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7월 10일 에베소서 6장 13절
서울 7월 10일 에베소서 6장 1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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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710 마귀와 어떻게 싸워 이기라는 것인가?
관리자(IP:220.♡.176.150)
09-07-12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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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7-15 18:09
서울090710a엡6장13절a
에베소서 제 39강 (이 근호목사, 2009년 7월 10일-(1), 서울의존교회)
에베소서 6:10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여기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하는데 입는 방법이 뭔지 모르겠어요. 14절에 보면 ‘너희 허리를 진리의 허리띠로 띠고’ 라고 되어 있지요. 어떻게 하면 진리의 허리띠를 띠지요? 진리를 죽 잡아 당겨서 벨트 매듯이 그렇게 허리를 동여맬까요? 진리의 허리띠를 띠어야 세상권세, 공중 권세잡은 마귀들과 싸워서 굳게 설수가 있는데 그 방법을 알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내 쪽에서 준비가 다 갖춰지지 않았는데 무슨 수로 세상권세를 다 쥐고 있는 마귀와 싸워서 이긴다는 말입니까? 불가능하죠. ‘의의 흉배를 붙이고’ 이것은 어떤 본드를 가져다가 붙일까요? 그 다음에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이것은 나이키를 신을까요? 성경가지고 구두방에 가서 이 평안의 복음의 신발을 맞춰달라고 해서 신고 다니면 되는 겁니까?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것은 믿음이라고 쓰여 있는 함석이나 쇠판 두드려서 둥그렇게 바퀴모양으로 만들어서 그걸 들고 다니면 되는 겁니까? 이것은 도대체 우리보고 어떻게 하라는 말인지, 이 말만 덜렁 던져놓고는 ‘입었나?’ ‘뭘요?’ ‘신었나?’ ‘뭔데요?’ ‘들고 있나?’ ‘뭐 말입니까?’ ‘투구를 썼나?’ ‘무슨 투구를 말하는 겁니까?’ ‘마귀를 이겨야지.’ ‘저도 이기고 싶어요.’
그런데 마귀를 이기는 방법이 너무나 모호하기 짝이 없어요. 그래서 이 말씀에 대해서 우리는 ‘아 그렇구나’ 그런 식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냥 넘어갈 수 밖에 없겠지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마귀와 싸워서 굳게 섰는지가 궁금합니다. 에스겔서 14장 14절에 보면 세 사람이 나옵니다. 욥, 다니엘, 노아입니다.
에스겔 14:14, 20
“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사람이 거기 있을찌라도 그들은 자기의 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 비록 노아, 다니엘, 욥이 거기 있을찌라도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그들은 자녀도 건지지 못하고 자기의 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노아, 욥, 다니엘 이런 사람들, 그리고 더 보탠다면 예레미아, 에스겔, 이런 사람들, 더 나중에 나오는 사도 바울같은 사람들은 분명히 마귀와 싸워서 이긴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오늘 본문과 이 사람들을 비교해서 ‘아하, 이렇게 싸우면 마귀와 이길수 있구나. 이게 바로 평안의 복음의 신발을 신는 것이고 이것이 믿음의 방패를 가지는 것이고 또 의의 흉배를 붙이는 것이고 이것이 진리로 띠를 띠는 것이고 이것이 믿음의 방패를 가지는 것이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을 가지는 것이고, 그게 아하, 이런 뜻있었구나’ 라고 이런 분들을 통해서 알 수가 있어요.
그런데 그냥 우리가 이 말씀을 봐버리면 난감하기 짝이 없어요. 먼저 싸웠던 믿음의 사람들을 보면서 ‘아하 그런 것을 두고 이이야기를 했구나’ 하고 이야기할수 있는 겁니다. 방금 했던 욥, 노아, 다니엘, 에스겔 이런 사람들을 다 한글자로 요약하겠습니다. 이들은 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몸에 대해서 악마는 공격을 해댔습니다.
그러면 에스겔이 태권도 몇단입니까? 예레미야가 유도를 했습니까? 악마가 K-1 선수입니까? 최홍만입니까? 악마가 우리 몸을 공격할 때 에스겔이나 예례미야 같은 사람들은 어떻게 같은 몸인데 이 악마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마귀로부터 굳게 설 수 있었을까요? 에스겔의 몸무게가 그 당시에 얼마나 나갔는지 혹시 아시는 분 계십니까? 저도 잘 모르겠는데 그런 그들의 몸의 형편과 관계없이 어쨌든 그들은 마귀의 공격으로부터도 굳게 섰다는 말입니다.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몸을 가졌습니다. 우리처럼 세끼 먹고 잠 오면 잠 자야 했고. 똑같은 몸인데 그들은 승리했고 우리는 지금 승리하는 방법도 모르고 추상적인 이야기로만 성경의 이야기가 들리고 그러면 우리는 뭡니까?
에스겔이 마귀로부터 공격을 받았을 때 공격을 하는데 악마를 보고 공격했습니까? 악마가 신월동 몇 번지에 살고 있습니까? 에스겔이 누구를 공격했는가 하면 같은 인간들, 사람들을 공격했고 공격할 때 탱크라든지, 칼, 활, 주먹질 같은 이런 물리력을 동원하지 않았습니다. 에스겔이 이들에게 어떻게 어떻게 했더니만 하나님으로부터 주의 종이라고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의 몸을 에스겔이 서 있는 자리에 집어넣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게 됩니다. 각자 사람들이 있는 이 자리에 마귀가 작용한다는 이 현실을 파악하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자기 자리에 그냥 있을 것이 아니라 에스겔의 그 마귀로부터 공격받고 마귀를 공격했던 바로 그 현실속으로 들어가야 보이게 됩니다. 마귀가 사람들 사람들 속에서 크게 일하고 있으며 그들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어떤 수를 써야 하는지가 나온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여기 있는 내가 에스겔의 자리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내가 에스겔이 아닌데 어떻게 에스겔의 자리에 가며 내가 예레미야가 아닌데 어떻게 예레미야의 자리에 가며 내가 사도바울이 아닌데 어떻게 사도바울의 자리에 들어가는가? 그 자리에 들어가야 마귀가 보입니다. 그냥 보면 이들은 다 이웃집 사람들일 뿐입니다.
지금 이곳 강단에서 에스겔이 와서 설교를 한다면 ‘이웃 여러분들 안녕하셨습니까?’라고 합니까? 그런 소리가 아니고 에스겔서 1장부터 나오는 그 말씀들이 죽 쏟아지겠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에스겔 속에 들어가면 우리도 에스겔의 그 말을 내놓을 수 있다는 말이지요. 우리쪽에서 먼저 에스겔의 이 자리에 들어가야 됩니다.
오늘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에스겔을 들여다 봐야 하겠습니다. 에스겔 13장 1절부터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의 예언하는 선지자를 쳐서 예언하되 자기 마음에서 나는 대로 예언하는 자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본 것이 없이 자기 심령을 따라 예언하는 우매한 선지자에게 화가 있을진저’ 라고 합니다.
6절에는 ‘…저희는 여호와가 보낸 자가 아니라’ 고 하고 19절에 보면 ‘…거짓말을 곧이듣는 내 백성에게 너희가 너희가 거짓말을 지어서 죽지 아니할 영혼을 죽이고 살지 못할 영혼을 살리는도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제가 방금 읽어드린 것을 요약하면 에스겔 자리에서 보면 거기에 누가 있느냐 하면 거짓선지자들이 있어요.
이걸 그림으로 다시 그려보면 이렇습니다. 에스겔이 악마의 사주를 받는 이 사람들로부터 멀리서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에스겔 본인이 뚜벅뚜벅 걸어서 그들이 사는 자리에 들어가게 됩니다. 지금부터 강의가 본격화하니까 잘 들으셔야 합니다. 에스겔이라는 사람이 이 이단들 속에 들어가니까 평소에 이단들이 악마로부터 사주를 받고 도움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 하면 하나님께서는 에스겔과 함께 있기 때문에 에스겔은 진짜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이 이단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들은 적도 없으면서 자기의 밥벌이를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생각 내키는 대로 지껄이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간단하게 이야기해서 이렇습니다.
오늘 본문에서처럼 이렇게 되는 것은 우리가 어느 자리에 가야 하느냐 하면 우리 자신이 성령을 받지 않고 악령을 받은 채로 살아가고 있는 그 현장, 그 상태의 자리에 우리가 우뚝 서야 됩니다. 단, 그냥 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복음을 들고 가야 합니다. 그들을 이해하는 거예요. 예수 안 믿는 사람 입장에서 그들을 나무라고 닦달 낼 것이 아니고 예수 믿지 않고 예수님을 거부하는 자리에 우리가 들어가야 되는 겁니다.
들어가서 그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를 우리가 충분히 이해를 해 줘야 합니다. 이게 참 쉽지요? 이게 왜 쉬운가 하면 이것이 평소에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바로 우리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에스겔 13장에 보면 거짓선지자들, 이단들이 하나님께 받은 것은 없고 자기들이 지어낸 대로 이야기를 한다는데 그 이야기가 이렇게 나옵니다.
에스겔 13:10
“이렇게 칠 것은 그들이 내 백성을 유혹하여 평강이 없으나 평강이 있다 함이라 혹이 담을 쌓을 때에 그들이 회칠을 하는도다.”
이 이단들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이런 거짓말을 지어내요. ‘여러분, 마지막때에 심판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저주는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원하는대로 사시기만 하면 아마 하나님이 여러분을 도와주실 겁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그 지점에다 하나님은 에스겔을 보낸 거예요. 지금 까지 한 이야기를 다 모른다 치고 다시 이야기할게요.
예수님께서 마귀를 공격하기 위해서 위에서 본 것이 아니고 이 죄인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 한 복판에다 자기 아들을 보내서 예수님이 사는 것과 사람들이 사는 것과 얼마나 큰 차이가 나는가를 통해서 ‘아하, 이런 것이 마귀의 사는 사고방식이구나’ 라는 것을 대외적으로 밝히 보여줬습니다. 이제 그 다음순서가 바로 저와 여러분입니다.
어떤 대학생이 취직을 했다. 왜 취직을 했을까요?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람과 하나님을 영을 받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그 직장에 취직을 시켜 준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을 받지 못한 사람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제가 성가대도 많이 하고 기도도 많이 했으니 저를 취직시켜 주세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저의 이야기입니다. ‘네가 왜 그렇게 취직을 하려 드느냐?’ ‘제가 지금 사귀고 있는 여자 친구가 있는데 빨리 결혼을 해야 되겠습니다. 남자가 여자를 책임을 져야 하니 취직을 당연히 해야 되겠지요. 그러니 제가 이 안○제일교회에서 열심히 봉사를 하고 있으니 이 봉사를 받으시고 취직하게 해주셔서 예수 믿더니 취직도 하고 결혼도 했다는 나의 가치성을 밝히 세상에 보이게 해주세요.’
이런 식으로 기도하고 있던 저의 자리에 주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써 다가왔을 때 ‘아하, 내가 그동안 딱 마귀가 좋아하고 있었던 기도를 하고 있었구나’ 하는 것을 밝히 알게 된 겁니다. 누가 도와주지 아니하면 우리는 자신이 마귀의 편인 것도 몰라요. 여기 부모님들이 계신데 부모님들에게 자녀가 왜 있을까요?
자녀들은 부모가 이야기해주지 아니하면 자신들이 훌륭한 사람들인줄 알고 있어요. 여기 있는 어린이들은 훌륭합니까? 답변하기 곤란하죠? 착하다고 하면 건방지다고 할 것이고 죄인이라고 하면 죄지은 것도 없으면서 왜 죄인이라고 하느냐 할 것이고. 오늘 본문에서 마귀와 싸울 때 멀찍이서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마귀가 딱 쥐고 있는 사람들 속에 우리가 휘파람 불면서 즐거이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한 복판에 들어가는데 우리 힘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들어가게 하시는 겁니다. 우리가 취직하기 싫어도 취직하게 되어 있고 결혼하기 싫어도 결혼하게 되어 있고, 결혼하고 싶어도 못하게 되어 있고 취직하고 싶어도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이 모든 배치, 인사이동이 에스겔 같은 사명 때문에 그 인생을 평생 살게 한다는 말입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지금까지 어떤 선택을 해서 여러분이 여기 이 자리까지 오게 되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저는 그것이 여러분 개인의 선택으로 그렇게 되었다고 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뭐로 본다는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이 어떤 자리에서 구원되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원래부터 있었던 그 자리에 그냥 세우는 겁니다. 본인은 생각하기를 애써서 끌어 모으고 애써서 이만큼 살았다고 하는데 그것은 자기 생각일 뿐이고 하나님은 자기 사명을 포기 안했어요. 오늘 본문을 이렇게 설명해가는 이유가 뭐냐 하면 본문에 보면 새삼스럽게 뭔가 해야 되는 것처럼 오해가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라’고 거듭나는 말은 뭔가 새삼스럽게 하라는 말이 아니고 ‘이미 너에게 성령의 검이 있다’ 는 말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모르고 사는 것 뿐입니다. 구원을 투구를 새삼스럽게 쓰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미 구원의 투구를 쓰고 있다고요. 그런데 모를 뿐입니다. 왜 모를까요? ‘아하, 하나님께서 내 기도에 응답해서 나를 취직시켜 줬구나’ 라고 자꾸 자기를 살리기 위한 생존의 자리, 밥 먹기 위한 수단으로 보니까 자꾸 마귀가 안 보이는 거예요.
마귀가 여러분 태어나기 이전부터 있었어요, 없었어요? 있었지요. 어떻게 있었는가? 말씀대로 있었지요. 하나님이 우리보고 마귀를 만들라고 하지 않았다는 말이죠.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마귀가 있듯이 마귀가 있다면 누구도 있다? 성도도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성도는 되고 싶어서 되고 만들고 싶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귀있음에 그 마귀를 대적하기 위해서 우리같은 성도를 만든겁니다.
문제는 성도를 만들어 놓았는데 그 성도의 신분이 얼마나 고귀하며 성도를 둘러싸고 있는 이 구원의 투구와 믿음의 흉배같은 것들이 얼마나 좋은지 우리는 깜빡깜빡 놓쳐 버려요. 왜 놓치는가? 눈에 보이는 것이 자기 생존과 아내와 남편과 가족 같은 것만 보이니까 그렇습니다. 교회 부흥 이런 것이나 보이는데 우리의 사명이 밥 먹고 사는 그것이 사명이 아닙니다.
밥먹고 사는 것은 들풀이나 개돼지도 잘 살아요. 하나님이 친히 기르셔서 우리보다 더 잘 삽니다.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마 6:27-30)고 하십니다.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허의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라고 합니다.
어제 서울에 비가 왔는데 1톤 트럭을 모는 아저씨가 빗길에 미끄러져서 난간 아래로 떨어져서 죽었습니다. 질문입니다. 그 사람은 왜 죽었을까요? ‘빗길에 속도를 내다가 빗길에 그만 미끄러져서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비는 왜 왔습니까? ‘그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장마철이니까 비가 왔겠지요(???).’
그 사람이 왜 죽었는가 하면 죽을 때 까지 하나님께서 살려줬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죽는 순간을 주신 겁니다. 제가 이야기 하면서도 나 혼자만 아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습니다. 사람이 왜 죽는가 하면, 지금까지 사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죽는 순간을 주는 겁니다. 끝이 있어줘야 소급해서 은혜인줄 압니다.
참새를 하나님이 기르신다고 할 때 영원히 기르신다는 게 아닙니다. 참새가 떨어지는 순간을 통해서 참새가 떨어지기 전까지의 존재는 하나님이 기르신 것처럼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라고 하시는 겁니다. 자꾸 살려고 할 것이 아니라 주께서 살려주는 이유를 알고 살라는 말입니다. 성도가 사는 이유는 성도가 싸워야 할 대상이 있습니다.
그 대상이 타락한 천사인 악마, 오늘 에베소서 6장이 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제 감이 오십니까? 제가 왜 이렇게 길게 설명하는가 하면 ‘여러분, 마귀가 있거든요. 그러니까 구원의 투구를 쓰고 진리의 띠를 띱시다’ 라고 하면 ‘목사님, 어떻게 구원의 투구를 쓸 수 있습니까? 의의 흉배는 어떻게 입는 것입니까?’ 이런 식으로 자기가 지금 안 쓰고 있는 것처럼 안 입고 있는 것처럼, 없는 것처럼 합니다.
새삼스럽게 성경에 나오는 이런 성도의 몸을 둘러싼 이런 것들이 없는 것처럼 교회 와서 호들갑떨면서 교육받아야 새로 생겨나는 것처럼 오해를 하는 거예요. 그런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성도를 만들어 낼 때에는 성도의 몸만 만들어놓는 것이 아니고 모든 마귀와 싸워서 이길 수 있는 모든 무기도 함께 세트로 만들어서 장착시켜서 성도로 세우는 겁니다.
왜 그런가? 성도가 성도된 것도 말씀대로 성도가 쓰고 있는 구원의 투구도 그 동일한 말씀대로 덮어써야 성도답습니다. ‘성도야, 내가 네 몸만 만들어놓았으니 무기를 비롯한 갑옷은 네가 알아서 무장해라’ 라는 이런 것은 없어요. 성도라면 성경에 나오는 모든 성도의 구비조건은 이미 갖추어져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거예요.
인식하지 못하니까 이 작대기, 말씀을 가지고 푹 쑤시는 겁니다. ‘성도야, 에베소서 6장에 무슨 말씀이 나오는지 아느냐?’ ‘요즘 바빠서 못 봤습니다.’ ‘한번 들여다 봐라.’ 그래서 들여다 보니까 ‘어? 우리 속에 성령의 검이 있네요.’ ‘그렇지. 그런데 왜 성도님들은 자기손에 성령의 검이 있다는 사실을 전에는 몰랐을까?’
‘그것은 밥 먹고 산다는 그 일에 바빠서 몰랐습니다.’ ‘그렇지.’ 지금까지 오직 밥먹고 사는 그것밖에 모른 그것조차도 마귀를 통해서 차이나는 것을 보여줘서 ‘나는 단순히 밥이나 먹고 사는 짐승같은 존재가 아닐거야’ 라는 사실을 어떤 계기를 통해서 성경을 보게 하셔서 성경이 곧 내 이야기이고 그것이 곧 내 안에 계신 주님의 이야기인 것을 알게 하셔서 그동안 잊고 있었던 악마의 존재, 세상권세를 누가 쥐고 있는지를 새삼 깨닫게 하는 그런 계기로서 우리를 인도해가고 있는 겁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걱정이랑 하지들을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때를 따라 깨닫게 하는 것도 주님께서 알아서 하는 겁니다. ‘깨닫자’ 해서 깨달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깨닫는 것도 때가 되어야 깨닫고 은혜 받는 것도 때가 되어야 은혜를 받지 은혜 받겠다고 작심한다고 해서 은혜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사시는대로 사세요.
십자가마을 사이트에 김영완씨가 방문해서 결혼하고 싶으니 합당한 자매를 소개해달라는 글을 올려놓았어요. 댓글에 보면 우리교회 강장로님의 댓글이 이래요. ‘그냥 사세요.’ 이 말은 결혼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사람이 웃을 때가 있으면 울 때가 있고 사랑할 때가 있으면 미워할 때가 있다는 거죠. 그렇게 있는데 우리는 그 모든 때를 자신의 신체에서 발산되는 유쾌와 불쾌의 차이로 판단하고 행동합니다.
이것이 존듀이가 말한 것인데 ‘인간에게서 나오는 모든 행동은 자기의 유쾌와 불쾌의 차이에서 나오는 산물이다’ 고 합니다. 자기 기분 좋으면 성령 받았다고 하고 기분 나쁘면 마귀라고하지요. 그것은 그냥 기분일 뿐이고 기분 따라 흔들리는 것뿐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기분 따라 흔들리다 보니까 마귀의 개념을 자기 기분대로 정하게 됩니다.
의존교회는 그런 교인이 없기에 제가 마음 놓고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새로 교인이 하나 왔는데 너무나 목사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거예요. 목사님이 그 교인을 칭찬하기를 ‘아무개 집사님은 행동하는 것이 하나 하나 천사같습니다.’ 그것도 사람 없는데서 조용히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고 다들 듣는데서 하니까 교인들이 안색이 별로 안좋습니다.
‘온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봉사도 별로 하지도 않은 것이 칭찬을 다 받네. 그동안 우리는 죽어라고 봉사를 했는데 하나 칭찬도 안 해주더니 사람하나 붙잡아서 교회 등록시키려고 목사가 알랑방귀를 뀌면서 구걸하는 꼬락서니 참 보기 그렇네.’ 이렇게 할 때 그 교회 분위기가 새로 온 교인이 먼저 온 교인에게 적수가 되고 만 거예요.
왜 적인가? 불쾌하거든요. 나를 불쾌하게 하는 것은 나의 원수고 적이 되는 겁니다. 그 순간 갑자기 마귀가 달려들죠. 달려들어서 ‘내가 싫어하는 사람은 무조건 마귀야’ 라고 되어 버립니다. 그렇다면 진짜 마귀는 어디 있습니까? 이거 어렵습니다. 진짜 마귀는 어디 있어요? 진짜 마귀는 본인, 바로 그 당사자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자기가 따로 마귀라고 매겨놓은 그것이 마귀의 유혹으로 인해서 가짜 적들을 만들어낸 진짜 마귀의 유혹에 빠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알게 하시는 것은 주님만이 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경험을 할 수 있는 그것이 바로 오직 성도죠. ‘나는 마귀입니다’ 할 때 그게 바로 성령의 검이 되는 거예요.
누가복음에 그런 말씀이 있죠. ‘많이 용서 받은자가 많이 사랑한다고’(눅 7:47) 점심때가 되어서 예수님께서 중국집에서 점심식사로 이것저것 시켰나 봅니다. 짜장면도 있고 짬뽕도 있고 죽 시켜서 먹고 있는데 갑자기 파마약을 잘못 써서 머리가 귀신처럼 이상하게 생긴 여자가 와서는 ‘예수님이 여기 계셨네요’ 하고 다짜고짜 예수님 발에 그 비싼 향유를 죽 부었어요.
냄새가 쫙 퍼졌지요. 그리고는 그 긴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어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옆에 있던 바리새인들이 ‘저 값비싼 향유를 저렇게 낭비하다니. 저거 팔아서 백명이라도 먹여 살리겠다’ 할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입 다물라. 많이 용서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 너희들이 눈물로 내 발을 씻어줬나?’
물하고 눈물하고 같습니까? 눈물은 자신의 모든 회개가 담긴 것이 눈물 아닙니까? 눈물로 씼었어요. 노래도 있습니다. ‘눈물로 쓴 편지는…,’ 눈물로 자기의 값비싼 것을 허비하면서 그 여인이 나타낸 것은 뭐냐 하면 ‘내 눈물보다 내 향수보다 나를 용서하신 주님의 용서가 더 가치 있습니다’ 하는 그 뜻입니다.
그럴 때 그 자리에 있는 악마가 누구입니까? 바리새인들 아닙니까? 비로소 악마가 악마로서 들통났지요. 주님께서 누구를 사용했습니까? 아주 질 나쁘기로 소문난 창녀 막달라 마리아의 ‘내가 죄인입니다’ 하는 그 고백을 통해서 악마 아닌 줄 알았던 그 바리새인들이 졸지에 악마로 부각되는 겁니다.
그러면 누가 누구를 이긴 거예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막달라 마리아가 성경 들고 와서 ‘어이, 나 막달라 마리아는 창녀다. 그런데 예수 믿고 구원받았거든. 바리새인 나와라. 나에게 귀싸대기를 맞아라’ 이렇게 이겼습니까? 마귀를 어떻게 이깁니까? ‘마귀, 이리와. 나 예수님한테 용서받았어. 이리 와서 꿇어.’ 이렇게 이겼습니까?
막달라 마리아가 마귀를 이겼는데 자기는 지금 뭘 하고 있습니까?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했을 뿐인데 그 현장에서 누가 들통난다? 바리새인의 악한 것이 들통났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식으로 우리를 사용한다고요. 예를 들어서 누가 취직을 했습니다. ‘이제 취직도 했으니 돈 벌고 잘 살면 되겠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은혜를 받고 나니까 ‘내가 순 돈만 생각하고 밥벌이만 생각하는 나쁜 놈이다’ 라고 한 그 순간 어떤 과장이 ‘자네의 그 말을 듣고 내가 후회했네. 내가 중고등부때 회장까지 했는데 벌써 교회 안간지 20년이나 되었네. 지금 자네 말 듣고 보니 교회 다시 가야겠어. 내가 너무 술만 좋아하고 교회를 너무나 등한시 했어’ 라고 하면서 마귀가 떠난 고백을 하는 거예요.
따라서 우리가 여기서 알아야 될 것은 뭐냐 하면 우리가 마귀를 이기고 성령을 검을 쥐고 구원의 투구를 쓰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진리의 띠를 띠고, 이 모든 것은 말씀을 주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지고 논다는 겁니다. 이것이 믿어져야 돼요. 하나님은 한순간도 우리를 헛되이 사용한 적이 없어요. 괜히 우리가 그렇게 생각한 것 뿐입니다.
‘나 벌써 교회 안 나간지가 5개월이 되었다.’ 그렇더라도 주께서 쓰셨습니다. 그 다음주일에 한꺼번에 회개하라고. 전에 제가 교회에서 문제를 냈어요. 일년에 교회 두 번 나오는데 그렇게 나와서 ‘주여, 이제 나 왔으니 받아주옵소서’ 라고 우는 사람들과 매주 건성으로 꼬박꼬박 교회 나오는 사람들 중에 어느 것이 의입니까?
그 질문을 듣고는 사람들이 목사님의 의중을 알고는 ‘그야 6개월에 한번 나와도 우는 사람이죠.’ 그 이야기 듣고 제가 다시 질문했습니다. 그걸 알고서 ‘1 년에 2번 나와서 우는 사람과 일년에 한번 나와서 우는 사람하고 누가 더 의인입니까?’ 약간 답하기가 곤란해지요. ‘그것은 1년에 한번 나온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3년에 한번 나오는 사람과 비교하는 식으로 계속 가볼까요? 정답은 주께서 쓰시는 사람이 의인입니다. 6개월만에 교회 나왔든 1년만에 교회 나왔던 주께서 쓰시는 사람이 의인입니다. 지금 매일같이 주께서 쓰신다는 것을 몰라서 그래요.
그렇다면 지금까지 한주도 안빠지고 매일같이 나온 사람은 자신이 매일같이 나왔다고 하며 그것은 하나님의 적이 되고 하나님께서 붙들어서 사용하셔서 ‘일년동안 한번도 안빠지고 나오게 하셨다’ 한다면 일년에 한번 나온 사람이나 매주 나온 사람이나 하나님 보시기에 의인이죠. 이해 되셨습니까? 그러니까 어떤 행위가 문제가 아니고 지금 주께서 나를 계속 사용하고 있다는 감을 느낄 때 그 때 우리에게는 마귀가 보이는 거예요.
왜? 나처럼 이렇게 주께서 쓰신다는 것을 모르고 자신이 잘났고 자기가 똑똑하고 자신이 잘해서 그만큼 되었다고 여기는 것들, 물론 그것들도 회개해서 다음에 성도가 되는 것은 주께서 맘대로 하실 일이고 어쨌든 그것은 다음이고 어쨌든 지금 보기에 하나님의 은혜도 빠져있고 성령의 검도 빠져있고 구원의 투구도 빠져있고 믿음의 방패도 의의 흉배도 진리의 띠도 빠져있고 그것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것은 마귀로부터 지배받고 있는 성도 아닌 사람이 되는 겁니다. 이제 좀 이해가 되십니까?
그런데 아직도 문제가 남아 있어요. 아까 에스겔이 어디까지 갔다? 에스겔이 불신자의 자리에까지 갔습니다. 가니까 이들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여러분, 우리는 평안합니다. 우리는 심판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평안, 축복 이거만 하렵니다.’ 이렇게 하더라는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게서 에스겔을 불신자속에 보낸 이유가 있습니다.
에스겔서에 의하면 마귀에 빠진 이단들은 ‘살릴 영혼은 죽이고 죽일 영혼은 살리는 하나님의 의중과 반대되는 짓을 했다’고 했지요. 그렇다면 지금 이들은 무슨 짓을 하고 있습니가? 살릴 영혼을 죽이는 역할 그리고 죽일 영혼을 ‘당신은 구원받습니다’ 하고 반대로 하고 있지요. 그렇다면 문제가 나갑니다. 에스겔이 해야 될 일이 뭡니까?
간단하지요. 그들이 하는 일과 반대로 하면 되지요. 살릴 영혼을 살리고 죽일 영혼을 죽이고. 그것을 하면 되는 거예요. 문제는 오늘날 목사님들이 살릴 영혼은 살리고 그것은 하려고 애쓰는데 그 다음에 뭡니까? 죽일 영혼을 잘 다둑거리고, 그렇지요? 죽일 영혼을 안 죽이죠. 그러면 그 사람은 거짓선지자들입니다.
강의 다시 해 봅시다. 에스겔을 죄인의 자리에 집어넣었죠. 죄인의 자리란 무엇이 지배하는 자리입니까? 악마가 지배하죠. 악마가 지배하는 속에 에스겔을 집어넣었습니다. 그런데 악마의 지배를 받고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뭐가 잘못되었는지 몰라요. 그저 사람들에게 좋게 하면 그것으로 사람들이 좋아하니까 교회가 풍성하게 부흥이 된다고 된다고 여깁니다.
‘살릴 영혼이나 죽일 영혼이나 다 오너라’ 하는 식인데 그들의 기준이 뭐예요? ‘다 나한테 오너라 그게 기준이잖아요. 그런데 에스겔의 기준은 뭡니까? 살릴 영혼은 살리고 죽일 영혼은 반드시 죽일 기준을 제시하는 것이 에스겔이잖아요. 그러면 에스겔의 기준과 이단들의 기준이 다르지요. 그러면 다 지우고 하나만 씁시다. 이거 뭐예요? 기준!
에베소서를 봅시다.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하는 이 모든 것의 기준은 다 뭡니까? 말씀과 관계있죠.
머리든 가슴이든 발이든 다 말씀이죠. 이게 말씀위주입니까? 사람위주 입니까? 사람위주 같으면 살릴 놈도 살리고 죽일 놈도 살리고 이렇게 되겠지요. 그런데 말씀위주가 되면 살릴놈은 살리고 그 말씀대로 죽일 놈은 반드시 ‘제발 좀 말씀대로 죽어라 이놈아. 제발 좀 지옥가 줘’ 라고 해야 합니다. 왜 말씀대로 지옥 갈 인간은 지옥 가 줘야 됩니다.
이것은 선지자 자기중심이 아니고 누구 중심이다? 선지자 자신도 말씀에 종속되어야 되지요. 그렇다면 에베소서 6장의 핵심은 뭐냐? 죽일 영혼 살리고 살릴 영혼 죽이고, 이것으로 보건대 마귀는 누구중심이고? 자기 몸 중심이죠. 마귀들은 누구중심? 사람중심. 성도는 누구중심? 사람중심이 아니고 말씀중심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다 이루신 분은 누구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말씀을 다 이루었다는 것을, 예수님을 증거 하기 위해서 성도는 있고 마귀편에 있는 것은 인간을 위한다는 이유 때문이죠.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평화를 주신다. 평화다. 그래서 그것 때문에 제가 에스겔서를 인용한 거예요.
에스겔서 14장에 보면 그 당시 거짓선지자들의 주특기가 뭐냐 하면 ‘여러분, 행복하세요. 축복, 축복, 할렐루야! 하면 됩니다, 긍정적사고방식, 적극적사고방식, 할 수 있거든이 무엇이냐 믿는 자는 능치 못할 것이 없느니라,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 라는 겁니다.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 하는 것은 마귀가 이야기한 것이죠.
전부 다 사람들 좋으라고 하는 말들이죠. 그러니까 ‘목사님, 그 사람들이 왜 그렇게 주장하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왜 저 사람들이 하나님 위주로 살지 않고 저렇게 사람 위주로 살아가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당신이 잘 알텐데요. 왜냐고요? 당신이 이미 그렇게 살고 있잖아요.’ 우리가 평소에 가만 보면 우리 밑바닥에 뭐가 깔려 있습니까? 하나님 하나님 하지만 사실은 누구위주가 깔려 있습니까?
‘하나님, 저요, 봐주셔야 됩니다. 다른 사람들 대기업 시험 치는데 50대 1인데 제가 예수 잘 믿잖아요. 다른 사람 다 떨어져도 저만 넣어주세요.’ 누군가 암이 걸렸다. ‘하이고, 고소해라. 주여, 우리 가정은 일체 암 없게 하옵소서.’ 이것이 밑에서 솟아 올라와요. 시기와 질투, 미움이 올라온다고요. 올라오게 될 그 때에 우리가 십자가의 영을 다시 한 번 보게 되면 ‘주여, 내가 바로 죄인중의 괴수입니다. 그런데 이 죄인중의 괴수를 이렇게 사용해 주시니 이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마귀를 모른다고 하는데 우리가 마귀를 모르는 것이 아니고 마귀를 너무 잘 알지요. 아까 오는 중에 어떤 분이 그런 이야기를 해요. ‘전에는 예수 안 믿는 것이 비정상이었는데 은혜 받고 나니까 예수 믿는 것이 비정상이고 예수 안믿는 것이 정상이다.’ 그 말이 맞지요? 오히려 예수 안믿는 것이 정상이고 예수 믿는 것은 웬 은혜고 웬 축복인지 나같이 쓸데없는데 어떻게 나를 쓰시지?’
쓸데없다 있다, 하는 것은 네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너에게 성령 줬으면 이미 그 자체가 뭐다? 그 자체로 마귀와 싸울 수 있는 충분한 성령의 검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말씀의 검, 혹은 성령의 검, 그 말씀 안에 구원도 있고 다 있는데 어떻게 그 말씀이 나를 쓴다, 혹은 그 말씀에 의해서 어떻게 내가 사용될 수 있습니까?
내가 어떻게 하면 말씀에 쓰임 받는 사람이 되는가? 그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는데 왜 잘못되었는가 하면 말씀에 의하면 ○년 ○월 ○시에 태어나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인간은 어떻게 해도 말씀의 틀에서 못 벗어납니다. 온 우주가 그래요. 온 우주가 말씀대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시편에 나옵니다.
시편 33:6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기운으로 이루었도다.”
구원받은 사람이나 구원 못 받은 사람이나 말씀에서 한발자국도 못 벗어납니다. 그렇다면 이 안에서 태어난 우리도 말씀대로 태어난 거예요. 심지어 지옥 가는 사람도 말씀대로 태어나는 겁니다. 지옥가는 사람은 인간의 몸과 몸의 시선으로 서로를 보지만 우리 성도는 그 시선을 둘 때 어떤 사람도 말씀을 가지고 보는 거예요.
‘아하, 저 사람은 예수를 안 믿는구나. 저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구나. 아하, 저 사람은 마귀의 지배를 당했구나.’ 모든 것을 볼 때에 말씀대로 보게 되면 그 자체가 우리는 마귀와 싸우는 하나의 병기, 군사, 부름 받은 군대가 되는 겁니다. 말씀이 우리를 만들었다면 그 다음문제는 말씀이 어떻게 우리를 다스리는가?
그것은 말씀이 우리 자신부터 깨뜨려요. 우리 자신부터 골수와 관절을 깨뜨려서 우리 속에 나의 체면과 위신이 살아 있지 않고 오직 그것이 나쁜 것임을 깨닫는 과정, 과정을 통해서 세상에 내 보냄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깨어지는 그 과정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이 깨어지고 그 사람들이 변화를 일으키는 그런 도구로써 사용하는 겁니다.
에스겔 1장에 보면 천사가 움직일 때는 온 사방으로 같이 움직여요. 하나님의 신이 천사와 더불어 함께 움직이기 때문에 천사가 자기 맘대로 하나도 못하고 천사위에 하나님의 신이 같이 있는 것처럼 그 천사 자리에 성도를 집어넣어 버리면 성도는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신에 의해서 하나님의 싸움을 싸우도록 우리 자신은 와장창 깨어지고 또 쉬면서 떡도 먹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관리자(IP:220.♡.176.150)
09-07-15 18:11
서울090710b엡6장13절b
에베소서 제 40강 (이 근호목사, 2009년 7월 10일-(2), 서울의존교회)
지난 시간에 제가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성도는 새삼스럽게 뭘 할 것도 없이 성도된 자체가 이미 모든 것을 다 갖추었기에 새삼스럽게 추가적으로 뭘 더 자기에게 할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찾아보면 다 나오는데 괜히 우리가 세상 사람들처럼 그냥 밥이나 먹고 출세나 하려고 살다 보니까 현재 하나님께서 감추어 두신 성령의 검, 믿음의 방패, 의의 흉배, 이 모든 것을 자꾸 잊어 버려요.
잊어버릴 때마다 하나님께서 내 일을 잘 안되게 하시고 뭔가 일 꼬이게 하심으로 그 가운데서 보면 ‘아하, 내가 참 구원받은 사람이지. 구원된 사람 같으면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인데 나는 내 이익만 너무 챙겼구나’ 하는 것을 짧은 순간이나마 깨닫게 하는 겁니다. ‘정신 차려. 정신 차려. 내가 세상 사람들처럼 그냥 밥이나 먹고 살다 끝내는 사람이 아니야. 나는 복음을 나타내는 사람이야. 정신 차려.’
이렇게 하면서 내 쪽에서 정신을 차리든 안 차리든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많은 일을 해 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 식으로 되는 이것이 기준인데 세상은 항상 기준이 내 몸 위주입니다. 내 몸 위주가 되면 여기 나가 있으면 여기 있는 나 보다 더 큰 것이 뭐냐? 내 가정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마다 목사들이 제일 고민하고 있는 것이 뭐냐 하면 노인분들은 교회에서 주님께 엎드려서 경배하고 있는데 젊은이들은 교회 보기를 나를 꺾고 하나님께 엎드려서 경배하는 곳으로 보지 않고 학원정도로 본다는 겁니다. 무슨 학원인가? 천국 가는데 필요한 기술을 습득하는 학원으로 봐요.
6개월 코스로 복음 알아서 다 외워놓고 죽을 때 되어서 그것 사용해서 구원받는 것. 엎드려 경배하는 것이 없어요. 자기가 누군가에게 엎드리는 것이 없고 ‘어이, 목사님, 교회여, 나에게 천당 가는 비법만 가르쳐 주면 내가 약간의 수수료 내듯이 헌금내고 받아 챙기겠고 내가 많이 바쁜 몸이라서 교회 잘 못 나오니까 언제든 죽더라도 구원받을 수 있는 방법이나 말해주세요. 십자가피?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6개월 뒤에 봅시다.’
이것을 제가 허투루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교회 이야기입니다. 중학생들은 예배시간에 휴대폰 들고 있어요. 전에는 고등학교 3학년 되면 교회 안 나왔잖아요. 지금은 고등학교 1학년인데도 부모가 교회를 안 보내요. 1학년때부터 조져야 겨우 대학에 간다는 거죠. 그 가정은 남의 가정이 아니고 누구의 가정이기 때문입니까? 나의 가정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성경말씀을 누구 중심으로? 나 중심으로. 나 잘되기 위해서 말씀을 줬다는 거예요. 이것은 뭐가 아닌가? 비밀이 아니에요. 반드시 복음으로 구원받을 때는 세상 사람들 눈으로 보기에 어리석게 보이고 세상 사람들이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것으로 인하여 우리가 구원받아야 돼요. 사람들 보기에 어리석게 보이고 부끄럽게 보이는 그런 방법이 십자가에 담긴 내용입니다.
그래서 남들이 깨닫지 못하고 어리석게 보이는 그 구원의 비밀을 우리가 알게 되면 우리속에 있는 그 구원의 비밀 때문에 우리도 세상에서 쪼다 되고 어리석은 자 되고 무시당하고 그렇습니다. 그게 얼마나 영광스러운 겁니까? ‘나의 의와 내 복음으로 인하여 핍박을 받으면 기뻐하라 너희위에 복이 있느니라.’(벧전 5:14)
‘복받은 줄 알아라. 이것들아!’ 하는 거죠. 선배님, 하면서 주님 앞에서 좋아해야 됩니다. 뭐든지 내 몸위주로 좋아라 하면 그것이 비밀이 아닙니다. 진짜 복음은 비밀입니다. 이것이 예레미야 23장에 보면 천상회의가 나옵니다. 어려운 이야기 합니다. 시간개념을 보통 수평개념으로 보잖아요. 성경은 수평개념 말고 수직개념으로 봐요.
수평개념은 과거-현재-미래가 되지만 수직개념으로 쏘아버리면 과거든 현재든 미래든 관계없이 지금 바로 이 자리에서 우리를 쏘아볼수 있는 겁니다. 정낙원목사님 설교 보면 이렇게 했어요. ‘태양은 미국가나 영국가나 어디를 가도 태양은 한 태양이다.’ 여러분이 차를 타고 가면서 달을 보시게 되면 수킬로미터를 달려가도 맨 달은 그 달이죠.
어디서 믿은 예수는 그 예수입니다. 우리 외부에서 은은한 달빛을 비추고 따뜻한 햇빛을 비추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그 달빛과 햇빛의 은혜에 대해서 언제 알았습니까? 사람들은 자기가 애써서 노동한 그 가치만 귀한 줄 알았지 은은하게 비추는 달빛과 햇빛과 별빛의 고마움을 몰라요. 얼마 전에 비 안온다고 얼마나 하나님을 원망해 댔습니까? ‘비를 주옵소서’ 기도하면서.
‘여러분, 회개합시다. 혹시 압니까? 회개하면 비를 주실지’ 이것은 회개하는 이유가 따로 있었다는 거지요. 자기 몸, 내 가정, 내 나라를 위해서, 자기를 위해서 회개하고 기도하는 거예요. ‘하나님, 비 좀 주세요. 왜냐고요? 그래야 내가 평안해 지니까요.’ 모든 기도회의 기도가 다 이래요. 세상의 어느 교회가, 의존교회에서 건너다 보이는 저 다른 교회들이 ‘하나님 아버지, 의존교회 부흥케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는 교회를 봤습니까?
항상 내 교회, ‘나’를 위함입니다. 그것은 비밀이 아닙니다. 나를 위해 사는 것은 비밀이 아니고 어릴 때부터 타고나는 겁니다. 오늘 KTX 6호차에 탔는데 거기에 엄마가 어린애를 데리고 탔어요. 그 애를 보면서 ‘나는 잠 다잤다’ 했지요. 애가 울어 퍼 대는데 엄마도 한 고집 하데요. 엄마가 애를 데리고 밖에 나가지를 않는 거예요.
누가 자리 차지할까봐서 그랬는지, 애는 한 시간 반 동안 울어대고 차안에서 자는 사람 다 깨워놓고. 제가 그랬지요. 엄마의 품위는 없습니다. 아무리 엄마가 하버드를 나오고 박사를 따고 해서 얻어진 그 고상한 품위, 애 업고 기차를 타보라는 거예요. ‘애 데리고 나가주세요’ 하면 거기에 무슨 품위가 있습니다. 애가 오줌 싸고 똥 싸대는데 무슨 품위?
애 젖 먹인다고 젖 턱 꺼내놓고, 처녀 때의 그 젖이 아니고 몸이 이미 아닙니다. 밤 잠 못자고 애 보다가 애가 잠들면 그제야 애하고 같이 쓰러져서 잠이 들고 하는데 거기에 무슨 엄마의 품위가 있습니까? 인간의 몸이라는 것은 자기의 몸 자기 맘대로 안되고 타인의 몸에 의해서 영향을 받게 되어 있어요. 세상은 자기 맘대로 못살아요. 남이 떠밀면 밀리게 되어 있어요.
이것은 비밀이 아니에요. 예레미야 23장 21, 22절에 보면 ‘이 선지자들은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달음질하며 내가 그들에게 이르지 아니하였어도 예언하였은즉 그들이 만일 나의 회의에 참예하였더면 내 백성에게 내 말을 들려서 그들로 악한 길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게 하였으리라’ 라고 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회의에 참석도 안했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내지 않았다는 말이죠.
분명히 하나님께서 그들을 안 보냈습니다. 목사라는 직업이 사회에서 점잖고 고상하다는 식으로 약간은 먹어주는 직업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보내지도 않았는데 목사하고 안수하고 기도하고 하나님께서 보내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스스로 성령받았다고 하고 설교하는 거죠.
이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기에 망정이지 제가 만일에 ‘여러분, 하나님이 보내지도 않았는데 왜 목사 했습니까?’ 한다면 그 사람들이 말하기를 ‘다 그런 것 아닙니까?’ 라고 할 거예요. 뻔하잖아요. 돈 되는데 사람들이 모이는 것이 뻔한 세상이치 아닙니까? 제 처제가 오래도록 일본에 있다가 나왔는데 일본 목사에 대해서 말하기를 일본의 목사는 그야말로 거지, 노숙자신세랍니다.
교인들이 그만큼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한국의 목사들 보고 있으면 기가 차다는 거예요. 한국교회가 부흥되었다고 하는데 아무리 봐도 부흥된 것이 아니고 사기를 쳤어요. 하나님이 보내지 않았어요. 천상회외의 참석도 안 해 봤고 그 천상회의에 참석하게 되면 나올 때는 반드시 비밀로 나오지요.
여러분이 구원받았다는 것이 비밀로 왔기 때문에 구원받은 그 사람은 항상 남들 보기에 어리석게 보이고 비밀스러운 존재가 됩니다. 항상 이렇게 돼요. 마치 엘리야처럼. 그러나 구원되지 않은 사람은 사람들에게 납득이 됩니다. 비밀이 아니기에 그렇습니다. 사람들에게 어떻게 납득이 될까요?
사람에게 납득된다는 말은 사람은 무슨 중심이다? 내 몸 중심이죠. 그러면 사람들에게 관심 있는 것은 뭡니까? 나의 건강, 나의 가정의 행복, 자기가 투자한 교회의 번창과 부흥, 크게 성공하는 것, 정복력의 확장, 자기 존재가치를 한껏 드러내는 것, 이 모든 것 앞에 전부 ‘나’ 가 다 걸려 있어요. 이것은 비밀이 아닙니다. 이것은 타고난 거예요.
어린애들도 엄마들 듣는 것 같지만 절대로 엄마 말을 듣는 것이 아니고 엄마를 이용해요.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지 엄마가 맛있는 것을 준다는 것을 알고 그대로 이용합니다. 이것이 타고났어요.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우리 애는 엄마에게 효도를 합니다’ 라고 하는데 저는 지금까지 부모에게 효도하는 자식을 본 적이 없습니다.
효도라고 말하는데 효도라고 할것이 아니고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가정이기주의’ 효도라는 것은 실상은 가정이기주의를 말합니다. 또는 가문이기주의죠. ‘그러면 목사님이 말하는 진정한 효도는 뭡니까?’ 진정한 효도는 이겁니다. 여러분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죽은 자는 죽은자로 장례한다는 것, 효자 났습니다. 그게 효도입니다. 그래서 효도는 이세상 아무도 할수 없습니다.
그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기주의, 가정이기주의, 자기 가정만 화목하면 된다는 겁니다. 어떤 인간도 효도하는 인간이란 없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사람도 없고 도적질 안하는 사람도 없고, 탐내는 자체가 이미 도적질이고 음란한 생각을 품는다는 것 자체가 이미 간음이고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이미 살인죄고 겉옷 달라고 하는데 속옷을 달라고 하는것도 나쁜 인간입니다.
잘 들어보세요. 돈 빌려 달라고 했는데 그냥 빌려 주지 않은 것은 다 산상설교에 어긋납니다. 은행에서 직원이 돈을 대부해주면서 이자를 받을 때 성경에 따르면 그것은 나쁜 인간입니다. 성경에 ‘누가 와서 돈을 꾸어달라고 하거든 거저 주라’ 고 나옵니다. 그리고 ‘먹을까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를 걱정하는 사람들은 이방인들입니다.
빗방울 한 방울 한 방울에 감사 못하는 인간들도 이방인들입니다. 매일 아침에 일어날때마다 태양에 감사못하는 그것도 이방인입니다. 이 세상 어떤 인간도 산상설교 지킬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현재 우리는 비밀을 원하는 것이 아니고 현재 살고 있는 내 몸이 신이 되었어요. 신이 있는데 어느 신을 섬김니까? 날 섬겨야 되지요.
그래서 교회 올 때 젊은 사람들은 나를 영원불멸의 존재로 이 내 몸을 영원히 멸하지 않는 불멸의 존재로 만들 방법이나 알려달라는 거예요. 어떻게 하면 천당 가는지 그거나 챙겨달라고 우기는 거지요. 그것은 살릴 영혼이 아니고 죽일 영혼입니다. ‘당신은 죽일 영혼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집에 가서 기다리세요.’
천상회의의 내용이 지상에 오면 비밀이 되는데 그 비밀이 아니면 하나님께서 보내준 바의 뜻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23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24절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기를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라고 합니다.
32절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거짓 몽사를 예언하여 이르며 거짓과 헛된 자만으로 내 백성을 미혹하게 하는 자를 내가 치리라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으며 명하지 아니하였나니 그들이 이 백성에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으며 명하지 아니하였나니’ 그런데 어째서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한다는 겁니까? 마태복음 7장에 나오지요?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쫒아내고 병을 고치고 주의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니까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누구세요? 누구시죠? 난 당신 모르겠는데?’
그래서 오순절날 성령이 와야 했어요. 12제자가 어디로 갔습니까? 예수님 십자가 죽으시고 부활하신 뒤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모였습니다. 뭐 때문에 모였습니까? 고기 잡으려고 모였습니다. 성령 안 받으면 그렇게 돼요. 고기는 왜 잡습니까? 비밀 때문에? 아닙니다. 그 전에 그들이 복음의 비밀을 받았어요. 아무리 그들이 말씀을 듣고 교육을 받아도 소용 없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누구 몸이 살아 있다? 내 몸이 살아 있는 한 우리는 복음을 전할수 없어요. 그런데 성령이 오고나면 그 때부터는 뭡니까? 젊은이들은 뭘 볼것이고? 환상을 볼것이고. 드디어 성령이야기가 나오잖아요. 마지막때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피가 되리라’ 그런데 누구든지 주 예수를 믿는자는 뭘 받는다? 구원을 얻는다.
사도행전 2:16-21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와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마지막 때에 멸망당하더라도 주 예수님 자체가 비밀이에요. 예수님이 비밀이에요. 예수님이 비밀이기 때문에 내 몸과 관련되는 것이 아니고 내 몸을 비켜가서 말씀과 직접 관련되어 있습니다. 내 몸을 비켜간다는 것은 뭐냐? 이 몸을 죄인으로 부정해 버리죠. ‘예수님, 제 가정을 좀 돌봐주세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네 가정은 내 복음을 위해서 쓰여져야 된단다.’
‘아니 그 말이 아니고 내 가정, 내 가정을 돌봐달래니까요?’ ‘글세 네 가정은 네 소유가 아니고 나의 소유인데 오직 내 복음을 위해서 쓰여야 될 가정이다.’ 복음을 위해서. 그러니가 고린도전서에 보면 ‘하나님 저 결혼 시켜 주세요.’ ‘아니야. 복음을 위해서 결혼해’ 정욕이 불같이 올라오거든 결혼 하기는 하는데 구태여 하기 싫은 결혼을 억지로는 하지 말라는 거죠. 왜?
이것은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이고 제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니까 오해하지 말고 들으세요. 이것은 비밀입니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주를 위해서 어떻게 주를 기쁘게 할꼬’ 라고 하다가 결혼하고 난 뒤에는 ‘남편을 위해서 어떻게 기쁘게 할꼬’ 라고 나오더라는 말이죠. 왜 갑자기 주에서 남편으로 변했습니까?
이 남편이 누구하고 관련되어 있습니까? 나와 관련되어 있어요. 남편이 튼튼해야 돈 벌어다 주잖아요. 남편이 비실하면 돈벌이가 안돼요. 그러니 결혼하기 전까지는 주여 주여, 하다가 결혼하고 난 뒤에는 내 남편 내 남편, 한다는 거죠. 이것은 남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주여 주여, 하다가 결혼하고 나서는 그저 내 아내, 내 아내, 하는 겁니다.
나중에 여자들은 애기를 낳으면 남편도 안 봐요. 뭘 봅니까? 내 새끼. ‘어느 놈이든 내 새끼 건드리기만 해 봐라. 내가 용서를 안한다.’ 자식외에 눈에 뵈는 것이 없는 것이 오늘날 교회 나오는 젊은 분들의 특징이에요. 그저 자기 새끼 피아노 가르치고 공부시키고 그것 외에는 아무 생각이 없어요.
교회 와서 복음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학원이 용하다고 소문이 났어요? 어느 선생이 족집게처럼 잘 가르친다고요?’ 그저 이야기하는 테마가 그거예요. 그게 무슨 비밀, 무슨 그런 비밀이 다 있어요? 천상회의, 이것은 어떤 인간도 예상하지 못했고 미가의 경우에 천상회의에 참석했어요.
예레미야도 마찬가지고 이렇게 부름 받아서 천상회의에 참석한 사람에게만 그 내용을 알려줘서 그렇게 하나님의 천상회의에 참석했기 때문에 죽일 영혼은 죽이고 살릴 영혼은 살려서 사람위주가 아니라 무슨 위주? 비밀위주로 복음위주로 살아가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마귀를 이기는 오늘날의 성도들의 특징입니다.
‘아니, 목사님 그런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그런 사람들이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아니요. 저는 내새끼밖에 모르는 인간인데요.’ 글쎄요. 성령께서 여러분을 언젠가는 깨닫게 하실 겁니다. 깨닫게 하셨다가 또 3분 지나면 다시 잊게도 하시고 2분뒤에 다시 깨닫게 하시고 5분뒤에 다시 잊게 하시고, 하여튼 매일같이 왔다 갔다 하면서 깨닫게 하시는데 이 비밀 때문에 이 십자가 복음 때문에 내가 살아났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그런 하루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에베소서 6장 19절을 봅시다.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그 다음에 뭡니까? ‘복음의 비밀을’ 그 다음에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이게 무슨 뜻이냐? 천상회의에 우리 중에 누가 참석하셨습니까? 천상회의에 참석하신 분은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참석한 정도가 아니고 천상회의를 주재하신 분이지요.
성경의 모든 말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 22장까지의 모든 말씀이 어디에 모이는가 하면 복음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출애굽기, 민수기, 이렇게 단선으로 가지 마시고 중심에 복음을 놓고 창세기도 무엇을 향하여? 복음을 향하여. 출애굽기도 민수기도 복음을 향하여. 더 어렵게 한다면 창세기 출애굽기 합해서 복음을 향하여. 창세기 출애굽기 민수기 합하여 복음을 향하여.
신명기도 복음을 향하여. 창세기 출애굽기 민수기 신명기 전부 다 합쳐서 복음을 향하여.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그리고 마태, 마가 누가 요한도 에베소서도 전부 다 복음을 향하여. 복음의 비밀이죠. 에베소서 3장 9절을 누가 읽어보세요.
에베소서 3:9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영원부터 감취었던 복음의 비밀’ 이죠. ‘창세전부터’입니다. 그렇다면 이 복음의 비밀안에 뭐가 담겨 있습니까? 온 인류의 처음과 마지막의 역사가 다 담겨 있겠지요. 그렇다면 이 그림을 이렇게 다시 그리겠습니다. 후지산을 아십니까? 후지산은 일본에 있습니다.
후지산 정상에 눈이 쌓여 있다고 치고 여기에 창세전부터 있었던 비밀이 있다고 합시다. 이 비밀이 부글부글부글! 그렇다면 창세기부터 올라오는 전 인류의 모든 것이 어디에 집중한다? 창세전부터 있었던 비밀 여기에 집중하고 여기서부터 무엇이 흘러나옵니까? 복음의 비밀이 흘러나오지요.
여기서 열두제자 + 한 제자가 나오지요. 이 한 제자가 누굽니까? 이방인을 위해 선택된 제자, 사도바울입니다. 사도바울이 다메섹에서 올라오다가 복음의 비밀을 알고 열두제자가 성령 받고 난 뒤에 뭐가 나오지요? 이 밑에서 차고 있던 모든 것이 막 흘러나오겠지요. 여기 아브라함도 있을 것이고 예레미야도 있을 것이고.
그들의 특징은 하나님께 부름 받아서 이렇게 흘러나온다는 겁니다. 나오게 되면 그들이 말하는 모든 내용은 다 어디로 소급됩니까? 창세전에 있었던 이 비밀 하나에 소급되는데 이 비밀을 사도바울은 십자가복음이라고 합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다른 복음이라는 것은 사도 자신이 이야기하지 않는 복음입니다.
사도가 이야기한 복음이 아니면 그것은 천상회의에 참석하지 않고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