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는 복음의 천적
목사는 복음의 천적
이름 : 이근호(IP:117.55.132.197)
목사는 복음의 천적
2009-07-21 17:17:17 조회 : 134 이름 : 이근호
생태계에서 생존에 상극을 이루는 것을 ‘천적’이라고 한다. ‘니가 죽어야 내가 산다’는 관계가 천적 관계다. 목사가 복음의 천적이 되는 이유는, 목사는 교인들의 의견을 대변해서 하나님께 아뢰는 자리에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목사는 교회를 대표한다. 교회를 누구보다도 꿰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교회 없는 목사는 더 이상 목사가 아니다. 교회가 있을 동안에만 목사다. 목사가 교회를 잃으면 목사직도 잃는다.
목사직을 잃지 않으려면 어떻게 하든 교회가 있어야 한다. 교회란 교인들의 집합체이다. 따라서 교인들을 의견을 반영하지 아니하면 교회는 깨진다. 교인들이 요구 사항을 목사는 여과없이 교인들을 대변해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그 기도 내용을 교인들은 유심히 본다.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기도하고 있는지를 살핀다.
교인들이 복음이 싫단다. 따라서 목사는 하나님께 솔직하게 전달해야 한다. “하나님, 우리 교회 교인들이 복음이 싫답니다.” 그런데 목사는 교인들 탓으로 돌리지만 싫은 목사 본인이 복음이 싫은 것이다. 이런 면을 분명히 부각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 교회에 복음을 사랑하는 자를 보낸다.
목사는 바짝 긴장한다. 그 많은 교인들 가운데서 자기 권위가 안 먹히는 인간은 그 복음을 아는 그 인간 뿐이다. 목사는 천적을 만났다. 저 인간 안 쫓아보내면 자기가 교회에서 쫓겨나갈 판이다. 일단 목사는 유화책을 쓴다. 당근을 제공하는 것이다. 교인들 앞에서 그 복음 아는 자를 한껏 칭찬해준다. “여러분, 우리 모두 이 분의 신앙을 본 받읍시다. 오늘날에도 이렇게 말씀을 사랑하고 복음대로 사는 사람은 처음 봤습니다. 이 분은 우리 교회의 보배입니다.”
무슨 뜻일까? 까불지 말라는 뜻이다. 함부로 날뛰지 말라는 뜻이다. 봐 줄 때 조용히하라 는 뜻이다. 목사가 공개적으로 칭찬해 주었기에 너도 어디 가서 담임 목사를 부추겨 세우는 식으로 교회 생활하라는 뜻이다.
그런데 막상 복음을 아는 이 성도는 꼭 저능아 같다. 교회 돌아가는 사태에 아둔하다. 무감각하다. “무슨 일 있어요?”라고 되묻는 눈동자를 보인다. 그냥 복음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식으로 살아간다. 이 바보, 등신 같은 처신이 교회에서 문제가 된다. 목사는 아무리 기다려도 그 성도가 자신을 존경하는 것으로 되갚아주는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
목사는 교회 내에서의 자기 권력에 약간의 구멍이 생기게 된 것을 느낀다. 그 구멍이 어디까지 커졌는지를 염려가 되어 사모님으로 하여금 조사케 한다. 한편으로는 더욱더 호의적으로 그 성도에게 다가간다. 하지만 아무리 목사가 그 성도를 부추겨주어도 성도는 목사에게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괘씸하다. 사회성이 결여된 자 같기도 하고 고지식하게 보이기도 하다.
교인들이 동요하다. 목사가 외치는 하나님과 그 복음 아는 성도가 말하는 하나님이 사뭇 다르다는 것을 눈치 챈다. 분명 복음을 아는 성도가 말하는 하나님이 옳은 것 같다. 목사는 손봐 줄 적절한 타이밍을 찾고자 한다. 목사가 부쩍 설교 시간에 복음적인 내용이 늘어나기 시작한다.
“나도 복음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는 투로 그 성도로 경쟁에 나서려는 것이다. 하지만 밑천이 딸린다. 교인들이 복음에 대해서 부쩍 질문들이 많아지기 시작한다. 위기다. 어설프게 답변했다가는 연이어 수 십개의 파생된 공격을 받을 수가 있다. 무식이 폭로나면 안 된다. 어쨌든 훌륭한 목사라는 이미지로 밀어붙여야 된다.
“그래, 인격이다. 인격으로 밀어붙이자!” 이때부터 유난히 교회 내에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보이는데 평일에 바쁜 장로들까지 불러내어 목사의 솔선수범적인 구제 활동을 목격토록 한다. 그리고 그 업적은 빠짐없이 온 교인들이 들으라는 듯이 설교 시간과 광고시간에 나팔을 분다. “여러분, 신앙은 이론이 아니라 실천입니다. 여러분들은 머리로만 신앙생활 해서는 아니 됩니다. 실천적 신자가 되고자 하는 자는 어려운 이웃을 돌아보는 교회 사업을 시간 바치시고 헌물 바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배나 갚아주십니다. 전도서 11:1에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너는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
목사는 발악을 한다. “어디 감히 내 밥그릇을 뺐으려고 이눔(=놈)이”
그 성도는 더 이상 모범적인 교인이 아니다. 교회를 파탄내는 불순분자로 찍혔다. 그 성도와 사귀는 자들은 사모님의 정보망에 걸려 속속 목사 귀에 들어간다. 이때부터 교인들은 조심하기 시작하면서 교회는 예전처럼 진정되어진다. 그리고 그 성도는 잊혀진다. 반짝 소동이었다.
복음이란 이처럼 늘 짧은 소동으로 끝난다. 하지만 파도 위의 달빛처럼, 떨어져 나가고 또 떨어져 나가도 파도는 계속 밀려온다.
채한욱(IP:122.♡.41.53)
09-07-21 22:29
누구는 전벌리고 누구는 바람잡고, 모양세가 영안좋구만------ 안방이 아니고 마당방이니 강구만씨는 좀체통을 지켰으면 좋겠 소이다. 오랜만에 문안 인사를 쓴 소리로 시작 한다고 몰매는 던지지 마시길. 집안에 한 두 사람쯤 쓴 소리 하는 사람이 있으면 모양세가 날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들 하시는지요?
강구만(IP:118.♡.241.172)
09-07-22 00:04
지킬 체통이 없는데 자꾸 체통을 지키라 하시니...
보이는게 전과 바람과 모양세 밖에 없으니...
권범식(IP:222.♡.61.130)
09-07-22 00:46
그런 복음의 상극인 목사와 이번 주일도 같이 있어야 된다는 것에 머리가 아픕니다...이것도 감사해야 할 것을...역시 감사할 줄 모르는 인간 입니다...
한진영(IP:218.♡.37.246)
09-07-22 07:54
미치긋다. 어딜 가도 웅얼 웅얼 에코가 되어 끝도 없이
들려오는 것은 '너 죽어~~'라는 소리 뿐이다.
대충 숨어 살고 싶은데 좀 익숙한 데에서 심신의 안정을 찾고 싶은데,
도무지 틈을 안준다.
굴 파고 숨어 봐야 늘 이 모양으로 벗겨 질 줄 알면서도,
그처럼 사망의 길을 닦는데 능란하며 익숙한 자신을 본다.
왜 그토록 기어들어 가고 싶은지..
십자가가 무엇이관데, 입으로는 그리 잘도 시인하되
마음으로는 그토록 회피하고 싶은 것일까.
나는 누구관데, 타조처럼 만날 모래 속으로 머리나 치 박는 것일까.
멸망의 가증한 것은 어찌 그리 서지 못할 곳에 잘도 서는지
전생에 깊은 연이 있었던 게다.
그러나 주의 신은 안 계신 곳이 없어
바산의 암소처럼 투실한 몸통, 죄인의 곤고함을 이처럼 백주에 훤히 드러내신다.
작열하는 볕을 피해 숨어들어 간 그 자리에 독사가 열 댓 마리,
그러나 내 진정 음부에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는 하나님이시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정녕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찌라도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취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일반이니이다 “ (시139)
오, 주님 아멘.
김영완(IP:218.♡.131.252)
09-07-22 08:40
불신자인 목사와 불쑥 찾아든 성도와의 어색한 인사...
불신자인 목사가 보기에는 내 말을 잘 들을 법한 일꾼 또는 헌금계좌로 보이겠고...
성도가 불신자 목사를 봤을 때는 딱히 해줄 말이 없을 뿐이고...
그 어색한 만남...
매주 만나도 어색할 뿐이다...
이미아(IP:115.♡.200.96)
09-07-22 09:50
목사의, 지극히 목사적인 욕망....교회는 내꺼야!!!
하나님께 절대로 양보할 수 없다.
목사에게 잘못하면 벌 받는다.
목사의 말이 곧 법이고 천국가는 길이다.
어찌보면 천국마저 목사의 것이다.
죽은 후에 알 바 아니다.
이 땅에서 실컷 천국을 사기치는 것이다.
그 목사가 좋았다....그 교인들은....
우리는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산다.
고관규(IP:119.♡.148.29)
09-07-22 16:32
복음을 모르고 경험하지 못 한 복음을 말하려니..다른 복음 즉,,번영의 신학. 축복의 길,꿈을 가져라, 생각되로 될 것이다. 선한일을 하고 교회에서 충성 봉사해라..라는 내용인 빈 깡통같은 소리만 하게되지요. 그런 예배당은 개독교 회당이며. 적극적 사고방식을 훈련시키는 기업의 훈련원같은 역활만 하지요. 지역사회에서 크게 건물을 짓고 이쁜 인테리어로 치장하면서 같은 동네의 피를 전하는 지하실의 개척교회를 핍박하는 사단의 족속들입니다. 빼내어 오기도 하고...
관리자(IP:220.♡.176.150)
09-07-22 17:52
체통이 필요하지 않는 예수님의 나라
노아가 무지개 언약의 은혜 아래에서 술 먹고 발가벗고 뻗어 자고 있으니 아들 함이 와서 저게 무슨 은혜받은자인가? 라고 발가벗긴 수치제거를 도리어 정죄하고 나섰다. 그러나 셈과 야벳은 뒷걸음질쳐서 그 발가벗겨진 은혜입은자를 허물을 보지 않고 덮어주었다.
(창 9:23, 개역) 『셈과 야벳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에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다윗이 빼앗긴 법궤가 스스로 발이 달린듯 혼자 우상을 법궤 스스로가 다 쓰러뜨리고 돌아오게 되니까 왕이고 뭐고 체통이고 뭐고 그 돌아오는 법궤 앞에서 춤을 줬다. 너무나 너무나 기뻐 노래하며 춤을 추다가 왕의 옷인 바지가 벗겨지는 줄도 모를정도로 춤추었다. 그 장면을 목격한 다윗의 아내 미갈이 업신여기며 왕의 체통을 먹칠한다고 여겼다.
(삼하 6:13, 개역)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행하매 다윗이 소와 살진 것으로 제사를 드리고』
(삼하 6:14, 개역)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때에 베 에봇을 입었더라』
(삼하 6:15, 개역)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부르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 오니라』
(삼하 6:16, 개역) 『여호와의 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저를 업신여기니라』
(삼하 6:17, 개역) 『여호와의 궤를 메고 들어가서 다윗이 위하여 친 장막 가운데 그 예비한 자리에 두매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리니라』
(삼하 6:18, 개역)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 드리기를 마치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백성에게 축복하고』
(삼하 6:19, 개역) 『모든 백성 곧 온 이스라엘 무리의 무론 남녀하고 떡 한 개와 고기 한 조각과 건포도떡 한 덩이씩 나눠주매 모든 백성이 각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삼하 6:20, 개역) 『다윗이 자기의 가족에게 축복하러 돌아오매 사울의 딸 미갈이 나와서 다윗을 맞으며 가로되 이스라엘 왕이 오늘날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 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날 그 신복의 계집종의 눈 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삼하 6:21, 개역) 『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저가 네 아비와 그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로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삼하 6:22, 개역)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한지라』
(삼하 6:23, 개역) 『그러므로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으니라』
향유병을 깨뜨려 비싼 향유를 때려붓는 여인의 행동을 보고
불끈 가룟유다는 저 비싼 향유를 가난한 자에게 주면 될것인데 왜 허비하냐고
버럭 화를 내면서 정의로움과 바른소리를 외친다.
과연 가룟유다가 가난한 자를 생각해서 하는 말일까?
인간이 앞장세우는 바른말 정의로움말 선의 말 뒤에는 항상 악이 있다.
선악을 아는 자체가 저주 받은 것이다.
그러나 성도들은 체통이고 뭐고 선악 이전의 상태인 어린아이와 같다. 처음자리이다.
영이 임해서 나타나는 성도의 행동들은
선악의 인간들에게는 해석할 길이 없는 걸림돌이다. 거친반석이 된다.
과연 선악으로 판단하는 인간들은 과연 선을 디기 생각해서 하는 말일까?
놀랍게도 선에 아예 관심 없다는 티를 오히려 더 걸림돌 앞에서 덜커덕 걸려들어 자기도 모르게 발설케 된다.
왕이여 바지 벗겨 졌슴더 체통 좀 지키시지요?
왕이여 어찌하여 좀 전 까지는 우시고 금식하시고 회개하시더니만?
왜 지금은 먹고 마시고 웃습니까?
(삼하 12:21, 개역) 『신복들이 왕께 묻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는 위하여 금식하고 우시더니 죽은 후에는 일어나서 잡수시니 어찜이니이까』
(삼하 12:22, 개역) 『가로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어니와』
(삼하 12:23, 개역) 『시방은 죽었으니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저에게로 가려니와 저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는 세대가 바로 성령의 소욕에 반대되는 선악의 소욕을 주장하는 악한세대이다.
(눅 7:31, 개역) 『또 가라사대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꼬 무엇과 같은고』
(눅 7:32, 개역)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을 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눅 7:33, 개역) 『침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눅 7:34, 개역)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눅 7:35, 개역)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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