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703b 울산강의-출애굽기3장
20090703b 울산강의-출애굽기3장
이름 : 한윤범(IP:119.192.174.148)
20090703b 울산강의-출애굽기3장
(강의:이근호 목사)
둘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진짜 하나님이 찾아올 때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질문할 권한이 없습니다. 그냥 하나님께서 계시한 대로 그 계시가 우리의 미래까지 확정해서 우리에게 덮친 것을 통고받을 뿐이에요. ‘아, 그렇구나!’ 하면 돼요. 믿음이 별 것 아닙니다. ‘아, 이미 내 운명은 덮쳐졌구나.’ 이불을 숨 막히도록 덮듯이. ‘아, 진짜 하나님의 약속이 나를 덮쳐버렸구나.’라고 그게 체험되어질 때 이건 나보다 더 센 어떤 것이 나를 덮치고 있다는 걸
이걸 이렇게 생각하면 돼요. 간단하게. 신은 뭐냐? 신은 전체. ‘전체’란 말은 개인보다 더 크다는 것. 장마철에 큰 먹구름이 울산에 덮쳐서 장맛비가 오듯이 그냥 큰 먹구름이라든지 이런 계시가 내 운명을 덮쳐버리면 따로 내 인생에 대해서 염려하거나 고민하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 돼버려요.
비는 위에서 내리는데 내가 펌프 만들어서 우물 푸는 것도 아니고. 받기만 하면 되는데 뭘 자기가 자기를 물을 끼얹습니까? 비를 맞으면 되죠. 그 빗줄기가 죽은 우리를 살리는 빗줄기가 된다 이 말이죠. 그러면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계시가 우리를 살려낸다면 뭘 알아야 되느냐? 우리는 왜 죽어 있는 상태냐? 이 말입니다. 그걸 지금 이야기하는 거예요. 왜 죽어 있는 상태냐 하면, 우리는 애굽인들에게 또 애굽 체제에게 지금 순종하고 있어요.
우리는 만날 내가 선택한다 하잖아요. 그 선택은 소용없어요. 우리는 이미 뭔가 무서워 떨면서 기존의 세계를 순종하고 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 기존의 세계가 뭐냐? 홍해도 건너가지 못할 연약하기 짝이 없는, 홍해도 통과하지 못할. 무슨 말이냐 하면, 홍해가 없었더라면 애굽인들 저희끼리는 대단한 인간들이죠. 그 대단한 인간들 중에서 건장한 인간들 모은 것이 애굽의 군대잖아요.
그런데 홍해에 히브리인들이 통과하기 전까지는 그들은 자기가 대단한 줄 알았지요. 근데 막상 어린양의 피가 발린 히브리인들은 홍해 통과했는데 소위 대단하다고 자부하던 그들은 홍해에 들어가자 몰살당했죠. 그러면 대단한 것 아니네요? 세상 사람들 그렇게 큰 소리 쳐도 별 것 아니네요?
왜 그럼 우리는 별 것 아닌 것에 그렇게 몸 사려가면서, 기 죽어가면서, 벌벌 떨면서, 호들갑 떨면서 왜 그렇게 아부하면 비볐고, 왜 그렇게 고개 숙였고, 왜 그렇게 했습니까? 이미 우리는 세상에 순종하는 것이 습관화 됐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을 제가 아까 첫째 시간 마지막에 세상 순종하는 그 순종을 이제는 뭐로 바꾼다? 하나님 순종으로 바꾸는 이 작업을 하나님은 언약을 투입해서 실시하신다 그 말입니다. 언약이란 바로 꼬챙이, 사다리가 덮치듯이 가는 거예요.
모세는 말합니다. “저 일 못합니다. 제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다, 쉽게 이야기하면, 모세를 보내는 게 아닙니다. 모세에다 망토를 입혀서 가는데, 망토라고 제가 일방적으로 했는데 성경적으로 하면, [여호와의 이름]입니다. 여기서 잠시 어려운 것 합니다.
‘이름’이라 하는 것은 반드시 뭐가 성립 되느냐 하면, 몸이 있을 때만 이름이 있어요. 몸이 없으면 이름이 없어요. 그런데 아직까지 여호와는 몸이 안 나타나죠. 장차 몸으로 오실 분이 누구죠? 몸으로 오신 여호와. 그걸 다른 말로 하면 ‘주 예수’죠. ‘주’는 여호와니까. 몸으로 오신 예수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 전에 우리는 몸이 있고 이름이 있는 게 보통이잖아요.
아담이 있고 아담, 이름 불렀잖아요. 갈빗대로 여자 만들 때 이름이 없었지요. 그런데 아담이 여자라고 불러줄 때는 비로소 뭐가 된다? 여자가 되죠. 꽃이라 불러주니 꽃이 된 거예요. 의미가 생긴 겁니다. 이름을 붙여준 사람에게 한 몸이 되는 겁니다. 그처럼 몸이 있고 그 다음에 이름 붙는 것이 인간이라면, 하나님은 이름부터 먼저 있고 나중에 이름에 해당되는 몸이 나온 거거든요. 신학자들이 그렇게 풀려고 했던 이름이 이렇게 풀립니다.
의미가 뭐냐? 이름이란 반드시 거기에 해당되는 몸이 따로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시편 볼 때 사람들이 의아해하는 게 ‘여호와의 이름’하고 ‘여호와’하고 도대체 ‘하나님’하고 ‘주’하고 헷갈린다. 하나님이 왜 복잡하게 나오느냐? 이렇게 하는데 여호와의 이름이 뭐냐? 실체도 없는데 이름은 왜 있느냐? 실체는 몸은 미리 있잖아요.
망토라 하는 것은 망토의 특징이 질질 끌잖아요. 그러니까 이 여호와의 이름이라 하는 것은 질질 끌게 돼있어요. 그래서 달리 이야기하면 모세란 몸 위에 뭐가 덮쳤다? 여호와 이름 이란 몸이 덮친 거예요. 그러면 모세가 일하는 겁니까, 모세를 덮친 몸이 일하는 겁니까? 모세를 덮친 하나님이 일하는 게 되죠.
그런데 모세는 이런 이야기해도 무섭다는 거예요. 무섭지요. 생각해보세요. 무서워요. 자기 몸은 자기가 봐도 보이는데 문제는 자기와 함께 한다는 동행한다는 하나님을 제가 믿습니다. 말이 ‘믿습니다’지 사실은 ‘믿고 싶습니다’ 이 말이죠.
“너, 평양 갈래.” “가고 싶습니다. 보내주세요.” [실미도]에 나오는 대사 아닙니까. “죽어도 가고 싶습니다.” 하는 것. 믿고 싶습니다. 그런 건 아니지요. 믿고 싶겠지요. 하지만 보이는 것은 자기 몸밖에 안 보이니까. 그런데 주님은 보이지 않는 몸으로 같이 가니까 그 보이지 않는 망토를 대신해서 망토하고 한 세트가 있어요.
한 세트가 뭘까요? 지팡이. 그 지팡이에 뭐가 있을까요? 여호와의 이름. 출애굽기 비밀들이 풀렸잖아요. 지팡이로 강물을 치니까 그 흘러가는 강물이 핏물이 돼버렸죠. 모세가 했을까요? 모세가 한 게 아니죠. 모세가 든 지팡이가 한 거예요. 그런데 그 지팡이라 하는 것은 사실은 장차오실 몸으로 오실 그분이 보이지 않는 형태로 이름으로 모세를 덮치고 있으니까 남들 보기에 일은 모세가 하되 사실은 일은 전부다 여호와 이름이 하신 겁니다.
그래서 이걸 가지고 성경에서 뭐냐? 신약에서 너를 통해서 주의 이름이 영화롭게 하리라. 네 몸은 네 몸이 아니라 주의 몸이라. 소유성! 신앙생활에 제일 힘들고 방해되는 게 소유성이잖아요. 이상하게 우리는 지팡이도 내 것, 심지어 하나님마저 내 것이라고 자꾸 중력의 블랙홀처럼 끌어당기는 속성이 있어요. 자꾸 내 것 만들어. 이게 자아의 습관화되어서 눈에 닥치는 대로 전부다 자기 호주머니에 다 집어넣어요. 왜? 그래야 자아라고 자기가 응축이 되니까. 그래서 좀 신앙생활하다 보면 모든 게 자기 것이 돼요. 문제는 그거에요. 자기 것.
우리교회에 떨어진 애 생각하면 저도 가슴 아프죠. 저도 애를 봤고. 그 부모하고 성경공부 같이 하고. 울산 이 교회 출신이죠. 이게 뭐냐 하면, 난처한 일이에요. 우리 보기에는 난처한 일인데, 부모 보기에는 난처한 일인데 하나님께서는 뭐냐? 어쩔 수 없는 일이에요. ‘난처한 일’과 ‘어쩔 수 없는 일’의 만남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만남은 꼭 이렇게 만나요. 우리를 난처하게 만들고 “어쩔 수 없었단다 애야.” 하는 식으로 다가올 때 하나님은 우리를 만납니다.
파리바게뜨, 그것도 비 오는 날. 하여튼 타이밍도 희한해. 파리바게뜨 바깥에 세워놓은 거기에 미끄러져서 받쳐서 복숭아 뼈 하필이면 함몰되어 입원해서 엄마 보고 싶다고 할머니 올라와 할머니 보다가 재워놓고 갔다고 그렇게 됐거든요. 모든 것이 타이밍이 그렇게 맞습니까? 딱딱 맞잖아요.
그래서 서울의 이미아 씨 글에 감동받았어요. 그게 정답이에요. “사랑할 때가 있으면 미워할 때가 있고, 태어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 있고, 만날 때가 있으면 헤어질 때가 있고.” 그걸 종합해보면 한 자로 뭡니까? 어쩔 수 없는 ‘때’ 그 때는 이미 우리에게 먹구름처럼 덮어버리는 우리는 운명으로서의 때로 만든 이불이죠. 주께서 어쩔 수 없는 것들만 이어져있는 때, 우리는 하나하나가 난처하기 짝이 없는 때지만 주께서는 “애야, 어쩔 수 없는 거야.” 어쩔 수 없는 때가 하나의 이불을 만들어서 이미 우리 운명을 확정지은 줄 알아야 돼요. 덮어버린 거예요.
그래서 제가 보기에는 살아있는 성경 같아요. 어떻게 당황하기 짝이 없는 그런 때들이 한꺼번에 다 몰리는 거예요. 그리고 그것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한테 주어진 일이라면 그러면 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교회문 스위치 올리니까 바퀴벌레 누워있는 것. 모든 게 모든 움직임이 기적이다. 이것 알 때까지. 눈동자 움직이는 것까지 기적이에요. 우리는 그냥 내가 한다고 하는데 그게 아니고 모든 움직임, 방금 볼펜 하나 떨어진 것, 이것도 기적이에요.
앞으로 보세요. 모든 움직임이 내가 자아가 껍데기가 움직이는 게 아니고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이 나를 지금도 움직이게 하고 있고 살게 한다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감사할 분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어요. 이 말은 모세처럼 우리가 뭔가 짊어지고 있어요. 짊어진다는 어폐가 있다. 그분이 우리는 타고 있어요. 마치 귀신한테 타듯이 하나님께 사로잡힌 자처럼 뭔가 우리 등어리에 타고 있는데 남들 보기엔 안 보이고 본인만 느끼고. 그분이 주신 힘으로써 모든 것이 움직이는데 앞에 어떤 것이 나타날지 그분만이 아는 사태와 사건들이 앞으로 우리와 계속 마주침.
이 ‘마주침’에서 뭐가 생기느냐 하면, 폭력이 나와요. 다시 말해서 저항이 나와요. “저 마주침은 내가 예상하지 않은 건데 하나님 왜 마주치게 합니까?” 하고 우리는 또다시 하나님께 폭력을 가하죠. 마음속으로.
성경에 이런 말씀 있습니다. “겉옷을 달라하거든 속옷까지 주어라.” 기억나십니까. 산상설교에. 만약에 혼자 살면 자기가 의지로서 움직인다면 원망을 하게 돼요. 왜? 겉옷을 달라할 때 주기는 주겠지만 마지못해 성경에 있으니까. “왜 하나님이여, 나로 하여금 겉옷 달라는 인간이 등장하게 만듭니까? 그게 나는 기분 나쁩니다.” 왜 겉옷 달라는 인간이 등장하게 만드느냐 이 말이죠.
오른 뺨을 치거든 그 다음에 뭐하라? 왼 뺨 내놔라. 그거는 내가 성경에 있으니까 순종하는 입장에서 대기는 대겠지만 난데없이 난처하게 내 오른 뺨을 치는 놈이 왜 마주치게 하느냐 이 말입니다. 때. 내가 만들지 않은 먹구름이 이미 때라는 사건의 연속으로써 우리를 항공모함처럼 덮고 지나가고 있는 거예요. 그게 바로 하나님의 확정 계시가 확정 진리가 지금 모세를 덮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본인에 있던 지팡이도 새로운 의미로 지팡이를 갖고 가야 되고.
성경 한번 봅시다. 중요한 말씀이니까. 출애굽기 5장 2절. 이 말씀은 액자에 넣을 만 합니다.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5장 1절에 보면, 내 백성 보내라. 바로 임금님, 내 백성 보내주세요. 광야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겠습니다. 하니까 “바로가 가로되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여호와가 누구관대” 했죠. 이걸 제가 여러분들이 액자에 걸어놓으면 좋겠다는 말이 뭐냐 하면, 우리가 지키지도 못하는 것을 액자 해놓으면 지키지도 못한 주제에 걸어놓으면 마치 지킨 양 행세의 위선자가 돼버려요. 오늘 집사님에 집에 가니까 지키지도 못한 것이 많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성경에 보면, 우리가 평소에 생각한 것과 딱 들어맞는 구절들이 나옵니다. 그게 출애굽기 5장 2절이에요. “여호와가 누군대? 내가 그 말 왜 듣는데.” 이게 지금 우리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속마음이잖아요. 그걸 그대로 고맙게도 우리가 마주치게 하는, 하나님 참 못됐어. 우리가 마주치게 하는 그 사람이 평소에 내가 꼬깃꼬깃 숨겨놓은 그 말을 용감하게 교만하게 다 까발리는 사람을 만나게 합니다. 우리는 그 사람을 이길 수가 없어요. 왜? 평소에 나도 그 말을 못 이기기 때문에. 내가 이길 수 없는 사람을 마주치게 해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하나님께 원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유발하게 만듭니다.
하나님, 또 못 이기겠어요. 저 사람, 내 속에 있는 것 다 들통 냈어요. 맞습니다. 나도 여호와 말씀 싫어했는데 저 사람 싫어하는 것 할 수 없지, 뭐. 할 말 하나도 없네요. 나도 솔직하게 하나님 별로였는데 저 사람 별로라 하니 할 말 없네요. 나오게 한다 이 말이죠.
지난 수요일 이런 설교했지요. 간음한 여인 하면서 보통 바리새인과 간음한 여인을 대비해서 바리새인들은 용서 못 받고 가버리고, 간음한 여인은 용서 받았다고 대비하잖아요. 저는 이렇게 해석을 했지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을 동원시켜서 그 간음한 여인을 예수님 앞에 끌어오게 하는데 바리새인까지 총동원시켰다고 이래 봐요.
왜? 누구든지 주님 앞에 나오려면 반드시 위선과 체면, 자존심 다 깨지고 우사스럽게 만들어서 가져오는 것이 하나님의 작전인데 그 작전에 동원되는 것이 뭐냐? 안 믿는 자들이 동원되는 겁니다. 그래서 수요일 날 부산의 신창원 원숭이 제가 예를 들었습니다. 골목에 돌아다니면서 옥상에 돌아다니면서 빨래 다 찢고 까불다가 잡혀보니까 자기가 사람인 양 사람 흉내 다 내요. YTN 뉴스에 나올 때 잡혀서
그처럼 간음한 여인이 주님 앞에 나올 때 이래 나온다 이 말이죠. 처분만. 이제는 저는 바리새인하고 마찬가지입니다. 간음한 여인이 죄가 없는 게 아니고 있어요. 저쪽은 도망가 버렸고 이쪽은 처분만 맡기고. 그 다음에 용서하고, 안 하고는 누구 소관입니까? 이미 예수님 소관이에요. 주께 “내가 용서하노라” 판결을 받았기 때문에 구원받은 거예요.
왜 바리새인에게 잡히게 했느냐? 주님에게 나온 용서의 위력이 어떤 죄도 이긴다는 사실을 알리는 시험 대상으로써 그 여인 하나 체포돼 온 거예요. 주 예수님의 자비의 속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게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신창원 원숭이 값을 못하죠.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왜 지키느냐? 이게 불신자들이 이야기하는 것 같죠? 우리가 매일같이 우리 속에서 이게 튀어나와요. 교회 가려고 했는데 하필 바이어가 와서. “아이고, 여호와가 누군대? 오늘만 날인가. 다음에 잘 가지.” 항상 우리는 바로의 말이 우리 속에 사라지지 않고 계속 이게 주도권을 쥐고 활성화 되는 이런 입장에 있습니다.
그러니 모세가 이 말을 듣고 모세 혼자 한다는 이건 결코 자기 백성을 이길 수 없습니다. 어림없습니다. 모세가 혼자 하는 방법이 뭐냐 하면, 자기 주먹으로 때려서 선방 날려서 할 수 있는 사람 죽인 것 아닙니까. 출애굽기 2장에 나오죠. 그런 방법, 그 혁명 방법, 그런 건 노사모, 서울광장에서 하라 하세요.
성경은 그게 아니고 우리 자신이 저주받을 인간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그런 처지에 있는 똑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식으로만 질질질 우리를 끌고 가고 있습니다. 감사하지요. 그래서 우리는 날이 갈수록 불신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은혜 받으면 받을수록 충분히 이해합니다. 오히려 충분히 이해해요.
3장 13절 봅시다. 이름이 나오는데.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여기 이름이 나오죠.
장차 몸이 있기에 미리 이름이 있을 경우에 이러한 미래까지 내다보는 안목은 하나님 안목이고, 기존의 우상 안목은 뭐냐 하면, 장차 몸이 아니고 지금 형체가 있고 거기에 이름이 붙는 겁니다. 지금 당장 어떤 형체가 있고, 그러니까 이름이 있다는 건 거기에 어떤 형태가 있어서 그 형체와 이름을 일치시키는 겁니다. 의미가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데
“많은 신들의 이름이 있는데 너는 무슨 신으로 왔느냐? 라고 물을 때 제가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할 때 하나님께서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14절에 보면,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스스로 있는 자가, 이게 여호와라 하는데 여기 스스로 있는 자라 하는 것은 ‘스스로’입니다. 그러니까 이거는 현재 있는 이 세상에 대해서 타협하거나 의논하거나 할 것 없이 이 세상 자체가 아무리 여호와를 모독해도 미워하고 어떤 세상이라도 이 세상 전부의 운명은 누구 손에 달렸다? 스스로 계신 분의 소유에 불과하다, 소유다 이 말이죠.
‘소유’에 대해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지금 소유권 문제, 소유 문제가, 존재라 하는 것은 사실은 껍데기고, 안에 소유권이 있습니다. 뭐가 존재한다는 말은 거짓말이고, 솔직해서 말해서 뭡니까? 뭐가 존재한다고 하지 말고, “어떤 것은 내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 ‘나는 존재한다.’는 말과 똑같은 말이에요.
반드시 소유권이 내포되지 않는 소유권을 전제로 하지 않는 존재라 하는 것은 없습니다. “저기 집 있대.” 그 다음 말은 뭡니까? “집, 누구 건대?” 반드시 나오죠. 그냥 있으면 묻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다니까. “저 여자 잘 빠졌네.” 총각들 안 합니까. “야, 저 여자 잘 빠졌네.” 그 다음에, “누구 건대?” 반드시 소유권을. “쟤 공부도 잘 하지.” 그 다음에 묻는 게 뭡니까? “쟤 엄마 뭐 하시지?” 소유권을 물어요.
예수님께서 설교 잘 하니까 사람들이 뭐라 합니까? “아이고, 복 되도다. 저 아저씨 낳은 엄마가 얼마나 복 있겠노.” 반드시 소유권을 물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뭐라 했습니까? “내 말을 듣는 자가 복 있다.” 마리아 들었으면 얼마나 섭섭하겠습니까. 듣긴 들었지만.
“아이고, 저 부모 참 좋겠다. 세상에 바이올린 잘 켜노. 저렇게 이쁘노. 쟤 엄마 좋겠다.” 항상 그 사람의 소유권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존재라는 것이 의미가 없어요. 골키퍼 있다고 골 안 들어갑니까? 마찬가지고 그냥 홀로 남은 총각, 처녀들 이것은 결국 완전한 인간으로 보지 않죠. 소유권이 등기, 담보가 돼있습니다.
그런데 스스로 있는 자란 말은, 지상에서는 인간의 소유가 되지 않고 오히려 세상 자체가 전체를 주님의 소유가 돼요. 그러면 원래 주인이 찾아옵니다. 그러면 원래 주인이 찾아오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원래 주인은 창조를 했죠. 창세기 1장에.
전에는 말씀으로 창조했잖아요. 지금의 모세 찾아올 때는 뭐로 창조하느냐 하면, 여기에 보면, 15절에 보면, 하나님이 스스로 일을 하시는데, 스스로 계신 분이 찾아왔다는 건 창조하려고 찾아왔는데 그 창조하는 원칙이 뭐냐?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너에게 찾아왔다. 드디어 창조를 하겠다. 창조하는데 원칙은 아브라함과 이삭와 야곱의 하나님, 언약대로 그런 하나님으로 창조하겠다는 겁니다..
여기서 이것 하나 생각해봅시다. 애굽인과 히브리인들을 구분하는 게 뭐라 했습니까? 죽음으로 구분되는데, 히브리인들은 어떻게 죽음을 통과했지요? 미리 통과했지요. 애굽과 결별할 마지막 밤, 그날 밤에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죽음으로 애굽인과 히브리인을 구분했지요. 할 때 그들이 죽어서 구원받았습니까? 아니지요. 그들은 골백번 죽어도 죽어요.
그러면 어떤 죽음이 대신 죽어야 됩니까? 우리 애들이 죽은 게 아니고 누가 우리 가운데 계신 분이 죽었다는 겁니다. 누가 죽었습니까? 어린양이 죽지요. 그러면 어린양이 죽어서 뭘 통과했다? 죽음의 바다를 통과했다는 말은, 그러면 스스로 계신 분이 앞으로 이야기할 것은 무슨 이야기냐 하면, 전에는 애굽 체제라면, 홍해를 건너나오면 무슨 체제냐 하면, 어린양의 체제, 어린양의 구조가 되죠.
어린양의 구조의 특징이 뭐냐? 죽어도 하나님의 심판마저 이겨내는 구조가 이 구조 아닙니까? 그러면 이게 광야인데 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심판마저 이겨낼 구조를 갖추려면 이들이 뭘 경험해야 돼요? 그들은 애굽적인 성향을 갖고 있어야 되고, 애굽적인 성향으로 말미암아 초죽음 되는 경험을 해야 되죠. 죽었어요. 사람 진짜 죽었어요.
홍해 죽으면서 신났지. 휘파람 불고. 팔다리 있으니 왜 못 건너가. 여기는 세상에 자기가 기존에 알 때 애굽적인 습관 그리고 자아상, 기억들 백해무익해요. 그리고 걸핏하면 어디로 돌아가자? 애굽으로 돌아가자. 못 돌아가요. 왜 못 돌아가느냐? 이미 애굽과 히브리 사이에는 죽음이 있기 때문에 이걸 통과 못 한다니까. 애굽으로 돌아갈 수가 없어요. 그들이 애굽에서 죽으면 안 됩니다. 죽더라도 광야에서 죽어야 이것은 애굽인들이 죽인 게 아니고, 누가 죽였다? 바로 언약의 하나님이 죽여줘야 그 죽음마저도 언약을 드러내는 죽음이어야 한다 말이죠. 오늘 어렵다. 모르겠다.
작은 쥐, 실험실의 모르모트 같아. 그래서 하나는 암의 면역성 시험한다고 암 종양, 또 하나는 미친 쥐 만들어서 얼마나 미쳤는가를 시험하듯이. 주께선 언약을 주사해서 얼마나 견디고, 어린양의 환경에서 애굽인의 사고방식이 못 낀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죽게 하고 그러면서도 애굽에 살면서도 거기서 여호수와 갈렙은 살아났잖아요. 모세는 죽었지만.
‘여호수아와 갈렙은 무슨 주사를 맞았기에 살아났는가?’라는 것을 보여주는 모르모트 같은 그런 시험을 광야에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시험 장소가 우리가 살고 있는 광야입니다. 우리는 이 시험을 받고 있습니다. 이미 우리를 관통하고 있는 예수님의 십자가 효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겨를 수 없는 사태와 상황을 마주치게 만들죠.
그러나 우리는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내가 교회 몇 년 나갔다고? 다른 말로 하면, 아까 출애굽기 5장 2절, 외워놓으세요. “여호와가 누군대?” 바로의 음성이 툭툭 튀어나와요. 교회 가는 게 오락이지 그게 뭐 대수라고. 그게 무슨 내 생명이라고. 이게 막 튀어나온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망토하고 지팡이 들고 동행하신 주님께서, 주께서 동행하심을 어떻게 우리에게 알려 주느냐 하면, 꼭 소스라치게 놀라게 만들어요. 사람이 갑자기 툭 치면, “아이고, 계셨군요. 아이고, 놀래라.” 하는 식으로 주께서 등장하실 때에는 치고 등장해요. 깜짝이야. 놀랬잖아. 사람을 놀래켜요. 어떤 사건을 통해서 주께서 계시다는 걸 깜짝깜짝 놀라게 만듭니다. 병주고 약주고 다 하는 거죠.
어린양의 세상 속에 애굽에서 수십 년 동안 살던 사람을 집어넣고 그들이 도저히 살 수 없는, 불가능성, 이 불가능성을 계속해서 더욱더 심화시키는 거예요. 그래서 광야에서 우리가 살면서 뭘 느끼느냐 하면, 도저히 내 공로로, 내 의로 내가 천국 못 간다는 것을 날이 갈수록 날마다 우리는 내 신앙생활로 도저히 못 간다는 것을 철두철미하게 실감해야 됩니다. 오직 주님의 어린양 피 아니면 우리는 십자가 피로 구원되지 내가 잘해서 구원 못 한다는 것을 늘 실감해야 됩니다.
저의 이러한 해석이 좀 과하다 싶은 생각 드는 사람은 고린도전서 10장을 보면, 홍해 건너온 것을 뭐로 보느냐 하면, ‘세례’라고 해요. 이게 얼마나 어려운지. 홍해 건너올 때는 역사입니다. 분명히 역사죠. 물 건너왔잖아요. 역사가 세례라는 것은 무슨 문제를 말하느냐? 실존이 돼버려요.
여기에 어떤 목사님이 저한테 질문한 것을 여러분에게 질문해 볼 테니까 여러분 답변해 보세요. 어떤 목사님이 이런 질문 했어요. 전화로. “목사님, 십자가 질 때 스데반 집사도 분명히 저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했고, 예수님도 십자가 질 때 ‘주여, 저들의 죄를 알지 못하니 용서해 달라.’고 했는데 도저히 납득이 안 됩니다. 왜? 예수님께서 분명히 예언하시기를 그들은 심판 받아 마땅하고 마귀 자식이라 했으면 십자가 질 때 ‘주여, 이제 주의 뜻대로 되기 때문에 저들로 하여금 심판해 달라.’ 이렇게 기도해야 앞뒤가 아귀가 맞는데 만약에 십자가에서 저들을 알지 못하고 했으니 용서해달라고 해버리면, 그러면 십자가 안 믿어도 용서한 게 돼버리고, 십자가 꼬챙이 찔린 사람도 용서한 게 되고, 그러면 십자가라 하는 것은 믿던 안 믿던 다 용서한 게 되는데 그러나 실제로 보면 그게 아니고 안 믿는 사람은 지옥 가기로 돼있는데 그럼 예수님의 기도가 응답 안 되는 게 되잖아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됩니까?” 방금 우리교회 질문답변 란에 올렸어요. 여러분들이 답변해보세요. 참 어렵죠잉.
제가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바로 역사와 실존 답변한 거예요. 예수님의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은 예수님에 실제 있었던 역사이야기죠. 역사가 사도 바울에 가버리면 이게 묵시가 돼버려요. 그러면 전에 모세하고 하나님 사이에 계시 받았죠. 계시가 엎어지면 뭐가 된다 했습니까? 확정 역사가 됐죠. 역사 시대 끝나고, 이번에 수련회 할 게 이것 아닙니까. 역사가 묵시가 돼버리면 다시 이게 뭐로 이어지느냐 하면, 몸으로 돼버려요.
다니엘에 보면 칠십 이레 나오죠. 7+62+1. 칠십 이레를 묵시로 풀면 안 돼요. 예수님의 몸으로 풀어야 돼요. 이 몸이 사도 바울이 풀면 그리스도의 몸이 실존 됩니다. 그리스도 몸이 어떻게 되느냐? 그 십자가가 들어와 버리면 용서고 자시고 없이 완전히 우리는 십자가에서 죽은 자가 돼버려요.
그럼 십자가의 응답은 일단 살아있는 자에게 해당되는 게 아니고 모든 인간을 죽여 놓고 그 다음에 살려주고, 안 살려주고는 누구 소관이냐 하면, 바로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에서 일어난 그 응답에 의해서 살아낼 자만 살아나는 겁니다.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나는 십자가에서 뭘 들었지롱.” 십자가에서 뭐 들으면 안 돼요. 들었다는 말은 아직도 자기가 안 죽고 살아서 들은 거잖아요. 그런 식으론 구원 안 해줘요. 하여튼 동네 치킨집 제일 기분 나쁜 게 뭐냐 하면, 분명히 쿠폰 10장 모으면 닭 한 마리 준다고 했는데 쿠폰 10장 모았는데 이사 갔을 때, 환장하지요.
주의 말을 순종하면 구원받는다고 해서 순종했는데 주께서 쿠폰 10장 모아서 “나는 주님이 십자가 용서해준다는 것 다 들었지롱. 용서해 줘.” 보니까 아까 바퀴벌레 죽이듯이 죽여 버리는 거예요. 나는 귀로 들었기 때문에 주의 말씀, 약속을 믿었기 때문에 이 ‘믿었기 때문에’에 근거해서 살려 달라? 그것 죽여 버립니다. 너희는 그럴 권한도 없다.
제가 아까 했다. 피조물은 창조자에게 요구할 권한도 없고, 질문할 권한도 없다. 왜냐? 피조물이기 때문에. 그저 누가 지시합니까? “모세야, 모세야.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모든 시작을 스스로 계신 분이 해서 우리 안에 뭐만 있어야 돼요? 스스로 계신 분의 뜻만 있어야 되지 내 스스로가 있으면 안 돼요. 내 스스로는 완전히 무시해버립니다. 나의 선택은 무시한 것이 하나님 선택입니다. 이게 해답이 됐는지 모르겠어요. 자세한 건 수련회 들으면 되지만.
역사가 다시 뭐로 뭉쳐진다? 역사가 하나의 몸으로써 뭉쳐져 버리면 몸이 돼버리면 모든 말씀이 시간적인 앞뒤 순서가 의미 없어요. 순서가 없어요. 뒤에 것이 앞에 와도 괜찮고 앞에 것이 뒤에 가도 괜찮고. 그래서 예언서에 보면, 뒤에 있는 예언이 앞에 있고 순서가 안 맞게 돼있어요. 안 맞는 이유가 뭐냐? 원인과 결과로써 엮여지는 고리를 잘라버립니다. 결과란 원인이 있어서 결과가 나오잖아요. 그걸 잘라버린다고. 원인 있고 결과 있는 게 아니에요.
하나의 예를 들면, “네가 나를 팔리라”라고 예언하시고, “가룟 유다야 네 할 일 하라” 했는데 가룟 유다가 파멸한 것이, 예수님의 말씀이 원인이 되어서 파멸했습니까 아니면 파멸할 것을 미리 예언한 겁니까? 이게 신학자들이 해결을 못하고 있어요. 원인이 예수님 말씀이 원인이야, 아니면 원인은 없고 결과만 있느냐?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라는 말씀이 씨가 되어서 부인했습니까, 아니면 부인하고 보니까 말씀대로 딱 들어맞은 거예요? 그렇게 될 줄 미리 알아서 예언 한 겁니까, 아니면 원인을 제공해줘야 비로소 움직입니까? 예수님께서 말씀 안 하면 베드로는 예수님 안 팝니까? 이 말입니다. 말씀을 해줘야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할 것이냐, 아니면 입 다물고 있으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 안 할 거냐? 그 말입니다.
그런 것은 쓸데없는 하나의 학문적인 논리나 절대로 불가하죠. 왜냐하면 기도할 때 이러한 원인을 항상 누구한테 돌리느냐 하면, 하나님께 돌리는 버릇이 우리한테 있습니다. “이런 일이 하나님께서 안 도와주셔서 그렇잖아요.” 말은 차마 못 꺼내지만 말 안 꺼낸다고 안 듣습니까? 다 듣지. 말 안 한다고 주께서 모르겠습니까? 눈을 지으신 이가 다 보고 계신데. “분명히 이건 아닌데 원인이 하나님에게 있어. 분명히 하나님이 유발했어.” 그런 생각이 들잖아요. 그럴 때 과연 그 원인이 하나님한테 있느냐 이 말입니다.
그것은 아까 이야기한 또 소유권을 자기를 자기 소유권으로 착각했기 때문에 그러한 오류가 생긴 겁니다. 스스로 있는 분에게 점령당하면 되는데 따로 나 스스로 하나님 되어서 “야 이 일은 하나님 책임이다. 이거는 내가 잘해서 그렇고.” 꼭 자기 자아를, 존재는 뭐가 기본이다? 소유권. “주여, 내 몸은 내 것입니다. 손대지 마이소.” 이게 꼭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이야기해봐야 소유권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 이야기하면 자기 주머니에 집어넣죠. 필요할 때마다 여호와 이름을 부르면서 행운을 얻기를 원하겠지요. 그러면 십계명 제삼계명이 뭡니까? “누구든지 내 이름을 망령되어 일컫는 자는 죄 없다 아니하리라” 천대까지 벌 받아요. 이게 뭐냐 하면, 소유에요.
스스로 있는 하나님이라 하는 것은, 절대로 인간은 누구를 소유할 수 없다? 하나님 이름을 소유할 수 없다. 그러면 앞으로 이름을 이야기할 텐데 그 이름은 무슨 이름입니까? 스스로에서 나온 이름이기 때문에 인간이 자기가 망령되이 써먹을 이름은 결코 아니에요. 오히려 그 이름을 위하여 내가 내 스스로 있는 능력도 파괴되고, 나는 내 몸은 내 것이라고 여기는 것도 스스로 있는 분 앞에는 무용지물입니다.
여름 되니까 피곤한 것 이해합니다. 조금만 더 하고 마치겠습니다.
비타500이 내 것이 아닌데 두 시간 기다려도 아무도 안 가져가요. 세 시간 기다려도. 다음 날 가도 또 그대로 있어. 그런데 하나님 참 못 됐지. 무려 16일간 두 시간을 기다려도 안 가져가서 딱 집으려 하는데 16일간 두 시간 일 분에 주인 와서, “당신 내 것 왜 가져가.” 왜 이렇게 하십니까? “이거는 내 것입니다.” 할 때를 기다렸어요. 그래야 사실은 내 속셈이 드러나죠.
사람은 뭐든지 소유해야 자기 속셈이 드러납니다. “주여, 이건 내 것입니다. 이건 내 영역입니다. 침범하지 마이소. 이건 내 노동으로 얻은 겁니다.” 꼭 내 역할 해야 그때 와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그때 나타납니다.
우리로 하여금 뭐 하게 만든다? 난처하게 만들어서 주께서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어쩔 수 없었다. 16일 동안 기다렸는데 그럼 15일 동안 오면 되는데. 아니야. 어쩔 수 없었어. 그러면 내가 16일 날 안 가져가도 오실 겁니까? 그건 네가 나한테 질문할 게 아니야. 18일 동안이면 그때 또 나타나요.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시간이 아니고 네 몸은 내 것이라는 걸 알려주기 때문에 우리는 시간적으로 따지지만 주께선 시간으로 따지는 게 아니고 우리가 자기 정체를 밝히는 그때를 기다려서 해요. 계속해서. 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니까, 그리스도의 것이니까.
쉽게 말해서 스스로 있는 자의 소유다 이 말입니다. 우리 소유는 있다, 없다? 우리 소유는 없어요. 소유권이 없으면 존재도 없죠. 존재가 없으면 자아도 없죠. 주님에 의해서 그때그때마다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서 새로운 자아가 우리한테 밀려오는 거죠. 지금 우리 안에 지팡이 있다 이 말이죠. “내가 한 것은 내가 아니고 주께서 하심이라.”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누구한테 잡혔을 때 너는 네가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네 속에 성령이 이야기한다. 진짜 이건 신 내림 받은 사람만 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네 속에 성령이 이야기하심이라. 네가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그럼 실험해봐야지. ‘부바디바디바’ 이것 누가 했게? 그건 벌써 또 소유권을 주장한 상태에서 부바디바디바 모습을 해도 그건 이미 내 소유가 되죠. 그러니까 이렇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하고 싸움이 뭐냐 하면, 나는 이미 확정적으로 주의 것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게 싫어서 “나는 내 것이고 싶습니다. 내 소유권을 내가 주장하고 싶습니다.” 하니까 이런 것을 데리고 주께서 세상 속에 살게 해서 우리가 소유권 주장하다 낙심하고 낙담하고, “왜 이러십니까?” 난처하게 만드는 그런 일이 자꾸 벌어지게 해서 그때그때마다 “봐라 네 것 아니지. 내 것 맞잖아.” 우리에게 기쁨과 행복과 안심을 주시는 겁니다.
네 인생 자체는 없어. 그런데 자꾸 네 인생 네 것이라고 하니까 그때부터 근심, 걱정, 두려움 네가 사서 고생해. 내 것이라고 여기기니까 고생도 달려오는 거예요.
여러분, 이런 시험 해봤어요? 여기 뼈다귀가 있어요. 개들이 눈치를 보고 뼈다귀를 쳐다보고 있어요. 주인이 가만있을 때는 개들이 가만있습니다. 주인이 뼈다귀를 싹 돌리니까 따라오잖아요.
내 몸은 주님의 것이라 할 때는 마귀가 안 따라와요. 드디어 내 몸을 내 것이라 하니까 준비된, 대비하고 있던 마귀들이 따라와서 “그러면 너 완벽하지 못하지. 그러면 벌 받지.” 온갖 상식과 윤리, 도덕이 따라와서 봐라. “그래서 벌 받는다.” 얼마나 입이 싼지. 마귀가. 나불나불나불. “이번에 아이 아픈 것도 네가 기도 안 해서 아프다.” 얼마나 나불대는지. 그래서 내 인생 내 것 아니라 하니까 또 기다리고 가만있는 거예요.
내 인생이 내 게 아니라고 하니까 마귀가 달아나고 뒤에 가만있다가, 서서히 “주여, 내 애가 서울대학 수석 합격했습니다.” 하니까 “애 봐라. 조심해라. 앞으로 수석하려면 공부 더 해야 돼.” 또 마귀가 따라와서 “완벽해야 돼. 완전해야 돼.” 또 나불나불. “난 완전 포기했다. 죽이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라.” 이렇게 나오면 또 숨어있고. 나 혼자 느끼는 느낌인지 모르겠어요. “드디어 설교 잘 해 은혜 받았구나.” 그러면 마귀가 “다음도 잘해야 돼. 다음주 심방 가야 돼. 그러면 되는 거야.” 온갖 것 하면, “에라 모르겠다. 주께서 하셨지 나는 모른다.” 그러면 마귀가 가만있고. 꼭 강아지 같아요.
우는 사자 같은 삼킬 자를 삼키는데 ‘내 것이다’ 할 그 순간에 삼키는 거예요. ‘주님 겁니다’ 할 때는 안 달려들다가 ‘주님이 기도해서 구원받는 거지’ 이럴 때는 가만있다가 ‘내가 기도해야 되지’ 이러면 확 달려들어요. 기도 두 시간해야 돼. 어떤 땐 세 시간. 막 달려들어요. 성경 안 보면, 성경 보고 기도해야 돼.
게임 같아. 스타크래프트 게임. 게임 같아. 인생이. 그 짓 하다가 나이 구십오 세에 돌아가시다 보면, 살아온 것이 꿈같아요. 그냥 꿈인 줄 모르고 온갖 고민하다가 나중에는 깨보면 천국이라. “아니고, 땀 봐라. 이리 고생했구나.” 이미 이불 다 깔았고 구원받았는데 자기 스스로 구원받으려고 얼마나 용을 썼던지 식은 땀이 막 나요. “아이고, 용 썼구나. 어이, 천사. 용 쓴 놈 한 놈 왔다. 빨리 샤워 시켜라.”
선배가 너는 어떻게 왔나? 주님 덕분에 왔습니다. 그 동안 뭐 했는데? 나는 내 것인 줄 알고 구원받으려고 얼마나 용을 썼던지 나중에 구십 다섯 살 되니까 아무 소용없는 걸 가지고. 늙어 죽어보세요. 용서도 안 돼요. 치매 걸려서 예수가 누군지 그러고 있어요. 젊어도 소용없습니다. 다 지나갔어요.
그러니까 주께서 동행. 이렇게 허접스러운 걸 알기 때문에 그렇게 시건 없고 자기밖에 모르고 만날 따지고. 그러니까 주께서는 지팡이와 망토를 입혀서, 간단하게 주의 이름으로, 더 쉽게 주께서, 주라는 이름을 걸고 책임지고 우리를 실험의 쥐로서 그리스도의 피를 집어넣고, “네 속에 있는 피가 너를 잡아먹는 마귀를 어떻게 이기는지 네가 살아가면서 똑똑히 목격해봐라.”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미 구원받았는데 우리는 내가 생각한대로 안 된다고 기대한대로 안 된다고 얼마나 하나님께 따지고 들었는지 사실은 따지고 보니까 아직도 내 소유였습니다.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이젠 네 것이 아니고 주의 것이라고 신신당부했던 그 당부를 온 몸에 퍼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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