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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녹취]2009십자가마을여름수련회 제6강자유게시판스가랴

[녹취]2009십자가마을여름수련회 제6강

이름 : 서경수(IP:116.37.101.7)

09 여름수련회(다니엘, 스가랴) 6강

y=x²에서 그래프가 있다면 이걸 벡터 상에 그리면 이렇게 그릴 수가 없고 힘의 방향으로 그릴 수밖에 없어요. 점선이니까 실선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어떻게 여기에 구체화, 현실적으로 나타났다는 것은 사실은 우리가 현실이 필요해서 일단 그렇게 정한 것이지 사실은 많은 힘들의 영역이 있는 거예요.

영역이 있다면 힘들의 영역이 ‘에라 모르겠다. 그 중에서 제일 근처에 간 것 이 그래프로 하자.’ 이렇게 현실화 시킬 때 아직도 그것을 했다고 해서 그것이 일치되는 것은 아니고 아직 여분이 남아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상이 만든, 우상의 군주의 특징이 뭐냐 하면 이 공식인데 행함은 행할 대로 해보고 나머지 여분의 것은 그냥 남겨 두자. 행함 + 여분 = 진리. 행함은 구체적으로 나타나되 그것이 다는 아니고 아직도 여분의 것이 남아 있으니까 여분의 것을 채워버리면 진리에 점차 가까워진다, 접근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행함을 부정합니까, 안 부정합니까? 부정할 수가 없어요. 행함을 행함대로 하고 또 여분의 것은 여분대로 해서 진리에 근접해 나가는 방식이 모든 세상의 군주 되는 방식입니다. ‘인간은 부족하고 연약하다. 인정하자. 그렇다고 손 놓을 수는 없다.’는 거예요.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보고 나머지는 신의 뜻에 맡기자. 그래서 모든 군주는 계속 정권이 바뀌는 거예요.

바뀔 때마다 전번에 못한 것은 우리가 보충합니다. 이것이 뭡니까? 행할 대로 해보고 여분의 것은 맡긴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개혁주의 사상입니다. 내 행함이 전부가 아니다. 계속해서 여분의 것으로 날마다 개혁해야 된다는 그 자체를 진리로 인정해 버리자. 어디까지? 몰라.

이 말은 뭐냐 하면, 결국 0.999는 1로 인정해 주자는 말입니다. 이것은 믿음이 아니고 그냥 해보는 거예요. 행함을 포기하면 일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다니엘서를 보면 다니엘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이 다니엘을 인자로 만들어 내는 겁니다.

그러면 행함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다니엘 너는 어떻게 그렇게 꿈을 해석했어?’ 라고 물으면 다니엘은 ‘하나님이 그렇게 했습니다.’ 라고 답변하겠지요. 그러면 또 이쪽에서 ‘그런 겸손한 답변 말고 네가 기도를 할 때 어떻게 해서 이렇게 응답 되었는지 이야기해 봐라.’ ‘왜 알려고 하는데요?’ ‘우리가 그것을 본받기 위해서.’ 라고 하거든요.

행위를 본받는 것은 나와 동질성을 갖추면서 구원을 받으려는 거예요. 남의 행위와 동질성을 갖추어서 나도 너와 같이 구원 받았다는 것을 스스로 확인하고 싶은 겁니다.

그렇다면 그 계시는 뭐가 필요한가 하면,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믿음이 아니라 날마다 확인을 해야 겨우 일부만 믿어지는 그런 믿음이 돼요. 그러면 그 믿음은 누가 실시하는가 하면,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을 받을 때 두 번째 시험에서 악마가 예수님께 뭐라고 했는가 하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라. 그러면 당신은 메시아로서 뜬다. 그러니까 한 번 뛰어내려 봐라.’ 그 때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그렇게 시험해서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러면 어쩌란 말인가? 단절되어 있어요.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과 행위책에 기록된 사람은 서로 단절이 되어야 천국이 갈만한 곳이 됩니다. 천국에 온 사람은 전부 다 예수님의 공로로 왔다고 하는데 그 중 어떤 사람이 ‘나는 내 행위로 천국 왔는데.’ 이렇게 나온다면 천국은 개판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천국이 아니죠.

그렇다면 이 신상이라는 신과 여호와 신이 짐승이라고 표현함으로 말미암아 언약 이전으로 되돌아 가버리면 여기에 짐승을 다루는 방식도 언약 이전 초기 약속의 방식으로 다루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 짐승은 요한계시록 12장에 보면, 이 짐승은 인자와 짝을 이뤄서 서로 적대관계에 있는데, 인자는 이 땅에 와서 아들로 등장하고 짐승은 이 땅에서 신상에 줄줄이 나오는 바벨론 국가, 혹은 국가적 행함을 가지고 대결을 하지요.

짐승은 자기편에 도장을 찍지요. 도장을 한자로 뭐라고 합니까? 인(印)을 찍고 인자도 자기 백성에게 도장을 찍어요. 그러니까 도장과 도장의 싸움. 인감도장이냐 가짜 도장이냐의 싸움입니다.

그러니까 이쪽은 뭐냐 하면, 마지막 나라는 예선전을 거쳐 결승전만 남아 있는 겁니다. 둘은 성질이 너무 달라서 하나가 죽어야 승부가 끝납니다. 그런데 이것은 계시록 20장에 보면 이것을 행위책이라고 하고 이쪽은 생명책이지요. 다니엘 12장에 1절에 보면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되어 있지요.

그 전에는 책 이야기 안 나옵니다. 다니엘 이야기가 나오지 책 이야기는 안 나와요. 그러면 다니엘 12장 1절 이야기를 다니엘 마지막 장에 설치하지 말고 1장 1절에 기록했다면 우리가 이해하기 굉장히 쉽겠지요. 그러면 왜 그렇게 안 합니까? ‘책에 기록된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기록되었다면 뭐라고 하는가 하면, ‘나는 책에 기록 된 자 맞다.’ 라고 하면서 믿음이란 말로 자기 행위를 끄집어내겠지요.

그러면 ‘책에 기록 된 자’라는 문장을 내가 믿는다는 그 행위로 자기가 구원 받은 것으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 그건 바로 짐승에 속한 자이지요. 그 뒤에 나오는 생명책에 기록된 자는 구원 받는다는 그것이 확인되기 위해서는 앞에 뭐가 있어야 되는가 하면 다니엘(인자)처럼 환란을 통과해야 돼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벌이는 굿판에 떡이나 얻어먹겠다고 서 있다가 굿판에 휩쓸려서 약간 아슬아슬한 경우를 거쳐야 ‘야, 큰 일 날뻔 했다. 내 모든 행위로서는 결코 구원될 수 없구나.’를 깨닫게 되는 겁니다.

이런 다니엘을 보고 ‘지혜 있는 자’라고 하지요. 지혜에 대해서는 욥기도 만만치 않지요. 욥은 자신이 믿는 자 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점정을 거치지 않았어요. 욥은 어떤 검정 과정을 거칩니까? 약간 아슬아슬한 경험을 하지요. 아들 10명 다 죽고, 재산 다 날리고, 마누라 도망가는 그런 경험을 하죠. 그렇게 되니까 욥이 원초적으로 돌아가지요. ‘차라리 태중에서 나를 죽였으면 이런 힘든 고난을 안 받을 건데 고난을 왜 받게 합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은 뭐라고 합니까? “응. 무슨 문제 있어?”

욥기 1장을 보면 욥은 뺀 상태에서 하나님과 사단과 이야기를 하죠. 욥은 거기에 참여를 안 합니다. 그래서 욥은 영문을 몰라요. 그러나 욥의 모든 골조는 사단과 이야기할 때 이미 확정된 것입니다. 욥은 모르고 있지요. 그래서 마귀가 말하기를 ‘하나님이 확정해도 욥은 인간이기에 넘어갑니다.’ 하나님은 ‘그래, 좋다. 넘어가는지 보자.’ 이렇게 해서 멀쩡한 욥이 두고 하나님과 사단이 내기를 하는 거예요. 그 게임에, 둘이 탁구 치는데 욥은 공이 된 거예요.

욥은 죽을 지경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욥은 내가 고난 받는다는 것이 나에게는 굉장히 진지했지만 하나님에게는 내가 진지한 것보다도 이런 나를 구원한다는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더 진지했음을 이미 나를 빼놓고 사전에 다 의논된 바를 그냥 적용시키는 그것이 여호와께서 하신 일인 것을 욥은 알게 됩니다.

이런 경우를 목회자는 다 겪어요. 마산에 계시는 심 목사님 경우는 많이 겪었어요. 부교역자 시절 예배 후에 당회가 모여서 “전도사님이 좀 강하게 나오는데 그냥 연말까지는 둘까요? 계약은 연말까지지만 더 이상 두면 교회가 시끄러울 테니까 이달 말로 사임하도록 하지요?” 이렇게 결정이 나서 쫓겨나고.

그런데 그 일을 누가 하시느냐? 바로 주님께서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행위에 대해서 일체 묻지 않고 ‘너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생명책에 기록된 대로 너는 구원 받는다.’

이제부터는 우리 믿음이 ‘믿음이란 이름의 행위’인지, ‘진짜 믿음’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저와 여러분들은 십자가의 길을 가야 됩니다. 그래서 행위를 툴툴 털어버리고, 최선을 다하고 나머지는 하나님께 맡긴다는 이런 행위의 법칙이 마귀의 원리인 것을, 이것은 내 자랑, 내 의를 키우는 방법인 것을 평생을 살면서 확인해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평소에 ‘저는 행위를 버렸습니다.’라고 하는데 저는 그런 소리 들을 때마다 속으로 ‘거짓말 하지 마세요.’라고 합니다. 우리는 자꾸 ‘좋은 여자, 좋은 남자, 좋은 아내, 좋은 남편’ 되려고 해요. 자기 앞에 ‘좋은’을 붙이기를 원합니다. 구원 받는데 ‘좋은’은 아무 소용 없습니다.

안 좋아도 괜찮아요. 그런데 왠지 오늘은 붙이고 싶어. 사실 늘 붙이고 싶어요. 좋은 아내, 좋은 여자이기 때문에 남은 망하고 욕먹고 고생해도 나는 그렇게 되지 않아야겠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인간의 육적 몸의 보존성.

좋은 것을 우리는 추구하지만 하나님이 오셔서 ‘좋은’을 ‘나쁜’으로 바꾸셔서 ‘나쁜 여자, 나쁜 남자, 나쁜 아내, 나쁜 남편’으로 바꾸십니다. 그래서 일을 잘 되고 자기는 진짜 나쁜 여자가 되고, 나는 죄인이고 일은 주님이 다 하셨고. 다시 한 번 이런 묵시적인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교회가 문제가 있다면 목사도 문제 있어요. 혼자 안 당합니다. 목사가 너무 좋은 목사 되려고 했어요. ‘좋은 목사’ 간판 내리고 ‘나쁜 목사’ 되세요. 내가 나쁘면 나쁠수록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납니다. 오늘 이상한 소리하고 있네.

죄인이면서도 죄인 아닌 척하는 것이 주님의 영광을 가리는 겁니다. 내가 죄인인 것을 알면 모든 것이 하나님 은혜입니다. 은혜는 알고 나는 나쁜 사람 되고. 은혜 알았으니까 거기에 덧붙여서 ‘은혜를 아는 좋은 사람’ 되려고 하면 안 됩니다. ‘죄인이기에 은혜로 산다.’ 이렇게 되어야지요.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그래서 어떤 문제가 있을 때 제일 큰 시험이 뭐냐? 자기를 좋은 여자, 좋은 남자로 연속성을 유지하려고 하기에 주께서 난데없는 사건을 유발시키는 겁니다.

다니엘 2장을 좀 더 살펴봅시다. 34-35절에 “왕이 보신즉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하고 뜨인 돌이 신상의 철과 진흙의 발을 쳐서 부서뜨리매 때에 철과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서져 여름 타작마당의 겨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었나이다.”

이 대목이 다니엘 2장 중간에 나옵니다. 그렇다면 다니엘 3장을 모르고 4장을 모르는 사람은 뭘 모르는 사람인가 하면, 다니엘의 환란을 생각하지 못하고 2장 35절만 보고 희희낙락할 가능성이 많아요. 소위 쪽복음이라고 하는데.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라는 구절만 받은 사람의 가장 큰 문제점은 ‘나에게 어떤 환란도 두 번 다시 안 올 거야. 나는 복음을 믿는 좋은 사람이기 때문에 좋은 사람에게 벌 내릴 이유가 없어.’ 라고 지레짐작을 하는 겁니다. 이게 문제에요.

그렇게 생각했던 대표적인 사람이 12제자들 이었습니다. 예수님 하신 말씀이 ‘나는 고난 받고 죽어서 삼일 만에 살아나야 된다.’고 하니까 베드로가 뭐라고 했습니까? ‘주여, 우리가 있는 한 절대 그런 일은 없습니다.’

베드로가 이런 소리를 할 때는 ‘우리는 좋은 편이고 예수님을 해하는 쪽은 악마 편이다.’ 라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누가 악마였습니까? 베드로가 악마였습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16:23).”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마16:24-26). 라고 하시면서 베드로를 변화산으로 데리고 가지요.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예수님과 함께 변화산으로 올라가서 예수님의 변형되심을 보고 놀라서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했지요. 그 때 주님께서 자신의 별세(죽으심)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니까 산을 내려가 봐야 돼요.

변화산에 올라간 것은 좋은데 그 변화산의 영광은 예수님의 죽으심에 동참하는 사람만 그 혜택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것을 알고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8:17).”고 했지요. 십자가라는 구멍을 열면 거기에 바로 부활이 있습니다. 십자가로 안 가면 부활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마귀를 통해서 환란을 주시고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다니엘 2장 35절 이 대목만 보면 신나요. 앞에 있는 이 제국들은 결국 유가 아니고 무였고 허수아비 또는 환각, 이미지인데, 이것이 오늘날의 국가입니다. 우리는 세상 모든 열국이 다 타고 남은 재가 되는 그런 상황 속에 놓여 있습니다. 대한민국이란 제국 속에 놓여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월드컵 할 때 차비 들여서 서울광장까지 가서 모여서 ‘대한민국’을 외쳤지요. 그런데 대한민국이 성경에 있습니까? 대한민국은 멸망할 바벨론 제국입니다. 서로 섞이지 않는 진흙 중 하나가 대한민국, 필리핀, 미얀마. 같이 있으면서도 전부가 하나하나의 느부갓네살이에요. 교만하기 짝이 없어요. 누구에 대해서? 하나님의 복음에 대해서, 새언약에 대해서.

제가 아까 중요한 이야기를 했는데 다시 한 번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대해서 당시 예수님을 죽인 사람들의 평은 뭐냐 하면, 예수님은 하나의 정치범이지요. [예수님의 고난]이란 영화에 대한 불신자들의 평은, ‘너무 잔인하게 때린다.’ 그런데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많이 울었다.’고 합니다. 이런 반응에 대해 예수님이 뭐라고 하실까요?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23:28).” 그 영화를 보고 예수님을 동정할 입장도 못 되고, 너무 폭력적이라는 생각도 옳지 않고, 예수님을 잔인하게 때리는 그 가해자가 바로 우리 자신이란 것이지요.

물론 사람 때리는 것이 재미는 아니지만 만약에 그 예수님이 나의 착한 행위(착한 남자, 착한 여자)를 바꾸는데 개입하면 우리는 그 예수님을 향해 ‘당신 미워!’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남들 건드릴 때는 가만히 있어요. 하지만 나를 건드리면 용서가 안 돼요. 이게 바로 교만이고 이게 자기가 신(신상)이 되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에 이러한 신상과 진짜 여호와의 나라에 차이점이 뭐냐? 이것은 에스겔에 보면 나옵니다. 에스겔의 주재는 성전입니다. 하나님의 신이 동쪽에 있다가 동쪽으로 빠져버려요. 하나님의 신이 빠져나가시니까 이것은 기가 빠져나간 거죠. 기가 빠져나가면 죽은 성전이 되는 겁니다. 이것은 불타도 하나님 앞에 아무 의미 없어요.

하나님의 신이 빠져나가는데 빠져나가면서 하시는 말씀이 뭐냐? 원래 하나님이 성전을 주신 것은 주의 이름 때문에 주셨어요. 주의 이름이 있게 되면 거룩이 주어지게 됩니다. 주의 이름으로 어떤 일을 벌이는데, 주의 이름이 어떤 분인데 그분이 일을 벌이면 거룩이 됩니다.

그런데 성전에서 성령이 빠져나가면서 주의 이름이 같이 이동할 것 아닙니까. 이동하는데 에스겔에 보면 흩어지는 내 백성이 곧 성소가 되는 거예요. 흩어지는 내 백성이 성소가 되는데 그 때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어떤 분이 계신다는 거예요. 그분이 누구냐? 다윗 언약으로 오신 다윗이 와서 흩어지는 내 백성과 주님과 결합시키는 그런 역할을 한다는 거지요.

다윗 언약에 따라 오시는데 그 때 언약을 가지고 새언약이라고 합니다. 이 새언약은 어떤 것인가 하면, 흩어진 내 백성을 찾아가서 당기는데, 하나님의 성신으로 인하여 당겨주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성신이 당기려면 이 다윗 언약을 새로운 메시아 다윗이 와서 다윗 언약을 완성하게 되면 거기에서 성령이 쏟아지는 겁니다.

이 성령에 쏟아지게 되면 흩어진 내 백성이 해골이 되어 있더라도 성령이 임하면, 그래서 에스겔에게 “인자야, 저 해골이 살겠느냐(겔37:3)?” 이렇게 묻는 다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일할 파트너가 된다는 것입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할 때는 아담을 들어서 약속을 담겠다는 뜻이 있어요.

하나님의 질문에 에스겔은 어떻게 답변하는가 하면,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했어요. 그리고 보여줍니다. 주께서 알아서 하시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죠. 해골에게 성신이 임하니까 해골에 힘줄이 생기고 살아나서 하나의 군대가 되었습니다. 군대가 되는 그 과정이 앞으로 흩어지는 내 백성에게 성신이 임하면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원리가, 죄로 말미암아 약속의 땅에 살지 못하고 쫓겨나야 될 내 백성을 다시 모으려면 거룩이 유지되어야 하는데 죄 있는 백성을 거룩으로 바꿀 수 있는 그 책임자가 다윗 언약을 이루는 메시아, 인자로 온다는 겁니다. 인자로 오게 되면 흩어진 내 백성이 성소가 되고 그 성소에서 물이 생겨서 에덴동산처럼 이 물로 인하여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이 살게 된다는 거예요.

방금 제가 길게 이야기했는데, 여기에서 인간의 행함이 어디에 있습니까? 꼭 인간의 행함을 찾아야 한다면 그냥 해골 되는 거예요. 그게 행함이에요. 성령이 임하고 난 뒤에는 해골에다가 성령이 임하기 때문에 여전히 해골이에요. 성령이 임해서 새사람 되어서 말씀대로 살아볼까? 이게 아니고 계속 해골이 될 경우에만 성령의 몫으로,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의 몫으로 모든 공로가 이체가 되지요.

만약 우리에게 용돈 5만원이 왔다면, 주님이 “그 돈 내게로 이체한다.” “어, 주님 그건 내 것인데.” 이런 말이 성립이 안 됩니다. 나의 모든 것은 내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으로 다 바꾸는 작업을 해요. 그러면 우리 안에 성령에 계시겠지요. 이것이 흩어지는 내 백성 속에 있는 성전, 우리 몸이 바로 성전입니다.

우리 몸이 성전이 되면 혜택이 뭔가 하면 바로 예수님이 영화롭게 된 것처럼 우리도 천사와 같이 우리 몸이 하늘의 형상에 속한 그런 몸으로 바뀌는 겁니다. 그러면 자아는 뭐냐? 자아는 이미지고 허상이었어요. 영혼도 이미지. 몸이 중요하지 영혼은 안 중요해요. 몸의 영원성이지 영혼의 영원성이 아닙니다. 이런 것이 기존의 신학이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것과는 다른 관점입니다.

그렇다면 봅시다. 제가 골조라고 했는데 힘의 골조가 신상을 이루지요. 어떤 사람은 여기에서 시간 요소를 빼야 되는데 안 빼면 어떤 일이 있는가 하면 바벨론 제국 무너지면 무슨 신상이 머리 없는 인형인가? 목 달라는 신상이 돼요. 이런 신상은 없습니다. 바벨론 제국 떠나도 여전히 바벨론은 남아 있어야 돼요. 왜냐하면 아무리 날뛰어도 그쪽은 같은 짐승의 장을 형성하기 때문에 그들이 하는 것은 느부갓네살이 받았던 그러한 조치에 같이 가는 겁니다.

힘의 골조 속에 흩어진 성소는 어디에 갑니까? 온 사방으로 흩어지겠지요. 그러면 흩어진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성소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흩어진 백성으로서 흩어져 있으면서 역사의 마지막 때에 짐승들이 무너지게 되면 흩어진 백성들로 인하여 짐승의 본생, 죄가 나오겠지요. 왜? 흩어진 백성들을 핍박하니까.

그러면 나중에 인자가 올 때는 흩어진 백성이 있는 곳마다 그들의 교만과 자만과 짐승적인 본성들이 드러나겠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서 계속 키워서 그들로 하여금 세상 속에 살게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 백성은 성령의 도장을 받고 마귀는 마귀 도장을 찍고 계속해서 투쟁하게 만듭니다. 이게 계시록 11장에 나옵니다.

계시록 11장에 보면 두 감람나무 되는 증인이 죽을 때 그 죽는 자리를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곳이라고 했어요. 우리가 알기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은 위도, 경도 몇 도입니까? 한 곳에 지정되어 있지요. 예루살렘에 있잖아요. 그런데 묵시적 개념에서는 십자가가 예수님과 더불어 고난당하는 그 장소가, 그것이 어디가 되었던 그곳이 바로 십자가 자리입니다. 왜냐? 거기에서 새언약이 나오니까.

그래서 지금 인자되는 다니엘이 짐승 되는 느부갓네살과 만나서 흩어진 백성들이 이기느냐, 아니면 덩치 큰 느부갓네살이 이기느냐? 자꾸 싸움을 붙이는 거예요. 결국은 생명책이 이기고 행위책은 지옥 가잖아요. 그것을 앞당겨서 자기 백성들을 파견해서 미리 그 맛을 보이는 겁니다.

그러니까 느부갓네살은 만날 꼭 일어 벌어지고 난 뒤에 “다니엘아, 미안하다. 너의 하나님은 살아 계시는구나.” 사울도 다윗에게 그렇게 했지요. “다윗아, 미안하다. 내가 잘못했다.” 그런 말해도 소용은 없어요. 돌아서서 또 공격을 하니까. 인간은 그 본성이 발산되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복음을 믿고자 해도 못 믿을 사람은 결국은 행함 + 미흡함으로 돌아갑니다.

이번 강의에서 참 귀한 것 배웠습니다. 짐승의 오류가 뭐라고요? 행함 + 미흡함. 미흡함이 있어야 겸손 티를 내지요. ‘인간이 신인가? 그러니까 부족하지.’ 이런 말은 ‘내가 부족함을 알기 때문에 나는 착한 사람이다.’ 이런 의미예요.

행위를 주장하는 이런 사람들과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사람들이 섞이게 합니다. 섞이면 결국 환란 속에 들어가고. 흩어진 백성들 중 일부는 다시 돌아와요. 돌아와서 성전을 짓는데, 지으면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지요. 그러나 그것은 온전한 성전이 아닙니다. 성전은 물이 나와야 성전입니다.

물이 흘러나와야 성전이고 하나님의 신이 임해야 성전입니다. 그래서 스가랴 4장 6절에 보면, 하나님의 성전은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고 했어요.

하나님의 신으로 된다는 말은 장소 개념을 떠나는 거예요. 그리고 행함 개념을 떠납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말하지요. “예수님,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루살렘에서 예배해야 한다고 하는데 어느 곳이 맞습니까?(요4:20)” 예수님 답변은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고 했어요.

어떤 장소도 아니고 인간의 행함이 아니고 ‘오직 진리와 영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요4:23).’ 예수님이 참 어렵게 말씀하셨어요. ‘오나니’에서 시제는 미래지요? 그런데 그 뒤에 “곧 이때라.”고 하셨어요.

그러나 사마리아 여인은 깨달았어요. 그래서 물동이를 던져버리고 메시야를 만났다고 사람들에게 외쳤어요. 에스겔에서 예언한 그 메시야를 만났다는 겁니다. 혼절이 일어났어요. 이제는 물 걱정은 마세요. 물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메시야가 중요해요. 제대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통로가 열렸다는 겁니다.

지금은 비록 성령은 안 왔지만 성령보다 먼저 다윗 언약을 이루실, 흩어진 사람을 모을 그 메시야가 지금 우리 눈앞에 등장했다는 겁니다. 제자들은 그것도 모르고 양식 구하려고 갔지요. ‘나는 양식 있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니까 제자들이 ‘누가 빵을 주었습니까?’ 라고 하고.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다.’ 라고 했어요.

우리에게 성령이 임할 때는 내가 성령만 받은 것이 아니고 주변의 악마적인 환경도 같이 받아요. 성령을 받고 난 뒤에 갑자기 우리가 몰랐던 이 세상 악마(느부갓네살) 속에 놓여 있다는 것을 한꺼번에 아는 겁니다.

좀 정리해 봅시다. 사건은 분화구처럼 나온다. 사건이 나왔는지 안 나왔는지 사건 자체로는 몰라요. 왜 모르느냐? 우리의 인식은 항상 내 시간론으로 보기 때문에 내 시간론 바깥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있어도 우리한테 의미가 없어요. 내 앞에 꽃이 있어도 내가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있으면 꽃이 있는 줄 몰라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사건이 벌어지고 난 뒤에 사건의 흔적을 남깁니다. 그 흔적을 통해서 내가 생각하지 않은 빈 구멍에서 뭔가 나왔구나를 알게 합니다. 나올 때 성경 전체가 나와요. 성경 구절이 살아서 나옵니다. 그렇게 되면 여기에서 두 가지가 나오죠. 하나의 노선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천국 가고, 또 악마를 따르는 자는 지옥 간다는 것.

우리가 보는 현실, 나는 시간관으로 보는, 그동안 짐승 속에 있어서 행함의 원리 속에 있었던 우리들에게 이런 새삼스런, 예수님과 악마의 대결 구도라는 새로운 낯선 것이 성경을 통해서 알려지면 그 사람은 예수만 달랑 취득하는 것이 아니고 악마를 의식하면서 악마 속에서 예수, 애굽 속에서의 출애굽 이것이 한꺼번에 다 다가옵니다.

애굽의 행함의 법칙이고 천국 백성은 생명책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는다는 이것이 양쪽 다 나란히 나옵니다. 그러면 이것을 가지고 자기 주변에 있는 모든 상황을 재해석하게 됩니다. 재해석 과정에 들어가면 ‘나는 구원 받았다.’는 동일성에 함몰되지요. ‘나는 이제 복음을 알아서 구원 받았어.’ 라고 동일성을 유지할 때, 이 동일성은 또 다른 분화구에서 나온 사건으로 인하여 이 동일성 자체가 바로 인간의 행함의 원리였고 짐승의 원리와 일치된다는 것을 깨우쳐서 부서지면서 자아 해체작업에 들어갑니다. 새로운 사건에 의해서.

그러니까 나는 ‘예수 믿는 좋은 남자’에서 ‘예수 믿는 나쁜 남자’로 다시 등장합니다. 나쁜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은혜로 구원 받았구나를 아는 순간 우리는 또 동일성에 빠지지요. 이게 언제까지 반복됩니까? 죽을 때까지 계속됩니다.

계속해서 내 행함이 나옵니다. 그 행함 속에는 내가 예수님을 깨닫게 되었다는 행함, 복음 안다는 행함. 이것이 누적되어서 이제는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고 구원 받은 하나의 우상시 하는 교만에 빠지지요. 그런데 고마운 것은 주께서 이런 것을 놓치지 않고 성령으로 하여금 우리 자신을 만날 십자가 앞에 세운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봐라. 예수 믿는 너를 보지 말고.’ 그래서 계속해서 십자가만을 증거하게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행함 + 미흡함(여분)’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들으면 ‘왜 당신은 사고방식이 그렇게 부정적인가?’ 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 저변에 깔려 있는 어둠의 내막을 보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그냥 너와 나만 보입니다.

너와 나만 보이는 것을 가지고 적자존재라고 합니다. 상대방을 통해서 나를 보고(이것을 대자존재) 그것을 통해서 나를 규정하는 것을 적자존재라고 사르트르가 이야기했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내가 누구냐를 알기 위해서 나와 유사한 라이벌 되는 사람을 통해서 ‘내가 행위로 저보다 더 튀어날 수 있을까? 저 사람한테 기죽으면 안 되는데’ 만날 전체적인 장(마당)을 생각하지 못하고 그 사람만 따로 떼서 그 사람을 평가하지요.

그래서 이 복음은 나로 하여금 교만하지 않게 해서 날마다 새로운 사건을 일으켜서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 사건을 만나게 해서 나를 날마다 부인케 하는 그러한 것이 있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말해서 내가 말씀 지키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나를 만든다. 왜? 이 말씀 속에는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은 반드시 구원 되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자기 숙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의 숙제물이 아니고 예수님의 숙제물이니까 그냥 내버려둬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다 벗어버려요. 제발 내가 나를 손대지 말고 그냥 살아가면 새로운 사건이 여러분들 기다릴 때 그 사건 속에서 우리를 스스로 ‘나는 개다. 나는 나쁜 남자다.’ 이렇게 사시면 하늘에 있는 태양과 별도 감사함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첨부파일 : 강의 6.hwp (94.5K), Down:21

서경수(IP:116.♡.101.7)

09-08-08 15:29

문장 시작부분에 수학기호 y=x 자성 표시가 날아가 버렸네요. 최일규 선생님이 고쳐 주신답니다.
첨부파일을 열면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관리자(IP:219.♡.86.34)

09-08-08 16:18

바꿔놓았습니다.^^

서경수(IP:116.♡.101.7)

09-08-08 16:34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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