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요리문답공부 31(20030720)
소요리문답공부 31(20030720)
이름 : 오용익(IP:211.194.56.69)
소요리문답공부 제 31강 (이 근호목사, 2003년 7월 20일, 우리교회)
제가 강의한 것을 다시 들어보니까 칠판에 필기하는 동안은 녹음상태가 안 좋아서 잘 안 들려요. 그래서 이제는 장치를 이동하면서 해야 되겠습니다. 오늘은 부활과 심판에 대해서 하겠습니다. 이것을 마지막으로 하고 이것을 하고 난 뒤에 당분간 쉬겠습니다. 심판, 누구든지 재판의 피고가 되기를 대단히 싫어합니다.
자기가 누구에게 고소를 당한다는 사실, 누군가에서 나에게 불만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 공격을 받는다는 것은 매우 피곤한 일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심판할 것 같으면 변명도 할 수 있고 대들 수도 있는데 우리를 만드시고 우리의 모든 일거수일투족을 꽤뚫어보시는 하나님께서 직접 나서셔서 심판을 하신다고 하니까 참 인간으로서는 저항할 수가 없지요.
‘죽었구나’ 라는 감만 듭니다. 그래서 ‘네가 악마에 들렸다’ 하든지 혹은 ‘심판받아야 된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부담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로마서 8장에 보면 ‘누가 너희를 정죄하리요’ 하는 그 말씀이 있거든요. 왜 사람들은 ‘누가 너를 정죄하리요’ 라는 그 말씀은 왜 안 좋아하느냐는 겁니다.
심판한다는 것은 아주 기분 나빠 하면서 마귀에 속했다는 말은 듣기 싫어하고 ‘누가 너를 정죄하리요’ 라는 ‘예수 안에 있는 자는 누구도 정죄할 수 없다’ 는 그 말은 왜 그렇게 안 좋아합니까? 제가 보기에는 아마도 ‘그거야 당연한 것 아닌가’ 라고 하는 것 같아요.
‘내가 세상 착실하게 살았으니까 그거야 당연한 것인데 새삼스럽게 이야기할 것이 뭐가 있나? 나만큼 훌륭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나는 원래부터 그렇게 생각했어. 그것은 당연한 것이고 다만 누군가 나를 지적하는 것은 기분 안 좋다.’ 이런 마음가짐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일줄 압니다.
그러나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심판을 면제시켜준 그 근거가 평소의 우리 잘남을 보고 면제시켜준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다르게 건져주는 방식이 따로 있기에 그 방식, 그 관계에 의해서 구원된 겁니다. 우리가 잘나서 구원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또 다른 방식에 의해서 우리가 건짐을 받았습니다.
그것을 사랑이라고 하는데 이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두고두고 알기 위해서 얼마나 하나님의 심판이 공정하게 이루어지고 양보 없이 이루어지는가를 분명히 알아야 되겠지요. 오늘 문제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제 32과 부활과 심판
제 38문 신자가 부활할 때에 그리스도에게서 무슨 유익을 받습니까?
답) 신자가 부활할 때에 영광중에 다시 살아남을 입어 심판 날에 밝히 인정됨과 죄 없다 하심을 받고 안전히 복을 받아 영원토록 하나님을 흡족하게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 교리문답은 약 1600년경에 생겼는데 그 대상자는 당연히 천국 간다고 알았던 유럽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무엇을 근거로 당연히 천국 간다고 생각했을까요? 그것은 유아세례를 근거로 해서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유아세례’ 란 아버지가 잘 믿은 덕분에 아이도 보너스로 천당 간다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 같으면 애가 열 명인데 그 애들 열 명 몽땅 유아세례를 받았다는 것 때문에 보너스로 천당 간다는 겁니다. 만약에 아버지가 연세 많아서 깜빡 했다고 칩시다. 애 열명중에서 1번, 2번, 죽 나가다가 8번 빼먹고 9번 10번으로 이어졌다면 빼먹은 8번 아이는 아버지의 건망증으로 인해서 지옥 가는 수가 생길 수 있습니다.
자식들이 하도 많다 보니까 저애가 그 애인지 이 애가 그 애인지 분간이 안 될 때가 있잖아요. 자녀가 많은 집은 이전에 우리 집도 그런 경우가 많았는데 어머니가 애들이 어디를 간다든지 도시락을 싼다든지 할 때 늘 한두 식구 것이 빠집니다. 하도 식구가 많다 보니까 지금 누군가가 기분상 빠지기는 빠졌는데 누가 빠졌는지를 잘 모르는 거예요.
나중에 나타나서 ‘밥 줘’ 하면 ‘밥 다 먹었다’ 그러죠. 그러면 울어 퍼대죠. ‘너, 어디 있다가 이제 오나?’ 하죠. 저는 밥을 빼먹는 일이 전혀 없었는데 특히 잘난 체 하는 삼촌같은 경우에는 잘난 체 하다가 그 중요한 밥 먹는 일을 빼먹기도 했지요. 고모들은 부엌에서 먹을 만한 맛있는 것은 미리 미리 다 챙겨먹기 때문에 그런 일이 없었고요.
아버지 하나 잘 만나서 자녀들이 다 천당 가는 거죠. 그때는 걱정 없이 마음 놓고 애를 낳는 겁니다. 유아세례가 애 낳는 것을 정당화 하는 셈이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페스트라는 무서운 유행병이 있어서 많이 낳아도 반타작 하면 잘한다는 식이었는데, 세례 받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예수님의 부활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것이 어려워요. ‘…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라고 묻기는 그렇게 물었는데, 인간으로서는 유익이라고 묻는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부활이란 그 이전에 ‘다 죽인다’가 전제로 된 상태에서 부활입니다. 다 죽이고 부활할 인간만 따로 건지겠다는 거죠. 물론 여기서 저주의 부활은 제외해 두고서 하는 말입니다.
다 죽이고 난 뒤에 영광스러운 부활은 예수님이 원하는 자만 건지겠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성령세례입니다. 영적 세례죠. 그런데 이 교리의 대상자는 날 때부터 유아세례를 받아서 자칭 다 자신이 신자라고 여기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어릴 때부터 세례 받고 아버지의 교육도 그렇게 받아서 ‘이제 신자는 되었고 그렇다면 신자에게 돌아올 유익이 뭐지?’ ‘부활’ ‘아이고 좋아라.’ 이런 식으로 교리문답이 되는 거예요.
교리문답이 불신자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신자 된 사람 잘 관리하는 차원에서 이런 식의 교리 문답서가 만들어 진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번 봅시다. 유아세례라는 것은 아버지가 결정해서 자식들이 받게 하는 것인데 그 자체가, 모든 사람을 죽이고 택한자만 건지는 영적세례와 일치될까요? 떡줄 사람은 생각도 안하고 있는데 김치국부터 마신다는 말이 있잖아요.
로또 산다고 해서 다 당첨되는 것은 아닙니다. 소수만이 당첨되죠. 그래서 ‘부활할 때 어떤 유익이 있습니까?’ 라는 말이 결론적으로 말해서 성립이 안 된다고 봅니다. 인간의 유익을 위해서 부활을 논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신자의 부활은 무엇입니까? 신자의 부활은 ‘나에게 왔던 그 성령이 과연 이런 결과를 낳았구나’ 하고 확인해 주는 거예요.
다시 말하면 부활을 좋아하면 안 된다는 거죠. 부활을 좋아하지 말고 내가 성령을 받아서 예수님을 ‘주’ 라고 시인하게 된 것을 즐거워하라 그 말입니다. 부활을 좋아하면 그것은 너무 이기주의죠. ‘너는 지옥가라. 나는 천당 간다.’ 너무나 이기주의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게 되면 이기주의가 안돼요. ‘성령이 오는데 왜 이기주의가 안 됩니까?’ 성령께서는 부활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알려줍니다.
십자가의 의미가 뭐냐? 절대로 교만치 못하게 만드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너 지옥가지? 나 천당 간다’ 이런 식으로 까불지 못하게 하는 거예요. 진짜 성령이 왔을 때는 ‘너는 어떻게 천당 가는데?’ ‘내가 예수 믿어 줬잖아. 내가 잘났잖아’ 라는 말을 못하게 하는 현상이 벌어진다는 말이죠. 성령이 오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주님께서 책망을 하시게 됩니다.
‘네가 그것이 죄라는 것을 몰랐지. 그것이 죄란다. 그것도 죄란다. 그것도 죄야. 그것이 바로 예수님하고 너하고의 차이점이야’ 라고 죽 책망하는 거예요. 제가 상상으로 생각해 봅니다. 어떤 분이 교회 처음 나와서 예배참석하고 나서 다른 사람 다 집에 가는데 혼자 남아서 엉엉 울면서 ‘주여, 제가 죄인이었습니다. 하나님도 몰라보고 제가 잘난 체 했습니다. 이제 저는 새사람 되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사나 죽으나 하나님을 위해서 살겠습니다’ 했습니다.
그래서 끝나고 절 만나서 ‘목사님, 말씀 감사합니다. 이제는 새사람 되었습니다.’ 그런 분들 더러 만나기도 했거든요. 제가 절대 안 믿습니다. ‘한번 두고 봅시다. 새사람 되겠다고요? 이제는 주를 위해서 살겠다고요? 이제는 유행가도 한곡도 안 부르고 가곡도 안 부르고 오직 가스펠송만 부르고 찬송가만 부르면서 평생 산다고요? 절대 안 믿습니다.’
그거 앞장세워서 안 그런 사람이 더 많기 때문에. 그런데 나중에 가만 보면 요령이 생기죠. ‘아, 세상 것 다 하면서 천당갈수 있구나. 요령껏 하면서도 천당갈수 있다면 요령껏 해도 괜찮겠네. 천당 가면 되었지 내가 얽매일 필요 뭐가 있나?’ 이렇게 요령이 슬슬 생기는 거예요. 그러면 저는 그것을 기뻐합니다.
진작 자기 본성을 드러내지 뭘 엎어지고 콧물 흘리고 ‘주님 위해 살겠노라’ 고 다짐하고 ‘유행가, 오동잎 한 입 두입, 그런 것도 안 부르고 노래방에 가도 찬송가만 부르겠습니다. 내 주를 가까이 ….’ 이런 식으로 하죠. 그래서 성경에 이런 것이 있어요. ‘처음 믿은 사람은 직분 세울 때 좀 조심하라’(딤전 3:6)고 했어요.
처음 믿은 사람은 항상 마귀의 시험에 빠질 수가 있다고 하는데 거기서 말하는 마귀의 시험이 뭔지 알아요? 소위 죄짓는 것이 마귀의 시험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곡해하는 것이 마귀가 하는 짓거리입니다. ‘엎어지고 자빠지고 회개할 때는 구원받은 상태고 거기서 타락하면 지옥 가는 상태다’ 라고 생각하도록 하는 그것이 바로 마귀의 시험입니다.
자기의 감정에 따라서 천당과 지옥이 결정되는 양 하도록 하는 것이 마귀의 시험입니다. 그런 사람 직분 받고 나면 남들 정죄하기 일쑤입니다. 적어도 직분자라면 다른 교인들이 무슨 짓을 해도 웃을 수 있어야 돼요. ‘그거 나도 다 해 본거다. 나도 다 겪어 봤다.’ 그리 되어야 집사도 하는 거예요. ‘거봐, 거봐. 타락했으니까 저게 나오잖아’ 이렇게 나오면 그것 참 교회 문제 크지요.
큰 문제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교회’ 직분자가 몇 명 안 되잖아요. 성령께서 함께 하시게 되면 모든 것을 다 죽은 상태에서 이제는 죄지었다고 하면서 울고 불고 할 것이 아니라 진짜 예수님만이 아무 이유도 없이 그냥 족집게로 딱 집어서 ‘어이, 너 뽑혔어. 당첨되었어’ 하는 식으로 아무 조건도 보지도 않고 그냥 뽑았다는 것을 알려주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부활이란 것은 이미 뽑힌 자이기 때문에 나중에 주님처럼 해같이 빛나게 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거지요. 아무 문제 아닙니다. 그런 사람에 한해서 ‘심판에 이르지 않는다’는 말이 이해가 되는 겁니다. ‘내가 술 먹는다고 지옥가고 죄지었다고 지옥 가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것이 그때서야 비로소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성령도 받지 않은 사람보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라고 하니까 ‘야, 신난다. 내 맘대로 살아도 되겠다’ 하면서 자꾸 자기 쪽으로, 자기 유리한 쪽으로 해석이 되는 겁니다. 심판에 이르지 않는다는 것은 심판이 시답지 않고 시시해서 이르지 않는 것이 아니고 심판이 너무 혹독한데 너무 혹독하기에 예수님께서 십자가로서 미리 앞당겨서 처리해줄 필요가 있었어요.
너무 혹독하기 때문입니다. 전에 이야기했듯이 물 한 방울 안 나오니까 너무나 혹독하지 않습니까? 너무나 지독한 형벌은 자기 백성에게는 안주기 위해서 앞당겨서 십자가 진 것을 성령받은 사람에 한해서만 고맙게 여기는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지신 것을 고마워하는 사람을 보고 ‘너 심판받는다. 네가 아무리 예수 믿어도 나쁜 짓을 하면 저주받는다’는 협박 공갈을 해 봐야 안 통합니다.
통할 리가 있습니까? 그런 협박 공갈이 통하면 안 됩니다. 여기 답변이 “신자가 부활할 때에 영광중에 다시 살아남을 입어 심판 날에 밝히 인정됨과 죄 없다 하심을 받고 안전히 복을 받아 영원토록 하나님을 흡족하게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라고 하는데 아예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기 때문에 심판 없이 그냥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하면서 휴거되어서 주와 함께 영원히 삽니다.
어떤 신앙이 좋다고 하는 분들은 휴거, 공중에서 주를 만난다는 이점에 대해서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바다에서 상어 100마리에게 물려 죽어서 상어 한 마리 한 마리 속에 내 찢긴 몸뚱아리가 조각조각 나뉘었는데 ‘상어들 모여라’ 하고 집합시켜서 다시 조립해서 새로운 몸을 만듭니까? 이미 상어 뱃속에서 소화되어서 똥이 되어 버린 후인데 안 되잖아요.
어떤 분은 화장한다고 하니까 환장하시는 분도 있어요. ‘화장하면 안 돼. 매장해야 돼. 왜냐하면 무덤을 열고 나와야 되기 때문에.’ 내가 보니 그것도 일종의 두려움과 공포에 시달리고 있어요. 심판에 이르지 않는다고 누누이 이야기했고 다 죽이고 선택된 자만을 건진다고 이야기했는데 아직도 무슨 공포가 남아 있는가?
어떤 사람은 비행기를 못타는 사람이 있어요. 죽을까 싶어서죠. 아직도 그런 공포가 있는가. ‘강도한테 칼에 맞아도 부활되는데 왜 죽음에 대한 공포가 아직도 남아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사도행전 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공중으로 올라갑니다. 어떤 분은 저에게 이런 소리 했어요. ‘생각해봐라. 중력의 법칙이 있는데 어떻게 몸이 뜨느냐’ 이 말이죠.
그것 때문에 <과학의 정체>라는 책을 썼는데 그것도 안 읽어보고. 중력이 있는데 어떻게 반중력이 작용해서 뜨느냐 그 말이죠. 참 답답해요. 그것도 안 믿으니까 오병이어도 안 믿고 물위를 걷는 것도 안 믿고. ‘어떻게 꺼냈는데 그 안에 고기가 또 있고 떡이 또 있어서 주고 또 주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그 말이죠.
그러니까 육은 육밖에 모르지요. 영의 세계는 어둡지요. 영의 세계는 성경대로 됩니다. 반드시 부활됩니다. 매장하든 화장하든 관계없이 죽음의 세력 자체를 이기기 때문에, 죽음이라는 세력 속에 있는 자체를 불러내기 때문에, 죽음의 세계 자체를 해체시키기 때문에, 그 안에 있는 자기 영을 통해서 영에 있는 자들은 공중에서 영접됩니다. 그래서 심판에 이르지 않고 영생을 얻게 됩니다.
이로써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을 끝내겠습니다. 잠 오는데 들어주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첨부파일 : 소요리31(030720).hwp (62.0K), Down: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