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14: 1 (유 월 절)
막 14: 1 (유 월 절)
이름 : 우리교회(IP:220.81.176.150)
본문 : 마가복음 14장 1절
제목 : 유 월 절
듣기 :
, 보기 :
이근호
09-07-05 13:34
유월절
2009년 7월 5일 본문 말씀: 마가복음 14:1
(막 14:1, 개정)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일 방도를 구하며』
(막 14:2, 개정) 『이르되 민란이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 하더라』
교회란 서로를 쳐다보는 데가 아니라 하나님을 쳐다 보는 곳입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을 내놓은 곳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 뭔가를 바라보고 감탄하기 위해서 불려나온 자들입니다. 오늘 본문에 ‘유월절’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사람들은 무슨 단어만 나오는 자신들의 행함으로 그것을 지키려고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것은 인간보고 지키라는 구절이 아니라 예수님 홀로 하실 일임을 드러내십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이런 예수님 단독 일에 끼어들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 모든 일을 예수님 홀로 다 하셔서 우리 성도는 가만히 앉아서 혜택만 받고 있습니다. 미술 전람회에 가서 바닥에 앉아 자기 그림을 그리는 짓을 꼴사납습니다.
대가들이 그린 그림을 보기만 해도 즐겁고 감격하기에 여념이 없어야 합니다. 이와마찬가지로 교회란 오직 하나님이 하신 일에 감탄하고 고마워하기 위해 모인 곳입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순전히 하나님 홀로 행하신다면 과연 우리하고 상관없는 일일까요? 하나님에게는 놀랍게도 ‘신의 아들’이 계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신의 아들’이 세상에 와서 유월절을 완성해야 우리들이 구원이 혜택을 입는다고 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일을 이처럼 번거럽게 하시는 걸까요? 그것은 이 세상 사람 전부가 다 구원될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유월절 이야기는 옛날 애굽 나라에서 애굽 나라 사람들과 함께 살았던 히브리인들을 겨냥한 절기입니다.
이 유월절 이야기는 “깨어라”는 예수님의 언급이 있고 난 뒤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즉 예수님의 유월절은 모든 인간을 위함이 아니라 옛날처럼 구원받기로 된 자들이 누구인지를 찾아내는 식으로 내뱉은 말씀입니다.
“깬다”는 말은 전에 알고 있는 바가 체험으로 반복적으로 깨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뭔가 들은 적이 있어야 “깨어라”가 성립하는 법입니다. 결국 유월절이란 이 “깨어라”고 외칠 그 대상에 위해 예비된 절기입니다. 여기서 애굽인과 히브리인이 예리하게 분리됩니다. 그 배후에는 인간들이 아무리 해도 경험해 보지 못하는 특별한 죽음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있을 수 없는 특수한 죽음 말입니다.
지난 시간의 본문이었던 마가복음 13:34-35에 보면,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 닭 울 때일는지, 새벽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이 집의 종들은 이미 전에 주인과 살아본 경험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주인이 부재 중입니다. 이런 환경에서, 마치 자신들이 처음부터 홀로 사는 것이 옳다는 식으로 산다면 이는 주인이 들어닥치는 날 멸망한다는 겁니다. 따라서 유월절에 관한 예수님의 이야기도 전에 히브리인들과 유월절 의식에 참여하는 것과 같은 오로지 자기 백성들만을 깨우기 위한 말씀입니다.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약속을 언질로 들어적이 있느냐를 묻고 있습니다. 지금 유대인들은 유월절 어린양의 덕분으로 얻어진 땅 위에 그들은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진정 유월절 의미를 모르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그들을 보시고 “깨어나라”고 하시는 겁니다. 사전에 주신 약속이 당연히 있습니다.
이 약속의 의미를 말해주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히브리인들을 애굽인이 사는 곳으로 머물게 하신 것입니다. 이 유월절의 의미를 위하여 그들 히브리인들도 있어야 하고 애굽인들도 있어야 했습니다. 히브리인들은 애굽에서 확장되어 급기에 그 애굽 땅 박차고 나가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10:1-3에서, 홍해 바다를 건너는 역사적 사건을 사도 바울은 ‘세례 받음’이라는 인간에게 일어나는 영적 실재 사건으로 이해합니다.
즉 역사 사건만 기억하고 내용은 빼먹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홍해란 애굽인이 봐서는 ‘세상 끝’입니다. 홍해 너머란 죽음의 세계입니다.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요 들어가서는 안 되는 곳입니다. 바로 거기로 하나님은 히브리인들을 몰아넣으시면서 애굽인과 차별화 시키십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바다란 땅의 끝자락을 말합니다. 사람이 못살고 못들어가도록 막는 경계선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선택받은 집단을 그 죽음의 문을 통과시키고서는 곧장 광야가 전개되도록 하십니다. 이 광야입니다. 한번 죽음이 아니라 연속으로 인간을 죽이는 곳입니다. 이 세상이 광야이기에 이 세상은 곧 사람을 살리는 장치가 아니라 죽이기 위한 장치입니다. 곧 ‘불가능한 세계’였습니다. 이 불가능함이 진정 애굽인과 히브리인을 갈라놓습니다. 애굽인들은 불가능함을 모르는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반면에 히브리인들은 ‘불가능함’을 맛본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오늘날 성도들은 바로 이 ‘불가능함’이 존재를 체험하기 위해 깨어나라는 말씀입니다.
이 광야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늘 불가능함으로 변모됩니다. 물도 없습니다. 양식도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계속 인도받는 곳입니다. 이 광야가 왜 이래야 합니까? 그곳은 ‘어린양’의 세계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인간의 가능함을 추구하던 애굽은 멀러 떨어져 나갔습니다. 사람이 바다 속에서 살아나온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 불가능함이 계속 유지되고 살아있는 곳이 이 광야입니다.
오늘날 성도에게도 이 세상은 광야합니다. 따라서 성도는 곧 은혜 덩어리가 됩니다. 모든 주변과 자신의 몸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기적으로 이해되기 시작합니다. 전에는 자신의 노동으로 모든 불가능함이 가능함으로 바뀌었다면 이 광야에서는 모든 것이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살아있다는 것은 이 자체로서 기적이요 은혜덩어리임이 드러납니다.
사람이 가능함을 유지하게 되면 그것이 자기 소유화가 됩니다. 이 소유성이 있는 곳에는 마귀가 찾아듭니다. 그리고 가능함으로 불가능함을 따내라고 참으로 힘든 시도를 하게 합니다. 이로서 인간들은 자꾸만 자기에게 집착하게 됩니다. 자신의 가능함에만 의지하니 감사 대신 불만만 가득할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한계요 죄입니다. 왜 유월절을 예수님 홀로 달성해야 합니까? 인간에게 이런 불가능함이 있음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오로지 예수님 단독 작업의 혜택으로 구원받는 사실을 영원히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우리교회
09-10-20 15:55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마가복음-2008/69강-막14장1(유월절)-mar090705.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