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상 21:10-15 (다윗의 처신)
삼상 21:10-15 (다윗의 처신)
이름 : 우리교회(IP:220.81.176.169)
본문 : 사무엘상 21장10-15절
제목 : 다윗의 처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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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09-06-28 15:28
다윗의 처신
2009년 6월 28일 본문 말씀: 사무엘상 21:10-15
(삼상 21:10) 『 그 날에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도망하여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가니』
(삼상 21:11, 개정) 『아기스의 신하들이 아기스에게 말하되 이는 그 땅의 왕 다윗이 아니니이까 무리가 춤추며 이 사람의 일을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한지라』
(삼상 21:12, 개정) 『다윗이 이 말을 그의 마음에 두고 가드 왕 아기스를 심히 두려워하여』
(삼상 21:13, 개정) 『그들 앞에서 그의 행동을 변하여 미친 체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리매』
(삼상 21:14, 개정) 『아기스가 그의 신하에게 이르되 너희도 보거니와 이 사람이 미치광이로다 어찌하여 그를 내게로 데려왔느냐』
(삼상 21:15, 개정) 『내게 미치광이가 부족하여서 너희가 이 자를 데려다가 내 앞에서 미친 짓을 하게 하느냐 이 자가 어찌 내 집에 들어오겠느냐 하니라』
전쟁의 영웅에서 졸지에 미친광이로 돌아가는 이 자유, 이 자유는 오직 선택된 자에게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선택받지 못한 자에게는 이런 자유성이 나타날 수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요한복음 1:15에 보면, 세례 요한이라는 분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이 사실로 인하여 요한복음 3:30에서는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고 외칩니다. 세상에 어느 인간이 자진해서 망해야 한다고 우기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런 자유를 나타내는 것은 그가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먼저 계심 분’이 자신에게 딱 들어붙어 세례 요한 자신이 원하는 인생이 아니라 그 분에 의해서 만들어져 가는 인생을 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곧 ‘있음’에서 ‘있음’으로 전개되는 인생을 말하지 않고 ‘없음’에서 나오는 능력으로 그때그때마다 ‘있음’으로 나타나는 삶을 뜻합니다. 인간에게 있어 ‘있음’이란 곧 우상이 되어버립니다. 왜냐하면 ‘있음’에 입각한 사고방식으로 눈에 보이는 세상 평가에 나설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1:1-3에 의하면, 신앙이란 있음을 있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없음에서 있음을 보는 안목이라는 겁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없음’에서 ‘있음’을 해석하려고 한다면 전쟁이 필요합니다. 전쟁이란 있음마저 위태롭게 하고 불안하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다윗은 사울에게 두려움을 느끼고 아기스왕에서 피신합니다. 있음의 세계가 없음에 기초해서 살아가는 선택받은 자를 핍박하는 겁니다.
이럴 때, 다윗은, ‘있음’의 ‘세계’에서 마치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무가치한 ‘없음’으로 분류될 수 밖에 없는 자리로 피신하는데 그것이 바로 ‘미친광이’의 자리입니다. 이로서 그는 무사히 ‘있음’만 인정받는 위험한 세상에서 일시적으로 ‘안식처’를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선택된 자를 이 세상에서 이런 시련을 겪게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창세전에 성부와 성자와 의논했던 그 내용에 대해서 이미 육체가 생겨버린 인간으로서는 알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살아가면서 자기를 둘러싼 사고방식과 전혀 배치되는 내용이 자신의 운명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알게 합니다. 그 예가 바로 이삭의 경우입니다. 이삭은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세상의 축복과 저주를 가름하는 위치에 있음을 압니다.
하지만 그는 오해하기를, 자신이 좋아하는 쪽이 축복의 자리요 자신이 싫어하는 자리가 곧 저주의 자리인 줄 알았습니다. 즉 그는 자기 자신의 이러한 판단이 ‘나 있음’에서 비롯된 판단이지 ‘나 없음’에서 나온 판단이 아님을 아직 몰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식들에게 말하기를 ‘사냥고기’를 별미로 만드는 자식에게 축복을 내릴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순전히 큰 아들인 에서에게 축복 몰아주기를 시도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동생 야곱에게 축복이 돌아가게 하시는데 이는 로마서 9장에 나오는 말씀처럼, 창세 전부터 야곱은 사랑받기로 작정된 자요 에서는 미움받기로 작정된 자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이러한 확정된 하나님의 뜻이 사람의 행위로 방해받지 않음을 확실히 증거해야 하기에 하나님께서는 오류있는 이삭의 본심을 그대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성도로 하여금 자꾸만 ‘있음’에 애착하도록 하십니까? 그것은 인간 자체가 얼마나 어슬프고 자기 밖에 모르고 자신의 완벽함이 곧 하나님믜 일인양 착각하고, 하나님의 복음을 훼방하는지 알게 해서 오로지 예수님에게만 공로와 영광이 돌아가게 하시려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1:18-25에 보면,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 인간들은 이런 성경 구절을 듣게 되면 곧장 ‘있음’의 지적 창고에 집어넣어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또 다시 ‘있음’에서 ‘있음’으로 나아가는 식으로 세상을 살게 됩니다. 즉 ‘하나님 아버지, 저는 십자가 복음을 압니다. 따라서 이 복음을 전하는 교회는 크게 부흥시켜 주옵소서. 그것이 하나님의 일임을 알게 하옵소서“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이삭이 저지른 실수가 같은 실수입니다. ‘없음’의 세계는 ‘있음’의 세계를 파쇄하면서, 난처하게 만들면서 크게 실망시키면서 작동합니다. 믿었던 있음이 새롭게 출현한 사건으로 인하여 없음의 세계로 되돌아가게 됩니다. 전혀 가진게 없게 합니다. 지식이든 재산이든 친한 친구든 모든 것이 사라질 때, 바로 그것이 전에 그가 잘 알았다고 여겼던 그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능력은 ‘있음’의 안목으로 유지되는 세상 사람들 보기에 그렇게 어리석고 미련하게 보일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없음’의 세계에 준해서 성경의 내용들을 보게 되면 교회마저 ‘있음’의 교회가 아니라 그때그때마다 발생되는 교회가 됩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된다”(눅 13:30)는 말씀이 이런 교회관을 말해줍니다. 즉 ‘있음’의 세계에서 붙잡을 수 없는 곳에서 늘 새롭게 교회가 시작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먼저 계신 분을 먼저 생각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우리교회
09-10-20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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