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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부산 7월 7일 조지래드 30 신약신학-제43과 유다서강의유다서

부산 7월 7일 조지래드 30 신약신학-제43과 유다서

이름 : 관리자(IP:220.81.176.150)

090707 유다서 - 종말상황의 여러 몸에서 한 몸

관리자(IP:220.♡.176.150)

09-07-07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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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IP:220.♡.176.150)

09-07-15 18:21

부산090707a조지래드30신약신학-유다서a

20090707a 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유다서 (강의:이근호 목사)

시간이 되었음으로 시작하도록 합시다.

오늘 유다서 할 차례지요. 유다서에 나오는 용어들이 마지막 끝이 되어야 나올 수 있는 용어들입니다. 앞서서 역사가 진행 중일 때는 기차가 달릴 때는 안 나오는데 기차가 멈췄을 때 비로소 나오는 용어들, 그걸 종말의 환경이라 하는데.

종말이 되면 감추어지는 환경이 있거든요. 모든 앞서 있었던 구약과 신약의 모든 용어와 개념들, 단어들이 종말의 환경에서는 어떻게 이것이 마감되는가? 중간에 달릴 때와 마지막 때와 개념의 차이가 납니다. 중간에 마지막 때를 향할 때는 여기의 개념들은 종말이전에는 사람과 하나님과 같이 주고받고 하면서 나오는 개념들이죠. 구원, 애굽, 심판, 천사, 권위를 업신여기고, 여러 가지 단어들이 나오는데 이 단어들이 사람과 하나님이 주고받고 하면서 나오는 개념들이다 이 말이죠.

예를 들면 사도행전 17장에 보면, 예수님 오시기 전까지는 내가 세상에 대해서 허물치 아니하거니와 마지막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믿을만한 구원의 확실한 증거를 줬다. 그전에는 허물치 아니하고 묵인했죠. 무슨 소리냐 하면, 묵인과 허물치 않는 그러한 시대라면 종말이 돼버리면, 인간에 대해서 동행하시는 주님은 종말에 와서는 종말적 입장에서 종말적 안목으로 인간을 대해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종말이 이르기 전과 종말이 이른 후에 개념들, 구원, 여기 나오는 여러 가지 믿음, 소망, 사랑 개념들에 대해서 종말에 이르기 전까지는 인간들의 소망과 사랑과 열심 이런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평가 대상이 돼요. 하나님께서 주고받고 하는 대화에 낄 수가 있는 겁니다. 열심을 낸다든지, 기도를 한다든지.

종말이 돼버리면 인간에서 나오는 모든 행위에 대한 것은 일체 인정하는 게 아니고, 마지막에는 예수 그리스도에서 나오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기준이 돼버려요. 예를 들면 구약 때부터 내려오는 종말에 이르기 전까지 대표적인 하나의 개념이 성전 개념이잖아요.

그럼 ‘성전을 지켜라, 성전에서 바르게 살아라, 율법대로 살아라’ 하면 사람은 말씀에 순종한답시고 율법대로 살고, 성전을 지키고, 제사 드리고 열심히 부산을 떨게 아닙니까. “하나님이여, 회개의 기도를 하나이다. 다시 돌아오겠나이다. 우리가 잘못했나이다.” 여러 가지 한단 말이죠. 그래서 성전을 지탱해보고 다시 성전을 짓고, 개축하고, 수축하고. 에스라, 느헤미야 같은 경우는 하나님 뜻이 있어서 보수하고 수리하고 하잖아요.

그런데 이것이 마지막이 되면, 예수 그리스도가 새로운 개념이에요. 마지막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성전이 돼버리면, 성전 하나만 두고 이야기합니다. 성전이 돼버리면 인간이 성전을 향하여 붙잡고, 애쓰고, 개축하고, 수축하는 게 뭐가 되겠어요? 그거는 무의미하게 되죠.

이게 뭐냐 하면, 기준점이 있어서 마지막 때에 환경을 이야기하라 하면 이렇습니다. 기준점에 있어서 예수님의 행하심이 기준이냐, 아니면 인간이 행한 것이 기준이냐? 이 기준에 들어가 있어야 됩니다.

그렇다면 방금 성전을 이야기했는데 그러면 교회를 예를 들어보면, 인간이 그 교회를 지키고, 보존하고, 그걸 유지시키고, 그걸 키워보려 하고, 교회가 교회답게 깨끗하게 해보려고 모든 애쓰는 것, 그것도 그냥 애쓰는 게 아니죠. 요한계시록 2장부터, 3장부터 해서 디모데전후서에 나오는 직분까지 동원시키고, 사도 바울서신에 나오는 교회 감독된 자는 어떻게 하고 나오잖아요. 그런 것에 준해서, 사도행전에 나오는 것처럼 더불어 먹고 마시면서 재산을 자기 재산이라 하지 않고 나눠주는 이 모든 시도, 그것이 기준입니까?

종말이라는 마지막 환경에 들어가 버리면 기준점이 아직도 종말의 환경 속에서 기준점을 인간이 말씀 지켜서 행해보겠다는 걸 기준으로 내세운다면 그건 시대착오적입니다. 뭔가 오해해도 보통 오해한 게 아니에요.

이미 모든 실험을 끝났습니다. 인간이 행할 수 있는 것, 인간이 말씀대로 순종할 수 있는 모든 실험은 어디서 끝났습니까? 십자가에서 이미 끝났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해요. 뭘 해도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 헌신, 기도, 예배, 찬송 뭘 해도 안 받아줘요. 이미 그런 실험은 충분히 했어요.

그런데 마지막 때는 믿을만한 증거가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기지 그 외에 것은 믿을만한 증거가 아닙니다. 성화론이라는 게 이렇게 무섭고 하나님의 구원을 방해하는 적그리스도적인 사고방식입니다. 지금이 종말 상황인데, 종말 상황의 기준이 예수 그리스도인데 아직도 자기 자신에게 기대를 걸고 자기 자신의 발전과 자기의 행함에 어떤 열매와 업적에 대해서 아직도 기대와 미련을 갖고 있다는 그것은 하나님이 제시한 마지막 때 기준을 모욕하는 겁니다.

제가 유다서를 하면서 왜 이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신약성경 전체가 종말 상황 속에서 해석하는 것은 물론일뿐더러 유다서 내용을 보고 다시 윤리, 도덕으로 돌아가는 해석이 백 프로입니다. 모든 주석이 그래요. 유다서, 베드로후서. 이건 예외가 없어요. 내가 보니 미쳤어. 전혀 신자가 아닌 것 같아요. 사도 바울에 그렇게 신자 같은데 유다서 해석하라 하면 신자 안 같아. 야고보서 들어가면 더욱더 안 같아요.

이미 인간이 성경을 통해서 열심을 내고 지키려고 애쓰는 그 기준점은, 그림을 보세요. 사람이 침을 뱉으면 도로 중력으로 다시 떨어지듯이 사람에게서 올라가는 것, 사람으로서 백날 올라가봐야 도로 제 자리로 떨어져요. 올라간 지점이 뭐냐? 교회거든요. 사람들이 아무리 성경 지키고, 주여, 주여 하지만 결국은 노림수가 뭐냐 하면, 교회 잘 되겠다는 그 이야기에요. 올라가봤자 내려와요. 어디로? 교회로.

그러니 이 기준이, 종말의 상황에서 교회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두고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몸이라 하는 것은 어려운데요. 몸에선 반드시 그냥 몸으로 있는 게 아닙니다. 거기서 능력이 나와요. 이걸 놓쳐버린다고요. 사람이 우리 몸이 가만있으면 저 사람에게 영향을 안 미치지만.

제가 설교시간에 그런 이야기했죠. 내가 여기서 밥을 한다고 해서 이천 킬로에 있는 러시아 북쪽에서 어떤 사람이 밥을 맛있게 먹는다든지 그렇지 않아요. 내가 뭐 한다고 해서 이천 킬로, 삼천 킬로 떨어진 사람 영향 없어요. 옛날 장희빈 보면 나오죠. 짚으로 인형 만들어서 바늘로 쑤시면 ‘아야’ 하잖아요. 흑마술이라 하죠. 오죽 답답했으면 했을까마는 실제로는 안 되거든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기도하면 땅에서 응답돼요. 예수님이 하는 모든 행동은 전 우주가 동원됩니다. 바다와 바람도 꾸중 듣는 것 보세요. “바다, 손들어. 폭풍 꿇어 앉아.” 이게 우리는 안 되지만 주님은 된다 말이죠. “어이. 물고기야. 아가미 벌려. 옳지. 동전 잘 (낸다).”

물고기 아가미 벌려서 동전 꺼내서 성전세 주라는 게 있잖아요. 그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이미 피조물 세계에서는 모든 중심이 누구 중심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중심이라서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데 지금 전부다 대기 상태에 있거든요. 인간만이 자기 의를 주장해요. 다른 모든 피조물은 대기 상태에 있단 말이죠. 당나귀도 말을 해야 되고, 홍해도 갈라져야 되고, 파도도 땅을 넘치지 못하게 되고.

그리고 더욱더 재미있는 것은 바다에 숨어있던 악마가 주의 뜻에 의해서 기어 올라와야 돼요. 상륙작전. 짐승이 기어 올라와서 요한계시록에 의해서 여자의 남은 자손과 싸워야 된다고. 이게 누구 지시냐 하면, 주님의 지시라니까. 거기에 어떤 틈새도 새삼스럽게 인간이 말씀 지켜서 행세를 한다는 것, 어떤 영향을 입히는 건 없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모든 성도들도 하나의 하나님의 능력이 임해서 뭔가 토해 나온다 하죠. 방출. 자기 능력이 아니고 주의 능력이 나오는데 그 주의 능력 나오는 하나하나를 요한계시록의 제일 중요한 대목이죠. 성도를 통해서 나오는 하나하나가 세상에 구약의 선지자의 예언한 대로 나온다 합니다. 이건 성도가 조작할 수가 없어요. 성도, 자기도 자기 마음대로 안 된다고.

성도가 예수 믿고 천당 가는 걸 가지고 요한계시록에 보면, 구약성경이 뭐냐 하면, 홍해 건너가는 걸 이야기한다고. 상당히 어려운 이 대목부터 먼저 말씀드려요. 그래서 유다서에 들어가 봅시다. 유다서에 애굽이라는 게 나오기 때문에.

‘홍해 건너감’ 이게 역사지요. 분명히 있었지요. 여기에 사람들이 동원됐잖아요. 건넌 사람이 있잖아요. 우린 안 건넜어요. 우리는 선악과 안 따먹었어요. 하지만 선악과 따먹은 분이 있을 것 아닙니까. 아담. 여기 홍해 건너간 사람이 있지요. 그렇다면 홍해 건널 때 건넜던 그 사람의 누구 운명입니까? 과거 건넜던 사람의 운명이죠.

그런데 고린도전서 10장에 보면, 홍해 건넌 그 사람의 운명이 오늘날 예수님 믿는 사람이 동일하게 세례 받은 같은 운명이라는 겁니다. 이게 신학적, 논리적으로 어떻게 해도 해결이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의 이 해석이.

선악과 따먹은 게 아담이다. 과거지사, 과거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따먹었다. 이 갭을 어떻게 건넙니까? 건널 수가 없어요. [두지평]이란 책에 보면 건널 수 없는 것을 어떻게 해명하느냐 하면, 가다머 이론에 의해서 인간의 실존문제로 돌아가는데, 실존하면 어렵다면 운명으로 돌아가는데, 그 실존문제에 있어서 밑바닥을 하이데거의 존재론에 근거해서 씨슬튼이라는 사람이 그렇게 설명했어요.

그런데 문제는 하이데거의 존재론은 어떻게 과거와 지금이 동일한 경험을 할 수 있느냐 그 문제거든요. 왜냐하면 동일한 체험을 하려면, 이 성경책이 뭡니까? 옛날 동화책 아닙니까. 문제는 인간의 몸에서는 이게 능력이 안 나온다는 겁니다. 인간의 몸에서 능력이 안 나오니까 능력 없는 몸이 성경 지켜봐야 뭐가 안 돼요? 주께 영광 돌리는 열매가 맺히질 않아요.

그래서 우리 몸을 주님께서 자신의 몸에서 나오는 능력으로 우리 몸을 늘 죽이게 되면, 우리는 날마다 죽고 우리 안에 있는 예수님의 생명이 살아나서 예수님의 몸이 살아나게 돼있어요. 그 능력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날마다 우리 몸을 죽이느니라’ 하는 능력이 포함돼있다 이 말이죠.

이해되는지, 안 되는지 모르겠는데. 보세요. 지금 우리가 말씀을 지키잖아요. 성경에 돈을 사랑하지 말라. 돈을 안 사랑하든 어쨌든 우리 신앙적 양심으로 뭐 합니까? “돈을 사랑하면 안 돼.”라고 나오잖아요. 이거는 신앙인 같으면 느끼잖아요. 불신앙 같으면 될 대로 하라 하지만 적어도 신앙인 같으면 “그래 그 나라 그 의를 구해야 돼.” 말이라도 하고 느낌이라도 온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그 느낌조차도 그리스도에 의해서 죽어줘야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안 죽어지고 “그렇다. 이건 살아야 돼.” 이걸 살려내 버리면 그건 누구 능력이에요. 나의 능력이 되는 거예요. 이걸 사람들은 뭐라 하느냐 하면, 나도 성령 받았어. 행할 수 있어. 이게 개혁주의 신앙입니다. 이게 죽어야 되는데 이게 안 죽는 거예요.

그러니까 유다서 보면서 도로 그만 종말의 상황을 이해 못하고 윤리, 도덕으로 다시 다 가버렸어요. 모든 주석책이 그래요. 제가 래드 책을 여러 번 봤어요. 유다서를 어떻게 보느냐? 도대체 당신은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 역시 나오는 게 ‘Already Not Yet’ 이미 구원받았지만 아직 구원받지 않았다. 아직 구원받지 않은 틈, 갭이 뭐냐? 그건 윤리, 도덕입니다.

래드의 책에 보면 유다서를 뭘 공격하기 위해서 썼느냐 하면, 영지주의를 공격하기 위해서 썼다 돼있어요. 이건 지난 시간에 했지요. 영지주의가 뭐냐 하면, 그들의 설명에 의하면, 영지주의란 능력은 없고 지식만 있어서 그 지식으로 자기 하고 싶은, 죄짓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저지를 수 있는 그러한 합리성을 바탕에 깔고 있는 게 영지주의라는 거예요. 제가 요약하면 그렇습니다. 이 책 읽어보면 나오지요.

다시 이야기할게요. 영지주의가 뭐냐? 능력은 없고 지식만 있어서 그 지식이 어디에 써먹는 지식이냐 하면, 자기가 땡기는 대로 인간의 욕망대로 다 하면서도 구원은 구원대로 받아 챙기는데 필요한 적법성? 핑계? 정당성? 그런데 필요한 지식이라서 사람들이 술 먹고 개판 쳐도, “이 지식 아시면 당신은 마음대로 죄 질 수 있습니다.”라는 핑계를 그 당시 유포시키는 게 영지주의라는 겁니다.

그래서 영지주의를 반대하는 소위 신학자들은 오늘날 신자들도 주의해야 된다. 왜? 성경 유다서, 베드로후서가 요한일, 이, 삼서를 반대했기 때문에. 그렇다면 어떻게 하느냐? 그 다음이 중요해요. 능력 받아서 성경에 합당한 윤리, 도덕 하게 되면 그건 구원받은 사람 맞습니다. 결론이 그렇게 나와요. 속으로, 네가 해봐라.

예를 들어봅시다. 여기에 유다 12절 봅시다. “저희는 기탄없이 너희와 함께 먹으니 너희 애찬의 암초요” ‘암초’란 말은 선원들이 배를 타고 가다 털썩 걸려버렸죠. 안 보이는데 걸려버렸어요. 왜 그럴까요? 바다 밑에 뭐가 있었다? 암초가 있었다. 따라서 발람의 어그러진 길을 가는 인간들은 겉은 안 보이지만 안에 암초가 있어서 덜커덩 너희를 멸망시킨다. 그 다음에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이건 뭔 뜻이냐 하면, 쉽게 말해서 살기 위해서 신을 거론하는 사람이죠. 누구 살기 위해서? 남 살기 위해서 아니죠. 자기 살기 위해서.

그런데 교회란 것이 천국의 기준을 제시하는 데 교회 맞지요. 교회 들어가려고 교회 있는 게 아니죠. 천국 보내기 위해서 교회 있죠. 그러면 교회에서 이야기할 기준이 천국 기준입니까, 교회 기준입니까? 반드시 천국 기준이어야 한다 말이죠. 그런데 천국 기준이 뭐냐 할 때 성경 말씀이 동원되고, 그 중에서 우리는 신약성경이기 때문에 신약성경의 특징이 뭡니까? 아까 했죠. 종말의 상황, 환경이잖아요.

종말의 환경일 때는 다른 건 다 허물치 않는데 단 무엇을 놓치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만이 마지막 믿음의 증거에요. 그것 놓치면 더 이상 교회를 왔다갔다해도 좋은데 그건 자기 마음대로 하세요. 문제는 어딜 못 간다 말입니까? 천국, 심판대거든. 마지막 종말이 뭐예요? 막장 아닙니까. 이거는 끝장 난 거예요. ‘됐나? 됐다.’ 그 판이란 말이죠. 난 교수로 왔습니다, 의사로 왔습니다. 지금 의사, 교수를 묻는 게 아니에요. ‘됐나? 됐다.’ 이걸 묻는데 “당신은 지금 뭐하고 있어요?” 하면, “난 의사에요.” 이러면 안 돼요.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내 행함만 의지하고 살아왔다. 죄인이다.” 이래 나와야 돼요. 당신은 뭘 보고 그런 소리하노? 십자가 보니 아네. 십자가 보니까 의사고, 교수고, 집사고 나발이고 치우고 십자가 보니까 그 피가, 내가 아무리 성경을 천 독을 하고 다 지킨다 할지라도 주께서 그걸 받는다, 안 받는다? 안 받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가 개척교회 열군데 하고, 강의하러 돌아다녀도 그걸 안 받는 걸 알았어요. 신학을 하고 백날을 해도 안 받는 걸 알았습니다.

그러면 주께서는 믿을만한 증거가 뭐냐? 내 몸에서 만들어낸 기도했습니다, 헌금했습니다. 내 몸에서 만든 증거는 증거 된다, 안 된다? 죄송합니다. 안 됩니다. 그러면 목사가 교회가 천국 가는 기준을 제시하는데 목사가 교인들에게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이것 이야기하죠. 여러분들이 교회 와서 이제까지 성과 받은 것 내보세요. 애들 뒤에 미술시간에 그림 그린 것 붙여주지요.

여러분들 지금까지 신앙생활 한 삼, 사십 년 했으니까 실적들 내보세요. 나는 육이오 때 폭탄 맞았는데 기적으로 살았습니다. 그것도 내시고. 나는 큐티해서 은혜 받았네. 내가 기도했더니만 신학교 때 공납금 하나도 안 내고 아는 권사가 다 내주고. 그것도 내시고.

다 내서 그 다음에 뭐냐 하면, 목사가 설교시간에 그걸 오징어, 쥐포 찢듯이 다 찢어야 되죠. 나는 신학박사입니다. 쭉쭉 찢어야 되죠. 찢으면 교인들이, “아이고, 저걸 왜 찢어?” 하면 그 사람은 지금 믿는 바탕이 뭔가 잘못 됐어. “속이 시원하다. 저 놈의 내 행함 때문에 얼마나 힘든지.” 그걸 할 때 백 프로 신자입니다.

그것도 한 번하고 치우는 게 아니고 올 때마다. 설교하는 목사, 본인도 자기 설교를 찢어야 돼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만 이 자리에 서서 이야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종말의 삶이죠. 사도 바울이 갔던 길입니다. 여기에 무슨 윤리, 도덕이, 인간의 행함이 어느 조직인데 그게 왜 들어갑니까?

다시 합시다. 인간의 몸은 이미 실험을 다 해봤어요. 누굽니까? 구약의 택한 자들이 인간의 몸에서 할 수 있는 건 이미 다 해봤어요. 단순히 그들이 모자란다, 부족하다가 아니라 그들의 행함의 결국 무엇의 죽음을 야기했는가?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는 그런 것으로 야기 시켰지요. 그러니까 주께서 “역사 중지, 시험지 내라. 시험지 끝.” 이걸 두 자로 ‘종말’이라 합니다.

신학자들이 종말, 종말 그렇게 해도 본인들이 믿질 않아요. 종말이라 하는 것은 ‘시험지 내라’ 이 말입니다. ‘종쳤다’ 이 말이에요. 시험지 내라. 이름 쓰고 내라. 쭉 내지요. 시험지 내면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의 시험지 다 걷어서 자기 십자가 앞에서 찢어버립니다. 그리고 아버지한테 ‘24번, 백 점, 의인.’ 죄인으로 들어와서 통과해버리니까 의인 돼버렸어요.

그러면 십자가에서 죄를 의로 교화시키는 장치가 있죠. 엔진이 팍팍 돌아가죠. 여러분 쌀 물에 씻어 들이밀면 방앗간에서 떡가래 나오죠. 어릴 때 신기했습니다. 굉장히 신기했어요. 그것보다 더 놀라운 신기한 장치가 종말 때 설치했는데 종말은 반까이다. 죄인으로 들어와서 의인으로 빠져버리죠.

그런데 의의 떡가래는 그 안에 뭐가 포함되느냐 하면, 우리가 아예 가루가 돼요. 그냥 죽어서 포함된다고.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떡가래 되서 빠져나오는 거예요. 하나님께선 떡가래만 맛있게 먹어요. 다른 떡가래는 먹질 않습니다. 나는 죽고 주님이 살아있는 떡가래.

그 장치가 유다서에요. 그런 유다서 가지고 십자가를 어떻게 죄에서 의로 빠지는 변화시킬 수 있느냐? 그건 유다서에 나오는 모든 용어 하나하나가 히브리어, 헬라어 아무리 동원해도 안 나와요. 모든 용어 하나하나에 바로 죄와 의를 바꾸는 주의 이름, 다른 말로 여호와죠. 여호와가 구약 때 했던 그 작용이 신약 때 유다서를 통해서, 유다서뿐 아니고 나머지도 있지만, 유다서를 통해서 주의 능력이 작용하면 용어 하나하나에 죄를 의로 바꾸는 방앗간 같은 작용들이 그 안에 포함돼있습니다. 이게 프리셉트해서 나올 게 아니에요. 문법연구해서 나올 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냥 봐선 안 되죠.

그래서 유다서 해석에 들어가기 전에 바로 들어가면 어렵기 때문에 쉬운 간단한 공식 같은 걸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일 번, 내가 보는 하나님 포기하고 하나님이 보시는 나로 성경을 보자. 공식 하나죠. 내가 보는 하나님은 포기하고 하나님이 보시는 내가 어떤 ‘나’냐 할 때 하나님이 보실 때 중간에 뭐 들어가죠. 그냥 보시는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 보실 때는 마지막 때니까 마지막 뭐로 보신다 했어요? 예수님의 십자가와 죽음과 부활이죠.

사도 바울은 부활에 이르기 위해서는 뭘 통과해야 된다? 반드시 십자가에 죽지 않으면 통과 못하죠. 그러면 하나님이 보시는 나라 하는 것은 뭡니까? 하나의 철학입니까, 관념입니까, 하나의 신학적 개념이에요? 아니에요. 구체적으로 사건인데 무슨 사건입니까? 십자가죠. 십자가를 사도 바울에서는 이걸 하나의 역사로 보지 않고, 이걸 성령의 영으로 본단 말이죠.

성령의 영이 되면, 십자가, 현실화되는 능력이기 때문에 반드시 십자가 능력은 뭘 죽인다? 육을 죽여서 종말에 있는 구약도 마찬가지지만, 모든 인간을 한 용어로 모았죠. ‘육’으로 봤죠. 육으로 본다는 것은 다른 말로 뭐냐 하면, “너 육이야” 할 때 “그렇습니다” 하는 사람은 이미 십자가의 능력이 도달된 사람이고, “너 육이야” 하면 “육으로 어떻게 바르게 살면 영 됩니까? 노력해보겠습니다. 성경대로” 이렇게 나오면 이 사람은 아직도 개념 안에 잠겨있는 마지막 종말에 방앗간 기능, 죄를 의로 바꾸는 그 장치를 보지 못하고 뭐만 바라봐요? 아직도 구약적인 자신의 실력, 자신의 종교적인 능력을 의지하는 사람이에요.

“육이야” 하면 “맞습니다” 하면 될 걸 “육인데, 이래선 안 되는데 어떻게 영으로” 자꾸 자기가 걱정하고 있어요. 육이라고 알려준 그 능력 자체가 이미 시작하신 분이 마지막 때까지 기어이 구원하시리라. 빌립보서 1장에 나오죠. 자기가 자기를 손대려고 한다고. 그리고 어쭙잖게 손대다 자기가 스스로 나가떨어져서.

다시 봅니다. 내가 보는 하나님을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이 보실 때 난데, 밑에 것은 반드시 안에 뭘 집어넣어야 된다? 그냥 구체적으로 하나님이 날 보신다 말고, 하나님은 한 남자를 죽임으로써 십자가만 통해서 사람을 본다는 것. 예수님을 통해서 사람을 본다.

두 번째가 뭐냐 하면, 두 번째 하면 첫 번째 다 잊어버렸다. 나중에 또 할게요.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산 자와 죽은 자가 만나는 방식으로 해석이 된다. 산 자가 누굽니까? 예수님이죠. 죽은 자가 누굽니까? 십자가에 의하면 누가 죽어야 돼요? 우리죠. 그러면 죽은 자에선 뭐가 나와요? 해석 나오죠. 산 자에서 해석 나오죠. 두 해석이 서로 충돌되죠. 그래서 유다서 해석에서 반드시 죽은 자가 산 자 행세하면서 나오는 해석, 이 해석의 잘못을 지적해야 되고, 이미 죽었다가 사신 분, 참 재미있잖아요.

죽은 자인데 산 자인 체하는 우리와, 이미 살은 분인데 죽을 수밖에 없는 분과의 해석이 서로 다르면서 해석이 돼요. 비슷하지만 두 가지가 틀린 게 있어요. 두 가지가 미리 깔려줘야 신약성경이, 특히 종말 상황이 해석이 돼요. 신약성경만 해석되느냐? 아니죠. 구약은 마지막 때는 마지막 때 입장에서 구약을 다시금 해석을 해야 돼요.

왜 천재적인 바리새인들이 제사법, 잠언서, 욥기, 시편을 보면서 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 죽은 것을 못 빼냈느냐? 당연하지요. 우리의 모습이에요. 우리도 마찬가지지요. 우리도 신약성경 있다 해놓고도 구약 보면, 그 해석이 십자가로 뽑아내는 게 아니고 “우리도 잘 하면 잘 할 수 있다.” 쪽으로 나오니까 그게 바리새인이 아니고 뭡니까? 바리새인하고 우리하고 똑같지요. 그래서 이 두 가지의 밑바탕을 깔아줘야 돼요.

이 두 가지의 해석학적 전제를 제시한 철학자가 있느냐? 비슷하게 한 사람들 많이 있어요. 리꾀르란 사람, 하이데거란 사람, 비슷하게 많이 했어요. 들뢰즈란 사람, 많이 했는데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고 이야기한 사람은 없어요. 레비나스란 사람은 세상을 어떻게 봐야 된다? 일그러진 이웃으로 찾아오신 하나님, 메시아. 우리 때문에 일그러진 얼굴, 상한 얼굴로 우리에게 찾아오신 메시아를 통해서 세상을 봐야 된다. 이게 유대교 철학자 레비나스의 주장입니다. 어지간한 목사보다 낫지요.

그리고 마틴 부버 같은 사람은, 하나님은 너와 나의 관계 속에서 찾아온다. 이건 자유주의 뿅 갔지요. 해방신학한 사람들, 감리교, 통합 측 이런 사람들 뿅 가잖아요. 한신 출신들. 한 맺힌 하나님이 한 맺힌 인간을 도와준다. 사랑으로. 그게 그들의 신학이에요. 인간의 실존적 해석을 하자.

그럼 보수주의에선 어떻게 해석하느냐? 보수주의에선 인간을 완전히 빼버려요. 왜 빼느냐?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빼자는 거예요.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뭐로 가담해야 돼요? 죄인으로 가담해야지. 빼기는 왜 뺍니까.

그래서 지금 제가 욕 얻어먹는 게 하나밖에 없어요. 개혁주의 신학은 옛날 칼빈, 루터부터 신학적인 전통과 역사, 사도 바울, 어거스틴 그 다음 루터, 칼빈 쪽으로 내려오는 모든 역사적 성경해석을 존중하면서 그 전통을 현재 시대적 상황과 맞춰서 해야 된다 이것 아닙니까. 거기에 뭐가 빠졌습니까? 한 자? ‘죄’가 빠졌잖아요. 그게 바로 죄인데.

이걸 가지고 저는 어느 글에서 신학자들은, 목사들은 신학적 용어와 성경 용어 뒤에 뭘 숨긴다? 자기를 숨겨요. 왜 숨깁니까? 죄인이 숨는 것, 아담의 속성과 같아. 아담이 무화과나무에 숨은 것과 똑같아요. 앞에 신학적 용어로 완전히 도배를 해서 “하나님 저의 신학적 솜씨가 어때요?” 갖다 막 안겨. 뒤에 보면 뭐가 숨어있습니까? 뒤에 음흉한 죄가 숨어있어요.

그게 음흉한 게 뭐냐 하면, 바로 이게 죽은 자로서 자기를 감추는 거예요. 나는 이러이러해서 죄인 맞습니다하는 것을 감추는 식으로 유다서를 해석하고, 요한일서를 해석하고. 나는 죽어 마땅합니다가 안 나오고 나는 가능성 있다고 나온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철학이고 신학이고 다 걷어치우고 내가 죄인으로서 나는 이 성경해석을 마주치는 쪽으로 이 성경해석에서 얼마나 내가 내 이익만 챙기려는 그런 죄인임을 뽑아내면서 동시에 그런 죄인을 쌀가루 집어넣으면 뭐가 나온다 했습니까? 떡가래 나오듯이 나 같은 죄인의 쌀가루를 신약 유다서에 집어넣으면 그 다음부터는 죄인을 다루시는 주님의 몸의 십자가의 능력이 말씀을 통해서 작열해버리면 회개와 더불어 우리는 의인으로 등장하죠. 그리고 그 모든 작업의 영광은 오직 주님만 영광을 돌리죠. 그래서 어떤 성경도 그리스도만 증거하는 게 돼요.

1절.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는 부르심을 입은 자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라” 여기에 보면 유다라는 죄인은 무엇을 위해서 이 말씀을 전해야 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죠. 그런데 사람들은 유다를 죄인으로 보지 않고 자력으로 의인됐다고 생각한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괜찮은 인간이 누구와 동업한다? 예수 그리스도와 동업해서 주를 위해서 한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위해서’란 말은 자기가 괜찮은 인간 같으면 그 위해서가 둘로 갈라져요. 뭐냐 하면, 주님도 위해서 하는 것 같지만 최종적인 것은 주님을 위해서 한 나, 자신을 위해서로 돌아가게 돼있다니까. 사람들은 그걸 왜 안 믿는지 몰라. ‘믿습니다, 믿습니다’ 해놓고는 뭘 해봐야 자기만으로 돌아온다는 뻔한 사실을, 눈 감고 아옹하듯이, 그걸 왜 사람들은 감추는지 모르겠어요.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다는 말은, 나 같은 인간이 부르심을 입어서 그리스도의 속성만을 증거하기 위해서다. 그리스도의 본질만을 닮기 위해서 부르심을 입었다.

그 다음 나오는 것은, 3절을 봅시다.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들어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뜻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 말 자체가 모순 아닙니까. 믿음은 어떻게 해야 된다고요? ‘단 번’ 해놓고 다음에 어떤 순서가 나옵니까? ‘힘써’ 이게 말이 돼요? 설명해야 돼요. 설명한다고 이게

‘단 번에’라고 해놓고 ‘힘써’ 싸운다는 것, ‘힘써’는 반복을 이야기하고, ‘단 번’이라 하는 건 단회성을 이야기합니다. 어떻게 단회성에서 반복이 나옵니까. 말이 안 되지요. 진짜 단회성 같으면 어떻게 돼요? 믿음 줬으니까 그 다음에 ‘힘써 싸우라’가 아니라 ‘잊어라’ 이렇게 나와야 되죠. 끝났다 잊어라.

그러면 만약에 진짜 모순되게 나오면 묻는 게 뭡니까? 그럼 힘써 안 싸우면 어떻게 되는데요? 반드시 묻는단 말이에요. 이럴 때 이 해답은, 신약의 특징은 그리스도의 몸 안에 우리가 지배를 받습니다. 우리의 몸이. 몸이 지배받으면 우리는 우리가 갖고 있는 의문점, “그러면 단번에 했는데 힘써 안 싸우면 우리는 구원 됩니까?”라고 묻는 그것이 어디서 나오느냐? 우리의 기본적인 본능성은 어쨌든 간에 내 몸은 살아남아야 된다는 나의 이기주의적, 자율적인 이 몸을 그리스도 몸에서 일어나는 상황이 이 상황을 덮쳐버리죠.

그럼 그리스도 몸에서는 ‘단 번’과 ‘힘써’가 성립합니까, 성립 안 합니까? 성립 하거든요. 예수 그리스도 몸에서는 성립해요. 그걸 어떻게 압니까?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나오죠.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으로 자기가 고난 받고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된다는 것, 본인이 알지요. 다 알아요. 알면서 그걸 아는 가운데서도 날마다 기도를 하고, 간구하고 이렇게 합니다. 그것은 보통 인간의 몸은 시간의 저촉을 받아요. 그래서 흘러간 과거는 현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과거라 하는 것은 과거라고 이야기하는 것조차도 오로지 현재적 과거 일뿐이에요. 내가 기억한 것만 과거 일뿐입니다.

여러분들은 목사님 되시니까 내가 여러분들이 이해되고, 안 되고 그건 실례지만 제가 좀 어렵게 이야기할 테니까 이거는 어떻게 알아서 조치하세요.

사람이 어느 지점에 갔습니다. 어느 바닷가에 가니까 내가 옛날 잊었던 기억이 되살아났어요. 저 바위 아름답다. 그리고 돌아오다가 어떤 사람을 만났어요. 동창생을 만났어요. “야 너. 오래간만이다.” 동창생을 만났을 때 기억났습니다. 그러면 내가 그 바위 안 가고, 동창생 안 만나면 그 바위 없는 겁니까, 동창생 죽은 겁니까? 답변해보세요. 있지요. 있는데 왜 만나기 전까지는 몰랐어요?

그거는 자기가 생각했던 과거 속에는 만나기 전까지는 동창생, 바위 생각 안 났지요. 그러면 그 과거는 어떤 과거입니까? 일방적인 과거죠. 자기만 생각하는 과거죠. 그렇잖아요. 그래서 사람이라 하는 것은 더불어 같이 살아가고, 나 말고 딴 사람이 같이 존재한다는 걸 모르고 항상 과거가 좋았다, 어떻다 하지만 그건 누구 중심입니까? 나만 살아있다는 걸 중심으로 과거가 재편돼요. 어디서? 현재로부터 과거가 재편됩니다.

바닷가에 갔습니다. 기억난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와봤다. 오다가 동창생 만났습니다. 아까는 한 명 만났지요. 이번엔 두 명 만났다고 생각해봅시다. “아이고 오래간만이다. 살아있었네. 많이 늙었네.” 하고 있는데 옆에서 “너는 나 모르겠나?” “모르겠는데.” “섭섭하네.” “니들 같은 반 아니었나?” 아하 이제 아는 거예요.

그러니까 첫 번째 아는 동창생 만나는 그 순간 다시 조립했죠. 나의 과거 속에 이런 동창생 있다. 조립해서 이걸 내 과거로 받았는데 그 순간에 내가 기억 안 나는 동창생 말이 “너 나 모르겠나?” 이러니까 “모르겠다.” 이러다가 다시 급 수정에 들어가죠. 그렇다면 도대체 이 급 수정을 어디까지 해야 됩니까? 도대체가 진리를 아는 게 뭐가 있어요? 도대체 뭘 알아요? 과거 자기 입맛에 맞는 대로 다 해놓고 간증집회 다 해놓고 뭘 옳아요? 지가 예수를 알면 얼마나 아는데. 만나면 조립하죠.

이게 바로 우리 몸이 야기 시키는 시간개념입니다. 그리고 그 시간개념은 ‘나’라는 몸에 갇혀서 빠져나오려야 빠져나올 수 없고, 일방적인 진리 주장을 하게 됩니다. 그 다음에 어떤 사태가 우리에게 들이닥칠지 모릅니다. 앞으로. 그 사태가 들이닥치면 지금까지 구축해놓은 모든 진리체계와 세상체계가 그 들이닥친 사태로 말미암아 순식간에 어떻게 수정할지 본인도 몰라요.

그래서 우리는 믿습니다. 뭘 믿어요? 나의 기억을? 웃기지 마세요. 나의 과거를? 웃기지 마세요. 내 세상관을? 아닙니다. 우린 누굴 믿어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은 내 몸과 다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시간관은 내 시간관과 다르다. 나는 하루가 하루지만, 주님한테는 천 년이 하루 같죠. 이것도 보세요. 이것도 마찬가지에요. 천년이 하루 같죠. 그걸 누가 해석했어요? 바로 내 몸이 해석했지요. 그것 맞을 일 있습니까?

그래서 이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런 시간관을 분석해서 결국 뭐가 나오느냐 하면, 나라는 존재는 모호하다는 존재론으로 나옵니다. 존재론 나오게 되면 나의 시간관은 이거는 뭔가 문제 있다. 문제 있는 정도가 아니고 문제가 많지요. 술 한 잔 먹으면 잊어버리는 걸 필름 끊긴다 하는데, 그래서 책임이 모면되는 건 아닌데. 시간관에서 존재론인데 이 존재론에 들어가면, 이게 오늘 강의에 제일 중요한 겁니다. 이것만 하고 십 분 쉽시다.

내 몸이 아니고 여럿 몸이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되고, 여럿 몸은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의해서 이것이 아담이라는 한 몸으로 굳혀진다는 것이 성경의 해석입니다. 그리고 이 한 몸 됨은 내 몸을 위함이 아니고, 누구 몸을 위한 표상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이다. 이것이 로마서 5장에서 이야기하는 거죠.

내 몸에 문제 있다는 걸 알았지요. 우리가. 만날 우리가 구사하는 세계는 일방적이라는 것, 순전히 내 욕망에서 나오는 일방적이다. 사람은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알고 싶은 것만 아는. 나머지는 어떻게 한다? 전부다 내 이익이 없다고 해서 삭제해 나가는. 매일같이 편집하는 식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그래서 미국에 있는 모델이 옛날 수입 없다고 45평짜리 고급 아파트에서 자살하는, 노무현이 자살한 게 뭡니까? 노무현이 자살한다 하면 아프리카 난민들이 돌 던집니다. 네가 자살하면 우리는 어떻게 사나? 자기가 알고 있는 세계에선 자살 할만한 이야기지만 아프리카 빈민들에 의하면 먹는 것, 입는 걸로 족한 줄 알고 그대로 받아들이죠. 그게 무슨 죽을 일이냐 말이죠.

세상에 나라에서 한 달에 오백 만원, 경호원 다 붙였지 어떻게 죽을 일이냐 말이죠. 얼마나 일방적입니까? 우리가. 그 일방적으로 만든 게 누구에요? 그동안 내가 축적된 나 위주의 과거 역사가 나로 하여금 완전히 나만 위해 사는 나쁜 놈으로 만들었어요. 그것도 고상하게 신학과 성경 말씀으로 듬뿍 떡을 쳐가면서. 초코파이처럼. 얼마나 자기변호와 자기 스스로 방해 받습니까?

이런 걸 이야기하면, 참 주님 고마워요. 일방적으로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을 구원했다는 소식을 알게 하는 거예요.

이 세상에 나만 존재하는 게 아니고 여럿 존재가 나옵니다. 그러면 여럿 존재 있다는 것은 이런 정도는 목사나 신학자들은 알아요. 어떻게 아느냐 하면, 여럿 존재기 때문에 여기다 뭘 집어넣느냐 하면,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을 집어넣어요. 그러면 여럿 존재가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우리들이 사랑하는 것이 뭔 뜻이다? 하나님 뜻이다.

요한일서에 나오죠. 형제를 위해서 네 목숨을 바치는 것이 마땅하니라. 모든 성경말씀을 집어넣어서 유다서에 나오는 서로 바르게 살고, 이런 것. 우리끼리 바르게 살면 우리끼리는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건 니 생각이고.

이 한 몸은 이 여럿 중에서 한 분이 침투했죠. 어느 몸이 침투했습니까? 그렇죠. 여기 예수님이 침투해버렸습니다. 이웃을 사랑한다고, 구제한다고 난리치는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이 끼어죽었지요. 치어죽었지요. 그렇다면 뭐가 문제입니까? 몸의 해석을 우리끼리도 문제 있지요.

어떤 목사는 설교하는데 날 위한 구원하지 말고, 공동체를 위한 구원하라. 공동체를 이야기한다고. 공동체는 이건 기독교를 떠나서 모든 종교가 추구하는 바입니다. 불교공동체. 공동체 신학, 이것 대표적인 사람이 최낙재 아닙니까. 최낙재가 얼마 전에 죽은 사람, 강변 교회, 김홍전 신학 아닙니까. 자유주의적 공동체 말고, 개혁주의적 공동체. 그래서 자유주의 공동체를 되게 비난하죠. 오직 성경대로 공동체,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말 좋지요. 그런데 한 몸이 죽었는데, 예수님이 죽었는데 그것 때문에 죽었는데.

여럿 존재에서 여럿 존재만 보이지, 여럿 존재를 하나의 존재로 묶어내는 수완이 능력이 인간에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여럿 존재가 도로 어디로 가요? 내 몸으로 묶어지지요. 공동체, 대한민국하고 일본하고 축구하면 누굴 응원합니까? 대한민국 응원하죠. 왜 대한민국 응원합니까, 우리는? 내가 대한민국 사람이니까 그런 거죠. 아무리 대한민국이 여럿 공동체를 이야기해도 그 가운데 주인공은 누구다? 역시 나죠.

만약에 대한민국이 나를 억울하게 모함했다? 그럼 어디로 갑니까? 미국으로, 호주로 대번에 이민 가버리죠. 왜? 대한민국 지긋지긋하다. 완전히 지긋지긋하다 나오죠. 그러니까 충분히 공동체를 말하든 뭘 하든지 간에 내 위주 아닙니까.

그래서 한 몸, 예수의 몸으로 묶어내는 방법이 인간에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건널 수 없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뭐냐? 십자가의 능력을 가지고 한 몸 쪽에서 여럿과 내 몸에게 찾아오는 방식으로 오지요. 그게 유다서 1장 1절에 유다는 뭘 했다? 유다는 부르심을 입었지요. 부르심을 입었으니까 여기는 우리 몸에 의하면 시간관이 개입됩니다. 그러면 과거, 현재, 미래가 형성되지요.

부르심을 입었으면 우리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내 몸에서부터 어느 몸까지? 그리스도 몸을 입었으니까 그 다음에 나와요. 우리는 누구 몸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 다음에 전제가 뭐다? 반드시 나는 포기하고. 이게 사도 바울과 관련 돼 있잖아요. 자기를 위해 살지 말고 이제부터 나를 위해 사신 자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 살지 말고 주를 위해 살아라.” 그 중간에 뭐가 있다고요? 나를 위해서 그 다음에 ‘죽으신’, 그러니까 성도와 주님 사이에는 뭐가 항상 있어야 돼요? 죽으심이 있어야 나는 날마다 죽어야 될 존재인 것을 안다 이 말입니다.

이 어려운 걸 계속.... 10분 쉬고 합시다.

관리자(IP:220.♡.176.150)

09-07-15 18:23

부산090707b조지래드30신약신학-유다서b

20090707b 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유다서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여럿 몸을 그리스도 한 몸으로 바꾸는 데는 이것은 주의 능력이 아니면 안 됩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2장에 보면 뭘 마셔요. 매실을 마시는 게 아닙니다. 뭘 마신다 돼있습니까? 한 성령을 마셔버리면, 분명히 여러 명이에요. 한 사람은 과천에 살고, 한 사람은 인천에 살고, 한 사람은 돈까스 집하고. 분명히 여러 몸이에요. 한 사람은 창원에 계시고.

몸인데 뭐라고 합니까? 한 몸이라고 하라는 거예요. 무조건. 미치지요. 아닌데. 구득영 목사님 뭐 한다고 내가 가슴 아프고 이런 것 아니잖아요. 아닌데 한 몸이라는 거예요. 저쪽에서 웃을 때 같이 웃어주라는 거예요. 저쪽에서 울 때 같이 울어주라는 겁니다. 왜요? 네 안에 뭐 있다? 사랑 있는데, 이 사랑은 우리가 만들어내는 게 아니고 선물로 준 것이 되어서 영원히 존속한다는 거예요. 이 사랑 없으면 한 몸이 아니고 한 몸이 깨져버리고 뭐가 됩니까? 여러 몸 되죠.

그러면 교회에서 한 몸 되기 위해서 계속 뭘 뭐야 됩니까? 본드 있잖아요. 본드만 이야기하는 거예요. 우리는 다같이 부족한데 예수님의 사랑은 뭘 없애나니? 두려움이 없나니. 개척교회 하는 사람들 두려움이 뭡니까? 교회 망한다는 두려움. 그 두려움은 평생 갑니다. 사랑은 뭘 쫓나니? 사랑이 오니까 두려움을 쫓나니.

교회가 여럿이 되면 니 교회, 내 교회 따로 있겠지요. 근데 한 몸된 교회는 교회가 몇 개밖에 없습니까? 몸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 교회도 하나요, 소망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요, 하나님도 하나요, 구원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이미 하나로 “됐나?” 그럼 우리는, “됐심니더.” 사랑은 두려움이 없나니.

이 유다서가 윤리, 도덕이 아닙니다. 우리로 하여금 이런 환희와 행복감과 안도감을 제공하는 유다서에요. 그런데 모든 주석은 윤리, 도덕으로 힘들게 만들어요. 그것은 이 유다서의 내용 하나하나에서 “됐나?” “다 됐다.”를 끄집어낼 줄 몰라서 그래요. 여러 몸에서 한 몸에서 주신 능력으로 우리는 세상을 어떤 관점이냐 하면, 내 몸의 관점이 아니고 주의 몸에서 관점을 보죠.

그러면 몸에는 눈이 담겨 있지요. 이 눈은 어떤 관점이냐 하면, 예수님께서 세상을 볼 때 어떻게 보느냐에 관점이 있지요. 그걸 위하여 유다가 부르심을 입었죠. 그래서 유다 관점이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유다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는데 여기에 한 몸 된 사람은 다 나와. 다 우리 한 몸이야.

그 관점이 뭐냐? 종말적 관점이죠. 종말적 관점은 시간이 멈췄어요. 왜 멈췄는가? 달려갈 길 다 달려갔으니까 멈춰버렸지요. 스톱되었어요. 스톱되면 빨리 갈 때는 빨리 움직여 버린다 말이죠. 이게 계란일까, 요구르트 병일까 모르는데 정지시키게 되면, 계란인 줄 알았는데 요구르트 병이구나 알잖아요.

모든 신약의 개념, 땅 개념, 율법 개념, 종말 개념, 구원 개념, 하나님 개념, 우상 개념, 십계명 개념, 모든 개념들이 사람과 더불어 확정될 때는 미확정적이에요. 그런데 어디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들어오면 시간이 스톱 돼버리면 애굽이라는 게 지리적 애굽이 아니고, 바로 이곳이 애굽이다.

요한계시록에 나오죠. 예수님 두 증인이 죽은 장소가, 세상에 그게 소돔이요, 고모라요,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이요, 애굽이다 이 말이죠. 어떻게 그런 해석이 나옵니까? 시간을 종말 때는 스톱이 되니까 내가 여기 있는 곳에 주와 함께 있는 이게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터지는 곳이죠.

봅시다. 나의 자격은 내가 있는 것이 아니고 주의 한 몸 자격으로 왔지요. 이걸 뭐라 하느냐 하면, ‘지체’지요. 지체의 특징은 바라보는 겁니다. 우리 한 몸 되신 예수님을 바라보죠. 여기 다른 사람도 예수님만 바라보죠. 그래야 한 몸 되니까. 그런데 이 지체는 성령이 주어지게 되면 성령 따라서 사건이 옵니다. 이 사건 속에는 시간에 구애 받지 않는 사건들이죠.

그러면 옛날에 민수기에 나왔던 발람이, 오늘 본문에 발람 나옵니다. 발람이 이스라엘을 꼬시던 사건이 과거 사건이다? NO. 아니죠. 지금 사건이죠. 여기 또 천사가 모세 시체 가지고 마귀와 다투던 사건이 과거 사건이다? NO. 지금 사건이죠. 그래서 아까 고린도전서 10장에 홍해 건너간 걸 뭐라 했습니까? 세례. 엄청난 거. 아마 사도 바울이 그런 소리하면 오늘날 신학자들한테 욕 얻어먹습니다. 어떻게 홍해 사건이 지금의 나의 운명이 되느냐? 그 사람 운명이지. 그 홍해 사건이 지금 사건으로 터져버려요.

그래서 지금 사건이 터져버리면 우리는 성화론으로 구성하면 안 돼요. 성화의 특징이 뭡니까? 과거보다 더 나은 지금 아닙니까. 지금보다 더 나아진 미래잖아요. 시간적 개념을 집어넣으면 안 돼요. 과거에 이미 극복했다는 죄가 앞으로 십 년 뒤에 또 나의 죄로 불쑥 튀어나오죠. 물론 그건 아주 교묘하게 거룩한 척 하면서 튀어나오죠. 아이 참.

그런 점에서 유다서는 윤리, 도덕을 공격하는 겁니다. 그냥 제대로 살라는 게 아니라 지금 네가 어떤 몸인데 아직도 그런 이미 해결된 죄에 대해서 아직도 묶여 있느냐는 식입니다. 방금 이 이야기하니까 기존의 개혁주의 신학하고 비슷해지는 느낌이 안 듭니까?

여기 8절에 봅시다. “그러한데 꿈꾸는 이 사람들도 그와 같이 육체를 더럽히며 권위를 업신여기며 영광을 훼방하는도다” 이게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죠. 근데 그 사건이 그리스도 안에서는 지금 사건이 된다. 그러면 그 주체가 뭐냐? 아까 12절 봅시다. 아까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그건 했고요. “바람에 불러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 이것은 완전히 잔뜩 기대했는데 들어보니 허풍, 아무것도 실속이 없는.

사실은 설교자가 평생 동안 설교하면서 이것에 주눅 들잖아요. 설교자 본인들이. 뭔가 단비를 품을 수 있는 구름이 돼야 될 텐데 자기 딴엔 단비를 마음껏 품어서 이제는 쏟아지려고 하니까 때가 여름이라. 촌이라 아침부터 할머니, 할아버지들 교회 왔는데 여름이라 선풍기 돌아가면 오자마자 주무십니다. 언제 깨느냐? 설교 끝날 때 귀신 같이 깹니다. 축복받고 집에 갑니다.

촌에 설교할 때 실컷 준비 다하고 삼십오, 육도 올라가는 실내에서 자기는 난닝구 다 적혀가면서 설교 해봤자 자알 주무십니다. 앞에 종, 땡땡땡 쳐봐야 잠자는 마귀여 나가라 백날 해봐야 소용없어요. 그럴 때 허탈감.

주일날 이런 소리했어요. 열정 뒤에는 공허함이다. 용을 쓰기는 왜 썼나. 그래서 교인들이 잘 때 이렇게 하세요. 주무시잖아요. 5초 동안 아무 소리 안 해 보세요. 자다가 다 일어납니다. 무슨 일 있는가 싶어서. 그럴 때 노려서 이야기합니다. 10초가면 잡니다. 10초 뒤에 다시. 참 싸우는 게 힘듭니다. 보통 사람은 잘 안 자요. 왜냐하면 남편 밥 차린다고.

“물 없는 구름이요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요”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실속은 없고 허풍밖에 없는데 문제는 “이것밖에 허풍입니다” 하면 문제가 없어요. 무슨 말이냐 하면, 오늘 진짜 중요한데 구약 사람들의 실패 있잖아요. ‘실패했다’ 하면 구원받습니다. 인간이 어떻게 이걸 살아요. 아담의 운명이 누구 운명이라고요? 아담이 선악과 따먹은 것 누가 따먹었어요? 우리가 따먹었잖아요. 감추기 좋아는 건 우리 속성이에요. 무화과나무에 만날 감추고 살아요. 우리 본성이고 죽을 때까지 계속 돼요. 이걸 아니라고 하면 곤란하죠.

돌아서면 우리는 내 위주에요. 한 2.5초 가죠. 돌아서면 내 위주라니까요. 바닷가에 바위 보고 동창생 만나도 돌아서면 너는 네 갈 길, 나는 내 갈 길, 이래요.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라면 안 된다 말이죠. 아니라 하면 십자가의 공로가 의미가 없어요. 말씀은 우리의 골수와 우리의 모든 것을 쪼개는 하나의 회집에 회칼이죠. 그걸 사시미 칼이죠. 말씀으로 보면 다 잘라버리죠. 자를 때 기분 괜찮아요. 안 잘리려 하니까 문제가 되죠.

껍데기밖에 없음을 인정합시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지요. “주여 고개를 못 듭니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할 때 뭐라 했습니까? 네가 의인이라 했지요. 죄인 아닌 정도가 아니고 “네가 바로 의인이다.” 했습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 이야기죠. 그러니까 현재 우리 몸이 이렇다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우린 죽을 몸이죠.

“자기의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이요” 파도가 치면 물결이 일어날 때 그 물결 속에 뭔가 있는 것처럼 보이죠. 나중에 해변에 보면 물결 다 죽어버립니다. 맹탕, 아무것도 없어요. 아무것도 없는 게 잘난 척해서 거품 팍팍 일어서 버블버블 하면서 보글거립니다. 백날 까불어도 요새 유명한 말 있잖아요. 한 방에 훅 갑니다.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에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이라” 유리하는 똥이 아닙니다. ‘별’이죠. 별이 뭡니까? 스타 되고 싶으면 연락하라 안 합니까. 다 어떤 분야에서 종사하려면 스타되라 하잖아요.

“아담의 칠 세 손 에녹이” 지금 계속 과거 이야기하는 게 뭐예요? 이 과거가 우리하고 상관없다? 아니죠. 이 과거가 지금 어디에 놓여있다? 지금 우리가 과거의 소산 아닙니까. 육은 그냥 육이 아니에요. 우리 아비가 우리 부모가 육을 낳았잖아요. 그러면 그 부모는 누구한테 낳았습니까? 또 할아버지한테 낳았잖아요. 모친의 뱃속에서 태어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이 죄가 쓰레기가 우리 안에 다 차 있잖아요. 이게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이야기입니다.

“아담의 칠 세 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 에녹서에 나오는 이야기다, 하여튼 이야기해요.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이것 설명해야 돼요. 복잡한데 이렇습니다. 시간은 선이죠. 직선입니다. 시간이 두께를 가지면 곤란합니다. 만약에 시간이 두께를 가지면 직선이 만약에 면적을 갖게 되면, 다른 말로 수학적으로 이건 이차원이 아니고 면적 가지면 삼차원이 되죠. 삼차원 되면 좌표 상 이 선 위에 또 선이 있고, 이 선 위에 또 선이 있어요. 그렇게 되면 시간이 중첩된 선이 돼버립니다.

그래서 이렇게 되면 시간이라 하는 것은 현재의 나를 생산해야 되는데 이 선이 A, B, C라면 현재 나라 하는 것은 A 선입니까, B입니까, C입니까? 이게 미확정적이죠. 예를 들어서 이런 겁니다. 이건 실제는 아니고. 나는 엄마가 날 키웠다고 생각했는데 오랜만에 미국에 계시던 이모가 와서 “아이고 내가 너 키웠다. 엄마는 그때 돈 번다고 나가버리고 내가 너 키웠다.” 할 때 처음 듣는 이야기다 말이죠. 이모가 하는 말이, “그때 너, 엄마보다 엄마라 안 했데이. 나보고 엄마라 했데이. 엄마, 엄마 하고 따라다녔어.” 이러거든요.

옛날에 그런 일이 있었어요. 옛날에 못 사는 친척이 집에 와서 가정부 노릇할 때 유모 노릇 다 했거든요. 연세 많은 할머니들 와서. 그러면 애들 젖 주고 이러면 엄마지 뭐. 내가 다 키웠지. 내가 몰랐어요. 진작 그런 소리했으면 제가 결혼식 할 때 모셨을 텐데. 그것도 모르고 이제 와서 너무 실례했습니다. 그러면 진짜 엄마가 그런 이야기를 왜 안 했을까요? 진짜 엄마는 시간적 노선이 이 자식이 내 자식이 되어야 돼요. B라는 C라는 새로운 노선이 오면 안 되는 겁니다.

갑자기 출생의 비밀이 생겨서 A에 B, C 엮기면 이것이 바로 막장 드라마에요. 허연 거짓말이죠. 아내의 유혹. 전부다 뒤섞이는 거잖아요.

사람의 행동은 깔끔하게 내가 누구냐를 알기 위해서 행동하게 돼있습니다. 깔끔하게 깨끗하게 도대체 나는 어디서 왔으며, 어디까지가 나며, 나라는 것이 이렇게 확실하게 규정되기를 원해서 인간은 행동에 나서요. 하나하나 할 때마다 내가 이런 능력이 있구나. 이런 거예요. 그런데 이렇게 뒤섞여버리면 곤란하다 이 말이에요.

지금 예언서에서 예언이 뭐냐 할 때 정말 예언에 대해서, 이번에 수련회 할 때 강의를 깊게 하겠습니다만 참 어려워요. 예언을 사람들이 단선으로 보거든요. 단선으로 보면 안 돼요. 이게 중첩돼있다니까요. 그냥 중첩돼있다는 것은 들뢰즈란 철학자는 이야기해요. 그것도 아니에요.

그럼 중첩된 것도 아니고, 단선도 아니고 그럼 뭐냐? 대구에서 강의할 때는 종말을 휘게 하는 거예요. 종말을 휘게 하면 현재와 미래가 같이 만나게 돼요. 이렇게 만난다고. 이미 과거가 이게 신기한 게, 그러니까 미래는 과거가 사라줘야 미래에요. 과거가 사라져야 현재 남고, 현재가 사라져야 미래 되잖아요. 그런데 미래가 휘어져서 현재와 같이 있고, 과거와 같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이해력을 초월하죠.

이렇게 사신 분이 누구냐 하면, 바로 예수님이었고, 그 예수님을 알아보신 분이 세례요한이었습니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이것 말 어렵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8장에서 아브라함은 나 보기를(아브라함에서 미래 아닙니까) 기대했다가 그 다음에 갑자기 미래에서 보고, 현재죠. 우리한테는 과거 돼버렸어요.

개혁주의신학에 이게 나옵니다. 박형룡 신학에 이거 나와요. 난 총신에서 못 배웠는데. 어느 교수가 가르쳐줘요? 아무도 안 가르쳐줬어요. 성경에 나오는데 아무도 안 가르쳐줬어요. 왜? 성경 중에서 일방적으로 자기가 원하는 신학을 조립하고 집어넣고 나머진 뺐기 때문에.

묵시문학에 대해서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어요. 묵시문학을 이야기해도 역사와 대비되는 묵시문학이 있어요.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서 뽑아 나온 묵시문학은 아무도 이야기 안 해 줬어요. 심지어 묵시문학 책에라도.

에녹이란 사람은 오래 전 사람인데 뭘 봤습니까? 주께서 심판한다. 그래서 신약학자들과 구약신학들이 만날 싸우는 것이, 예수님을 그냥 예수가 아니고 ‘주 예수’죠. 그 ‘주’가 신약학자들은 ‘여호와’라 하고, 구약학자들은 미쳤다 해요. ‘여호와’는 구약학자만 여호와지 왜 신약에 와서 주가 되느냐 이 말이죠. “어이, 신약학자들 여호와가 주 되는 걸 설명해봐라.” 설명 못해요. 뭐라 하느냐 하면, 성경에 나오니까 한다고 해요. 성경에 나오니까 그런다 하면 신학이 뭘 필요해요. 성경 그냥 읽으면 되지. 설명을 해줘야지. 설명을 해줘야 될 것 아닙니까.

주님께서 주의 몸 할 때 이 주 안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여호와가 들어있죠. 여호와가 들어있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 주신 언약이 들어있죠. 그럼 언약이 들어있는 것을, 재미있는 것은, 여호와께서 언약 줄 때는 언약을 누가 이룬다 했습니까? 주가 이룬다 했지요. 그런데 여기 종말과 과거가 만나버리면 여호와께서 언약을 줘서 주께서 이룬다 이래 되지만 만나버리면 주께서 언약해서 주께서 이룬 게 돼요.

그래서 시편에 나오는 여호와 개념이 신약에서는 무슨 개념으로 바뀌었습니까? 예수님 개념으로 바뀌어버렸어요. 예수님이 자기가 해놓고 자기가 약속하고 자기가 성취했어요. 그래놓고 세상에 모든 만물이 나를 위해서 해놓고 그리고 예정도 여호와가 예정한 것이 아니고 예수 안에서 모든 것이 예정 되었느니라. 에베소서 1장 4절.

그렇다면 그동안 우리가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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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536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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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