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출 6: 1- 7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라는 이름2003년 11월 16일 본문 말씀: 출애굽기 6:1-7
6: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제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 강한 손을 더하므로 바로가 그들을 보내리라 강한 손을 더하므로 바로가 그들을 그 땅에서 쫓아내리라6:2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로라6:3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6:4 가나안 땅 곧 그들의 우거하는 땅을 주기로 그들과 언약하였더니6:5 이제 애굽 사람이 종을 삼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을 듣고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6:6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 내며 그 고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큰 재앙으로 너희를 구속하여6:7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줄 너희가 알찌라
사도행전 4:12에 보면,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곧 다른 이름을 부르는 자는 지옥간다는 것을 확실히 명시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름으로만 자기 백성을 건지고 저쪽을 저주하신게 좀 이상하게 보이지 않습니까? 여기에는 그만한 내력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건지는데 있어 애굽 나라를 그냥 곱게 두시지 않고 강하게 징벌하시는 과정을 통해서 자기 백성만을 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이름을 모른다는 단지 그 이유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5:2에서 바로왕이 말하기를,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느냐"라고 강하고 나옵니다.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모르는 것이 왜 그토록 저주받을 중죄가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그 이름 안에는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하나님만의 기능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민족에게 신(神)이란 개념은 그 용어 하나로 다 통합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조물주도 되고, 날마다 복을 주시는 분도 되고, 사람이 죽고 난 뒤에 그 사람의 행업에 따라 상과 형벌을 차별지어 내리시는 분도 됩니다.
따라서 '신'이라는 용어 하나만으로 충분합니다. 또 그 신의 이름이 무엇이냐 에 대해 궁금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 뿐인 신은 신 그 자체가 그 분의 이름이 되는 겁니다. 이름이란 이름을 부르는 쪽의 이해성 정리를 위함입니다. 만약에 자식이 하나 밖에 없다면, '내 자식'이라는 표현만으로 곧바로 지칭됩니다.
그러나 여러 명의 자식을 거느렸다면, '내 자식'으로 부족하고, '누구 누구'라는 이름을 따로 불러야 합니다. 그러니까 이름이란 차이성을 분명히 하는데서 발생됩니다. '저 신, 그 신'이 아니라 '나의 신'이 되기 위해서는 따로 '나만의 신'에게 붙이는 이름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이름을 지을 때는, 그 대상의 기능성을 염두에 두게 됩니다.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동물들의 이름 짓기를 위임한 적이 있습니다. 이 때 아담은 그 대상 안에서 하나님의 창조성의 구별을 기준으로 해서 속성을 파악해 내게 됩니다.
그런데 아담이 동물들의 이름을 짓고 부르면서 하나 느낀 점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갑자기 아담은 외로움을 느낍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이 독처하는 것이 좋아보이지 않아서 아담이 잠든 사이에 또 한 사람을 창조해 냅니다.
여기서 아담은 그의 이름 짓기의 특기가 발휘됩니다. 자기 아내를 '여자'라고 부르게 됩니다. 자기 몸의 일부가 연장되어서 하나님께서 여성으로 만든 것을 아담은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따로 떨어져 있는 두 개의 객체라도 한 몸이 되는 겁니다.
이처럼 아담은 곧, 인간은 '이름 부르기'를 통해서 자기와의 관계성을 만들어 나갑니다. 이로서 '여성'은 '남성'을 위해서 존재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름을 지어준 자의 세계를 위하여 이름을 지음 받은 자가 존재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여자'라는 이름이 '하와'이라는 이름으로 바뀝니다. 즉 '생명'으로 바뀐다는 말입니다. 이 이름은 남편되는 아담이 지어준 이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따라서 '여성'은 남성 관리 하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관리 하에 놓이고 또한 그 이름에 담긴 기능을 중심으로 하여 하나님께서 일하시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에 있어 예수님은 성도의 신랑입니다. 그리고 우리 성도는 신부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우리들은 주의 이름이 벌리는 그 기능으로 인하여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신부가 갖게 되는 영광성이란 땅에서 차려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차려져서 내려오게 되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1:2에 보면,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름이란 그 고유의 기능성을 품고 있으며 그 기능성은, 그 이름을 부르는 관계로 인해 실시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시가 있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가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
이 시인이 자기 책상에 놓인 꽃의 이름을 부르기 전에는 꽃과 시인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이 그 꽃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그 꽃은 시인에게 '의미'가 되고 그 때부터 관계성이 성립된 것입니다. 즉 꽃이 시든다 싶으면 시인은 그 꽃에게 물을 줌으로서 그 꽃을 시인 본인에게 의미있는 꽃이 되게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제공합니다. 이것은 인간이 신의 이름을 부를 때 비로소 하나님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아예 하나님 자신이 만든 이름 자체를 인간에게 던져주심으로 말미암아 인간으로 하여금 그 이름에 종속되게 하시고자 하십니다.
즉 인간이 자의로 제정한 신의 이름이 아니라, 신께서 자의로 제시한 이름이기에 인간이 오히려 그 이름이 갖는 기능이 적용되어야 될 대상이 되어 버리는 겁니다. 물론 인간의 경우와 하나님의 경우는 반대입니다. 사람이 지어준 이름이 아니라, 그 이름으로 불리워질 것을 요구하는 식으로 하나님께서 다가오셨기에, 인간들이 그 이름을 불러줄 때면 이미 그 이름을 부르는 인간들은 하나님에게 의미있는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시고, '아담'이라고 부를 때만 인간으로서 관계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지정해주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 인간은 더 이상 자신만의 세계는 사라지고 이 때부터 하나님께서 친히 일하시는 그 체계안에 참여되는 겁니다.
그 이름에 담긴 기능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3절에 보면,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나님은 어떤 식으로 자신의 전능하심을 드러내었습니까?
바로 언약에 의한 실시입니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의 자식은 반드시 아브라함이 육이 그 한계성이 드러나는 것을 통해서 성취되어야 합니다. 즉 이삭은 아브라함의 자식이 아니라 언약, 즉 하나님의 약속의 자식이 되게 하시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제단을 쌓은 것을 여러분들이 아실 겁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고해서 갑자기 아브라함에게 초능력이 생겨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있는 자신의 능력도 무너지고 기대감도 무너져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약에서 마리아의 오빠 나사로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무덤 밖에서 "나사로야 나오너라"고 이름을 부르면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군말말고 무덤 밖으로 살아서 나와야 하는 겁니다.
즉 성도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더 이상 그들 고유의 일은 사라집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벌리시는 일만 그들에게 덮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자신이 생각한 이름이 아니기에 모든 면에서 불가능함과 절망감을 느끼게 됩니다.
바로 그 때의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야 그 취지의 의미가 생성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오직 언약 성취에만 관심을 두고 일하십니다. 그 언약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의 만남에서 이미 주어진 바 있습니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는데도 아무런 변화가 없으면 어떡합니까? 그런 걱정은 안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자기 백성에서 알렸을 때는, 이미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즉 새삼스럽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지시에 따를 때만 하나님의 일이 성사되는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의 이름이 지니신 능력에 의해서 자기 이름을 부르는 이스라엘 백성을, 완전히 통제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이름은 곧 전능하신 하나님의 위력이 실려 있는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신다는 말은, 인간들이 하나님이 이름을 불러서 일 한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이 직접 일하는데 인간들이 그 이름을 부르면서 일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만약 이스라엘 민족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으면 이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으로 일하심의 내용이 되는 언약 밖에 존재하는 것이 되어 그 전능하심에서 오는 저주와 징벌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오늘날 우리 성도들도 하나님의 이름에 의해서 내부가 장악당하고 침투당했습니다.
이제 우리네 인생이라는 것은 따로 없습니다. 오직 주의 이름으로 해놓으신 그 공로와 업적을 온 우주에 증거하기 위해서 살아야 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직장이나 가정 생활에서, 남들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채워주기를 기대하는 식으로 살지 마세요.
이제부터는 자기 앞에 놓인 세계를 빈공간으로 간주해서 주님께 받은 그 사랑으로 마음껏 채워나가는 식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나의 것'이 없고 모두 하나님께서 사명을 발휘하라고 마련해 주신 마당으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이름으로 하나님의 일이 시작하고 끝맺음을 우리가 알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