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대구강의07(교회를넘어서)15-그리스도의몸으로서의교회2
05대구강의07(교회를넘어서)15-그리스도의몸으로서의교회2
이름 : 구득영(IP:203.223.97.192)
[05 대구강의 7] - 교회를 넘어서 15 -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2
05,05,23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목자를 치면 양떼들이 흩어진다 !!
오늘은 일단 교재 276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목자를 치면 양떼들이 흩어진다' 라는 예언의 말씀도 다 새 언약의 달성을 위함이다(마 26:31).
(마 26:31)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이 예언의 말씀이 이루어지려면 일단 목자가 등장해야 되고, 그 다음에는 그 목자에 의해서 뽑혀서 나온 양떼들이 있어야 하고, 그리고 나서는 어떤 외부세력이 그 목자를 쳐야 되고, 그 다음은 마지막으로 그렇게 목자를 침으로서 양떼들이 도망을 가야 한다는 말이다.
◈ 모든 것을 하나님이 준비하시는데 !!
그렇다면 이 4가지 요소를 누가 장만하는가? 그것은 하나님 쪽에서 다 알아서 준비를 하셔서, 이러한 정경을 유발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빨간색이 필요하고, 노란색이 필요하고, 초록색이 필요하고, 그리고 흰색이 필요하다면, 그 4가지 색깔의 크레파스를 누가 준비하는고 하니, 하나님 쪽에서 모두 마련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볼 때, 성도가 이 세상을 보는 현실이 얼마나 든든하냐 하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굉장히 든든한데, 바로 이러한 사실을 기록한 것이 마태이고, 또한 예수님의 제자들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 당시의 현실을 살았던지, 아니면 오늘 21세를 살았던지 상관이 없이, 마음이 굉장히 든든하고 또한 대범하게 살았다는 것이다.
◈ 그들의 빈정거림이 과연 필요한가?
아마 다른 사람들 같으면 다음과 같이 꾸중을 할 수도 있을 텐데, 즉 "당신은 현실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에만 매달려서 종속되어 있는가?" 라고 말이다. 철학자들이나 절에 있는 중들의 경우에 뭐라고 하겠는가? 신이 주신 자율성을 생각해야지, 신이 주신 그 딱딱한 문자에다 목을 매고 살아갈 필요가 뭐가 있느냐고 빈정거리지 싶은데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빈정거림이 오늘날 우리에게 과연 필요하겠는가? 그렇게 빈정거리는 사람들이 말이다. 즉 "'성경' 이라고 하는 옛날 고전에 지나지 않은, 그야말로 시대에 뒤떨어진 그런 동화와도 같은 이야기에 목숨을 거는가?" 라고 하는, 그런 종류의 인간들이 과연 이 시대의 우리에게 필요하냐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은 그런 인간들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보는데, 그래서 예수님은 뭐라고 하셨는가? "마지막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 라고, 이 시대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교회에 간다고 해서 지나게나 다 믿음이 있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 말씀자체에 완전히 돌아버려야 !!
그러므로 믿음이 있다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말씀자체에 완전히 돌아버려야 하는데, 심지어 말씀에 매여있는 본인조차도 자기가 미쳤다고 여길 정도로 말이다. 지금 자기 자신도 도대체 자기가 그 무슨 꿈을 꾸고 있는지, 도대체 왜 그렇게 해야하는지 의아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모두들 의아해 하는 표정들인데, 아닌가?
다시 말해서, 그렇게 때로는 말씀에 대한 과도한 믿음으로 인하여 본인이 불안감을 느낄 정도가 되어야만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런 불안감이 조성되는 가운데, 과연 성경말씀이 엉터리인지 아닌지를, 그것을 스스로에게 자문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도들은 이 세상적인 관점에서는 전혀 유명 인사들이 아닌데, 종교계에 종사하는 평범한 인사들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사도들을 어떻게 여기시는가? "목자를 치면 양떼들이 흩어진다" 라는 것을 당연한 것처럼 믿었던 사도들의 길을 감히 우리가 걸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제자들의 스승을 위한 순교 결의도, 닭 울음조차도 넘기지를 못하고 세속의 선을 넘지를 못했다. 닭 울음 이후에는 주위에 아무도 없이 예수님이 하나님과 홀로 있는 시간이었다.
◈ 닭이 운다 ??
이것을 지난번에 '묵시와 역사'를 하기 전에 설명을 했지 싶은데, 이렇게 "닭이 운다" 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베드로는 닭이 울지 않는 것도 경험을 했고, 닭이 우는 것도 경험을 했는데, 그렇다면 닭이 우는 것과 울지 않는 것의 차이점이 무엇이냐는 말이다.
닭이 울지 않을 때는 베드로는 본인이 세속에 있으면서도 마치 자기는 순교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으로 착각을 했는데, 즉 자기가 하나님의 일을 대체할 수 있다고 말이다. 그러니 상당히 종교적이고, 또한 인간적인 양심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말이다.
◈ 예수님의 예언된 말씀 덕분에 !!
그렇다고 하면 이러한 세속에서 영적인 세계로 전환시키는 것은 무엇인가? '닭' 인가? 아니면 닭이 운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예언된 말씀' 인가? 당연히 예언의 말씀인데, 그렇다면 닭이 울고 난 뒤에는 베드로가 세속적인 자기의 순교결의나 종교적인 열심에 매여있겠는가? 아니면 닭이 울 것이라고 하는 예수님의 예언의 말씀에 매여 살아야 하는가?
닭이 울고 난 뒤에는 베드로는 목숨을 거는데, 어디에 거는고 하니, 순교하겠다고 하는 자기의 결단에 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예언의 말씀에 건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실제로 닭이 울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하면, 닭이 울 것이라고 하는 예수님의 예언의 말씀만 맞아떨어지는가? 아니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다른 모든 말씀들도, 즉 닭이 울기 이전에 하신 말씀과 닭이 울고 난 이후에 하신 말씀도 모두 다 진리의 말씀이라는 말인가? 그 모든 것이 다 진리라는 것이다.
◈ 이제는 말씀에 준해서 새로운 세상을 !!
그렇게 되니 이제 베드로의 입장에서는, 이 세상 사람들이 보는 것처럼 이 세상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예수님이 남기신 말씀에 준해서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되는데, 바로 그것을 자기 배속에서부터 토해내면서 펼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때부터 베드로가 자기 혼자서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수준은 백 날을 해봐야 고기를 잡으러 가는 정도이니 말이다. 끊임없이 주님께서 또 다른 예언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즉 "닭이 울기 전에 니가 나를 부인할 것이다" 라는 말씀이 이루어진 것처럼 말이다. 그런 말씀을 가지고 베드로를 찾아오신다는 것이다. 그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인데, 즉 말씀으로서 성령은 지금도 우리를 찾아오신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렇게 닭이 울고 난 뒤부터는 베드로 자신의 결심, 각오, 행위, 노력 등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는 전혀 무용지물임을 알게 되는데, 그렇게 무용지물이라면 그 뒤에 베드로에게 적용되고, 예수님에게 실시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새로운 조건인데, 거기에는 그 어떤 인간의 조건도 담을 수 없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즉 새 언약에는 그 어떤 인간의 조건도 담을 수가 없다는 이야기이다. 오로지 '내(예수님) 살이며, 내(예수님) 피뿐이다'. 따라서 새 언약 아래에서의 성전은 예수님으로 몸으로만 규정된다.
◈ 새 언약은, 오직 예수님의 살과 피 !!
이렇게 제가 "예수님의 새 언약은 오직 예수님의 살과 피입니다" 라고 하니, 어떤 사람은 오해하기를, "이전에는 말씀을 믿었지만, 그러나 이제는 살과 피를 믿으면 되겠네요" 라고 하는데 말이다. 그러나 제가 말하는 취지는 그게 아니라, 과거에는 말씀을 믿어야 했는데, 이제는 말씀을 믿는 것도 소용이 없고, 예수님의 살과 피가 예수님 쪽에서 우리에게 적용시키는 시대에 돌입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옛 언약은 율법이니 십계명인데, 이렇게 십계명이니 분명 살과 피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 십계명은 그냥 지시사항인데, 즉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지시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예수님이 주신 계명은 살과 피인데, 그러니 이것은 전혀 지시사항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우리의 살과 피가 아닌 예수님의 살과 피라는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십계명을 지키되 살과 피를 통해서 지키라는 의미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이 이렇게 살과 피를 제공했다는 것은, 예수님 쪽에서 살과 피를 우리에게 적용시킨다는 의미이고, 그렇게 해서 지킨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새 언약의 특징인데, 그러니 이 새 언약에는 인간의 행함이 도저히 스며들 수가 없다는 말이다.
◈ 예수님의 살과 피로서 새로운 시대에 !!
사도바울에게 있어서 명령으로 되어있는 모든 말씀들은, 즉 "술에 취하지 말고 성령에 취하라, 분을 품지 말라, 남편 사랑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나이가 들어서 과부가 되었으면 말씀과 기도에 전념하라, 집사들은 단정하고 술에 인박히지 말라, 목사들은 한 여자의 남편이 되라" 등등 말이다.
그러한 명령으로 된 그 모든 말씀들은 그 기초가 어떠한고 하니까, 마치 베드로의 경우에 닭이 우는 것처럼 이제는 새로운 시대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표시한다는 것이다. 그런 새로운 시대에 접어들게 되면 그 기초가 바로 예수님의 살과 피라는 말이다.
그러한 예수님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적용시키는 방식이 무엇인고 하니, 바로 조금 전에 제가 나열한 여러 가지 말씀들의 방식이라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살과 피 속에는, 그러한 하나님의 뜻의 완성이 들어있다는 말이다. 예수님의 살과 피에 말이다.
◈ 새 계명 - 서로 사랑하라 !!
이것을 간추려서 이야기해보면, 이러한 예수님의 살과 피를 요한복음이나 요한일서, 요한계시록에서는 '새 계명' 이라고 하는데, 그런데 그것을 풀이하면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 '사랑'이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즉 "서로 사랑하라. 이는 새 계명이니" 라고 말이다.
(요일 3:23)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이렇게 예수님의 살과 피가 사랑이라고 한다면, 그렇다면 아까 이야기한, 즉 돈을 사랑하면 일만 악의 뿌리라든지,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 알라고 한 것이든지, 모이기를 힘쓰라고 하든지 하는, 그런 여러 가지 명령들이, 거기에는 모두가 다 사랑의 말씀으로 나타나서 그렇게 살과 피를 주신 주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적용시키는 도구가 된다는 것이다.
◈ 예를 들어서 1, 2, 3, 4... !!
예를 들어서,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 알라" 라고 하면, 옛날이라고 하면 "예, 알겠습니다. 제가 지키겠습니다" 라고 하는데, 즉 닭이 울기 전의 베드로 같으면 "제가 목숨을 걸고 지키겠습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옛 언약 시대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딤전 6:7)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딤전 6:8)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 이제는 말씀 자체를 주신 사랑으로 !!
하지만 이제는 새 언약을 담는 도구가 되면 어떻게 되는가? 즉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 알라" 라고 하면, 이제는 "그럼요. 사랑을 받았는데 그것이 무슨 대수이겠습니까? 그것으로 족한 줄 압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말씀을 자기가 지켜야 하는 명령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 자체를 자기에게 주신 사랑으로 받아들인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분을 품지 말라" 라고 해도, "그럼요. 분을 왜 품습니까? 이미 사랑을 받았는데 말입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요한일서 3장 16절에 나오는 "형제에 대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 마땅하다" 라고 해도, "그렇지요. 주님의 사랑을 알았으니, 우리도 그렇게 형제를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당연합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엡 4: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요일 3: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그리고 에베소서 5장에서 "술에 취하지 말고,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라고 해도, "아니, 사랑을 받았는데 어떻게 술에 취합니까? 음주운전을 하면 큰 일이 나는데 말입니다" 라고 하는데, 그런 것이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리고 에베소서 6장에 보면 "아비가 된 자가 자식을 노엽게 하지 말라고" 라고 해도, 주님의 사랑을 받았는데, 자식이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자식을 마구 구박해서 노엽게 할 필요가 뭐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라고 해도, 그것을 감사하게 여긴다는 말이다.
(엡 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엡 6:4)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그리고 갈라디아서 6장 8절에 보면,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라고 하는데, 당연히 주님의 사랑을 받았으니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둘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무슨 문제가 될 것이 있는가?
(갈 6: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그리고 베드로전서 2장에 보면,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이라는 말씀이 있는데, 너무나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베드로전서 2장에도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하나님 앞에 아름답다" 라고 하는데, 이미 사랑을 받은 자는 그런 길을 가는 것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벧후 1:5)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벧후 1: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벧후 1: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벧전 2: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 사랑은, 마치 한 겨울의 폭설과도 같아 !!
이렇게 닭이 울고 난 뒤의 베드로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모든 말씀 자체가 사랑으로 받아들여지는데, 이 사랑은 마치 한 겨울에 오는 엄청난 폭설과도 같은 것인데, 그러니 받으면 기분이 좋다는 것이다. 물론 강원도 사람들은 이것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되겠지만 말이다.
발렌타인데이에 초코렛을 주는데, 이 친구에게도 주고, 저 친구에게도 주고, 그렇게 초코렉을 나누어주면 참으로 고맙게 여기지, "내가 이 초코렛을 먹고 이빨이 상하라는 말인가? 이 나쁜 놈아!" 라고, 그렇게 그 선물을 이해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성경말씀을 보면서, "돈을 사랑하면 일만 악의 뿌리이다" 라고 하면, "내가 이것을 지켜야만 구원을 받는다는 말인가? 이 나쁜 예수야. 돈도 없이 어떻게 살라고. 그리고 먹고 입는 것으로 족한 줄로 알라고 하면, 나보고 거지가 되라는 말인가? 그래도 최소한 나이키 정도는 한번 신고 입어봐야지"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의 말씀이 왜 좋은고 하니까, 사랑을 받지 않은 사람은 화를 내게 되어있고, 사랑을 받은 사람은 그 말씀자체가 굉장히 고맙게 여겨진다는 것이다.
◈ 누가복음 12장에 나오는 부자의 경우에 !!
누가복음 12장에 보면, 어떤 부자가 창고에 곡식이 가득하니 뭐라고 하는가?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라고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사랑을 받은 자 같으면, 예수님이 다른 말을 하기에 앞서서 미리 "아이쿠 이놈아, 하지만 니 영혼을 데리고 어떻게 되겠는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예수님이 뭐라고 하시는가?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서로 딱 맞아떨어지는데, 그런데 사랑을 받지 않고 돈을 사랑하는 자라고 하면, 그런 소리를 들으면 겁이 덜컥 난다는 것이다. "지난번에 탄 곗돈을 어떻게 하지?" 라고 하면서 말이다.
(눅 12: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눅 12: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눅 12: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 당신, 신자가 맞아?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말씀을 하시는 자체가 그 사람으로 하여금 "당신, 신자가 맞아?" 라고 하면서 쑤시는 좋은 도구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목사들이 설교하면서 이러한 점을 놓치면 안 되는데, 목회자도 당연히 같이 쑤셔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쑤심을 당한 사람은 인상에 다 나타나는데, 얼굴에 그만 수심이 가득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신학교 등지에 가서 강의를 하고 나면 반박용 질문이 여기 저기서 등장을 하는데 말이다. 그것은 바로 주님이 주신 진짜 사랑을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시비를 걸고 반발심이 마구 터져 나온다는 것이다. 물론 제대로 열을 받은 사람은 강의도중에 뛰쳐나가지만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그러면 참 교회와 우상의 교회는 무엇이 다른가? 신약시대에 와서는 참 교회는 '없음의 정신'으로 성전을 유지한다. 한 곳에 고정시킨 성전은 없어진 것이다.
(계 21:22) 성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 참된 교회는 '없음의 정신'으로 !!
여기에 보면 "신약시대에 와서는 참 교회는 '없음의 정신'으로 성전을 유지한다" 라고 하는데, 이것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설명을 하고 지나가야 한다는 말이다. 즉 '없음의 정신' 이라고 말이다. 이번에 제 책이 시시울 출판사에 하나 나오는데, 아직 제목은 미정인데 말이다. 거기에 보면 이 표현을 그대로 사용했는데, 교회라고 하는 것은 가위를 가지고 자기 존재를 오려서 버리는 것과도 같다는 것이다.
아마 이런 경우이지 싶은데, 앨범에 자기 출신학교가 수치스럽게 느껴질 때는 그만 자기 사진을 오려낸다는 것이다. 물론 증명사진이 없어서 오리기도 하지만 말이다(ㅋㅋ). 즉 "나는 수준미달인 너희들과는 놀지 않는다" 라는 의미인데 말이다. 또 어떤 특정인이 미울 때도 그의 사진도 오리고 말이다. 그래서 다른 아이들은 다 있는데, 자기만 없다는 것이다. 물론 성질이 더러운 경우지만 말이다.
◈ 죽이시는 하나님 !!
제가 왜 이런 잔인한(?)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예수님께서 새 언약으로 다가오실 때는 우리를 죽여버리는데, 즉 우리를 죽이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당연히 하나님을 우리를 살리시는 하나님이라고 여기지만,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은 자기의 장례식에 가야 실감이 나는데, 사실은 나이가 점점 들고, 몸에 병이 발병하기 시작하면, 사실상 처음부터 우리는 도려냄을 당해야 할 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전도서 7장에 보면 뭐라고 하는가? 결혼식에 가지 말고 장례식에 가라고 하는데, 우리 인생의 본질이 거기에 있으니 말이다.
(전 7:1)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전 7:2)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
우리는 이렇게 숨을 쉬고 있고, 또 모여서 성경공부도 하고 밥도 먹고 등산도 하고 하니 살아있다고 보는데, 그러나 주님이 보시기에는 어떠한가? 사실상 우리 인간은 처음부터 죽은 자로서 이 세상에 출현시켰다는 것이다. 죽은 자로서 말이다.
◈ 교회는, 주님의 분여(分與) !!
그래서 주님은 교체작업을 하시는데, 즉 가위를 가지고 오려내고 구멍을 뚫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다가 무엇을 집어넣는고 하니, 예수님의 '분여'를 넣는다는 것이다. 이 '분여(分與)' 라는 말은 어려운 용어인데, 즉 분배해서 나누어준다는 것이다.
마치 수제비를 만들 때 나누어서 넣은 것처럼, 자기 것을 일부 떼어서 나누어준다는 말이다. 즉 자기 몸의 일부를 떼 내어서 발라놓았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이미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몸의 일부이기 때문에 산 사람이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무엇인가?" 라고 했을 때는, 일단은 구멍을 낸다는 것이다. 그렇게 구멍을 내어서 빈칸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거기에다가 예수님의 분여, 즉 예수님의 몸체의 일부를, 즉 분배물을 그 빈칸에다가 채워 넣는다는 것이다.
◈ 저런, 식인종들이 ??
흔히 교회에서 성찬식을 할 때 뭐라고 하는가? "이것은 예수님의 살과 피입니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그것을 먹은 사람은 예수님의 일부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초대교회시대에 로마인들이 그것을 그렇게 오해를 했는데, "저 놈들은 사람의 살과 피를 실제로 먹고 마신다" 라고 말이다.
하지만 초대교회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떡과 포도주를 나누는 것은, 이미 자기들은 개별적 존재자로 있는 것이 아니라, 물론 개별적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것은 조금 복잡하니 다음 기회에 설명하기로 하고, 그렇게 개별적으로 있는데 손을 잡고 따라가서 보니, 하나로 모이더라는 것이다.
그것을 에베소서 4장에 보면,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요,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라고 하는데, 하지만 사람들이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까, 인간은 이미 타락을 했기 때문에 말이다.
(엡 4:4)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엡 4:5)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엡 4:6) 하나님도 하니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인간이 타락을 하기 이전에는, 즉 아담과 하와가 처음에는 한 몸이었는가? 두 몸이었는가? 당연하게 한 몸이었는데, 자꾸 물으니 시험을 차는 것 같아서 조금은 죄송한데, 하지만 이렇게 묻는다는 것은 주요하니 강조하는 의미라는 것이다.
◈ 우리는 왜 '한 몸'을 느낄 수 없는가?
우리가 타락 이전으로 잠시 돌아가서, 저기 하와가 있는데 그렇다면 아담이 과연 그 하와와 한 몸이라고 느껴지는가? 믿어지는 것이 아니고 느껴지느냐는 말이다. 절대로 느낄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인간은 '대자(對自)' 관계인데, 즉 '타자(他者)' 관계라는 말이다. 그렇게 타자관계가 되려면 반드시 '주체의식'이 있어야 하고, 이 주체의식은 어디서 생기는고 하니, 반드시 타락이 되어야만 생긴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타락이 된 상태에서 주체의식이 생기는 것이고, 이러한 주체의식이 있어야만 '자아(自我)' 라는 것이 있는데, 이 자아가 있어야 타자가 있는 것이고, 그런데 이 타자는 무엇을 제 아무리 해도 여전히 타인이라는 말이다.
◈ 인간은 타인을 몰라 !!
이전에도 그런 강의를 했는데, 인간은 제 아무리 무엇을 해도 자기가 아닌 남을 이해할 수가 없다고 말이다. 그러므로 아내가 남편을 이해하고, 남편이 아내를 이해한다는 것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동상이몽(同床異夢)' 이라는 말도 있는데, 인간은 부부가 서로 한 이부자리에서 함께 자도 꿈은 따로 꾼다는 것이다.
서로가 "왜 당신과 나의 꿈은 다르지?" 라고 다툴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타인이니 말이다. 사실은 타인 정도가 아니라, "그가 보는 내가 있고, 내가 보는 내가 따로 있다" 라는 것이다. 이 둘을 도저히 합칠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타락이전에는 이것이 가능했는데, 제가 이런 말을 하면 "설마 그랬을라구요?" 라고 할지 몰라도, 그것은 우리가 타락을 했기 때문에 '설마' 라고 하는데, 하지만 우리가 타락을 하지 않았다면 한 몸이 될 수가 있다는 것이다.
◈ 이는 내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라 !!
창세기 2장에서 아담이 하와를 보고는 "이는 내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라" 라고 하는데, 그것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 "너는 내 심장 중의 심장이고, 창자 중의 창자이고, 내 허파 중의 허파이다" 라는 말인데, 즉 자기 내부 깊숙이 있는 장기(臟器)라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이해가 되어야, 우리가 예수님과 한 몸이라는 것이 실감이 나는데,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지금 이 땅에 있는데 무슨 한 몸이냐는 것이다.
(창 2:23)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이렇게 아담이 하와를 보고서 "이는 내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라" 라고 하는 것처럼, 예수님도 자기 백성들에게 그렇게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솔로몬을 통해서는 "어여쁜 나의 신부, 나의 누이여" 라고 하셨는데, 그렇게 이제는 서로가 한 몸이라는 것이다.
◈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 !!
그것을 요한복음 14장을 보면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내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라고 하시는데, 그래서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 있다" 라는 것이다. 이것을 타락이전이라고 하면, 아담이 가는 곳에 하와가 있고, 하와가 가는 곳에 아담이 있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하와가 혼자 있을 때 뱀이 와서 유혹을 하는데, 그러니 뱀은 한 몸이 아니라 두 몸인 것을 기정사실화하고 유혹을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와가 바로 그 유혹에 넘어가고 말았기 때문에, 그의 후손들은 우리들은 아담과 하와가 한 몸인 것을 실감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요 14: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요 14: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요 14: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그러므로 그 누구라도 믿음이 없다고 하면, 자기가 예수님과 한 몸인 것을 느끼지 못하는데, 하지만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자기 속에 있는 심장으로, 허파로 여긴다는 말이다. 그것을 성경말씀에 기록된 대로 말하자면, 예수님은 자기의 눈으로, 귀로, 손가락으로, 발가락으로, 그렇게 여기고 간주하신다는 것이다.
◈ '나' 라는 주체를 오려내어야만 !!
이것이 믿는 정도가 아니라 실제로 느껴져야 하는데, 그렇게 되려고 하면 주체의식으로 똘똘 뭉쳐진 자기 자신을 가위로 완전히 오려내어야만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만약에 자기 자신을 오려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가? 자기 자신도 이렇게 있고, 또한 예수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 몸이 아니라 두 몸인데, 즉 예수님은 '타자' 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기가 한 몸이 되려고 예수님에게 부단히 가까이 가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말이다. 즉 자기는 뭔가 항상 시도를 해야 되는 대상으로 남는다는 것이다.
◈ 불교는 인간의 모든 철학을 현실화시켜 !!
그것이 바로 불교인데, 불교는 절대자아를 행하여 부단히 결합을 시도하는 종교인데, 그러니 불교가 철학 중의 철학이고, 철학의 종착역이라는 말이다. 즉 인간의 모든 철학을 현실화시켜놓았다는 말이다. 그래서 불교는 모든 것을 섞는데, 김용옥에 의하면 '기(氣)'로서 그렇게 한다는 말이다. 즉 "내가 분해되면 너가 되고, 너가 분해되면 내가 된다" 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에게 업보가 있으면 그 다음 세상에서는 짐승으로 태어나고, 그것이 해결되면 소로 태어나고(?), 그 다음에는 사람으로 태어난다고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너'와 '나'가 허물허물해지고, 결국에는 하나로 뭉쳐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흙이 그냥 따로 있을 때는 널려진 흙에 불과하지만, 그것을 물을 가지고서 섞어놓으면 하나의 진흙 덩어리가 되듯이 말이다. 이것이 바로 불교가 시도하는 것인데, 즉 절대적인 우주의 대자연과 합일하는 것으로 말이다. 여기서 대자연은 바로 신인데, 즉 신과 합일하는 것이 불교의 최종적인 목표라는 것이다.
◈ 그러나 로마에서 사도바울은?
하지만 로마서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6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하는 이야기가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장사를 지낸 바가 되었고, 그렇게 죽었다가 다시 부활해서 동일한 한 세례를 받았다는 것이다. 이 로마서 6장을 보면서 우리가 기가 찬(?) 것이, 사도바울이 이런 말을 했을 때는 그것을 이해하고 납득을 하는 자가 있기 때문에 쓴 것인데, 물론 성령이 시켜서 썼지만 말이다.
◈ 이미 30년 전에 다 끝난 일인데 ??
사도바울이 이 로마서를 기록할 때가 약 AD 60년경으로 보는데, 그러면 예수님은 언제 죽으셨는가? AD 33년 정도로 본다면, 왜냐하면 예수님이 태어났을 때가 AD 4년경이라고 하니까 말이다. 그러니 30년 뒤에 이 로마서를 기록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30년이나 지난 뒤에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느냐는 것이다. 30년 전에 이미 다 죽고 했는데 말이다.
(롬 6: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롬 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올해가 2001년인데, 2001년이 아닌 2005년이라구요? 요즘 제가 왜 이렇는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2005년도에서 30년을 빼면 1985년인데(ㅋㅋ), 그때가 전두환 정권 때이지 싶은데 말이다. 그때 그만 어떤 사람이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그것을 가지고 지금 2005년도에 와서 뭐라고 하는가? "내가 그때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라고 한다면, 누가 그것을 곧이 듣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산다" 라고 한다면 말이다.
◈ 사도바울 -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된 사람이 있으면 나와봐 !!
도대체 사도바울이 무엇을 믿고 이러한 황당무개한 이야기를 하는가? 그래서 저는 이 로마서 6장의 말씀을 보면서, 물론 다른 성경말씀도 그렇지만 말이다. 저도 이런 황당한 이야기를 하는데, 그래도 우리교회에 사람들이 모인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신기한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물론 그 말씀이 믿어져서 오는지, 아니면 따지려고 오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무슨 웃기는 짜장면도 아니고 말이다.
그것이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라" 라고 하면 사람이 왜 오지 않겠는가? 이웃을 사랑하고 싶어서 환장한 사람들이 많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러한 이웃사랑이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 온유하세요" 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인가? "그리스도와 실제로 장사된 사람이 있으면 나와봐!" 라고 한다는 것이다.
◈ 이제는 성전이 건물이 아니라 !!
제가 교재 276페이지를 보면서 이런 이야기를 끄집어낸 이유가 다 있는데, 지금 성경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계속해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옛날에는 성전이 건물이었는데, 예수님 당시의 헤롯왕 때도 건물이었고 말이다. 그런데 이제는 성전이 건물이 아니라는 말인데, 그러면 인간의 몸인가? 그 육체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몸은 몸인데, 우리 인간의 육체의 몸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도대체 몇 단계가 되는가? 일단은 건축물에서 출발하는데 그것은 아니고, 그리고 몸은 몸인데 육체의 몸도 아니고, 그러면 무엇인가? 부활의 몸인데, 그것을 성전으로 본다는 것이다. 전에도 이야기를 했지만, 성전인지 아닌지는 내용물을 가지고 말하는데, 그 내용물에는 누가 와야 하는고 하니, 마지막 종말에는 종말의 영이 와야 한다는 것이다. 즉 종말의 영인 성령님이 거주해야 성전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가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성전이 아니고, 주인공은 없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이미 자기는 죽고, 자기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말이다. 그렇게 성령이 사는 것을 두고 성전이라고 하는데, 그러니 성전을 규정할 때는 몇 단계를 거처야 한다는 것이다.
◈ 성막은 어떻게 생겼지?
우선은 제일 먼저 거룩한 장소가 있어야 하고, 그 거룩한 장소에 거룩한 인물이 등장해서, 그 인물이 곧 제사장인데 말이다. 그런 거룩한 인물이 등장해서 거룩한 구조물을 세우는데, 즉 성막을 세운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성막 안은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해야 하는데, 먼저 밖에는 제단과 물두멍이 있고, 성소 안에는 분향단이 있어야 하고, 오른 쪽에는 12개의 떡이 놓여있어야 하고, 또한 그 맞은 편에는 가지가 7개인 촛대가 놓여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커튼을 열고 들어가면 언약궤가 놓여있는 지성소가 있어야 하고 말이다. 또한 그것을 밖으로는 양장 열 폭을 가지고 가늘게 꼰 베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로 그룹을 공고히 수를 놓아 만들어서 전체를 덮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위에 다시 수달 가죽으로 덮고 말이다.
◈ 기존 제사장도, 역시 제사장이 아닌데 !!
이것은 제가 지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명령하신 것인데, 그런데 하나님은 직접 자기가 지시를 해놓고는 그것이 아니라고 거부하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성전이 성전이 아니라고 하면 어떻게 되는가? 이것은 문제가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닌데, 거기에 종사는 제사장도 역시나 제사장이 아니라는 말이 되고 말이다.
그리고 제사장이 되기 위한 족보가 있어야 하는데, 즉 과거에 아버지가 제사장일 때 아들에 된다는 것이다. 그런 혈통도 그냥 깨어지고, 그렇게 제사장의 혈통이 깨어지면 나머지 12지파의 모든 혈통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이런 점이 참 어려운데 말이다.
이렇게 레위지파의 혈통이 의미가 없어지고 끊어졌다는 것은, 이 레위지파는 기존의 12지파를 대변하는 지파였는데, 이렇게 레위지파의 혈통이 무의미해지면, 나머지 12지파도 전부가 다 무의미해진다는 것이다. 좀 아는 사람은 "하지만 유다지파가 있지 않습니까?" 라고 할 것인데, 그러나 그 유다지파도 의미가 없는데, 이 유다지파에게 의미를 두는 것은 혈통이 아닌 다른 계통 때문에 그러한데,
◈ 유다지파는 멜기세덱의 혈통을 !!
그렇다면 유다지파는 무슨 계통인가? 멜기세덱의 계통이라는 것이다. 이 멜기세덱은 혈통이 없는, 즉 족보가 없는 혈통이라는 말이다. 원래 혈통은 족보가 생산하는 것인데, 그런데 이 멜기세덱은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그야말로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혈통인데, 무슨 그런 혈통이 다 있느냐고 할지 몰라도, 하늘의 혈통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멜기세덱의 혈통은, 인간의 어떤 육체적인 혈통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주어졌음을 보여주는데, 바로 그러한 증거물로서 등장한 것이 곧 유다지파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유다지파에 속해야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이 유다지파는 그냥 레위지파와 비교함으로서 의미가 생기는데, 즉 "레위지파는 혈통이었는데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라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이제 레위지파는 깨어졌구나" 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나온 것이 곧 유다지파라는 말이다. 굳이 혈통중심으로 보면, 레위지파가 깨어질 때 유다지파도 깨어지는데, 그러니 유다지파는 혈통중심을 이야기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기존 혈통이 아닌 다른 하늘의 혈통이 있음을 증거하라고 유다지파가 있다는 말이다.
◈ '육체'에서 어떻게 '영'으로 넘어가는가?
그러므로 이러한 성전개념을 파악하는데, 이것이 보통 복잡한 문제가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하긴 황우석 박사도 중요한 것은 다 되었고 이제 피크만 남았다고 하는데, 사실 믿기가 좀 힘들지만 말이다. 아무튼 이 성경에서도 피크가 무엇인고 하니까, "육체에서 어떻게 영으로 넘어가는가?" 라는 문제인데, 그것을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넘어가는데 힌트를 주는 것이 바로 '몸 개념' 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 '교회를 넘어서' 라는 책에서는 그 개념을 어떻게 잡았는고 하니, '산 영'과 '살려내는 영'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같이 성경공부를 하면서 느끼는 점이 무엇인고 하니, 성경에는 이렇게 복잡하고 중요한 일들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데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이런 사실들을 모른다는 것이다.
◈ 일종의 교양 쌓기로 '교회 다니기' !!
예를 들어서, 중소기업을 운영하면서 교회에서 회계집사를 맡아서 봉사를 하고 있는데, 바쁘다가보면 외국에 출장도 가고 해서 한 달에 두 번밖에 못 나올 때도 있고 말이다. 그러한 양반에게는 우리가 방금 이야기한 이런 성경말씀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중국에 어떻게 진출을 해야할지, 그런 것을 고민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말씀에 관심도 없는데 구원을 받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지금 한국교회 95%이상이 말씀에 관심이 없는데, 그 원인이 무엇인고 하니, 소위 '육(肉)' 이라고 하는 자기 몸은 그 어떤 경우에라도 포기하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즉 자기를 죽이는 방향으로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살리는 방향으로 중소기업을 운영하는데, 그 중에서 교양과목으로 하나 수강을 하고 있는 것이 '교회 다니기' 라는 말이다. 전공과목도 아니고 말이다. 자기 엄마가 권사였고, 아버지가 장로였으니 교회에 다닌다는 것이다.
그렇게 일종의 교양 쌓기로 다니는데, 그러니 남아있는 것은 무엇인가? 여전히 몸이 남아있는데, 그런데 아까 이 몸을 하나님이 어떻게 하신다고 했는가? 죽인다고 하는 사실을, 그것은 정작 본인이 관속에 들어있을 때는 실감이 나는데, 그러나 관 밖에서 돌아다닐 때는 모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기가 죽고 난 다음에 거래하던 곳에서 조화가 도착하고, 가족들이 오열을 해도 정작 본인은 아는가?
◈ 내 몸은 내가 살린다 !!
평소에 교회도 빼먹으면서 바이어를 만나고 그렇게 사업을 했는데, 또 가족들을 위해서 돈을 번다고 고생도 하고 말이다. 그리고 남자들은 40대에는 고개를 숙인다고 하는데 말이다. 하지만 정작 포기를 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내 몸' 이라는 것이다. 즉 "내 몸은 내가 살린다" 라는 말이다.
하지만 그 양반이 성경말씀을 한번이라도 보았다면, 즉 "자기 몸을 살리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 라는 말씀을 보았다고 하면, 뭔가 자기가 인생을 잘못 살고 있음을 느껴야만 하는데 말이다. 물론 교회에 와도 하나님이 자기를 죽인다고 하는 사실을 설교하는 목사도 없었지만 말이다. 대심방을 다니면서 짬뽕(?)을 먹으면서 "이 기업을 잘 되게 해주세요" 라고 축복이나 던지고 가버리고 마는데 말이다.
◈ 근호야, 니가 죽으면 니 성경지식은?
그러므로 "이 영혼을 데리고 가면 이 재물이 누구의 것이 되겠는가?" 라고 하는, 그렇게 우리를 죽이는 하나님을, 그렇게 늘상 죽이시는 하나님을 말이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공부를 하고 집으로 가다가 모두 다 죽어도 괜찮다는 것이다. 즉 "근호야, 니가 죽으면 니가 알고 있는 성경지식은 누구의 것이 되겠는가?" 라고 묻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그런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우리가 이러한 죽이는 하나님은 만난 것보다 더 큰 행운은 없는데, 항상 우리를 죽이시고, 또한 도려내는 하나님, 그렇다면 우리 지신은 왜 죽어야만 하는가? 그것은 바로 몸 때문에 그러한데, 즉 죽어도 죽어도 죽지 않는 몸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은 "죽어라, 이 놈아!" 라고 하면서 우리를 항상 죽이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그렇게 우리를 죽이고 있는데, 과거에 살아있던 분들도 다들 사라지고, 우리 자신도 다리가 흔들리고, 머리고 희어지고, 또한 얼굴에 이상한 꽃도 피고 말이다. 그렇게 죽어가고 있는데, 바로 주님이 그렇게 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 죽어야만 보이는 몸 !!
물론 우리는 우리의 목을 조르는 하나님을 믿지 않으려고 하는데, 하지만 하나님은 왜 우리의 목을 조르는가? 그것은 우리의 육적인 몸이 죽어야만 영적인 몸이 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죽어야만 눈에도 보이고, 또한 온 몸으로 느낀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자기 죽음을 옷을 벗는 것으로 보았는데, 더러운 옷을 말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하루바삐 그 더럽고 냄새나는 옷을 벗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새 옷으로 갈아입으려고 했는데, 그것이 그의 간절한 소원이라는 것이다.
물론 사도바울에게도 썩어지는 육체가 있지만, 그러나 그 안에는 자기는 죽고 그리스도가 살아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리스도에 걸맞는 그리스도의 새로운 옷을, 즉 하늘의 형상을 입는다는 것이다. 마치 곤충이 허물을 벗듯이 그렇게 벗고싶은 욕망(?)이 있다는 말이다. 그 욕망이 바로 하루바삐 이 세상을 떠나서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물론 사도바울은 지금도 주와 함께 거하지만, 아무튼 그렇게 주님만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것이 기도원에서 기도를 하든지, 또 절에서 도를 닦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닌데, 오직 성령이 임해야만, "야, 내 몸이 정말 내 몸이 아니구나" 라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고후 5: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니라
◈ 이제 '몸'에 대해서 세부적으로 !!
제가 지금까지 몸이 가지고 있는 위상에 대해서 대략적으로 설명했는데, 지금부터는 세부적으로, 논리적으로 정리를 하려고 하는데, 그러니 조금은 힘이 들어도 정신을 집중해달라는 것이다. 아무튼 지금 우리는 하나님이 죽이시는 몸을 지니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저희 아버님이 식사를 하지 못하고 계시는데, 제 아내는 링겔(링거?)라도 맞아서 영양분을 보충하자고 하는데, 하지만 저는 그러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는데, 그런 것을 해봐야 며칠인데 말이다. 과연 그것이 효도이냐는 것이다. 만약에 그렇게 하지 않고 돌아가시면 "아버님, 링겔이라도 맞혀야 했는데" 라고 하면서 후회를 하겠는가?
저는 그것이 마치 더러운 옷을 벗고 있는데, 마치 "아버님, 옷을 벗지 마세요" 라고 하는 것과 같은데 말이다. 아무튼 지금 제 표현이 너무 잔인한지 모르겠는데, 지금 이것이 '안식사(안락사?)'와 비슷한 문제가 되고 마는데, 미필적 고의 살인죄가 될지도 모르고 말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처음부터 더러운 옷을 입으시고 벗는 과정으로서 3년을 보내셨다는 것이다. 로마서 8장 3절에 보면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참 로마서가 아니고 요한복음 8장인데, 요즘 들어서 왜 이런지 모르겠는데 말이다. 하긴 옷 벗을 사람이니 말이다. 아니, 로마서가 맞는데, 그래도 일단 말씀은 보고 옷을 벗자는 말이다(ㅋㅋ).
(롬 8: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 육신의 모양 - 껍데기인가? 정말 육신인가?
아까 닭이 운다고 했는데, 그렇게 하나님은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하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보면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라고 하는데, 여기서 '육신의 모양'이 문제라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여기서 말하는 예수님이 '육신의 모양' 이라는 것이 그냥 폼만 잡은 것인지, 아니면 정말 육신이냐는 말이다. 여기에서부터 삼위일체 논쟁이 시작되는데, 이것이 고대 초대교회의 논쟁거리가 된다는 것이다. 가현체, 즉 껍데기만을, 즉 가면만 썼는지, 이것을 '페리소나' 라고 하는데, 아니면 정말로 육신을 입으셨느냐는 것이다.
여기서 진짜로 육체라고 하면 예수님은 그만 죄가 있는 사람이 되어버리고, 하지만 가현체라고 하면, 예수님은 육신을 걸친 사람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실제로 육신을 가진 적이 없으니까, 요한일서에 의하면 그만 적그리스도가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진실로 사람이 되셨는데, 그런데 마치 폼만 잡은 것처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그리고 디모데후서에 보면, 어떤 사람들은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고 현혹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그렇게 사도바울은 주의를 촉구한 적이 있다는 말이다.
(딤후 2:18) 진리에 관하여는 저희가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하므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
◈ 여호와 증인 - 예수님은 껍데기 ??
그러니 영적인 것을 오해를 해서, 육신을 기준으로 해서 영을 생각하지 않고, 육체를 기준으로 해서 영을 생각하게 되면 문제가 되는데(육신과 육체가 달라??), 그러면 그만 귀신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이것이 여호와 증인의 문제점인데, 즉 그들은 예수님은 한번도 육체가 된 적이 없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냥 천사가(?) 폼만 잡았다는 말이다.
◈ 예수님은 통과맨 ??
그들이 왜 그런 주장을 하는고 하니, 사도행전에 보면 제자들이 모여있는데 문이 분명히 닫혀있었음에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냥 '쑥' 하고 그냥 들어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말이지 육체를 가지고 있었다면 예수님은 그렇게 들어올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문은 나무와 금속으로 되었는데, 이 나무와 금속들은 분자들이 촘촘하게 결합이 되어있어서, 그것은 원자들의 간격이 좁다는 말인데, 그런데 그것을 통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떤 물질이 물질을 통과하려고 하면 그 틈새가 있어야 하는데 말이다.
예를 들어서, 요즘 병원에서 단층촬영이 가능한 것은 레이저가 인간의 물질로 되어있는 그 틈을 통과하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원자에는 양자와 전자가 사이에 틈이 있는데, 그 빈 공간에 에너지장을 발사해서 그 물체의 구조를 밝힌다는 것이다.
◈ 아니, 냉장고 문을 열지 않고 음식을 ??
아무튼 문은 목재로 되어있으니 촘촘한 분자구조인데, 더욱 더 촘촘한 것은 금속이고 말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단백질로 되어있는 몸을 가지고 있는데, 그러니 육신을 가지고는 도저히 문과 같은 물질을 통과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무슨 밀인지 알겠지요? 쉽게 말해서, 우리가 냉장고 문을 열지 않고서는 물건을 꺼낼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화두(話頭)로 뭐라고 하는가? "여기 병 속에 있는 새를 끄집어 내어보아라" 라고 하는데, 병을 깨면 되는데 무슨 고민을 그리 하는지 말이다. 물론 손을 대지 않고 꺼내야 하는데, 그 정답이 무엇인고 하니, "저는 자유입니다" 라고 하면, "그래, 너는 자유이다" 라고 하면서 서로 좋아하는데, 하지만 둘 다 미친놈들이 아니냐는 것이다. 하긴 우리들도 육신을 가지신 예수님이 문을 그냥 통과했다는 것을 믿으니 좀 그렇지만 말이다.
◈ 육체가 아닌 '영체' ??
아무튼 물질과 물질의 만남은 촘촘한 에너지의 간격이 있을 때는 전혀 통과를 하지 못하는데, 그런데 예수님은 분명히 문을 닫아놓았는데 제자들이 있는 곳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육체가 아니라 '영체(靈體)' 라고 하는데 말이다.
그리고 제자들이 엠마오로 가는데, 예수님의 생김새를 이미 제자들이 알고 있는데, 그런데 왜 모르고 있다가 예수님이 암시를 주니 비로소 알게되었느냐는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서로 이야기를 하면서도 모르는가? 함께 밥을 먹으면서 예수님이 알게 해주니 알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마가복음 16장 12절에 보면 '다른 모양'으로 나타나셨다고 하는데 말이다.
(막 16:12) 그 후에 저희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저희에게 나타나시니
◈ 왜 예수님을 몰라보는가?
그러니 이것은 보통 말하는 인간의 육체라고 할 수 없는데, 그런 육체는 보통 이미지가 박히는데 말이다. 해골에 피부가 그 윤곽을 따라서 덮이니 그 인상은 동일한데, 물론 뼈가 바뀌든지 하면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물론 과도한 얼굴이 몰라보게 다이어트로 바뀔 수도 있다는데 말이다(ㅋㅋ).
아무튼 예수님의 그 얼굴이 그대로라면 제자들이 모를 리가 없는데, 그런데도 요한복음 20장에 보면, 예수님이 부활하고 난 다음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여자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왔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는데 알아보았는가? 몰랐다는 것이다. 그냥 동산지기인줄 알았지 말이다.
(요 20:15)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로 알고 가로되 주여 당신이 옮겨 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그러니 예수님의 얼굴이 부활하기 이전의 얼굴이 아니라는 말인데, 그래서 어떤 신학자들은 "예수님이 음식을 먹고 나서 과연 똥을 누었는가?" 라는 것을 가지고 실제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런 육체가 아니니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활하셨다고 하기보다는 다른 몸으로 오신 것이 아닌가?" 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주장을 하니까 다른 쪽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그렇다고 하면 도마에게 보여준 못자국과 창자국은 무엇인가? 그냥 폼인가?" 라고 나온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논쟁을 유발시킨 사고방식, 그것이 바로 인간들 자신의 육체를 기초로 해서 나온 사공방식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몸의 개념에 대해서, 자기 자신의 몸을 기준으로 해서 추정해서 들어가면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사도바울 - 흙에 속한 형상, 하늘에 속한 형상 !!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것을 구분하는데, 즉 흙에 속한 형상과 하늘에 속한 형상으로 말이다. 그러므로 부활은 흙에 속한 형상이 입던 몸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형상을 입는 것을 두고서, 그것을 곧 부활의 몸이라고 보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르다의 오빠인 나사로는 소생한 것인가? 아니면 부활한 것인가? 당연히 소생인데, 왜냐하면 흙에 속한 형상에서 다시 흙에 속한 형상으로 나왔으니 말이다. 그러니 사람들이 나사로를 알아보았다는 것이다. 회당의 딸이 죽었을 때,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는가? "소녀야, 그만 자고 일어나" 라고 했을 때, 그것은 소생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사도행전에 보면 '유도고' 라는 청년이 설교를 듣다가 그만 3층에서 떨어져서 죽었을 때, 사도바울이 그 청년을 살렸는데, 그것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그렇게 다들 살아나서는 어느 정도로 살다가 나이가 들든지 해서 또 다시 죽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주장한 것처럼, 하늘에 속한 형상 쪽으로 부활의 몸을 계산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 하늘에 속한 형상은, 십자가에서 나오는 형상 !!
그렇다고 하면, 이렇게 하늘에 속한 형상이 부활의 몸이라고 하면, 이 하늘에 속한 형상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그것은 바로 다른 곳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렇다고 해서 하늘에 떨어진 것도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로부터 나오는 형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의 십자가로부터 나오는 형상이어야 한다는 말은, 현재 흙에 속해있는 죽음을 기초로 한 형상이 곧 하늘에 속한 형상이라는 말이다. 즉 흙에 속한 형상의 죽음을 토대로 해서 이루어지는 형상이 바로 하늘에 속한 형상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럴 때 작용하는 그 전체의 모습을 두고서 '살려주는 영'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고린도전서 15장에 나오는데, 45절부터 한번 찾아보자.
(고전 15:45)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고전 15:46)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고전 15:47)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고전 15:48)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고전 15:49)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 아담이 '산 영' 인가? '산 육신' 인가?
여기 45절에 보면, 아담을 '산 영'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산 육신' 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런데 이 아담이 언제 영이 된 적이 있었는가? 아담이 귀신인가? 왜 '영' 이라고 하느냐는 말이다. 산 육신도 아니고 산 육체도 아니고 말이다.
혹시 여러분은 여기에 대해서 고민한 적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아담이 엄연히 두 다리를 가지고 있고, 또 하와와 합궁을 해서 아이도 낳았을 것이고 말이다. 분명히 아담은 귀신이 아니라, 실제로 꼬집으면 아프다고 하는 육체를 가지고 있었는데, 또 선악과를 따먹으면 에너지도 발생시키는 세포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아담은 분명 산 육체인데, 그런데 여기 45절에서는 '산 영' 이라 한다는 것이다.
* 질문 - '개핀' 이라는 신학자가 주장하기를, 여기 '영' 이라는 것을, 히브리어 원어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는데, '루아흐', '네페쉬' 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전도서에도 동일한 단어가 나오는데, 그들은 너무 문자에 얽매이는 것 같은데, 그런데 혹시 목사님도 너무 문자에 얽매이는 것이 아닌지, 성경전체를 다 보아야 하는데 말입니다.
조금 전에 제가 말한, 즉 예수님이 고기를 먹으면 똥은 어떻게 되는지, 그런 발상을 모두 동원시켜야 하는데, 결론적으로 말하면 문자에서 나오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문자라는 것이 맞아떨어지면 참 고마운데, 하지만 문자로 보게 되면 성경에서 어느 대목은 맞지만 다른 대목에서는 전혀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다.
◈ 언어는, 그 시대상황을 반영한 것에 불과해 !!
그런 경우가 굉장히 많은데, 물론 일반 교인들은 중소기업을 하고 장사하기에 너무 바빠서 모르지만, 하지만 신학자들끼리는 안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모두 다 통하는 그런 특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