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취]2009십자가마을여름수련회 제1강
[녹취]2009십자가마을여름수련회 제1강
이름 : 한윤범(IP:119.192.174.148)
2009십자가마을여름수련회 제1강
(강의:이근호 목사)
다니엘 12장 1절. 제가 얼굴을 못 들겠어요. 다니엘 12장 1절에, “그 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대군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 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그 때에 네 백성 중 무릇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얻을 것이라”
‘책에 기록된 자는 구원 얻을 것이다.’ 그럼 책에 기록되지 않은 사람은 구원 실패할 것이다. 책 외에. 그 책이라 하는 것은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말하지요. 이 책에 기록된 사람은 구원을 얻는다고 이야기하면, 우리의 행함은 뭐냐? 행함은 저주받습니다. 행함은 곧 저주죠. 자기의 행함을 어떤 이유든지 간에 “나는 이렇게 행해서 구원받고자 합니다.”라고 했다면 어떤 이유든 그 사람은 구원이 되지 못하고 저주받게 돼있습니다. 어떤 이유든 간에. 다니엘에 의하면.
그래서 다니엘에 나오는 인간의 행함에 대한 거부는 무엇에 대한 거부냐 하면, 인간의 몸에 대한 거부죠. 인간의 몸에 대한 거부는 인간의 모든 신학이라든지, 신앙 또는 학문, 이성, 여러 가지 자기 아는 것, 이런 것 전체에 대한 거부가 되는 겁니다.
그럼 여기 몸에 대한 거부라면, 여기서 구원받는 사람한테는 이 몸 말고 새로운 몸이 나오는데, 이 새로운 몸을 다니엘에서 ‘인자’라고 한다 이 말이죠. [환상 속에 그대]라는 제목인데 ‘환상 속의 그대들’이 아니에요. ‘환상 속의 그대’ 한 분이라고. 한 분밖에 없다.
새로운 몸이 등장했기 때문에 여기에 이 행함의 몸들은 환란 받아야 되고, 저주받아야 되죠. 책에서 나온 구원의 새로운 몸이 나오면, 이 몸의 능력에 의해서 새롭게 구원되는 사람이 나타나는데 다니엘 12장 2절에 보면,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책에서 어떤 분이 등장하고, 그분이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티끌 가운데, 죽은 가운데 있는 사람이 살아나는 거예요. 그러면 ‘티끌’의 특징은 뭐냐 하면, 행하고 싶어도 아예 행할 수 있는 그런 입장이 못 되는 거죠. 본인이 티끌이라고 이야기한다면, “저는 행할 수도 없는 입장입니다.”라는 그런 같은 생각이 되는 겁니다.
티끌로 하나님은 새로운 부활 주님께서는 우리를 티끌로 넘겨줌으로 말미암아 ‘행함으로 구원받습니다.’라는 그런 이야기가 두 번 다시 나오지 않도록 일소해버리는 식으로 다니엘이 전개되는 거예요.
이러한 사람 다니엘은 몸에 대한 개념 같은 것, 몸에서 자아가 나오고, 인간이 나오고, 여러 가지 나오는데 이러한 개념들이 새로운 몸에서 나오는 이러한 자아라든지, 이러한 인간상, 이거는 하나님 은혜로 주어지는 그러한 개념이라면, 이 밑에 있는 것은 인간의 행함에 준해서 일어나는 개념이기 때문에 전부다 여기서 거부당하는 것입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여기 인간의 행함을 주장하는 몸에서 나오는 자아라 하는 것은 반드시 뭐냐 하면, 영어로 'I'죠. ‘내가’를 꼭 집어넣어요. 예를 들어서 ‘빨갛다’고 한다면 빨간 게 들어오면 되는데 “‘내가’ 빨갛다고 본다.” 꼭 자기를 집어넣어요.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비가 온다’고 하면 그냥 비가 오는데, ‘바람이 분다’하면 바람이 불면되는데, 꼭 ‘내가 바람을 맞는다. 내가 바람인 줄 안다’라고 거기다 꼭 ‘나’를 집어넣어요. 나를 집어넣는 게 문제가 돼요.
뭐든지 그래요. 여러분들이 음식이 맛있을 때 ‘음식이 달콤하다.’ 하면 몸에 달콤함이 다가오는데 이걸 표현할 때는 ‘내가 달콤해.’ 꼭 자기 자신을 집어넣어요. 이거는 반칙입니다. 왜 자꾸 자기를 집어넣느냐 하면, 그게 행함을 주장하는 이쪽 세계에서 습관화됐어요. 날 때부터 습관화돼버렸어요.
‘예수님이 믿어진다.’ 하면 되는데 ‘내가 믿습니다.’ 이렇게 나온다고. ‘내가 믿습니다.’ 하니까 성경에 나오는 그 믿음이 아니라는 거죠. 오늘 아침도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반드시 ‘당신은 예수 믿습니까?’라고 믿음 속에다 당신을 넣을 수가 없어요. 질문을 이렇게 해야 돼요. ‘누가 믿게 했습니까?’ 이렇게 주체자가 너, 나 말고 빠져나가야 되는데 꼭 사람들은 버릇이 되어서 ‘내가 믿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내가 믿습니다.’ 하니까 그 믿음은 어디에 해당되느냐 하면, 그 믿음은 믿음으로 가기 못하고 여전히 행함에 소속돼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오직 책에 기록된 사람만 구원하기 위해서 다니엘서를 통해서, 성경 전체를 통해서 무슨 작업을 해야 되느냐 하면, 이 행함에 속한 모든 것을 제거하는 그 작업에 나서는데 그 작업 중에 하나가 다니엘입니다. 다니엘, 스가랴. 모든 행함을 제거하는데 역사가 필요했고, 그 역사는 행함을 죽이고 오직 책에 기록된 사람만 구원한다는 것을 돋보이게 하는 그러한 작업을 시작하게 되죠.
그렇다면 이 다니엘에 방금 제가 이야기한,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만 구원받고, 행함을 주장하는 사람은 유황불에 들어간다는 이 원칙을 가지고 제가 방금 어떤 이론을 제시했느냐 하면, 행함에 대한 모든 것을 역사를 통해서 다 제거한다는 주장을 제가 방금 펼쳤지요.
그렇다면 이러한 주장을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전체를 이걸 펼치는 성경책인데 그중에 하나 요한계시록 같은 경우에 보면 이런 게 있어요. 여러분, 우리 집에도 김치냉장고 있는데 김치냉장고에 김치 넣을 때 박스에 담아서 박스를 층층이 담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에서 3장. 그 다음에 4장에서 7장. 1장에서 3장에서는 그 당시 실제 역사였던 역사 교회였고, 4장에서 7장까지는 일곱인. 8장에서 11장까지는 일곱 나팔. 그 다음에 12장에서 14장까지는 여자의 아들. 그 다음에 15장부터 17장까지는 일곱 대접. 그 다음에 18장부터 19장까지 바벨론 제국. 저도 대충 씁니다. 성질이 급해서. 그 다음에 20장에서 22장 보면 천년 왕 노릇하는.
이것이 뒤에는 점선으로 돼있어요. 김치냉장고에 박스를 쌓는데 이것이 4장부터 7장까지를 이렇게 더 쌓으면서 점선이 여기까지 나오고, 그 다음에 이쪽의 일곱 나팔 이쪽 오면서 점선 이건 길어지고, 이건 짧아지고, 여자의 후손 중간 쯤 되고, 점선이 계속 나오고. 15장에서 17장 마찬가지 멀어지고 점선 이렇게 나오고. 바벨론 제국 할 때는 점선이 이만큼 나오고, 이만큼 타고, 20장에서 22장은 여기서 여기까지 다 차면서 점선은 이만큼 나오고.
여기서 말하는 점선은 뭐냐 하면, 이게 역사(알파요 오메가) 시작부터 마지막 끝 지점을 성경에서 이야기할 때 뭔가 마치 레일을 조금씩, 조금씩 층층이 당기는 것처럼 처음에 역사에 대해서 강조할 때는 이 뒤에 나오는 이걸 남겨 놓으면서도 전체를 이야기하면서 남겨놨다가 점점 잡아당겨버리면 끝에 이를수록 끝부분이 강조되면서 초반부는 점선으로 남겨놓는 거죠. 점선으로 지운 거예요. 앞쪽에서는 역사적인 것이 강하다면 뒤에는 묵시적인 거죠. 초역사적인 묵시적인 것이 굉장히 강하면서 김치냉장고 전체를 꽉 차게 만드는 거예요.
그러면 요한계시록 첫 장 보면, 나는 알파요 오메가다. 나는 시작과 끝이다. 요새 가수 노래의 가사를 들어 보니까 A부터 Z까지라는 가사가 있어요. 혹시 아십니까? 얼른 봤어요. A부터 Z까지. 그게 알파요 오메가를 따라한 모양이라.
요한계시록 이걸로 끝입니다. 같은 전체를 이야기하면서 밑바닥에선 역사에서부터 점차점차 역사가 소멸되고 묵시로 진입하는 단계로 올라가는 겁니다. 올라갈 때마다 역사에서 묵시로 하나님께서 잡아당길 때마다 여기서 극렬한 저항이 일어나는데 그 저항의 속성이 뭐냐? 바로 행함, 행위가 되는 거예요.
역사를 쥐고 있는 사람을 묵시에서 잡아당기니까 왜 묵시에서 잡아당기느냐고 붙잡는, “우리 행함이 뭐가 문제인데? 우리는 최선을 다하고 있단 말이야. 왜 우리 행함을 부정하고 왜 책에 기록된 자만 구원받아. 이건 있을 수 없어.”라고 붙잡는 그 강력한 저항, 뭔가 역사를 붙잡는 어떤 악한 세력이 있어요. 그 역사를 붙드는 악한 세력이 역사를 떠나서 묵시로 모든 것이 이전하는 것에 대해서 강력한 반발을 일으키는 겁니다.
그들은 가면 갈수록 극렬해지는데 이 행위를 가지고 ‘죄’라고 하는 거예요. 그럼 죄라 하는 것은 비밀을 가리는 겁니다. 무엇이 죄냐 하면 묵시적 비밀을 가리는 게 죄가 되는 거예요. 비밀이라 건 하늘에 감추어진 예정된 뜻이 비밀이고, 복음이고 그런데 그것을 뭐로 감추느냐 하면, 행위로 인간이 최선을 다한단 말입니다. “우리는 나름대로 열심히 해요.”라는 식으로 자꾸 그것을 희석시키려 할 때 그게 죄가 되는 거예요.
이 죄가 묵시에 가까울수록 강렬해지면서 뭐가 딸려 나오느냐 하면, 묵시적 안이 나와요. 다시 말해서 역사에는 등장하지 않았지만 죄가 증가하면 증가할수록, 행위를 강조하면 강조할수록 뒤에 배후에 숨어있던 악한 묵시적 악마가 서서히 정체를 드러내고 있는 겁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정치적이에요. 군주, 짐승.
다니엘에 보면, 짐승이 바다에서 올라왔다는데 바다의 내용에 뭐가 있는지는 사람들은 모릅니다. 이스라엘이 뭘 갖고 있느냐 하면, 비밀을 갖고 있죠. 이스라엘이 이방의 풍습을 따라갔고 이방의 종교를 따라감으로 말미암아 비밀로 간직한 것을 스스로 놓아버렸죠. 다시 말해서 행위로 돌아서니까 거기에 대한 하나님에 대한 묵시적 반발이 점점 더 하나님의 행위에 대해서 한층 더 업그레이드된 계시가 계속 주어지죠.
이 계시가 뭐냐? 묵시에 가까운 계시가 주어지면서 여기에 대한 그들의 숨겨져 있던 노골적인 신에 대한 반발 같은 것이, 은혜에 대한 반발 같은 것이 점점 더 힘을 얻으면서 달려들 게 돼있어요.
이런 경우는 요한계시록뿐만 아닙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을 보면서 모든 목사들이나 교인들이 제일 답답해하는 것이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종말에 대한 어떤 이야기를 할 때 한꺼번에 오늘 이 사건, 다음 사건, 다음 사건 해서 마태, 마가, 누가 이건 틀리지 않고 공히 시나리오 짜서 한 드라마의 한 대본처럼 깔끔하면 될 텐데 이건 성전 무너지는 이야기하다가, 하늘에 별 떨어지는 이야기하다가 뒤죽박죽이 되어서 사람이 이걸 보고 이해하라는 이야기인지, 성경 보지 말라는 이야기인지 성경 마태, 마가, 누가 기록하면서 마무리가 깔끔하질 못해요. 성경 본 사람은 다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이런 경우는 마태, 마가, 누가복음만 아니고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도 마찬가지고. 왜 마무리, 우리가 제일 궁금해 하는, 세상을 어떻게 끝장내는가에 대해서는 차라리 [휴거]란 소설이 더 멋있잖아요. 얼마나 그 소설이 정리 잘 돼있습니까? 1992년 10월 28일인가요? 날짜는 모르겠는데 이장림 씨가 재림한다고 해요. 재림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돈이 뭐 필요하겠습니까? 그래서 돈을 냈지요. 그런데 이장림 씨 본인은 45억인가 따로 꿍쳐놨어요.
다시 이야기할게요. 사람들이 뭐든지 자기 몸에, 바람은 우리가 만듭니까? 바람은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바람이 불잖아요. 제 말이 맞죠. 바람이 그냥 불어오잖아요. 꽃이 빨갛다. 빨간 게 다가온다고. 모든 게 다가오게 돼있어요. 내가 정리할 이유가 없다 이 말이죠.
그런데 마지막 때에 대한 계시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거예요. 사람들은 잘못된 자아상이 있어서 하나님의 계시를 자기가 정리하려고 해요. 바람이 오면, 이건 해운대에서 온 바람이고, 이건 창원에서 온 바람이고, 이건 부산에서, 이건 대구에서 온 바람이고. 바람을 우리가 정리할 수 있습니까? 바람은 마음대로 임의로 부는데. ‘바람은 못해도 우리 인생은 내가 관리한다.’ 이건 말이 안 돼요.
대구 강의할 때 그런 강의를 했지요. ‘바람 불어 좋은 날’ 사람들이 마루바닥에 기도하고 있는데 바람이 휙 불었어요. 바람이 부니까 벽도 날아가고 지붕도 날아가고 다 날아가 버렸어요. 남은 것은 바닥에 기도하는 사람만 남았을 때 과연 이게 교회인지, 절간인지 어떻게 구분하느냐?
바람이 불어서 지붕이 날아갔다 하면, 진짜 신자 같으면 이게 어디에 해당되느냐 하면, 바로 이 세상에 오직 책에 기록된 자만 구원된다는 그것과 관련되어서 바람 불던, 비바람 오던 간에 책에 기록된 사람은 구원받는다고 이해하면 되는데, 바람이 불고 비바람 치니까 지붕이 날아갔다 합시다. “이런 환경에서 어떻게 기도하라고 합니까?”라고 대들면 이건 무엇 갖고 대드는 겁니까? ‘내가 기도한다.’를 가지고 책에 기록된 자만 구원한다는 거기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게 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우리가 숨겨진 죄가 되는 겁니다.
죄라 하는 것은 왜 나를 이런 아이스박스 채우듯이 채워져 있는 요한계시록의 바람 같은 질서를 왜 내가 구태여 정리해야만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정리 안 해도 되잖아요. 이 요한계시록 바람이 와서 나를 구원하는데 그 방식은, 오직 근거는 뭐냐? 다니엘 12장 1절의 말씀처럼 책에 기록된 이유 때문에 이 요한계시록 전체가 바람이 오듯이 나에게 부딪친다. 이렇게 믿고 받아들이면 될 텐데 왜 내가 이걸 나란 인간을, 자아를 집어넣어서 정리하려고 하는가? 정리 의도가 뭡니까? 수상하기 짝이 없잖아요. 정리해서 뭐 할 건데. 내가 마지막 때에 알아야 되겠다. 네가 뭔데, 네가 왜 알아야 되는데?
모든 부는 바람도. 예수님하고 제자들 하고 갈릴리 바다 갈 때 제자들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어떻게 바람과 파도도 예수님께 순종하는가? 이런 이야기죠. 그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곳에는 바람과 파도도 순종하는데 왜 나라는 몸한테는 바람과 파도가 순종 안 하느냐 이 말이거든요.
왜 바람과 파도가 우리에게 순종 안 합니까? 구원받는 책, 생명책은 우리와 관련된 것이 아니고 그 리스트 작성할 때 하나님하고 숙의해서 적어놓은 책이거든요. 그러니 구태여 나에게 의견을 들을 이유가 없지요.
정낙원 목사님이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풍랑이 이는데 예수님이 주무신다. 제자들이 할 것은, 바람이 불고 배가 뒤집어지면 각자 모포 들고 예수님 옆에 베개 펴고 같이 자면 돼요. 자면 어떻게 돼요? 바람이 불어서 배를 뒤집겠지요. 뒤집으면 예수님도 죽고, 제자들도 죽잖아요. 그게 바로 다니엘 12장 2절에 나오는 티끌로 돌아가잖아요. 티끌로 돌아가는 게 드라마 끝이 아니잖아요.
다니엘 12장 2절에 의하면 티끌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 된다? 다시 도로 살아나오잖아요. 그러면 됐잖아요. 세상 모든 걱정이 다 끝나버렸죠. 뭐가 문제에요. 가만있어도 될 문제를 왜 구태여 ‘나’란 것을 집어넣어서 왜 내 몸도 아니고 주님의 몸인 우리 안에 말썽을 일으킵니까? 왜 자꾸 말썽을 일으켜요.
엄마가 잡채를 만들어주면 그냥 곱게 먹으면 될 텐데 괜히 요리도 못하는 초등학교 2학년 딸애가 가서 한다고 해서 소금 더 넣고, 후추 넣을 때 안 넣을 때 구분도 안 되는데 넣고, 국에다 정종, 소주 넣으면 그래서 그게 음식이 되겠습니까? 바로 이렇게 뭔가 인간이 하나님이 다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책에 기록된 자가 구원받는다는 다니엘 12장 1절에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꼭 ‘내가’ 나서야 되겠다하는 것은, 바로 인간 몸을 좌우하는 다른 세력이 인간에게 있다 이 말이죠.
그걸 하나님께서 우릴 통해서 끄집어내려고 하는 거예요. “악마야. 그만 숨고 나와. 숨바꼭질할 시간 끝났어. 세상은 끝났어. 빨리 나와. 숨지 말고. 바다에 있는 놈. 나와 빨리.” 기어 나오니까 짐승이에요. 다니엘 전체를 보면 완전히 쥬라기 공원이에요.
그러면 이러한 요한계시록 전체의 흐름이 이렇습니다. 요한계시록뿐만 아니고 예수님께서 종말을 이야기할 때 전부다 층층이 구조로 다 이야기한다고. 가면 갈수록 묵시는 가깝고, 역사는 희미해지면서 점선으로 남겨버리죠. 처음에는 역사로 시작하고 반드시 예루살렘 성은 불탈 것이다. 해놓고 뒤에 이야기하는 것 보면, 같은 예수님 이야기해보면 뒤에는 뭐냐 하면, 하늘에 별이 떨어지고, 인자가 구름 타고 오고. 층층이 묵시에 가까운 거예요. 하지만 층 하나가 더 보태는 것이 아니고, 하나하나가 전체를 전부다 커버하죠. 시작부터 끝까지 전부다 커버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을 그릴 때 대충 선으로 그리면 이렇습니다. 사람을 제가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 이걸 포커하는 카드로 봅시다. 카드를 보면, I am a card. 나는 카드다 하잖아요. 눈, 코, 입 있다면, 난 카드다. 그런데 이것은 인간들이 일방적으로 이렇게 생각해서 성경을 이야기하니까 모든 성경을 일단 자기를 거쳐서 해석해야 된다고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카드를 옆으로 세워보세요. 하나의 필름처럼 막이 되겠죠. 막이 돼버리면 이렇게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것인 이렇게는 보입니다. 이게 뭐냐 하면, 양쪽에서 서로 노리는 세력이 있어요. 이쪽은 악마가, “너는 내 거야.” 이쪽에서는 하나님께서는, “너는 내 것이야.” 이래 되는 거예요.
이게 막으로 돼있으니까 서로가 잡아가려고 하는 거예요. 이것은 계속 나는 카드다. 혼자 카드죠. 악마는 이런 고백을 듣지도 않습니다. “너는 무조건 내 거야.” 우리 주님도, ‘나는 뭡니다. 나는 무엇, 무엇입니다.’ 이런 걸 거부해요. 너는 값으로 산 내 것이다. 고린도전서 6장 20절. 우리는 만날 이렇게 되는 거예요. 정면으로 ‘나 여기 있습니다. 성경 해석, 내가 알아야지.’ 만날 일단 자기를 거쳐서 하나님께 영광 돌린답시고 자기를 일단 거쳐야 된다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이걸 이렇게 세워버려요. 옆으로 세워버리니까 이거는 두께가 1미리도 안 되지. 마치 LCD라. 얇은 티브 같아.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 필름이 너무 얇기 때문에 여기다 어떤 이미지를 담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이렇게 정면으로 봐버리면 모든 게 이미지가 돼요. 이미지가 뭐냐? 상상이고, 착각이고, 환상이고 만날 공상하고 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여기는 아무것도 없는데, 이래 되니까 여기서 자기가 상상한 것 가지고 고민하고 걱정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이 카드처럼 옆으로, 앞으로 보게 되면 여기에 시간관이 작용해요. 이것은 여러분들이 피곤하더라도 꼭 알아둬야 됩니다. 이 시간관을 모르면 묵시개념이 풀리지 않아요.
인간의 시간관이 뭐냐 하면, 쉽게 하겠습니다. 쉬운 것부터 어려운 것으로 나가겠습니다. 처음에 과거로부터 현재로부터 미래로 나아갑니다. 이게 인간의 시간관이에요. 이 말은 과거에 있었던 것에 그것이 마일리지 쌓여서 그게 현재가 되고, 현재를 통해서 미흡한 것을 채운다는 식으로 미래로 나갑니다. 이 말은 과거가 반드시 원인이 되고, 그 원인에 대해서 내가 어떻게 행함을 하게 되면, 미래에 내가 기대한 것이 획득할 수 있다. 이게 인간의 시간관이에요.
그러면 나라 하는 것은 누가 만드는가? 과거의 노동한 것이 지금이 내가 된다는 거예요. 이렇게 아이 엠 어 카드가 될 때 이렇게 보고 있을 때. 이걸 옆으로 딱 돌려버리면 무엇이 날아가 버리느냐 하면, 원인과 결과의 소속이 전부다 하나님 소속으로 바꾸어버립니다. 여긴 폭이 좁아서 이런 시간관을 가질 여유가 없어요. 이거는 막 통과해버려요.
참새가 자기 먹고 살기 위해서 자기 창고를 누구한테 하청한 적 있습니까? 없지요. 참새끼리 모여서 저 곡식을 많이 먹기 위해서 이쪽에 경남 지방에다 창고 하나 짓자. 마태복음 장에 보면 그런 게 있어요? 참새가 창고 있습니까, 없습니까? 창고 없지요. 그러나 누가복음 보면, 어리석은 부자는 창고를 짓지요. 창고를 짓는다는 말은 다시 말해서 이렇게 옆으로 보지 않고 이렇게 보는 거예요.
이렇게 보니까 창고 있음이, 창고에다가 자기 미래를 담아버려요. “내 영혼아. 걱정하지 마라. 내 장래까지 창고의 곡식으로 넉넉하게 먹고 살 수 있다.”라고 일방적인 자기의 과거, 현재, 미래를 여기다 다 담아버리는 겁니다. 그런데 이걸 카드를 옆으로 돌려버리면 여기에 실을 게 뭐가 있어요. 폭이 좁은데.
그럼 여기 양쪽에서 마귀는 마귀대로,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서로 통과하겠지요. 통과하게 되면 현재 나라는 입장은 뭐냐 하면, 마귀와 악마가 하나님과 거래한 악마는 이런 것이고, 하나님은 이런 분이라는 걸 보여주는 하나의 증거물로 유지될 뿐입니다.
이렇게 되면 마귀도 사라지고, 하나님도 사라지요. 왜? 마귀는 내 노동의 원인으로써 하나님을 안 만들어냈습니다. 오랜만에 어려운 말 해봤습니다. 하나님이 내 원인이 될 경우에만 포착이 돼요. 왜냐하면 우리는 내가 내 노동의 원인이 되지 아니하면 어떤 결과도 우린 인정할 수 없습니다.
데카르트란 사람이 이런 이야기했어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내가 생각한다는 자체를 봐서 딴 건 없애도 이건 없애지 못한다. 나는 존재한다. 그러면 당신이 죽으면, 내가 죽으면 하나님도 없다. 내가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원인을 주니까 하나님이 살아있는 거예요.
그럼 내가 만약에 치매 걸렸다. 나이 구십 됐다. 하나님이고, 예수고 간에 완전히 두뇌 시냅스가 망가져서 정신 차리지 않을 때는 누가 뭐래도 목사님이 와서 사도신경 해도 그 사람은 그렇게 심방 갔던 목사님도 “누구신지?” 실제 있었던 사실이에요. 찬송가 틀면, “찬송가 말고 나훈아의 ‘무시로’ 틀어봐라.” “권사님이 제일 좋아하시는 찬송가 하는데.” “듣기 싫다.” “예수님께서.” “예수 이야기 나한테 이야기 하지 마라.”
그럼 그전에 예수, 하나님이 뭐냐 하면, 내가 생각했던 하나님과 예수란 그것이 나에게 원인 제공했기 때문에 정보가 누적이 된 겁니다. 누적이 됐기 때문에 내가 아프든지 죽어버리면 내 몸과 같이 그것도 홀라당 날아가 버리는 거예요. 그걸 줄여서 이야기하면 내가 생각한 하나님이 아니라면 어떤 하나님도 나는 거부한다 이 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 우선이 아니고 내가 우선이다. 다른 말로 하면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 내가 스스로 있고 예수, 하나님은 창조물이에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아이고 목사님. 딴 데는 몰라도 저희들은 안 그렇습니다.” 그런지 안 그런지는 복음을 전해보면 알아요. “여러분, 어떤 행위도 관계없이 생명책에 기록된 자는 구원받습니다.” 이렇게 할 때 만약에 평소에 행위에 염두에 둔 사람은, “그러면 내 행위가 소용이 없네요.” 소용 있고, 없고 물을 가치도 없죠.
그럼 제가 무척 기분 나쁜데요. 당신이 기분 나쁜 게 이 자리에서 그런 이야기를 왜 하느냐 이 말이에요. 내가 뭐뭐 하다는 게 성경책에 없잖아요. 아까 요한계시록 안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내가 기분 나쁘다, 기분 좋다.’ 이런 것은 성경에 없는 이야기입니다.
바람이 오면, 바람이 분다 하면 될 걸 꼭 사람들이 뭐라 하느냐 하면, 내가 바람 부는 것을 안다. 꼭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해요. 기어이 남은 몰라도 나는 안다고 자기를 집어넣어야 돼요. 자꾸 주님께서 뾰족하게 세우려고 하는데 우리는 이상하게 무슨 더러운 버릇이 있는지 자꾸 정면으로 보려고 해. 바로 서, 바로 서. 만날 그런 거예요.
이렇게 서면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 은혜고 나는 내 것이 아닙니다. 또 이렇게 펼치면 과거에 이런 일을 했으니까, 내가 이런 기도를 했으니까 이런 응답을 받는구나. 또 여기다 자기 시간론을 집어넣어버려요. 그러니 묵시가 역사를 잡아당길 때는 몸하고도 싸워야 되지요, 시간론하고도 싸워야 돼요. 싸울 게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성경의 해석 가지고도 싸워야 되고.
또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다니엘 9장에 보면, 70이레가 나와요. 여러분들이 제 강의를 들을 때 물어봅시다. 제가 그냥 강의 나가면 여러분 몰라도 나가기 때문에. 70이레가 여러분들이 아는 경우에만 70이레가 들이닥칩니까, 몰라도 70이레가 진행됩니까, 어느 쪽입니까? 일 번, 알아야 70이레가 진행된다. 아니다. 내가 몰라도 진행 된다. 몇 번입니까? 이 번 이잖아요. 여기에 나를 집어넣을 필요가 없지요.
‘이레’라는 것은 창조단위에요. 창조단위는 누구만 해석할 수 있느냐 하면, 창조에 관여한 몸만 해석이 가능해요. 왜냐하면 여러분들이 한 살 때 기억은 누가하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기억 못해요. 여러분의 엄마가 기억하죠. 왜냐하면 창조자기 때문에 기억해요. 한 살 때 어떻게 행동했느냐 해석을 누가 해요? 엄마가 하는 거예요. 한 살 난 애가 해석을 못합니다.
애가 열 살 쯤 되어서 엄마한테 들어요. “한 살 때 너는 많이 울고, 밤새도록 울었단다.”라는 해석을 받고 난 뒤에 열 살 때 몸이 열 살 때 기억을 가지고 엄마가 이야기할 때는 한 살 때 이야기를 했는데 엄마 말고 딴 몸이 되는 자기가 자기 몸을 가지고 그걸 재해석해버려요.
울어도 늘 울었겠느냐. 아마 울어도 신사답게 울었겠지. 그래서 친구한테, “나 한 살 때 울었단다. 운 사람은 노래도 잘하고 머리도 좋데. 아마 울어도 그렇게 엄마 애 먹이지 않았다 해. 점잖게 울었을 거야.” 마음대로 해석하는 거예요. 그렇게 해석할 수 있는 자기가 권한이 없어요. 그리고 엄마가 말하기를 “너는 한 살 때 심하게 울었다.”라는 것은 엄마 평생에 혼자 지니고 돌아가실 때 혼자 알고 그냥 돌아가셔요. 왜냐하면 제 삼자한테 이야기해봤자 전부다 왜곡된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기 때문에 해봤자 소용없는 겁니다.
성경 자체는 70이레란 해석은 주님만 해석하지 다른 사람은 해석을 못한다가 아니라 해석할 권리가 없어요. 그러면 70이레에서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면, 뭐든지 일이 벌어지면 ‘아 이게 70이레구나. 70이레에 포함되었구나.’ 이렇게 알면 되는 겁니다. 이게 최고의 멋진 해석이에요.
70이레란 것은 7과 62, 1이 되거든요. 이렇게 되니까 사람들은 말하기를 7 다음에 62되고, 62 다음에 1되는 줄 알고 있습니다. 그게 아니에요. 이레가 붙어있고 앞에 숫자가 있으면 이거는 전체가 김치냉장고 안에 있는 박스처럼 전체가 7이레고, 그 다음에 밀려서 62이레가 되고, 여긴 점선으로 이만큼 남아있겠지요. 또 밀려서 전체가 한 이레가 되면서 전체를 포함하고 있어요.
왜 그러냐 하면, 창조를 며칠 만에 했지요? 창조를 칠일 만에 했잖아요. 칠일 만에 창조하신 분이 70이레라는 계시를 내렸습니다. 그러면 해석을 할 때 칠일 만에 창조했던 그 원리를 가지고 70이레를 분명히 여기서 이 세상에다 적용시킨다고.
그러면 여러분들이 칠일 동안에 창조할 때 그 창조의 뭔가 방향이 있는 걸 아십니까? 점차점차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방향이 이어집니까? 처음에는 천지창조, 자연물에서 하다가 점차 가까이 갈수록 어디까지 가느냐 하면, 마지막 최후에 창조된 어떤 인물에 관심이 있죠. 창세기 1장 안 읽어보셨습니까? 인물에 있으면서 육일 째쯤 되면 코로 호흡하게 돼있습니다. 육일 째 난 같은 동생들 그러니까 같은 짐승들은 코로 호흡하게 돼있죠.
창세기 7장 22절 보면, 노아홍수가 뭘 죽이깁니까? 물고기 죽이깁니까? 안 그러면 비둘기 죽이는 거예요, 까마귀 죽이는 겁니까, 꽃을 죽이고 들풀 죽이는 거예요? 창세기 7장 22절에 의하면 코로 숨쉬는 놈은 다 죽이는 거예요. 그만큼 노아홍수 자체가 이미 묵시 세계로 창세기보다 한 발자국 더 당기는 겁니다. 그렇다면 노아언약은 깨보면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바로 이레, 창조의 칠일이 다 담겨있어요. 그게 창조의 단위입니다.
이해 안 된다. 이걸 어떻게. 진도 나갈 문제가 아닙니다. 다시 해봅시다. 지금 문제가 뭐냐 하면, 제가 다시 쉽게 할게요.
바람이 분다 할 때 바람이 오는 거예요. 거기다가 내가 바람 맞는다 나를 집어넣을 이유가 없다 이 말이죠. 바람이 불면 그거는 창조된 바람이 부는구나. 왜 부는가? 이래 서있지 말고 이래 서 버리면 하나님께서 그 창조 중에 하나가 누굽니까? 마지막 육일 날 창조할 때 누굴 창조했어요? 사람을 창조했지요. 그 사람이 저와 여러분이잖아요. 그러면 그 창조의 원리가 아직 안 변했잖아요.
그러면 만약에 해운대란 바다 있고, 해 있고, 달 있고, 별을 주실 때에 그건 무슨 뜻이냐 하면, 인간을 만들기 위해서 전제적인 거잖아요. 그러면 내가 이렇게 서면 태양이나 별이나 나나 다같이 하나님이 창조했던 창조 작업의 하나의 대상이 되서 파묻히잖아요. 그런데 만약에 내가 이렇게 서있지 않고 이래 서버리면 그 다음부터 내가 뭘 보느냐 하면, 태양을 바라보는 거야.
“어이 태양. 너 왜 개기일식 왜 하는데?” 태양은 말하기를 “네가 왜 관여하는데.” “어이 물 이리 나와. 왜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데?” 물은 말합니다.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든 땅에서 떨어지든 네가 말하는데.” 그런데 인간은 물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것은, “옳다. 전기를 만드는데 하나님의 지혜다.” 이러고 있다고. 누구 마음대로 지혜라.
‘바람이 불듯이 하나님께서 나를 만들었구나.’ 할 때 그 다음에 우리는 뭐냐 하면, 그 다음 조치가 뭡니까? 그 다음에 하나님은 나를 어떤 조치를 가할 건데요? 하고 기다리는 마음으로 살면 되는 거예요.
주의 몸은 주의 몸이니 하나님이 요한계시록까지 가득 담겨있는 전체 말씀을 가지고 그 다음에 나에게 어떤 식으로 퍼부을 건가? 내가 그냥 바람 받듯이 그냥 받아서 그 다음에 통과, 세상을 향하여 통과하면 돼요. 그게 뭐냐? 주를 증거하는 겁니다. “나한테 이런 게 왔거든.” 하고 증거하면 돼요. 그걸 중간에 이래 되면 자꾸 쥐면 소유가 되는데 이래 하면 통과가 된다니까.
모든 교회의 문제점이 어디 있느냐 하면, 통과 시키지 못하고 쥐고 있다는데 문제 있어요. 베드로후서에 나오죠. 노아방주에 구원받은 자가 오직 여덟 명이다. 차 대절했는데 분명히 차가 크기 때문에 사천 명 들어간다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여덟 명 타니까 오라이 했어요. 그때 “빈 좌석이 있는데 왜 노아의 방주를 문 닫습니까?” 물으면, “너 이리 나와. 어떤 근거에 의해서 이게 빈 좌석으로 보는가? 내가 보니까 여덟 명이 꽉 찬 걸로 보이는데 너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비어있는 걸로 보느냐?” 이 말입니다.
사도행전 1장을 하면서 제일 크게 오해되는 게 뭐냐 하면, 사도행전 1장에 보면, 성령이 임하면 하늘나라가 확장된다는 거예요. 하늘나라는 확장될 성질이 아닙니다. 하늘나라는 공간 개념이 없어요. 확장이란 개념이 없습니다. 수직적 개념밖에 없어요.
사람이 이렇게 자기 나름대로 공간과 시간을 갖고 있어버리면, 이건 칸트가 그런 이야기했는데. 인간은 시간과 공간을 갖고 있으니까 비어있다고 보는 거예요. 안 비어있는 거예요. 자기가 있으니까 비어있는 건데, 하나님은 자기만 있어도 꽉 찬 것이고, 두 사람 있어도 꽉 찬 것이고, 세 사람 있어도 꽉 찬 거예요. 혼자 구원받아도 구원 확실하게 다 받은 거예요.
자기 몸이 바로 중립이 아니고 이미 악마로 물들었다는 사실을 뾰족하게 서서 보지 못하기 때문에 이렇게 서기 때문에 악마는 없다. 왜? 내가 악마 있기 위해서 노력을 안 했기 때문에. 그런데 그 사람이 만약에 신내림을 받았다. 무당 됐다. 악마는 있어. 왜? 내가 과거 경험에 신내림 받았으니까.
그러니까 그 사람은 1950년도에 신내림 받아서 악마 있다 했다가, 1958년도 교회 나온 뒤 악마가 없다 했다가, 1960년 다시 신내림 받아서 악마 있다 했다가, 1970년 다시 교회 와서 없다고 했다가, 앞으로도 미지수라. 그 사람은 본인도 몰라. 자기가 갈 때까지 가보겠다는 거예요. 되풀이해서 계속 발전하면 뭐 있겠지. 근본 자체가 하나님의 창조보다도 자기 행위로 인한 창조에 기준이 있는 이상은 그 사람은 어떤 일이 벌어져도 그 사람은 그냥 자기 행함에 대해서 놓지를 못합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이것하고 십 분 쉽시다. 회개하라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그것은 바로 다니엘 70년 포로생활에서 회개란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언약에 의해서 이스라엘 된 걸 가지고 다시 이방인 것처럼 행함으로 나온 것, 이 자체가 하늘의 비밀을 우리의 행함으로 가린 것에 대해서 회개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 행함은 가렸으니까 어떻게 돼요? 철거해야 되죠. 그 철거가 뭐냐? 환란이에요. 철거할 때 누구도 철거됩니까? 본인이 스스로 이렇게 뾰족하게 한 몸을 이렇게 바로 내가 뭐 해보겠다는 이 몸, 이것도 하늘의 비밀을 가리는 죄가 되기 때문에 이 몸조차도 날아가 버려요.
그 날아갈 때 필요한 작용이 환란이고, 여기에 환란을 돕기 위해서 특별 초청된 사람들을 두 자로 ‘짐승’이라. 짐승들이 오셔서 그것도 노시는 바다에서 친히 방문하셔서 모든 인간의 행함이라는 몸을 다 죽여 버리는 그러한 훌륭하신 일들을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보면, 목 벤 자가 이미 구원받았느니라.
10분 쉽시다.
첨부파일 : 2009십자가마을여름수련회 제1강.hwp (54.0K), Down: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