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4장3- 9절 제목 : 예수님의 장례식
막 14: 3- 9 (예수님의 장례식)
이름 : 우리교회(IP:220.81.176.150)
본문 : 마가복음 14장 3- 9절
제목 : 예수님의 장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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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09-07-12 13:29
예수님 장례식
2009년 7월 12일 본문 말씀: 마가복음 14:3-9
(막 14:3, 개정)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막 14:4, 개정)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막 14:5, 개정)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막 14:6, 개정)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막 14:7, 개정)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막 14:8, 개정)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막 14:9, 개정)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여인의 행위로 말미암아 분위기가 갑자기 두 패로 나뉘어지게 되었습니다. 3000만 원 상당의 고가의 향수가 예수님의 머리 위에 부어진 것을 ‘낭비’라고 여기는 쪽과 도리어 ‘참된 복음을 아는 자의 행위’라고 여기는 편으로 나뉘어졌습니다. 우리는 어느 쪽입니까? 사람들이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봅니다.
들판에 소에 한가로이 풀을 뜯고 놀고 있을 때, 그 덩치 큰 소가 인간의 마음 속에 들어옵니다. 비록 그 소가 저녁이 되어서 자기 집으로 돌아가도 그 소를 본 사람의 마음에는 소의 이미지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렇합니까? 그것은 소를 기억하는 자기 자기 즐겁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인간들은 주위에서 본 이미지들을 자기 안에 끌어당겨 안정되게 붙잡아 둡니다. 이것은 오로지 자기 즐거움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만약에 그 들판의 소 앞으로 어떤 사람이 지나가도 그런 것은 별로 머리 속에 담아 두고 싶지를 않습니다. 이처럼 인간들은 자아의 안정됨을 견지하다 보니 자꾸만 자기와 타인을 갈라놓게 됩니다. 그런데 타인 속에 예수님이 있으면 어떠하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향수를 머리에 부운 여인에게는 예수님이 타인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 여인의 행위를 비난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은 어디까지나 타인 중에 하나일 뿐입니다. 세상 사라들은 믿음 없이도 얼마든지 잘도 살아갑니다. 하지만 천국에는 믿음 없이는 살 수가 없는 세계입니다.
어떤 믿음이라야 천국에 살 수 있게 할까요? 오늘 본문에서는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이 여인의 행위도 같이 전파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이 여인이 알고 있고 보고 있고 믿고 있는 믿음과 같은 믿음이 되어야 천국에 들어가는 믿음입니다. 비싼 향수를 가지고 자신을 위해 쓰는 것보다 예수님을 부각하는데 쓰는 것이 정말 고귀한 향수의 가치를 드높인다고 여긴 것이 여인이 행한 취지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에다 해석을 더 길게 끌어가십니다. 즉 “이 여인은 나 예수의 죽음을 더 빛나게 만들기 위한 장례의식”이다는 겁니다. 즉 진정 귀하고 귀한 것은 예수님의 존재가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신 사건이라는 겁니다. 죽지 않을 예수님은 귀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곧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죽게 하심으로서 모든 인간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죽어야 될 자’라는 취지에서 다루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예수님을 여인은 타인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 여인을 비난하는 자들은 여인 뿐만 아니라 예수님마저 그들에게 일개 타인에 불과한 것입니다.
인간의 죄란 자립심을 선언하고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이로서 죄란 예수님이 점점 타인으로 느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의 죽음은 단지 자신만이 죽음에 해당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개인의 죽음마저 예수님의 특수한 죽음의 의의를 알려주는 죽음으로 끌어당겨버립니다.
보통 사람이 죽음의 여부를 살필 때, 폐, 심장, 뇌 기관의 정지되었는지 여부를 살핍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죽음에 관하여 언급할 때에는 반드시 율법이 개입합니다. 사람이 죽는 것은 율법 때문이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에 근거하지 않고서는 사람을 죽이거나 저주하지 않습니다. 신명기 28장에 보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면 들어가도 저주받고 나와도 저주받고 항상 저주 아래 있다고 했습니다. 이 저주를 항상 받았다고 해서 그것으로 징벌을 면제해주지는 않습니다. 저주 끝은 여전히 저주만 이어질 뿐입니다.
죽음이란 이처럼 저주의 영원성을 철저히 하게 하는 조치입니다. 죽음 이후에는 더 이상 기회가 없습니다. 마태복음 8장에서나 누가복음 16장에서, 지옥간 자들은 바깥 어두운데로 쫓겨나 거기에서 이를 갈며 통곡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후회한다는 말입니다. 들어와서는 안 될 곳에 들어왔다는 말입니다. 달리 말해서 율법의 존재를 무시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법이라는 것이 이처럼 사람을 죽이는데도 불구하고 왜 사람들은 그토록 법을 선호할까요? 그것은 자기의 정당성을 과시하기 위해서 법이라는 것을 세우게 됩니다. 즉 사람들은 자기를 위한 법을 따로 세워놓게 됩니다. 남 좋아라는 법이 아니라 자기 좋아라는 법입니다. 그 법으로 해서 스스로 자기를 칭찬하고 자신에게 형벌을 가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법이란 독자적인 영역 확보에 필수적으로 동원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법을 대체해서 자신이 만든 법에 자신을 굴복케 하므로서 자신의 만든 법을 높이 우대하려고 합니다. 바리새인들에게 모세의 법이 주어졌을 때, 그들은 그것으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는데 동원시켰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에 대한 자기 해석보다 더 높이, 더 넓게, 더 깊게 해석하는 분이 자기네들 곁에 나타날 줄을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산상설교가 끝날 무렵에 이런 구절이 실려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마 7:28-29)
산상설교는, 기준의 인간들의 이해하는 율법 해석이 전혀 하나님 수준과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설교입니다. 요한복음 5:45-47에 보면,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할까 생각하지 말라 너희를 고발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가 바라는 자 모세니라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모세 율법은 인간을 고발하는 용도로 주어졌다는 겁니다. 즉 인간들은 자기를 죽이는 법을 가지고 자신을 살려내려고 부질없는 시도를 하게 됩니다. 모세 율법 뿐만 아니라 모든 성경이 다 그러합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자기가 지켜낼 수 있는 법적인 성격을 지니는 원칙 같은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8장에서 한 문둥병자를 고치는 대목에서, 말씀을 성취하는 것은 문둥병자가 아니라 그를 고쳐주신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셨습니다. 문둥병자는 그저 예수님의 성취성에 드러내기 위해 소집된 인물에 불과합니다. 마태복음 8:17에서 예수님은 “친히 담당하시는 분”으로 자신을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 율법이 예수님이 아니라 인간에게 들이닥치면 오로지 저주만 주어질 뿐입니다.
율법을 하나님께서 주실 때 그런 심정으로 세상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5:56에 보면,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사람들을 사망케 하기 위해 죄를 유발시키는데 그 죄를 활성화시키는 방법과 능력이 바로 율법에서부터 비롯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율법이라는 것이 선한 것인데 어떻게 그것이 인간에게 알려지면 죄가 되는 겁니까? 그것은 우리 안에 이미 죄가 들어있어, 선한 율법이 들어와도 그것을 죄악된 인식으로 재해석해버려서 자신을 기어이 살려내려는 식으로 써먹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인간이 다룰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다룰 문제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그것을 자기 영역에서 자신을 정당화하는데 주입시킵니다. 이것은 숨어있는 자신의 죄만 더욱더 발각되게 할 뿐입니다.
인간은 지금 흙으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그 흙에서 천사의 몸, 하늘의 몸으로 다시 삽니다. 이 두 가지 과정을 다 알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과연 지금이 몸이 어디서 온 겁니까? 무에서 온 겁니다. 무에서 말씀대로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몸은 말씀대로 적용받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죄있는 몸을 가진 이미 우리 인간들이 율법으로 인하여 죽어가고 있음을 미리 알려주는 사건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지 아니하면 예수님과 함께 살 수 없다는 겁니다. 디모데후서 2:11에 보면,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한 견해와 해석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줍니다. 즉 사람이 자신의 죽음만을 생각할 입장이 못된다는 겁니다.
로마서 8:1-4에 보면,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러한 죽으심이 우주의 중심이라면 우리는 그 중심과 어떤 관련성 속에서 살아갑니까? 우리는 바로 우리가 만든 법으로 스스로 정죄함에서 탈피하려고 했고, 자신의 선한 양심과 노고로서 자생적으로 의인이 되려고 하지를 않았습니까? 바로 이런 우리의 행위의 내부에는 임의적이고 일방적으로 나를 살려낼 만한 법을 스스로 창안해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법 때문에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이 율법의 본래 핵심과 본질 때문에 죽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생명의 법이요 성령의 법입니다. 인간이 만든 모든 법을 무용지물로 만드시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여인의 장례식 준비는 율법의 본래의 정신에 참여하고 있는 작업입니다. 이 여인은 자신을 살리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그 특수한 고귀함 속으로 자신을 던져넣은 것입니다.
이로서 십자가 복음, 즉 예수님의 죽으심은 여기에 합당한 행위가 따로 있습니다. 그 행위란 자신이 죽어 마땅한 죄인임을 아는 것입니다. 아렇게 해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죽이기 위해 살게 하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만든 법에 놀아나지 말고 늘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상한 심령에 불과한 것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우리교회
09-10-20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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