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14:29-31 (베드로의 장담)
막 14:29-31 (베드로의 장담)
이름 : 우리교회(IP:220.81.176.150)
본문 : 마가복음 14장29-31절
제목 : 베드로의 장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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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09-08-02 13:15
베드로의 장담
2009년 8월 2일 본문 말씀: 마가복음 14:29-31
(막 14:29, 개정) 『베드로가 여짜오되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
(막 14:30, 개정)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막 14:31, 개정) 『베드로가 힘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목자를 치면 양들은 흩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흩어져야 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제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주장합니다. “목숨을 바칠지언정 예수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말입니다. 이 제자들은 아직도 천국에 대해서 착각하는 자들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자기에게 원인을 제공해서 거기에서 결과가 나오는 것으로 기대합니다.
즉 그러다보니, 천국도 그런 식으로 들어갈 수 있으리라고 여기는 겁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이런 천국은 가짜 천국입니다. 말벌의 예를 들어봅시다. 말벌이 사람을 쏘는데 그 사람의 학식이나 가정형편이나 인격 같은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쏩니다. 즉 말벌은 인간들이 스스로 설정해 놓은 원인과 결과라는 고리에 말려들지를 않는다는 말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우리 인간들이 머리 맞대어 숙의해서 만든 세상이 아닙니다. 대중들의 여론을 규합해서 참고로 해서 굳혀놓은 영역이 아닙니다. 만드신 분이 따로 있는데 누가 어니 곳에 갈 것인가 하는 것은 자신이 들어가야 될 세상의 성격을 미리 보여주는 자들에게 돌아갈 것입니다. 즉 천국을 발산하는 자는 천국으로, 지옥의 성격을 발산하는 자는 지옥으로 갈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와 제자들은 자기 자신들의 의지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즉 자신의 성격을 본인들이 붙잡고 다잡을 수가 있다고 장담하는 반면에 예수님은, 바로 그런 것이 천국의 속성이 될 수 없다는 겁니다. 천국이란 오로지 생명책에 명단이 있는 사람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구원은 베드로의 평소 행위와 아무런 상관없이 성취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상관없다고 여기는 닭을 베드로와 엮기에 만듭니다.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베드로로 하여금 자신이 아는 자아말고 다른 자아상으로 예수님이 자신을 보고 계심을 알게 만드는 겁니다.
즉 닭 우는 소리 가운데서 진정 자신의 운명을 결정짓는 타인의 음성, 곧 예수님의 예언의 소리를 듣게 하는 겁니다. 나를 구멍 내는 것이 곧 구원의 본격적인 개시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자아상은 실은 악마의 복사물로서의 자아상임을 인정토록 하시는 겁니다. 닭은 분명히 예수님의 예언의 노선 안에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독자적인 인생 노선을 설계했습니다. 따라서 닭은 살았고 베드로는 죽은 자입니다. 베드로의 노선 이편저편에는 예수님이 안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는 닭과 같은 예언의 노선에 들어있음을 닭을 통해서 알려주시는 겁니다.
베드로를 비롯해서 모든 인간들은 자기 몸을 기준으로 하는 시간관을 갖고 있습니다. 그 시간관에 의하면 자신의 결심이 원인이 되어 자신이 예상한 결과를 얻을 수 있는 능력자로서의 자아상이 이 시간관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나 자신이 미래를 결정하는데 있어 다른 시간관이 개입될 필요를 느끼지 않는 것이 인간들의 시간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천국에 들어갈 자들에게 적용될 시간관을 본인이 따로 갖고 계시고 그 예수님이 갖고 계신 시간관을 자기 백성들에게 이미 적용되어 있음을 알려주시는 방식으로 구원 궤도에 합류시켜 주시는 겁니다. 여기에 반발하는 것이 바로 인간들 나름대로 갖고 있는 시간관입니다. 이 시간관은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로 미래로 흘러가는 시간관입니다.
하지만 이 시간관을 오로지 자신이 원하는대로 세상이 돌아가리라고 억지를 부리는 그런 시간관이 됩니다. 창세기 7:22의 말씀에 보면, 인간에게는 전혀 이런 시간관을 가질 자격이 없음을 말씀하십니다. “육지에 있어 그 코에 생명의 기운의 숨이 있는 것은 다 죽었더라” 노아홍수 심판 때일입니다.
즉 인간은 공기의 들숙날숙하는 중간 기계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리고 안개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이사야 2:22에 보면, 다음과 같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 즉 ‘의지할 것이 못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느 인간치고 믿을 것이 딱히 자기 인생 빼놓고서는 없다는 의식입니다. 쉽게 말해서 예수를 믿어도 예수를 믿는 나를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 의식의 한계라는 겁니다.
즉 “당신은 자신이 예수 믿는 것을 믿습니까?”라는 질문은 성도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 질문 자체가 악마에 속한 자가 하는 질문입니다. 참된 성도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누가 당신으로 하여금 믿게 하셨습니까”입니다.
그러면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단 말입니까? 바로 여기에 예수님은 닭을 내세웁니다. 닭도 역시 호흡니다. 하지만 닭은 결코 호흡하는 자기 자신을 믿음을 증거하는 피조물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닭은 분명 예수님의 예언에 의해서 거기에 배치되어 있는 피조물입니다.
이와같은 경우는 마태복음 17:27에도 나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
제자들이 그동안 예수님을 쫓아다닌 것은 자아를 포기못하고 도리어 지금보다 더 우월한 자아로 초월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베드로에게는 베드로 자체가 그림자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노선이 다르고 길이 달랐습니다. 그림자는 그림자만 볼 뿐입니다. 예수님이 보시는 자아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닭과 예수님과의 관계입니다. 닭은 예수님이 예언하신대로 울어주므로서 예수님의 시간관을 발산했습니다.
그렇다면 죄인 되었음 자체가 좌절해야 할까요?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강도 맞은 사람’이 나옵니다. 거기에 강도는 안 나옵니다. 누가 강도 짓했는지 책임을 묻는 자리가 아니라, 즉 원인을 새삼 따지는 것이 참다운 인간이 아니라 강도 맞은 자와 자신을 같이 볼 수 있는 자가 누구냐를 찾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실수는 실천 안 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제대로 볼 줄 몰랐다는데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더불어 함께 무덤에서 돌아 나온 시간관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늘 닭의 요소와 강도 만난 자의 요소가 우리 자체로부터 뜯어지지 않고 채워주시는 것이 지금 예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신앙 방식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그 속에서 팔을 벌려 우리를 꽉 붙잡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체가 남들 것으로 가득차 있는 그림자와 허수아비인 것을 알게 하시고, 예수님의 예언의 노선 위로 옮겼음을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우리교회
09-10-20 15:51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마가복음-2008/73강-막14장29-31(베드로의장담)-mar090802.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