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강의 2007년02월09일(고린도후서 2, 3장) (2/3)
안산강의 2007년02월09일(고린도후서 2, 3장) (2/3)
이름 : 조현창(IP:220.76.191.49)
그 이야기가 고린도후서 2장 이야기입니다. 이 근심 이야기가 쭉 나오는데 근심은 무엇이냐 하면 5절에 보면 (고후 2:5) 근심하게 한 자가 있었을지라도 나를 근심하게 한 것이 아니요 어느 정도 너희 무리를 근심하게 한 것이니 어느 정도라 함은 내가 너무 심하게 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현재만 들여다보고 사는 사람에게는 근심이 아예 근심을 불러 들여요. 왜? 미래가 없기 때문에. 미래의 능력을 못 믿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지 현재의 내가 내일을 결정한다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지금 현재 잘 하냐 못하느냐에 따라서 그것이 심각한 문제입니다.
여러분, 성도에게 심각한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진지한 것은 있지요. ^^ 그냥 아무렇게나 살지 말고 진지하게 살되 심각한 문제, 심각한 오류, 심각한 파괴 이런 것은 성도에게 해당이 안 됩니다. 어쨌든지 성도가 본인이 잘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옆에 계신 분 덕분으로, 두 자로 대.신.
참, 이것을 자꾸 잊어버려요. 성경공부 할 때마다 생각나고 그 다음에 잊어버리곤 하는데. 대.신. 살아간다는 사실을 몰라요. 인생을 대.신. 살아준다는 사실을 모르고 자꾸 내가 잘 해야 내가 구원받는다는 생각을 하는 겁니다.
사실은 기본인데. 사실 복음의 기본 아닙니까. 주님께서 내가 나쁜 짓을 아무리 죽을 때 까지 한다 하더라고 구원받는데 전혀 지장이 없어요. 왜냐하면 처음부터 대신해 주기로 작정을 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결정해서 내 인생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내 인생을 대신 사신 분 때문에 그 덕분에 내가 구원받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사는 버릇이 있기 때문에 내 인생을 내가 꾸려서 내가 결정지으려고 합니다. 내가 결정지으려고 하니까 어느 것이 옳은가 그 다음에 어느 것이 그른가 하잖아요.
어느 것이 옳은가 어느 것이 그른가 한다는 것은, 중요한데, 그것을 내가 판단한다는 말은 결국은 최종 판단자를 누구로 결정했다는 말입니까? 세상에! 자기를 최종 판단자로 결정했다는 말 아닙니까!. 이것은 누구를 모독해요? 내가 내 인생 결정해서 천당 갑니까? 아니잖아요. 주님께서 이미 판정을 하셨죠. 너는 백날해도 죄인이며 너가 구원받는 것은 내가 너 대신 행한 의 때문에 구원받는다.
그렇다면 최종 판단자가 누구입니까? 내가 아니라 이 말이죠. 내가 아닌데 평소에 우리는 예수 믿는다 말만 했지 세상 사람들처럼 결정은 누가하고 판단은 누가 합니까? 내가 내리잖아요. 판단을 내가 내리다 보니까 거기 따라오는 것이 무엇입니까? 결정을 내가 하니까 그것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죠. 책임감을 느낀다는 자체는 결국 누구를 모독해요? 최종 책임자이신 누구를 모독합니까? 예수님의 결정 사항을 누가 방해합니까? 내가 방해하잖아요, 내가.
무슨 말이냐 하면 사람이 최종 판단자를 만나기 전까지는 항상 최종 판단자가 누가되느냐 하면 내가 됩니다. ‘주여, 잘 해 보려고 하다가 실수 했는데, 다음번에는 잘 해 보겠습니다’ 요런 거. ‘주여 제가 판단해서 이것은 잘 못되었다 해서 이것은 안 했고, 이것은 잘 했다 싶어서 했습니다’ 이러는 거예요.
그런데 둘 다 주님에게는 의미가 없는 거예요. 대.신. 죽으셔서 구원받았잖아요. 그런데 대신 죽었다는 것은 가위로 잘라 버리고 ‘뭐 대신 안 하셔도 되요, 알아서 하겠습니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결국 그것은 누구를 공격한 것입니까? 복음을 안다는 자가 누구를 공격해요?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공격하지요.
가장 공격하는 자가 누구냐? 복음을 안다는 자가 공격하는 거예요. 복음을 알고 난 후에 내가 잘 해 보겠습니다, 이 따위 사고방식을 갖는 겁니다.
고린도후서가 쉽다고 하지만 가만히 보니 쉽지가 않죠. 지금 고린도후서 성경 해석을 누가 방해합니까? 내가 방해하지요. 왜? 최종 판단자가 나이니까. 그렇게 되면 안 되지요. 그렇게 되면 최종판단자가 나 같으면, 대신 죽으심의 의미가 그 사람 앞에서 날아갑니다, 최종 판단을 내가 한다면.
지금 주님께서는 대기하고 계세요. ‘너 대신 내가 와서 너를 구원한다.’ 대기중인데 ‘가만있어 보세요, 지금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자기 딴에는 열심히 살려고 하는 거예요. 열심히 산다는 말은 뭐예요? 자기가 판단해서 나쁜 짓은 안하고 착한 일만 골라 하겠다. 그렇게 해서 누적된 의로 괜찮은 미래를 보장 받겠다 그것이지요.
죄 지으면 미래가 나쁘고 저주받고, 현재 착하면 미래에 복이 주어지고..., 그런데 이런 사고방식 자체가 결국 무엇에 위배된다? 대신 죽으심의 기쁜 소식에 위배되지요. 그러니까 결국은 아까부터 내가 이야기 한 것이 뭡니까. 왜 자꾸 현재의 나를 미래로 밀어 넣으려고 하느냐 말입니다.
그러면 고린도후서 1장 21절의 말씀처럼 이미 성령은 우리 속에 보증으로 와 있다는 의미와 가치를 어디에서 찾습니까. 찾을 수가 없지 않느냐 이 말입니다. 근본적으로 기독교가 무엇이냐, 복음이 무엇이냐, 예수님이 누구냐, 근본적으로 완전히 바뀌어야 된다 이 말입니다. 바뀌어야 되요.
세상살이 오래 하다보면 이것이 잘 안 바뀌어요. 맨 날 결국 남는 것이 뭐냐 하면, ‘주여, 열심히 살았잖아요’ 이것만 남아요. ‘나쁜 것은 나쁘다고 내가 피했잖아요.’ 이런 것. ‘좋은 것은 내가 목숨 바쳐 충실히 하려고 했잖아요’ 이것만 남는다고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피 흘리시면서 누가 너를 최종 판단자로 지명한 적이 있느냐? 하시는 겁니다.
아까 고린도후서5장 이야기했지만, 사람이 몸이 아프면 판단 생각보다도 몸이 안 따라 주어요. 사람이 책임감이 강하면 강할수록 본의 아니게 남에게 피해를 입혀요. 이 [본의 아니게]에 해당되는 것이 몸이 아플 때, 그리고 치매에 걸렸을 때, 그리고 정말 부지중에 실수 했을 때, 차로 딴 생각, 졸음 운전하다 사람을 죽였을 때. 그 책임감. 나 때문에 죽었다는 그 아픔. 이 거 못 견디어서 ?(37분20초)
그런데 인간은 처음부터 부지중에 누구를 죽였느냐.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는 아무런 감각이 없어요. 우리가 죽여 놓고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너희가 죽인 것이 아니고 내가 너희를 위해서 일부러 죽었다. 왜? 너희들의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진다’는 이 따위 사고방식이 바로 옛 사람, 마귀에 속한 옛 속성이기 때문에 이것을 대신 하여서 내가 인생에서 어떻게 살았던 간에 내가 대신하여, 외부에서 이미 잔치 상을 다 벌렸다는 거예요.
이것은 찌짐이 굽고, 잡채하고 할 필요 없어요. 여기서 탕수육 만들고 할 필요 없다 말이죠. 외부에서 이미 다 해 놓았다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언제 쯤 들어오느냐? 이제 중요합니다. 강의의 핵심인데요. 우리가 우리 스스로 하다가 ‘안 될 때’, 우리가 스스로 ‘실망스러울 때’, 성도에게는 뭐가 침투해 들어오느냐면, ‘그래도 대신 죽으신 이가 계시다’는 그 기쁨이 틈바구니 빈 공간에 차고 들어오게 되어 있어요.
이것을 제가 강의 처음에서 ‘미래가 현재에 들어온다’. 이해되시지요? ‘안 될 때’를 고린도 후서에서는 두 자로 환란이라 합니다. 고린도후서12장에서 사도바울은 가시, 고린도후서11장에서는 고난. 고린도후서2장에서는 환란.
환란을 당하니까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근심을 하게 되죠. 근심할 때 사도바울이 편지를 보내요. 너희들이 사는 것은 현재에서 미래를 내다보면서 살아가는데, 나 사도 바울은 미래에서, 미래를 이미 보장받고 난 뒤에, 미래가 (현재) 어디에서 일어나는 가를 찾는 방식으로 현재를 살아간다.
미래가 이미 왔는데 그 온 미래가 어디 쯤 있는가 찾아가는 식으로 자기는 현재를 살아간다. 그러니까 배불렁(?)하지요. 편하지요. 아까 이야기 했지만 교회 어디를 가든지 혼자 있다 하지말고 추방되더라도 너 보고 추방한 것이 아니고 너와 함께 있는 예수님 보고 추방한 것이니까 너만 추방했다고 섭섭해 하지 말고 주님과 함께 추방당했다고 생각해라.
그것이 미래가 현재와 함께 섞여 있는 것입니다. 그 미래가 접촉되는 순간은 다시 말해 성령과 접촉하는 순간에는 현재 내 계획대로 모든 것이 ‘안 될 때’ 그 때 비로소 대신 죽으심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린도후서 2장의 시작점입니다. 전체와 연관됩니다.
고린도후서 5장 8절을 다시 한 번 봅시다.
(고후 5: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니라
자, 이제 이해되십니까? 편하게 이해되십니까? 억지가 아니고 편하게. 사도 바울의 의식이 뭐예요? 미래에 벌써 바탕을 두고, 다리를 딛고 살아요? 현재에 두 다리를 딛고 살아요? 미래에 두 다리를 딛고 거꾸로 머리를 현재에 쳐박고(?)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그림을 그려보면, 하늘에 두 다리를 걸치고 눈은 지금 현재에 있고. 이렇게 살아가고 있고, 우리는 뭐냐, 미래는 보장이 안 되어 있어요. 우리라고 하면 안 되지만, 성도하고 다르니까, 성도가 아닌 사람은 그냥 가 보는 거예요. 갈 때 까지 가 보는 거예요. 어떤 식으로? 현재에 내가 한 것으로 인하여 미래가 열릴 것이야, 라는 그냥 기대하는 거죠.
그러니까 이것은 뭡니까? 홀로 사는 것이죠. 누가 대신 죽으심도 없고 그냥 자기 혼자 알아서 혼자 사는 것을 최선을 다 한다 하잖아요. 그냥 최선을 다해 보는거죠. 그러니 이것은 믿음도 아니고 가상현실라고 해요. 현실은 현실인데 자기 위주의 현실. 제가 강의 처음에 뭐라 했습니까 인간은 누구 우선이다? 자기 우선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이 아니고 뭐가 없다? 미래에 ‘나’가 없어지지요. 그런데 이 사람들은 현재에 누구밖에 몰라요? 나 밖에 모르죠. 병원에 누가 죽더라도 우는 이유가 뭐다? 나하고 연관되어 있을 때 우는 거예요. 그것이 현실이 아니고, 현실은 나 위주가 아닌데 사람들은 그걸 나 위주로 만들어 낸 현실을 무슨 현실? 4자로 무슨 현실? 가상현실입니다.
각자각자 가상현실에서 살아갑니다. 이 가상현실을 구축하려니까 사서 고생하고 사서 근심하고 사서 걱정하는 겁니다. 주님을 찾아오심(?)을 생각 안 하고, 내가 주님을 만날 생각을 하니까 문제가 생기는 거예요. 지금 주님께서 무엇을 주셨느냐는 생각 안 하고, 내가 어떻게 하면 주님을 만날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겁니다.
좀 더 어렵게 이야기해 볼까요? 부활의 능력은 나를 깨는 능력이예요. 현재 나의 가상현실을 깨는 능력이 부활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환란 중에 기뻐하고. 사도 바울은 가시 빼 달라고 세 번씩 기도해도 주께서 하시는 말씀이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이것이 고린도 후서 12장에 나오지요.
(고후 12: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항상 고린도후서 12장을 볼 때는요, 성경 전체를 (가지고 설명해 줘야 해요), 성경구절을 가지고 설명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구절 밑바닥에 있는 그 복음을 가지고 설명해 줘야 해요. 성경 구절이 쭉 나열되어 있다면 성경 구절 하나 뽑아서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 구절 밑바닥에 있는 복음, 대신하여 죽으심, 이걸 성경 구절을 통해서 이야기해야 되죠. 어떤 구절을 해도 복음이 나와야 되죠.
고린도후서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다시 한번 1장을 보면, (고후 1:20)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어디 안에 있습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그리스도가 오셨죠. 그러면 약속이 취소 될 수 있다 없다? 없지요. 고린도후서 5장을 봅시다. 21절. (고후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약속이 취소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죠. 이 약속을 우리가 만들어냅니까 못 만들어냅니까? 못 만들지요. 그런데 우리가 우리의 최종 판단자를 왜 ‘나’로 정했습니까?. 이것도 못 하는 주제에, 이것도 못 만드는 주제에, 이 약속도 할 줄 모르는 주제에 왜 자기가 자기를 판단하고 자기가 자기를 평가해서 낙담하고 절망하고 까불고 왜 그러는 거요.
그것은 혼자 살려고 그러는 거예요. 주님과 더불어 살아야 되는데 자꾸 혼자 살려고 그래요. 버릇이 그래요. 자꾸 혼자 살아요. 나 아니면 나를 살릴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결국 신앙이 없는 거예요. 자기는 실컷 신앙생활을 했다고는 하는데 어느 날 가만히 보니까 신앙이 없는 거예요. 지금까지 열심히 나 혼자 살아온 거예요.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온 겁니다. 언제 주님을 부른 적도 없고 주님을 원한 적도 없어요. 주님을 느낀 적도 없고, 내 곁에 있다는 것을 생각한 적도 없고, 내 아니면 내 인생 그냥 살려주는 사람 없다, 그런 본성만 붙들고 살아 온 거예요.
그리고 예수 이야기하면 내가 열심히 다가가야 겨우 만나는, 내 먼 발치에, 그냥 나한테 내가 불러 주기만 기다리는 어떤 등신같은 분. 바보같은 분. 그림 속의 모나리자 같애. 또는 아이 피아노 위에 있는 인형같고. 오늘 잘 잤나? 하고 노는 바비 인형같애. 내가 만져주면 그 때 비로소 반응을 나타내는 그런 예수가 되어 버린 거예요. 내가 등치가 너무 커졌으니까.
여기 나오잖아요. 대신 죽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이라면, 아까 고린도 후서 5장 21절에 나오는, 그 약속은 예수 안에서 뭐가 된다 했습니까? No가 아니고 Yes가 되지요. 그렇다면 그 예(Yes) 됨에 말려든 사람이 누굽니까? 그 예수님의 약속이 Yes(맞다)라고 확정짓기 위해서 부름 받은 사람이 누구예요? 우리 몸, 우리 몸뚱아리 잖아요.
그렇다면 우리는 후패해도 괜찮죠. 왜? 후패해도 우리 속은 날로 새롭고 죽음 뒤에는 뭐가 기다리기 때문에? 새로운 장막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차라리 몸을 떠나서 죽는 것이 더 낫다는 말은 이미 그 말은 뭐냐, 나는 이 세상에 하나님의 약속을 보여주는 도구가 되었다. 내가 내 인생을 꾸려가는 것이 아니고 내 속에 있는 하나님의 약속이 나 보다 더 위대하고 그 약속이 계획, 시나리오 짜여진대로 나는 거기에 말려들고 끌려가는 그런 인간 밖에 안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 섭섭한 것이 아니고 그것이 얼마나 홀가분합니까. 신바람 나는 이야기예요. 그러니까 2장에 보세요. 교인들아 왜 근심하느냐? 신바람 나는 인생을 왜 근심하느냐 말이죠. 그것은 네 인생을 네가 꾸려나가려니까 애썼기 때문에 그렇단 말이죠. 사도 바울이 내가 다시 갈 때는 그렇게 하지 말라 말이죠. 내가 갈 테니까 근심하지 말라 말이죠. 사도 바울이 가는데 왜 근심하지 말아야죠? 사도 바울이 무엇을 가지고 간다? 그들이 걱정하는 것을 해결하는 것을 가져가는가요? 아니잖아요. 무엇을 가져갑니까? 하나님이 예(Yes)하는 하나님의 약속을 가져가지요.
지금 어느 집사님 가정에 부도가 났다. ‘목사님, 부도났어요. 집도 빼앗기고 길바닥에 나 앉게 되었습니다’ 할 때 사도 바울이 전화 받고 ‘걱정하지 마소. 내가 갈 테니까.’ 무슨 뜻입니까? 그 쪽에서 ‘아, 사도 바울이 집 한 채 준비하는구나.’ 이렇게 생각하잖아요. 이것은 뭡니까? 현재 집 한 채 있는 내가 집 한 채 있는 상태에서 신앙생활 잘 하면 미래에 뚤린다(형통한다) 이래 되잖아요.
그게 아니고, 그게 아니라 사도 바울이 전해주려 하는 것은, 주님께서 너를 부르려고 하는 시점이다. 그리고 집 빼앗은 것도 다른 사람이 아니고 주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이다. 사도 바울의 가시가 누가 심어 놓은 가시예요? 주님께서 마귀를 통해 심어 주신 가시예요. 주님께서 주신 가시 맞습니다. 마귀를 통해서 줬지요.
성도한테 죄라는 것도 주께서 허락하사 마귀를 통해서 주어진 죄입니다. 우리에게 죄가 있어야 죄를 대신한 것도 의미가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성도가 죄 짓는 것도 대신 죽으심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마귀를 통해서 집어넣은 죄예요.
따라서 우리가 잘났다가 아니라 우리는 못났어요. 우리는 죄만 짓는 못난 놈인데 다만 감사한 것은 이렇게 못 난 놈도 대신 죽으심 때문에 살려 주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천국가게 되면 우리의 모든 은혜 된 것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이 땅에서 우리가 아무리 잘 살려고 발버둥쳐도 우리는 죄밖에 지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기정사실로 생각하세요. 그래도 근심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하나님의 약속때문이예요. 대신 죽으시어, 죄를 알지 못하는 자로 대신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죄 밖에 모르는 우리를 뭐가 되게 한다?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한다. 아까 고린도후서 5장21에 나와 있죠.
(고후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러니까 이렇게 쉽게 하세요. 하나님은 누구 일 밖에 모릅니까? 자기 일 밖에 모르죠. 하나님은 지금 이 집에서 하는 것 몰라요. 전혀 관심 없어요. 하나님은 자기 일 밖에 몰라요. 어떻게 하면 저 죄 많은 인간이 의인되어 천국에 가느냐 그거만 관심이 있어요.
따라서 우리가 이 땅에 아무리 살아도 뭐 될 수 없다? 의인 될 수 없어요. 왜냐? 의인될 수 없어야 대신 죽으심의 가치가 돋보이니까. 내가 착해버리면 대신 죽으심이 소용없잖아요. 미래에 다리를 딛고 살아야 돼요. 현재의 나를 내가 밀어 붙여서 천국까지 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복음을 모르는 일반 교회에서 목사들이 하는 생각입니다. 열심히 하시오, 게으르지 말고. 충성을 다 하시면 천국 갈 수 있습니다. 기껏 그래봐야 베드로가 자기 목숨 바쳐서 주님께 합세하는 것 밖에 안되요. 주님께서 그것을 용납했습니까 안했습니까? (용납하지 않으셨지요.) ‘주여 제가 죽기까지 주를 따르겠습니다’ 베드로가 했을 때 주님이 뭐라했습니까? 장하도다 이 놈아, 천당가자. 이랬습니까 뭐랬습니까? 너는 내가 있는 곳에 오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뭐냐 주님께서 대신 죽으심이 아니면, (그 때가 주님께서 십자가 지시기 전이거든요.) 주님께서 십자가 안 지면 사도 베드로가 백날 천번 만번 죽어도 천당에 못가요. 그것이 우리의 입장이예요. 우리의 현실입니다. 가상현실이 아닙니다. 실제 우리의 모습이 그런 모습인데 왜 우리는 자꾸 우리 위주의 가상현실을 만들어서 거기서 최선을 다 하려고 합니까? 최선도 아니면서.
성경 전체를 보세요. 최선을 다하라는 말이 있는가. 조폭(조직폭력배) 사무실에나 있지 성경에는 없어요. 하면 된다는 말이 성경에는 없어요. 다단계에서 하는 이야기이지 성경에는 없어요.
주님께서 아직 우리를 죽이지 않는 것은 주님이 힘이 없어서 안 죽이는 것이 아니고요, 살아가면서 죄를 좀 더 깊이있게 알라고 살려주시는 겁니다. 죄라는 것을 깊이있게 파 들어가 봐라. 거기 보면 최선을 다하며 애쓴 것도 죄라는 것을 좀 알라고.
거기에 7절에 보면,
(고후 2:7) 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저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저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
(고후 2:8) 그러므로 너희를 권하노니 사랑을 저희에게 나타내라
(고후 2:9) 너희가 범사에 순종하는지 그 증거를 알고자 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고후 2:10) 너희가 무슨 일이든지 뉘게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
(고후 2:11) 이는 우리로 사단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그 궤계를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
근심하는 것 자체가 어디에 속한다? 근심 안 할 수는 없지만 근심하고 계속 근심하는 것은 근심의 범주에서 못 벗어나는 것은 결국 사탄의 책략이다는 말입니다. 결국은.
주님의 사랑이 있잖아요. 주님의 용서가 있는데. 계속 근심한다는 것은 마치 하나님의 일을 내가 안 하면 하나님의 일이 안 되는 것처럼 착각하는데서 오는 겁니다. 우리가 요한복음을 쭉 했지만 세월이라는 것이 고마운 것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세월 지나면 다 잊어버려요.
요한복음 6장을 봅시다. 38절 (요 6:38)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요 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주님이 하시는 일에 어떤 하자가 있겠습니까? 없죠. 주님이 하시는 일에 어떤 누락이 있겠습니까? 없지요. 그런데 왜 우리는 근심합니까. 이상하잖아요. 결국 우리는 누구를 안 믿는다? 예수님이 하시는 솜씨에 대해서 안 믿는다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열심히 한다고 안 택할 자가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요, 내가 열심히 안한다고 해서 택할 자가 지옥 들어가는 것도 아닙니다.
걱정을 해도 주님이 걱정할 문제이지 왜 우리가 걱정합니까? 상당히 수상해요. 참으로 이것은 수상하기 짝이 없어요. 그 마음가짐이 수상해요. 정신머리가 엉뚱한데 가 있어요. 분명히. 그 사람은 정신을 엉뚱한데 팔고 있어요.
뭔가 두렵다는 것. 한 번 정리해 볼까요. 두렵다는 것은 지금 주님에게 정신이 전혀 안 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두렵다는 것은 이미 자기가 결정 내린 것이 있다는 말이고, 이 사람은 자기 결정을 무가치하게 보지 않고 뭔가 큰 가치가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다시 할께요. 두렵다는 것은 자기가 어떤 결정을 내렸다는 말이고 결정을 내렸다는 말은 결정을 내린 나에게 가치가 있다는 말이고, 나에게 가치가 있다는 말은 나 홀로 살아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하고 전~혀 동떨어진, 예수님이 없는 세계에서 지금 혼자 놀고 있어요. 혼자 지금 힘쓰고 있는 거예요. 전혀 주님과 관계가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 요한1서에 보면 무엇이 두려움을 쫓습니까? 사.랑.입니다. 사랑이 두려움을 쫓지요. 그러면 사랑이 있는 앞에서 우리의 결정은 의미가 없잖아요.
아버지; 얘야 너를 사랑한다. 이 집은 네 것으로 해라.
아들; 아버지, 제가 열심히 했으니 지금 받을 만 해서 받겠습니다.
아버지; 내가 너를 사랑한다 했잖아. 그냥 받아.
아들; 제가 열심히 해서 받겠습니다.
이것은 사랑을 배척한 것 밖에 안되죠. 그러니까 사랑이 오게 되면 남는 것은 반응은 뭐 밖에 없습니까? ‘감사합니다’ 밖에 없죠. 그죠? 감사합니다, 이니까 내가 사랑받을 만 해서 받는 것입니까? 아니면 결정을 누가 했습니까? 주님이 결정해서 사랑했으면 내 결정은 사랑 앞에서 의미 없지요. 의미 없으니까 사랑 앞에서 내 결정이 의미 없다는 말은 내가 최종 판단자가 아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