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무엇을 보고 있는가
[일반] 무엇을 보고 있는가
이름 : 강구만(IP:118.41.241.83)
나의 죽음보다 더 생생한 현실은
하나님의 아들이 죽었다는 현실 입니다.
나로 부터 출발하는
내가 중심이 되는
내가 만들어낸 현실은
'피' 앞에서 가상일 뿐입니다.
주께서 인정하지 않는 것은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 외에
알지 않기로 했습니다.
김대식
09-07-03 12:28
은사와 성령은 종말의 구조를 말하고 있지, 인간의 개혁실천이나 교회꾸미기를 용납치 않는다
09-06-27 15:34 김대식
인간은 은혜가 뭔지 모르기 때문에 은혜를 조작해 내고있다. 인위적으로 말이다.
그것도 항상 은혜를 더욱더 은혜 답게 해야한다는 달콤한 미혹의 말로써 말이다.
그러나 은혜란 인간에 의해서 은혜가 더욱 더 은혜 답게 되는 은혜는 없다.
오히려 그런 것은 인간의 장난질이요 이벤트 페스티발일 뿐이다.
그래서 성화론자들은 구원을 자꾸 자기 탐욕으로 승화 시킨다.
그리고 신앙을 자꾸 계급 나누듯이 초보냐 성숙이냐 라고 나눈다.
왜냐 그짖 말고는 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철딱서니 없는 자들을 위해 이렇게 성숙한 수고를 했봤겠니?
성화되고자 아픔을 겪어 봤겠니?
교회를 맨손으로 세워 봤겠니?
그것 내세우기 바쁘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반대다 자신의 약함을 자랑한다)
(고후 12:9, 개역)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고후 11:19, 개역) 『너희는 지혜로운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용납하는구나』
(고후 11:20, 개역) 『누가 너희로 종을 삼거나 잡아 먹거나 사로잡거나 자고하다 하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
(고후 11:21, 개역) 『우리가 약한 것 같이 내가 욕되게 말하노라 그러나 누가 무슨 일에 담대하면 어리석은 말이나마 나도 담대하리라』
(고후 11:22, 개역) 『저희가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아브라함의 씨냐 나도 그러하며』
(고후 11:23, 개역)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고후 11:24, 개역)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고후 11:25, 개역)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고후 11:26, 개역)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고후 11:27, 개역)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고후 11:28, 개역)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고후 11:29, 개역)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
(고후 11:30, 개역)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그래서 직분으로 협박 공갈을 친다. 너 어느 정로도 성화 되었어? 나 보다 크냐? 나 보다 지식 많이 아냐? 나 보다 더 개혁적인 실천을 많이 했냐? 라고만 따질 뿐이다.
초보자를 붙여주시고 성숙 된자를 붙여주시는 이유는
복음을 위한 것이다. (처음자리 되돌리는 성령의 일 곧 십자가의 죽음에 접붙이심이다.)
초보자도 붙여주신 주님께 감사로, 성숙된자를 붙여주신 것은 주님께 감사케 하기 위함이다. 도리어 이용가치를 따지면서 삼키고자 입맛을 다시고 있다.어디에도 인간에게 향하는 법은 없다.
그런데 인간들은 계급에 관심이 있다.
그래서 자연 스럽게 남을 의식하게 되고 타인의 눈치를 보면서 신앙케 하는 것이
인간들이 조작해 내는 성경이다.
베데스다의 사건이 바로 그런 인간들의 조작성을 잘 보여준다.
요 5장의 사건은 낫고파 하는 자들이 고침을 받을 수 있는 자기쪽에서의 출발의 한계성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자기보다 좀 더 나은자들이 고침을 받을 가능성이 더 있다.
바로 이것은 인간의 고침 받음이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뜻이다.
기적 따위나 그 당시의 예루살렘 중심의 모든 장치들(제사장이라든지, 성전, 율법, 등등의 장치들)이 사람을 더욱더 위선적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고침 받고자 하는 목적이 빨리 나아서 심판과 저주를 받은 인생이 아니다 라는 남들로부터의 시선을 피하기 위함으로 남에게 양보할 수 조차 없다. 내가 먼저 일 뿐이다.
이런 사고방식에 젖어 있는 그야말로 마귀에게 전부 물린자들 속에 예수님이 뛰어드심으로써
비로소 심판이 뭔가를 보여주신다.
심판과 저주를 자기쪽에서 벗어날 인간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누가 심판자인가? 그 심판자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자는 고침을 받아봤자 소용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성화론자들은 거꾸로 해석을 하고 있고
도리어 계급으로 나누면서 히브리서를 동원해서 또 다시 사기를 치고 있다.
(히 6:4, 개역)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히 6:5, 개역)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히 6:6, 개역)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흔히 이 말씀을 인용하면서 많은 삯꾼 목자들이 교인들을 협박 공갈칠 때 사용하는 구절이다.
십자가(심판)가 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처음부터 그들은 그런 역할을 맡았기에 처음부터 지독한 미움을 받은 버림 받은자들이다.
즉 그렇기에 그들이 스스로 타락 할 수가 없다.
위의 예는 사울을 보면 알수 있다.
사울이 다윗 덕분에 은사도 맛보고 성령도 참예한 바 된다.
그러나 그것이 처음 창세전의 결정을 바꿀수가 없다.
도리어 그런 체험들이 다윗을 더욱더 미움을 부추기게 하는 은사요 성령체험인 것이다.
그래서 이런 속담도 있다고 한다.
과연 사울도 선지자에 속하느냐 라고 말이다. 왜?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 되었기에 말이다.
(삼상 10:10, 개역) 『그들이 산에 이를 때에 선지자의 무리가 그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신이 사울에게 크게 임하므로 그가 그들 중에서 예언을 하니』
(삼상 10:11, 개역) 『전에 사울을 알던 모든 사람이 사울의 선지자들과 함께 예언함을 보고 서로 이르되 기스의 아들의 당한 일이 무엇이뇨 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있느냐 하고』
(삼상 10:12, 개역) 『그곳의 어떤 사람은 말하여 이르되 그들의 아비가 누구냐 한지라 그러므로 속담이 되어 가로되 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있느냐 하더라』
이것은 계시록에 나타난 짐승과 결합한 여자도 해당 된다. 제사장 딸이니까 하나님에 대해서 누구보다더 더 잘 안다는 것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거짓선지자들은 스스로 거짓 선지자가 될 수 없다.
종말때에 영이 부어지는데 악령과 성령이 부어짐으로써 각자의 그릇의 역할을 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초보 라는 해석의 문제가 아니라. 종말의 의미를 못보기에 몰라서 헛소리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화론자들과 개혁주의자들의 해석의 관점은 결국 인간이 하기 나름이다 라는 인간의 숙제에 두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울에게 씌여진 진노의 그릇 역할을 담당해야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은사도 영의 일도 다 그렇게 진행이 된다.
왜? 종말이니까. 언약을 드러내기 위해서 말이다.
인간들은 소유할 수 있는 은사가 아닌 종말의 구조를 말하기 위해서
하기 싫어도 해야만 하는 그 역할을 수행하도록 되어 있다.
약속이 미래에서 땡기기 때문에 한 쪽은 천국에서
한쪽은 지옥에서 땡기기에 그 열매를 내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