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 6: 5- 8 (벌 받을 성)
렘 6: 5- 8 (벌 받을 성)
이름 : 우리교회(IP:220.81.176.169)
본문 : 예레미야 6장 5- 8절
제목 : 벌 받을 성
듣기 :
, 보기 :
이근호
09-08-05 21:33
벌 받을 성
2009년 8월 5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6:5-8
(렘 6:5, 개정) 『일어나라 우리가 밤에 올라가서 그 요새들을 헐자 하도다』
(렘 6:6, 개정)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하노라 너희는 나무를 베어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흉벽을 만들라 이는 벌 받을 성이라 그 중에는 오직 포학한 것뿐이니라』
(렘 6:7, 개정) 『샘이 그 물을 솟구쳐냄 같이 그가 그 악을 드러내니 폭력과 탈취가 거기에서 들리며 질병과 살상이 내 앞에 계속하느니라』
(렘 6:8, 개정) 『예루살렘아 너는 훈계를 받으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 마음이 너를 싫어하고 너를 황폐하게 하여 주민이 없는 땅으로 만들리라』
오늘 본문에 예루살렘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볼 때는 그냥 보통 도시나 지역으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 마치 사람 대하듯이 다루십니다. 이것은 예루살렘 거민, 한 사람, 한 사람을 따로 취급하시는 것이 아니라 집단으로 취급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인식은 오늘날 ‘나만 구원받으면 돼’라는 인식과는 전혀 다른 관점입니다.
그 대신 ‘구원받으려면 어떤 집단에 속해라’는 관점입니다. 물론 신약 시대에서는 이 집단을 ‘그리스도 안’이라고 합니다. 이 집단 구원 개념은 개인과 개인의 경쟁이나 비교를 일체 인정해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오직 지도자의 자질에 따라 덩달아 백성들의 운명은 종속됩니다. 이런 지도자와 백성의 관계를 ‘언약’이라고 합니다.
당연히 이 언약은 백성이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백성은 뭘 합니까? 백성들은 ‘쳐다 봐야’ 합니다. 광야에서 모세는 놋뱀을 들었습니다. 요한복음 3:14에 보면,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라고 되어 있고 요한복음 12:32에 보면,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턱을 들고 위를 쳐다본다는 말은, 자기 쪽의 형편과 사정을 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자기 쪽의 형편과 사정을 보지 아니하면 타인과의 비교나 경쟁을 할 여유가 없습니다. 시편 84:1-3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신앙인은 자기 머리 위에 덮어씌운 하나님이 궁정에 대해서 황홀해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이 사모하는 마음이 지극해서 쇠약할 지경입니다. 자기를 전부 여기에 맡긴 것에 대해 무척 다행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미 확정지어버린 자기 운명에 대한 고마움을 어떻게든 표현하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이 예루살렘성이 졸지에 ‘멸망의 성’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것도 집단적으로 말입니다. 왜 이런 사태에 이르게 되었습니까? 이 점을 설명하기 위해 언약에 대해서 좀더 설명을 해야겠습니다. 노아 언약은 방주와 무지개라는 세트로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있어 무지개란 흔하게 보는 거지만, 막 홍수 심판이 끝나고 난 뒤에 있어 무지개는 결정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 ‘비 내림’이란 곧 죽음을 의미하고, ‘비 그침’이란 생명을 의미했습니다. 바로 이 ‘비 내림’과 ‘비 그침’ 사이에 무지개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즉 죽음의 세력이 생명의 영역으로 밀려오지 않도록 막아서게 역할을 하게 됩니다. 복음의 기본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이란 예수님의 희생으로 주어진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진실을 잊어버리고 놀리고 모독합니다. 하나의 가설 내지는, 전설로 봅니다. 이렇게 되면 죽음의 세력을 막을 수 있는 생명의 중보자를 없는 자가 되어 저주가 그대로 그 사람에게 덮치게 됩니다. 예루살렘성이란 바로 이런 은혜로 저주를 차단해주는 덕분에 그동안 버텨온 것입니다.
제가 이번 가야산 수련회에서 3000원 짜리 볼 펜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이 설교단에서 말하면 여러분은 저에게 이렇게 공격해야 합니다. “목사님은, 왜 복음보다 중요하지 않는 이야기를 강대상에서 말합니까?”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중에 어떤 분이 자녀를 잃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사실을 알고서도 예수님의 희생으로 저주로부터 지켜주심을 설교한다고 해봅시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은 가만히 있는데 그 사람이 저에게 뭐하고 공격하겠습니까? “목사님은 왜 정작 중요한 내 아이의 죽으심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덜 중요한 예수님의 희생을 증거합니까?”라고 항의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자유란 언제 느껴지는 줄 아세요? 감금 되었을 때에 비로소 자유가 생각나는 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있을 때, 그들은 참으로 자유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출애굽에 성공해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살게 될 때에, 그들은 자유의 귀중함을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 예루살렘성이 ‘멸망의 성’이 되어야 했습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이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미워서 한 것이 아닙니다. 잊었던 자유와 사랑과 용서를 다시 덮어주시려고 합니다. 이 조치를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바벨론 제국까지 동원하셨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자신이 쳐다 봐야 할 분을 다시 보게끔하고자는 겁니다.
사람이란 항상 죽음이란 한계에 갇혀있습니다. 자력으로 벗어나려고 해도 가능치가 않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이란 생명의 맛을 주기 위해 죽음의 위협을 가까이 하게 합니다. 이렇게 되면 자기에게서 손을 떼게 됩니다. 여기서 발생하는 것ㅎ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이란 자기 자신에게로 의미로 도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갈수록 그 사랑의 대상에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즉 “나는 이제 하나님께 용서받았으니 내 마음대로 살거야”가 성립되지 않는 것입니다. 시편 84편에 나오는 신앙인의 고백은 진정 무엇이 참된 사랑인가를 보여주는 겁니다. 고린도후서 5:14에 보면,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에 강권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심정이 우리도 헤아리고 우리 속에도 담아야 합니다. 즉 사도 바울이 사도 되기 전의 사울로 있을 때와의 심정과 차이점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천사의 의인으로 자처했던 사도 바울은 로마서 4장에서 아브라함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합니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사랑이란 성도로 하여금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게 하실 때, 여전히 참 예루살렘라는 집단에 속하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예수님의 희생을 이제는 영원히 잊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우리교회
09-10-20 23:53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예레미야-2009/022강-렘6장5-8(벌받을성)-jer090805.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