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상 24:16-22 (사울왕의 이중성)
삼상 24:16-22 (사울왕의 이중성)
이름 : 우리교회(IP:220.81.176.169)
본문 : 사무엘상 24장16-22절
제목 : 사울 왕의 이중성
듣기 :
, 보기 :
이근호
09-08-09 15:37
사울왕의 이중성
2009년 8월 9일 본문 말씀: 사무엘상 24:16-22
(삼상 24:16, 개정) 『다윗이 사울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마치매 사울이 이르되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목소리냐 하고 소리를 높여 울며』
(삼상 24:17, 개정) 『다윗에게 이르되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
(삼상 24:18, 개정) 『네가 나 선대한 것을 오늘 나타냈나니 여호와께서 나를 네 손에 넘기셨으나 네가 나를 죽이지 아니하였도다』
(삼상 24:19, 개정) 『사람이 그의 원수를 만나면 그를 평안히 가게 하겠느냐 네가 오늘 내게 행한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네게 선으로 갚으시기를 원하노라』
(삼상 24:20, 개정) 『보라 나는 네가 반드시 왕이 될 것을 알고 이스라엘 나라가 네 손에 견고히 설 것을 아노니』
(삼상 24:21, 개정) 『그런즉 너는 내 후손을 끊지 아니하며 내 아버지의 집에서 내 이름을 멸하지 아니할 것을 이제 여호와의 이름으로 내게 맹세하라 하니라』
(삼상 24:22, 개정) 『다윗이 사울에게 맹세하매 사울은 집으로 돌아가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요새로 올라가니라』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을 분석하고 이해하기가 상당히 난해하기 그지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마다 성격이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물론 신약성경에서는 이런 인간류를 하나로 묶어서 표현합니다. 모두 다 한 아담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 ‘한 아담’ 속에서 수 천 수 만 성격들이 터져나오기 마련입니다. 한 인물의 성격을 분석하기에 부족합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의 또 다른 대목을 보면, 인간을 둘로 나눕니다. 하나 류는 ‘육에 속한 사람’, 다른 류는 ‘영에 속한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이런 관점으로 봐야 인간을 제대로 분석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육에 속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악마에 감금된 자라고 말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귀신 들린 자’들이 예수님과 접촉한 경우를 보게 되면 그들은 입에 거품을 물고 미친 짓을 하는 것으로 ‘귀신 들린 자’의 표본이 되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좀 더 읽어보면, 매사를 냉철하게 보고, 이성적으로 보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이 악마들인 자의 표본으로 지목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주장까지 합니다. 사도행전 5:38-39에 보면,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버려 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소위 ‘하나님의 주권 사상’입니다. 인간들의 상상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사상이 바로 이 ‘신의 주권 사상’입니다. 하지만 역시 마귀들린 자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귀신 들린 자’의 기준이 되는 겁니까? 그것은 바로 ‘영에 속한 사람’과의 마주침에서 어떤 반응을 나타내는 것으로 판단하게 됩니다. 즉 인간이란 ‘육에 속한 자'와 ’영에 속한 자‘로 나뉘어는데 두 종류의 마주침에서 판가름됩니다.
오늘 본문이 그러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육에 속한 사람’인 사울이 다시 정상으로 돌아온 듯한 반응을 보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바는, ‘육의 속한 사람’이라고 해서 늘 정신 이상자로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대부분이 정상인 상태로 지낼 수 있습니다. 특히 자기 자신의 양심에 준해서 행동할 때는 그러합니다. 하지만 이런 존재로 악신이 작용하면 하나님의 은혜에 도발적인 발악을 내뿜게 됩니다.
이것은 성령에 속한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늘 “할렐루야”라고 외치면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성령이 작용하게 되면 오로지 자신만을 섬기고 사는 자아의 죄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기름부음의 의미’만 던지고 하나님으로부터 그 다음 사건을 기다립니다. 하나님의 조치에 맡기는 삶을 삽니다.
이것은 사울와의 관계에서 자신을 빼버리는 방식의 삶이 됩니다. 이럴 때 다윗이 믿는 바는 눈에 보이는 사울왕의 개과천성에 기대를 거는 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행하시는 조치를 바라보는 입장에 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사라짐’입니다. 자아를 사라지게 하고 그 자리에 하나님의 말씀 사건을 집어넣어서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입니다.
이런 경우가 예수님과 예수님 제자들 사이에서도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20장에 보면, 제자들 10명은 모였는데 그 중에 한 명이 빠져 있을 사이에 예수님께서 다녀갔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도마라는 제자가 합류해서 예수님께서 다녀갔음을 알려줍니다. 이 때 도마는 당연히 의심합니다. “나는 보지 않고 못 믿겠다” 참으로 육적 인간의 진수를 보여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가끔 하나님께서 우리 면전에 나타나서 “내가 부활한 예수님이시다”라고 보여주었으면 보다 든든하리라는 기대를 해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도다”라는 원칙을 고수하십니다. 즉 도마 이외의 제자들은 자신들이 믿음이 있다고 주장하고 싶지만 실은 도마의 솔직함과 진배없습니다.
보는 것으로 믿는 것은 여전히 온전한 믿음의 증거라고 볼 수 없습니다. 보는 것으로 인해 가려져 있는 원칙이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보지 않고 믿는 일”입니다. 마태복음 10:40에 보면,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영접’이라고 할 때는 나에게 최고 손님으로 우대하고 극진한 대접을 해드리겠다는 의사표시입니다. 하지만 과연 눈에 보이지 않고 말씀만 전달된 상황에서도 이러한 똑같은 극진한 대접 정신이 나타날까요? 나타난다면 그야말로 영적 사람의 진수입니다. 즉 사람의 됨됨이는 말씀 앞에서의 그 사람의 태도로 결정납니다.
이와같은 경우가 마태복음 25:14부터 나옵니다. 소위 유명한 ‘달란트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주인되시는 분이 일터를 직공들에게 맡기도 본인은 먼 타국으로 여행을 떠났을 때 일어나는 비유입니다. 어떤 일군은 주인님이 있든지 없든지 상관없이 열심히 일하십니다. 하지만 어떤 일군은 ‘사라짐’을 기회라고 여기고 일을 태만이 했습니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그 사람의 면전에서는 그 사람에게 온갖 아양을 다 떨다가도 그 사람이 화장실에 가겠다고 일어서서 등을 보일 때부터 험담이 시작되는 겁니다. 이 ‘사라짐’을 통해서 그 사람과의 관계가 제대로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다시 재림하는 사이에는 ‘사라진 메시야상’이 자리잡습니다. 하지만 이 메시야는 말씀으로 일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예수님의 떠나심이 곧 관계의 단절로 이해하게 됩니다. 주님이 떠나시면서 남긴 말씀을 무시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심판을 위한 재림 활동이 왜 필수적인지를 보여주는 증거가 됩니다. 보이지 않는 말씀 속에서 예수님께서 여전히 활동하신다는 사실에 대해서 받아들이는 사람이 바로 말씀을 본인이 지키는 사람이 아니라 말씀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영적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편 23편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우리가 얼마나 육적인 사건과의 부딪침을 통해서 ‘부족함이 없는 존재’인 것을 알까요? 사람이란 계속해서 자신이 이상적인 상태를 끊임없이 구성해서 생산해냅니다. 이것이 아담의 속한 모든 인간들의 타고난 본성입니다.
하지만 이 본성을 선하다고 우기고 키우는 것이 악령의 역사라면 성령의 활동이란 이 본성을 꺾어서 오직 ‘목자로만 부족함이 전혀 없음’ 상태에 이미 놓여져 살아감을 깨닫게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만들어가는 내가 되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우리교회
09-10-20 13:04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사무엘상-2008/055강-삼상24장16-22(사울왕의이중성)-1sa090809.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