광주 강의(09. 7. 24) 1강 녹취록
광주 강의(09. 7. 24) 1강 녹취록
이름 : 서경수(IP:116.37.101.7)
광주 강의(09. 7. 24) 51-1
디모데후서 3장 16-17절을 보겠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책이면, 다른 책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 아니겠지요. 그러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책과 그렇지 않은 책이 빛깔이 다릅니까, 가격에서 차이가 납니까? ‘감동’이란 그 대목에서 뭔가 외형적인 차이가 있어야 될 것 아닙니까?
여기 지금 옥수수가 있는데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옥수수와 그냥 옥수수의 차이가 뭡니까? 맛있고 맛없는 그런 차이입니까? 성경이란 책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고 하지만 보통 사람들이 볼 때는 다른 책과 차이점을 못 느낍니다.
보통 책은 질문할 수 있는 권한이 있어요. 그리고 질문한 것에 대해서 답변을 해 주는데, 성경은 우리가 질문을 하게 되면 우리가 원하는 답변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그 질문을 통해서 성경 자체가 도로 우리에게 질문을 하는 그런 책이 성경입니다.
보통 책들은 3+5= ? 해답을 보니까 8이다. 질문을 누가 만들어요? 인간이 만들죠. 젊은 사람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질문을 한다는 겁니다. 유치원 아이들과 같이 다니면 귀찮을 정도로 질문을 많이 합니다. 계속 질문을 해서 자기 영역을 키우고, 궁금하면 또 질문해서 알고 그렇게 합니다.
최근에 어떤 단체에서 젊은이들 모집해서 땅 끝 해남에서 강원도 휴전선까지 걷기 대회를 하던데, 왜 그런 무모한 짓을 하는가? ‘국토 대장정’이라고 해서 걷기를 했어요. 왜 하는가? 그 자체가 질문입니다. 세상은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것인가? 나라는 존재는 어디까지 인내할 수 있고, 내가 해낼 수 있는 일의 한계는 어디까지 인지? 이런 것들이 궁금하니까 그런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가 물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자기가 질문을 던져서 스스로 해답을 찾는 것입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것이지요. 그런데 만약에 성경에서 질문이 안 나온다면 이 사람에게는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책이 아니고 그냥 보통 책이지요. 그래서 성경을 해석할 때도 자기 방식으로 하는 것입니다.
자녀를 바르게 교육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지? 성경에 보니까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라고 했으니까 성경을 읽게 하면 자녀가 바르게 되겠구나. 이렇게 보면 그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책이 아닙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책인 경우에는, 성경을 보면서 ‘자식을 어떻게 교육하면 됩니까?’ 라고 하면, ‘그걸 왜 묻는데?’ ‘내 자식 바르게 가르쳐야지요.’ ‘네 자식은 없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 질문에 대해 답변하지 않는 이유가 어떤 질문을 해도 그것이 바로 ‘너는 잘못된 질문을 했다.’ 라고 질문 수정에 들어갑니다. 3+5가 뭔지 궁금해서 물어보면 “그것 네가 알아서 뭣 할 건데?” ‘김대중 전 대통령이 얼마나 더 살겠습니까?’ “그것 알아서 뭐 할 건데?” ‘우리 교회 부흥 되겠습니까?’ “알아서 뭐 할 건데?” ‘궁금하잖아요.’ “그러니까 네가 잘못 되었다.”
‘너는 질문해야 될 것은 안 하고, 질문하지 말아야 될 것만 골라서 하는 아주 질 나쁜 놈이다.’ 성경이 이것을 이야기합니다. 이처럼 인간은 평소에 질문을 해 댑니다. 성경이 없고 같은 인간들 끼리 있으면 질문을 주고받고 마음껏 할 수 있는데, 막상 성경을 펼치면 ‘너 질문 왜 하는데? 질문해서 뭘 얻고 싶은데?’ 이렇게 나옵니다. 이게 바로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20대 초반의 젊은이가 있습니다. 이분이 질문하기를 “나는 어떤 여자를 만나서 결혼하겠습니까?” 라고 질문합니다. 질문을 할 때 질문하는 순간 ‘나는 어떻게 행해야 합니까?’ 라는 질문을 하죠. 그 순간 이 사람은 어떤 행위만 있고 나머지 자기 자신은 그 순간 사라지는 겁니다.
사람이 질문을 하는 것은 ‘내가 어떤 행위를 하면 됩니까?’ 라는 뜻이거든요. 예를 들어, 돈은 없는데 영화가 보고 싶다. 그러면 나에게 질문해요. ‘어느 친구한테 전화하면 나오겠나?’ 질문하는 순간 나는 떠나버리고 휴대폰으로 전화하는 그 행위만 남아요.
엄마가 아들에게 말합니다. “애야 빨리 숙제해라.” ‘숙제하기 싫어!’ 하는 순간 내가 사랑했던 엄마는 사라지는 거예요. 나보고 숙제하라고 하는 그 순간 엄마는 엄마가 아니라 나에게 숙제를 강요하는 어떤 행위만 달랑 남는 겁니다. 그러다가 “애야 오늘 저녁에는 네가 좋아하는 깐풍기 해줄게.” 라고 하면, 그 순간에는 숙제하라는 것은 사라지고 맛있는 깐풍기 해 주는 행위만 남는 거예요.
인간 대 인간의 만남에서 “나는 오 목사님 자체가 좋더라.” 라고 했는데, 어느 날 오 목사님이 돌아서서 나에게 욕한다면 ‘좋더라.’고 한 것은 그 순간 날아가 버리고 ‘나에게 욕한 오 목사님의 행위’만 남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아무리 가족이고, 남편이고 하더라도 그때그때 그 행위만 낚아채요.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 안 되는 자식을 보게 되면 “아이고, 저놈은 자식이 아니고 원수다.” 라고 하지요. 그 순간은 자식은 없는 거예요.
그런데 그 원수라는 자식이 밖에 나가서 전화로 “엄마, 나 교통사고 났어.” 하면 “얼마나 다녔는데?” 하면서 달려가지요. 이 순간에는 ‘다친 내 자식’이 됩니다. “엄마 그냥 심심해서 장난 쳤어!” 라고 하면, 그 순간은 ‘엄마를 속인 못된 내 자식’이 되지요.
지금 디모데후서 3장 16절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는 그 대목인데, 그 의미가 뭐냐 하면, 인간은 뭐든지 밖에 대상이 있으면 그냥 지나가지 않고 묻지요. ‘이 성경이 나에게 필요할까, 필요 없을까? 성경을 읽어야 구원 받나? 안 읽으면 구원 못 받나?’ 여러 가지 질문을 하지요.
이 질문에 대해서 성경이 답변을 하느냐? 성경은 답변을 안 하고 공격을 하지요. ‘그런 질문 자체가 바로 죄다. 너에게서 나오는 어떤 질문도 죄가 된다.’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 제가 이 성경 읽으면 구원 받겠습니까?” 라고 하면, 성경은 말하지요. “네가 왜 구원 받아야 되는데?” 구원은 누구 소관입니까? 예수님 소관입니다. 그런데 왜 인간들이 구원문제에 개입하느냔 말이지요.
그래서 “나는 구원 받고 싶은데 성경 어떤 구절을 믿으면 됩니까?”라고 물으면, 성경은 말하기를 “구원은 네가 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자기 권한에 따라 이미 구원 받기로 작정된 사람에게 구원이 돌아가게 되어 있다.” 따라서 ‘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 받습니까?’ 라는 물음 자체는 구원에 어떤 영향이나 도움이 전혀 안 된다는 것이 성경의 이야기입니다.
그래도 궁금하잖아요. 인간의 궁금함은 죄악에서 나온 것입니다. 영원 불변성. 나는 이곳에서 살고 있지만 죽어서도 영원히 살고 싶다는 자기 욕심이지요. 그리고 나는 여기서는 힘들게 살았지만 천국에 가서는 행복을 누리고 싶다는 자기 욕심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인데, 이 성경과 기존 책의 차이점은 기존 책은 인간이 질문하면 반드시 답변하게 되어 있는 반면에 성경은 질문하면 할수록 그 질문 자체가 왜 성경 내용과 완전히 동떨어진 자기만의 욕심인가를 고발하고 지적하는 식의 답변이 나옵니다.
산상설교에 보면 그런 것이 있지요. ‘속옷을 달라고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 주어라(마5:40).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마6:3). 금식하는 자는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전혀 금식 안한 티를 내라(마6:17).’
제가 설교시간에 이런 소리 했어요. 결혼식 때 신랑, 신부가 부모님께 절을 하는데 신랑, 신부가 절할 것이 아니라 부모가 자식에게 절해야 된다고. 왜? 장가(또는 시집) 가줘서 고맙다고. 기존의 사고방식은 내가 낳아 결혼할 나이가 되도록 키워줬으니까 ‘너는 나에게 절해야 돼. 너 키운다고 고생 많이 했어.’ 이런 식이잖아요.
사실은 잘 컸으니까 부모가 고맙고 그래서 ‘부모가 자식에게 절을 해야 된다.’ 라고 했을 때 실제로 절하라는 말이 아니고, 기존의 모든 것을 반대로 뒤집는 거예요.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이 기존의 사고를 뒤집는 것입니다. ‘오른 뺨을 치거든 왼뺨도 돌려대라.’ 이 모든 것이 뒤집는 거예요. ‘맹세한 것은 지키라고 너희들은 알고 있으나 나는 이야기한다. 맹세한 것을 안 지켜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 아예 맹세 자체를 하지 말라.’ 왜 그렇습니까? 뭔가 응답이란 것은 기도한다고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맹세한다고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무상으로 그냥 주는 거예요.
내가 나를 보는 것보다 나를 만드신 하나님이 나를 보는 시선이 더 정확해요. 나는 내 것을 키우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주님은 우리가 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 덩어리에요.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보지 않고, 있는 것은 기본이고 여기에다 내가 원하는 것을 추가적으로 더 주셔야 비로소 하나님께 복 받은 느낌이 들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어느 정도 하나님과 핀트가 안 맞고 얼마나 엉터리 같은 죄인인가를 알 수 있지요. 성경을 보기만하면 우리는 ‘아하, 내가 이래서 죄인이구나.’하는 것을 더욱더 알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의로 교육하기’라는 말씀이 있어요. 이 ‘의’는 두 종류가 있어요. 하나는 인간들이 생각하는 의, 또 하나는 하나님이 생각하는 의입니다. 그러면 성경은 왜 있습니까? 인간들이 생각하는 의가 죄가 되고, 하나님의 의가 진짜 의라는 것을 바꿔치기 하는 응답이 성경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고.
인간은 항상 자기 욕심에 감동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하나의 예로 인간들의 의가 무엇인가를 조사해 볼 필요가 있지요. 인간들의 의가 왜 죄가 되는가? 창세기 3장에 보면 인간들은 선악과를 따먹었어요. 선악과는 선과 악을 아는 지식입니다. 그래서 선도 알고 악도 알게 되었지요.
그러면 선과 악을 몰랐을 때를 우리가 상상할 수 있습니까? 성경을 강해하기 힘든 것은 우리는 보통 성경을 볼 때 항상 나를 전제로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나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는 나, 너를 인정하지 않고 아담만 인정해요. 아담은 이렇다고 이야기해요. 그런데 우리는 항상 성경을 볼 때 ‘나는 이렇습니다. 내가 사는 것이 이렇게 힘듭니다.’ 늘 내 문제부터 시작해서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 너는 없다는 거예요. 있는 것은 오직 아담이라는 한 덩어리. 로마서 5장 이야기입니다. 아담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 나, 너를 거론하지 말란 말이지요. 하나님은 우리를 아담 밑에 있는 한 지체로 보기 때문에, 아담을 다루는 식으로 다루기 때문에 여기서 벗어나서 ‘나는요?’ 라고 나온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습니다.
학생은 몇 학년입니까? 6학년 1반. 예를 들어서 교장 선생님이 6학년 1반 학생들에게 맛있는 팥빵을 다 나누 주었는데, 그 중 한 학생이 ‘교장 선생님. 저는 팥빵 못 먹어요.’ 이렇게 나오면, 교장 선생님이 6학년 1반 학생 개개인을 다 불러서 ‘팥빵 좋아하나? 좋아하면 줄게.’ 이런 식으로 물은 것이 아니고, 6학년 1반 전체를 향해 일괄적으로 팥빵을 준다고 했는데 그중 한 학생이 ‘저는 못 먹어요.’ 라고 나온다면 그 학생의 의견은 무시해 버리죠. ‘못 먹으면 먹지 마!’
우리가 성경을 그렇게 오랫동안 보면서도 하나님은 아담 한 사람만 취급한다는 사실이 눈에 잘 안 뜨이지요. 왜냐하면 자기 사정이 다급하니까. 교회 와서 엎드려 울며 기도할 때는 전부 자기 사정만 생각하지 남 사정 생각 안 합니다. 즉 사람들은 아담을 안 믿어요.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아담 한 사람만 취급한다는 사실을 안 믿으면서 ‘나는 예수 믿습니다.’라고 합니다. 거짓말이지요.
하나님은 인간 전체를 아담으로 봐서 다루는데 이것은 안 믿으면서 ‘나는 예수 믿습니다.’라는 말은 사기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기 전에는 선악을 몰랐지요? 그러면 아담의 머릿속에 뭐가 들어 있습니까? ‘선’ 아닙니다. 선악과 따먹기 전이니까. ‘악’도 아닙니다. 뭡니까? 아담의 몸에서 보여주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과의 연결입니다. 하나님 바라보는 거죠. 하나님만 바라보는 겁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따먹든 아니든 간에 하나님과의 교류가 되지요.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하나님과의 교류는 교류대로 되고 여기서 선악이 생겨버렸어요. 그때부터 하나님과 교류하면서 선악을 따지게 됩니다. 전에는 하나님만 쳐다봤는데 이제는 하나님 쳐다보면서 선악도 쳐다봐요. 자기 자신은 안 쳐다봅니다. 하나님이냐, 선악이냐 어느 쪽이냐? 내가 행동을 어떻게 했느냐를 쳐다보지요. 보니까 하나님이 따먹지 말라고 한 과실을 따먹어서 무서워서 나무 밑에 숨었지요.
이것이 바로 인간은 없고 인간의 행위를 이야기합니다. ‘제가 뭘 할까요?’를 묻지 ‘제가 누구입니까?’를 묻지 않습니다. 길에서 사람들에게 물어보세요. ‘당신 누구입니까?’ 라고 물으면 ‘나는 내가 누구인지 생각해 본 적 없다.’고 합니다. 아침 눈만 뜨면 ‘오늘은 뭘 할까? 꿀 차부터 한 잔 마셔야 되겠구나.’ 사람은 항상 행위만 생각하지, 아침에 눈 떠서 ‘나는 누구지? 하나님 나는 누구입니까?’ 묻지 않습니다.
가정주부의 경우에는 아침에 눈뜨면 뭘 합니까? ‘빨리 밥을 해야겠구나. 오늘은 좀 늦었네.’ 그리고는 ‘아이들을 깨워야겠구나.’ 이런 식으로 순서에 따라 하나씩 뭔가를 하지요. 여러분은 아침에 일어나서 뭘 합니까? 성경 읽지요. 만약 하루에 성경 2장 읽는다면 2장 끝부분에는 뭘 생각합니까? 끝부분에는 성경 생각 안합니다. 이것 읽고 다음은 뭘 하지? 반드시 인간은 ‘내가 누구냐?’를 생각할 때는 몸이 아파서 병원에 있을 때, 다시 말해서 내 행위가 강제적으로 중지가 될 때, 뭘 해도 소용없을 때 ‘나는 누구냐?’를 생각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작전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배를 따고 갔을 때 배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출렁거렸죠. 그 때 예수님의 행위는 잠자는 것이었고 제자들의 행위는 노를 젓고 호들갑을 떠는 것이었죠. 제자들도 예수님과 같이 잠을 자야 했어요. 예수님이 잠을 잤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아담이 선악과를 안 따먹었으면 우리가 주님만 바라보면 돼요. 주님과 다른 요소 선악과도 있으니까 ‘어, 주님은 주무시네. 그럼 나는 뭘 해야 되지?’ 주님을 알면서도 주님과 단절된 관계에요. 같이 있다 뿐이지 주님은 주무시고 제자들은 따로 놀고. 개체가 따로지요.
따로 움직이는 것은 자기 속에 선악과가 있으니까 ‘내가 무엇이 옳은 행위인지 선악적으로 판단하겠다. 자, 바람이 분다. 배가 뒤집어진다. 물을 퍼내고, 열심히 노를 젓고 배를 지키자.’ 이렇게 나온 거예요. 주님은 주무시고 있는데.
예수님이 주무시는 행위 그 다음 행위가 무엇입니까? 바람과 바다를 꾸짖는 행위가 아니고 누구를 꾸짖어요? 제자들을 꾸짖지요. ‘뭐 하는데?’ ‘물 퍼냅니다.’ ‘아이고 이 믿음 없는 것들아.’ 그런데 이 이야기를 제자들이 못 알아듣습니다. 파도가 쳐서 배 안에 물이 들어와서 물을 퍼냈습니다. 물도 안 들어왔는데 물 퍼냅니까? 물이 들어왔기 때문에 물을 퍼내고 했잖아요.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예수님의 꾸짖는 그 꾸중의 의미를 몰라요. 이게 바로 인간들이 성경을 볼 때 성경이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그것에 대해서는 전혀 안중에도 없고 그냥 내가 다급하고 어렵고 힘든 것, 그런 것들의 해답을 찾으려고 성경을 보기 때문에 성경을 아무리 열심히 읽어도 성경 내용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그 질문 왜 하는데?’ 울면서 기도하면 주님이 말씀합니다. “울긴 왜 울어?” “내 자식이 죽었습니다.” “그 자식이 네 자신이냐? 내가 죽였다. 왜?” 성경을 너무 몰라요. 성경이 자기 아쉬운 것 채워주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하나님께서 아담을 볼 때 선악과 따먹은 것 때문에 선악과와 합작한 환경이 있어야 됩니다. 이번 수련회에서 그 환경 이야기할 거예요. 선악과와 합작한 환경이 뭐냐 하면, 선악과는 피조물이 알아서는 안 되는 겁니다. 이 선악과는 하나님이 아시고 악마가 압니다. 따라서 이 선악과에 해당되는 것은 저주가 합당하기 때문에 선악과를 품에 안은 인간들은 저주가 땅에서 쏟아 올라오는 그 환경 속에 살아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천국에는 생명나무만 있고 선악과는 없어요. 왜냐? 천국은 인간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4:17).”고 했지요. 하나님 나라에는 생명나무뿐이에요. 선악과는 없어요.
선악과는 어디와 적절하냐 하면, 지옥입니다. 선악과 따먹은 인간과 뱀은 영원한 지옥 불에 들어가야 하는데, 그 지옥은 무엇이 악인가를 말해주는 거예요. 선은 하나님만이 선이고 악은 그 선악과에 대해서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던 그 악마가 악이라는 것을 영원한 지옥 불에서 확인하게 됩니다.
생명나무 못 먹으면 지옥 가는 겁니다. 생명나무 먹든지 아니면 저주 받든지 둘 중에 하나지 생명나무도 안 먹고 저주도 안 받고 이런 경우는 없습니다. 성경에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피조물은 하나님의 속성을 담기 위한 그릇이기에 피조물 자체의 자존심이라든지 의미 이런 것은 하나님이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들이 땅에서 쏟아지는 저주를 받습니다. 창세기 4장에 보면 땅에서 저주가 올라옵니다. 가인이 동생을 죽이고 싶지 않더라도 죄가 가인을 덮치면 가인은 죄악 된 행위를 해야만 합니다.
간단하게 정리해 봅시다. 인간은 행위로 말합니다. 그런데 그 행위는 자기가 원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환경이 그 행위를 하도록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사라지고 환경만 남아서 환경이 나로 하여금 그 행위를 하도록 하는 겁니다. 아침에 책을 읽는데 갑자기 배가 아프다. 그러면 배 아픈 환경(어젯밤에 너무 과식을 했다)이 나로 하여금 책 읽은 환경을 허락지 않고 화장실에 가는 행위로 바꾸는 겁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친구 잘못 만나면 안 된다.’ 그러면 그 친구는 어떻게 됩니다. 두 사람이 있는데 이쪽은 친구 잘못 만났다고 하면 저쪽도 친구 잘못 만났다고 해요. 친구 잘못 만난 경우는 없어요. 친구는 똑같은 족속이기에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가 친구를 부르는 게 아니에요. 자기도 평소에 그 친구를 원하고 있었던 거예요. 내가 그런 친구를 좋아할 줄 몰랐는데 사귀다보니까 마음에 드는 거예요.
‘나쁜 남자’는 분명히 나빠요. 하지만 내 속에서 나쁜 남자를 그리워하고 있어요. 여자들이. 나쁜 남자는 나쁜 남자 맞아요. “내가 어떻게 나쁜 남자와 결혼을 해” 라고 하잖아요. 그러면 나쁜 남자 말고 착한 남자 소개시켜줘 보세요. 그러면 뭐라고 하는 줄 아세요? “남자가 계집애도 아니고 정말 지루해서 같이 못 있겠다. 화끈한 남자 없나?”
그러니까 ‘나쁜 남자의 매력이 뭐지?’ 나쁜 남자가 주는 매력이 있다니까요. 그것이 뭐냐? 유유상종. 나도 내 마음속에 나쁜 남자를 그리워하고 있었든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아무리 자기가 나쁜 길로 안 가려고 해도 환경이 나를 그렇게 밀어붙이면 환경에 맞는 행동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건 군대 안 간 사람들은 몰라요.
현역으로 군 복무 해 보세요. 졸병 시절 고참병들에게 그렇게 고생했으면 자신이 고참병이 되면 졸병들을 잘 대해 줄 것 같지요? 천만의 말씀. 많이 시달림 받은 병사가 고참병이 되면 똑같이 졸병들을 괴롭힙니다. 그게 악순환 됩니다. 어느 순간 자신이 잔악한 사람이 되는데 그것은 바로 환경이 그 인간의 행위를 결정해요.
이것은 어느 집단이건 다 그렇습니다. 모든 조직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도, 목사, 장로 모임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조직에는 반드시 선배가 후배를 길들이면서 내가 선배 됨이라는 이 행위를 후배가 인정해 주기를 요구하는 입장에서 선배는 행동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 선배가 “나는 너와 똑같다.” 라는 말을 믿지 마세요. 선배는 반드시 후배 앞에서만 선배 티를 내게 되어 있습니다.
후배가 없을 때는 자신이 선배 티를 낼 줄 몰랐어요. 그런데 막상 후배가 생기면 갑자기 예전에 안 하든 행동, 선임자다운 행동을 하게 되어 있어요. 후배가 생긴 환경이 그렇게 만들어 버려요. “나는 내 며느리 들어오면 딸처럼 지낼 거다.”라고 말하는데, 막상 며느리가 들어오면 시어머니 노릇 합니다.
새로운 환경이 잠재되어 있는 나의 악한 본성을 자극 시켜서 ‘내가 이렇게 내 위주로 사는 줄 몰랐다.’는 것을 깨달아요. 나는 남을 배려하고 나보다는 남을 우선으로 생각한다고 여겼는데 막한 어떤 환경이 닥치면 정말 나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인 것을 알게 돼요.
이것이 바로 친구라든지 새로운 환경을 통해서 행위가 나오고 그 행위가 바로 습관이 되고, 습관이 흔히 말하는 인격으로 굳어집니다. 인격은 뜯어보면 습관이 인격 되는 거예요. 습관은 뭐냐? 자기가 살아온, 자기가 처한 환경에서 만들어지는 것이고, 그 환경은 하나밖에 없는 아담. 아담의 한 덩치에 잠재되어 있던 인간의 죄성이 환경에 따라서 다 달리 나타나는 거예요.
환경이 다 다르기 때문에 각양각색의 인격이 있는데 어떤 색깔의 인격도 전부 죄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은 공자, 맹자, 테레사 수녀, 슈바이처 등 모든 인간을 죄인으로 만들어요. 다윗, 모세, 바울, 베드로 그 누구라도 죄인으로 규정하는 책이 바로 성경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3:10)” 율법을 주신 것은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롬3:19).”고 했어요.
이 죄를 알게 되면 ‘나는 죄인입니다.’에서 벗어나서 ‘내 조상 아담이 죄인입니다.’ 라고 해요. 이것을 누가 이야기했습니까? 시편 51편에 보면, 다윗이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죄인인데, 이 죄는 우리가 어쩔 수 없습니다.
성경을 아는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아요. 영원히. 이것이 세상 이치입니다. 성경을 보면 이 어쩔 수 없는 사람들의 대표자가 나와요. 마태복음 11장 5절에 보면 소경, 앉은뱅이, 문둥이, 귀머거리, 죽은 자, 가난한 자가 나오는데, 이들은 저주 받은 자의 리스트입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길에 “다윗의 자손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외친 자들이 누굽니까? 부자들입니까? 소경, 문둥병자들이었죠. 그리고 38년 된 병자가 나음을 입었잖아요. 이 사람들의 특징이 뭐냐? 세리 같은 사람들.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막달라 마리아 같은 사람들. 행실이 더럽다고 온 동네에 소문이 난 사람인데 자기 향수병을 부어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 비싼 향수를 허비했다는 오해를 받은 여자. 그 때 예수님이 뭐라고 하시는가? ‘많이 용서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
이 사람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자기 운명은 굳어진 거예요. 어쩔 수가 없어요. ‘나는 저주 받아 마땅하며, 나는 죄인이다.’ 특히 수로보니게 여자는 자신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자기를 개로 여깁니다. ‘개, 소경, 저주 받아 마땅해. 그리고 나는 죽은 자.’ 이 전체를 바울 서신에서는 ‘그리스도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죽은 자’라는 것입니다.
아담은 태어나자 말자 죽어가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아담은 죽어가고 있으니까 결국은 모든 인간은 죽은 자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볼 때 개인으로 보지 않고 집단적으로 이미 죽은 자로 보는 거예요.
죽은 자 중에서 누구는 살려내고 누구는 안 살리고 하는 권한은 누구한테 있습니까? 이미 죽어버린 사람한테는 권한이 없어요. 주님이 지명해서 ‘너, 너, 너 나와!’ 하시면 그들은 깨어나는 겁니다. “날 깨워준 사람이 누굽니까?” 주께서 “나다.” “오, 주여 나를 살리셨군요. 감사합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더 이상 자기 행위를 자랑하지 않고 죽은 자신을 살리신 그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를 자랑하는 사람이 되겠지요. 이런 자들이 바울이 말하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의 특징이 뭐냐 하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안다는 것입니다. ‘내 운명은 어쩔 수 없다.’ 어쩔 수 없다는 예를 들면서 문둥병자를 거론했지만 신약시대에는 이 어쩔 수 없는 모양이 다양해져요. 부자. 집이 10채. 땅 25만평. 다른 사람이 묻기를 “왜 부자 됐습니까?” “어쩔 수 없었습니다.” “자식이 공부를 왜 잘 합니까?” “어쩔 수 없었습니다. 하지 말라고 말려도 안 돼요.”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고린도전서 15장 10절.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이 말을 지질이 못난 상황만 염두에 두지 마시고, 남들 보기에 ‘그만하면 살만 하구나. 똑똑하네.’ 그런 상황까지 이것이 내 것이 아니고 다 주님의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면 부자라고 해서 지옥가고 이러지는 않는단 말이지요.
여러분들이 성경을 아신다면 성경 말씀을 지킬 생각을 하지 마시고 성경을 통해서 어쩔 수 없는 것을 안다면 그것이 성경 지킨 것이 되는 겁니다. 성경 어느 구절, ‘무시로 기도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전도하라.’ 등등의 모든 말씀을 하나로 하면 다 지킨 것이 돼요. ‘어쩔 수 없다.’
강도만난 사람이 쓰러져 있다. 제사장도 그냥 가고, 레위인도 갔다. 그런데 어떤 사마리아 사람이 그 사람을 치료해 주고 여관에 데려고 가서 회복하도록 해 주었다. 다른 사람이 묻습니다. ‘어떻게 이런 착한 일을 했습니까?’ 라고 할 때, 답변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만남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고 나는 어쩔 수 없었다고 해야 됩니다.
강도만난 사람 돌봐주고 집에 돌아가서 마약하다가 경찰에 잡히고. 그러니까 그 사람을 돌봐줬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마약하는 것을 안 들키게 하는 법은 없어요. 착한 일을 10개 했다고 해서 나쁜 일 1개 한 것을 감해주는 것은 선악적 아이디어이기에 이것은 저주를 불러요.
그래서 성화론은 저주를 부르는 이론입니다. 여기에는 자기 의가 담겨 있으니까. ‘나는 이만큼 훌륭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론이기에.
제가 쓴 글에 ‘불신자의 산’이라고 있어요. 산이 2개 있는데 서로 동떨어진 산이에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산에 가는데 같은 산인 줄 알고 올라가다가 예수님 십자가를 향해 가면 계속 가면 될 텐데 어느 순간 예수님 십자가가 시야에 안 보이니까 큰 교회가 보이겠지요. 큰 교회가 보이는 것은 자기 행위가 나빠서가 아니라 자기 속에 잠재되어 있는 죄성이 발현되는 거지요.
‘환경이 나로 하여금 잠자고 있던 나의 본성을 깨운다.’는 겁니다. 큰 교회 좋아하다 보니 큰 교회가 구름 밑에 있는데, 알고 보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러면 남은 것은 뭡니까? ‘천상천하 유아독존. 나는 나다.’ 이것만 남아요. 신앙생활 실컷 하고 교회에서 목사, 장로로 충성하고 결국 남는 것은 ‘나는 나다.’ 이건 불교 신자지요.
그런데 여기는 민둥산이라 자기밖에 안 남는데, 저기 건너편에는 보니까 생명나무가 있더란 말이지요. 처음부터 예수님을 뒤따라가야지 그렇게 하지 않고 나는 나 혼자 살아도 살 것 같으니까 예수님 십자가와는 결별하고 자기가 성경 말씀 지켜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서 천국에 들어가 보려고 했더니만 그 나라는 불교 나라였습니다. 자기는 엉뚱한 산에 와 있어요.
사람이 어느 정도 된다 싶으면 그 다음부터는 ‘내가 착해서 복 받았다’는 선악적 사고방식이 작동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는 잊어버리고, ‘나보다 더 착한 사람 있으면 나와 봐.’ 라는 식의 경쟁 게임에 돌입합니다. 누가 기도 오래 하는지, 누가 헌금 많이 하는지, 누가 성경 많이 알고 있는지, 누가 목사한테 더 사랑 받는지 등 끊임없이 경쟁하죠. 그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성경을 읽고, 질문하고, 기도하고.
그러니까 성경을 달달 외우고, 질문하고 해도 성경은 답변을 안 합니다. 성경은 그런 답변 없어요. 그래서 만약에 그 사람이 지옥에 갔다. 정답은? ‘어쩔 수 없다.’입니다. 그게 성경에 나오잖아요. 한 사람은 아예 창세전부터 사랑 받기로 작정되어 있고, 한 사람은 미움 받기로 작정되어 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어쩔 수가 없어. 이것이 세상 이치야.’
선악을 아는 것을 자랑스러워하지 마시고, 내가 선에 대해서 안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하지 말란 말이지요. 선에 대해서 안다고 선인도 아니요 의인도 아닙니다. 성경의 내용은, 인간의 의와 하나님의 의를 대비시켜서 하나님의 의가 인간의 의에 의해서 핍박을 받고 무시당해서 생긴 사건이 십자가 사건인 것을 언급하기 위해서 이 십자가를 가지고 도로 모든 인간의 의가 있는 자리에 들이대는 그런 내용이거든요.
서기관, 바리새인들은 그 당시 최고 수준의 의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인정했어요.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5:20).” 이 말은 어느 누구도 바리새인보다 더 뛰어난 의를 못 갖는다는 말이고, 그 말은 바리새인 지옥가면 너희들은 당연히 지옥 간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행동을 할 때 ‘하나님 이건 선한 행동입니까? 이것은 악한 행동이지요?’ 라고 생각하는 것. 이 자체가 이미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죄를 끄집어내기 위해서 성경에서는 계속해서 명령하고 지시하고 해요. 성경 아무 곳이나 펴면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하게 된지라(요5:16).” 라는 구절이 나오면 ‘주님, 저는 핍박 안 했지요?’ 이렇게 나옵니다. 이런 생각하는 것이 죄라니까요.
유대인들이 핍박 했다면 우리도 여차하면 복음을 싫어할 수 있는 그런 인간이라는 것을 알면 돼요. 성경 전체가 율법적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제가 강의 초반에 아담의 한 덩어리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다른 몸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담의 몸이라면 성경은 예수님의 몸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두 사람 뿐입니다. 수백억의 인구가 있어도 성경은 두 사람 뿐입니다. 아담과 예수님뿐입니다. 우리는 아담에 속해 있지요. 아담에 속해 있는데 예수님의 성령이 오게 되면 ‘비록 너의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을 몸이나 너희 속에 있는 영으로 말미암아 죽을 너희 몸도 영 때문에 예수님 몸으로 영화롭게 변할 것이다.’ 이게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입니다.
이 구원론이 성립하려면 우리는 어디에 있어야 돼요? 우리의 현재 모든 몸은 아담의 몸이고, 아담 몸은 그냥 몸이 아니지요. 아담 몸에서 선악과, 저주의 죄가 나오지요. 매일 뭔가를 했으면 ‘이것 잘했어, 못했어?’ 잘하면 어떻고 못하면 어때요? 구원은 예수님 때문에 받는 것이지 내가 뭘 잘 해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닌데.
그런데 예수님 공로로 구원 받는다는 생각보다 내가 잘해서 내가 구원 받는다는 생각이 나를 흐뭇하게 만들고 사는 재미와 보람을 갖게 해요. 나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 없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요. 그래서 남이 나를 나쁜 놈이라고 해도 나는 나에게 관대하게 용납하지요.
내가 아무리 나에게 관대해도 지옥 갈 수밖에 없는데, 이런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 누구냔 말이지요. 그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너 쪼다인줄 알거든. 너는 너밖에 모르는 자인 줄 알거든. 그런데 너 같은 인간을 성령을 줌으로 말미암아 도저히 안 된다고 하는 너를 되게 했다.’ 이것이 바로 탕자에 대한 용서입니다.
탕자가 집으로 돌아올 때 빈털터리였잖아요. 그런데 와보니까 가락지 끼우고, 새 옷 입히고, 소 잡고 잔치를 벌였잖아요. 이게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용서입니다. 이 용서를 누가 좋으라고 용서하는 것입니까? 내 좋으라고 용서합니까? 아니지요. 아담 속에 있었는데 예수님의 몸에 해당되는 그 다수를 위한 용서입니다. 나를 위한 용서가 아니고.
그렇지 않으면 ‘사모님, 용서 받았습니까? 못 받았지요. 나는 용서 받았는데. 내가 이겼네.’ 이렇게 된다고요. 그러니까 이 용서가 예수님의 용서하심을 자랑하기 위한 용서지, 나를 위한 용서가 아니고 주님을 담고 다니는 가마, 주님의 용서가 출렁출렁 넘치도록 하는, 주님 자랑하기 위한 용서로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10분 쉽시다.
(2009. 8. 11. 09. 51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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