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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광주 6월 26일 강의 디모데후서 3장 1절강의디모데후서

광주 6월 26일 강의 디모데후서 3장 1절

이름 : 관리자(IP:125.190.2.45)

090626 말세에 반드시 나타나야만 하는 것들

관리자(IP:125.♡.2.45)

09-06-27 12:15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광주/광주090626a디모데후서3장1절a.hwp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광주/광주090626b디모데후서3장1절b.hwp

관리자(IP:220.♡.176.150)

09-07-12 10:11

광주090626a디모데후서3장1절a

광주 강의(09. 5. 26) 50-1

디모데후서 3장 1절을 보겠습니다.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 이렇게 쭉 나갑니다.

이 구절을 보면서 사람들은 어디에 관심이 있을까요?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에서, ‘여기에 나오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인가?’에 관심이 있는 것 같은데, 그렇게 보시면 안 되고, 그 앞에 있는 말씀 “말세”에 초점을 맞춰야합니다.

왜냐하면 이러이러한 사람이 나온다는 것은 본인이 그렇게 되고 싶어서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만들어내는 말세의 풍경화 중에 이런 사람이 반드시 생겨야 되는 겁니다. 김홍도라는 화가가 그림을 그릴 때 자기가 그리고 싶은 것(씨름하는 모습, 시장에서 장사하는 모습 등등)을 그릴 때마다 하나의 풍경이 만들어지는데, 옆에 있는 사람이 “여기는 씨름하는 사람이 없는데 왜 이런 그림을 그려?”라고 하면 안 됩니다. 화가가 그런 그림을 그리면 그런 풍경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마지막(말세)이라는 이 도화지에 어떤 그림을 그리는 것은 사람들을 나무라고 닦달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 본문을 보게 되면, ‘나는 말세에 이렇게 안 해야지. 돈을 사랑하지 말아야지.’ 이렇게 나와요. 그렇게 되니까 성경 해석을 엉터리로 하는 거예요.

이 구절은 ‘이렇게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말세의 그림을 그리면 반드시 이러이러한 사람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생겨나야 하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성경을 봐야 성경이 자기 행위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방금 이야기한 이 행위는 누구의 행위입니까? 우리 행위가 아니고 주님의 행위지요. 이게 바로 믿음입니다. ‘말세에 사람들이 돈을 사랑한다고 성경에서 말씀하셨는데, 나는 돈 사랑하는 것을 주의해야지.’ 이렇게 주의할 문제가 아니고 ‘현재 네가 이 시대를 말세로 보느냐? 그리고 네가 이 말세에 주님을 믿는 것이 네 의지가 아니고 주님의 행위인 것을 믿느냐?’ 이것을 묻는 겁니다.

제가 만약에 광주에 산다면, ‘광주에 사는 것이 너의 결정이 아니고 주님의 결정인 것을 믿느냐?’ 라고 묻는 거예요. 오 목사님이 이 전라도까지 내려오셨는데, 지금 주님이 물으시기를 “네가 전라도까지 온 것이 너의 결정이었나, 아니면 주님의 행위였나?” 그것도 마지막 때에 그려져야 될 그림 가운데서 ‘오 목사님은 광주에서 목회를 한다.’ 이것이 이미 포함이 된 겁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이렇게 해서 구원 받아라.’가 아니라 말세를 보여주기 위한 한 방법입니다. 말세는 인간 행위가 주도가 아니고 주님의 행위가 주도권을 쥐는 것이 말세라는 겁니다. 이것을 알면 성경 해석은 무척 쉽지요.

다시 해 보겠습니다.
여기 창세기가 있고, 마지막 때를 말세라고 하는데, 창세기와 말세 중간에 있는 사람이 말세를 알겠어요, 모르겠어요? 모릅니다. 특정 지점부터 말세라고 하는 것은 누구의 아이디어인가 하면, 예수님의 아이디어지 인간들의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흔히 동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입버릇처럼 “말세야, 말세! 세상 뒤집어져야 돼.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야 해.” 라고 하지만 이것은 그 사람들 생각이고, 주님의 말세는 사람들에게 의견을 묻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세 만들기는 하나님 자기 뜻대로 하십니다. 그분이 만드시는 말세가 정착이 되고 보면,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시는 말세에 어쩔 수 없이 말려들 수밖에 없는 그런 신세가 되죠. 행복한 신세지만.

종말 처리장이 있다는 자체가 우리들 의견이 아니고 어차피 이렇게 만들어지면 좋든 싫든 종말 처리가 되어야 하는 겁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면 비로소 이 ‘말세’와 ‘말세 이전’이 어떻게 다른가를 감 잡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강의의 어려운 부분입니다.

정리해 봅시다.
말세는 누구 행위입니까? 주님의 행위로 사람들이 만들어지고, 말세 이전에는 주님께서 어떻게 했습니까? 인간들 제 마음대로 살도록. 이것이 사도행전에 나오지요. 이방 나라들에게 허물치 아니하시고 마음껏 살도록 방치했지요. 그러다가 마지막 때가 되면 말세라는 새장을 만들어서 거기에서 빨간 새, 노란 새, 파란 새를(구원 받을 새, 지옥 갈 새) 따로 만들어요. 지금 이 작업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본문을 보면서 “나는 말세 때 이런 것을 주의 해야지. 이제는 돈을 사랑 안 하고, 자기를 사랑 안 하고, 교만하지 말아야지.” 이렇게 생각할 이유도 없고, 그런다고 구원 받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뭘 생각해야 하는가? ‘우리가 이 마지막을 맞이한 것은, 나는 새장 안에 있는 한 마리의 새인데 이 마지막 때를 보여주기 위해서 주께서 특별하게 제조했습니다.’ 라는 것을 믿으시면 됩니다.

이것을 믿게 되면 우리는 뭘 해도 우리 환경은 말세 속에 놓여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취직을 하든지 결혼을 하든지 뭘 하든지 항상 뭘 잊지 못합니까? 결혼을 했다면, 그냥 ‘결혼 했다.’ 이렇게 하면 안 되고, ‘마지막 때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오늘 나는 윤00라는 여자와 결혼했다. 나는 누구냐? 김00이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인자의 때에--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눅17:28) 이런 본문이 왜 있을까요? 장가가는 것이 죄라는 말이 아니고, 기원전 6,000년경에 결혼 하지 않고 왜 하필 2009년 6월 20일 결혼 했습니까? 뭘 보여주기 위해서? 마지막 때를 보여주기 위한 결혼이죠.

마지막 때 결혼 안 하는 것도 이상해. 마지막 때는 결혼을 하든지 장사를 가든지 뭘 하든지 하세요. 그런데 항상 무엇을 잊지 말아라? ‘말세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마지막 때에 그런 일을 한다.’ 이것이 바로 성도에게 하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구태여 이 말씀을 가지고 ‘나는 마지막 때에 살아남아야지.’ 하면서, 자기가 자기 행위에 신경을 쓰는 것은 말세를 일부러 만드신 하나님의 행위를 모독하는 겁니다. 인간이 나서서 왜 ‘마지막 때는 주의해야 돼.’ 이렇게 해요. 주의하면 구원 받습니까? 안 되지요.

마지막 때를 알면 구원 받는데, 마지막 때를 자기가 대비하면 구원 못 받아요. 참 희한하지요? ‘제가 결혼한 것은 마지막 때임을 주님이 보여준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구원 받는데, ‘마지막 때군요. 그러면 살아남기 위해서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러면 구원 못 받는 거예요. 이 사람은 주도권이 누구한테 있어요? 자기한테 있는 거예요.

마지막 때에 구색을 맞추기 위해서 어설픈 나 같은 것도 있어야 되고, 훌륭하신 오 목사님 같은 분도 있어야 되고. 전부 구색을 맞추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에서 모일 때 “당신은 왜 그렇게 생겼어요?” 라고 하면, 대답은 간단합니다. “구색을 맞추기 위해서” 무슨 구색? 마지막 때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나 같은 인간도 마지막 때에 산단다.” 그것을 증거하라고, 주님의 행위 증거하라고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모아놓은 겁니다.

이것을 알고 말씀을 보면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라 굉장히 고맙고 감사할 뿐이지요. 예를 들어서, 여기 “돈을 사랑하면 잘린다.”고 했으면, ‘아, 잘리는구나! 하지만 주께서 이것을 미리 알려주신 것은, 주께서 마지막 때를 살리기 위해서 돈을 사랑하는 우리를 위해서 조치를 취하셨구나. 우리 죄를 가져가는 조치를.’

그러면 여기서 공식을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Fx(a) : Fy(b) ≅ Fx(b) : F₁₋ a(y)
욥기를 한 문장으로 표시하면 이렇게 됩니다.

제가 지금 마지막 때를 이야기하면서 왜 이런 공식을 쓰는가? 이 공식을 설명하면, 주께서 마지막 때를 어떤 식으로 만드는가 하는 것이 밝혀져요. 이번 여름 수련회에서 할 내용을 미리 약간 말씀드리면, 욥기에 보면 처음에 하나님 : x, 여기서 하나님 : x에서 앞에 하나님 자리에 자비의 자리, 그리고 뒤에 x자리가 사악의 자리입니다. 신화의 공식에 보면 나와요. 구조주의 공식에 보면 나오는데, 자비의 자리와 사악의 자리가 있는데 이것이 뭐냐 하면, 옛날 인간들은 신을 볼 때 신 안에 두 개의 서로 상반된 속성이 있다는 겁니다.

하나는, 자비로울 때는 굉장히 자비로운데 성질부릴 때는 굉장히 악해요. 사악한 성질과 자비로운 성질 두 개 다 있다고 보는 겁니다. 제가 욥기를 왜 거론하는가 하면, 욥이 언약 이전에, 언약이 보편화되기 전 아브라함 시대의 인간들 심성이 나와 있거든요. 자연 신인데, 이것이 신약에 오면 하나님의 속성은 하나는 공의, 또 하나는 사랑이죠. 이것이 로마서 11장에 보면 나옵니다.

그런데 이 공의와 자비가 섞이지를 못해요. 왜냐하면, 서로 대비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어릴 때 아버지가 좋을 때는 굉장히 좋다가 한번 화가 나면 분노가 폭발합니다. 어떤 때는 자애롭다가 어떤 경우에는 엄청나게 무서워요. 서로 상반된, 어느 쪽이 진짜 아버지의 본심인지 알지 못하는 것처럼 하나님도 그렇다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x는 어떤 특정인간이니까 아무나 들어갈 수 있으니까, 여러분도 들어갈 수 있으니까 제가 x로 한 거예요.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면 어떻게 됩니까? 출애굽기 3장에 나오지요. 사사기 13장에도 마노아가 하나님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면 어떻게 됩니까? 죽잖아요. 출애굽기에 보면 시내산 밑에 있는 사람들이 산 위로 못 올라오잖아요. 무서워서. 그만큼 우리는 더럽고 하나님은 무섭지요.

이사야 6장 5절에 보면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그러니까 여기 x자리가 사악의 자리, 우리는 더러운 자라서 악의 자리인데 하나님과 만났을 때 어떻게 이 하나님으로부터 더러운 죄인이 용서받을 수 있겠느냐 하는 문제지요. 방법이 뭐냐 하면 ≅, 이것이 뭐냐 하면 ‘동치’ 똑같다는 것이지요. 수학에서는 그냥 5+3=8. 여기서는 그냥 =로 하는데, 여기서는 =위에 ~표시를 하나 더 붙여서 같은 류다 라고 해서 ‘동치’라고 합니다.

그래서 욥을 하나님 자신의 자리에 넣어버리고 하나님께서 욥이 있던 그 더러운 자리를 차지합니다. 이건 뭡니까? 빌립보서 2장 5절 이하에 나오는 성육신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십자가는 어떤 곳입니까? 가장 사악한, 사람들의 안목으로 보기에는 가장 악랄한 사형 틀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저런 인간은 쳐 죽여야 돼.’ 라는 자리가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교도소에 가는 것까지는 이해를 해도 사형수가 되어 십자가에서 죽는 것까지 이해하는 것은 어려워요.

십자가에서 죽는다는 말은 이 세상에서 희망이라고는 전혀 없을 경우, 그것이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이게 바로 욥을 하나님 자리에 앉히고 욥의 자리에 하나님이 가심으로 말미암아 욥을 구원하는 거예요. 이게 기독교이고 복음입니다. 간단하지요? 자리만 바꿉니다. 이것을 어려운 말로 ‘치환’이라고 합니다. 쉽게 하면 ‘자리 바꿈’이지요.

‘교회 오셔서 기도하시면 복 받습니다.’ 이 말에는 뭐가 없습니까? ‘치환’이 없지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어요? ‘여러분들이 새벽기도 나와서 열심히 기도하시면 아들 좋은 대학에 합격합니다.’ 이것은 본인이 착해서 열심히 새벽기도 간 덕분에 그 본인 착함의 대가를 받는 거잖아요. 누구로부터? 자비로운 하나님으로부터 자비로운 대가 받아서 복을 챙기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것은 뭐가 없어요? ‘치환’이 안 일어났지요. 그래서 그것은 십자가 복음이 없는 거예요.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 이게 무슨 뜻입니까? 완전히 바꾸자는 겁니다. 탕자의 이야기를 생각해 봅시다. 탕자가 재산을 다 날렸는데, 그렇게 되면 집으로 돌아오겠습니까, 안 돌아오겠습니까? 탕자가 재산을 다 탕진하지 않았으면 집에 돌아오겠어요, 안 돌아오겠어요? 안 오지요.

아버지가 언제까지 기다립니까? 재산 다 탕진할 때를 기다려요. 왜? 다 날려야 그 다음부터는 누구 자랑만 해요? 아버지 자랑만 하지요. 나 같은 죄인을, ‘아버지 덕분에 가락지 켰다. 좋은 옷 입었다. 아버지 덕분에 한우 고기 먹었다.’ 동네방네 자랑하잖아요.

천국이 뭡니까? ‘치환’을 모르는 사람은 천국에 못 갑니다. ‘전복, 도취’ 이것 모르면 교회 다녀도 지옥가요. 주여, 주여 하면서 지옥에 간다니까. 그 사람들은 지옥에 가서도 주여, 주여 하면서 탄식합니다. 땅을 치면서 통곡합니다.

그렇게 ‘자리 바꿈’을 말해도 왜 못 알아들었습니까? 못 알아들을 수밖에 없지요. 왜? 교회 나올 때부터 ‘나는 오늘 바쁜데 교회 나왔다.’ 오면서부터 자기 의가 가득 차 있으니, ‘내 잘난 맛에 내 잘되려고 하는데 하나님은 도와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것이 그들이 믿던 하나님이잖아요.

그런데 욥은 반대가 되지요. ‘네가 내(하나님) 자리 앉고 내가 네 자리에 갈 게.’ 그렇게 하고 또 여기 ≅가 되면, 욥의 친구 : 욥. 욥의 친구가 누구를 비난했어요? 욥을 비난했지요. 뭐라고? ‘이 사악한 놈아! 네가 죄가 있으니까 벌 받았지.’

그러면 그 친구들은 뭡니까? 훌륭한 자리에 있고. 괄호( )의 앞쪽은 훌륭한 자리고, 뒤쪽은 사악한 자리에요. 처음에 보세요. 처음 하나님은 훌륭한 분이잖아요. 욥은 죄인 아닙니까. 그런데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욥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하나님 앞에 누가 등장했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마귀가 등장했지요. 그러면 하나님은 결국 뭡니까? 마귀에게 앞으로 하나님이 하실 역전, 도취. 마귀가 생각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사람을 구원하는 그 멋진 솜씨를 마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누구를 동원했습니까? 욥이죠. 오늘날 화평교회 여러분을 동원하셨습니다. 이 말이 좋은 말인지 나쁜 말인지?

하나님이 공연히 마귀하고 게임을 하면서 당하기는 욥이 당한 거예요. 마귀는 선악과로 고소합니다. 곧이곧대로. 옳으면 옳고 아니면 아닌데, 이 곧이곧대로 하면 인간은 한 사람도 천국 못 갑니다. 그걸 마귀가 알고 있죠. 이왕 자기는 천국 못가는 것, 다른 사람들도 천국 못가도록 만들려는 거예요.

이렇게 마귀가 천국 못가도록 막는데, 주님은 거꾸로(주님은 죄인 자리에, 죄인은 주님 자리로) 바꾸는 방식으로 자기 백성을 천국으로 인도합니다. 이것을 누가 알았으리요? 정락원 목사님은 평생 말씀 지켜서 의인되려고 하다가 [십자가를 아십니까]라는 책을 읽고는 완전히 뒤집어졌다는 거예요. 나는 그 책이 뒤집어질 내용은 없는 것 같은데, 그분은 그 책을 보고 주님의 ‘자리 바꿈’을 깨달은 거예요.

나는 [피]라는 책을 보고 뒤집어졌는데. 나는 “하나님은 한 남자를 죽였다.” 그 구절 보고 뒤집어졌는데. ‘하나님께서 한 남자를 죽였다. 끝.’ 한 남자가 피를 흘리고 있단 말이지요. 하나님께서는 한 남자를 죽인 거예요. 그 앞에 교회가 무슨 의미가 있으며 목사, 집사, 장로가 무슨 의미가 있어요?

하나님의 관심사는 한 남자가 죽은 그 사건에 있는데, 장사가 되느니 안 되느니, 날씨가 춥니 덥니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느냔 말이지요. 저는 거기에 완전히 충격 받았어요. ‘하나님이 한 남자를 죽였다.’ 이 말은 뭡니까? 하나님이 “나는 이근호 너한테는 관심 없다.” 이 말이거든요. 하나님은 누구에게 관심 있다? 자기가 죽인 예수에 관심이 있지 다른 것에는 관심 없다는 말입니다.

평생 자아만 생각하는데 자아 생각하는 것은 허송세월입니다. 마이클 잭슨이 왜 죽었습니까? 하나님은 자기가 죽인 한 남자(예수)에 신경 쓰는데, 마이클 잭슨은 자기 노래 얼마나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까 그것만 생각하다가, 성형수술에 약 복용 등등 죽을 때까지 힘들었어요. 5살부터 50살까지 수많은 사람을 열광케 한 마이클 잭슨이나 20년 무명시절 보내가다 ‘땡벌’이란 노래로 유명해진 가수나, 아직도 유명해지지 못해서 밤무대를 전전하며 1당 5만원 받는 가수나 관계없이 주님은 자기 아들에만 관심 있는 거예요.

이것이 ‘역전’입니다. 그런데 이 역전을 어느 시대에 한다? 마지막 때에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께서 만든 만찬은 우리 해장하고 속 풀라고 만찬을 준비한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결정적인 것, 다시 말해서 죄인이 의인 되고 하나님이 죄인 되는 그 역전을 보여주기 위해서 마지막 무대로 만든 것이 두 자로 ‘말세’입니다.

이 ‘역전’을 모르게 되면 사람들은 돈을 사랑하고, 자기를 사랑하고 줄줄이 나오는 거예요. 이것은 윤리, 도덕에 관한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에 채울 내용에 대해서 모르게 되면 아무리 열심히 뭘 해도 그 사람은 구원 못 받습니다. 말세를 알면 그 뒤는 볼 것도 없이 구원 받았습니다.

마지막 때가 바로 주께서 뒤집는 이벤트.

세 번째가 뭔가 하면 욥의 친구가 욥을 사악한 놈으로 보고 자기들은 자비로운 것으로 여겼지요. 친구 위로하려고 왔으니까 얼마나 자비롭습니까?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바뀌는가 하면 하나님이 여기 계시고, 하나님 : 괄호 열고 하나님 : 욥의 친구. 결국 욥의 친구는 나쁜 놈이 되지요.

※ 치환의 과정

하나님(자비의 자리) : x(사악의 자리) ≅ 욥(자비의 자리) : 하나님(사악의 자리) ≅ 욥의 친구(사악의 자리) : 욥(자비의 자리) ≅ 하나님(욥) : 사탄(욥의 친구)

그러니까 보세요. 하나님이 욥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죄인의 자리에 들어가고, 욥은 졸지에 의인의 자리에 들어가서 욥을 구원하는 그 일만 하는 것이 아니고, 욥을 바라보면서 나쁜 놈이라고 하는 욥의 친구를 저쪽 죄인의 자리에 보내고 무서운 하나님으로 등장합니다.

욥이 지금 하나님 자리에 들어가 있고, 하나님 자리에 욥이 들어가지요. 욥이 친구를 위해 기도할 경우에만 친구가 용서 받지 그렇지 않으면 욥이 기도하지 않으면 친구는 구원 받을 길이 없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다시 하겠습니다.
지금 말세를 이야기하니까 사람들은 그냥 시간이 흘러가는 줄 알고 있어요. 아닙니다. 시간은 흘러가되 말세라고 규정짓는 것은 누구 소관입니까? 하나님이 말세를 만들어 놓았어요. 그러면 말세에 일어나는 일도 누가 만들어요? 그것도 하나님이 만들어요.

※ 치환의 과정
하나님(자비의 자리) : x(사악의 자리) ≅ 욥(자비의 자리) : 하나님(사악의 자리) ≅ 욥의 친구(사악의 자리) : 욥(자비의 자리) ≅ 하나님(욥) : 사탄(욥의 친구)

그러면 말세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보잔 말이지요. 그게 바로 욥과 하나님 사이에서 하나님이 x니까 특징인. 욥을 포함해서 특정인들. 하나님께서 욥을 볼 때 하나님 이 앞의 자리가 자비의 자리고 여기 x자리는 사악한 자리입니다.

선한 하나님과 욥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욥을 구원하기 위해서 욥을 의인되게 하고 욥이 앉았던 그 죄인의 자리에 하나님이 들어가세요. 이것을 제가 ‘치환’이라고 했고, ‘도치’라 했고, ‘전복’ 또 ‘자리바꿈’ 등으로 표현했지요.

자리를 바꾸는데 문제는 이런 식으로 자리 바꾸는 이 작업을 누가 보는 앞에서 했다? 욥기에 보면. 악마가 보는 앞에서 함으로 말미암아 기존의 인간 세계가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말미암아 악마에게 물들어 있는 이 세계에서 어떻게 악마로부터 인간을 건져내는가? 그게 바로 하나님께서 죄인의 자리에 들어가고 죄인을 의인의 자리에 앉힐 때 비로소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2장에 보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주’라는 내용 안에 뭐가 들어 있습니까? ‘치환’이 들어 있어요. 우리가 ‘주여!’ 라고 부를 때 그 안에 우리를 의인 자리에 올리기 위해서 주께서 내가 있던 그 더러운 자리에 대신 앉았기 때문에, 마치 시소처럼 저쪽에서 앉으면 반대편에서 쑥 올라가듯이 주께서 죄인의 자리에 앉으시니까 죄인인 나는 의인의 자리에 올라가 있고, 주님은 십자가 저주의 자리에 가시고.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이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다. 주님을 사랑 안 할 수가 없지요. 그래서 기존 교회에서 새벽기도 하고 헌금해서 복 달라고 하고 이것은 완전히 ‘치환’이 빠져있고, 복음이 없고, 다른 말로 하면 새 언약이 없는, 예수님의 피와 살이 빠져버린 마귀가 조작해 낸 절(부처가 있는 곳)이지요. 이 절에 가면 ‘빌면 복 받는다.’는 것만 통용 됩니다. ‘도치’가 없는 그런 교회들이 이 땅에 차고 넘칩니다.

공식을 좀 더 이야기해 보면, 하나님께서 욥만 구원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욥을 이렇게 구원함으로 말미암아 욥을 구원했다는 그것을 가지고 진짜 저주받을 인간에게 하나님은 무서운 분으로 등장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욥의 자리에 가고 욥은 하나님 자리에 간 것은 이해하시겠지요?

앞쪽이 선한 자리니까 욥은 앞쪽에 가고(이 자리가 욥이 구원 받는 자리지요), 그 다음 욥의 친구들은 자기들이 선하다고 생각하고 욥을 죄인으로 봤는데, 하나님은 오히려 욥을 들어서 욥을 선한 자리에, 욥의 친구를 악한 자리에 가게 하는 이러한 치환을 하나의 수식으로 적으면 어떻게 되는가? Fx(a) : Fy(b) ≅ Fx(b) : F₁₋ a(y) 이런 공식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욥에게는 자비로운 하나님으로 우리를 건지시고, 또 악한 자를 악하다고 징벌하는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하나 설명하겠습니다. F는 함수인데 여기서는 그냥 ‘속성’이고 x는 ‘선한 것.’ 그리고 괄호안의 a는 ‘선함을 받는 대상’ 그 다음 y는 속성인데 ‘악한 속성’ b는 ‘나쁜 속성에 속한 대상들.’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신은 자기편에 있으면 복 주고, 자기편에 있지 않으면 심판하는 그런 하나님의 속성이 이 안에 있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을 다 용납하고 봐주는 하나님이 아니고 자기편에 서지 않으면 무조건 저주하는 그런 하나님을 이런 식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다시 설명 안 해도 되겠지요? 선한 쪽에 선 사람은 선한 속성을 가지고 자기 백성을 품는 것. 이해하시겠지요?

그런데 이것이 이렇게 되려면, 선한 속성을 가지신 분이 b가 뭡니까? 하나님은 선하신데 예수님은 하나님께 버림 받았지요. 선한 하나님께 버림 받았다면 그것은 뭡니까? 죄인이죠. 그러니까 선한 속성을 가진 대상이 누구다? 악한 자리에 계신 분이 선함 속에 포함되어 있죠. 이것이 메시야죠. 선하면서도 죄인의 자리에 간 거예요.

그 다음이 어려워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것뿐만 아니고, 선한 대상의 반대말이, a의 반대말이 흔히 알기를 -a라고 생각하지요. 이게 오해에요. -a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1-a로 표현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1a+1-a=1이지요. 1은 전체에요. 그냥 a+(-a)=0이잖아요. 아무것도 없잖아요. 그래서 전체 모든 인간을 막기 위해서는 a의 반대말을 1-a로 표현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하나님께 사랑받은 자 빼놓고 나머지는 뭐냐 하면, 사악한 자리에서 저주 받아야 됩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한쪽이 구원 받으면 다른 한쪽은 지옥 간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주님께서 오심은 천국 가는 것만 위한 것이 아니고, 안 믿는 사람들을 필히 지옥으로 보냅니다.

여기 화평교회에서 성경공부 모임을 갖는다는 것은 말씀에 관심 없는 사람들을 반드시 마지막 때에 지옥 보내기 위함입니다. 0집사님 참석 안했는데 이런 소리를 해서 되는지 모르겠는데 --, 하여튼 한쪽이 구원 받았다는 말은 한쪽은 버림 받았다는 뜻이에요.

하나님은 한 가지 일을 가지고 양쪽에 다 효과를 내고 있는 겁니다. 십자가 믿는다고 좋아하면 다른 한쪽은 자동적으로 지옥 가야 돼요. 어쩔 수 없어요. 이것이 세상 이치입니다. 한쪽이 천국으로 가고 있다는 말은 그 반대쪽은 지옥 간다는 말입니다. 나는 그냥 말씀에 관심이 있을 뿐인데 내 친구는 말씀에 관심이 없어. 점점 더 멀어져 가요. 이제 대화가 안 돼요.

북극의 빙하가 꽁꽁 얼어 있는데 날씨가 점점 따뜻해 져서 얼음이 녹아서 결국은 큰 얼음 덩어리가 갈라져서 한 쪽은 동쪽으로 한 쪽은 서쪽으로 떠내려갑니다. 전에는 하나의 얼음이었는데 이제는 점점 멀어져 갑니다.

황전도사님이 아들 아파트에서 헤어져 떠나오면서 “00아! 십자가다.” 다른 사람은 무슨 말인지 몰라요. 마지막 떠나기 전에는 많을 말을 했겠지요. 몸 건강해라. 등등. 그런데 정말 거리가 멀어지면서 안타깝고 꼭 남기고 싶은 말이 “00아! 십자가다.”

이 이야기를 듣고 제가 얼마나 가슴이 시린지. 진짜 얼음판에서 떠내려가는 자식을 보고 최후로 당부하는 말씀이지요. ‘어디를 가도 십자가 믿어라!’는 말이지요. 바라기는 녹매교회에 가서 십자가 믿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될지 모르지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이 공식이 구원 받을 자는 어디에 포함되어 있습니까? 1-a 빼고 나머지 a는 다 되겠지요. 창세전부터 영원히 주님 품이 되겠지요. 예를 들어보면, ‘김 집사. 너는 영원히 하나님 품에 있다.’ 라고 할 때, 우리는 ‘고맙습니다.’ 우리는 내 구원 받은 것만 생각하는 그 순간에 그 주변에 무슨 사건이 벌어집니까? 바로 대 변혁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철없이 내 구원 받은 것만 생각하는 그 와중에도 다른 사람한테는 이런 복음으로 인하여 저주받는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이런 사건을 일어나게 하는 장치가 어느 때에 일어난단 말입니까? 말세 때. 그러니까 말세는 시간이 흘러가다 보니까 말세가 아니고 일부러 만들었어요.

저 서울의 롯데월드가 공사를 하다보니까 그냥 생겼습니까? 다 계획을 하고 만들었지요. 이처럼 주께서 계획을 잡아서 말세에 누구는 십자가로 구원 받을 사람, 누구는 지옥 가기 위해 태어나고. 미리 조치를 다 해놓은 거예요. 그 구조가 뭐냐? 마지막 때, 말세라는 겁니다. 그리고 악마가 활동하는 장소도 다 정해져 있어요. 악마가 활동을 하되 절대로 택한 백성은 넘어지게 못해요. 왜? 주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기도하시기 때문에. 이런 치밀한 장치가 마지막 때, 말세 구조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이제 마지막 때를 아시겠지요?

그런데 방금 이러한 ‘역전’ ‘도치’ ‘치환’ 이것이 욥 개인에게 일어났는데, 이번 여름 수련회 때 할 [다니엘, 스가랴]는 이 개인에게 일어난 이것을 ‘치환’으로 늘입니다. 그러면 뭐가 되겠어요? 역사가 되겠지요. 마지막 때는 성령이 오게 되면 역사가 없어요. 예수님 십자가 믿는 순간, ‘나는 죄인이구나. 그런데 주님이 내 자리에 오셔서 나의 모든 죄를 해결하셔서 날 의인 만들었네.’ 하고 졸지에, 짧은 순간에 이것을 믿게 되지요. 그리고 ‘지금까지 율법으로 살던 모든 것은 다 악마의 복음이었구나.’를 깨닫지요. ‘악마가 교회를 장악해서 교회가 나에게 지옥 가도록 유도했구나.’ 한 순간에 알지요.

그런데 이번 수련회 때 할 [다니엘, 스가랴]는 순식간에 아는 것이 아닙니다. 긴 시간이 필요해요. 그게 바로 역사가 됩니다. 역사가 되면 여기에 7+62+1 뭐냐 하면, 합치면 몇 개가 되요? 70이래를 통해서, 역사를 통해서 역전(도치)이 어떻게 연결되느냐를 보여주는 것이 70이래입니다. 그러니까 여름 수련회 때 이 엄청난 작업을 해야 됩니다. 이 작업을 하면서 요한계시록 구조도 같이 볼 겁니다.

아까 ‘치환, 도치’ 거기에다 아무거나 집어넣어도 돼요. 아까 욥을 집어넣었지요. 다윗을 넣어 보세요. 다윗이 있었는데 그는 율법적으로 괜찮다고 봤는데 누구를 만났다. 밧세바. 왜 그 때 동네 목욕탕에 안 가고 다윗이 볼 수 있도록 목욕을 했느냔 말이지요.

다윗이 바로 죄인이 되었단 말이지요. 그런데 그 다윗이 지옥 갔습니까? 시편 51편에 보면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밧세바와 자기가 낳은 자식이 죽고 난 뒤에, 이 자식이 죽은 것은 다윗 자기 죄를 인하여 죽었는데, 그 일 이후 ‘나는 태어날 때부터 죄인입니다. 주님의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여기서 ‘역전’이 일어나잖아요. 아까 그 공식처럼.

이것은 욥에게도 해당되고 다윗에게도 해당되고 모세에게도 해당 돼요. 모세의 경우, 처음에는 자기가 잘났다고 민족해방을 위해 까불다가 사람을 죽여 놓고 그것을 숨기다가 같은 유대인이 고자질을 해서 도망치잖아요. 그래서 나는 이제 민족해방이고 뭐고 모르겠다고 삐쳐 있을 때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내부인을 외부인으로 바꿔놓고, 그 외부인을 도로 내부인으로 집어넣어서 그 모세 때문에 수십만 이스라엘이 돌아오게 되지요.

이 공식에 모세 집어넣어도 되고 유다, 이삭 누구를 집어넣어도 됩니다. 이 공식에 저와 여러분 다 집어넣으시기 바랍니다. 집어넣으면 우리가 자랑할 것은 주님 십자가 밖에 없지요. 십자가 자랑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나는 이제 구원 받았어.’ 그런 뜻입니다. 십자가 자랑한다고 하면서 가만 보면 자기 구원 받은 것 자랑해요. 그런 것은 자랑해도 괜찮아요. “나, 구원 받았다.” 누구 덕분에? “주님 덕분에.” 내가 잘해서 내가 구원 받았다고 하면 안 되지만, 주님 덕분에 구원 받았다는 자랑은 마음껏 하세요. 그것 하라고 성령 준 거예요.

그런데 그런 자랑은 하면 할수록, 우리가 둘러싸인 시대가 무슨 시대다? 말세지요. 그러니까 말세를 만드는 것이 아니고 말세 되도록 우리로 하여금 성령을 주셔서 예수님을 증거하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말세 때는 구원이 어떻게 된다? 순식간에 성령으로 됩니다. 말씀을 믿는 순간.

그런데 구약에는 그렇지 않고 긴긴 역사가 필요한 거예요. 그 역사가 필요하면 그 다음부터는 역사가 둘로 나눠지는데, 이 세대와 말세가 되는데 이것이 신약에 오게 되면 수평으로 나란히 되는 것이 아니고 한쪽은 1층, 다른 쪽은 2층으로 됩니다. 1층은 이 세상이고 2층은 묵시의 세계죠. 수직적으로 둘로 나눠지니까 비록 우리가 아직 구원 못 받았지만 이미 구원 받았고, 아직 우리가 죄를 짓고 있지만 이미 의인 된 사람.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보증금이 있는데 그 보증금은 성령입니다.

보증금은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고 주께서 걱정하지 말라고 준 거예요. “주여, 이렇게 해서 구원 되겠습니까?” “너 안에 내가 준 보증금 있잖아!” 보증금을 주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2009. 7. 2. 10:54 녹취 마침)

관리자(IP:220.♡.176.150)

09-07-12 10:11

광주090626b디모데후서3장1절b

광주 강의(09. 6. 26) 50-2

지난 시간 끝부분에 한 것이 뭐냐 하면, 개인에게 일어날 일이 구약 때는 역사적으로 길게 일어나고, 그리고 그 역사에서 묵시로, 한쪽은 하늘로 한쪽은 땅으로 갈라지죠. 그렇게 되면 하늘과 땅이 갈라질 때 여기 중간에 누가 버티고 서있지요? 마태, 마가, 누가, 요한에 보면 예수님이 계시죠.

그러니까 다른 사람, 땅에 속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볼 때 어떻게 봅니까? “저게 도대체 괴물이야, 인간이야?” 라고 하는데, 사실 예수님은 하늘에 속했으면서도 땅에 속하고, 땅에 속했으면서도 하늘에 속한 분입니다. 즉, 양쪽 다 속해 있지요.

오늘날 예수님 같은 실존이 누구냐 하면 성도입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15:19).”고 했습니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골로새서 3장 3절에 보면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고 했어요. 이 말은 하늘에 가야 얻는 것이 아니고 이미 기둥처럼 서 있으면 머리는 하늘이요 발은 땅이요, 생명은 하늘에서 받고 살기는 땅에서 살고. 꼭 예수님처럼 이렇게 사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뭘 얻겠다는 것인가? 그렇게 해서 나온 게 뭐냐 하면, 말세란 말이지요. 말세를 다른 말로 하면, ‘다 이루었다.’ 그래서 말세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도 범사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때문에 그것이 기쁜 소식이 되지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6-18).”

이렇게 될 때 “우리 힘으로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지요. 그런데 예수님을 보세요. 예수님은 마지막 때에 하늘과 땅에 있으면서 예수님만 있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흘러 들어왔기 때문에 이 모습도 오늘날 성도의 모습과 같아요. 성도가 하나님께 사로잡힌바 되고 성령께 사로잡힌바 되면, 그 사람의 원래 소속은 하늘 소속이고 살기는 땅에 살고. 파견 근무죠.

옛날 중앙정보부가 한창 잘 나갈 때 소속은 정보부요 사는 것은 허름한 동네에 산다면, 동네에서 얼마나 으스대겠습니까? 그 때는 경찰서장이고 뭐고 터치 할 사람이 없었잖아요. 이것을 두 자로 ‘자유’라고 합니다. 그 자유를 맛본 대표적인 사람이 누구냐? 간음하다 잡힌 여자가 중앙정보부 요원이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이 여인은 율법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율법은 죽이는 것이고 주님은 살리는 분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 여인은 간음해야 될 특별한 임무를 띠고 이 땅에 태어난 거예요.

자, 그런 관점에서 보게 된다면 이 마지막 때가 즐겁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을 봅시다. 2절에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 훼방한다는 것은 조롱한단 말이지요. “당신이 메시아야! 메시아 같으면 내려와 봐.” 이런 식으로 조롱했지요. 그런데 문제는 조롱을 남이 하는 것이 아니고 성도가 매일 자기 자신을 조롱한다는 거예요. “아이고, 꼴 좋다. 성도라는 자가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본인이 본인을 조롱하게 돼요.

제가 정석훈 목사님 설교 평을 해 놓았는데, 그것은 정 목사님 설교를 평한 것이 아니고, 설교는 이러해야 된다는 설교 전체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 내용이 뭐냐 하면, 성도가 설교를 하게 되면 그 설교 내용은 올바른 설교 즉 복음이지요. 그런데 그 복음에 대해서 누가 비난을 하는가 하면 설교자 본인이 비난해요. “아이고, 네가 복음 전한다고 교인들이 감흥 받는 줄 아나? 너도 그렇게 못 살잖아. 치워라. 괜히 그런 설교해서 교인들 떠나간다.”

본인이 설교한 그 복음 설교에 본인이 못마땅해서 “아이고, 내 팔자야. 왜 나는 이런 복음밖에 못 전할까? 다른 소리 적당히 섞으면 돈도 벌고 교회도 커질 텐데. 아이고, 내가 싫다.” 라고 자기가 복음 설교 해놓고 자기가 설교를 비난하면, 그 비난한데 대해서 그 설교한 내용이 그 목사를 정죄할 때 그것이 올바른 설교입니다.

왜? 그럴 경우에만 이 설교는 누구의 설교입니까? 성령이 하신 설교입니다. 성령이 한 설교만 설교한 자의 죄를 들춰낼 수 있습니다. “네가 네 자신의 설교에 대해서 실망하고 있지?” 설교 내용이 틀려서 실망한 것이 아니고 내용이 옳기 때문에 실망하는 거예요. “이렇게 설교해봐야 무슨 소용 있나? 이렇게 설교해도 ‘이번 달 예산 마이너스 700만원입니다.’ 이런 소리나 듣고.”

백날 복음 전해도 이런 광고 나오면 설교자가 어떤 생각이 듭니까? “그러면 다음 설교에는 헌금 강요하는 내용을 좀 넣을까? 그러면 설교 듣는 사람이 ‘우리 목사 드디어 맛이 갔다. 그렇게 큰 소리 치더니 별 수 없네.’ 이렇게 나오겠지?”

그러니까 설교자가 자기 설교를 통해서 회개를 하고 내가 복음 설교한 것이 내 뜻이 아니었고 아버지 하나님이 나를 치려고 한 것임을 깨닫지요. ‘내가 복음 전해서 사람들에게 신임을 얻고 예수님의 사랑도 받겠다.’는 노림수를 또 발각당하는 거지요.

설교는 바로 이런 거예요. 그래서 목사는 설교 하면서 구원 받아야 됩니다. 늘 구원 받고, 은혜 받고, 설교 하면서 회개하고 그런 거예요.

계속 본문을 보면,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이것을 가지고 누가 누구를 공격합니까? 마귀가 성도를 이렇게 공격하겠지요? 그것을 미리 아시고 여유만만하게 주께서 말씀으로 우리에게 먼저 알려주시는 겁니다. 그러니 주님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하나님께서 “너는 훌륭하다. 너는 대단하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마귀가 공격하는 것보다 더 혹독하게 다뤄요. 그렇게 해서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 자만하지 않고, 돈만 사랑하지 않고, 자기를 사랑하지 않고, 조급하지 않고, 그렇게 회개하게 만드는 작업이 우리를 이렇게 비난하면서 말세에 합당한 성도 되게 하시는 겁니다.

4절 이하에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저희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바 되어 항상 배우나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

마지막 때에 이러한 전경을 쭉 깔아놓는다는 말은, 우리 자신이 우리 힘으로 벗어날 수 없는 것을 주께서 되게 하시는 거예요. 어떻게? “내가 바로 이런 인간입니다. 내가 음행하고 내가 돈 밖에 모르는 이런 인간입니다.” 라는 말을 할 수 있다는 것.

8절에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저희도 진리를 대적하니” 출애굽기 7장에 나오는 내용인데, “이 사람들은 그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리운 자들이라. 그러나 저희가 더 나가지 못할 것은 저 두 사람의 된 것과 같이 저희 어리석음이 드러날 것임이니라.”

이런 이야기를 한 것은, 마지막 때에 흔히 사람들이
제가 질문을 할 테니 여러분 답변해 보세요. ‘내가 노동해서 번 돈으로 내 자녀 피아노 레슨을 시켰다. 마지막 때에 이게 뭐가 잘못인가?’ 마지막 때에 구원되는 사람, 즉 말세형 인간이 따로 있어요. ‘뭐가 나쁘냐?’ 하는 인간은 마지막 때에 건짐 받는 인간형이 아닙니다. 말세형 인간은 어떤 자냐? ‘마지막 때에 뭘 할 거냐?’를 생각하는 사람이 구원 받는 사람입니다.

지금까지 쭉 본문에서 여러 항목들이 나왔잖아요. 그러면 구원 받는 사람은 뭐 합니까? ‘야, 이게 딴 사람 이야기가 아니고 내 이야기인데, 그러면 이 마지막 때에 나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라고 묻는 사람이 바로 마지막 때에 구원 받을 하나님이 만드신 말세형 인간입니다.

그런데 ‘내가 열심히 일해서 내 자녀 교육 시키는데 뭐가 나빠?’ 이렇게 나오는 사람은 마지막 때에 구원 받지 못할 자들의 모습이에요.

이제 정리해 봅시다.
마지막 때에 구원 받을 사람과 구원 받지 못할 사람의 차이가 뭔가? 마지막 때 구원 받을 사람은 마지막 때에 주께서 하신 잔소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고, 구원 받지 못할 사람은 주님의 잔소리보다는 나의 행위에 관심이 있고, 지금이 마지막 때인 줄도 몰라요. 그냥 해와 달이 평소처럼 떠 있으니까 과거나 지금이나 차이가 없다고 여겨요.

따라서 이 성경을 보면서 ‘못 지키면 안 되는데’ 이렇게 보지 마시고, 이 말씀에 관심이 있냐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나는 교회는 안 나가지만 나는 내 나름대로 자식 키우려고 오늘도 밤늦도록 고생하고 있다.’ 라는 사람이 반드시 마지막 때는 누구를 핍박하게 되어 있는가 하면 이 말세형 인간, 말씀에 관심 있는 사람을 핍박하게 되어 있단 말이지요. 그 핍박을 받는 경우에만 ‘경건’이란 것이 성립이 돼요. 이게 좀 어렵습니다.

우리가 나름대로 경건한 것. 이건 아무 소용없습니다. 그것은 경건이 아니고 자기 폼 잡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아도취고 자기 환상에 빠진 것이지요. 마지막 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코스가 있어요. 이렇습니다. 십자가로 들어가야 부활에 이르기 때문에, 빌립보서 3장에는 ‘어찌하든지 십자가에 참여하려고 한다.’고 할 때, 이것이 마지막 때의 ‘경건’이 되지 혼자 나만 경건할 수 없어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마지막 때 십자가 가는 길을 터기 위해서 주변에 이 점을 도와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도와주는데 어떻게 도와주는가 하면, 핍박과 조롱으로 도와주는데, 이 핍박과 조롱하는 사람의 특징이 뭐냐? 디모데후서 3장 1절부터 8절까지의 항목에 나오지요.

이런 사람들의 조롱과 비난으로 말미암아 성도가 ‘아하, 내가 가고 있는 길이 십자가의 길이 맞구나.’를 되새기게 하는 그런 행운을 안겨줘요. 신앙생활 하면서 제일 힘든 것이 뭐냐 하면, 우리교회 교인들이 무서워요. 오후 예배 때 기도하라고 하면 하나 둘 다 거절하는 거예요. 마치 목사님들에게 글을 쓰라고 하면 안 쓰듯이. 왜 기도를 안 하느냐 하면, 기도하게 되면 기도 내용을 가지고 얼마나 난도질을 할 것이냔 말이지요. 그래서 가슴이 떨려서 기도를 못 하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제 생각에는 기도해서 씹히고 해야 이 사람이 자기 의를 포기할 수 있는 겁니다. 만약에 씹히지 아니하면 아직도 자기 의가 남아 있어요. 김 집사님 경우에는 가족들에게 씹힙니다. 그러니까 십자가의 길을 가는 거예요. 만약에 김 집사님 주위에서 전부 ‘잘 한다. 정말 훌륭하다.’ 이런 소리만 하면 정말 자신이 잘 하는 줄 알아요.

[달려라 하니]는 외롭고 슬퍼도 앞만 보고 달리잖아요. 그런데 사람들은 교회 나와도 친구하고 이야기하고 수다 떠는 것이 재미있지 혼자 달리기 싫어. 십자가 길을 가지를 못해요. 아예 계모임을 해요.

씹힐 때는 씹혀야 됩니다. 그래야 내가 죄인인 것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씹힐 때는 조용하게 씹히세요. “씹어라! 씹어라!” 하고 열 내지 말고. 왜냐? 주께서 아시잖아요. 우리의 앉고 일어섬을 주께서 아세요. 광고하면서 십자가 길 가는 것. 이것은 십자가 티를 내는 것이지 전혀 십자가 길로 안 들어선 거예요. 진짜 십자가의 길은 본인이 원치 않는 길을 가야 그것이 십자가 길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욥입니다.

욥은 씩씩거리면서 “주여, 왜 저를 이렇게 힘들게 합니까?” 욥의 친구는 욥과 이야기하지만(같은 인간들끼리 이야기하지만) 욥은 하나님과 이야기해요. 그것이 성도에요. 욥의 아내는 욥에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 저주하고 죽어라!” 그러나 욥만은 하나님께 이야기합니다. 욥이 사람과 이야기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해도 전부 튕기니까(하나님 뜻이에요) 어쩔 수 없이 대화할 사람은 하나님뿐이에요. 완전히 나다나엘이에요. 무화과나무 밑에서 하나님께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는 방법입니다. 사도바울도 이렇게 인도했어요.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경건’이란 겁니다.

12절에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이 말은 경건하면 핍박 받는다는 말이 아니고, 자기가 생각하는 경건은 경건이 아니라 폼 내는 것이고, 핍박 받게 되면 바로 주께서 의도적으로 경건의 길을 가고 있음을 알려주는 하나의 계기판이란 것입니다.

마지막 때의 구조 자체가 주변에서 도와줘요. 누가? 안 믿는 사람들이 도와주죠. 어떻게? 핍박함으로 말미암아 나로 하여금 주님과 이야기할 수 있는 경건.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은 노닥거리는 것이고, 주님과 늘 이야기하는 그런 경건에 주위 사람들이 많이 도와주지요. 고맙다고 해야 합니다.

13절 봅시다.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아까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에 어떻게 한다고 했습니까? 말세에 어떤 구조가 있다? 천국 갈 사람은 천국으로 화끈하게 가게 하고, 지옥 갈 사람은 지옥으로 화끈하게 가게 하는데, 지옥 갈 사람은 누구를 핍박한다? 천국 가는 사람을 핍박해서 경건하게 살게 만들고, 지옥 갈 사람들은 점점 더 악하게 되지요.

지옥 가는 사람들이 악하다고 했는데, 이것은 누구의 안목입니까? 지옥 갈 사람과 점점 더 멀어진 안목에서 보니까 점점 더 악해 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악한 사람 본인들의 입장에서는 전혀 악하다고 생각 못해요. 그래서 이 악한 자들은 핍박이 없지요. 왜? 다들 악하니까. 그리고 경건도 자기가 만들어낸 경건이니까.

중요한 것이라서 다시 이야기합니다.
역사가 갈라지면 뭐가 된다고 했습니까? 묵시가 된다고 했지요. 묵시가 되면 위에는 하늘 밑에는 땅. 그 사이에 기둥처럼 버티고 있는 것이 예수님. 이 예수님 자리에 현재 누가 버티고 있습니까? 성도지요.

마지막 때에 성도가 하늘과 땅 사이에 버티고 있는 이 일을 누가 도와주는가 하면 땅에 있는 이 사람들이 도와줘야 예수님이 고난 받고 가신 그 길을 성도가 같이 합세해서 갈 수가 있는 겁니다. 왜? 예수님이 누구에게 핍박 받았습니까? 땅에 속한, 역사에 속한 사람한테 묵시에 속한 예수님이 핍박 받았기 때문에 그 핍박을 같이 받을 수가 있는 기회를 안 믿는 사람을 통해서 우리에게 제공한단 말입니다.

안 믿는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자기 의라는 겁니다. 자기 의가 뭐냐 하면, 자기와 대화하는 겁니다. 독일의 철학자고 희망 신학의 근거를 마련한 에른스트 블로흐라는 사람이 있어요. 이 사람이 이런 주장을 했습니다. ‘생각은 시간을 초월하게 한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모든 사람은 마지막에 자기와 대화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울증도 마찬가지고. 모든 사람의 마지막은 자폐증입니다. 남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와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진짜 성령 받은 사람은 누구와 이야기하는가 하면 주님과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주님과 이야기하는지 자기와 이야기하는지 어떻게 아는가? 말씀과 이야기하면 주님과 이야기하는 것이고 말씀과 관계없이 이야기하면 자기와 이야기하는 거예요. 하여튼 성경 말씀이 떠오르거든 주님과 대화한 것으로 여기시고, 성경 말씀과 관계없이 생각나거든 마귀와 속삭인 것으로 보시면 됩니다.

제가 쓴 글에 이런 것이 있어요. ‘젊은 사람들은 꾸미고, 늙은 사람들은 탈출을 꿈꾼다.’ 젊은 사람들은 만날 꾸미면서 삽니다. 가구는 이렇게 배치하고 화분은 이쪽으로 놓고 이렇게 항상 꾸미는 것을 생각하고, 늙은이들은 ‘하이고 빨리 죽어야 할 텐데.’ 하면서 탈출을 꿈꾸고 있어요. 둘 다 지옥 갑니다. 왜냐하면 평소에 주를 위해서 살아본 적이 없고, 평생 --

이번에 장례식에 가서 제가 호되게 설교 했어요. 죽은 사람은 듣지를 못하니까 산 사람에게 소리쳤어요. ‘어떻게 평생을 자기만을 위해서 사는가?’ 라고. 성경에는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5:15).”고 되어 있는데, 평생을 자기만 위해 살아서 ‘아이고 세상 더럽다. 빨리 죽자.’ 이런 사람이 천국 갈 수 있습니까? 자기만을 위해 살았는데.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장례식 설교 본문이 요한복음 3장 6절이었습니다. 니고데모는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 대답이 6절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성령이 와야 되지요. 여기에서 성령이 온다는 말은, 성령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그래서 성령에 오게 되면, 모든 것이 전부 하나님의 은혜임을 압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세상을 모르는지, 노무현이 14살 때 자기 집 근처에 부엉이 바위가 있는 이유를 알았겠습니까? 몰랐겠지요. 자기가 나중에 그 바위에서 뛰어내릴 것을 알았겠습니까, 몰랐겠습니까? 몰랐지요. 따라서 지금까지 살아 온 것도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주신 햇볕과 공기와 물로 살려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은혜를 감사할 줄 몰랐어요. 오직 자신에게만 감사하고 격려하고 하다가 자기 자존심 지키기 위해서 죽었어요. 그것은 불신자는 결국 이렇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마지막 때의 장치요, 그 마지막 장치 중 하나로 부엉이 바위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만을 위해 살았는데, 어느 날 십자가의 은혜가 찾아오고, 십자가의 은혜가 누구로부터 왔다면 십자가 알게 된 그 자체가 이게 그냥 주님의 은혜가 아니라 아예 구원까지 보장받는, 무엇으로? 도치 또는 치환. 주님이 내 자리에 들어오고 내가 주님의 자리에 들어가서 천당 갈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목사가 시키는 대로 열심히 충성하면 천당 가는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천당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나는 말세 때 구원 받는 하나의 장치가 되겠지요. 이것이 바로 경건입니다. 핍박 받아도 괜찮아요. 핍박 받는 것도 하나의 장치니까.

이렇게 말씀을 드려도 돌아서면 또 고민하고 있어요.

제가 방금 이야기한 것을 정리해 봅시다.
반드시 하나님의 일은 성령을 통해서 오고, 성령은 성경 말씀 따라 역사하지요. 디모데후서를 보겠습니다. 3장 13절에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한다.’고 했는데 그들이 악하다는 기준이 뭔가? 성경이죠.

15절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자, 여기서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다고 하는데 누구의 은혜입니까? 하나님 은혜지요. 저는 신학교 다니면서부터 지금까지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이 대목을 설명하면서, 어려서부터 성경을 안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설명하는 사람을 한 사람도 못 만났습니다. 그리고 어떤 주석에도 그렇게 해석한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통상적으로 이 구절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디모데가 어릴 때부터 어머니로부터 신앙교육을 잘 받아서 어려서부터 성경을 공부하고 배웠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디모데는 어머니께 순종을 해서 어릴 때부터 성경을 읽었다. 우리도 목사님이 가르치면 잘 순종해야지.’ 라는 식으로 가르쳤고,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성령이 오기 전까지는 그게 맞는 줄 알았어요. 그리고 열심히 성경 읽고 그 말씀대로 순종해야 구원 받는 줄 알았어요.

지금 깨닫고 보니 어릴 때부터 성경을 아는 것도 마지막 때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내가 노력한다고 해서 성경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 우리교회도 중등부 학생들이 있지만, 우리 000선생님 참 노고가 많습니다. 교회 도착하면 바로 휴대폰 열어서 게임합니다. 설교 안 들어요. 그런데 다 듣고 있어요. 안 듣는 척 할 뿐이에요.

그러면 곱게 들으면 될 텐데 왜 안 듣는 척 하면서 듣는가? ‘목사님! 내 교회 온 것 고마운 줄 아세요.’ 이런 뜻이에요. ‘내가 교회 안 올 수도 있지만 인간성이 좋아서 와 줍니다.’ 이것이 바로 존재의 가치지요.

애들은 항상 자기 존재의 가치를 부모한테서, 선생님께, 친구들에게 찾아요. 컴퓨터가 그것을 가르쳤고 모든 것이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요. 초등학교 선생님들은 잘 알지요? 초등학교 2학년도 자기 존재의 가치를 드러내려 해요. 회초리 들고 때리려고 하면 휴대폰으로 때리는 장면 찍으려 하고.

우리는 선생님이 때리면 고마운 줄 알았는데, 요즘은 아니지요. 선생님을 타인으로 보고 나는 나로 족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선생님이 때리거나 제재하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간섭하지 마세요.’ 이렇게 나와요. ‘나는 나로 족하다.’ 이것을 어릴 때부터 가르쳤어요. 그러니까 선생님도 타인입니다. 자기 빼고는 모두가 타인이니까. 그러면 타인과 나를 연결하는 고리가 있습니까? 없어요. 그래서 타인을 이용은 하지만(예수님도, 선생님도 모두 이용) 결국은 자기가 자기와 이야기해요.

제가 수요일 그런 설교를 했습니다. 결혼식에 가니까 신랑. 신부가 시부모께 절하고, 친정 부모에게 절하더란 말이지요. 사실은 시부모가 신랑. 신부에게 절해야 돼요. 왜? 결혼해 줘서 고맙다고.

말세에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은 우리에게 섭섭한 일이 아니고 나 자신의 진수를 남들에게 똑똑하게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아주 유용합니다. 나도 어릴 때 저런 자식이었고, 나도 얼마든지 말 안 들을 수 있었고, 내가 교회 오기 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예수 믿으라고 했겠습니까. 나는 잘 모르지만. 분명히 내게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으라고 전도지도 주고 했을 거예요. 나는 관심 없이 그냥 버렸지만.

내가 예수 믿고 난 후에 복음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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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