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취]2009십자가마을여름수련회 제4강
[녹취]2009십자가마을여름수련회 제4강
이름 : 오용익(IP:59.3.201.241)
(20090803-4,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강의:이근호 목사)
제 4강
다니엘서 전체가 점차점차 역사세계에서 묵시세계로 당겨져 올라가는데 지난시간에 이야기했듯이 사람이 지은 성전은 이미 날려갔습니다. 날려가서 성전이 없으면 하늘과 땅의 연결통로 자체가 없는 것인가? 그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뭐냐, 성전은 없는데 어떤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 인물이 장차 될 성전의 인격화를 미리 보여주는 인물이 등장해요.
그런 성전이 인격화된다는 언약을 담고 있는 그 인물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인자’ 라고 합니다. 김 세윤 교수를 비롯해서 수많은 신학자들이 ‘인자(사람의 아들)’ 개념을 가지고 논문을 썼는데 뭐라고 했느냐 하면 ‘언약을 이루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언약을 이루는 사람이 아닙니다. ‘언약이 생산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언약이 유지되는 연속성을 가지고 있으니까. 성경을 보는 모든 신학자들의 사고가 꼭 반대로 되어 있어요. 인자가 뭐냐? 인자가 뭐냐, 거기에 대해서는 답변을 안하고 ‘인자는 이런 일을 하셨다. 예수님은 인자인데 십자가를 지셨다. 예수님은 인자인데 고난을 받으셨다. 예수님은 인자인데 병을 고치셨다.’ 그래? 인자가 뭔데?
여러분, 지금 참외를 드셨잖아요. ‘김 집사가 참외를 먹었다.’ ‘김 집사가 누구신데요?’ ‘참외 먹었다. 커피 먹었다. 강의시간에 잤다.’ ‘아니, 김 집사가 누구냐니까요? 김 집사가!’ 인자가 누굽니까? ‘인자가 누구일까? 성경을 찾아보자. 인자는 자기 백성을 사랑한다. 인자는 병을 고친다.’ 그거 말고 인자가 누구냐는 말입니다. 인자가!
하여튼 무슨 수련회를 하든 성경공부를 하든 노트필기 적은 것은 가득해요. 노트 가득하면 뭐합니까? 이미 다 되어 있는데. 이 성경에 다 있는 것 그대로 쓰면 그게 무슨 소용 있습니까? 여기 있는 이것이 활자로 더 잘 되어 있지요. 이 성경이 내 몸에 낯선 사건으로 부딪혀서 내가 고백하고 토해낸 그것이 뭐냐? 이렇게 되어야 돼요.
이 성경이 살아서 내 바깥에 있던 성경이, 내가 말씀을 지킨다고 여겼던 것이, 말씀이 나를 생산했다는 것을 체험하게 된 그 열매들이 나올 때 그게 바로 성경공부 아닙니까? 새삼스럽게 성경 귀절 외워서 뭐할 것입니까? 돌아서면 잊어버리는데. 나이 60되어 보세요. 다 잊어버리지. 성경귀절 외우는 것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잘 외우지요.
신천지집단도 그런 것은 잘하지요. 제가 영주에 있을 때인데 여호와의 증인들이 찾아왔어요. 꼭 남자 하나에 여자 둘이 오는데 여호와의 증인들도 남자숫자가 모자라는 모양입니다. 그들이 와서 전을 펼치는 것을 보고 제가 조지레드의 신약신학 뒤에 붙어 있는 관주성경귀절 정리한 것만 해도 50여페이지가 되는데 그걸 죽 보여줬어요.
이 책 한권을 쓰는데 동원된 성경귀절을 보라고 죽 보여줬어요. 그들이 그냥 갔습니다. 왜냐? 자기가 외운 것보다 더 많거든요. 성경 귀절을 외워서 뭐할 거예요. 성경 안에 다 들어 있는 것인데. 성경 귀절 하나가 내 속에 들어오면 안돼요. 성경귀절 하나가 성경전체의 내용을 담고 내 안에 들어와야 됩니다. 성경귀절 하나가 들어오면 안 됩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이 들어오면 안돼요.
유니버시아드 대회나 올림픽대회 할 때 보면 카메라에 이런 것이 잡히는 경우가 있어요. 아무 소리 안하고 피킷을 들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그 피킷에 ‘Jhon 3:16' 라고 써있어요. 존이 뭡니까? 요한복음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것이 성경에 있는데 그것을 알아서 뭐할건데요? 그 해석도 엉터리로 해요.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에서 세상이 누군데? 몰라요. 세상은 세상이죠. 그러면 지옥은 없게요? 하나님이 세상을 다 사랑한다면 지옥은 왜 만들어놓았습니까? 사랑한다면 아무소리를 하지 말아야지요. 엄마가 있고 여기에 자식이 있다면 그 자식을 보고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이렇게 한다면 그 사랑한다는 말이 무슨 뜻이에요?
사랑 안한다는 뜻이잖아요. 사랑하면 그저 밥만 해주면 돼요. 주님이 사랑한다는 말은 ‘너 사랑하는 사람 맞아’ 라고 확인차원에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이 세상에서는 사랑 못받을 자가 있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는 사랑 못 받을자가 있는데 너는 사랑받은자가 맞아?’ 라고 묻는 차원이라니까요.
이걸 제가 다 설명하려고 하니까 참 힘들어요.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하나님은 세상을 다 사랑한 것이 아니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을 사랑한다’(요 13:1) 고 되어 있고 또 예수님의 기도인 요한복음 17장에도 보충설명이 나와 있습니다.
요한복음 17:9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나이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마 7:7) 이것도 요한일서에 보충설명이 나옵니다.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일 5:14) ‘그의 뜻대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뜻을 기도할 수 밖에 없습니다. 뭘 해도 우리 뜻이에요.
인자라는 개념이 ‘김집사가 참외를 먹는다’ 라는 식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인자 자체가 왜 인자라는 말을 들고 왔는가? 다니엘에 예언된 묵시를 성취차원에서 내가 왔다, 그 말 아닙니까? 에스겔의 인자를 성취하러왔고 시편 8편에 나오는 인자를 성취하는 자가 바로 나다 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인자가 뭘 했다가 아니라 먼저 예수님이 인자라는 말을 하기 이전에 인자라는 말을 사용했던 그분들에게, 그분이 어떻게 했는가를 찾으면 안돼요, 그 분들에게 'What happen?' 무슨 일이 있었는가, 하는 것을 찾아봐야 됩니다. 혼절한다든지, 무슨 일이 있었는가? 외부에서 그분을 어떻게 다루었는가, 그것을 보셔야 됩니다.
다니엘과 예수님 사이는 외부에서 다니엘을 다루었다는 것이고 예수님은 본인이 본인을 스스로 다루었다는 거예요. 다니엘 당시에 예수님의 묵시는 성전이 없더라도 하나님의 언약은 유지되고 연속됩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왔다고 하지 않고 ‘나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왔다’(마 15:24) 고 합니다.
전도의 범위가 아예 처음부터 제한적입니다. ‘아무나 오라. 누구나 오라’ 가 아닙니다. ‘잃어버린 양 누구야?’ 다른 말로 하면 ‘탕자 다 나와.’ 이런 뜻입니다. 그래서 나왔던 탕자가 누구냐 하면 소경, 절뚝발이, 문둥이, 귀머거리, 간음한 여인, 세리와 창기입니다. 세리는 얼굴도 못들고 ‘제가 죄인입니다’(눅 18:13)라고 했어요.
막달라 마리아같은 경우에는 눈물로서 예수님 발에 향수를 부었어요. 문둥병자 소경같은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자들이었습니다. 그것을 한글자로 뭐라고 했습니까? 자기가 있으나 마나 한 존재인 것을 아는 사람, 그 대표적인 사람이 자기는 있느나 마나 한 사람이라고 해서 ‘나는 없다’ 가 아니라 있으나 마나 하다는 것을 더 강조하는 말이 'I AM A DOG'입니다.
‘나는 있으나 마나 한 개입니다.’ 왜? 내가 죄를 지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 의해서 나를 개 되게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이방인들은 뭐라고 했습니까? 개입니다. ‘옳습니다. 개, 잘 하셨습니다. 잘 칭했습니다. 나는 그 언약 통째로 수용합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나쁜 짓을 해서 개가 아니에요. 나쁜 짓을 한 것이 아닙니다.
지난주일 오전 설교가 그겁니다. 베드로가 나쁜 짓을 한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자기 시간대의 그 원인과 결과, ‘내가 결심하면 주님을 위해서 목숨까지 버릴 수 있다’는 자기 시간대에 갇혀 있었던 거예요. 거기에 주님께서는 뻥 하고 구멍을 뚫어버렸어요. 뭘 가지고? 아니지요. 뭘 가지고? 닭을 가지고. 닭의 소리로 구멍을 뚫었어요.
닭은 어디에 속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예언노선입니다. 닭은 예언노선인데 베드로는 자기노선이라. 베드로는 지금까지 가짜였어요. 가짜 베드로. 가짜 나를 가지고 평생토록 살아 온 겁니다. 설교 시간에 이런 예를 들었어요. 베드로가 우는 닭 모가지를 비틀면서 ‘너는 뭐야? 너 왜 우는데’ 라고 하면 닭은 ‘저는 예언대로 울었는데요.’
그러면 닭 모가지를 흔드는 베드로 저는 뭔데요? 그 안에 예언이 없어요. 예언대신 누가 있어요? 내 안에 나 있다. 천상천하유아독존 아닙니까? 나는 나를 위해서 예수 믿고 나는 나를 위해서 하나님 믿고, 나는 나 밖에 없는 거예요. 나를 증거 하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베드로의 노선을 뭐로 바꾼다? 닭 노선으로 바꾸는 거예요.
열두제자를 전부 다 닭속에 집어넣는 거예요. 그날 교회 점심에 닭고기 나왔어요. 인간이 닭만 못하다는 것이 아니고 베드로가 어떤 점에서 닭보다 못한가 하면 닭은 하나님의 예언노선 안에 있는데 베드로는 그 바깥에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바깥에 있는 베드로를 어떻게 예언노선에 집어넣는가? 그냥은 못들어가요.
예수님이 일단 무덤속에 들어가서 무덤속에 있다가 사흘만에 부활하게 되면 베드로같은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을 ‘대속’, ‘대체’ ‘대리’ 대신 합류함으로 말미암아, 이 합류를 가지고 ‘세례’라고 하는데 같은 팔자, 같은 운명, 한 덩어리를 만듭니다. ‘네 팔자가 내 팔자고 내 운명이 네 운명이다.’ 왜 한덩어리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성령을 받게 되면 아버지로부터 하늘나라의 모든 것을 유산으로 받을 것이다.’ 왜? 자기 자식이니까. ‘아버지의 것이 네 것이다.’ 그것을 유산이라고 하지 않고 성경에서 뭐라고 하지요? 기업이라고 하지요. ‘기업을 받을 것이다’ 라고 하지요. ‘그러니까 누가 율법가지고 너희를 폄론하고 비난하겠느냐?’ 이미 받았는데.
꼭 못 받은 것들이 아직까지도 법 따지고 있어요. 꼭 못 받은 것들이 받으려고 애를 쓰는데 그럴 필요 없습니다. 우리는 받은 것 끄집어내기만 하면 돼요. 받은 것 끄집어 내면 돼요. 죄는 원래부터 물려받은 것이고, 죄도 물려받았고 죄용서도 물려받았고 뭐 어쩌란 말입니까? 그렇게 해서 생산된 것이 우리 몸인데.
여기서 말하는 죄라는 것은 특별히 율법이 말하는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뭐든지 ‘나는 나밖에 모른다’는 그 죄, 나의 시간관 나의 역사관, ‘내가 죽기까지 주님 떠나지 않겠습니다’ 라는 것. 제가 지난 주일오전설교에 문제 하나 냈잖아요. 다음 중 예수님께 버림받은 사람은? 1) 예수 버리겠다는 사람 2) 교회 받드는 사람 3) 예수님 저주하는 사람 4) 죽기까지 주를 따라가는 사람.
몇 번입니까? 정답은 4번입니다. 자기 주제파악을 못하고 있는 거예요. 자기주제 파악이 안되는 사람입니다. 진정 합류가 되었으면 합류되기 이전에 이 작업을 위해서 인자가 무슨 사전작업을 해 줘야 돼요. 그 인자의 사전작업은 다니엘에서 찾아봐야 됩니다. 왜? ‘인자야’ 라고 했으니까. ‘다니엘이 뭘 했다’가 아닙니다.
‘다니엘을 본받자.’ 뭘 본받아요. 다니엘 본받을 것 뭐가 있습니까? 회개했다고요? 회개를 자기 맘대로 할 수 있습니까? 혼절나야 하지요. 다니엘이 자기 맘대로 하는 것 없어요. 남의 꿈을 알아채는 것? 무슨 수로 합니까? 어제 저하고 주무셨지요? 어제 꿈꾼 것 생각해 볼까요? 1) 강의를 잘하는 모습을 봤다. 맞습니까?
그냥 잤지요. 꿈도 안 꾸고. 푹 잤어요. 사람이 가능할 것 같으면 저도 ‘하라’고 합니다. 성경말씀 어느 한 구절도 가능한 구절이 하나도 없습니다. 만약에 가능한 구절이 있으면 그것은 여기서 빠져나와서 공자 맹자책에, 윤리책에 집어넣어야 돼요. 성경은 어느 구절도 한 구절도 사람이 지킬만한 구절은 없습니다.
그냥 내 버려둬요. 그렇게 그냥 살도록. 내버려두면 혼절이 나든지 뭐가 와요. 제가 말을 잘못했는데 내버려두지 않더라도 매일같이 와요. 햇빛과 공기를 주시죠. 매일 같이 옵니다. 어제 달 보셨습니까? 시편 138편에 보면 ‘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합니다.
달 떠 있는 것만 봐도 신자는 감사함인데 불신자는 ‘어, 달이네’ 그렇게 합니다. 신자는 달이 그냥 떠 있는 것이 아니라 달이 떠 있는 것을 통해서 뭔가가 와요. ‘달아, 달아, 누가 만들었느냐?’ 뭐가 온다고요. ‘저 달도 뭔가 복음을 위해서 만들었겠지’ 이렇게 온다고요. 그것도 2초내지 한 3초정도. 너무 길게 잡으면 여러분이 시험 들기 때문에.
이게 인력으로 안돼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자를 통해서 무슨 일이 벌어지게 하는데 그 인자를 통해서 무슨 일이 벌어지느냐, 하는 것은 다니엘을 통해서는 모르고 예수님층이 묵시의 원천이기에 다니엘이 먼저고 예수님이 뒤에 오지만 예수님을 통해서만 알아집니다. 다니엘이 이렇게 길게 있잖아요. 7이레, 62이레, 1이레, 이 중간에 누가 있다고 했습니까?
예수님이 계시죠. 그러니까 70이레는 프리즘처럼 묵시층의 원천되시는 예수님으로부터 아래로 쫙 퍼진거죠. 퍼진것이지만 영사기에서 퍼진 그림이 그렇고 필름은 달랑 영사기에 꽂혀 있는 한 장이잖아요. 이 짧은 이것이 예수님께서 알파요 오메가라면 이 역사를 다 모으면 알파요 오메가, 시작이고 끝이 된다 그 말입니다.
그 중의 일부가 다니엘의 70이레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빛이 영사기처럼 파생되면 여기에 예수님의 모습을 미리 앞당겨서 예수님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는 것을 선지자라고합니다. 선지자의 모든 고난이, 정 낙원 목사님의 히브리서 설교를 들어보면 죽 나오는데, 예수님의 고난의 실체가 앞당겨서 나옵니다.
노아는 방주, 에녹은 죽지 않고 올라가는 것, 아브라함 같은 경우는 자기 아들을 바치는 것, 야곱같으면 지팡이에 의지해서 하는 것, 모세같은 경우는 애굽의 공주 아들됨을 거절하고 노숙자 되기를 원했다는 이야기, 이런 이야기들이 전부가 모아지면 예수님의 일대기속에 집중이 된다는 말입니다. 집중이 되니까 군주가 되고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아야 되거든요. 그렇다면 다니엘에 있어서 모든 고난은 결국 누구의 고난입니까? 원래 원조되시는 예수님께서 악마한테 받을 고난을 인자가 미리 앞당겨서 보여주는데 그것이 역사적인 형태로 다니엘에게 나타나는 거예요. 아직까지 묵시까지는 안당겼으니까. 그래서 다니엘 1장에 보면 ‘왕이 먹는 진미(고기)를 먹을래’ 할 때 다니엘이 뭐라고 합니까? ‘저는 안 먹겠습니다’ 라고 했지요.
그러니까 트레이너를 보내서 ‘한번 조사해봐라. 체중이 늘어나는지 줄어드는지 알아봐라. 맛있는 것 안 먹고 어떻게 체중을 유지하고 건강을 유지하는지 한번 보자.’ 보니까 고기 안먹고 채소만 먹어도 건강이 유지 되었다는 거죠. 만일에 이것을 그리스도의 몸과 연관시켜서 해석을 하면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생존과 관련되어 있지만, 이것을 우리 몸과 관련시키게 되면 여기서 뭐가 나오냐 하면 웰빙식단이 나옵니다.
그래서 성경을 볼 때 꼭 자기 몸을 위주로 자기 유리한대로 성경을 봐버리면 묵시적존재로 가야 될 해석이 같은 역사의 존재인 나에게로 와버려요. 그 중에 하나의 예가 ‘십일조를 하면 복을 받는다’고 하는데 여러분, 십일조를 하면 복을 받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그 십일조의 의와 신과 인을 다 이루었습니다.
우리는 어떤 성경말씀도 못 알아들어요. 십일조도 제대로 못한 우리에게 십일조를 한 자에게만 주어지는 복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게 달빛이고 별빛입니다. 밤에 길을 가면 달빛이 늘 비추지요. 그래서 나온 유명한 노래가 노사연의 <달그림자> 아닙니까? ‘저만치 앞서가는 길~.’ 하나님의 보호 속에 달그림자, 그리고 별빛, 그리고 태양.
여러분 태양 빛나고 있는데 세금 얼마 냈습니까? 공짜지요. 이방인들은 그것 보고도 고마운줄 모르는데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것을 보고 자비를 배워서 ‘우리도 원수를 사랑해야 된다’는 것을 안다는 거죠. 이것은 돈 10억을 줘도 그것을 몰라요. 그러니까 우리는 십일조 안 해도 십일조 한 사람만 받는 복을 예수님이 다 이루어서 주신 성령으로 인하여 계속 복을 누리고 있는 겁니다.
뭘 더 원해요. 복중의 최고의 복은 죽어도 괜찮다는 거예요. 자식이 애를 먹입니까? 죽으세요. 자식이 눈에 안보일 겁니다. 사실은 자식이 애를 먹여도 그 자식은 복음을 위하여 총괄과거에서 나온 일부가 총괄과거의 일부인 나를 만나서 복음을 위하여 뭔가를 알게 하기 위해서 말썽꾸러기 자식을 만나게 했다고 해야 맞습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거기에 집어넣으세요. ‘말썽꾸러기 자식이 말썽을 부리든지 말든지’ 오직 복음을 위해서 그렇게 한 겁니다. 이것을 어떻게 실천에 옮깁니까? 그냥 내버려둬요. 가만있으면 여러분 속에 악마가 있고 활동하게 될 것이고 돌아서서 회개하게 될 것이고 여러분을 인자로 사용하실 겁니다.
다니엘은 먼저 온 인자이고 우리는 나중 온 인자입니다. 먼저 온 인자는 성전을 대치한다면 나중 온 인자는 우리 몸이 주께서, 성령께서 역사하는 인자가 되는 겁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인자 꼬라지 좋다’ 하겠지만 하늘나라 가면 육에 속한 것이 다 없어지면 다 같은 천사가 되어서 모든 천사와 같이 영광을 누립니다. 해와 같이 빛날 거예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주께서 여러분을 죽이실 겁니다. 우리 서 장로님같은 경우는 제대날짜가 얼마 안 남았어요. 제가 ‘아주 좋다’고 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다 벗어버리고. 1장에서는 우리 같은 육을 가지고 있는 이방인들의 생존방법에 다니엘보고 합류하라는 말입니다.그럴 때 다니엘은 ‘우리의 생존방법은 따로 있거든?’ 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는 고기거든?’ 하니까 ‘우리는 채소거든?’ 이렇게 되는 겁니다. ‘좋다. 건강한가 보자’ 하고 트레이너가 가서 조사해보니까 얼굴이 포동포동 살이 더 쪘어요. 그걸 보고 왕이 ‘아이고 너희들이 믿는 신이 있기는 있구나.’ 그러니까 몸이라는 개체의 만남을 통해서 한쪽은 자기들의 몸밖에 모르고 한쪽은 뭔가 투과하고 담기는, 하나님의 묵시가 담기는, 장차오실 예수님의 인자하심이 담기는 그러한 몸으로 이미 사용하고 있습니다.
3장에는 다니엘의 세친구가 등장하지요. ‘나팔을 불거든 금신상에 절하라.’ ‘안하거든. 우리는 못하겠거든.’ 그런데 여기에 무슨 조항을 담는가? ‘절하지 아니하면 죽인다.’(단 3:5,6) 여러분, 죽음이 뭐예요? 『피』라는 책에 나옵니다. 죽음이 무엇인가? 죽음이란 내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없으면? 1) 속시원하다. 2) 무섭다. 몇 번입니까?
솔직하게 이야기해 보세요. 강도가 죽인다고 하면 1) 속시원하다. 2) 무섭다. 몇 번입니까? 무섭지요. 왜 무서운지 그것을 2천년동안 철학자들이 밝혀내지를 못했어요. 히브리서 2:14이하에 보면 간단하게 답해 놓았습니다. 우리 몸은 우리의 것이 아니고 마귀의 것이기 때문에 마귀가 무서운 거예요.
히브리서 2:14,15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마귀가 무서우니까 우리가 같이 무서워하는 거예요. 그리스도가 온 이유가 뭐다? ‘마귀와 한통속이 되어서 같이 무서워하는 너희들을 죽기 무서워하는 마귀 자체에서 빼내어서 이제는 두 번 다시 죽는 것이 안 무서운 사람의 소속으로 옮겼느니라.’ 그것 때문에 예수님이 오셨다는 거예요.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교회란 무엇이냐? 교회란 건물이 고딕식이냐 무슨 양식이냐 그런 것이 아니고, 목사가 있고 장로가 있다 그런 것도 아니고 교회란 무조건 음부의 권세를 이긴 사람들의 집합입니다. 따라서 교회 올 때는 휴대폰 다 빼놓고 마지막 유언장 쓰고 와도 괜찮다는 그 말입니다. ‘괜찮다!’
십자가가 원래 무덤에만 있어요. 유일하게 자아를 죽이는 무덤입니다. 요새 무덤은 너무 좋게 해놓았어요. ‘대구우리교회’ 무덤도 에어컨 네 대나 해 놓았어요. 20명당 한 대꼴로 에어컨이 팡팡 돌아갑니다. ‘이왕 죽는 것 시원하게 죽자’ 이 말입니다. 땀 흘리면서 죽을 필요 없으니까 아주 좋은 취지지요. 어느 교회 가도 ‘우리교회’만큼 점심식사 잘 안 차립니다.
취지가 뭐냐? ‘이왕 죽을 것 먹고 죽자’ 그런 취지에요. 그 가운데서 살려고 교회 왔으면 그것은 왕따 당하지요. 왜 살려고 합니까? 살아서 자기 행위를 보이겠다는 거예요. 죽은 사람은 행위를 포기했는데 혼자 살아서 행위를 보이겠다고 하면 그것은 어떻게 됩니까? ‘신상에 절 안하면 죽인다’ 그것처럼 ‘마귀한테 절 안하면 죽인다’ 할 때 예수님은 뭐라고 했습니까?
너는 누구에게 경배하라? 하나님께 경배하라고 했지요. 다니엘의 세친구는 아직 거기까지는 아닌 모양이죠. 좀 소극적입니다. ‘그리 아니하실찌라도.’ ‘나는 여호와 섬깁니다.’ 이렇게 ‘나는 예수 믿는다’ 고 하면 될 것을 그 소리를 못해서 ‘나는 안섬기겠습니다’ 이렇게 소극적으로 나오지요. 그래서 느부갓네살이 튼튼한 소방관 동원시켜서 용광로에다 그들을 집어넣었어요.
용광로는 포항제철 생각하면 돼요. 그 포항제철 화로 속에 집어 넣었습니다. 세포는 단백질로 되어 있기 때문에 약 200도 내지 300도 되면 타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런데 같은 세포를 가지고 있는 몸인데 세친구를 집어 넣은 소방관들은 타죽어 버리고 안에 들어간 사람은 안에 들어가 보니까 네 번째 사람하고 미팅하고 있더라는 말이죠.
강강술래 하고 있어요. 그림으로 그리면 이렇지요. 불속에 들어가면 네 사람이 있어요. 왕이 이들을 불속에 집어넣었는데 이 불이라는 경계선 안에서 바깥을 볼 때 그 바깥이 불타는 세계였습니다. 바깥쪽은 불타는 세계고 도리어 안쪽이 불이 안타는 세계였습니다. 왜? 인자되시는 분이 합세하니까. 이게 바로 성전이잖아요.
‘주와 함께 있으면 죽어도 살리라.’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1장에서 마리아와 마르다에게 하신 이 말씀이 이게 농담이 아닙니다. 농담이 아닌 것을 다니엘의 세친구가 역사적으로 보여줬어요. 다니엘의 세친구가 보여준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런 이벤트를 만들었지요. 물론 이 이벤트를 하고 나서 혼났습니다. 말이 그렇지 깜짝 놀랐을 거예요.
‘두 번 다시 그런 이벤트는 시키지 마세요’ 했을 거예요. ‘자, 다음에는 물속에 한 번 들어가 볼까?’ ‘아니요. 아닙니다. 됐습니다. 저 믿음 있는거 아시잖아요. 왜 이러십니까?’ 할 거예요. 홍해같은 경우에는 집단 자살로 홍해바다로 들어가지요. 뒤따라오는 애굽 군대는 ‘저것도 인간이고 우리도 인간인데 저것들 가는데 우리가 못갈것이 뭐가 있는가’ 하면서 말타고 병거타고 따라갔지요.
물론 그들은 들어갔습니다만 물이 합세하면서 다 죽었습니다. 그 죽은 사람 붙들고 인터뷰 해보면 ‘너 왜 물속에 들어갔는데?’ ‘물속에 들어가도 살줄 알았어요.’ ‘임마! 물속에는 물고기만 사는 거야. 알았어?’ ‘그럼 저 인간들은요?’ ‘저사람들은 너희와 같은 인간이 아니야. 어린양의 피가 묻어 있어. 유월절의 피가 묻어 있는 인간은 인간이 아니야. 천사야.’
애굽은 뭘 대표합니까? 애굽은 지옥 갈, 물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인간집단을 애굽이라고 하고 그 애굽나라가 어디까지 이어지느냐 하면 바벨론 애굽 다 거치면서 요한계시록까지 이어집니다. 물론 성경에 이런 내용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제가 간추린 겁니다. 거기에 금신상의 내용이 죽 나와 있는데 그것은 수직으로 서 있다면 이 금신상이 바벨론 제국입니다.
엎어지면 발 닿는 데, 여기가 바로 세상 역사의 끝입니다. 서 있는 입체적인 금신상을 발로 차서 자빠뜨리면 이 발 닿는 여기가 세상 끝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묵시적인 세계를 보이는데 느부갓네살로 하여금 신상을 만들도록 해서 마귀가 만든 신상이 얼마나 역사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좋은 교육자재가 되는지를 보여주는 거예요.
성도에게 역사는 어떻게 끝나는가를 알려주기 위해서 지금도 주께서 수많은 마귀와 적그리스도를 동원해서 복음을 위하여 그들을 활동케 하시는 겁니다. 그들의 주특기를 알려줄게요. 그들의 주특기는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행함으로 구원받기. 별로 안놀래시는 것 같습니다.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그들의 주특기입니다.
그러면 믿으면 되잖아요. 그 믿음도 행함입니다. 아니 행함으로 구원받지 못한다면 그러면 믿으면 되는데 그 믿음도 행함이라고 하고 그러면 진짜 믿음은 어디서 나옵니까? 믿음은 믿음에서 나와서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롬 1:17) 왜 사도바울이 로마서 1장 17절에서 믿으면 된다고 하지 않고 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고 하느냐 하면 믿음의 주체를 우리자신에게 두지 않기 위함입니다.
‘내가 믿는다’는 소리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런 것은 사도바울이 사도되기 전에 많이 했어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사도가 예수님 만나고 나서 알게 된 것은 구원받는 믿음의 주체가 결코 내가 될 수 없다는 겁니다. 육에서 나올 수 없다는 겁니다. 그냥 주님의 믿음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그런 믿음을 받은 사람의 특징이 뭐냐? ‘내가 믿는다’고 하지 않고 ‘주께서 믿어지게 하셨습니다’ 라고 하지요. 그걸 저에게 묻는 어떤 목사에게 여러 번 이야기를 했어요. ‘목사님, 예수 믿습니까?’ 하면서 막 달려들어요. ‘주께서 믿게 했습니다.’ ‘그것 말고, 그것 말고!’ 그것 말고 다른 것을 이야기하는 것을 보니까 자신은 자기가 믿어서 믿는다고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저는 주님이 믿게 해서 믿었다고 주님 증거 하는데. 우리는 뭘 소유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 믿음 아침 다르고 저녁 달라요. 부부싸움 해보세요. 믿음이고 뭐고 없습니다. ‘너 죽고 나 죽자’ 이렇게 나오는데 거기서 무슨 믿음입니까? 성화 좋~다! 26년째 성화 했다가 26년 하고 이틀째 되는 날 부부싸움 해보세요. 성화 다 깨집니다.
공든 탑 다 깨져요. 아무 소용없습니다. 6장에 보면 다니엘이 법에 금지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창문 훤히 열어놓고 기도했어요. 쉽게 하면 KBS, SBS, MBC, YTN 카메라 다 찍는데서 공개적으로 기도했어요. 대번에 소문이 났지요. 조·중·동 신문에 톱기사로 났어요. ‘고급관료 다니엘 금지된 기도를 하다.’
청와대에서 아주 난처하게 되었어요. 자기에게 소속된 인물인데 기도하다가 걸렸으니까 아주 종용히 불렀어요. ‘기도했나?’ ‘했습니다.’ ‘왜 했는가?’ ‘하나님이 살아계시니까 저는 이렇게 할 겁니다.’ ‘와, 우리가 이렇게 헤어지나?’ ‘할 수 없습니다.’ ‘미안하다.’ ‘미안할 것은 또 뭐가 있습니까? 주께서 일으킨 사건인데.’ ‘그래. 그러면 들어가라.’
그래서 다니엘이 사자굴에 들어갔습니다. ‘너무 미안하다.’ ‘미안할 것 없습니다.’ ‘미안하니까 내가 너 지켜보마.’ ‘집에 그냥 가셔도 되는데요.’ ‘아니야. 지켜보마.’ 왕이 지켜보고 있지요. 사자는 사흘을 굶어서 어느 놈이든 들어오기만 해봐라, 하고 버티고 있는데 다니엘이 들어갔습니다. 베드로가 꼭 감옥에 들어간 것 같아요.
베드로는 감옥을 일종의 모텔로 생각한 것 같아요. 잠자러 들어왔어요. 자고 있는데 천사가 흔들어 깨워서 잠도 제대로 자지도 못하고 감옥에서 나왔어요. 하여튼 이 성경의 세계, 묵시의 세계가 희한해요. 다니엘이 사자굴에 들어갔는데 사자가 무슨 최면이 걸렸어요. 입은 벌려야 되겠는데 벌려지지를 않아요. 사자가 끝내 가만있는 거예요.
그래서 왕이 그걸 멀찍이서 보고 ‘잘못했다. 내가 미안하다. 하나님이 살아 있는 것을 몰랐다.’ 그래서 끄집어냈지요. 끄집어 낸 뒤에 나중에 알아보니 이 법을 제정해 놓은 이유가 다니엘을 자리에서 제거하기 위해서 정적들이 조작한 것으로 드러났어요.
이번에는 그 정적들을 다 사자굴에 집어넣도록 해서 ‘에이, 바보 같은 사자들은 사람고기를 안좋아하더라’ 해서 안심하고 들어갔는데 사자가 ‘이제 왔나’ 하면서 그 때 입이 벌어져서 다 잡아 먹었어요. 이게 뭐냐 하면 구원은 반드시 짝이 있어요. 심판 없는 구원 없고 지옥 없는 천국은 없습니다. 여러분, 천국 갔습니까? 지옥으로 헤어진 친구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요한계시록 1장부터 3장까지 교회내에 천국가는 사람과 지옥 가는 사람이 있는 것으로 나와 있지요. 역사적인 교회에 역사적인 사건으로서. 다니엘의 후손들은 다니엘이 은퇴하고 난 뒤에 미래에 이것을 그대로 답습해야 돼요. 답습하면서 역사에서 묵시쪽으로 더 무게를 주게 됩니다.
이 미래의 환란에 안티오쿠스 4세가 등장하는데 이것은 성경에 안 나와 있고 그냥 ‘뿔’이라고만 나옵니다. 뿔, 하면 뿔테안경이 생각나는데 이 뿔은 다니엘에 보면 무슨 기능이 있느냐 하면 들이박는 기능이고 무엇을 들이박느냐 하면 성전을 들이받습니다. 본인들은 몰라요. 뿔이 성전을 들이박는 그 환경의 조성이 다니엘 11장에 나옵니다.
성경좀 읽는다 하는 사람도 성경진짜 재미없다 하면서 그냥 넘기고 싶은 구절들이 몇구절 있습니다. 첫째가 레위기에 나오는 제사법, 두 번째가 에스겔에 나오는 성전측량법, 세 번째가 다니엘에 나오는 11장인데 한번 봅시다. 정말 짜증나는 구절들입니다.
11장 5절부터 보면 ‘남방의 왕은 강할 것이나 그 군들 중에 하나는 그보다 강하여 권세를 떨치리니 그 권세가 심히 클 것이요 몇 해 후에 그들이 서로 맹약하리니 곧 남방 왕의 딸이 북방 왕에게 나아가서 화친하리라 (휴, 숨 한번 크게 쉬고) 그러나 이 공주의 힘이 쇠하고 그 왕은 서지도 못하며 권세가 없어질 뿐 아니라 이 공주와 그를 데리고 온 자와 그를 낳은 자와 그때에 도와주던 자가 다 버림을 당하리라’(단 11:5-6)
9절에 보니까 ‘북방왕이 남방왕의 나라로 쳐들어갈 것이나 자기 본국으로 물러가리라’(휴 ~) 11절, 12절에 보니까 ‘남방왕은 크게 노하여 나와서 북방왕과 싸울 것이라 북방 왕이 큰 무리를 일으킬 것이나 그 무리가 그의 손에 붙인 바 되리라 그가 큰 무리를 사로잡은 후에 그 마음이 스스로 높아져서 수만명을 엎드러뜨릴 것이나 그 세력을 더하지 못할 것이요.’
15절을 봅시다. ‘이에 북방왕은 와서 토성을 쌓고 견고한 성읍을 취할 것이요 남방 군대는 그를 당할 수 없으며 또 그 택한 군대라도 그를 당할 힘이 없을 것이므로,’ 17절에 봅시다. ‘그가 결심하고 전국의 힘을 다하여 이르렀다가 그와 화친할 것이요 또 여자의 딸을 그에게 주어 그 나라를 패망케 하려 할 것이나 이루지 못하리니 그에게 무익하리라.’
20절에 봅시다. ‘그 위를 이을 자가 토색하는 자로 그 나라의 아름다운 곳으로 두루 다니게 할 것이나 그는 분노함이나 싸움이 없이 몇 날이 못 되어 망할 것이요.’ 그 다음에 계속 넘어가서 29절과 30절에 ‘작정된 기한에 그가 다시 나와서 남방에 이를 것이나 이번이 그 전번만 못하리니 이는 깃딤의 배들이 이르러 그를 칠 것임이니라 그가 낙심하고 돌아가며 거룩한 언약을 한하고 임의로 행하며 돌아가서는 거룩한 언약을 배반하는 자를 중히 여길 것이며.’
이게 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윗동네 아랫동네 축구시합 하는 것 같잖아요. ‘어이 윗동네 한판 붙자.’ ‘아이고, 게임 안된다.’ ‘안되는지 되는지는 붙어봐야 알지.’ 붙어서 4:0으로 깨졌어요. 그러자 괜찮은 축구선수 박지성을 불러서 다시 한판 붙습니다. ‘한판 붙자. 이번에는 이긴다.’ 또 깨져버렸습니다.
‘박지성이 가지고도 안되겠다. 이번에는 더 나은 선수를 불러서 붙어야 겠다’ 하고 다시 붙습니다. ‘한판 붙자.’ 붙어서 이겼습니다. ‘와, 우리가 이겼다.’ 이것은 성전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 보입니다. 이게 AD 300-200 사이에 있었던 일인데 그 당시에 유대나라는 나라 자체가 없어요.
하나의 부족, 아니면 흩어진 난민들, 그러면서도 그 흩어진 난민들도 순수한 혈통도 아니고 형식은 유대교이지만 그 혈통은 아주 모호하기 짝이 없는, 그러면서도 성전 하나는 붙들고 있는 식이었습니다. 그 성전은 에스라 느헤미야때 BC 440년 경에 완공된 거예요. 2년만에 지으려고 하다가 방해세력 때문에 못 짓고 기다렸다가 14년동안 기다렸다가 짓는 복잡한 사연들이 있어요.
그런 것은 성경책에 다 나옵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그들은 축구시합 하듯이 그냥 왔다갔다 할 뿐인데 한 번 이길 때마다 기분 좋다고 성전에 와서 금은을 약탈해 갑니다. 기분 나쁘면 기분 나쁘다고 술 한 잔 먹고 와서 약탈해 가고. 본의 아니게 북쪽의 시리아와 남쪽의 애굽사이의 중간에 끼어 있는 것이 애꿎은 유다나라의 성전입니다.
이놈이 이겼다고 훑고 지나가고 저놈이 졌다고 또 훑고 지나가고 이리 빼앗기고 저리 빼앗기고 완전히 황폐해지고 말았어요. 62이레의 환란이 그렇게 된 겁니다. 제가 어릴 때 식구가 13식구가 함께 살았어요. 삼촌들과 함께 잤어요. 삼촌들은 벌써 어른들이었고 우리는 초등학교 다니는 어린이였어요.
삼촌들이 잠버릇이 나빠서 이쪽에 있는 큰 삼촌이 이불을 둘둘 말아서 구르면 이불을 다 가져가 버려요. 그러다가 반대쪽에 있는 삼촌이 춥다고 이불을 끌어다가 둘둘 말아서 가져가버리면 또 저쪽으로 가져가 버립니다. 나중에 새벽되면 어린 조카들은 이불도 하나 없이 휑 허니 쪼그려 자고 있지요. 밤새도록 이쪽으로 훑고 지나가고 저쪽으로 훑고 지나가고.
요새 애들은 그런 것을 잘 모르지요. 각방을 쓰기 때문에 그런 것을 알 턱이 없지요. 같이 자니까 그런 일이 생기는데 그걸 방목이라고 하지요. 방목을 하면 그런 현상이 일어나요. 그러니까 지금 남들 보기에 성전존재는 의미 없어요. 이방나라가 보기에는 그냥 성황당 같은 것이 하나 세워져 있는 것 뿐이지요.
그러나 유다니라 입장에서는 ‘아닌데, 이거 성전 있어야 되는데, 에스라 느헤미야가 지은 건데,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인데’ 하면서 쥐고 있으면 이놈이 와서 빼앗고 저놈이 와서 빼앗고 가만 있다가 다 날아가게 생겼어요.
그게 바로 다니엘이 겪었던, 이방인들에게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은 정말 의미 없는 것이지만 유대인에게는 의미 있는 유일한 것이 의미 없이 하는 인간들로 하여금 부지중에 박살나는 현상,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주여, 저들이 하는 짓을 모릅니다’입니다.
그들은 메시아를 죽이는지도 몰라요. 그냥 하나의 정치범이 까불다가 얻어맞는 것으로 해석하지 하늘에서 온 구세주가 우리 손에서 십자가에서 죽는다는 사실을 그들은 모릅니다. 고린도전서 2장에 보면 ‘십자가를 누가 아는가? 사람의 지혜로는 모른다. 만약에 그들이 아는 지혜가 있었다면 절대로 예수님을 죽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를 아는 것은 인간의 마음으로는 안되고 오직 성령이 임한 자라야만 오직 십자가가 우리를 구원하는 능력이 된다는 것을 비로소 안다’ 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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