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707b 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유다서
20090707b 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유다서
이름 : 한윤범(IP:119.192.174.148)
20090707b 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유다서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여럿 몸을 그리스도 한 몸으로 바꾸는 데는 이것은 주의 능력이 아니면 안 됩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2장에 보면 뭘 마셔요. 매실을 마시는 게 아닙니다. 뭘 마신다 돼있습니까? 한 성령을 마셔버리면, 분명히 여러 명이에요. 한 사람은 과천에 살고, 한 사람은 인천에 살고, 한 사람은 돈까스 집하고. 분명히 여러 몸이에요. 한 사람은 창원에 계시고.
몸인데 뭐라고 합니까? 한 몸이라고 하라는 거예요. 무조건. 미치지요. 아닌데. 구득영 목사님 뭐 한다고 내가 가슴 아프고 이런 것 아니잖아요. 아닌데 한 몸이라는 거예요. 저쪽에서 웃을 때 같이 웃어주라는 거예요. 저쪽에서 울 때 같이 울어주라는 겁니다. 왜요? 네 안에 뭐 있다? 사랑 있는데, 이 사랑은 우리가 만들어내는 게 아니고 선물로 준 것이 되어서 영원히 존속한다는 거예요. 이 사랑 없으면 한 몸이 아니고 한 몸이 깨져버리고 뭐가 됩니까? 여러 몸 되죠.
그러면 교회에서 한 몸 되기 위해서 계속 뭘 뭐야 됩니까? 본드 있잖아요. 본드만 이야기하는 거예요. 우리는 다같이 부족한데 예수님의 사랑은 뭘 없애나니? 두려움이 없나니. 개척교회 하는 사람들 두려움이 뭡니까? 교회 망한다는 두려움. 그 두려움은 평생 갑니다. 사랑은 뭘 쫓나니? 사랑이 오니까 두려움을 쫓나니.
교회가 여럿이 되면 니 교회, 내 교회 따로 있겠지요. 근데 한 몸된 교회는 교회가 몇 개밖에 없습니까? 몸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 교회도 하나요, 소망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요, 하나님도 하나요, 구원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이미 하나로 “됐나?” 그럼 우리는, “됐심니더.” 사랑은 두려움이 없나니.
이 유다서가 윤리, 도덕이 아닙니다. 우리로 하여금 이런 환희와 행복감과 안도감을 제공하는 유다서에요. 그런데 모든 주석은 윤리, 도덕으로 힘들게 만들어요. 그것은 이 유다서의 내용 하나하나에서 “됐나?” “다 됐다.”를 끄집어낼 줄 몰라서 그래요. 여러 몸에서 한 몸에서 주신 능력으로 우리는 세상을 어떤 관점이냐 하면, 내 몸의 관점이 아니고 주의 몸에서 관점을 보죠.
그러면 몸에는 눈이 담겨 있지요. 이 눈은 어떤 관점이냐 하면, 예수님께서 세상을 볼 때 어떻게 보느냐에 관점이 있지요. 그걸 위하여 유다가 부르심을 입었죠. 그래서 유다 관점이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유다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는데 여기에 한 몸 된 사람은 다 나와. 다 우리 한 몸이야.
그 관점이 뭐냐? 종말적 관점이죠. 종말적 관점은 시간이 멈췄어요. 왜 멈췄는가? 달려갈 길 다 달려갔으니까 멈춰버렸지요. 스톱되었어요. 스톱되면 빨리 갈 때는 빨리 움직여 버린다 말이죠. 이게 계란일까, 요구르트 병일까 모르는데 정지시키게 되면, 계란인 줄 알았는데 요구르트 병이구나 알잖아요.
모든 신약의 개념, 땅 개념, 율법 개념, 종말 개념, 구원 개념, 하나님 개념, 우상 개념, 십계명 개념, 모든 개념들이 사람과 더불어 확정될 때는 미확정적이에요. 그런데 어디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들어오면 시간이 스톱 돼버리면 애굽이라는 게 지리적 애굽이 아니고, 바로 이곳이 애굽이다.
요한계시록에 나오죠. 예수님 두 증인이 죽은 장소가, 세상에 그게 소돔이요, 고모라요,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이요, 애굽이다 이 말이죠. 어떻게 그런 해석이 나옵니까? 시간을 종말 때는 스톱이 되니까 내가 여기 있는 곳에 주와 함께 있는 이게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터지는 곳이죠.
봅시다. 나의 자격은 내가 있는 것이 아니고 주의 한 몸 자격으로 왔지요. 이걸 뭐라 하느냐 하면, ‘지체’지요. 지체의 특징은 바라보는 겁니다. 우리 한 몸 되신 예수님을 바라보죠. 여기 다른 사람도 예수님만 바라보죠. 그래야 한 몸 되니까. 그런데 이 지체는 성령이 주어지게 되면 성령 따라서 사건이 옵니다. 이 사건 속에는 시간에 구애 받지 않는 사건들이죠.
그러면 옛날에 민수기에 나왔던 발람이, 오늘 본문에 발람 나옵니다. 발람이 이스라엘을 꼬시던 사건이 과거 사건이다? NO. 아니죠. 지금 사건이죠. 여기 또 천사가 모세 시체 가지고 마귀와 다투던 사건이 과거 사건이다? NO. 지금 사건이죠. 그래서 아까 고린도전서 10장에 홍해 건너간 걸 뭐라 했습니까? 세례. 엄청난 거. 아마 사도 바울이 그런 소리하면 오늘날 신학자들한테 욕 얻어먹습니다. 어떻게 홍해 사건이 지금의 나의 운명이 되느냐? 그 사람 운명이지. 그 홍해 사건이 지금 사건으로 터져버려요.
그래서 지금 사건이 터져버리면 우리는 성화론으로 구성하면 안 돼요. 성화의 특징이 뭡니까? 과거보다 더 나은 지금 아닙니까. 지금보다 더 나아진 미래잖아요. 시간적 개념을 집어넣으면 안 돼요. 과거에 이미 극복했다는 죄가 앞으로 십 년 뒤에 또 나의 죄로 불쑥 튀어나오죠. 물론 그건 아주 교묘하게 거룩한 척 하면서 튀어나오죠. 아이 참.
그런 점에서 유다서는 윤리, 도덕을 공격하는 겁니다. 그냥 제대로 살라는 게 아니라 지금 네가 어떤 몸인데 아직도 그런 이미 해결된 죄에 대해서 아직도 묶여 있느냐는 식입니다. 방금 이 이야기하니까 기존의 개혁주의 신학하고 비슷해지는 느낌이 안 듭니까?
여기 8절에 봅시다. “그러한데 꿈꾸는 이 사람들도 그와 같이 육체를 더럽히며 권위를 업신여기며 영광을 훼방하는도다” 이게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죠. 근데 그 사건이 그리스도 안에서는 지금 사건이 된다. 그러면 그 주체가 뭐냐? 아까 12절 봅시다. 아까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그건 했고요. “바람에 불러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 이것은 완전히 잔뜩 기대했는데 들어보니 허풍, 아무것도 실속이 없는.
사실은 설교자가 평생 동안 설교하면서 이것에 주눅 들잖아요. 설교자 본인들이. 뭔가 단비를 품을 수 있는 구름이 돼야 될 텐데 자기 딴엔 단비를 마음껏 품어서 이제는 쏟아지려고 하니까 때가 여름이라. 촌이라 아침부터 할머니, 할아버지들 교회 왔는데 여름이라 선풍기 돌아가면 오자마자 주무십니다. 언제 깨느냐? 설교 끝날 때 귀신 같이 깹니다. 축복받고 집에 갑니다.
촌에 설교할 때 실컷 준비 다하고 삼십오, 육도 올라가는 실내에서 자기는 난닝구 다 적혀가면서 설교 해봤자 자알 주무십니다. 앞에 종, 땡땡땡 쳐봐야 잠자는 마귀여 나가라 백날 해봐야 소용없어요. 그럴 때 허탈감.
주일날 이런 소리했어요. 열정 뒤에는 공허함이다. 용을 쓰기는 왜 썼나. 그래서 교인들이 잘 때 이렇게 하세요. 주무시잖아요. 5초 동안 아무 소리 안 해 보세요. 자다가 다 일어납니다. 무슨 일 있는가 싶어서. 그럴 때 노려서 이야기합니다. 10초가면 잡니다. 10초 뒤에 다시. 참 싸우는 게 힘듭니다. 보통 사람은 잘 안 자요. 왜냐하면 남편 밥 차린다고.
“물 없는 구름이요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요”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실속은 없고 허풍밖에 없는데 문제는 “이것밖에 허풍입니다” 하면 문제가 없어요. 무슨 말이냐 하면, 오늘 진짜 중요한데 구약 사람들의 실패 있잖아요. ‘실패했다’ 하면 구원받습니다. 인간이 어떻게 이걸 살아요. 아담의 운명이 누구 운명이라고요? 아담이 선악과 따먹은 것 누가 따먹었어요? 우리가 따먹었잖아요. 감추기 좋아는 건 우리 속성이에요. 무화과나무에 만날 감추고 살아요. 우리 본성이고 죽을 때까지 계속 돼요. 이걸 아니라고 하면 곤란하죠.
돌아서면 우리는 내 위주에요. 한 2.5초 가죠. 돌아서면 내 위주라니까요. 바닷가에 바위 보고 동창생 만나도 돌아서면 너는 네 갈 길, 나는 내 갈 길, 이래요.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라면 안 된다 말이죠. 아니라 하면 십자가의 공로가 의미가 없어요. 말씀은 우리의 골수와 우리의 모든 것을 쪼개는 하나의 회집에 회칼이죠. 그걸 사시미 칼이죠. 말씀으로 보면 다 잘라버리죠. 자를 때 기분 괜찮아요. 안 잘리려 하니까 문제가 되죠.
껍데기밖에 없음을 인정합시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지요. “주여 고개를 못 듭니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할 때 뭐라 했습니까? 네가 의인이라 했지요. 죄인 아닌 정도가 아니고 “네가 바로 의인이다.” 했습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 이야기죠. 그러니까 현재 우리 몸이 이렇다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우린 죽을 몸이죠.
“자기의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이요” 파도가 치면 물결이 일어날 때 그 물결 속에 뭔가 있는 것처럼 보이죠. 나중에 해변에 보면 물결 다 죽어버립니다. 맹탕, 아무것도 없어요. 아무것도 없는 게 잘난 척해서 거품 팍팍 일어서 버블버블 하면서 보글거립니다. 백날 까불어도 요새 유명한 말 있잖아요. 한 방에 훅 갑니다.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에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이라” 유리하는 똥이 아닙니다. ‘별’이죠. 별이 뭡니까? 스타 되고 싶으면 연락하라 안 합니까. 다 어떤 분야에서 종사하려면 스타되라 하잖아요.
“아담의 칠 세 손 에녹이” 지금 계속 과거 이야기하는 게 뭐예요? 이 과거가 우리하고 상관없다? 아니죠. 이 과거가 지금 어디에 놓여있다? 지금 우리가 과거의 소산 아닙니까. 육은 그냥 육이 아니에요. 우리 아비가 우리 부모가 육을 낳았잖아요. 그러면 그 부모는 누구한테 낳았습니까? 또 할아버지한테 낳았잖아요. 모친의 뱃속에서 태어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이 죄가 쓰레기가 우리 안에 다 차 있잖아요. 이게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이야기입니다.
“아담의 칠 세 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 에녹서에 나오는 이야기다, 하여튼 이야기해요.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이것 설명해야 돼요. 복잡한데 이렇습니다. 시간은 선이죠. 직선입니다. 시간이 두께를 가지면 곤란합니다. 만약에 시간이 두께를 가지면 직선이 만약에 면적을 갖게 되면, 다른 말로 수학적으로 이건 이차원이 아니고 면적 가지면 삼차원이 되죠. 삼차원 되면 좌표 상 이 선 위에 또 선이 있고, 이 선 위에 또 선이 있어요. 그렇게 되면 시간이 중첩된 선이 돼버립니다.
그래서 이렇게 되면 시간이라 하는 것은 현재의 나를 생산해야 되는데 이 선이 A, B, C라면 현재 나라 하는 것은 A 선입니까, B입니까, C입니까? 이게 미확정적이죠. 예를 들어서 이런 겁니다. 이건 실제는 아니고. 나는 엄마가 날 키웠다고 생각했는데 오랜만에 미국에 계시던 이모가 와서 “아이고 내가 너 키웠다. 엄마는 그때 돈 번다고 나가버리고 내가 너 키웠다.” 할 때 처음 듣는 이야기다 말이죠. 이모가 하는 말이, “그때 너, 엄마보다 엄마라 안 했데이. 나보고 엄마라 했데이. 엄마, 엄마 하고 따라다녔어.” 이러거든요.
옛날에 그런 일이 있었어요. 옛날에 못 사는 친척이 집에 와서 가정부 노릇할 때 유모 노릇 다 했거든요. 연세 많은 할머니들 와서. 그러면 애들 젖 주고 이러면 엄마지 뭐. 내가 다 키웠지. 내가 몰랐어요. 진작 그런 소리했으면 제가 결혼식 할 때 모셨을 텐데. 그것도 모르고 이제 와서 너무 실례했습니다. 그러면 진짜 엄마가 그런 이야기를 왜 안 했을까요? 진짜 엄마는 시간적 노선이 이 자식이 내 자식이 되어야 돼요. B라는 C라는 새로운 노선이 오면 안 되는 겁니다.
갑자기 출생의 비밀이 생겨서 A에 B, C 엮기면 이것이 바로 막장 드라마에요. 허연 거짓말이죠. 아내의 유혹. 전부다 뒤섞이는 거잖아요.
사람의 행동은 깔끔하게 내가 누구냐를 알기 위해서 행동하게 돼있습니다. 깔끔하게 깨끗하게 도대체 나는 어디서 왔으며, 어디까지가 나며, 나라는 것이 이렇게 확실하게 규정되기를 원해서 인간은 행동에 나서요. 하나하나 할 때마다 내가 이런 능력이 있구나. 이런 거예요. 그런데 이렇게 뒤섞여버리면 곤란하다 이 말이에요.
지금 예언서에서 예언이 뭐냐 할 때 정말 예언에 대해서, 이번에 수련회 할 때 강의를 깊게 하겠습니다만 참 어려워요. 예언을 사람들이 단선으로 보거든요. 단선으로 보면 안 돼요. 이게 중첩돼있다니까요. 그냥 중첩돼있다는 것은 들뢰즈란 철학자는 이야기해요. 그것도 아니에요.
그럼 중첩된 것도 아니고, 단선도 아니고 그럼 뭐냐? 대구에서 강의할 때는 종말을 휘게 하는 거예요. 종말을 휘게 하면 현재와 미래가 같이 만나게 돼요. 이렇게 만난다고. 이미 과거가 이게 신기한 게, 그러니까 미래는 과거가 사라줘야 미래에요. 과거가 사라져야 현재 남고, 현재가 사라져야 미래 되잖아요. 그런데 미래가 휘어져서 현재와 같이 있고, 과거와 같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이해력을 초월하죠.
이렇게 사신 분이 누구냐 하면, 바로 예수님이었고, 그 예수님을 알아보신 분이 세례요한이었습니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이것 말 어렵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8장에서 아브라함은 나 보기를(아브라함에서 미래 아닙니까) 기대했다가 그 다음에 갑자기 미래에서 보고, 현재죠. 우리한테는 과거 돼버렸어요.
개혁주의신학에 이게 나옵니다. 박형룡 신학에 이거 나와요. 난 총신에서 못 배웠는데. 어느 교수가 가르쳐줘요? 아무도 안 가르쳐줬어요. 성경에 나오는데 아무도 안 가르쳐줬어요. 왜? 성경 중에서 일방적으로 자기가 원하는 신학을 조립하고 집어넣고 나머진 뺐기 때문에.
묵시문학에 대해서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어요. 묵시문학을 이야기해도 역사와 대비되는 묵시문학이 있어요.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서 뽑아 나온 묵시문학은 아무도 이야기 안 해 줬어요. 심지어 묵시문학 책에라도.
에녹이란 사람은 오래 전 사람인데 뭘 봤습니까? 주께서 심판한다. 그래서 신약학자들과 구약신학들이 만날 싸우는 것이, 예수님을 그냥 예수가 아니고 ‘주 예수’죠. 그 ‘주’가 신약학자들은 ‘여호와’라 하고, 구약학자들은 미쳤다 해요. ‘여호와’는 구약학자만 여호와지 왜 신약에 와서 주가 되느냐 이 말이죠. “어이, 신약학자들 여호와가 주 되는 걸 설명해봐라.” 설명 못해요. 뭐라 하느냐 하면, 성경에 나오니까 한다고 해요. 성경에 나오니까 그런다 하면 신학이 뭘 필요해요. 성경 그냥 읽으면 되지. 설명을 해줘야지. 설명을 해줘야 될 것 아닙니까.
주님께서 주의 몸 할 때 이 주 안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여호와가 들어있죠. 여호와가 들어있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 주신 언약이 들어있죠. 그럼 언약이 들어있는 것을, 재미있는 것은, 여호와께서 언약 줄 때는 언약을 누가 이룬다 했습니까? 주가 이룬다 했지요. 그런데 여기 종말과 과거가 만나버리면 여호와께서 언약을 줘서 주께서 이룬다 이래 되지만 만나버리면 주께서 언약해서 주께서 이룬 게 돼요.
그래서 시편에 나오는 여호와 개념이 신약에서는 무슨 개념으로 바뀌었습니까? 예수님 개념으로 바뀌어버렸어요. 예수님이 자기가 해놓고 자기가 약속하고 자기가 성취했어요. 그래놓고 세상에 모든 만물이 나를 위해서 해놓고 그리고 예정도 여호와가 예정한 것이 아니고 예수 안에서 모든 것이 예정 되었느니라. 에베소서 1장 4절.
그렇다면 그동안 우리가 알았던 단선적인 하나님부터 시작해서 엘로힘부터 해서 여호와로 해서 주와 가는 이 단선적인 시간 개념으로 알았던 하나님은 뭐였습니까? 우상이죠. 그럼 뭐가 우상 아닙니까? 처음부터 예수님이 관여해야 된다. 이게 사울이 사도 바울 되기 전에는 몰랐어요. 다메섹에서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예수님이 처음부터 주가 되심을 알고 그렇게 쓴 겁니다. 모든 것이 주로 말미암아 통일되게 하심이라.
그럼 여호와는 어디 있느냐? 하나님은 어디 있느냐? 없지요. 주님이 나타나야 그 배후에 아버지가 계시니까. 그동안 사람들이 자기 죄인 상태, 아담의 죄를 짓고 난 뒤에 ‘여호와, 여호와. 주여, 주여’ 하는 것 전부다 허구라. 거짓말이었습니다. 거짓말에도 불구하고 진짜 주님은 언약을 통해서 주를 모르는 사람에게 주의 역사와 주의 주신 은혜를 그동안 누려왔던 거예요. 누려왔는데 그들은 오해하기를 내가 여호와 불렀기에 은혜 받은 줄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여호와에게 부름 받은 선지자는 만날 여호와 찾는 사람한테 핍박받죠. 그게 어디까지 이어지느냐 하면, 그게 예수님의 십자가까지 이어져요. 여호와를 찾는 바리새인한테 여호와로 오신 여호와가 죽임을 당하고. 무슨 말입니까? 우상이 딴 게 아니고 네가 만든 게 우상이고, 다른 말로 네 몸이 우상이고. 그런 몸으로 성전 지키고, 그런 몸 가지고 사십 년 동안 성전 지어봐야 그 성전은 부서져야 됩니다. 그래서 아담의 몸은 죽기 위해서 생긴 몸이에요. 죽어야 돼요. 그리고 이 세상은 아담을 죽이는 장치입니다.
[복음의 칼럼]에서 ‘세상=죽이는 장치’ 그 글 내 마음에 맞던데. 세상은 우리를 살리는 장치가 아니고 죽이는 장치인데 우리는 아담의 속성을 받아서 자꾸 살라고 하니까 세상 현실과 안 맞는 거예요. 안 맞으니까 예수님도 미워하게 되고. 자기 안 살려준다고. 목사가 개척 교회하는 것은 하나님이 개척 교회를 통해서 그런 식으로 죽이려고 하는 겁니다. 목사가 개척 교회해서 살려고 하니까 이게 핀트가 안 맞는 거예요.
예언이란 바로 종말과 현재를 휘게 해서 같이 만나게 함으로 말미암아 우리 자신을 떠나서 지금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 누구 손에 달렸나를 알게 하는 것,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흔히 이해하는 은혜로 산다는 것을 알게 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죽어가는 존재로 만드신 거예요. 은혜 없이는 못 산다는 것. 그게 유다서의 핵심이에요. 여기 무슨 윤리가 나오고, 도덕이 나오고. 기가 차요.
그래서 주일날 설교했잖아요. 눈동자 움직이는 것도 은혜라고. 전에는 내가 움직였는데. 뭔가 움직인다는 자체가 은혜에요. 나만 움직이는 게 아니고 바깥에 차가 움직이는 것도 은혜고, 나를 둘러싼 것도 다 은혜고, 그 안에 있는 나도 은혜고. 은혜 아닌 것이 하나도 없어요.
그 다음에 봅시다.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경건을 쌓으라는 말이 아니고, 마지막 때 종말의 입장에서 보니까 경건 아닌 게 없더란 말이죠. 정죄 받을만한 세상이란 말이죠.
“목사님, 노아는 구원받았잖아요.” 노아는 주께서 은혜 줘서 구원받았지요. 말 똑바로 합시다.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했지요. 단독적으로 구원 못 받습니다. 방주가 누구 아이디어입니까? 노아 아이디어입니까? 그 생각 안 해봤습니까? 노아는 착했으니까 구원받을 것이다. 아이고, 방주 없이?
방주 설계도가 착하다고 나옵니까? 나는 교회 안 다녀도 착하다고. 착하면 십자가 개념이 떠오릅니까? 십자가 개념이 언제 떠오르는지 알아요? 지독하게 나쁜 놈이라 할 때 떠올라요. 자기가 착한 인간인데 어떻게 십자가가 떠오릅니까. 나는 교회 장로라면 무서워요. 장로치고 안 착한 사람이 없어요. 다 착해요. 다 훌륭하고.
목사야 워낙 경건한 사람들이니까 ‘죄인입니다. 할렐루야.’ 이러지만 장로는 안 그래요. 교회 봉사한다고 목돈 바쳤고, 단독주택 팔아서 교회 진다고 바쳤고. 그게 십년, 이십년 계속 가요. 그래서 복음 전하면 제일부터 장로부터 삐지고 그러면 당회장이 압력 받아서 나가달라고. 그렇지요. 경험상 안 그래요? 난 너 붙들라 하는데 장로가 싫어해서. 안 그럽니까. 난 많이 느꼈는데.
자기가 착한 게 어떻게 십자가가 보입니까? 그래서 어떻게 해소하는지 알아요? 십자가를 믿을 정도로 착하다 이래 나와요. 그게 바로 불경건입니다. 경건치 않은 거예요. 왜냐하면 종말의 심판은 심판의 기준자가 다른 말로 심판주죠. 심판주가 내신 문제가 있어요. 이래야 구원받는다는 것은 누가 문제 냅니까? 심판주가 문제 내야 되지 자기가 자기한테 문제 내놓고 이 정도 풀었으니까 구원받지 않겠는가? 그건 니 생각이고 일방적 생각이고. 에녹은 계시 받았습니다.
정리해봅시다. 목사님, 예언이 뭡니까? 심판주가 내는 기준이 예언이에요. 자기가 자기한테 경건하면 소용없습니다. 다시 이야기할게요. 노아가 아무리 경건해도 노아 머리에서 방주의 설계도면이 안 나옵니다. 그럼 왜 나오느냐? 동행하신 분. 누구? 하나님이 동행하셔서 동행하신 분에 의해서 그 설계도면이 나오게 돼있어요. 그럴 때 노아는 방주도 은혜고, 그동안 동행하신 것도 은혜고, 나 같이 부족한 것을 동행해서 그 구원의 방법을 알게 하신 것도 은혜고, 그 은혜가 매일같이 제시된다는 것도 은혜입니다. 그 사랑이 모든 두려움을 쫓아내나니.
16절에 봅시다. “이 사람들은 원망하는 자며” 사람이 원망 왜 합니까? 불만을 왜 합니까? 여러분 문제 냅시다. 여러분, 도적질이 나쁩니까, 도적질해서 물건을 자기한테 자기 것이 되는 것이 나쁩니까? 대구강의에서 문제 냈어요. 연세 많은 집사님에게 물어봤는데 정답을 냈어요. 도적질이 나쁜 것이 아니고 도적질한 것도 내 것이라 여긴다.
그러니까 창고 있는 게 문제에요. 창고 있으면 필히 어리석은 사람이 될 수밖에 없어요. 창고 가득 찰 때 성경 본다? 힘들어요. 그런데 창고 도둑맞았다. 그때 성경 다시 보게 되죠. 어제 강의에 그런 거 했죠. 개척교회 할 때는 성경 보는데 개척교회 그만 두고 돈까스 집 한다? 성경 볼 리가 있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설교 준비하려고 성경 보지 성경 볼 리 없잖아요. 그런데도 만약 성경을 본다면, 그분은 개척교회를 해도 하나님 섬겨야 된다는 것은 변함이 없는 성도다 이 말입니다. 욕 하려고 한 게 아니고.
자꾸 이름이 뭐냐? 내 창고. 내 창고 있으니까. 창고는 채워야 맛이에요. 철학의 존재론에 있어서 화이트헤드가 발견한 게 뭐냐 하면, 껍데기만 있는 것이 아니고 존재는 존재로 있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소유권을 가지고 존재한다는 것이 화이트헤드 발견한 겁니다. 그전까지는 소유 수준이 존재된다 했잖아요. 소유가 없는 존재는 존재가 아니에요.
‘나는 존재한다’ 하면 안 되고 반드시 ‘나는 뭔가를 소유하고 있다’ 이래 말해야 돼요. 총신 나왔습니까? 그러면 반드시 그 사람은 뭘 갖고 있어요? 나는 총신 출신이라는 걸 갖고 있습니다. 반드시. 나는 누구의 남편이라는 말은 뭡니까? 나는 내 아내를 갖고 있다는 뜻이에요. 아내가 없는 죽어버린 사별한 남편은 남편이 아닙니다. 그냥 홀아비죠.
그래서 소유된 게 없으면 존재란 말을 하지도 말라는. 그렇다면 자꾸 채워야 되는데. 아프리카 사람이, 나는 부자입니다. 실례지만 한 달 수입이? 십 만원이나 돼요. 어디서? 아프리카에서 부자에요. 근데 일본 가서 일만 엔 해보세요. 거지 아닙니까. 노숙자도 그 정도 벌이는 다 한다 말이죠. 그래서 존재라 하는 건 소유인데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계속해서 끌어 모아야 되는 제대로 안 끌어 모을 때 우리는 불만과 불평하는 거죠.
지난 주 심방했다. 이번 주 교회 안 나왔다. 어떻게 돼요? 불만 생기고, 불평 생기면서 더불어 생기는 것이 두려움. 그래서 현대 똑똑한 철학자는 말하기를 사람들은 국가와 사회, 인간의 육체와 영혼을 이야기하지만 말짱 다 구라인 줄 알아라. 그러면 뭐만 이야기하면 되는가? 뭡니까? ‘공포’에요.
내가 국가를 이야기하고, 허정무 축구팀을 이야기하고, 안 그러면 북한의 핵을 이야기하고, 우리 교인을 이야기하고, 하나님을 이야기하고, 예수님을 이야기한다? 그 배경에 뭐가 있다고 합니까? 공포가 있다. 그걸 우리 주님이 알아요. 그래서 동행해 주세요. 죽은 자한테 누가 동행하느냐? 죽었다가 사신 분이 동행해요.
그래서 죽을 니 믿지 말고 이미 죽었다고 살아난 경력이 있는, 경력자, 전문가 나를 믿어라. 예수 믿고 삽시다. 오늘 강의 이상하게 끝났네. 다시 말해서 뭐냐? 공포밖에 없는 우리에게 예수 믿고 삽시다.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아이고, 우리 자식 공부 잘한다.’ 이 말은 뭐냐? 앞으로 자식이 공부 못하게 되면 그것이 나의 공포의 대상이 된다는. 아이고, 이번에 성적이 향상됐다고. 다음에 떨어지면 그것이 나의 공포 대상이 돼요. 말 끄집어낼 때마다 밑바닥에 알 수 없는 공포가 깔려있는 거예요. 그게 불만과 불평으로 나오는 거예요. 이것이 인간들 용납해줍시다. 다 같은 인간이니까.
하지만 마지막 종말에 심판주가 내는 심판의 기준에 비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안 됩니다. 비록 우리가 벌벌 떠는 것은 같은 인간이니까 이해하는데 마지막 심판주한테는 이게 성립 안 돼요. 왜? 주께서 구원해주려고 왔는데 벌벌 떨고 있다는 말은 결국 누굴 무시했다? 방주의 출입구를 무시한 거예요. 예수님이 하신 모든 말씀을 시답지 않게 여기는 것이 되잖아요. “내가 부활이고 진리고 길이요” 그 말을 귀 담아 듣지 않는단 말 아닙니까. 그럼 공포는 공포대로 남고, 예수는 안 믿고. 멸망당해야죠.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보면, 마지막 할 때 기준이 뭐냐? 믿지 않는 자.
18절에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치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기롱하는 자들이 있으리라 하였나니 이 사람들은 당을 짓는 자며” 왜 당을 지을까요? 공포. 그 다음에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은 없는 자니라” 다 우리 이야기죠. 근데 성령이 왔으니까 얼마나 감사하냐 이 말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며, 하며, 하라, 하라’ 말이죠. 여러 번 이야기했는데 해봤자 공포 때문에 다 잊어버렸으니까 다시 해봅시다.
성경에서 ‘하라’는 말과 ‘하지 말라’ 하는 말이 같은 말입니다. 왜 같은 말이냐 하면, 듣는 우리는 서로 반대로 들리겠지만 이 말을 주시는 분은 한 분밖에 없어요. ‘하라’ 할 때는 반드시 전제가 네가 뭘 안 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제가 말장난 하는 게 아니고 진짭니다. 지금 ‘하지 말라’는 것은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라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이 밑에 있는 안 하고 있는 것과 하고 있는 이 주체는 누굽니까? 우리잖아요. 그러니까 중간에 이 법 다 빼버리면 누구와 누구의 만남이에요? 이미 사신 분과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만남이잖아요.
율법을 설명할 때, 그걸 설명해야 되겠네. 예를 들어서 선풍기 틀어놨는데 “선풍기 끄세요.” ‘하라’죠. 그럴 때 뭘 염두에 두느냐 하면, ‘끄세요’ 하면 끄면 아무 문제없는데, “안 끄면 어떻게 할 건데?” 이래 나온다고.
자, 보세요. 이게 율법을 주신 이유에요.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할 때 누구를 위해서 섬긴다? 조직신학에 의하면, 피조물은 창조주의 영광을 위해서 만들어졌지요. 그렇다면 피조물의 모든 권한은 있다, 없다? 없다. 피조물의 독자적인 권한은 있다, 없다? 없지요.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했지요. 그러면 우리는 선악과를 따먹을 권한이 있다, 없다? 없지요. 그게 하나님 뜻이잖아요. 근데 선악과를 따먹잖아요. 따먹고 난 뒤에 처음의 창조와 다른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어떤 세상이냐? 그걸 율법을 통해서 보면, “선풍기 끄세요.” 하면 “안 끄면 어떻게 할 건대?” 이래 나오면, 몸이 몇 개입니까? ‘끄세요.’라는 몸 하나 있지요. 그 다음에 탁탁 튕기는 몸 하나, ‘안 끄면 어떻게 할 건대?’ 또 몸 하나 나오지요. 이 몸과 창조주의 몸만 있으면 되는데 우리는 그분에 종속, 예속 되어야 되는데 예속 되지 않은 독자적인 어떤 몸이 나온 이 관계는 바로 천사 중에서 악마와 하나님 아니고 예수님이다. 예수님과 악마의 관계가 현실화 된 거죠. 그렇잖아요.
그래서 주님께서 현재 우리 몸을 알리기 위해서 부득이 누구를 동원시켜야 됩니까? 우리를 이렇게 만든 악마를 시간을 초월해서 다 동원시켜서 심지어 짐승에다 용과 뱀까지, 옛 뱀부터 해서, 용부터 해서 같은 이야기지만. 숨지 말고 나와. 온 우주를 들쑤셔서 인간만 사는 게 아니고 인간 배후의 조종자까지 다 들쑤셔서 나오는 방법이 뭐냐?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역사요, 요한계시록입니다.
십자가 뾰족하잖아요. 십자가로 하늘과 땅과 바다 속까지 다 들쑤시면 바다에 있던 놈들까지 다 튀어나옵니다. 누굽니까? 짐승 올라오죠. 다 올라와서 그걸 계시로 만들어서 퍼지면 사람들은 뭘 느끼느냐 하면, 내가 이런 짓을 하는 것이 전부다 배후에 마귀의 괴물이 작용해서 그렇구나 하는 것을 성도한테는 알게 하죠. 그러면 여기서 어찌 할꼬? 어찌 하기는 뭘 어찌 해요. 예수님께서 뭐 때문에 죽었는데. 들쑤시는 그 작대기 있잖아요. 이걸 가지고 일곱 인이라 합니다.
봉인하는 걸 가지고 예수님이 와서 십자가 피로 열면 그 봉인 한데서 그동안 감춰진 묵시들이 그러니까 악마와 주님 그 사이 관계가 인간 세계에 퍼져있다는 겁니다. 퍼져있을 것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은 시간을 초월하니까. 이전부터 다 퍼져있었음을 재확인하는 과정이 바로 요한계시록입니다. 다음에 요한계시록 해야 돼요.
그러니까 이것은 ‘하라’, ‘하지 말라’ 하는 율법은 작대기 줘서 우리가 얼마나 예수님, 하나님 하지만 평소에 독자적인 단독적인 영역을 내 몸을 구축하려고 애쓰는가를 쑤시는 게 법이에요. 하나의 예를 들면, “예수님, 저는 어릴 때부터 십계명 다 지켰습니다.” 예수님이 작대기로 뭘 쑤십니까? 그러면 모든 다 팔아 날 좇으라 하니까 근심되어 돌아가죠. 근심이 뭡니까? 공포죠. 이걸 다 바치면? 난 안 되지. 난 못 살아. 죽는다는 공포, 죽음의 공포.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죽음에 두 가지. 유월절 죽음하고, 이건 이번 주 설교해야 되는데, 나의 죽음하고 달라요. 유월절 보면 그리스도 몸이 죽잖아요. 그리스도 몸이 죽으면 온 우주가 변합니다. 그런데 죄송합니다만 저와 여러분이 죽음은 개죽음입니다. 아무렇지도 않아요. 누가 죽었나. 이럽니다.
그래서 죽은 자로 하여금 너는 날 따르라. 진짜 죽음을 보여줄게. 진짜 죽음이 뭔지 맛보게 해줄게. 아버지 죽은 것 말고. 십자가 죽음이 진짜 죽음이 돼요. 온 우주까지 신경 쓰는 건 예수님 죽음이지. 죄송합니다. 내 죽으면 신경도 안 씁니다. 내 죽음 해봐야 개죽음됩니다. 고맙게도 나의 죽음을 예수님의 유월절 죽음과 연결시켜주는 건 성령께서 그렇게 하죠. 살아있을 때도 연결 돼요.
마태복음 10장에 네가 말한 것은 네가 아니라 네 속에 성령께서 말한다. 이미 성령께서 우리 속에 와서 장차오실 주님과 시간을 초월해서 연결되게 되면 우리 죽는 것은 죽음이 아니고 안식이고 쉬는 겁니다. 죽어도 살아요.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이미 예수님께서 그 말을 하실 때는 바로 이런 유월절이라든지 우리의 몸이 단독자라는 걸 다 아시는 상태에서 내뱉었는데 마리아, 마르다는 힘이 없어서 그걸 알 수가 있나. 자기 오빠만, 자기 공동체만 결속된 가까운 자기의 동행하는 여럿 몸만 생각하지 한 몸이란 건 생각 못합니다.
율법이란 바로 들쑤시는 작대기. 그래서 성령 이야기하기 전에 반드시 율법 이야기를 해줘야 돼요. 그래서 율법은 복음을 댕겨주는 몽학선생이에요. 하나의 세트에요. 병마개 따야 삼패인 먹는 것처럼, 뱀 따야 주어먹습니다.
그 다음에 봅시다. 22절. “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 또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불 심판은 어느 시점입니까? 노아 시점이 아니죠. 모세 시점이 아니죠. 다윗 시점도 아니죠. 불에서 구원이라는 것은 베드로후서 3장에 의하면 마지막 심판이죠. 마지막 심판을 미리 당겨서 이야기해요.
24절에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 자” 마지막으로 이것 이야기하고 마치겠습니다.
다시 봅니다. ‘하라’, ‘하지 말라’가 누구 몸에서 나온다 했습니까? 율법을 주신 주님의 몸에서 나오죠. 주님은 심판주죠. 심판주로 오셔서 하라했죠. 그럼 우리는 심판 받아 마땅하잖아요.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심판주가 구원한다는 말은 ‘하라’, ‘하지 말라’를 주께서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덮치게 해서 우리는 기어이 마지막 때 흠 없게 서게 하실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8절. 뭐죠? 못 외운다. 다 같이 해봅시다. 시작.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가지 견고케 하시리라” ‘하라’, ‘하지 말라’고 율법 주신 그 분이 이제는 ‘하라’는 어떤 ‘하라’입니까? 끝까지 지키시리라는 ‘하라’를 주셨단 말이죠. 그럼 우리는 오게 되면 뭐로 바꿔요? 내가 하는 것처럼 바꿀 때 만날 얻어맞는 거예요. 환난 중에 인내해야 돼요. 환난이 있어야 더 이상 자기에게 기댈 게 없게 만들죠.
25절.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제 이름 이야기죠. 주 예수로 말미암아 나로 말미암아가 아니라 나의 경건으로 말미암아가 아닙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만고 전부터 이제와 세세에 있을지어다” 왜? 마지막이기 때문에. 마지막 되면 모든 앞에 창조부터 해서 모든 것이 누구의 권위였고, 누구의 계획이었습니까? 주님의 계획이었고, 공로였잖아요. 그러니까 그 예수님을 이제 알게 되었으니까 나 되는 것도 전부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이 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고 이런 이야기를 듣고 같이 성경 보게 한 것도 예수님 증거하라고 모인 줄 압니다. 우리 증거하지 말고 대단한 체 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고 사랑이 늘 덮쳐서 천국까지 이끌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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