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사물' 을 읽고
[ 말과 사물 ]을 읽고 미셸 푸코 저 이광래 역 민음사(서울 :1997)이 세상은 뭔가 계속 보여주는 양상을 띤다. 속성을 감추지 않고 방출하고 있다. 어떤 식으로 보여주는가? 저자는 서양 역사를 돌아보면서 과거의 사람과 오늘날의 사람이 어떻게 달라졌는가를 보여준다.옛날에는 나름대로 자연과 호흡하며 살고자 했다. 그것을 통해 자연과의 유사성을 유발했다. 하지만 그 가운데 유사성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빈 공간을 갖고 있었다. 그 공백 안에는 신비가 맴돌고 있다. 자연과의 유사성을 갖추면서도 그 자연과의 친밀성마저 초월하려는 욕구로 인해 늘 신비의 자리를 장만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신비스러운 요소와 물질적인 사물을 어떻게 관계짓고 배치하느냐 하는 점이다.예를 들면, 영혼과 육체를 인간 안에서 연결짓기 위하여 '죄'라는 개념을 동원하여 영혼의 원천과 육체의 원천을 상호 분리시킴으로서 차라리 신비를 여전히 사람 몸에 저장된 것으로 여긴다. 이러한 인식도 또한 하늘과 땅이라는 자연 요소와 유사성을 유지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며 동시에 그것을 넘어서려는 욕구로 인해 신비적 공백자리가 장만되는 사례이다. 이렇게 해서 사물마다 지니고 있다는 고유의 성격이란 사실상 이러한 관계의 장에서 파생된 부수적 성격이 된다. 관계짓는 의미가 바뀌면 이 성격도 바뀌게 마련이다. 이런 점을 외부로 들추어보는 방법은 언어를 탐구하는 것이다.16세기까지 언어란 유사성의 표현이었다. 즉 자연 세계 안에서의 유사성 원칙에 따라 서로 관계지어지는 것처럼 언어 세계 안에서도 그러하다. 그러나 이 언어의 관계들은 하나의 위대한 세계만이 궁극적으로 존재하다 는 사실과 이로 인해 피조물들의 한계가 규정된다는 점을 말하기 위해 유용했다. 그러나 17세기부터는 언어 세계가 서서히 자율성을 띠기 시작한다. 소위 '문학'이라는 것이 성립하게 된다. 각자 자기만의 세계 구축을 위해 언어가 활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질서'라는 것을 자기가 만든다. 자기 세계 안에서만 합리적일 수 있다면 그 질서로서 충분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돈키호테의 경우처럼, 자기 나름대로 영웅이 결코 보편적인 영웅이 될 수도 없을뿐더러 남들에게 되레 웃음거리가 된다. 그러면서도 자기에게 영웅이면 곧 영웅이며 최후의 승리자가 된다는 것이다. 돈키호테라는 작품은 그 당시에 세계에 대한 하나의 부정이다. 돈키호테 진리성은 바깥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통하는 진리는 아니다. 여기서 보편적 유사성은 깨어진다. 동시에 불연속적인 '타자' 개념이 형성된다.자연과 그 해석이 자기 자신에게 얼마든지 허구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자아를 절대화하는 가운데 새로운 유사성의 길로 나설 필요가 있었는데 그것이 곧 '과학'이다. 과학이란 모든 사물의 속성을 수량화 작업 속에 집어넣어 재 정돈한 것이다. 대나무, 사람, 태양, 신, 원숭이, 장미, 왕, 노예, 모래 한 줌, 산, 해파리, 사과 등, 모두 '1'이라는 점에서 동일한 대상으로 다루게 된다. 이처럼 양(量)이나 수(數)로서 사물의 가치를 새로 규정짓고 그 안에서 모든 불연속성을 해소해 보겠다고 나서게 된다. 두 사물의 비교란, 양과 수의 비교로 최종 판가름된다. 자연의 모든 움직임은 신도 아니요 천사도 아니라 물리적인 힘, 곧 역학(力學)에 최종적인 권위가 부여된다. 뿐만아니라 국가의 운용 체계도 통계학으로 초석 삼을 뿐이지 인간의 인격성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다.(실제로 통계학 'statistics'는 '국가학'이다) 모든 것이 비인격적으로 마감될 뿐이다.과학 질서에 부합되도록 기호를 새로 창조해야만 했다는 것은 영원히 자연과 결별한다는 선언이다. 비연속성에 대한 극복 뒤에는 오로지 '진보'만 있을 뿐이다. 영원한 신비 세계는 이 진보의 노선 그 끝자락에 있고 그 정복을 위한 집념과 희망을 갖게 되었다. 역사 의식이 서서히 부각된다. 누가 이 진보를 계속 밀고 가는가? 여기서 인간의 행함이 강조된다. 언어의 구조도 여기에 합치되도록 조정된다. 원시적 형태의 단지 비인칭 동사(動詞)로만 구성되었다. (il pleut 비가 내린다, il tonne 천둥이 친다) 그러다가 이 동사들이 주체자의 존재함을 확인해주는 동사로 바뀐다. 즉 '나는 노래한다'라는 말은 '나는 노래의 상태에 있다'는 말에서 전이된 것이다. 주체자의 존재를 긍정하면서 주체자가 주도적으로 벌리는 행위에 초점이 모아진다. 존재한다는 것, 산다는 것은 단지 행위하기 위해 살아 있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언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인간이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행위하고 겪는 바이다. 이것은 다른 사물에는 주어지지 않고 인간에게만 차별적으로 주어지는 특권이다.사물이란 인간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따라 의미가 부여될 뿐이다. 예를 들면, 생물은 자기의 내부에 스스로의 형태를 조화시킬 수 있는(혹은 원래 주어진 것과 약간 다른 특징을 점차적으로 획득하여 원래의 모습이 단계적으로 변화해 가다가 결국에는 알아 볼 수 없도록 만들게 되는) 자연발생적인 능력을 갖고 있다고 상정하느냐, 아니면 생물의 최종적인 종을 가정하여, 선행하는 모든 종들의 특성을 소유하면서도 훨씬 더 복잡하고 완전한 이 최종적인 종을 향하는 수수께끼 같은 충동이 생물에게 분유(分有)되어 있다고 상정하느냐를 따지는 식이다. 어떤 선택을 하든 연속성은 항상 살려놓고 만다. 자연 안에서 아무리 많은 변화와 소멸과 투쟁이 있다하더라도 연속성은 흘러가는 시간에 선행한다고 믿는다. 그것이 시간의 조건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진보의 발자국은 그 어떤 경우에도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로서 사물과 인간은 동등하지도 않고 유사성도 없다. 자연의 모든 구성 요소는 인간 지배 하에 놓여 있을 뿐이다. 또 그것들은 모두 인간을 위하여 존재할 뿐이라고 해석한다. 뿐만 아니라 이번에는 인간 사회마저 연속성으로 이해하려 한다. '부의 연속성'을 목표로 삼게 된다. 화폐마저 영원한 연속성에 봉사하기 위한 의미를 지닌 (가격을 지닌) 기호로 사용된다. 부의 문제를 화폐의 축적과 자본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다. 금의 가치란 더 이상 금속 자체의 고유 가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화폐로서 유통에 얼마나 기여하느냐에 달려 있게 된다. 즉 가치란 생산에 의해 형성되거나 증대되는 것이 아니라 소비에 의해 형성되고 증대되고 그곳에만 발생한다. 따라서 부는 자연이 잠재적으로 사전에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의해 비로소 창조되고 활용되면서 주어지는 기호체제의 결과이다. 인간들의 욕망이 여기에 관심을 갖고 집중되는 것도 이제는 자연스러운 흐름이 되었다. 욕망을 표출하는데 있는 돈이라는 기호 이외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음을 우리는 이 시대의 가장 확고한 진리처럼 받아들이며 살고 있다.평가:21세기에 유행되는 인간상과 과연 참다운 인간상일까?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그 인간상을 어디서 찾을 것이며 설사 어디쯤 있다고 발견하더라도 과연 거기로 돌아갈 마음을 품을 수 있겠는가? 과연 모든 이 시대의 재물관과 성공관을 버리고 초연할 수 있을까? 차라리 이러한 논의 자체에서 도피하여 자신의 욕망을 인정해 주는 곳으로 숨어버리고 싶을 심정일 것이다. 그렇다! 오늘날의 교회가 그 숨는 장소 구실을 한다. 진리나 하나님이나 예수님에 대해서 전혀 관심 없고, 오로지 21세기의 요구하는 세상 기준에 준해서 자신이 얼마나 똑똑하며 성공한 존재인가를 확인 받고 싶어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신신 당부하셨음을 우리는 잊지말자.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눅 21:34-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