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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광주 강의(09. 6. 26) 2강자유게시판디모데후서

광주 강의(09. 6. 26) 2강

이름 : 서경수(IP:116.37.101.7)

광주 강의(09. 6. 26) 50-2

지난 시간 끝부분에 한 것이 뭐냐 하면, 개인에게 일어날 일이 구약 때는 역사적으로 길게 일어나고, 그리고 그 역사에서 묵시로, 한쪽은 하늘로 한쪽은 땅으로 갈라지죠. 그렇게 되면 하늘과 땅이 갈라질 때 여기 중간에 누가 버티고 서있지요? 마태, 마가, 누가, 요한에 보면 예수님이 계시죠.

그러니까 다른 사람, 땅에 속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볼 때 어떻게 봅니까? “저게 도대체 괴물이야, 인간이야?” 라고 하는데, 사실 예수님은 하늘에 속했으면서도 땅에 속하고, 땅에 속했으면서도 하늘에 속한 분입니다. 즉, 양쪽 다 속해 있지요.

오늘날 예수님 같은 실존이 누구냐 하면 성도입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15:19).”고 했습니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골로새서 3장 3절에 보면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고 했어요. 이 말은 하늘에 가야 얻는 것이 아니고 이미 기둥처럼 서 있으면 머리는 하늘이요 발은 땅이요, 생명은 하늘에서 받고 살기는 땅에서 살고. 꼭 예수님처럼 이렇게 사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뭘 얻겠다는 것인가? 그렇게 해서 나온 게 뭐냐 하면, 말세란 말이지요. 말세를 다른 말로 하면, ‘다 이루었다.’ 그래서 말세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도 범사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때문에 그것이 기쁜 소식이 되지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6-18).”

이렇게 될 때 “우리 힘으로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지요. 그런데 예수님을 보세요. 예수님은 마지막 때에 하늘과 땅에 있으면서 예수님만 있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흘러 들어왔기 때문에 이 모습도 오늘날 성도의 모습과 같아요. 성도가 하나님께 사로잡힌바 되고 성령께 사로잡힌바 되면, 그 사람의 원래 소속은 하늘 소속이고 살기는 땅에 살고. 파견 근무죠.

옛날 중앙정보부가 한창 잘 나갈 때 소속은 정보부요 사는 것은 허름한 동네에 산다면, 동네에서 얼마나 으스대겠습니까? 그 때는 경찰서장이고 뭐고 터치 할 사람이 없었잖아요. 이것을 두 자로 ‘자유’라고 합니다. 그 자유를 맛본 대표적인 사람이 누구냐? 간음하다 잡힌 여자가 중앙정보부 요원이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이 여인은 율법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율법은 죽이는 것이고 주님은 살리는 분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 여인은 간음해야 될 특별한 임무를 띠고 이 땅에 태어난 거예요.

자, 그런 관점에서 보게 된다면 이 마지막 때가 즐겁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을 봅시다. 2절에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 훼방한다는 것은 조롱한단 말이지요. “당신이 메시아야! 메시아 같으면 내려와 봐.” 이런 식으로 조롱했지요. 그런데 문제는 조롱을 남이 하는 것이 아니고 성도가 매일 자기 자신을 조롱한다는 거예요. “아이고, 꼴 좋다. 성도라는 자가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본인이 본인을 조롱하게 돼요.

제가 정석훈 목사님 설교 평을 해 놓았는데, 그것은 정 목사님 설교를 평한 것이 아니고, 설교는 이러해야 된다는 설교 전체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 내용이 뭐냐 하면, 성도가 설교를 하게 되면 그 설교 내용은 올바른 설교 즉 복음이지요. 그런데 그 복음에 대해서 누가 비난을 하는가 하면 설교자 본인이 비난해요. “아이고, 네가 복음 전한다고 교인들이 감흥 받는 줄 아나? 너도 그렇게 못 살잖아. 치워라. 괜히 그런 설교해서 교인들 떠나간다.”

본인이 설교한 그 복음 설교에 본인이 못마땅해서 “아이고, 내 팔자야. 왜 나는 이런 복음밖에 못 전할까? 다른 소리 적당히 섞으면 돈도 벌고 교회도 커질 텐데. 아이고, 내가 싫다.” 라고 자기가 복음 설교 해놓고 자기가 설교를 비난하면, 그 비난한데 대해서 그 설교한 내용이 그 목사를 정죄할 때 그것이 올바른 설교입니다.

왜? 그럴 경우에만 이 설교는 누구의 설교입니까? 성령이 하신 설교입니다. 성령이 한 설교만 설교한 자의 죄를 들춰낼 수 있습니다. “네가 네 자신의 설교에 대해서 실망하고 있지?” 설교 내용이 틀려서 실망한 것이 아니고 내용이 옳기 때문에 실망하는 거예요. “이렇게 설교해봐야 무슨 소용 있나? 이렇게 설교해도 ‘이번 달 예산 마이너스 700만원입니다.’ 이런 소리나 듣고.”

백날 복음 전해도 이런 광고 나오면 설교자가 어떤 생각이 듭니까? “그러면 다음 설교에는 헌금 강요하는 내용을 좀 넣을까? 그러면 설교 듣는 사람이 ‘우리 목사 드디어 맛이 갔다. 그렇게 큰 소리 치더니 별 수 없네.’ 이렇게 나오겠지?”

그러니까 설교자가 자기 설교를 통해서 회개를 하고 내가 복음 설교한 것이 내 뜻이 아니었고 아버지 하나님이 나를 치려고 한 것임을 깨닫지요. ‘내가 복음 전해서 사람들에게 신임을 얻고 예수님의 사랑도 받겠다.’는 노림수를 또 발각당하는 거지요.

설교는 바로 이런 거예요. 그래서 목사는 설교 하면서 구원 받아야 됩니다. 늘 구원 받고, 은혜 받고, 설교 하면서 회개하고 그런 거예요.

계속 본문을 보면,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이것을 가지고 누가 누구를 공격합니까? 마귀가 성도를 이렇게 공격하겠지요? 그것을 미리 아시고 여유만만하게 주께서 말씀으로 우리에게 먼저 알려주시는 겁니다. 그러니 주님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하나님께서 “너는 훌륭하다. 너는 대단하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마귀가 공격하는 것보다 더 혹독하게 다뤄요. 그렇게 해서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 자만하지 않고, 돈만 사랑하지 않고, 자기를 사랑하지 않고, 조급하지 않고, 그렇게 회개하게 만드는 작업이 우리를 이렇게 비난하면서 말세에 합당한 성도 되게 하시는 겁니다.

4절 이하에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저희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바 되어 항상 배우나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

마지막 때에 이러한 전경을 쭉 깔아놓는다는 말은, 우리 자신이 우리 힘으로 벗어날 수 없는 것을 주께서 되게 하시는 거예요. 어떻게? “내가 바로 이런 인간입니다. 내가 음행하고 내가 돈 밖에 모르는 이런 인간입니다.” 라는 말을 할 수 있다는 것.

8절에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저희도 진리를 대적하니” 출애굽기 7장에 나오는 내용인데, “이 사람들은 그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리운 자들이라. 그러나 저희가 더 나가지 못할 것은 저 두 사람의 된 것과 같이 저희 어리석음이 드러날 것임이니라.”

이런 이야기를 한 것은, 마지막 때에 흔히 사람들이

제가 질문을 할 테니 여러분 답변해 보세요. ‘내가 노동해서 번 돈으로 내 자녀 피아노 레슨을 시켰다. 마지막 때에 이게 뭐가 잘못인가?’ 마지막 때에 구원되는 사람, 즉 말세형 인간이 따로 있어요. ‘뭐가 나쁘냐?’ 하는 인간은 마지막 때에 건짐 받는 인간형이 아닙니다. 말세형 인간은 어떤 자냐? ‘마지막 때에 뭘 할 거냐?’를 생각하는 사람이 구원 받는 사람입니다.

지금까지 쭉 본문에서 여러 항목들이 나왔잖아요. 그러면 구원 받는 사람은 뭐 합니까? ‘야, 이게 딴 사람 이야기가 아니고 내 이야기인데, 그러면 이 마지막 때에 나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라고 묻는 사람이 바로 마지막 때에 구원 받을 하나님이 만드신 말세형 인간입니다.

그런데 ‘내가 열심히 일해서 내 자녀 교육 시키는데 뭐가 나빠?’ 이렇게 나오는 사람은 마지막 때에 구원 받지 못할 자들의 모습이에요.

이제 정리해 봅시다.

마지막 때에 구원 받을 사람과 구원 받지 못할 사람의 차이가 뭔가? 마지막 때 구원 받을 사람은 마지막 때에 주께서 하신 잔소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고, 구원 받지 못할 사람은 주님의 잔소리보다는 나의 행위에 관심이 있고, 지금이 마지막 때인 줄도 몰라요. 그냥 해와 달이 평소처럼 떠 있으니까 과거나 지금이나 차이가 없다고 여겨요.

따라서 이 성경을 보면서 ‘못 지키면 안 되는데’ 이렇게 보지 마시고, 이 말씀에 관심이 있냐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나는 교회는 안 나가지만 나는 내 나름대로 자식 키우려고 오늘도 밤늦도록 고생하고 있다.’ 라는 사람이 반드시 마지막 때는 누구를 핍박하게 되어 있는가 하면 이 말세형 인간, 말씀에 관심 있는 사람을 핍박하게 되어 있단 말이지요. 그 핍박을 받는 경우에만 ‘경건’이란 것이 성립이 돼요. 이게 좀 어렵습니다.

우리가 나름대로 경건한 것. 이건 아무 소용없습니다. 그것은 경건이 아니고 자기 폼 잡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아도취고 자기 환상에 빠진 것이지요. 마지막 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코스가 있어요. 이렇습니다. 십자가로 들어가야 부활에 이르기 때문에, 빌립보서 3장에는 ‘어찌하든지 십자가에 참여하려고 한다.’고 할 때, 이것이 마지막 때의 ‘경건’이 되지 혼자 나만 경건할 수 없어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마지막 때 십자가 가는 길을 터기 위해서 주변에 이 점을 도와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도와주는데 어떻게 도와주는가 하면, 핍박과 조롱으로 도와주는데, 이 핍박과 조롱하는 사람의 특징이 뭐냐? 디모데후서 3장 1절부터 8절까지의 항목에 나오지요.

이런 사람들의 조롱과 비난으로 말미암아 성도가 ‘아하, 내가 가고 있는 길이 십자가의 길이 맞구나.’를 되새기게 하는 그런 행운을 안겨줘요. 신앙생활 하면서 제일 힘든 것이 뭐냐 하면, 우리교회 교인들이 무서워요. 오후 예배 때 기도하라고 하면 하나 둘 다 거절하는 거예요. 마치 목사님들에게 글을 쓰라고 하면 안 쓰듯이. 왜 기도를 안 하느냐 하면, 기도하게 되면 기도 내용을 가지고 얼마나 난도질을 할 것이냔 말이지요. 그래서 가슴이 떨려서 기도를 못 하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제 생각에는 기도해서 씹히고 해야 이 사람이 자기 의를 포기할 수 있는 겁니다. 만약에 씹히지 아니하면 아직도 자기 의가 남아 있어요. 김 집사님 경우에는 가족들에게 씹힙니다. 그러니까 십자가의 길을 가는 거예요. 만약에 김 집사님 주위에서 전부 ‘잘 한다. 정말 훌륭하다.’ 이런 소리만 하면 정말 자신이 잘 하는 줄 알아요.

[달려라 하니]는 외롭고 슬퍼도 앞만 보고 달리잖아요. 그런데 사람들은 교회 나와도 친구하고 이야기하고 수다 떠는 것이 재미있지 혼자 달리기 싫어. 십자가 길을 가지를 못해요. 아예 계모임을 해요.

씹힐 때는 씹혀야 됩니다. 그래야 내가 죄인인 것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씹힐 때는 조용하게 씹히세요. “씹어라! 씹어라!” 하고 열 내지 말고. 왜냐? 주께서 아시잖아요. 우리의 앉고 일어섬을 주께서 아세요. 광고하면서 십자가 길 가는 것. 이것은 십자가 티를 내는 것이지 전혀 십자가 길로 안 들어선 거예요. 진짜 십자가의 길은 본인이 원치 않는 길을 가야 그것이 십자가 길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욥입니다.

욥은 씩씩거리면서 “주여, 왜 저를 이렇게 힘들게 합니까?” 욥의 친구는 욥과 이야기하지만(같은 인간들끼리 이야기하지만) 욥은 하나님과 이야기해요. 그것이 성도에요. 욥의 아내는 욥에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 저주하고 죽어라!” 그러나 욥만은 하나님께 이야기합니다. 욥이 사람과 이야기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해도 전부 튕기니까(하나님 뜻이에요) 어쩔 수 없이 대화할 사람은 하나님뿐이에요. 완전히 나다나엘이에요. 무화과나무 밑에서 하나님께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는 방법입니다. 사도바울도 이렇게 인도했어요.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경건’이란 겁니다.

12절에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이 말은 경건하면 핍박 받는다는 말이 아니고, 자기가 생각하는 경건은 경건이 아니라 폼 내는 것이고, 핍박 받게 되면 바로 주께서 의도적으로 경건의 길을 가고 있음을 알려주는 하나의 계기판이란 것입니다.

마지막 때의 구조 자체가 주변에서 도와줘요. 누가? 안 믿는 사람들이 도와주죠. 어떻게? 핍박함으로 말미암아 나로 하여금 주님과 이야기할 수 있는 경건.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은 노닥거리는 것이고, 주님과 늘 이야기하는 그런 경건에 주위 사람들이 많이 도와주지요. 고맙다고 해야 합니다.

13절 봅시다.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아까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에 어떻게 한다고 했습니까? 말세에 어떤 구조가 있다? 천국 갈 사람은 천국으로 화끈하게 가게 하고, 지옥 갈 사람은 지옥으로 화끈하게 가게 하는데, 지옥 갈 사람은 누구를 핍박한다? 천국 가는 사람을 핍박해서 경건하게 살게 만들고, 지옥 갈 사람들은 점점 더 악하게 되지요.

지옥 가는 사람들이 악하다고 했는데, 이것은 누구의 안목입니까? 지옥 갈 사람과 점점 더 멀어진 안목에서 보니까 점점 더 악해 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악한 사람 본인들의 입장에서는 전혀 악하다고 생각 못해요. 그래서 이 악한 자들은 핍박이 없지요. 왜? 다들 악하니까. 그리고 경건도 자기가 만들어낸 경건이니까.

중요한 것이라서 다시 이야기합니다.

역사가 갈라지면 뭐가 된다고 했습니까? 묵시가 된다고 했지요. 묵시가 되면 위에는 하늘 밑에는 땅. 그 사이에 기둥처럼 버티고 있는 것이 예수님. 이 예수님 자리에 현재 누가 버티고 있습니까? 성도지요.

마지막 때에 성도가 하늘과 땅 사이에 버티고 있는 이 일을 누가 도와주는가 하면 땅에 있는 이 사람들이 도와줘야 예수님이 고난 받고 가신 그 길을 성도가 같이 합세해서 갈 수가 있는 겁니다. 왜? 예수님이 누구에게 핍박 받았습니까? 땅에 속한, 역사에 속한 사람한테 묵시에 속한 예수님이 핍박 받았기 때문에 그 핍박을 같이 받을 수가 있는 기회를 안 믿는 사람을 통해서 우리에게 제공한단 말입니다.

안 믿는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자기 의라는 겁니다. 자기 의가 뭐냐 하면, 자기와 대화하는 겁니다. 독일의 철학자고 희망 신학의 근거를 마련한 에른스트 블로흐라는 사람이 있어요. 이 사람이 이런 주장을 했습니다. ‘생각은 시간을 초월하게 한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모든 사람은 마지막에 자기와 대화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울증도 마찬가지고. 모든 사람의 마지막은 자폐증입니다. 남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와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진짜 성령 받은 사람은 누구와 이야기하는가 하면 주님과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주님과 이야기하는지 자기와 이야기하는지 어떻게 아는가? 말씀과 이야기하면 주님과 이야기하는 것이고 말씀과 관계없이 이야기하면 자기와 이야기하는 거예요. 하여튼 성경 말씀이 떠오르거든 주님과 대화한 것으로 여기시고, 성경 말씀과 관계없이 생각나거든 마귀와 속삭인 것으로 보시면 됩니다.

제가 쓴 글에 이런 것이 있어요. ‘젊은 사람들은 꾸미고, 늙은 사람들은 탈출을 꿈꾼다.’ 젊은 사람들은 만날 꾸미면서 삽니다. 가구는 이렇게 배치하고 화분은 이쪽으로 놓고 이렇게 항상 꾸미는 것을 생각하고, 늙은이들은 ‘하이고 빨리 죽어야 할 텐데.’ 하면서 탈출을 꿈꾸고 있어요. 둘 다 지옥 갑니다. 왜냐하면 평소에 주를 위해서 살아본 적이 없고, 평생 --

이번에 장례식에 가서 제가 호되게 설교 했어요. 죽은 사람은 듣지를 못하니까 산 사람에게 소리쳤어요. ‘어떻게 평생을 자기만을 위해서 사는가?’ 라고. 성경에는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5:15).”고 되어 있는데, 평생을 자기만 위해 살아서 ‘아이고 세상 더럽다. 빨리 죽자.’ 이런 사람이 천국 갈 수 있습니까? 자기만을 위해 살았는데.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장례식 설교 본문이 요한복음 3장 6절이었습니다. 니고데모는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 대답이 6절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성령이 와야 되지요. 여기에서 성령이 온다는 말은, 성령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그래서 성령에 오게 되면, 모든 것이 전부 하나님의 은혜임을 압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세상을 모르는지, 노무현이 14살 때 자기 집 근처에 부엉이 바위가 있는 이유를 알았겠습니까? 몰랐겠지요. 자기가 나중에 그 바위에서 뛰어내릴 것을 알았겠습니까, 몰랐겠습니까? 몰랐지요. 따라서 지금까지 살아 온 것도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주신 햇볕과 공기와 물로 살려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은혜를 감사할 줄 몰랐어요. 오직 자신에게만 감사하고 격려하고 하다가 자기 자존심 지키기 위해서 죽었어요. 그것은 불신자는 결국 이렇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마지막 때의 장치요, 그 마지막 장치 중 하나로 부엉이 바위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만을 위해 살았는데, 어느 날 십자가의 은혜가 찾아오고, 십자가의 은혜가 누구로부터 왔다면 십자가 알게 된 그 자체가 이게 그냥 주님의 은혜가 아니라 아예 구원까지 보장받는, 무엇으로? 도치 또는 치환. 주님이 내 자리에 들어오고 내가 주님의 자리에 들어가서 천당 갈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목사가 시키는 대로 열심히 충성하면 천당 가는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천당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나는 말세 때 구원 받는 하나의 장치가 되겠지요. 이것이 바로 경건입니다. 핍박 받아도 괜찮아요. 핍박 받는 것도 하나의 장치니까.

이렇게 말씀을 드려도 돌아서면 또 고민하고 있어요.

제가 방금 이야기한 것을 정리해 봅시다.

반드시 하나님의 일은 성령을 통해서 오고, 성령은 성경 말씀 따라 역사하지요. 디모데후서를 보겠습니다. 3장 13절에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한다.’고 했는데 그들이 악하다는 기준이 뭔가? 성경이죠.

15절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자, 여기서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다고 하는데 누구의 은혜입니까? 하나님 은혜지요. 저는 신학교 다니면서부터 지금까지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이 대목을 설명하면서, 어려서부터 성경을 안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설명하는 사람을 한 사람도 못 만났습니다. 그리고 어떤 주석에도 그렇게 해석한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통상적으로 이 구절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디모데가 어릴 때부터 어머니로부터 신앙교육을 잘 받아서 어려서부터 성경을 공부하고 배웠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디모데는 어머니께 순종을 해서 어릴 때부터 성경을 읽었다. 우리도 목사님이 가르치면 잘 순종해야지.’ 라는 식으로 가르쳤고,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성령이 오기 전까지는 그게 맞는 줄 알았어요. 그리고 열심히 성경 읽고 그 말씀대로 순종해야 구원 받는 줄 알았어요.

지금 깨닫고 보니 어릴 때부터 성경을 아는 것도 마지막 때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내가 노력한다고 해서 성경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 우리교회도 중등부 학생들이 있지만, 우리 000선생님 참 노고가 많습니다. 교회 도착하면 바로 휴대폰 열어서 게임합니다. 설교 안 들어요. 그런데 다 듣고 있어요. 안 듣는 척 할 뿐이에요.

그러면 곱게 들으면 될 텐데 왜 안 듣는 척 하면서 듣는가? ‘목사님! 내 교회 온 것 고마운 줄 아세요.’ 이런 뜻이에요. ‘내가 교회 안 올 수도 있지만 인간성이 좋아서 와 줍니다.’ 이것이 바로 존재의 가치지요.

애들은 항상 자기 존재의 가치를 부모한테서, 선생님께, 친구들에게 찾아요. 컴퓨터가 그것을 가르쳤고 모든 것이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요. 초등학교 선생님들은 잘 알지요? 초등학교 2학년도 자기 존재의 가치를 드러내려 해요. 회초리 들고 때리려고 하면 휴대폰으로 때리는 장면 찍으려 하고.

우리는 선생님이 때리면 고마운 줄 알았는데, 요즘은 아니지요. 선생님을 타인으로 보고 나는 나로 족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선생님이 때리거나 제재하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간섭하지 마세요.’ 이렇게 나와요. ‘나는 나로 족하다.’ 이것을 어릴 때부터 가르쳤어요. 그러니까 선생님도 타인입니다. 자기 빼고는 모두가 타인이니까. 그러면 타인과 나를 연결하는 고리가 있습니까? 없어요. 그래서 타인을 이용은 하지만(예수님도, 선생님도 모두 이용) 결국은 자기가 자기와 이야기해요.

제가 수요일 그런 설교를 했습니다. 결혼식에 가니까 신랑. 신부가 시부모께 절하고, 친정 부모에게 절하더란 말이지요. 사실은 시부모가 신랑. 신부에게 절해야 돼요. 왜? 결혼해 줘서 고맙다고.

말세에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은 우리에게 섭섭한 일이 아니고 나 자신의 진수를 남들에게 똑똑하게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아주 유용합니다. 나도 어릴 때 저런 자식이었고, 나도 얼마든지 말 안 들을 수 있었고, 내가 교회 오기 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예수 믿으라고 했겠습니까. 나는 잘 모르지만. 분명히 내게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으라고 전도지도 주고 했을 거예요. 나는 관심 없이 그냥 버렸지만.

내가 예수 믿고 난 후에 복음을 전하니까 듣는 사람이 비웃고 조롱하지요. 이런 상황을 맞으면서 화 낼 것이 아니라, 우리도 저런 인간이었는데 웬 은혜인지. 지금은 성령 받아서 성경을 읽게 되고, 성경 읽게 된 것도 성령의 은혜입니다. 본문이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악한 자는 더욱 더 악해지고 선한 자는 더욱 더 선해지는데, 선하다는 것은 착한 일을 한다는 말이 아니고 점점 더 성경의 뜻대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마지막 때에 세워짐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15절을 봅시다.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왜 사도바울은 말을 이렇게 어렵게 하는지 몰라요.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고 하면 얼마나 쉽습니까? ‘디모데야!’ ‘예.’ ‘믿음으로 구원 받는 거야.’ 이러면 얼마나 쉽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 너 안에 예수님이 계셔서 예수님이 주도권을 쥐고 구원에 이르는 그런 인간을 만들어 낸다.’는 것입니다.

‘디모데야, 찬양을 너한테 하지 말고 제발 네 속에 있는 주님께 해라. 내가 보기에는 네 안에 믿음이 있다.’ 믿음이 있다는 말은 믿음의 주인공이 있다는 말입니다. 네가 믿어야 될 분이 계시다는 뜻입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죠.

그 예수님이 너로 하여금 성경으로 인도해서 너 안에 계신 분이 어떤 분인가를 성경책을 갖다 대니까 우리 안에 예수님, 바깥에는 성경. 성경을 보니까 성경이 누구를 증거합니까? 우리 행함이 아니라 예수님의 행하심. 우리를 왜 건져야 되는지, 왜 주님이 우리에게 찾아왔는지 이유를 밝혀 주는 것이 바로 성경 전체의 내용입니다.

그래서 이번 여름수련회에 다니엘, 스가랴를 통해서 뭘 끄집어내는가? 환상 속의 그대. 노래도 이런 것이 있어요. ‘너 안에 너가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 있다.’ 이것이 다니엘, 스가랴의 주제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이 너를 그때그때 조성해 내는 겁니다.

16절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이것을 통합측에서는 안 믿지요. 이것을 거부합니다. 성경을 인간의 지혜로 보지요. 하나님의 감동을 집어넣으면 왜 신학자들이 싫어하는가 하면,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면 성경 문자와 하나님의 감동을 따로 떼서 그 다음에 같이 붙여야 해요. 뗄 수도 없고 붙일 수도 없는 입장에서 신학을 하려고 하니까 떼는 방법도 모르겠고 붙일 재주도 없어요.

그러니까 어떻게 하는가? 한쪽을 포기하지요. 하나님의 감동을 ‘하나님 믿는 사람이 그런 느낌이 있었단다.’ 이렇게 은근슬쩍 넘어가요. 그러면 사람 대 사람의 이야기가 되지요. 제가 아까 말했지요. 사람은 사람과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기존 교회에서 헌금을 하라는 것은 목사가 교인에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돈 내란 말이야. 명단 밝히겠어.’ 이것이 뭐냐? 사람과 사람이 상대하는 겁니다. 진짜 헌금은 주께서 그 사람을 감동시켜서 하도록 합니다.

우리교회 장로님들이 걱정하는 것은 ‘젊은 사람들은 헌금을 안 한다.’고 하는데, 젊은 사람들이 헌금 안 한다고 하지 마시고 교회가 교회답기 위해서 하나님이 젊은 사람들에게 그 돈 낸 것도 큰 돈 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거예요. ‘어떻게 한 달에 만원을 내나? 그 큰돈을?’ 이렇게 만들어요. 왜냐? 이 교회가 주님 것이란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리고 구원은 교회를 통해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도치, 또는 전복, 치환으로 구원 받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말세 때 ‘선한 일’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일이죠. 위 구절을 다시 생각해 봅시다. 성경책이 있습니다. 질문합니다. 1)성경책 안에 하나님의 감동이 있다. 2)성경책이 있는데 바깥에서 감동이 온다. 1번입니까, 2번입니까? 1번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사도요한이 썼고 감동이 오는 것이 아니고, 성령으로 감동 받아서 사도요한이 쓴 것입니다. 그러면 사도요한이 성경책만 썼습니까? 다른 글도 많이 썼겠지요. 그러나 딴 것은 성경이 아닙니다. 사도가 쓴 글이 많이 있더라도 그것은 성경이 아닙니다. 성경이 성경 되게 하기 위해서는 성령께서 감동하는 것은 기본이고 성경이 될 수밖에 없도록 하시는 것까지만 성경이지 예수님 사는 모습이 비디오로 나왔다고 그것이 성경이 아닙니다.

다른 신학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예수님 비디오가 있으면 그걸 계시로 보지요. 성경책만 계시로 인정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를 계시로 인정합니다. 그러다보니 예수님의 실존을 인성과 신성으로 분석하지요. 분석해 놓고는 결합하는 방법을 몰라요.

왜 이렇게 되는고 하니, 안 믿으니까 믿는 척하고 있는 겁니다. 진짜 성령을 받으면 성경을 볼 때 안에서 문자가 살아 움직여요. 설교자가 설교를 하고 난 뒤에 교인들이 성경을 보면 파도가 쳐요. 전에는 내가 성경을 봤는데 설교 끝난 후에는 성경책이 내 안에 들어와서 내 안에서 꿈틀거리고 그래서 그 때 부터는 내 안에 있는 성령과 의논하고, 내 안에 있는 예수님과 의논 할 수밖에 없지요. ‘디모데야! 너는 그렇게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왜? 너 안에 예수님이 그렇게 만드니까. 그것도 마지막 때에.

악한 놈들은 악하라고 해. 하지만 너는 너 갈 길을 가야 돼. 핍박이 오더라도 두려워하지 마라. 왜? 원래 그 길로 가는 경건한 사람은 핍박을 받게 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이 만든 마지막 때에 예수님을 보내셔서 죄인의 자리까지 내려가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놀랍게도 사흘 만에 다시 일으키신 그 일은 지금이 마지막 때며 누구든지 예수를 믿어야 구원 받는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줄 압니다. 저희들 그전까지 예수 믿지 않고 나를 믿었지만 이제부터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예수 믿는 기쁨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09. 7. 9. 11:02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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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