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
설교자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
이름 : 이근호(IP:117.55.145.62)
설교자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
2009-06-27 18:08:52 이름 : 이근호
의존교회 김명현 목사님의 ‘죽다’라는 아주 짧은 글 (“어제까지 살아있었으니 오늘쯤에는 정말 죽고 싶은데 왜 글 쓰는 지금까지 살려져 있는가?”) 속에서 설교자로서 겪는 아픔이 한이 되어 두꺼운 녹처럼 마음 벽에 들어붙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왜 하나님께서는 복음 전하는 자에게 그런 마음의 고통을 안겨주시는 걸까요? 그것은 오직, ‘복음 전달’에 있어 그 어떤 세상적 대가를 기대하지 말하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복음 전달 자체가 하나님께서 받은 상(償)이라고 했습니다. 즉 아무나 이런 상을 받는 것이 아니기에 천사도 부러워할 일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설교자는 교회에 약간이라도 봉사하다보면 어느새 교인들의 세상살이를 닮아가게 됩니다. 처음에는 그들이 가진 것이 부럽다가 더 나아가서는 그들의 생활 태도까지 급기야 부러워지기 시작하게 됩니다. 이것은 복음 전달자 자신부터 하나님이 주신 ‘복음전하는 상’을 무시하게 되는 선을 넘고야 마는 겁니다.
교인들의 세상 생활태도가 어떠합니까? 예수는 받아들인다고 장담하면서도 예수님의 세상을 살아가는 생활방식에 대해서는 질겁하고 혼비백산 하면서 멀리 도망쳐 버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소식이 그들이 접한 겁니다. 즉 예수님께서 하나님 말씀에 모든 것을 걸었다가 십자가에서는 전혀 하나님으로부터 도움 받지 못한 경험을 맛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생명이란 이 십자가 안에만 들어있고 담겨 있는 겁니다. 이 사실을 모르는 교인들은 십자가에서 버림받은 아픔을 두려워해서 미리 머리를 굴립니다. 어떻게요? 아예 하나님께 도움 받을 생각조차 안하는 겁니다. 그 대신 자신이 따로 열심히 버는 그 노동의 대가에 희망을 거는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갑니다.
즉 예수님처럼 하나님 아버지께 믿었다가 실망당하기 보다는 애초부터 생존에 관한 문제에 자신이 알아서 처리하겠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니 교인들이 교회 나오는 이유는 아주 단순해져 버렸습니다. 자기 힘으로 안 되는 내세의 운명에 관한 것, 즉 ‘죽어서 천당 가기’ 사항에만 신의 도움을 청하고 나머지 모든 문제는 절대로 하나님에 도움조차 구하지 않는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러니 교인들이 교회에 헌금을 할 리가 없습니다. 적어도 옛날 식 교회에서는 교인들이 하나님께 십일조만 내면 두 세배로 하나님이 불러서 풍성히 채워준다는 내용을 자진해서 믿고 싶어 환장해서 실험삼아 십일조를 내었지만, 이제는 생존문제가 어디까지나 자신의 재테크 기술 문제로 이양된 이상, 구태여 교회 헌금 바쳐서 아슬아슬한 돈 더 벌기 게임을 할 필요가 없다고 마음 정리한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가 돌아가니 은근히 복음 전한 대가로 가족의 생계비를 충당해보겠다는 목사의 생존 계획에 차질이 나는 것입니다. 아무리 강단에서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그 손실은 교인들의 영적 피해로 돌아간다”(고전 9:9-11)를 언급하면서 직, 간접적으로 헌금을 강요해보지만, 여기에 대해서 교인들은 다음과 같이 속으로 반발하기 일 수입니다.
“목사님, 저희들도 사회에 나가서 내 노동의 양만큼 다 얻지 못하고 착취당하며 삽니다. 누가 저를 힘들게 합니까? 그것은 목사님이 소개하는 바로 복음적인 하나님께서 저를 힘들게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워낙 인간성이 좋아서 세상에서 갖은 고생을 다해서 하나님만은 어떻게든 섬겨야 된다는 일념에서 교회 나와 주고 있습니다. 신앙 없는 사람들은 벌써 포기했음에도 보세요. 저는 포기하지 않지 않습니다. 더 이상 저가 어떻게 하나님에게 더해 드리겠습니까? 그나마도 내가 신앙이 출충 하기에 이 정도라도 버팁니다. 만약에 목사님이 소개하시는 하나님께서 이 험한 세상에서 저를 더 힘들게 하신다면 저도 장담 못합니다. 목사님도 경험해야 합니다. 하나님만 믿지 마시고 직접 우리가 사는 세상에 내려와 봐야 합니다. 산다는 것이 장난이 아니라 현실인 것을…”
이렇게 되면 교회 모임은 그 자체가 불신자들의 시위 장소가 됩니다. 하나님께 일주일간 쌓인 불만을 조목조목 따지고 대드는 현장이 됩니다. 거기에는 천사라는 하늘나라 경찰도 보이지 않습니다. 단지 교인들의 인심 좋은 후한 헌금을 기대하다고 또다시 실망해버리고 자신의 업무에 날이 갈수록 회의를 느끼는 목사의 은닉된 본심과 난감한 생활고로 인해 목사한테 노골적으로 화풀이하는 사모님의 잔소리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생활고로 인한 스트레스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인간적인 힘으로 극복해보고자 복음 전하는 목사들은 버릇처럼 “죽자, 죽자. 그만 살고 죽자”를 연발하겠습니까! 그럴 때마다 곁에 있는 사모님으로 “이 무책임한 인간아. 식구는 나 몰라라 하고 네만 죽어 천당 가면 다야!”라는 질책을 곱빼기로 받게 됩니다.
아, 하나님에게마저 버림받는 느낌, 이 느낌 없이는 어떻게 생생하게 복음만이 전달되겠습니까! 천사도 부러워한다는 성도의 신분, 그러나 어디까지 관념처럼 여겨지고 그 대신, 돈이 있어야 산다는 이 현실이 더욱 더 생생한 현실로 다가 올 때에, 설교자는 자신이 전하는 그 복음이 자신이 도리어 저주해버리고 짓밟아 버리고 싶은 충동에 직면하게 됩니다. 악마의 일군 되는 것은 순식간에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고후 11:13-15)
지옥갈 수도 있다는 위험부담을 떠안으면서까지 복음 증거를 중단하고 싶은 그 심정이 바로 성경에 나오는 가룟 유다의 심정이요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의 심정입니다. 이 지경에서 예수님이 피 흘리심이 감격으로 다가오고, 이런 지경이 구원의 사랑으로 이해된다면 진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점찍은 성도요, 그렇지 않고, 세상이 부러워 십자가 복음이 결코 들려오지 않는 영역으로 피신해 들어간다면 애초부터 지옥 가도록 점지해 놓은 악마의 일군입니다.
애초부터 복음 전달에 대가를 기대한 것 자체가 비복음적이고 악마가 격려하는 심보입니다. 성령에 휘감기지 아니하면 할 수 없는 일, 그래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고후 2:14-16)
과연 “누가 이 일을 감당하겠습니까?”
이미아(IP:115.♡.208.128)
09-06-28 13:52
아버지의 뜻대로 버림받은 현장에서 예수님은 죄도 없으신 분이 죄인되어서 죄를 감당해내야만 하는 그 지옥같은 죄의 외로움을 맛보아야만 했습니다...이 코스가 우리에게 담겨졌을 때 하나님의 영 외에는 사람의 속사정을 누가 알리요....늘 주님을 배반하는 모습으로 재빨리 도망치기나 하는 우리에게서 나올것은 죄 밖에는 없습니다. 교회라는 전쟁터에서 싸움...나 밖에는, 나 외에는, 천상천하유아독존...이것이 죄의 실체이고...예수님만이 진정한 죄와의 싸움꾼이십니다..죄를 토해내는 오물덩어리들..각자 자기가 먹은 것들을 토하는 것을 보십시요....겉은 꽃뱀처럼 화려합니다. 그러나 그 안에 독사의 알을 품고 있습니다. 땅에서 올라오는 짐승이 어린 양 같은데 용처럼 말을 합니다.
우린 입만 열면 거짓말이요 사기요 가짜들입니다. 평생 이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는 예수님께서 대신 피 흘리사 주신 용서와 은혜를 감지해가는 것이 성도의 일생입니다..."여자의 일생이 아니라 예수님의 일생이 우리 안에 담겨져 코스대로 끌고 가십니다"....
이미아(IP:115.♡.208.128)
09-06-28 14:15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예수님 설교자들은 뉘 죄로 설교자가 되었습니까?
자기때문입니까? 그 부모가 원해서 입니까?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과연 "누가 이 일을 감당하겠습니까?"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는 이 일을....주님의 외로운 외침을 그대로 물려 받은 설교자들의 이 외로운 외침을.......
김성환(IP:125.♡.0.183)
09-06-30 08:14
오늘 시편 78-79편을 읽다가 이런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복음의 설교자가 보기도 싫고 먹고 싶지도 않는 눈물의 젖은 빵을 먹어야만 하는 이유는 주님의 이름때문에 싫어도 먹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주께서 그들(광야에서 한없이 불평 원망하는 이스라엘)에게 눈물의 양식을 먹이시며 많은 눈물을 마시게 하셨나이다."(시80:5절).
또한 복음의 설교자가 한 없이 고독하고 외로운 광야의 길을 걸어가야만 하는 이유는 주님의 이름때문에 때론 외로운 길을 걸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를 우리 이웃에게 다툼 거리가 되게 하시니 우리 원수들이 서로 비웃나이다."(시80:6).
광야의 이스라엘이 우리 자신이었기에 그들이 토로하고 토해냈던 모든 불평과 원한들이 결국 주님의 복음을 가로막았던 마귀의 종들었던 사실이 확연히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언약(약속)의 신실하신 하나님은 여전히 주님의 이름을 날마다 택한 받은 죄인에게 '허락'하신다는 사실로 기쁘고 감사합니다. "주의 오른쪽에 있는 자 곧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인자에게 주의 손을 얹으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에게서 물러가지 아니하오리니 우리를 소생하게 하소서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시80:17-18)
목사님의 주일 오전 설교처럼 사도 바울이 복음을 받고 복음의 설교자가 된 것은 그 자체가 하나님에게 받은 '상(은혜)'이기에 그 삶이 비록 환난, 곤고, 박해, 기근, 적신, 위험, 칼, 사망일지라도 주님의 이름때문에 영원한 하나님의 복음의 노예로 살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신비의 계시를 따라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하게 하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롬16:26-27)
하나님이 안개처럼 곧 사라질 이 땅에서 성도에게 고난이란 현실을 허락하심은 죄인인 나 자신 보다 더 큰 천국의 현실인 주님의 이름만을 의지케 하는 하나님의 한 없는 신실한 사랑이 아닌가 하고 생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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