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710-(2) 서울강의녹취 : 에베소서 제 40강
20090710-(2) 서울강의녹취 : 에베소서 제 40강
이름 : 오용익(IP:211.194.56.80)
에베소서 제 40강 (이 근호목사, 2009년 7월 10일-(2), 서울의존교회)
지난 시간에 제가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성도는 새삼스럽게 뭘 할 것도 없이 성도된 자체가 이미 모든 것을 다 갖추었기에 새삼스럽게 추가적으로 뭘 더 자기에게 할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찾아보면 다 나오는데 괜히 우리가 세상 사람들처럼 그냥 밥이나 먹고 출세나 하려고 살다 보니까 현재 하나님께서 감추어 두신 성령의 검, 믿음의 방패, 의의 흉배, 이 모든 것을 자꾸 잊어 버려요.
잊어버릴 때마다 하나님께서 내 일을 잘 안되게 하시고 뭔가 일 꼬이게 하심으로 그 가운데서 보면 ‘아하, 내가 참 구원받은 사람이지. 구원된 사람 같으면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인데 나는 내 이익만 너무 챙겼구나’ 하는 것을 짧은 순간이나마 깨닫게 하는 겁니다. ‘정신 차려. 정신 차려. 내가 세상 사람들처럼 그냥 밥이나 먹고 살다 끝내는 사람이 아니야. 나는 복음을 나타내는 사람이야. 정신 차려.’
이렇게 하면서 내 쪽에서 정신을 차리든 안 차리든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많은 일을 해 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 식으로 되는 이것이 기준인데 세상은 항상 기준이 내 몸 위주입니다. 내 몸 위주가 되면 여기 나가 있으면 여기 있는 나 보다 더 큰 것이 뭐냐? 내 가정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마다 목사들이 제일 고민하고 있는 것이 뭐냐 하면 노인분들은 교회에서 주님께 엎드려서 경배하고 있는데 젊은이들은 교회 보기를 나를 꺾고 하나님께 엎드려서 경배하는 곳으로 보지 않고 학원정도로 본다는 겁니다. 무슨 학원인가? 천국 가는데 필요한 기술을 습득하는 학원으로 봐요.
6개월 코스로 복음 알아서 다 외워놓고 죽을 때 되어서 그것 사용해서 구원받는 것. 엎드려 경배하는 것이 없어요. 자기가 누군가에게 엎드리는 것이 없고 ‘어이, 목사님, 교회여, 나에게 천당 가는 비법만 가르쳐 주면 내가 약간의 수수료 내듯이 헌금내고 받아 챙기겠고 내가 많이 바쁜 몸이라서 교회 잘 못 나오니까 언제든 죽더라도 구원받을 수 있는 방법이나 말해주세요. 십자가피?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6개월 뒤에 봅시다.’
이것을 제가 허투루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교회 이야기입니다. 중학생들은 예배시간에 휴대폰 들고 있어요. 전에는 고등학교 3학년 되면 교회 안 나왔잖아요. 지금은 고등학교 1학년인데도 부모가 교회를 안 보내요. 1학년때부터 조져야 겨우 대학에 간다는 거죠. 그 가정은 남의 가정이 아니고 누구의 가정이기 때문입니까? 나의 가정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성경말씀을 누구 중심으로? 나 중심으로. 나 잘되기 위해서 말씀을 줬다는 거예요. 이것은 뭐가 아닌가? 비밀이 아니에요. 반드시 복음으로 구원받을 때는 세상 사람들 눈으로 보기에 어리석게 보이고 세상 사람들이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것으로 인하여 우리가 구원받아야 돼요. 사람들 보기에 어리석게 보이고 부끄럽게 보이는 그런 방법이 십자가에 담긴 내용입니다.
그래서 남들이 깨닫지 못하고 어리석게 보이는 그 구원의 비밀을 우리가 알게 되면 우리속에 있는 그 구원의 비밀 때문에 우리도 세상에서 쪼다 되고 어리석은 자 되고 무시당하고 그렇습니다. 그게 얼마나 영광스러운 겁니까? ‘나의 의와 내 복음으로 인하여 핍박을 받으면 기뻐하라 너희위에 복이 있느니라.’(벧전 5:14)
‘복받은 줄 알아라. 이것들아!’ 하는 거죠. 선배님, 하면서 주님 앞에서 좋아해야 됩니다. 뭐든지 내 몸위주로 좋아라 하면 그것이 비밀이 아닙니다. 진짜 복음은 비밀입니다. 이것이 예레미야 23장에 보면 천상회의가 나옵니다. 어려운 이야기 합니다. 시간개념을 보통 수평개념으로 보잖아요. 성경은 수평개념 말고 수직개념으로 봐요.
수평개념은 과거-현재-미래가 되지만 수직개념으로 쏘아버리면 과거든 현재든 미래든 관계없이 지금 바로 이 자리에서 우리를 쏘아볼수 있는 겁니다. 정낙원목사님 설교 보면 이렇게 했어요. ‘태양은 미국가나 영국가나 어디를 가도 태양은 한 태양이다.’ 여러분이 차를 타고 가면서 달을 보시게 되면 수킬로미터를 달려가도 맨 달은 그 달이죠.
어디서 믿은 예수는 그 예수입니다. 우리 외부에서 은은한 달빛을 비추고 따뜻한 햇빛을 비추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그 달빛과 햇빛의 은혜에 대해서 언제 알았습니까? 사람들은 자기가 애써서 노동한 그 가치만 귀한 줄 알았지 은은하게 비추는 달빛과 햇빛과 별빛의 고마움을 몰라요. 얼마 전에 비 안온다고 얼마나 하나님을 원망해 댔습니까? ‘비를 주옵소서’ 기도하면서.
‘여러분, 회개합시다. 혹시 압니까? 회개하면 비를 주실지’ 이것은 회개하는 이유가 따로 있었다는 거지요. 자기 몸, 내 가정, 내 나라를 위해서, 자기를 위해서 회개하고 기도하는 거예요. ‘하나님, 비 좀 주세요. 왜냐고요? 그래야 내가 평안해 지니까요.’ 모든 기도회의 기도가 다 이래요. 세상의 어느 교회가, 의존교회에서 건너다 보이는 저 다른 교회들이 ‘하나님 아버지, 의존교회 부흥케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는 교회를 봤습니까?
항상 내 교회, ‘나’를 위함입니다. 그것은 비밀이 아닙니다. 나를 위해 사는 것은 비밀이 아니고 어릴 때부터 타고나는 겁니다. 오늘 KTX 6호차에 탔는데 거기에 엄마가 어린애를 데리고 탔어요. 그 애를 보면서 ‘나는 잠 다잤다’ 했지요. 애가 울어 퍼 대는데 엄마도 한 고집 하데요. 엄마가 애를 데리고 밖에 나가지를 않는 거예요.
누가 자리 차지할까봐서 그랬는지, 애는 한 시간 반 동안 울어대고 차안에서 자는 사람 다 깨워놓고. 제가 그랬지요. 엄마의 품위는 없습니다. 아무리 엄마가 하버드를 나오고 박사를 따고 해서 얻어진 그 고상한 품위, 애 업고 기차를 타보라는 거예요. ‘애 데리고 나가주세요’ 하면 거기에 무슨 품위가 있습니다. 애가 오줌 싸고 똥 싸대는데 무슨 품위?
애 젖 먹인다고 젖 턱 꺼내놓고, 처녀 때의 그 젖이 아니고 몸이 이미 아닙니다. 밤 잠 못자고 애 보다가 애가 잠들면 그제야 애하고 같이 쓰러져서 잠이 들고 하는데 거기에 무슨 엄마의 품위가 있습니까? 인간의 몸이라는 것은 자기의 몸 자기 맘대로 안되고 타인의 몸에 의해서 영향을 받게 되어 있어요. 세상은 자기 맘대로 못살아요. 남이 떠밀면 밀리게 되어 있어요.
이것은 비밀이 아니에요. 예레미야 23장 21, 22절에 보면 ‘이 선지자들은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달음질하며 내가 그들에게 이르지 아니하였어도 예언하였은즉 그들이 만일 나의 회의에 참예하였더면 내 백성에게 내 말을 들려서 그들로 악한 길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게 하였으리라’ 라고 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회의에 참석도 안했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내지 않았다는 말이죠.
분명히 하나님께서 그들을 안 보냈습니다. 목사라는 직업이 사회에서 점잖고 고상하다는 식으로 약간은 먹어주는 직업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보내지도 않았는데 목사하고 안수하고 기도하고 하나님께서 보내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스스로 성령받았다고 하고 설교하는 거죠.
이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기에 망정이지 제가 만일에 ‘여러분, 하나님이 보내지도 않았는데 왜 목사 했습니까?’ 한다면 그 사람들이 말하기를 ‘다 그런 것 아닙니까?’ 라고 할 거예요. 뻔하잖아요. 돈 되는데 사람들이 모이는 것이 뻔한 세상이치 아닙니까? 제 처제가 오래도록 일본에 있다가 나왔는데 일본 목사에 대해서 말하기를 일본의 목사는 그야말로 거지, 노숙자신세랍니다.
교인들이 그만큼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한국의 목사들 보고 있으면 기가 차다는 거예요. 한국교회가 부흥되었다고 하는데 아무리 봐도 부흥된 것이 아니고 사기를 쳤어요. 하나님이 보내지 않았어요. 천상회외의 참석도 안 해 봤고 그 천상회의에 참석하게 되면 나올 때는 반드시 비밀로 나오지요.
여러분이 구원받았다는 것이 비밀로 왔기 때문에 구원받은 그 사람은 항상 남들 보기에 어리석게 보이고 비밀스러운 존재가 됩니다. 항상 이렇게 돼요. 마치 엘리야처럼. 그러나 구원되지 않은 사람은 사람들에게 납득이 됩니다. 비밀이 아니기에 그렇습니다. 사람들에게 어떻게 납득이 될까요?
사람에게 납득된다는 말은 사람은 무슨 중심이다? 내 몸 중심이죠. 그러면 사람들에게 관심 있는 것은 뭡니까? 나의 건강, 나의 가정의 행복, 자기가 투자한 교회의 번창과 부흥, 크게 성공하는 것, 정복력의 확장, 자기 존재가치를 한껏 드러내는 것, 이 모든 것 앞에 전부 ‘나’ 가 다 걸려 있어요. 이것은 비밀이 아닙니다. 이것은 타고난 거예요.
어린애들도 엄마들 듣는 것 같지만 절대로 엄마 말을 듣는 것이 아니고 엄마를 이용해요.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지 엄마가 맛있는 것을 준다는 것을 알고 그대로 이용합니다. 이것이 타고났어요.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우리 애는 엄마에게 효도를 합니다’ 라고 하는데 저는 지금까지 부모에게 효도하는 자식을 본 적이 없습니다.
효도라고 말하는데 효도라고 할것이 아니고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가정이기주의’ 효도라는 것은 실상은 가정이기주의를 말합니다. 또는 가문이기주의죠. ‘그러면 목사님이 말하는 진정한 효도는 뭡니까?’ 진정한 효도는 이겁니다. 여러분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죽은 자는 죽은자로 장례한다는 것, 효자 났습니다. 그게 효도입니다. 그래서 효도는 이세상 아무도 할수 없습니다.
그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기주의, 가정이기주의, 자기 가정만 화목하면 된다는 겁니다. 어떤 인간도 효도하는 인간이란 없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사람도 없고 도적질 안하는 사람도 없고, 탐내는 자체가 이미 도적질이고 음란한 생각을 품는다는 것 자체가 이미 간음이고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이미 살인죄고 겉옷 달라고 하는데 속옷을 달라고 하는것도 나쁜 인간입니다.
잘 들어보세요. 돈 빌려 달라고 했는데 그냥 빌려 주지 않은 것은 다 산상설교에 어긋납니다. 은행에서 직원이 돈을 대부해주면서 이자를 받을 때 성경에 따르면 그것은 나쁜 인간입니다. 성경에 ‘누가 와서 돈을 꾸어달라고 하거든 거저 주라’ 고 나옵니다. 그리고 ‘먹을까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를 걱정하는 사람들은 이방인들입니다.
빗방울 한 방울 한 방울에 감사 못하는 인간들도 이방인들입니다. 매일 아침에 일어날때마다 태양에 감사못하는 그것도 이방인입니다. 이 세상 어떤 인간도 산상설교 지킬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현재 우리는 비밀을 원하는 것이 아니고 현재 살고 있는 내 몸이 신이 되었어요. 신이 있는데 어느 신을 섬김니까? 날 섬겨야 되지요.
그래서 교회 올 때 젊은 사람들은 나를 영원불멸의 존재로 이 내 몸을 영원히 멸하지 않는 불멸의 존재로 만들 방법이나 알려달라는 거예요. 어떻게 하면 천당 가는지 그거나 챙겨달라고 우기는 거지요. 그것은 살릴 영혼이 아니고 죽일 영혼입니다. ‘당신은 죽일 영혼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집에 가서 기다리세요.’
천상회의의 내용이 지상에 오면 비밀이 되는데 그 비밀이 아니면 하나님께서 보내준 바의 뜻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23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24절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기를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라고 합니다.
32절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거짓 몽사를 예언하여 이르며 거짓과 헛된 자만으로 내 백성을 미혹하게 하는 자를 내가 치리라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으며 명하지 아니하였나니 그들이 이 백성에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으며 명하지 아니하였나니’ 그런데 어째서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한다는 겁니까? 마태복음 7장에 나오지요?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쫒아내고 병을 고치고 주의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니까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누구세요? 누구시죠? 난 당신 모르겠는데?’
그래서 오순절날 성령이 와야 했어요. 12제자가 어디로 갔습니까? 예수님 십자가 죽으시고 부활하신 뒤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모였습니다. 뭐 때문에 모였습니까? 고기 잡으려고 모였습니다. 성령 안 받으면 그렇게 돼요. 고기는 왜 잡습니까? 비밀 때문에? 아닙니다. 그 전에 그들이 복음의 비밀을 받았어요. 아무리 그들이 말씀을 듣고 교육을 받아도 소용 없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누구 몸이 살아 있다? 내 몸이 살아 있는 한 우리는 복음을 전할수 없어요. 그런데 성령이 오고나면 그 때부터는 뭡니까? 젊은이들은 뭘 볼것이고? 환상을 볼것이고. 드디어 성령이야기가 나오잖아요. 마지막때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피가 되리라’ 그런데 누구든지 주 예수를 믿는자는 뭘 받는다? 구원을 얻는다.
사도행전 2:16-21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와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마지막 때에 멸망당하더라도 주 예수님 자체가 비밀이에요. 예수님이 비밀이에요. 예수님이 비밀이기 때문에 내 몸과 관련되는 것이 아니고 내 몸을 비켜가서 말씀과 직접 관련되어 있습니다. 내 몸을 비켜간다는 것은 뭐냐? 이 몸을 죄인으로 부정해 버리죠. ‘예수님, 제 가정을 좀 돌봐주세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네 가정은 내 복음을 위해서 쓰여져야 된단다.’
‘아니 그 말이 아니고 내 가정, 내 가정을 돌봐달래니까요?’ ‘글세 네 가정은 네 소유가 아니고 나의 소유인데 오직 내 복음을 위해서 쓰여야 될 가정이다.’ 복음을 위해서. 그러니가 고린도전서에 보면 ‘하나님 저 결혼 시켜 주세요.’ ‘아니야. 복음을 위해서 결혼해’ 정욕이 불같이 올라오거든 결혼 하기는 하는데 구태여 하기 싫은 결혼을 억지로는 하지 말라는 거죠. 왜?
이것은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이고 제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니까 오해하지 말고 들으세요. 이것은 비밀입니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주를 위해서 어떻게 주를 기쁘게 할꼬’ 라고 하다가 결혼하고 난 뒤에는 ‘남편을 위해서 어떻게 기쁘게 할꼬’ 라고 나오더라는 말이죠. 왜 갑자기 주에서 남편으로 변했습니까?
이 남편이 누구하고 관련되어 있습니까? 나와 관련되어 있어요. 남편이 튼튼해야 돈 벌어다 주잖아요. 남편이 비실하면 돈벌이가 안돼요. 그러니 결혼하기 전까지는 주여 주여, 하다가 결혼하고 난 뒤에는 내 남편 내 남편, 한다는 거죠. 이것은 남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주여 주여, 하다가 결혼하고 나서는 그저 내 아내, 내 아내, 하는 겁니다.
나중에 여자들은 애기를 낳으면 남편도 안 봐요. 뭘 봅니까? 내 새끼. ‘어느 놈이든 내 새끼 건드리기만 해 봐라. 내가 용서를 안한다.’ 자식외에 눈에 뵈는 것이 없는 것이 오늘날 교회 나오는 젊은 분들의 특징이에요. 그저 자기 새끼 피아노 가르치고 공부시키고 그것 외에는 아무 생각이 없어요.
교회 와서 복음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학원이 용하다고 소문이 났어요? 어느 선생이 족집게처럼 잘 가르친다고요?’ 그저 이야기하는 테마가 그거예요. 그게 무슨 비밀, 무슨 그런 비밀이 다 있어요? 천상회의, 이것은 어떤 인간도 예상하지 못했고 미가의 경우에 천상회의에 참석했어요.
예레미야도 마찬가지고 이렇게 부름 받아서 천상회의에 참석한 사람에게만 그 내용을 알려줘서 그렇게 하나님의 천상회의에 참석했기 때문에 죽일 영혼은 죽이고 살릴 영혼은 살려서 사람위주가 아니라 무슨 위주? 비밀위주로 복음위주로 살아가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마귀를 이기는 오늘날의 성도들의 특징입니다.
‘아니, 목사님 그런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그런 사람들이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아니요. 저는 내새끼밖에 모르는 인간인데요.’ 글쎄요. 성령께서 여러분을 언젠가는 깨닫게 하실 겁니다. 깨닫게 하셨다가 또 3분 지나면 다시 잊게도 하시고 2분뒤에 다시 깨닫게 하시고 5분뒤에 다시 잊게 하시고, 하여튼 매일같이 왔다 갔다 하면서 깨닫게 하시는데 이 비밀 때문에 이 십자가 복음 때문에 내가 살아났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그런 하루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에베소서 6장 19절을 봅시다.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그 다음에 뭡니까? ‘복음의 비밀을’ 그 다음에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이게 무슨 뜻이냐? 천상회의에 우리 중에 누가 참석하셨습니까? 천상회의에 참석하신 분은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참석한 정도가 아니고 천상회의를 주재하신 분이지요.
성경의 모든 말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 22장까지의 모든 말씀이 어디에 모이는가 하면 복음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출애굽기, 민수기, 이렇게 단선으로 가지 마시고 중심에 복음을 놓고 창세기도 무엇을 향하여? 복음을 향하여. 출애굽기도 민수기도 복음을 향하여. 더 어렵게 한다면 창세기 출애굽기 합해서 복음을 향하여. 창세기 출애굽기 민수기 합하여 복음을 향하여.
신명기도 복음을 향하여. 창세기 출애굽기 민수기 신명기 전부 다 합쳐서 복음을 향하여.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그리고 마태, 마가 누가 요한도 에베소서도 전부 다 복음을 향하여. 복음의 비밀이죠. 에베소서 3장 9절을 누가 읽어보세요.
에베소서 3:9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영원부터 감취었던 복음의 비밀’ 이죠. ‘창세전부터’입니다. 그렇다면 이 복음의 비밀안에 뭐가 담겨 있습니까? 온 인류의 처음과 마지막의 역사가 다 담겨 있겠지요. 그렇다면 이 그림을 이렇게 다시 그리겠습니다. 후지산을 아십니까? 후지산은 일본에 있습니다.
후지산 정상에 눈이 쌓여 있다고 치고 여기에 창세전부터 있었던 비밀이 있다고 합시다. 이 비밀이 부글부글부글! 그렇다면 창세기부터 올라오는 전 인류의 모든 것이 어디에 집중한다? 창세전부터 있었던 비밀 여기에 집중하고 여기서부터 무엇이 흘러나옵니까? 복음의 비밀이 흘러나오지요.
여기서 열두제자 + 한 제자가 나오지요. 이 한 제자가 누굽니까? 이방인을 위해 선택된 제자, 사도바울입니다. 사도바울이 다메섹에서 올라오다가 복음의 비밀을 알고 열두제자가 성령 받고 난 뒤에 뭐가 나오지요? 이 밑에서 차고 있던 모든 것이 막 흘러나오겠지요. 여기 아브라함도 있을 것이고 예레미야도 있을 것이고.
그들의 특징은 하나님께 부름 받아서 이렇게 흘러나온다는 겁니다. 나오게 되면 그들이 말하는 모든 내용은 다 어디로 소급됩니까? 창세전에 있었던 이 비밀 하나에 소급되는데 이 비밀을 사도바울은 십자가복음이라고 합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다른 복음이라는 것은 사도 자신이 이야기하지 않는 복음입니다.
사도가 이야기한 복음이 아니면 그것은 천상회의에 참석하지 않고 전하는 악마의 복음이라서 저주를 받고 사도가 전하는 복음 다시 말해서 십자가복음만이 진짜 복음이라고. ‘그러면 이목사 당신은 참석한적 없잖아?’ 여기 계신 김 목사도 참석 안했고. 그런데 참석 안해도 어떻게 그것을 이야기 할 수 있는가?
에베소서 6장 18절에 보면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무시로’ 나 훈아 노래가 있지요. 이것은 시도 때도 없이 그런 말이죠. ‘성령께서 시도 때도 없이 기도하고 간구하면서 복음을 위해서 살아라’ 하는 뜻입니다. 성령께서 일 하시는 것이 뭐냐 하면 복음의 비밀을 담대해 전할 수 있도록 성령께서 기도한다 그 말입니다.
열두제자가 성령을 받지 아니하면 그들은 절대로 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전할 수 없습니다. 왜? 자기 몸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면 성령을 받은 사람, 곧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함’(고전 2:12) 에 해당된 사람입니다.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현재 내 속에 있는 은혜 들을 깨우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 속에 은혜가 따로 있습니까? 우리 자체가 은혜입니까? 우리 자체가 은혜입니다. 어느 것 하나 은혜 아닌 것이 없지요. 그렇다면 우리 몸은 몽땅 다 내 것이 아니고 누구의 것이다? 주께서 값을 주고 산 우리 몸이 몽땅 우리 것이 아니고 주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령의 역사가 없고 성령의 감동이 없으면 이 몸을 누구의 것이라고 봅니까?
어쨌거나 내 것이죠. 여기 부모님들 계시고 애들이 있는데 그 애들이 누구의 애입니까? 곧 죽어도 내 아이죠.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중간에 하나 들어가죠. 주께서 나를 통해서 쓰시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거 한 3초 갑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아이를 낳은 내 몸이 내 몸이 아니고 주의 몸인데 주의 몸에서 태어난 아기니 내 것이 아니고 주의 것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육이 아니고 영이 되는 겁니다. 같은 몸이라도 성령이 있으면 영이 되고 성령이 없으면 육이 되어서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영으로 난 것은 영’ 이 됩니다. ‘그렇다면 육이 되었다가 영이 되었다가 왔다 갔다 한다는 말입니까?’ 그것이 아니고 성령 받은 사람은 놀랍게도 내가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알게 되고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용을 써도 여전히 최후로 남는 것은 ‘역시 내 몸은 내 것’ 이라는 것만 남습니다.
그리고 ‘내 몸은 내 것이다’ 라는 이 생각은 우리나라 목사들이 대부분입니다. 교인들에게는 예수 이야기하지만 마지막에는 고백합니다. 속으로 고백하죠. ‘나는 지금까지 예수를 믿은 적이 없다.’ 그러면 무엇을 믿었는가? ‘나는 교회를 믿었다.’ 교회는 사람들이죠. 주님의 교회는 주님이 갖고 있는데 나는 주님을 느끼지를 못했다.
‘나는 유력한 사람들, 돈 많은 장로들을 믿었다.’ 목사는 교회, 사람을 믿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처음에 교회 괜찮을 때는 주님이야기 하고 성경이야기 하다가 결정적일 때, 자기가 유리하다 싶을 때부터는 정치이야기, 교회 법 이야기 나옵니다. 안산에서 그 이야기 했지요. 사랑이 없으면 뭐가 나온다고 했습니까? 꼭 법이 나와요.
법을 내놓는다는 말은 지금 무엇이 사라졌다? 사랑이 사라졌다는 말입니다. 사랑이 사라지면 법을 이야기합니다. 법이 나온다는 것은 두렵고 무섭다는 뜻이에요.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쫒나니’(요일 4:18) 사랑이 있으면 법이 필요 없어요. 사랑은 법을 초월했기 때문입니다. 이미 사랑이 왔는데 법이 왜 필요합니까?
‘엄마, 내가 뭘 지키면 엄마의 아들이 되는데?’ 그것은 물을 필요 없어요. ‘너는 내가 이미 사랑하는 아들이란다.’ ‘그것은 내가 알고 내가 뭘 지킬 경우에만 내가 아들 되느냐고?’ ‘너는 태어날 때부터 내 사랑이니까 너는 뭘 해도 내 아들이야.’ 그러면 법은 없습니까? 사랑 앞에 법은 없는 거예요.
그런데 애들이 언제 법 찾습니까? 꼭 나쁜 짓을 했을 때입니다. ‘엄마, 나 좀 용서해줘’ 라고 자꾸 법을 따지지요. ‘얘야, 이미 용서했다. 이미 용서했어. 네가 이런 짓을 하건 안하건 관계없이 이미 내 자식이야.’ 주님께서는 사랑으로 나오는데 우리는 뭔가 두려워서 법을 거론하지요. 일이 좀 된다 싶으면 그게 잘못될까 싶어서 ‘하나님, 헌금을 더 할까요?’ 꼭 법을 내세웁니다.
‘성경을 두 장 더 읽을까요? 전도를 할까요? 그렇게 하면 이 어려운 형편이 나아지겠습니까?’ 이런 식의 법을 내세운다고요. 사랑이 오면 사업이 망해도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고 복이 됩니다. 아까 말 한대로 사람이 죽는 것은 그 동안 산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깨닫게 해주시기 위함이라고. 그래서 사랑이 오게 되면 법이라는 것은 더 이상 있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목사들이라도 천상회의에 참여할수 없었는데 어떻게 감히 비밀을 이야기할 수 있는가? 고린도전서 2장에 보게 되면 성령이 오게 되면 은혜 주신 것을 안다고 되어 있습니다. 성령이 와야 우리 몸 전체가 그 자체로 은혜인 것을 안다면 그러면 성령이 안온 사람은 이 몸이 누구 몸입니까?
나의 몸인데 이 나의 몸은 나의 수고, 나의 의로움 같은 것으로 나의 몸이 되었다고 생각하죠. 그러면 여러분이 언제 성령이 소멸된 것을 느끼느냐 하면 ‘뭐든지 나는 최선을 다해서 뭔가 하는데 왜 내가 기대한 성과가 내 원하는 만큼 안 나타나는가’ 라고 나온다면 그것은 분명히 성령이 소멸한 거예요.
그렇다면 무엇이 죄인가? ‘뭔가 기대한다는 것’ 이것이 죄가 되는 거예요. ‘나 고 3인데 공부 많이 해서 이번에 좋은 대학에 들어가야지.’ 그게 죄가 되는 거예요. 현재 공부하게 하신 것도 은혜인데 이것은 은혜가 아니고 뭔가 성과를 얻을 때만 은혜라고 자기가 일방적으로 정해버립니다. 기대하지 않는 것이 은혜인데 기대하지 않는 것이 은혜라면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고 살아가는가?
비밀을 봅시다. 비밀은 비밀이 나왔던 곳으로 다시 우리를 회수해서 데리고 갑니다. 따라서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가 가야될 코스가 이미 확정되어 버려요. 우리의 목적지란 성령이 왔던 그 천국에 반드시 가야한다는 것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그게 비밀입니다. 우리 힘으로는 할수 없고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가야 하나님이 예비한 곳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움직일 때 그들은 뭘 로 움직였습니까?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했잖아요. 가는 곳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했다는 말은 ‘내 노력으로 살수 있다’ 하는 것을 다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갈 수 있는 것이 천국인 것을 깨닫게 하는 식으로 인도했어요.
지금도 성령께서는 나의 기대하는 것을 묵살시켜가면서 주께서 예비하신 곳으로 데려가기 위해서 지금도 은혜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 우리의 목표가 뭐냐? 그 복음이 나왔던 그 십자가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그 길을 우리가 가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복음의 비밀’은 다른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예수 그리스도이 일하심입니다.
에베소서 6:20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내가 복음을 위해서 쇠사슬에 매였다’고 해서 이 에베소서를 옥중서신이라고 부릅니다. 옥에서 쓴 편지라고들 하는데 그것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은 신학자들이 추측한 것에 불과합니다. 성경에서는 옥중서신이냐 아니냐 하는 그런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왜 쇠사슬에 묶여야 복음이 나오는가?’ 하는 겁니다.
그것은 사도바울에게 그것이 해당되었기에 그렇게 된 겁니다. 안 묶이면 복음이 안나오기 때문에 묶은 거예요. 쉽지요? ‘엄마, 아빠! 나는 왜 여자인데?’ 정답은 이렇습니다. ‘여자가 되어야 복음이 나오기 때문에 여자가 되게 한 거예요.’ 남자로 나오면 복음이 안나오게 되어 있어요. 말씀으로 창조를 했거든요.
말씀으로 창조를 했는데 ‘여자를 만들었다’ 하면 ‘아, 나는 여자가 되었다’ 라고 그냥 그렇게 하면 안되고 ‘나는 말씀을 위하여 여자가 되었다’ 라고 해야 됩니다. 저는 왜 남자가 되었을까요? 복음을 위해서 남자가 된 거예요. ‘그러면 당신은 여자로 나왔다면 복음을 못전했겠네?’ 못 전하지요. ‘왜 그런데?’ ‘내가 없으니까.’
제가 지금 말장난 하는 것 같이 들릴 텐데 가만 생각해보면 이게 맞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저는 왜 머리가 큽니까?’ 반드시 집어넣으세요. 복음을 위해서 머리가 큰 거예요. ‘됐나?’ ‘됐다!’ 끝나버렸어요. 욥이 그런 소리를 했지요. ‘하나님, 왜 저를 태어나게 했습니까?’ 하나님께서 ‘고난 받기 위해서 태어났다.’ 그러자 욥이 ‘왜 고난 받아야 됩니까?’ ‘고난 그 자체를 네가 받아야 된다’ 는 거예요.
지금 욥은 자꾸 뭘 집어넣는가 하면 ‘나’를 집어넣어요. 아까 기준이 뭐였습니까? ‘나’ 라는 기준이 내 몸에서 나오고 또 다른 기준은 감추어진 비밀이거든요. ‘너는 고난이라는 비밀을 위해서 고난을 받아야 돼’ 라는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욥은 ‘왜 내가 고난을 받아야 됩니까?’ 라고 합니다. 저 같으면 이렇게 하겠어요. ‘네가 뭔데 고난을 안 받아야 되는데? 네가 뭔데 너는 고난을 안 받아야 되느냐는 거죠.
고난 받는 것도 복음, 다른 말로 하면 비밀을 위해서. ‘저 사람은 왜 고난을 안받습니까?’ 비밀을 위해서 고난을 안받는 거예요. 제가 이런 소리를 하면 여러분이 머리가 팍팍 돌아갈 거예요. ‘주여, 주의 비밀을 위해서 한 6천억만 당겨주시고 아이의 아이큐가 200에서 약간만 모자라게 해주시고 딸은 이번에 미스코리아 진이 되게 해주시고 지금 있는 마누라는 죽어버리고 새로 시작하는 것도 좀 고려해주시고, 교인수는 너무 많이는 말고 한 8천6백명쯤 되게 해주소서.’
그러면 주님께서 ‘그것은 네 생각이고.’ 정말 설사 그렇게 될지라도 그렇게 된 것은 누구의 은혜다? ‘네가 기도해서 된 것이 아니라 주께서 그렇게 되어야만 했기에 그렇게 된 것이고 그렇게 안 되더라도 그렇게 안 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다.’ 범사에 합력하여 뭘 이룬다고 했습니까? 선을 이룬다.
모든 것이 짜여서 오직 하나님의 아들 되신 예수님만 등장하면 우리는 우리 구실 톡톡히 한 겁니다. 여기에 안경 쓰신 분들이 있는데 앞으로는 그냥 ‘내 눈이 나빠서 안경 썼다’ 하지 말고 ‘복음을 위하여’ 안경 쓰신 거예요. 나중에 수술해서 안경 벗거든 그것도 복음을 위해서 벗은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 아니면 수술도 못하거든요.
그러니까 매사가 다 은혜입니다. 한 순간도 은혜 아닌 것이 없어요. 왜 그런가? 이것이 어려운 것인데 이 어려운 것을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우리는 과거 - 현재 - 미래, 이런 뱡향으로 우리 몸을 생각합니다. 나는 과거에 있던 기억들을 모아서 현재의 나를 생각해요. 기타를 친다고 하면 ‘나는 기타를 칠줄 알거든’ 하지요. ‘그러면 너는 커피 탈줄 알아?’ ‘알거든’
기타치고 컴퓨터 할 줄 알고 영어도 좀 할 줄 아는 나, 이 ‘나’라는 보따리안에 영어하고 기타치고 컴퓨터 할줄 아는 그것이 모여서 오늘날의 ‘나’ 가 됩니다. 이 ‘나’는 과거의 나를 근거해서 미래의 좀 더 나은 ‘나’를 생각해. ‘영어를 조금만 더 잘했으면…, 머리 염색 안해도 되도록 약간만 젊어졌으면 ….’
새로 알게 된 어떤 목사님이 이야기를 하는데 제가 감명 깊게 들었기 때문에 여러 번 이야기를 합니다. 자기 교회에 연세 많은 노인들 밖에 없답니다. 그 분들이 새벽기도에 나와서 기도하면서 구하는 소원이 뭐냐? 그저 오래살고 싶다는 겁니다. 젊은 사람들이 보기에 기가 차지요. 왜? 노인들이 오래 살면 살수록 젊은 사람들이 세금을 많이 내야 되지요.
그것도 모르고 노인들은 자기 몸만 생각해서 그저 오래살고 싶다는 거예요. 자기를 부양하는 가족들은 기가 찰 노릇입니다. 그 가족들은 죽기만 기다리고 있는데. 왜냐하면 그게 효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병들어서 고통하면서 오래 사느니 하나님의 은혜로 고통 덜 받고 빨리 죽으면 더 좋지요. 게다가 비행기 여행 중에 돌아가시면 보상금 타서 그것도 괜찮고.
그래서 팔순 되어서 ‘어머니, 오래 사셔야 합니다’ 하면 이 말은 ‘어머니, 이번으로 꿑입니다. 내년에는 없습니다’ 하는 뜻이란 말이죠. ‘제발 내년에는 우리도 숨 좀 쉽시다. 나이 60이 된 며느리가 나이 먹고 시어미 모시려니 환장하겠습니다.’ 다들 안모시려 하는데 맏이라는 그 한 이유 때문에 60이 넘도록 시어미 모시는 거죠.
맏이는 왜 되었습니까? 복음을 위해서 맏이가 된 거에요. 에서가 왜 태어났습니까? 지옥에 가려고 태어났고 야곱이 왜 태어났습니까? 천국가려고 태어난 거예요. 로마서 9장에 나옵니다. 이것이 성경이 비밀이에요. 다른 사람은 모릅니다. 사람들이 이런 소리 들으면 미쳤다고 합니다. 잘못하면 맞을수도 있어요.
이렇게 과거에서 현재를 수평적으로 이루는데 어느 날 동창생을 만났는데 고급승용차를 타고 다닙니다. 고급승용차를 타는 동창생을 만난 그 순간부터 ‘저도 고급승용차를 타게 하옵소서’ 라고 좀 더 나은 것을 원하는 나로 바뀌지요.
무슨 말이냐 하면 길을 가면서 ‘어서 가서 피존하려고 담궈놓은 빨래 탈수시켜야지’ 하고 있는데 난데없이 고급승용차를 타고 지나가는 동창생을 만나면 ‘아이고, 이놈의 팔자야. 아내는 일하러 나가 자기는 집에서 놀면서 빨래나 하고 있고, 에고 주여, 내가 이꼴로 계속 살아야 되겠습니까?’ 신세타령이 늘어집니다.
동창생을 만나기 전까지는 ‘주여,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복음을 위하여!’ 이러다가 부티나게 사는 동창생을 우연히 만난 뒤에 ‘휴, 차라리 죽는 것이 낫지. 이게 사는 거냐?’ 특히 남자들은 좀 덜한데 여자들이 여고동창생을 만났을 때 ‘애는 잘 있지?’ ‘음. 근데 이번에 우리애가 MIT에 합격되어서 골치 좀 아프다. 등록금도 만만치 않고 요즘 환율이 장난 아닌데’ 하면서 자랑을 늘어놓을 때 갑자기 ‘이게 내가 사는건가?’ 하고 바뀌지요.
그러니까 이 수평적인 것은 내 몸 중심이기에 ‘나’라는 것이 수시로 바뀌어요. 그런데 이런 몸을 수직적으로 가두어 놓는 비밀이 있어요. 수직적으로 가두게 되면 여기 위(산 위에 정상에 해당되는 중심부)에는 복음이 있지요. 복음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네가 너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인데 달랑 너 구원하는 은혜가 아니고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 온 천하의 구주 되심을 알려주는 도구의 일부로써 너를 시간 속에 함몰 시겼다’ 는 겁니다.
이게 2008년도라면 2009년에도 이것이 그대로 따라오죠. 2010년도에도 따라오죠. 계속 따라오는 거예요. 따라오게 되면 이 사람이 나중에 강도가 되고 창녀가 된다고 할지라도 거지라고 해도 관계없이 수직적으로 바로 올라가 버리죠. 이것이 성령 안에서 알려주는, 후지산 꼭대기에서 당기듯이 뭔가 당겨주는 은혜가 지금도 여러분을 쥐고 계속해서 역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20절에 보면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것은….’ 만일 사도바울이 쇠사슬에 매였을 때 이 수직적인 것은 모르고 수평적인 것만 남는다면 ‘쇠사슬에 매인 것이 무엇 때문에 매였을까’ 하고 원인을 찾겠지요. ‘내가 그때 너무나 과격하게 이야기를 했다. 그때 경찰이 없을 때 이야기를 할 것을 하필 경찰이 있을 때 복음을 전해서 이 꼴 되었다. 앞으로 내가 경찰이 있을 때는 복음을 전하지 말아야지.’
이렇게 수평적으로 있을 때는 계산을 하겠지요. 그런데 수평적으로 있을 때는 ‘그 때 경찰이 거기에 있던 것도 하나님의 뜻이었고 그 경찰이 거기에 있는 줄 알면서도 복음 전한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러니 내가 쇠사슬에 매인 것은 다 무엇을 위하여? 이 복음을 위하여 매여야만 하기 때문에 매인 것이란 말이죠.
그래서 전하는데 어떻게 전합니까? ‘담대히’ 전합니다. 당당하게 전합니다. 왜? 내 몸이 내 것이 아니니까요. 내 몸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고 창세전에 말씀대로 내가 있어야 하기에 내가 있기 때문에 아주 당당하지요. 제가 바라기는 아예 이 성령이 여러분에게 귀신 씌우듯이 덮여 씌우기를 바랍니다.
옛날 노인들 챙이 넓은 모자 갖고 있잖아요. 성령의 모자를 여러분 위에 따 씌웠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수직적으로 여러분을 쫙쫙 당겨줘서 수평적으로 된 것이 사실은 모든 것이 다 수직적으로 복음을 위해서 된 것으로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기를 바랍니다. 그게 바로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는 뜻입니다.
자 끝으로 23절에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부터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이 형제들에게 있을찌어다.’ 이것이 수평적으로 과거에서 밀려오는 겁니까? 아니면 위에서 수직적으로 치고 내려오는 겁니까? 이게 수직적으로 치고 내려오지요. 그런데 왜 우리는 자꾸만 자기의 과거만 기억하고 지금 주시는 은혜를 느끼지 못하느냐는 겁니다.
아, 답답하지요. 왜냐하면 나 자신을 너무나 수평적으로만 보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을 과거의 노동으로 오늘날 내가 되었다고, 자꾸 자기의 과거로 인해서 오늘날 내가 되었다고,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을 모르고 과거 탓으로 돌리기 때문에 그래요. ‘그때 고 3때 공부좀 더 했으면 …’ 만날 과거 이야기하고 ‘미래에는 내가 공부 잘해야지…’ 만날 지금 현재를 기준으로 해서 미래를 쳐다보고 있고. 이렇게 자꾸 지평적인 것만 봅니다.
사실은 매일 매일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갑니다. 지금 저 파마한 아기, 하나님의 은혜로 저렇게 까부는 거예요. 아이 아프면 엄마 걱정이 더합니다. ‘에고, 제발 건강해서 까불기라도 해라.’ 아파서 누워 있으면 기가 막히죠. 저렇게 생동감이 넘치는데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니까 까부는 거예요. 왜 저렇게 까부는가?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서 까부는 거예요.
24절을 다 같이 읽고 마치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찌어다.’ 참 부끄럽다. 여기에 ‘변함없이’ 여기서 안 부끄럽습니까? ‘변함없이 사랑하는 사람’ 부끄럽지 않습니까? 그런데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왜? 변함없이 하도록 수직적으로 매일 같이 여러분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모를 때는 수평을 흔들어서라도 수직을 알게 하는 은혜를 주시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참새보다 더 귀하고 들풀보다 더 귀한데 주께서 친히 기르신다고 했는데 웬일인지 우리가 지금껏 내 힘으로 살아온 것처럼 그렇게 느껴지는 것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지 못해서 그런 줄 압니다. 다시 한 번 말씀을 통해서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덩어리 인 것을 잊지 말고 무엇을 해도 하나님의 인도함을 따라서 살아가고 있음을 날마다 더 깊이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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