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상 22:8-10 (집단 순교)
삼상 22:8-10 (집단 순교)
이름 : 우리교회(IP:220.81.176.150)
본문 : 사무엘상 22장 8-10절
제목 : 집단 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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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09-07-05 15:35
집단 순교
2009년 7월 5일 본문 말씀: 사무엘상 22:8-10
(삼상 22:8, 개정) 『너희가 다 공모하여 나를 대적하며 내 아들이 이새의 아들과 맹약하였으되 내게 고발하는 자가 하나도 없고 나를 위하여 슬퍼하거나 내 아들이 내 신하를 선동하여 오늘이라도 매복하였다가 나를 치려 하는 것을 내게 알리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하니』
(삼상 22:9, 개정) 『그 때에 에돔 사람 도엑이 사울의 신하 중에 섰더니 대답하여 이르되 이새의 아들이 놉에 와서 아히둡의 아들 아히멜렉에게 이른 것을 내가 보았는데』
(삼상 22:10, 개정) 『아히멜렉이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묻고 그에게 음식도 주고 블레셋 사람 골리앗의 칼도 주더이다』
사울왕이 화가 단단히 났습니다. 자기 세력에 다윗 때문에 누수가 생긴 겁니다. 그래서 사울은 자신의 실세를 과시하기 위해서 다윗을 협조한 자들을 과감하게 조치를 단행합니다. 본 때를 보이기 위해서 85명의 하나님의 제사장을 현장에서 죽여버리고 말았습니다. 여기에 가담한 자가 있었습니다.
도엑이라는 제사장입니다. 그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울왕이 세도를 부리는 것을 자신이 살기 위한 기회로 간주합니다. 이 세상은 일종의 정치판입니다. 정치판이란 다수의 힘과 소수의 힘이 늘 상호 충돌하면서 변화를 조성하는 것을 뜻합니다.
정치판에서는 힘 가진 자가 힘이 없는 자들을 지배하는 것을 당연시하게 되는데 이것을 그들은 ‘진리’라고 부릅니다. 이렇듯 이 진리 안에는 자신이 힘이 들어있습니다. 자기가 중심이 된 채로 움직이는 그런 힘의 판도와 배치도를 사람들은 잊지를 못합니다. 자기보다 힘이 센 자가 나타나면 하염없이 아부하고, 자신의 출세로 가로막는 자가 나타난다면 한없이 미워하면서 죽여 제거하려고 합니다.
이처럼 자신이 짜가는 정치판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는 자들이 이 세상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힘에서 밀리면 불의자라는 판정을 받게 되고 힘을 끌어 모으게 되면 그것들이 모여서 진리처럼 행세하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것은 진정한 진리가 아니라 힘의 뭉치입니다.
그런데 다윗 위에서 하나님의 창조의 힘이 덮쳐서 인도합니다. 이 창조는 나름대로 힘이 따로 있습니다. 이 힘은 인간들의 자기 중심에서 주장하는 힘과는 다릅니다. 과연 하나님의 창조적 능력이 이 땅에 그 얼굴을 보일 수 있을까요?
사울왕은 다윗을 도와준 제사장 아히멜렉 제사장과 그 가문들을 다 소집합니다. 그리고 사울은 부하들 보고 죽이라고 했을 때, 그들은 주저합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죽여야 하는 자들이 하나님과 직접 관련된 업무에 종사하는 제사장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도엑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더 이상 하나님이 의식되지 않습니다. 오로지 힘 모으기에 급급했고 그 힘의 제공자가 바로 사울왕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생각은 오로지 힘을 더 얻고 싶을 뿐입니다.
다윗과 사울 때문에 발생된 상호이질적인 대립하는 두 계열 사이에는 집단적인 살해가 이루어지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이는 곧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는 집단에 의해서 하나님에 의해서 살아가는 집단이 살해당한 겁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런 힘든 상황을 우리 성도에게 일으키는 겁니까? 누가복음 24:13-17에 보면, “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미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은 성도와 동행한다는 겁니다. 그만큼 성도 자체만으로는 죽음을 이길 수가 없는 겁니다. 오늘 본문 같이 이런 죽음 사건들이 성경의 밑바닥을 장식하면서 진행되는 것은 도대체 구원이라는 것이 어디서 어디로부터의 구원인가를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사람에게는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도엑이라는 사람이 과감하게 85명이라는 하나님의 제사장을 죽일 수 있었던 것은 대범해서가 아니라 도리어 뭔가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4:18에 보면,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늘 알 수 없는 두려움에 휩싸여 살아가고 있음을 하십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는 예수님의 두 제자가 알 수 없는 공포와 두려움에 싸여서 예루살렘에서 엠마로로 나려갑니다. 과연 이들에게 있어 구원이라는 것이 뭡니까? 도대체 무엇에서부터 구원받았다는 말입니까?
사람이란 자기에게 찾아드는 두려움을 행함으로 처리하려고 합니다. 보다 힘있는 노선에 줄서면 그것이 자신을 지켜준다고 여깁니다. 사울왕의 두려움이나 도엑의 두려움이 바로 이 힘을 지키려는 데서 오늘 두려움입니다. 이런 현상은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서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원’이 뭔가를 알려주기 위해서 세수대야를 가지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베드로가 사양하기를 자신이 도리어 예수님의 발을 씻어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되면 너와 나는 상관없는 사이가 된다”고 말입니다. 하나님 믿는 자들이 도리어 세상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은, 구원이라는 것이 그렇게 사람들이 생각하는 힘의 체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즉 하나님의 사랑은 그 어떤 두려움에서부터도 해당되지 않음을 분명히 해주십니다. 다윗에게 덮친 창조력의 내막은 이사야 45:7-8에 나옵니다.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하늘이여 위로부터 공의를 뿌리며 구름이여 의를 부을지어다 땅이여 열려서 구원을 싹트게 하고 공의도 함께 움돋게 할지어다 나 여호와가 이 일을 창조하였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창조는 기존에 인간들이 갖고 있는 생존 능력을 능가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죽는 것을 제일 두려워합니다. 노인네들이라고 예외가 아닙니다. 겉으로는 여유를 부리지만 내면적으로 죽음을 피할 수 있는 방도를 고심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창조력이 덮치면, 자신에게 일어나는 그 어떤 일도 이미 예수님에 의해서 구원받았음을 말해주는 증거들이 됩니다.
“겉옷을 달라하는 자에게 속옷까지 주어라”는 말씀이나 “네게 필요한 것을 위해 기도하지 말라”는 말씀이나 “먹는 것, 입는 것을 위해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도 모두 죽음을 사랑으로 이겨내어 주신 하나님의 창조력을 찬양하는 여유로움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 그 어떤 두려움을 품지 말고 감사하게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우리교회
09-10-20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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