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취]2009십자가마을여름수련회 제3강
[녹취]2009십자가마을여름수련회 제3강
이름 : 오용익(IP:59.3.201.241)
(2009년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강의:이근호 목사)
제 3강
사건이 나올 때 분화구(일종의 화산) 에서 사건이 나옵니다. 분화구에서 사건이 나오게 되면 이 사건은 능력을 발생시키고 이 능력은 새로운 자아(몸)를 만들어내는 겁니다. 지난시간 끝부분에서 말씀드렸듯이 분화구에서 사건이 나오게 되면 이 사건은 분화구에서 나온 사건이고 이 사건이 능력이 되어서 여기서 몸이 만들어집니다.
이 분화구에서 나온 본래의도가 우리 몸에 능력을 가하게 되면 그 몸에서 자아가 나오는데 그 자아는 분화구 밑에 숨어 있었던 속성이 자연스럽게 발산됩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하면 예수의 증인이 된다’ 하는 것은 전혀 우리 본래 의도했던 것과는 관계없습니다. 우리는 그냥 공부 좀 잘 해서 좋은 학교 졸업하고 좋은 직장 취직해서 결혼해서 애 잘 낳고 잘 살면 되는 그것 뿐이에요.
그것은 누구의 증인이냐 하면 나의 증인되기를 원했던 겁니다. 나의 증인되기를 원했는데 성령이 임하면 예수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뭔가 내가 의도하지 않는 변화가 어느 구석에서 출발이 되어줘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무→유’로 창조한다는 겁니다. 지난시간에 제가 두 가지를 이야기했지요.
하나는 ‘유→유’가 나오는 방법인데 여기서 나온 것이 우리가 평소에 갖고 있는 시간관이라고 했습니다. 이 시간관은 ‘과거 → 현재 → 미래’로 나아가는데 그 방법은 ‘여기에 있는 과거의 원인이 내가 되어서 현재를 이루고 그 현재는 원인이 되었던 그 기대한 것을 미래에 달성한다’라는 쪽으로 이미 있는 우리 몸을 ‘유→유’로 몰고 간다는 말입니다.
만일 내가 고 3이라 합시다. 그러면 공부 안하고 가야산까지 수련회에 왜 참석했어요? 고 3이면 공부를 해야 좋은 대학 가잖아요. 이것이 ‘유→유’로 나오는 것이니까 이런 결과로 나온 미래의 ‘유’는 새로울 것이 없어요. 내가 예상한 것 그대로입니다. 이것은 자기증거,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증거 하는 겁니다.
그에 반해서 ‘무→유’로 증거가 되려면 첫째 이 ‘유’가 무엇으로 바뀌어야 되느냐 하면 ‘有(유)→無(무)’ 로 바뀌는 경험을 해야 됩니다. ‘아,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죽어 마땅하다. 아, 지금까지 내가 有라고 여겼던 이것은 착각이었구나. 하나의 이미지, 내 자아에서 올라온 상상에 불과했구나.’
이렇게 유를 무로 돌리고 무가 된 이 상태에서 다시 유가 되어 버리면 무에서 유가 되는 이 몫, 이 공로의 모든 것은 나로 하여금 무를 유로 돌렸던 다른 분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고전 15:10) 라는 ‘내가 다른 사도보다 더 많이 일을 했지만 내가 잘나서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이렇게 되었습니다. 나를 몰고 가는 것은 다른 세계가 와서 그렇고 다른 분이 와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라고 되면 여기서는 자기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無로서 有로 나를 있게 하신 그 주님을 증거 하는 거죠.
사도바울은 ‘有에서 有’, 이것을 肉(육)이라고 했고, 자기 증거가 아니라 ‘無에서 有’ 이것을 가지고 육에서는 나올 수 없다고 해서 ‘영에 속한 사람’이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너희들이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를 볼 수 없다.’(요 3:3) 유에서 유로 가는 것이 좋기는 좋아요.
‘나는 예수고 귀찮고 하늘나라도 귀찮고 나는 나만 있으면 돼.’ 문제는 하늘나라를 볼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배짱 센 사람들은 그까짓 거 하늘나라 안보면 그만이라는 겁니다. 아주 막가자는 이야기입니다. ‘하늘나라 안보면 그만이지 뭐. 지옥도 구경 좀 하자. 지옥도 한 번 들여다보고.’ 본인이 지옥 가겠다는 거예요.
다른 말로 하면 나는 나의 증인으로만 살겠다는 겁니다. 내가 이만큼 잘났고 내가 이만큼 훌륭하다는 것을 뽐내는 것으로 평생을 보내겠다는 거예요. ‘나는 너를 꺾었어. 나는 너보다 더 뛰어나. 너보다 목회 더 잘해. 너보다 아는 것이 다 많아.’ 그런 식으로 평생을 가겠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런 소리할 때 그 소리에 동질성을 이룰 때 그 사람은 그런 교회에 다니는 겁니다.
‘우리 교회는 우리교회 자랑하러 왔다.’ ‘그래? 자랑해라’ 그리 되려면 우리교회의 역사가 있어야죠. 왜? 역사라는 것은 ‘유→유’ 로 할 때 이 유와 유 사이의 연속성을 끄집어 낼 때 그 연속성을 역사라고 합니다. 이 역사를 묵사발 내는 것을 가지고 ‘묵시’ 라고 합니다. ‘우리 교회의 역사가 80년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 말은 ‘우리 교회는 육이거든’ 그 소리입니다.
뽐내겠다는 소리지요. 어떻게 80동안 그런 성과를 얻었는가? 행함이 작용했다는 겁니다. 어떤 행함? 철야하고 성경쓰기 하고 새벽기도 하고 교인들을 프로그램으로 돌리고, 행함이 작용했다는 거예요. 그러면 성경에 ‘책에 기록된 자만 구원 받는다’ 하는 그것은 뭐냐? ‘그런 것이 있었던가???’
지난 시간에 이야기 했듯이 우리는 이렇게 넓은 면이 보이는 카드처럼 서 있으면 안되고 옆으로 얇은 막처럼 서게 되면 우리자신의 면적은 사라지고 여기서 책에 기록된 것만 구원된다는 무에서 올라오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반면에, 강력하게 저항하는 세력, 다시 말해서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너는 의인이 될 수 있어. 너는 선 쪽에 설수 있다’고 하는 강력한 선악과 쪽에서 밀어붙이는 강력한 세력이 하나의 얇은 판막이 같은 우리의 몸으로 두고 서로 경쟁하는 그런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뭐라고 했습니까? 영적전쟁이라고 했습니다. 나의 내부에서는 행함으로 나를 의인 만들고 싶고, 악을 사라지게 하고 나로 하여금 의인으로 우뚝 서고 싶은 것이 있는데 그것이 뭔가 다른 이유 때문에 나로 하여금 그것을 ‘오호라 나는 곤고하다’ 라는 식으로 피곤한 존재로 만들어버리고 다른 것에 눈돌리게 하는데 그것이 뭐냐? ‘나는 주 여호와로 인하여 찬송합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행함과 관계없이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내가 감당해야 할 이 행함의 피곤한 면을 주께서 예수님을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서 우리에게 주어질 모든 죄를 그에게 담당시킴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여기에 선악적요소로서의 법을 따라는 것이 아니고 생명의 법을 따라서 구원받는다, 하는 이야기가 로마서 8장에 나옵니다.
생명의 법은 우리의 몫이 거기에 포함이 안 됩니다. ‘어떻게 행하느냐’ 가 생명의 법에 다시 개입할 수가 없게 되어 있어요. 이것을 저는 분화구로 표현했는데 이것은 설명이 필요하고 어렵습니다. 사건, 낯선 사건, 내가 예상 못한 사건, 왜냐하면 과거 - 현재 - 미래가 되어 버리면 여기서 미래라고 하는 이것은 항상 내가 예상한 것 가지고 미래가 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보통 하나님께 선택권을 넘길 때 항목을 서너가지로 정해서 줍니다. 불교 중에서도 유식불교 같은데 보면 꼭 네 가지를 정해서 줘요. 나는 저 빵을 먹을 수 있다. 나는 저 빵을 먹을 수 없다. 나는 저 빵을 먹을 수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다. 나는 저 빵을 먹을수 있는지 없는 다 알수 있다. 이 네 가지를 가지고 인간의 한계를 설명해요.
불교가운데 제 1기불교, 초기불교는 소승불교이고 제 2기불교는 중간불교이고 세 번째가 유식불교인데 ‘유식’이란 똑똑하다 할 때의 유식이라는 말이 아니고 의식만이 유일하다는 의미에서 ‘유식’ 이라고 한 겁니다. 의식은 남고 ‘색’은 다 날아간다는 말입니다. 그 유식불교에 있어서 인간의 자아는 없는 것으로 나오기 때문에 자아는 없으면서 윤회는 해야 되기 때문에 난처하기 짝이 없는 거예요.
자아는 없으면서 윤회는 해야 되기 때문에 윤회하는 그 자아는 뭐냐, 이런 문제가 생깁니다. 그래서 유식불교, ‘식’, 의식만 유일하다는 쪽에서는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두가지 층을 나눕니다. 하나는 외부의 층인 표층층이 있고 또 하나는 심층층이 있어요. 표층에서 심층으로 다시 심층에서 표층으로 왔다 갔다 하는 뭔가의 요소가 있어요.
그것을 가지고 종자(씨앗)라고 합니다. 인간의 씨앗이 있는데 과거의 모든 선악적인 행함이 업(카르마)이 되어서 그 업이 종자를 변화시킨다는 겁니다. 따라서 그 종자가 계속해서 괜찮은 종자가 되려면 41단계의 성화론적 수양을 해야 돼요. 다른 말로 하면 절에 돈내라, 그 이야기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그냥 ‘당신은 부처 됩니다’ 라고 하면 절에 안오잖아요. 믿음으로 구원받는데 교회를 왜 옵니까? 집구석에 있어도 믿음으로 구원되는데. 사람들을 교회에 불러낼때는 꼭 돈이 되는 쪽으로 불러내요. 훈련을 받아야 된다는 말은 학원수강료 내듯이 훈련비 내라는 그 말입니다. 구원받는 데는 교회가 필요 없지만 훈련받는 데는 교회가 필요하니까 교회 나올 때마다 식사비 천 원씩 내라는 그 말 아닙니까? 식사비 천 원씩.
식사비로 제하고 나면 별로 남는 것도 없겠지만. 이것은 교회가 아니고 불교입니다. 불교를 모르기 때문에 교회인지 절간인지 구분이 안 되어서 그런 거예요. 불교를 공부해 보면 ‘이게 교회네’ 이렇게 됩니다. 교회를 공부해 보면 ‘불교네’ 이렇게 나옵니다. 그래서 We are the world, 하면서 다같이 손을 잡는 거예요.
그래서 똑같은 거예요. 공이나 신이나, 성령이나 법칙이나 다 똑같은 거예요. ‘자기를 부인하라’를 가지고, 그것은 불교의 종자설과 관계있다고 하고 또 불교의 자비는 기독교의 아가페의 사랑과 관계되어 있다고 하고, 이렇게 다 연결해요. 사건이라 하는 것은 그렇게 예상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건은 어디서 사건이 터지는 줄 몰라요.
모르는데 사건이 터지고 난 뒤에 그 언저리에 흔적이 남아요. 마치 한라산의 백록담처럼 터져버리면 터진 구멍에 언저리로 흔적이 생기지요. 그 언저리 생긴 그것을 보고 아하, 사건이 터졌구나, 하는 것을 아는 겁니다. 그런데 이 언저리가 어떤 사건이냐 하면, ‘유에서 유’ 로 잘 나가다가 총맞은 것처럼 뻥, 하고 뚫립니다.
‘총 맞은 것처럼~’ 총 맞은 것처럼 뻥, 하고 구멍이 뚫려 버릴 때 사건이 벌어진 거예요. 잘 나가다가 뭔가 뻥, 하고 구멍이 뚫려버립니다. 그게 다니엘에 나옵니다. 다니엘에 ‘총맞은 것처럼~, 이런게 나오던가?’ 하시는 분, 보세요. 여기 나옵니다. ‘총’ 이라는 단어는 여기에 없어요. 그것쯤은 예상 하셨지요? 다니엘 8장입니다.
다니엘 8:27
“이에 나 다니엘이 혼절하여 수일을 앓다가 일어나서 왕의 일을 보았느니라 내가 그 이상을 인하여 놀랐고 그 뜻을 깨닫는 사람도 없었느니라.”
여기 보면 ‘이에 다 다니엘이’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어요? ‘혼절하여’ 왜 갑자기 혼절합니까? 왜 혼절하지요? 그냥 목사님 말씀 잘 듣고 꼬박꼬박 주일날 예배 잘 참석하고 오후예배는 예식장 가고, 한주간 잘 살다가 그 다음 주에 주일날 또 오고, 그러면 될것인데 뭐가 문제입니까? 봉사 하나도 안하고, 성가대도 안하고 주일학교도 안하고 아무것도 안하고 그냥 예배는 이벤트참여 해서 구경하듯이 하고 가면 되잖아요. 문제 될 것이 뭐가 있는데요.
이것은 우리교회의 예를 들은 겁니다. 아침 안 드시고 오셨다면 오전 예배 마치고 점심 드시고 가면 되고 아침 드시고 오셨다면 일찍 가시면 되고. 신앙생활 참 쉽죠 잉! 신앙생활 뭐가 어려워요. 오전 11시 예배 같으면 11시 15에 와요. 와서 설교만 딱 듣고 가면 돼요. 뭐가 어려워요. 그런데 여기에는 외부가 간섭을 한다니까요. 그래서 혼절해요.
혼절한다는 말은, 이것 참 하나하나가 다 어려운데, 아직 다니엘 1장도 안 들어갔습니다. 이런 것이 정리 안 되면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어제 밤늦게 의사선생님하고 이야기를 하는데 선생님이 자아를 이야기해요. 자아라 하는 것은 이미지입니다. 따라서 자아란 이미지이기 때문에 없는 것이고 있는 것이란 몸이 있는 거예요.
몸에서 일어나는 이미지가 그때 그때마다 자아라는 개념으로 힝상 급수정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지금 다니엘에게는 자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영혼이란 없는 거예요. 영혼은 몸이 가지고 있는 체험의 덩어리를 영혼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영혼을 만든 것이 아니고 몸을 만들었어요. 이것을 가지고 히브리적 사고방식이라 합니다.
헬라적 사고방식이란 ‘몸+영혼’ 이라 해서 이 영혼을 영혼불멸설로 당겨서 몸은 죽어도 영혼은 살아남는다고 해서 이 영혼을 자아의 대체물로 삼는 거예요. 이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종자설입니다. 이것이 헬라철학의 플라톤에게서 나왔다고 이야기들 하는데 이것은 플라톤 뿐만이 아니고 그 당시 부처도 마찬가지고 공자든 뭐든 다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은 몸을 만들어놨어요. 이 몸이 투과성을 가지고 있지요. 제가 아까 말한대로 이렇게(정면으로) 서지 말고 모로(옆으로) 서라 이 말이죠. 여기에 사건이 일어나니까 이 몸이 무슨 몸이냐 하면 혼절하는 몸이 되었어요. 혼절하는 몸인데 사람들이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내가 혼절했다’ 고 생각하는 거예요.
꼭 여기에 누구를 집어넣어요. ‘나’를 집어넣어서 자아 중심적으로, 이것을 주체라고 하는데, 자아 중심적으로 삼는 겁니다. 미셸 푸코가 그런 이야기를 했지요. ‘바람피운다는 이야기는 19세기에 처음 등장한 말이다. 그전에는 바람피운다는 말이 없었다.’ 사회가 법 감정을 새롭게 만들어준 거예요.
다윗이 바람피웠습니까? 사람들은 그 자아가 속해있는 사회적인, 문화적인 것들을 여기에 입력을 시켜놓고 이것 가지고 그 자아 중심으로 과거에 있는 선배들 사고방식까지도 다 뜯어 고치려고 해요. ‘이것은 인간도 아니야’ 라고 하면서요. 선배가 벌떡 일어나면 완전히 빠따 칩니다. ‘이게 어디서?’
하나님께서는 몸을 만들어 놨어요. 이 몸은 외부로부터 반응될 수 있는 몸으로 만들어서 외부의 반응에 따라서 몸의 운명이 결정 나는 그런 몸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 몸은 어떤 원인이 있으면 쇠퇴하게 되어 있고 어떤 원인이 있으면 이 몸은 천사와 같이 하늘에 속한 형상을 입게 되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 ‘흙에 속한 형상인 장막집이 없어지면 새로운 장막집이 있는데 그것이 하늘에 속한 형상이다’ 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13장에 ‘해와 같이 빛나리라’고 합니다. 빛난대요. 성형수술, 쌍커플, 필요 없어요. 태양이 쌍커플 수술 하는 것 봤습니까? 모세와 엘리야가 화장발로 변화산에서 그렇게 빛이 났습니까? 보톡스를 집어넣어서 당겨봤자 다른 쪽에서 다시 당겨져서 일그러집니다. 쌍커플 수술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쌍커플수술을 해도 어떤 외부적인 환경 때문에, 낯선 사건 때문에 수술했다, 그러면 됩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시켰다고 주님을 증거 하면 되는데 꼭 ‘나는 아름다워야 한다’는 자아 때문에, 자기의 과거로 인한 것 때문에 수술하니까 그게 죄라는 그 말입니다. 쌍커플 수술하는 그것을 탓하는 것이 아니에요. ‘왠지 하고 싶네’의 그 왠지가 뭐예요.
어떤 사건이 발생되었다 그 말입니다. 면접은 봐야 되지 눈썹은 뭉개졌지 그러니까 해야지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거기에 대해서 탓하지 않습니다. 방향성입니다. 수학에서 말하는 벡타입니다. ‘복음을 위해서 하자.’ 지금 몸에서 나온 사건인 ‘혼절한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제가 시간론을 다시 한 번 설명해 보겠습니다.
흔히 하는 대로 과거 - 현재 - 미래가 우리의 심리적인 시간관입니다. 어거스틴이 말한대로 ‘시간은 영원히 흐른다’고 했는데, ‘시간이 뭐냐고 물으면 모르지만 질문하지 않으면 아는 것이 시간이다’ 라고 이야기했어요. 이게 무슨 소리인지 모르지만 하여튼 그런 소리를 했어요. ‘과거 - 현재 - 미래’라고 할 때 문제가 이 과거, 현재, 미래를 누가 생산하느냐 하면 지금 우리 몸이 생산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 몸은 무슨 몸이냐 하면 ‘유에서 유’, 이것을 보존성이라고 하는데 사람은 계속 자기를 보존하려고 해요. 자아를 보존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몸이 보존하려고 하니까 덩달아서 자아는 이미지이니까 ‘아, 나는 계속 살아남아야 돼’라고 자아이미지로 여겨지는 거예요. 그러다가 갑자기 치통이 와보세요. 갑자기 이미지가 달라져요. ‘고마, 칵 죽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됩니다.
모든 것이 자아에 달린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이 몸에 달렸어요. 모든 것이 영혼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고 몸의 컨디션에 따라서 영혼이 좋았다가 나빴다가 달라지는 겁니다. 새벽기도 나와서 은혜 받아서 ‘야, 이제 내가 혼절했다’ 하다가 옆집 개가 대문에 똥싸놓은 것 보세요. 갑자기 은혜 받은 것 다 놓쳐 버리죠.
‘오늘 대판 따져야 되겠다. 누가 이기나 해보자.’ 인간의 영혼, 자아, 이런 것은 붙잡을 만한 것이 없어요. 몸은 또 우리가 붙잡지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몸은 외부환경에 의해서 변동되기 때문에 아무리 자기가 ‘졸거나 잠자서는 안 된다. 깨어라. 깨어라’ 해도 나중에 강의시작하고 10분 지나보면 그 때 이미 꿈속에서 ‘깨어라. 깨어라’ 하고 ‘아이고 잘 잤다’ 합니다.
사람은 자기 몸을 못 이겨요. 그래서 정신은 신체적인 장애라고 하지 않습니까? 정신적 장애가 아니고요. 정신이라는 말은 사실은 없는 말이에요. 두뇌에 문제가 있고 몸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런데 여기에서 과거, 현재, 미래라고 할 때 사실은 현재라는 것이 없고 ‘과거와 미래 그 사이를 뭐라고 할까, 에이 현재라 하자’ 그래서 현재가 된 거예요.
현재 지점에 와 봐야 시지푸스 신화에 나오는 산처럼 꼭대기에 올라가면 그 꼭대기의 면적이 거의 없어요. 올라가서는 곧장 내려가게 되어 있어요. 여기가 정상(현재)이라고 할 때 이게(올라가는 능선) 과거이고 이게(내려가는 능선) 미래라면 어떤 순간도 이렇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이 몸을 자기 몸이라고 하니까 시간 따라 같이 따라 가주는 거에요.
이번에 로마수영대회 보니까 카메라가 선수를 계속 따라가 주지요. 그러니까 여기서 시간이 흘러가니까 몸이 같이 따라가 주면서 저것은 내시간이야, 저것은 내시간이야, 하면서 자꾸 일방적으로 자기시간으로 잡아당기는 거예요. 왜? 시간이 있어야 원인과 결과를 예상하기 때문입니다.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나는 그것을 할 수 있다.’
그게 누구에게 최면을 거는 겁니까? 시간은 관계없어요. 자기가 자기에게 최면을 거는 거예요. 시험칠 때 동그라미 하면 정신 번쩍 차린다는 거예요. 해보라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에서 뭐가 문제가 되느냐 하면 이렇게 자기시간으로 잡아당기다가 길에 우연히 동창생을 만나게 되었어요. 이것은 부산에서 강의한 내용인데 다시 하겠습니다.
길에서 우연히 만난 고등학교 동창생을 보니까 행색이 초라해요. 그때 옥경이가 나옵니다. ‘어디서 무엇을 하면서 어떻게 살았는지, 그것도 밝은 등불이 아닌 희미한 등불아래서.’ 나이보다 훨씬 늙어 보이고 주름살도 잔뜩 보이는데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 물어보는데 물어보면 아무 말이 없어요. 옥경이가 아무 말이 없다고.
그때 무엇을 느끼느냐 하면 이 세상을 나의 시간으로 독점했다고 여겼다가 같은 나의 친구도 내가 내 시간만 몰두할 그 시간에 카메라처럼 같이 움직인 거예요. 그렇다면 지난 과거의, 예를 들어 전두환이 어떻고 박정희가 어떻고 그것이 나의 기억 속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동창생을 만나고부터 이 과거의 것은 나의 기억이 아니고 과거의 전부 속의 하나의 일부가 나의 기억으로 포착이 된 것 아닙니까?
지금 무슨 뜻인지 제가 말하는 취지를 모른다! 예를 들어 바닷가에 갔다. 바닷가에 가서 ‘아, 옛날에 사법시험 떨어지고 여기 와서 자살하려 했는데 지금 판사가 된 이 마당에 다시 여기와서 그 때 일을 회상하니 그 때 그렇게 했더라면 어쩔번 했는가’ 하면서 바닷가를 돌아 나오는데 그 옆에 어디서 많이 본듯한 여자가 보이는데 고등학교때 짝사랑했던 여자친구라는 말이죠.
‘너는 그동안 어떻게 살았나’ 하고 물었어요. 나에게는 그 바닷가가 옛날 젊은 시절에 시험에 떨어져서 낙심해서 찾아왔던 그 바닷가인 반면에 거기에 찾아온 옛날 여자친구는 결혼했던 남자와 이혼한 상태로 온 거예요. 그러니까 나는 이 전세상의 온 움직임이 단지 나를 위한 과거인줄 알았는데 이 얼마나 어리석고 무지몽매한지 이 나라는 몸이 과거를 잡는 것이 아니고 과거가 생산한 거예요.
누구를? 현재 오늘의 나를 생산한 겁니다. 그러니까 나는 나를 생산한 전부를 모르면서 어떻게 내가 누군지를 알 수가 있겠습니까? 진짜 무지 몽매하죠. 세상은 같이 흘러가고 있는데. 그러면 여기서 나오는 그 다음 물음은 뭐냐? ‘그렇다면 목사님, 전체 우주의 과거는 무엇이고 현재는 무엇이고 미래는 무엇입니까?’
그게 바로 다니엘이 혼절하면서 알았던 다니엘의 묵시적 계시였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걸 배우러 온거예요. 내가 이것을 알아서 내 몸의 소망을 어떻게 이루냐, 그것이 아니라 ‘나’라는 것은 이 전체의 해운대파도의 하나의 물방울에 지나지 않는 것을 알고, 그리고 그것을 아는데서 멈추면 안되고 도대체 이 전체가 어떻게 움직였기에 오늘날 나는 이모양 이꼴로 살아가고 있느냐?
땅은 한 15만평 밖에 안 되고 재산은 한 2천만 원쯤 밖에 안 되고, 애는 시험쳤다 하면 1등으로 합격하고 도대체 나는 어떻게 해서 이런 망가진(?)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가? 그러니까 사람은 자기 시간관만 가지고 있게 되면, 나를 이렇게 만든 세상을 탓하면서 데모하고 시위하는 식으로 되는 거예요.
그러나 전체를 알면 바로 내가 마치 부모를 탓하는 것이 어리석은 것처럼 내가 누구를 탓할 수 없고 현재 내가 이런 모습이 된 것에 대해서 모든 이에게 감사할 수 밖에 없지요. ‘너’가 있음에 오늘날의 ‘나’ 가 있게 되었다는 것을 알지요. 그게 바로 나의 과거, 현재, 미래 그 외곽에 있었던 낯선 시간대가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침범한 겁니다.
성령의 이름으로 침범한 거예요. 성령은 알파와 오메가 시작과 끝을 다 가지고 있거든요. 우리는 성령받기 전에는 육이에요. 육이라는 것은 뭐냐? 자기 시간밖에 몰라요. ‘교회 개척했다. 성공해야지.’ 이게 누구교회입니까? 내교회지요. 똑똑한 부교역자가 와서 설교를 잘하면 ‘저게 어디서 날아온 돌이 박힌 돌을…저 인간을 어떻게 정치적으로 조져서 매장을 시킬까’ 하는 그런 것만 계산 할 수 밖에 없어요.
평소에 그 똑똑한 부교역자가 안 오게 되면 천하의 한 경직 목사고 온유 그 자체고 자비 그 자체이며 (목소리 깔아서) ‘할렐루야’ 하고 항상 점잖고 항상 인자한 모습인데 자기보다 똑똑한 사람이 오니까 이것은 밤새도록 잠을 못자지요. ‘저놈을 새벽기도를 빼? 저놈의 입을 본드칠을 해서 붙여버릴까? 심방을 시키지 말어? 어디서 자아의 것, 어디서 내 것을 건드리느냐.’
이것은 제가 교회의 예를 들었지만 일반 약국을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공짜로 박카스도 주고 해서 할머니들한테 약국 인심 좋다고 소문났는데 바로 앞집에 큰 약국이 생겼어요. 그 약국은 담배도 팔고 온갖 것 다 팔아요. 졸지에 매상이 30퍼센트로 확 떨어졌을 때에, 그런 사건이 오기 전까지는 천하의 인자스럽고 성령이 충만하고 진짜 훌륭한 사람인데 갑자기 라이벌이 등장하니까 이것은 마귀도 그런 마귀가 없어요.
이것을 계열이라 합니다. 사건과 사건을 연결시키는 것, 계열이라 하는데 이렇게 해 볼 때 작게 나를 봤던 그 범위가 좁으면 항상 집중이 나에게 되지만 그 범위가 넓어버리면 서서히 자기가 해체되어 갑니다. 그러면 이 전체적인 시간은 어떻게 흘러가는가?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것을 합니다.
이 무, 여기서 능력이 올라오는데 여기서 능력이 올라올 때 두 가지가 올라와요. 유에서 올라온 것 말고 무에서 올라온 세계는 시작과 끝, 그 내용을 다 함유하고 있는 계시가 올라옵니다. 위에서 내려온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흠집이 나는데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시작과 끝을 예수님의 비밀, 예정하심, 예수님의 복음, 이것은 천국 가는 노선입니다.
이렇게 천국 가는 노선이 올라오는 반면에 하나는 악마의 지옥가야 될 노선도 올라오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 악마라는 것은 전부 영적인 존재가 되잖아요. 평소에 우리가 육적인 여기서는 관심이 없었지요. 이렇게 분화구처럼 사건화 되어서 와버리면 예수님의 천국만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지옥가야 될 악마도 이렇게 계시하고 있다는 그 내막이 우리에게 사건으로 주어지게 되면 이 ‘유’ 는 자아를 주장하다가 갑자기 막이 되어 버려요.
왜냐하면 주도권이 예수님도 우리보다 세고 악마도 우리보다 세잖아요. 더 센 분 때문에 자기 몸을 자기가 관리할 수 없는 처지에 있음을 비로소 알게 됩니다. 그게 뭐냐? 혼절입니다. 혼이 나서 기절할 일이라는 말이죠. 또는 이사야 같은 경우에는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라고 합니다. 또는 고린도전서 13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삼층천에 올라갔을 때 ‘내가 그 사람의 몸 밖에 있었는지 몸 안에 있었는지 모르겠다’ 이 말입니다.
사람들은 자꾸 예수님만 온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를 않아요. 영적인 내막은 악마가 지옥간다는 내용과 함께 다가오는 겁니다. 이것이 다가와 줘야 요한계시록의 내용이 하나의 신화나 전설이 아니고 그것이 지금 실제 벌어지고 있는 상황으로 믿어지는 겁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어제 잠깐 이야기를 했는데 다니엘에 두 가지 몸이 나왔습니다. 하나는 불타는 몸, 또 다른 하나는 불타지 않는 몸입니다. 그 다음에 사자에게 먹히는 몸, 사자에게 안 먹히는 몸. 여러분은 둘 중에 어느 몸이 되고 싶어요. 제가 묻는 것이 잘못이죠. 불타지 않는 몸이 된 것을 감사히 여기고 사자에게 안 먹히는 것을 감사히 여길 때 여기서 주의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기적은 내 몸이 괜찮은 몸이 되는 그것이 기적이 아니고 다니엘이 남이 꾼 꿈을 본인이 알아채는 그 기적이 내 몸이 불에 안타는 그것보다 더 월등한 기적이었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한번 불타지 않았다고 해서, 한 번 물위를 걸었다고 해서 또 다시 불에 안타고 물위를 걷는다는 보장은 없다 그 말입니다.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그거예요. 사건이 한번 괜찮은 사건이 왔다고 해서 그것을 좋아라 할 것이 없습니다. 사건은 두 번 다시 반복이 안 되는 것이 사건이에요. 홍해사건 두 번 다시 반복 안 되고 요단강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어떤 순간적인 기적보다도 영원히 고정화된 그것에 참여하게 되면 그것이 더 월등한 축복이 되겠지요.
다니엘은 하나님의 계시를 접함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사자굴에서 사자에게 먹히냐 안먹히냐 하는 것이나, 다니엘의 친구들의 불타냐 안 불타냐 하는 것은 하나의 결과일뿐이지 그것은 그들에게 문제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이런 결과를 낳게 한 더 원천적인 능력, 그것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이 더 감사할 뿐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다니엘이 봤던 그 계시하고 오늘날 성도들의 십자가를 안 그 계시하고 어느 것이 더 월등한 계시이겠습니까? 그거야 십자가죠. 그런데 왜 여러분들은 기뻐하지 않습니까? 만날 불에 타는지 안타는지 라이터 켜서 시험해야 되겠습니까? 다니엘이 기껏 알아봤자 세례요한보다 모르고 세례요한이 기껏 안 것은 신약시대에 성령 받은 성도가 아는 것보다 다 작은자고 더 몰라요.
우리는 마지막, 최종적인 것을 다 알아버렸어요. 따라서 아는 이것이 어느 정도로 좋으냐 하면 죽어도 괜찮을 정도로 괜찮아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 있다!’(갈 2:20) 그리스도안에 있는 사람은 동의하지만 그리스도 없는 사람은 무슨 말인지 모르지요.
고린도후서 4장 같은 경우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날마다 어려움 속에 집어넣는 것은 나로 하여금 죽음에 넘기우며, 내안에 생명 있다! 봐라 끄떡없지.’ 날마다 더 어렵고 육으로서 감당치 못할 시험에 빠지는 것은 그런 어려움가운데서 오히려 그리스도의 생명이 발산되는 방법으로서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40에 하나 감한 매를 세번씩이나 태장으로 맞고 강도의 위협도 당하고.
어제 권사님은 운전하다가 누구를 박으신 모양이에요. 이것은 도로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배가 난파되는 그 위험과. 실제로 사도바울은 로마로 가면서 큰 폭풍을 만났잖아요. 그러한 가운데서도 비로소 그동안 내가 몰랐던, 그런 어려움가운데서도 저 우주의 위대함보다 더 위대한 분이 나와 함께 있음을 비로소 체험할 수 있는 혜택, 기회를 하나님께서 주신 거예요.
그래서 우리 몸은 없어져도 새로운 몸이 온다는 것, 이것은 내 몸이 내 자아를 유지하거나 간직할 그러한 모든 것은 필요치 않아요. 쉽게 말해서 ‘너는 너에게서 손을 떼라’ 그 말입니다. ‘너의 시간관은 주님의 시간관에 맡기고 너는 손을 떼버려라.’ 뗄 때 이것을 가지고 회개라고 하지요.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수를 부으면서 눈물로서 예수님의 발을 씻길 때 그때는 이 여인에게는 남들의 시선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지요. 뭐냐 하면 죄를 알 때 그는 인생의 전부를, 진리를 해탈했습니다. 자기 죄를 알면 부처가 따로 없어요. 자기 죄를 알면 부처입니다. 자기 죄를 알면 모든 것을 통달해 버렸어요.
그런데 이 죄는 놀랍게도 자기가 지은 죄가 아니에요. 자기가 지은 죄가 아니고 물려받은 유산입니다. 찬란한 유산이죠. 위대한 유산이고. ‘모친의 죄 중에서 내가 태어났다는 것’(시 51) 그전까지는 어떤 것 때문에 힘들었는가 하면 내가 죄지었다는 그 문제 때문에 책임감 느끼고 마음 아파했던 그 모든 스트레스가 한 방에 날아갔어요.
인생이 뭡니까? 인생은 한방 부르스라고 하잖아요. 한방에 확 간다는 말이죠. 왜 지금까지 죄의 출처를 나로 삼았습니까? ‘나’가 죄의 출처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내가 죄인중의 괴수가 된 것에 대해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이게 말이 되는가 안되는가 지금 모르겠습니다만 내가 짓지도 않은 죄에 대해서 왜 내가 책임지려고 하느냐 말이죠.
왜 그랬어요. 멱살 잡고 따져 묻고 싶어요. 헌금 안했다고 죄의식하고 교회 한번 빠졌다고 죄의식하고 왜 그래요? 어디서 구원받는데 교회 몇 번 왔는지 그것을 묻습니까? ‘교회 몇 번 빠졌어? 주의 해.’ 다음 중 교회 몇 번 빠졌습니까? 그런 것을 시험칩니까? 천국갈 때 아주 멋지게 묘사한 대목이 나와요.
<엽기적인 그녀>라는 그 영화에 보면 전지현과 차태현이 나오는데 자신들이 당당하게 나이트클럽에 갈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머닝에서 증(주민등록증)을 꺼내서 내밀면서 들어가는 장면이 나와요. ‘봐라! 봐라!’ 나를 혼절하게 했던 그 묵시를 가지고 보여주는 겁니다. 내것은 가진 것이 없으나 나는 어디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 ‘그리스도안에소속되었습니다’라는 그 소속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게 스가랴에 나옵니다. 여호수아가 사탄이 보는 앞에서 새 옷으로 갈아 있습니다.(슥 3:1-5) ‘한번 봐라. 누가 저 사람을 더럽다고 하느냐’ 갈라디아에서는 그것을 ‘그리스도로 옷 입는자’(갈 3:27)라고 합니다. ‘누구든지 어른이나 어린애나 남자나 여자나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는 하나님의 자녀다’(갈 3:28,29)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은 걸치고 있는 옷이 ‘네 옷이냐 아니면 누구의 옷이냐’ 그 말입니다. ‘목사님, 예수님의 옷을 입었을지라도 그 옷이 더럽혀 진다면 곤란해지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옷은 어디서 나온 제품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것이 인간의 힘으로 더럽히려고 더럽히려고 해도 안 더럽혀지는 옷이에요.
더럽히려고 온갖 짓을 다 해도, 사창가에 가고 술을 처먹고 온갖 짓을 해도 조금도 더럽혀지지 않는 옷이에요. 아마 원단이 꽤 괜찮은 원단인 것 같아요. 왜 그런가 하면 영의 옷은 이미 십자가에 죽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죽음의 세력을 거뜬히 이겼음. 이라는 그 정보가 포함된 옷이거든요.
너를 정죄하고 너를 지옥 보내는 모든 바탕이 이미 삭제되었습니다, 라는 십자가구원을 거쳐서 주어진 옷이기 때문에 그 옷만 걸치면 불속이나 물속이나 어떤 죄속에라도 여러분들은 그곳이 천국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주님 주신 옷, 기름부음을 감사할 줄 모르고 어떤 목사를 본받아야지, 어떤 집사를 본받아야지, 그렇게 하고 있는데 본인들이 집사 되고 장로되어 보세요. 그게 본받을만한 집사 장롱인지.
장로 되어 보세요. 진짜 장로라는 것이 본받을만한 것이라는 것이 성립이 되는지. 왜 장로되느냐 하면 구원이 장로 되는 것과 무관하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장로된 거예요. 그 무관함을 알려주기 위해서 장로 되었기 때문에 이것이 전체과거지요. 전체과거가 나로 하여금 어느 교회의 장로 되게 한 겁니다. 뭔가 과거가 나를 밀어서 된 거예요.
그것을 좀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막장 드라마를 해 봅시다. 해변가에서 어떤 남자가 자기 옛날의 여자친구를 만났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 여자친구의 남편이 우리교회를 다니는데 정수기 팔려고 왔다는 거예요. 한, 두 번 다니면 정수기 하나 팔아주시겠습니까,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개척교회 하면서 한 사람이 아쉬운데 정수기 팔아주는 것이 문제인가 한번 뚫어보자. 저가 복음 들으면 오래 있겠지.’
여러분, 정수기 팔려고 온 사람이 오래 있는 사람 없습니다. 정수기만 팔면 대충 떠납니다. 다른 교회 가서 장사해야 할 것 아닙니까? 그 사람을 나쁘게 생각했는데 그 나쁘게 생각한 그 사람의 아내가 분명히 옛날 첫사랑이라고 할 때 그 사람의 과거, 현재, 미래에 마구 엮이는 사건들이 있는 거예요.
그럴 때 이 사람 입장에서는 자기 입장에서 엮였다고 생각하지만 저 사람 입장에서는 ‘왜 저 사람을 20년만에 왜 만났을까’ 라는 식으로 저쪽에서도 엮이는 거예요. 이 모두를 엮는 그 시간대, 그 시간대는 바로 성경말씀입니다.
우리는 ‘저인간은 나하고 무슨 인연이 있어서 이렇게 엮이는가?’ 라고 하지만 모든 엮임은 다 무엇을 이야기하기 위함인가 하면 복음과, 그리고 제가 아까 이야기했지요, 뭐가 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뒤에는 무서운 심판, 지옥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배치된 존재들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저는 이 교재에서 힘의 좌표라고 한 거예요. 마치 울렁울렁하는 물침대가 있다면 한 사람이 이쪽에 서 있으면 갑자기 저 사람이 압력을 받게 되겠지요. 세상은 혼자 살 수 없는 것이 저쪽에 어떤 일이 발생되면, 이것을 버터플라이효과(나비효과)라고 하는데, 상해에서 나비가 날개짓 하면 뉴욕에 태풍이 온다는 것, 초기의 세미한 변화가 예상밖의 엄청난 결과를 난다는 이론인데, 이쪽의 어떤 영향이 나는 몰랐는데 저쪽에서 어떤 일이 발생되어서 이렇게 나에게까지 왔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이 세상에서 내가 되고 싶은대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어요. 아니, 말을 다시 합시다. 내가 되고 싶은대로 되겠다는 것도 내가 결정한 것이 아니고 주위 사항이 그렇게 만들어버렸어요. 엄마는 바람나서 집 나가버리고 아빠는 술먹고 난동이나 부릴 때 ‘에라 모르겠다. 이제는 내 인생 내가 산다’ 라고 할 때 주위에서는 ‘와, 자존심도 대단하다. 저 젊은 나이에 저렇게 험한 일도 다한다’고 하면 ‘당신은 내 비밀을 알아? 내가 어디서 엮였는지 모르지요?’
남들 보기에는 괜찮을지 모르지만 자신의 뒤에는 남들이 모르는 자기를 엮어놓은 긴 과거가 있는 겁니다. 그 모든 과거는 사실은 한 구멍에서 나왔다. 그게 영과 육을 통한 구멍에서 나오는데 다니엘서에서는 성전이라고 합니다. 한 구멍에서 나왔다. 영적인 그리고 육을 통한 구멍에서 나오는데 그게 바로 어디냐? 다니엘서에서는 성전이라고 합니다.
지금까지는 성전이었는데 다니엘서에 와서는 그 성전을 인격화시켜요. 성전이 인격화되면 뭐가 되겠어요? ‘인자’가 됩니다. 그 인자되기 이전에 먼저 성전 없어도 하나님은 일을 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인자야’ 라고 호칭하는 인물이 두 사람 등장해요. 하나는 에스겔이고 하나는 우리가 공부하는 다니엘입니다.
성전 없다고 하나님이 일을 안 하시는 것이 아니고 새로운 형태의 성전이 바로 다니엘이고 그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이 꾼 남의 꿈까지도 다 알아챌 정도로 하늘과 땅이 통하는, 무와 유가 연결되어 있는 유일한 출처가 된다는 것을 다니엘이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면 다니엘에서 쏟아내는 그 성전 그것은 기존의 성전과는 달리 물이 흐르는 성전입니다.
물이 흐르는 성전이라는 말은 청계천에 교회 지었다는 말이 아니고 다시 말해서 예수 인자에게서 성전이 나온다는 말이고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 보면 그 성전이 누구입니까? 우리 몸이죠. 우리 몸으로 된 성전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우리 몸이 성전이라고 하니까 이 해석이 뚱딴지 같은 해석들이 나오는 겁니다. 담배피우지 말라는 등. 담배피우면 우리 몸의 구조가 시커멓게 되고 파괴된다는 것이죠.
그런 뜻이 아닙니다. ‘네 몸은 성전이니까 네 몸을 함부로 하지 말라.’ 이런 것들은 유교에서 ‘네 신체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니까 함부로 하지 말라’ 는 그것과 비슷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뜻이 아닙니다. 10분 쉬고 계속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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