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요리문답공부 29(20030706)
소요리문답공부 29(20030706)
이름 : 오용익(IP:211.194.56.69)
소요리문답공부 제 29강 (이 근호목사, 2003년 7월 6일, 우리교회)
구원론 마지막 시간을 맞이했습니다. 마지막시간이기에 정리를 해야겠지요. 구원이란 것은 예정에서부터 흐르는 줄기라고 했습니다. 예정이라는 하나의 저수지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물이 가득 차 있습니다. 예정된 코스대로 뻗어 나옵니다. 예정된 대로만 부르시는 ‘부르심’입니다. ‘부르심’ 앞에 예정이 들어가 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아무나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너는 예정된 자야. 너는 예정되었다는 말이야’ 라고 불러주는 거죠. 그 다음에 ‘거듭남’ 인데 ‘너는 예정된 자라서 거듭났어’ 라고 할 수 있습니다. ‘회개’, ‘너는 예정된 자이기에 너는 회개되었다.’ ‘믿음' '너는 예정된 자이기 때문에 남이 없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칭의’, ‘너는 의인이고 천국갈만한 사람이라는 자격을 부여하기 위해서 예정되었다.’
‘양자’, ‘아들되기로 예정된 아들’입니다. ‘성화’를 ‘거룩’ 이라고 보고 ‘너는 거룩된 자를 만들기 위해서 예정되었다.’ 마지막에 ‘영화(영광스러움)’, ‘영광스러운 사람 되기 위해서 예정되었다.’ 이렇게 보니까 우리가 어떻게 해서 구원되겠다는 것은 일체 허용을 안하지요. 우리가 노력해보겠다든지, 멋지게 살아보겠다든지 할 필요도 없이 예정된 자는 반드시 불러주시고 의롭다 하시고 반드시 영화롭게 하십니다.
반드시 이런 코스를 가게 되어 있다고 로마서 8장에 나와 있습니다. 오늘은 마지막시간, ‘영화(영광스럽다)’를 생각해 보겠는데 이것이 매우 어렵습니다. 현재 우리 몸을 두 가지로 생각해야 됩니다. 하나는 아담에 속한 아담의 몸이 있고 예수님에 속한 예수님의 몸, 두 가지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몸을 ‘교회’라고 합니다.
흔히들 교회라고 하면 ‘당신은 어느 교단 소속입니까?’ 라고 묻는데 예수님은 그렇게 묻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냐?’ 물을 때는 ‘네 머리가 누구냐?’ 이렇게 물어요. ‘내 머리는 내 머리입니다.’ 이러면 안돼요. ‘제 머리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통치하고 우리는 지체로서 움직입니다.’ 그리되면 딩동댕! ‘네가 교회구나’ 라고 되는 겁니다.
교회라는 것은 머리 있고 지체가 있습니다. 에베소서 1장에 보면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엡 1:22,23, 5:23) 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교회냐, 라고 물을 때는 교단, 노회소속을 묻는 것이 아니고 ‘네 머리가 누구냐’를 묻는 것입니다. 그러면 ‘목사가 머리냐?’ 목사가 머리면 예수님은 은퇴해야 되겠지요.
머리라는 말의 뜻은 ‘지시하시는 분, 지배자’ 라는 뜻입니다. 만약에 목사가 머리 같으면 목사가 지배자가 되겠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의 머리가 되신다면 예수님의 지배와 지시에 어긋나는 그 어떠한 세력도 우리는 단호하게 배척을 해야 됩니다. 전부터 있어 왔는데 현재 한국교회를 개혁한다는 명분의 단체들이 여럿 있어요.
그 단체들이 하는 일들을 살펴보면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목사의 임기를 임기제, 또는 계약제로 하자.’ 교수임용계약처럼 계약제로 해서 제대로 못하면 내보내고 장로도 그와같은 계약제로 하자는 겁니다. 그 다음에 ‘목사에게 교육비, 자녀교육비, 사택관리비등 여러 항목을 주는 것을 사례비 하나로 통일해서 잡스런 기금들이 목사의 수입으로 안잡히게 하자. 그래서 교회를 목사의 독재가 아닌 민주적이고 합리적으로 운영되도록 하자.’
그 다음에 ‘교회의 예산은 반드시 얼마간의 비율로 구제비로 책정하고 선교비도 그렇게 하자. 교회 헌금을 재산축적 목적의 건물짓기나 부동산등, 심지어 주식투자같은데 사용하지 말자.’ 그리고 ‘성가대지휘자에게 사례금을 주지 말고 담임교역자와 부교역자의 사례비의 격차를 줄이자.’ 각가지 건전한 제안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거기서 말하는 교회의 머리가 누구냐? 교회머리는 교인들이 됩니다. 교인들이 민주주의 하자는 것인데 민주주의는 다수가 머리가 되는 체제입니다. 그래서 다수의 횡포라는 말도 있는데 다수결에 의해서 모든 것이 결정되기 때문에 진리보다는 다수의 의견이 진리로 통하는 분위기가 되겠지요. 제가 보기에는 성경하고는 안 맞아요.
그쪽에서의 주장을 볼 때 왜 교인들이 그런 정치적이고 행정적인 제안을 하게 되었는가? 그것은 한국의 민중들이 유교적인 인습을 가지고 교회출석을 하더라는 겁니다. 유교적인 인식이란 ‘마치 옛날 왕조시대처럼 나라의 임금에게 충성하듯이 목사에게 충성해야 복이 온다는 사고방식인데 그런 인식이 교인들의 머릿속에 꽉 들어차 있더라’는 말입니다.
‘미국이나 영국이나 프랑스 같은 나라들은 그렇지 않은데 한국은 유교적인 풍토 때문에 그것이 그대로 교회에 확산되어서 교회내의 독재체제로 굳혀졌다’고 보는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건전한 교회를 원하기에 건전하게 교회를 고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라는 논리를 폅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아요. 교회라는 것은 개혁한다고 해서 개혁되는 것이 아니고 교회, 곧 그리스도의 몸은 지배자, 혹은 지시자가 괜찮을 것 같으면 아무 하자가 없어요. 왜냐하면 영생주시는 분, 예정하시고 부르시고 거듭나게 하시고…, 이 모든 일들이 오류 없이 아무 잘못도 없이 진행된다면 역시 그 교회도 그런 민주주의 같은 것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교회가 되는 겁니다.
사람이 수리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그 자체로 완벽한 교회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독재적인 목사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니까 그쪽에서 치리한다느니 어쩌고 한다면, 그러면 거기서 나오면 되지요. 거기서 나가라고 하면 나오면 되고, 나가기 싫으면 목사보고 ‘네가 나가라’ 하면 되고. ‘네가 나가라’ 해서 안 나가면 본인이 나가면 되고.
나가고 안 나가고 가지고 건전한 교회 되고 안 되고를 생각할 필요 없다는 말이죠. 기존의 교회를 자꾸 그리스도의 몸으로 인식을 하니까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데 아예 인식을 안 해버리면 되잖아요. 나가고 안 나가고를 예수님의 지시에 따르자는 말이죠. 예수님께서 거기 더 있으면서 고생하라고 하면 더 있고 ‘이제 할만큼 했으니 그만 나가라’ 고 하면 나오면 되고.
그러한 관계, 주님과의 고리, 사슬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몸의 혜택은 뭐냐? 교회가 그리스도의 지체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몸이 부활체가 되어 버리면 지체도 예수님처럼 영광스럽게 되는데 이것을 가지고 구원론에서 ‘영화’라고 합니다. ‘영화’란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깨끗하게 산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진짜 우리의 신체가 천사처럼 완벽하게 전혀 다른 모습으로 영광스럽게 다른 몸으로 돌변해버리는 것입니다.
이 영광스러움이란 예수님의 부활이전에도 있었습니까? 없습니다. 에녹이 이 지상에서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라갔고, 엘리야도 불수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는데 그것이 영광이 아니겠는가? 그것은 영광이 아닙니다. 영광은 영광의 모델케이스가 되는 예수님의 부활체가 있고 나서 그 다음에 영광스럽게 되는 거예요.
예수님의 부활이 있기 전에는 영광스럽게 되지를 않습니다. 예수님의 영광스러움이란 십자가가 있어야 됩니다. 십자가 다음에 부활 다음에 예수님의 부활체 다음에 교회입니다. 이것을 고린도전서에서는 ‘예수님이 부활의 첫열매’(고전 15:23)라고 했어요. 예수님 부활 이전에도 회당장의 딸 같은 경우에는 죽었다가 살아났어요.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빠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아담의 몸이지 예수님의 몸은 아닙니다. 에녹 같은 경우에는 아담의 몸을 가지고 천국 간 거예요. 자세한 것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영광된 그 몸은 아닙니다. 그걸 볼 때에 예수님의 부활하심이란 첫열매가 되는 거예요.
첫열매라는 것은 열매가 짠, 하고 한꺼번에 열리는 것이 아니고 처음열매가 열리게 되면 이것이 하나의 시발점이 되어서 여기 원, 여기 투, 여기 쓰리…, 이런 식으로 열리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첫열매입니다. 예수님과 같은 몸이 되었다면 예수님과 똑같은 부활체로서 우리가 부활되는 겁니다.
그러면 안죽은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안죽은 사람은 땅에서 예수님 재림하실 때, 그것을 휴거라고 하는데 위에서 당겨서 공중으로 올라가게 되는데 올라가는 순간 몸은 아담의 몸 시절을 끝내버리고 예수님과 더불어 영광스런 몸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왜 영광스런 몸이 되어야 하는가? 하늘의 몸은 인간의 흙의 몸과 함께 있을수가 없어서 그래요.
천사들이 왔을때 인간들이 깜짝 놀란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육체를 가진 인간이 천사를 만나면 죽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천사쪽에서 낮춥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봤는데 그냥 그대로 내려왔습니까? 그냥 그대로 내려오면 사람들은 눈이 부셔서 볼수가 없습니다.
모세의 몸이 영광스럽게 되지도 않았는데 단지 영광스러운 하나님과 함께 있었을 뿐인데 그 영광이 흔적이 여전히 남아서 내려오니까 사람들이 눈이 부셔서 볼 수가 없어서 모세쪽에서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는 조치를 취하고서야 모세와 대화가 될 정도 였습니다. 마치 어떤 샴푸 광고처럼 그 샴푸를 썼을 뿐인데 잡티가 다 날라갔다나 뭐라나 그런 식이죠.
물론 나중에는 그런 흔적도 다 흩어지고 없어졌지만 처음에는 그랬다는 말이죠. 하물며 우리 몸이 주님의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된다면 그 영광스러움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지요. 아픈 것도 없을 것이고 죽는 것도 괴로운 것도 없을 것이고 그 때는 마태복음 13장에 있는 말씀대로 해와같이 빛난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3:41-43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그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그리고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변화될 때 그 때 베드로와 요한과 야곱이 놀랐습니다. 갑자기 예수님께서 해같이 변했어요. 그러니까 그것을 보고 베드로가 너무 좋아서 ‘집에 내려갈 것 뭐 있겠습니까? 여기가 이렇게 좋은데 여기서 초막 셋 짓고 아예 눌러 삽시다’ 라고 했는데 그러면 집에 있는 아내는 어쩌라는 말입니까? 남자들은 주로 그런 모양이죠.
좋은 것이 있으면 푹 빠져서 집안도 안 돌보게 되나 봅니다. 그래서 성경에 ‘자기 집안을 안 돌보는 자는 불신자보다 더 악한자니라’ 라고 하는데 그런 조항이 있다는 것을 남자들은 잘 모르지요. 하여튼 해와 같이 눈부시게 빛이 나서 감히 눈을 들어 쳐다보지도 못하고 베드로가 엎드려서 이야기를 했잖아요. 그것이 바로 부활체고 그 부활체와 같은 몸으로 부활되는 거예요.
그러면 ‘목사님, 저도 그렇게 부활되고 싶습니다’ 라고 하고 싶겠지요. 그런 것은 하등 걱정을 하지들 마세요. 이미 이야기 했잖아요. 그 영광스러움 앞에는 예정이 있다고. 이미 불러준 사람은 마지막 코스가 이 코스로 빠지게 되어 있어요. 결혼식 피로연에서 뷔페로 할 때 ‘밥만 먹었지요? 이제는 끝났습니다.’ 그런 것은 없지요.
밥 먹고, 김밥 먹고, 초밥 먹고, 탕수육, 찜, 야채 …, 마지막에 아이스크림까지 코스가 있다는 말이죠. 그 코스대로 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신랑친구는 밥 먹는데 까지만, 신부 친구는 김밥먹는데 까지만 드세요’ 라고 막지 않는다는 말이죠. 로마서 8장에 있죠. ‘미리 아신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영광스럽게 하셨느니라.’ 붕붕 뜁니다.
로마서 8:29,30
“하나님이 미리 아신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하신다’ 가 아닙니다. ‘할 걸?’ 이것도 아니에요. ‘해줄게’도 아니에요. ‘하셨느니라’입니다. 누가? 성령께서 그렇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여기에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전도하기, 기도하기, 이런 것이 들어갈 자리가 아예 없습니다. 인간의 행함은 여기에 끼어들 이유도 없고 필요도 없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구원론 강의를 하니까 믿는 사람,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야, 이것은 정말 횡재다. 기쁜 소식이구나’ 하면서 좋아합니다. 그런데 그런 분들은 소수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야, 너무 풀어준다. 너무 풀어주는 것이 아닌가? 짐승도 묶어 키우듯이 사람도 어느 정도는 족쇄를 채워야 하는데 너무 풀어주면 혹시 다른 사람들이 저것을 이용해서 더욱더 남에게 해코지 하고 마음껏 죄를 활개치게 할 것이 아닌가’ 하면서 자꾸 남 걱정을 하는데 자기걱정이나 할 것이지 남까지 걱정할 필요가 없는 이유가 있어요.
성경을 보세요. 이미 예정된 자를 부르시고 다 해 준다는데 본인이 이것을 안믿는 거예요. ‘혹시 그렇게 생각하는 분이 계신다면 일어서 보세요’ 라고 했다 칩시다.
‘예. 저 여기 일어섰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절제하고 당신을 관리해서 구원받습니까?’ ‘아니요. 그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당신도 당신이 절제하고 관리하고 스스로 잘해서는 구원될 수 없는 것처럼 남 걱정 할 일 아닙니다. 그 사람도 당신과 똑같은 입장에서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다 해주시는 분이 따로 있다는 것을 왜 당신은 못 믿습니까?’
‘저는 되지만 저 사람은 안 됩니다.’
꼭 이렇게 나옵니다. ‘나는 되지만 최 집사 저 인간은 안 된다니까!’ 안되면 어쩌겠습니까? 저도 군대가서 전방에 배치를 받게 되었어요. 아버님이 6.25 참전용사라 그 덕에 좀 편한데 갈줄 알았는데 아예 고생 많이 하는 곳으로 가고 말았어요. 그런데 거기서 이상하게 고참한테 이끌려서 교회가게 되었어요.
그 전에도 교회는 가 봤지만 ‘이것은 완전히 사기다’ 하면서 ‘안티기독교’ 활동을 많이 했어요. 의지 없는 인간들의 일종의 장난같이 봤어요. 복음도 모를 때니까 ‘안티복음활동’ 이라고는 할 수 없고요.
그런데 군대 가서 예수를 믿고 그 때부터는 순교의 길을 자청했지요. 어떻게 해서든지 순교하고 싶어서 환장을 한 거예요. 군대에서 때리는 빠따 한 대라도 더 맞으려고 하고, 비상걸렸는데 교회 갔다가 탈영병으로 찍히고, 계속 그것만 연구하는 거예요. 아주 재미있대요. 성경에 보니까 성령께서 감당치 못하게 해준다고 해서 그랬지요.
저는 더 오버해서 그런 거예요. 제가 그러한 경험을 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도 그런 시행착오를 겪는 것을 이해를 합니다. 하지만 성령께서 가만 계시면서 노시는 분이 아니잖아요. 그런 시행착오는 안 할거라고 누구도 장담 못해요. 저도 지금도 하고 있고 다 하고 있는데 믿읍시다. 그런 시행착오까지 극복될 줄을 믿읍시다(*).
첨부파일 : 소요리29(030706).hwp (67.0K), Down: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