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요리문답공부 30(20030713)
소요리문답공부 30(20030713)
이름 : 오용익(IP:211.194.56.69)
소요리문답공부 제 30강 (이 근호목사, 2003년 7월 13일, 우리교회)
구원론 하다 보니까 휙 지나가서 이제 30과, 31과 두과만 남겨두고 있습니다. 30과 죽음이 남아 있고 31과 부활과 심판에 대해서 남아 있습니다. 부활과 심판은 우리가 기대하는 것이 뭐냐 그 점에 대해서 내용을 채우는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종교를 가지나 안가지나 누구에게나 실존적인 문제지요.
실존주의라는 어려운 말을 사용했습니다. 실존주의는 사람이 존재하는 것과 돌이 존재하는 이것을 구분하고 싶어 했습니다. 돌이 있는 것은 그냥 돌이 있는 것이고 사람이 있는 것은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고 봤습니다. 그러면 사람은 어떻게 있는가? 헤겔이라는 철학자는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제가 성경을 이야기하면서 왜 헤겔이라는 철학자를 끄집어 냈는가? 우리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서양철학은 동양철학과 다릅니다. 어떤 면에서 다른가? 서양철학은 하나님께서 인간세상을 어떤 법칙과 원리로서 인도하시고 섭리하시는가에 대한 추적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기본적으로 어릴때부터 기독교의 풍토속에서 학문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대학에서 배운 모든 학문이 어디서 흘러들어왔는가? 중세 때 기독교 신학자들에 의해서 고안되고 정리되어 틀이 잡힌 개념들을 그대로 배우기 때문에 기독교신자로서 가질 수밖에 없는 의문점, 호기심들이 정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서양철학은 동양철학과 그런 면에서 다릅니다.
우리는 동양인들이고 서양인들은 신이 어떻게 섭리하는가를 가지고 철학을 했기에 우리는 그들의 철학을 많이 참고를 해야 되겠지요. 헤겔이라는 철학자는 이렇게 보았습니다. 신은 그냥 계시는 것이 아니고 삼위일체로 계신다는 겁니다. 삼위일체는 그냥 계시는 것이 아니고 일하면서 계신다고 해서 ‘기능적삼위일체’라고 합니다.
성부는 그냥 계시는 분입니다. 성령도 중요하지만 성자가 중요한데 성부께서 자기의 내면에서 외부로 자기와 똑같은 거울상을 만들어요. 이것이 거울상인데 자기자신을 외부에 만들어놓고 도로 찾아오는 식으로 인간의 역사를 끌고 간다는 겁니다. 인간은 양탄자와 같은데 어떤 양탄자인가 하면 하나님이 자기것을 내 뱉어 놓고 그것을 회수하는 과정을 인류의 역사로 봤어요.
성부께서 성자를 만드시고 그 성자를 자기에게서 소외(버림)시킵니다.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지요. 이 성자중심에서 나온 세계가 자연세계입니다. 자연세계도 계급이 있어요. 돌멩이도 인간도 다 자연세계인데 이 둘이 어떤 차이가 있는가 하면 돌은 그냥 자기 내면만 있을 뿐이에요. 자기를 외부를 대상으로 해서 인식하는 식으로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라캉이라는 사람이 연구한 바에 의하면 어린애가 6개월 이전에는 자의식이 없어서 자기를 모른다고 합니다. 그런데 6-24개월이 되면 아기는 거울을 보면서 자기자신이라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것을 상징적 단계라고 이야기합니다. 이처럼 인간은 자기바깥의 외면을 통해서 ‘내가 이렇구나’ 라고 자신을 찾는 것이 되고 돌멩이는 그것이 안 됩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하나님보시기에 돌멩이보다 더 아름답다고 합니다. 왜 더 아름다운가? 신의 형상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본 거예요. 이렇게 해결을 봐버리면 기독교 신자가 아닌 아프리카인들, 폴리네시아인들, 뉴질랜드의 마오리족이나 하와이언들은 뒤떨어진 인간이라고 보는 거예요.
따라서 선교를 해야 하는데 선교란 뭐냐? ‘하나님의 형상을 알아야 하는데 하나님의 형상을 몰라서 하나님의 속성을 몰라서 마치 원숭이같은 짐승들이나 길거리에 널부러진 돌멩이같은 하위계급의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먼저 하나님의 놀라운 속성과 비밀을 다 아는 사람들이 가서 그들로 하여금 계몽, 개화 시키는 것이 먼저 복음 아는 사람의 도리다’ 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의 선교사들이 한국에 와서 한국의 유교와 미신이 뒤섞인 생활을 보고 개탄해 하면서 대동강 물에 성경을 집어던지면서 ‘내가 이 민족을 살려야겠다’고 헌신을 다짐하면서 계몽운동에 들어가죠. 계몽의 첫 번째는 교육기관을 세웁니다. 그래서 생긴 것이 계명대학교, 이화학당들입니다. 최근에 계명대학이 누구소유가 되었는지, 교수들끼리 싸우고들 있는데 현재 계명대학교, 동산병원 주변의 터는 다 선교사들의 묘지터가 아닙니까?
무슨 고개 넘어가면 옛날에 문둥병 고치는 병원이 있었는데 그 주변의 수만 평 되는 묘지터가 다 지금 누구의 땅이 되었는지 그 돈 문제로 싸우겠지만 어쨌든 선교사들은 이러한 정신, 하나님보시기에 미개한 민족을 개화, 계몽시켜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 보시기에 자기자신을 제대로 아름답게 보게 하는 작업을 목숨 바쳐서 했던 것입니다.
이런 식의 선교는 외국에서는 그 유행이 한물 지난 선교방식입니다. 아직도 한국 보수주의가운데는 이런 것들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만 지금의 선교방식은 뭐냐? 성령위주의 선교방식입니다. 성부, 성자, 따로 소외된 것을 성부와 성자를 같이 붙이는 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라고 본 겁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성령께서 암탉이 새끼를 품는 것 같이 모든 만물을 품어서 세상을 창조했다는거죠.
성신께서 그렇게 했다면 지금도 성신께서는 전 세계의 어느 민족에게도 은혜를 주시고 품고 있다는 겁니다.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새로운 선교정책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선교정책은 이 사람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것이 아니에요. 개종하든 안하든 관계없이 성령께서 은혜로 그들을 돌보는 사랑이 있다는 겁니다.
다만 문화가 서양의 문화와 그들의 토착문화가 다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못받고 있다고 다만 오해를 했던 것뿐이죠. 문화나 생활방식이나 관습등이 다르다고 해서 그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 아닌 것으로 취급해 버리면 성령의 은사 자체에 도전하는 것이 되기에 그런 식으로는 선교를 하지 말자고 된 겁니다.
그러면 뭐냐? 성령은 신약시대에 보면 예수님의 고통과 아픔의 영이 되었다는 말이죠. 따라서 지금도 이 세상의 많은 민중들은 정치적인 면에서 아픔과 고통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두 번째 경제적인 면에서 아픔과 고통을 겪고 있고 세 번째는 사회적인면, 문화적인 면에서 아픔과 고통을 갖고 있다고 본겁니다.
따라서 이런 보편적인 아픔과 고통이 있으니까 이런 아픔과 고통에서 그들을 해방시켜 주는 것이 그들에 대한 로고스, 하나님의 뜻이라고 보는 겁니다. 그러면 정치적으로 어떻게 하면 되는 겁니까? 운동권 되는거죠. 성령께서는 인간만 은혜로 보는 것이 아니고 모든 자연 생물, 무기물까지 다 은혜로 보니까 여기서 자연 나오는 것이 환경운동입니다.
쓰레기 분리수거, 산에서 함부로 자연을 채취하지 않는 것같은 운동을 하는 겁니다. ‘공장오폐수가 시화호에 들어가서 그 호가 자체적인 정화능력을 잃어서 완전히 파괴될 때 그것이 하나님의 자연을 건방지게 인간이 훼손했다는 그 대가로서 하나님의 분노를 자아내서 많은 기상이변과 재해가 일어난다’고 봅니다.
여기에 해류의 흐름과 바닷물의 온도를 측정합니다. 북극의 빙하가 녹아내리는가 하면 난기류가 발생해서 적도부근에서 폭설이 내린다든지 하는 재앙으로 돌아온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카오스이론 같은 것도 있습니다. 이렇게 정치적으로 하는 겁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데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권세있는 자를 물리치시고 비천한 자를 위한다(눅 1:52)고 하지요.
그렇다면 미군 장갑차는 왜 여중생을 죽이느냐 말이죠. 탱크면 다고 장갑차면 밀어붙이면 다 되느냐? 장난질 치다가 애 죽여 놓고 책임질 인간들은 다 미국으로 빼돌려 버리고. 그래서 미군 장갑차에 희생된 여중생사건이 크게 부각되었잖아요. 이것이 전부 다 신부, 목사, 승려, 할 일없는 백수들과 다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이상한 일로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인류를 성령의 탄식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고상한 행위를 하고 있다고 보는 겁니다. 두 번째는 경제적인 문제죠. 악덕업자 추방하기, 5일 근무제 시행하기, 구조조정 안하기, 파업허용하기 이런 것들입니다. 예전 같으면 목사가 그런 것이 할 일이냐 하는데 목사기 때문에 해야 한다는 거죠. 유기농법, 화학비료 안 쓰고 농사짓기 같은 것.
햄버거 고기조각 하나 만들기 위해서 5천평의 녹초가 사라지는 거죠. 왜냐하면 햄버거에 들어가는 고기재료를 위한 소를 키우기 위해서는 사료생산을 위한 녹초지가 있어야 되는 겁니다. 햄버거 먹고 뱃살 늘어나서 성인병 걸려서 문제, 환경파괴로 인해서 또 문제.
브라질의 열대우림지역은 지구의 심장이라 해서 산소를 공급하는 지역인데 미국은행에 진 빚을 갚기 위해서 매일 축구장 두배 넓이씩 불도우저와 다이너마이트에 날아가는 거예요. 고속도로 뚫고 공장짓고 그 공장에서 각종 해로운 가스가 발생하고 지구온난화현상이 일어나면서 온갖 기상이변, 엘리뇨 같은 현상이 생겨나는데 이런 문제를 다루는 거죠.
그것을 누가 하겠습니까? 택시기사가 하겠습니까? 전기기사가 하겠습니까? 하루종일 그 일에 매진해야 되는데. 놀면서 전체를 다 아는 사람들이 해야 되는데 그게 누굽니까? 목사, 신부, 승려들이 하지요. 시주 받은 것으로 먹고 놀면서 다른 사람들은 무술하고 도닦고 심신 수련하지만 자기는 세 번 절하고 한 발 걷고 그 짓하면서 운동하는 겁니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고난 받은 자가 누구입니까? 북한의 주민들이 아닙니까? 북한에 가서 김정일 설득하고 북한도 우리 동포라고 미국을 설득하고 그 일에 대한 후원금도 받아가면서 또 선교한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문화의 해방입니다. ‘조상제사는 귀신에게 하는 것이다’ 라고 하면 ‘치워라. 조상제사도 하나의 문화다. 그들에게는 그런 것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 그런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자.’
이런 식으로 ‘누구를 구원하고, 누구는 구원안하고가 아니라 세상 전체를 통합적으로 구원하는 이것이 신자의 사명이 아니냐’ 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입니다. 왜 이런 주장이 먹히느냐 하면 오늘날은 전문화 시대이기 때문에 자기 맡은 그 부분의 발전에만 온통 신경을 다 쓰고 있어요. 은행직원은 은행의 고객유치에 온통 신경이 가 있고 카드사 직원은 카드고객확보에만 온통 신경을 쓰고 있다고요.
고등학교 같으면 애들 서울대학 보내는 그것에만 신경을 쓰고 있잖아요. 서로 서로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적인 거죠. 개인주의하고 이기주의하고 또 달라요. 하여튼 이기주의적인 풍토로 인하여 점점 더 자연은 파괴되어 가고 있으니까 결국 자연의 주인이 되신 하나님게서 얼마나 슬퍼하고 탄식하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사명감 가지고 범국가적으로 하죠.
여기서 좀 더 나가면 이런 산업화의 일선에 선 장본인이 누구냐 하면 기존의 자본주의를 표방한 국가 자체입니다. 따라서 국가 자체를 없애는 방법은 국가자체를 무시하고 온 인류가 하나가 되는 무정부주의, NGO(國際非政府機構, Non-Governmental Organization)운동을 합니다.
이것은 다국적 기업이나 국가와 국가끼리 계약을 맺는 것을 반대하고, 지구의 주체인 인민, 민중, 개별인간 자체가 주인이 되어서 인간과 환경을 살리자는 것입니다. NGO나 시민단체들은 국가 위에 자기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전교조에서 요청하는 것도 뭡니까? 이제는 국가를 위한 인재양성을 위한 교육은 이제 그만두고 이제는 실제 교육의 수요자인 가정 위주로 학생위주로 교육정책이 바뀌어야 된다는 것이 아주 좋은, 물론 자기들끼리 좋은 것이지만, 아주 좋은 구호가 되고 있습니다.
이게 전부다 NGO활동과 다 연관되어 있지요. 기존의 기독교의 우리교회중심, 우리교회부흥중심에서 벗어나서 눈을 전 세계로 돌려버리면 이런 선한일이 있고 이런 선한일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자 하는 식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죽음에 대한 해결책이 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겠지요.
여기서 그들이 말하는 죽음이란 개인적인 목숨이 끊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지구상태가 좋지 않은 상태이기에 이 좋지 않은 상태를 포괄적으로 하나님보시기에 죽음이라고 보는 거예요. 보통 교회에서 죽음이란 내 숨이 멎는 것, 두뇌기능이 정지하는 것을 죽음으로 보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들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죽음이란 이런 악한 분위기에 동조해서 거기에 합세할 수 밖에 없는 우리의 타락된 심성 자체를 죽음으로 규정해 놓자’ 는 거죠. 그러면 그 죽음의 반대인 생명이란 뭐냐? 생명이란 죽고 나면 부활하는 것을 생명이라 했는데 그쪽에서는 그렇게 보지 않고 ‘남을 살리는 분위기 자체가 생명운동’ 이라고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기독교로 개정하는 것도 필요 없고, 그게 기독교신자인지 유교신자인지 불교신자인지도 상관두지 않고 어려운자, 가난한자, 억눌린 자, 옥에 갇힌 자, 헐벗은 자 편에 서서 그들을 도와주는 그것이 바로 생명운동이라고 하는 거죠. 제가 방금 길게 이야기를 했는데 여기서 문제점이 뭡니까?
그것을 주장하는 사람이 이 자리에 서도 제가 방금 이야기한 것과 같이 똑같이 이야기 할 수밖에 없어요. 그들이 다 주장한 것들이니까요.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신들이 주장한 문제점이 뭔지 몰라요. 다 옳은 소리 바른 소리고, 오늘날 통합측이니 합동측 주일학교 공과책이 다 이런 내용들로 바뀌었어요. 예를 들어 ‘지구를 살리는 하나님’ 이런 내용들입니다.
옛날하고 많이 달라요. 문제점이 뭡니까? 헤겔의 문제점이 뭡니까? 성경은 하나님 중심이 아니고 예수님 중심입니다. 이것을 몰라요. 그들은 예수님은 하나님 밑에 있다고 보는 거예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일종의 쫄따구처럼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진짜 살아계신 하나님은 하나님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앞장세우고 진짜 하나님 자신은 뒤로 감춘 채 나타나시는 겁니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죽음, 죄가 뭐냐? 간단한 문제에요. 예수 안 믿는 것이 죽은 상태고 죄가 되는 겁니다. 왜? ‘관계 끊어짐’입니다. 아까 이야기한 헤겔식으로 보면 이것은 관계가 끊어진 것이 아니에요. 성령의 은혜를 통해서 관계가 이어진다고 보지요.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관계가 끊어졌다고 본 거예요.
인간이 아무리 환경운동을 하고 아무리 노력 해봐도 이미 그것은 멸망되어야 할 대상에 불과한 겁니다. 불쏘시개에 불과한 거예요. 진짜 사는 것은 예수 믿어야 사는 거예요. 선한 일 한다고 해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으로 출발하면 ‘아예 우리는 처음부터 관계가 끊어졌다. 생명으로 못 간다’ 는 이것이 되는데 예수님으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신이라는 추상적인 존재로부터 출발하니까 예수님은 그냥 중간에 미흡한 것을 보완하기 위해서 끼어든 것밖에 안되고 모든 사람이 예수 믿으나 안 믿으나 다 하나님의 자녀 되는 것이 가능한 식이 되는 거예요.
이것은 바로 불교입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우상적인 하나님관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 드린 것은 여러분이 예수 중심으로 생각한다고 자신하지만 막상 주위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 버리면 ‘아이고, 우리가 너무 좁게 알았구나. 하나님의 큰 일을 모르고 너무 작게만 생각했구나. 맞아. 말은 안해도 절에 가도 천당갈 사람(익명적 그리스도인) 있다. 이웃을 위해서 심장, 허파 떼어주는 사람이 있는데 얼마나 착한가? 신자라고 하는 내가 부끄럽구나. 맞아. 구지 예수 주장할 필요 없이 다 하나님 안에서 한 자녀가 되는거’ 라고 될 수가 있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입니다.
오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첨부파일 : 소요리30(030713).hwp (68.0K), Down: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