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 뼈들 앞의 에스겔
마른 뼈들 앞의 에스겔
이름 : 조규현(IP:118.34.215.156)
설교할 수 있는 위치에 서 있는 저를 포함해서
설교자란 마른 뼈들 앞의 에스겔.
겔 37:3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1. 하나님의 말씀을, 복음을
2. 대언하는, 있는 그대로(나름대로 해석해서가 아니라) 전하는, 전달할 뿐
복음을 믿고 자시고의 문제는 설교자에게 달린 게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린 것.
내 설교듣고 변화? 내가 설교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
맞는 자세인가요?
유년부 전도사로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고 또 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참으로 어렵네요..
너무나 연약하고 부끄럽고 죄송스럽습니다.. 아이들에게, 하나님께
이근호(IP:117.♡.145.62)
09-07-04 17:35
1. 설교란, 설교자 내부 전쟁이 밖으로 터져 나온 것이기에 설교자 스스로가 자기 설교를 못마땅해하고 미워하고 비난하고 흉 봐야 하며, 그렇게 흉 보는 그 설교자 자신의 태도에 대해서 본인이 증거한 설교 내용 자체가 "그러니까 너는 죄인 맞다"는 식으로 전개되어야 할 것입니다.
설교자가 설교를 통해서 자기 내부 전쟁에 정신을 팔고 있어야 청중들의 차가운 반응에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자기 설교에 대해서 아주 혹독하면, 타인이 자기 설교를 무시하는 것 때문에 낙담하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설교자는 설교 내용을 통해서 설교자 자신을 죄인으로 몰아넣은 혹독한 내용이 필히 담겨야 합니다. 그래서 설교는 하나님께서 설교자를 사람 취급하지 않고 잔인하게 뭉개버리는 그 능력으로만 채워져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설교를 통한 하나님의 ‘설교자 죽임 사태’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설교나 사도들의 설교나 선지자들의 예언의 특징이 바로 이러합니다. 하나님께서 설교자를 그 자신의 설교를 통해서 뭉개지 아니하면 그 설교자는 자기 소유성에서 벗어날 수가 없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교주로 가는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는 바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설교자 본인의 설교를 통해서 설교자를 치지 아니하면 설교자도 죄인이기에 필히 자신의 신학이나 설교 용어 뒤로 자아를 숨기기 십상입니다. 이런 식으로 선지자를 하나님께서 치시기에 선지자는 그 어떠한 환란 속에서도 ‘복음의 광채’ 앞에서 자아를 잊을 수가 있었습니다.
2. 유년부 아이들은 태어나면서 '선악지식 체제'를 갖고 태어나기에 '예수님 믿기'도 '예수님 믿는 것'이 선한 일이기에 믿을게요 라는 입장을 갖게 됩니다. 즉 예수 믿으면 선한 일이요 예수 안 믿으면 악한 일이기에 나는 선한 일이라는 선택하고 악한 일은 선택 안할래요 하는 것으로 예수 믿는다고 주장하게 됩니다. 따라서 이러한 율법의 몽학선생적인 기능을 앞장 세우면서, 아이들의 실생활과 이러한 고백의 차이와 모순점을 제시해주는 것이 좋습니다. 선학 체제의 한계를 복음적으로 깨어주면서 설교를 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애야, 엄마 아빠가 교회에 안 나오고도 네 혼자 교회 나올 수 있느냐?"를 묻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아이들은 어른들이 선한 일이라고 지시하는 것을 아이들 내부의 선악의식이 호응하는 식으로 어른의 세계에 합류하려는 의도에 문제점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선악을 가르치는 부모 자리에 선과 악보다 은혜를 그저 주시는 예수님을 자리잡도록 설교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아이들에게나 처음 교회 다니는 사람에게 보여줄 수 있는 '예수님 증거'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