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강의 2007년02월09일(고린도후서 2, 3장) (1/3)
안산강의 2007년02월09일(고린도후서 2, 3장) (1/3)
이름 : 조현창(IP:220.76.191.49)
안산강의 2007년02월09일
오늘은 고린도후서 2장을 할 차례입니다.
사도 바울은 ‘누가 최후에 살아남을 것인가?’.
이것은 ‘제발 미래에서 현재를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현재에서 미래를 바라보면 희미해서 안 보입니다. 현재에서 미래를 보면 미래는 비현실이 됩니다. ‘어느 누가 (미래를) 아나? (미래에) 가 봤나? 뭐, 가 보면 있겠지. 죽으면 천국 있겠지. 중요한 것은 현재야.’ 현재 위주로 살아가게 됩니다.
사도 바울의 고린도 전후서를 보게 되면, 현재에서 미래로 치고 들어가는 관점이 아니고요, 미래가 이러하니까 따라서 현재는 이러해야 한다는 관점입니다. 그래서 미래가 불확실한 사람은 신앙생활 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시도해 보는 것이죠, 시도. 그냥 한 번 밀어 보는 거죠. 시도해 보는 거죠.
고린도 후서에서 사도 바울이 말한 핵심을 하나만 끄집어내라고 한다면, 우리의 미래가 얼마나 확실한지 지금 우리가 현재 당하는 환란에도 끄떡없다는 정신입니다. 미래가 너무 확실하기 때문에, 현재 몸이 아프다든지 바쁘다든지 생활이 궁핍하다든지 하는 이런 것으로 아무리 흔들어 대도 그것으로 인하여 미래가 변함이 없다, 는 것이 고린도후서의 중요한 중심 테마입니다.
이런 관점을 가지고 보게 되면, 그 다음에 무엇이 궁금하게 되느냐 하면 ‘도대체 사도 바울은 미래를 어떻게 잡았기에 현재 그 어떤 환란도 흔들림이 없다는 말인가?’ 아주 희한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겠지요. 우리가 보통 적금을 들거나 펀드를 넣을 때 미래를 누가 만든단 말입니까? 현재 내가 뭔가 꼼지락 꼼지락 해야 미래에 돈을 타죠.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미래는 누가 만들어요? 미래는 미래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현재의 내가 미래를 만들잖아요. 그것이 우리들의 일상 생활입니다. 모든 사람이 이해하고 납득이 갑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것이 아니고 미래가 너무나 확실하기 때문에... 무엇이 확실하냐면 미래는 확실하고, 무엇이 불확실하냐, 현재는 불확실하다고 봅니다. 그러면 현재라는 밀림, 현재라는 수풀을 헤치면 그곳에서 무엇이 톡 튀어나오겠습니까?
밀림 속에서 토끼나오고, 멧돼지 나오고, 여러 야생 동물들이 나오듯이, 현재라는 수풀을 헤치면 무엇이 톡톡 튀어나오겠어요? 사도바울의 입장이라면 무엇이 튀어나오겠습니까? 미래의 모습이 나오겠지요. 이해되십니까?
여기 이렇게 밀림이 있습니다. 아프리카 밀림이 있고, 저 멀리 눈 덮힌 킬리만자로의 산이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 밀림에서 킬리만자로 산으로 간다면 미래는 확실합니다. 미래는, 목표는 킬리만자로 산. 그런데 우리는 가는 길을 모르잖아요. 왜? 수풀이 앞을 가려서 앞이 보이지 않지요.
그런데 미래로 가는 길을 수풀을 헤치며 나가다 보니까, 여기 킬리만자로 산에서만 사는 토끼가 톡 튀어 나왔다, 는 이야기는 ‘아! 이 길로 가면 킬리만자로 산으로 가는 길이구나.’ 알게 됩니다.
고린도 후서 1장부터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환란이 오더라도, 밀림이 오더라도 현재 미래가 보장되어 있기 때문에 그 환란가지고 네 믿음이 떨어졌다, 좌절되었다, 잘 못 되었다 이렇게 곡해를 하지 말라, 라는 것입니다.
현재 생활이, 인생이 너희를 속일 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는 말도 있잖아요 ^^ , 푸쉬킨인가 그런 멋진 시가 있는데, 미래가 지금 보장 된 상태이기 때문에 현재에 이러 이러한 환란이 있더라도 그것을 헤치면 미래가 이렇게 톡 톡 튀어나오게 되어 있어요. 미래가 보장되어 나오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미래에 만나게 될, 미래에 있을 일들을 현재 만나게 될 때, 그 사람은 환란 중에 기뻐하겠습니까? 안 하겠습니까? 기뻐하죠. ‘반갑다! 친구야!.’
제일 웃기는 것이 친구인 줄 알고 ‘반갑다, 친구야.’ 하고 예수님의 손을 붙잡았는데, 예수님이 ‘처음 뵙겠습니다’ 이렇게 나올 때, 그 얼마나 황당하겠습니까. ^^
제가 이렇게 말하면 의문점이 무엇이냐 하면, ‘목사님 그러면 미래가 현재에 섞일 수 있습니까? 이것이 어렵죠. 왜냐하면 미래는 미래고, 현재는 현재인데 미래가 현재와 섞일 수 있습니까?’ 질문할 수 있겠죠. 미래가 현재와 섞일 수 있는 것은 오직 천국의 능력밖에 없습니다.
지금까지 요약하면 고린도 후서는 천국의 능력이, 다른 말로 하면 미래의 능력이 미래에서만 우리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고 앞당겨서 벌써 어디에 와 있다? 현재에 침투해 있다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보통 사람들은 미래를 누가 어디서 만든다고 했습니까? 현재에서 만듭니다. 예를 들면 적금이나 펀드 넣는 것들. 넣어야 미래에 돈을 찾으니까요. 그런데 고린도후서의 사도 바울 같은 경우에는 이미 미래가 보장되어서 미래의 관점에서 현재를 바라본다고 했어요.
그러면 미래는 내가 만들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현재라는 이 수풀을 헤치면 그 곳에서 무엇을 만납니까? 미래에나 나올 사건, 사태들을 현재 속에서 만날 때 ‘반갑다, 친구야!’ 하게 됩니다.
‘크! 내가 구원받은 것이 맞구나! 내가 환란 중에 이렇게 기뻐하다니! 이것은 미래에나 기뻐 할 일을 지금 현재에서 미리 기뻐한다는 것은 주님께서 천국에서 마중 나온 것이구나.’ 그래서 여기서 궁금한 것이 사도 바울은 도대체, 세상 모든 사람은 ‘장래란 현재 내가 열심히 해야 장래가 보장되기 때문에 미래는 현재 내가 만들어 간다’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사도바울은 거꾸로 ‘미래가 오늘의 나를 만든다. 미래의 능력이 지금 나를 만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을까? 상당히 궁금하지요.
고린도후서 끝 부분을 한 번 봅시다. 제 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 1절에 보면 (고후 12:1)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미래상입니다. 사도바울은 지금 미래를 보았습니다. 지금 미래에 가서 본 것이 아니고, 14년 전에, 앞 당겨 본 겁니다. 앞 당겨 보니까 첫째 하늘도 둘째 하늘도 아니고, 셋째 하늘에 내가 갔는데, 그 사람은 하나님이 아시는 분인데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밖에 있는지 몸 안에 있는지 나도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신다...’ 이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그 세계에서는 무엇이 날아가 버린다? 나. 자아. 자아가 날아갑니다. 나라는 것이 날아갑니다.
사람이, 자아가 있는 것이, 불교식으로 말하면 업보입니다. 불행의 시작, 눈물의 씨앗입니다, 자아가 느껴진다는 것이. 모든 눈물은 자아 때문에 생깁니다. 내가 미리 현실을 가상현실로 만들어 놓은 것이 있기 때문에 그 가상현실대로 안 될 때, 우리는 그 때 누가 우느냐? 소리 높여 내가 울어요. 내가 운다구요.
내가 모르는 사람이 병원에 현재 누워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어제 밤에 돌아가셨는데 내가 웁니까? 안 웁니까? 안 울지요. 그런데 만일 어제 밤에 삼촌이 돌아가셨다. 내가 슬프죠. 삼촌, 아는 사람이 돌아가셨으니까요. 사랑하는 사람이 돌아가면 더 슬프지요.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병원의 입장에서는 그냥 사람이 죽은 겁니다. 이 사람의 친척이 누구인지 몰라요. 그냥 사람이 죽은 것뿐이지만, 그 사람이 죽었다고 우는 사람 따로 있고, 안 우는 사람 따로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건이 터졌다고 우는 것이 아니고, 나와 연관되어 있을 때만 사람은 반응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지금 죽는 사람이 많아요. 다 슬퍼해야 합니까? 그렇지 않지요. 내가 아는 사람만 골라서 슬퍼해야 하지요. 그러니까 인생이 행복하다 불행하다 하는 것이 언제나 항상 자기 입장이지 이것이 진정 불행해서 불행한 것이 아니고, 행복해서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만든 자기 입장을 생각하니까 불행이고 슬픈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불행하라고 또는 행복하라고 돌아가는 것이 아닌데, 다만 하나님이 하는 일과는 따로 나만의 일이 있기 때문에, 내가 그 하나님이 (따로) 하시는 일을 보고 좋아 했다 어떤 때는 슬퍼했다, 혼자 울었다 웃었다... 그러다가 세월 다 보내고 머리가 허옇게 쉬고 머리는 다 빠져버리고 나중에는 염색할 머리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
인생이라 하는 것은 자기도취에 빠져 살다가 주님께서 부르실 때 그냥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미 미래 세계에 이런 경험을 했습니다. 미래 속에 무엇이 없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모른다 했지요. 그런데 지금은 14년 전 생각을 해 보니 ‘그’가 누군지 알아요. 나인 줄 알았죠. 그런데 14년 전 당시에 그 계시를 받을 때는 그 사람이 나인지 알았습니까? 몰랐습니까? 몰랐지요.
나중에 그 계시에서 벗어나 보니까 그 사람이 누구였다? 바로 나다 이 말입니다. ^^ 이것이 사도 바울의 미래상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미래상입니다. 우리는 뭔가 티끌만한 것이라도 우리와 연관이 있을 때만 반응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항상 ‘나’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언제의 법칙이냐 하면, 현재에서 내가 미래를 만들려고 할 때에는 이러한 주눅드는, 항상 육신으로 울었다가 슬펐다가 하는, 그러한 운명을 질 수 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미래가 되고 안 되고는 내가 잘 되어야 하니까.
내가 잘 되어야 미래가 잘 되니까. 그러니까 나를 버릴 수가 없어요. 나를 못 버리니까 여기서 근심도 찾아오고 걱정도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후서 12장에 보니까 거기에 사도 바울은 무엇이 없었습니까? 나가 없지요. 나가 없고 무엇만 있습니까? 미래만 있지요.
그 미래 속에 들어가면 누구는 없어진다? 내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미래에서는 내가 없어요. 그냥 ‘함께 있는 나’ 밖에 없어요. 내가 만들어 놓은, 내가 만들어 가는 세상이 아니고, ‘어떤 세상’에 있는데 그 곳에 초청받은 것이지요. 누구에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삼층천까지 올라 간 것이지 자기가 사다리타고, 엘리베이터 눌러서 올라간 것이 아니다 말입니다.
자기가 엘리베이터 눌러서 1층, 2층, 3층 올라 간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초청해서 휩싸이다 보니까 3층 세계에 올라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명히 우리도 똑 같은 팔자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미 미래가 보장되어 버렸어요. 연탄가스 중독으로 죽던지, 오토바이 사고로 죽던지 간에 그 죽는 순간부터 무엇이 되느냐 하면 고린도후서12장입니다.
전기에 감전되어 죽던지 상관없이, 죽으면 고린도후서 12장입니다. 이미 보장 받은 상태입니다. 이것이 고린도후서에 또 나옵니다. 고린도 후서 전체를 알기 전에 중간 중간 알려 주도록 할 텐데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전체를 보는 안목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에 보면 16절에 (고후 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날로 새롭도다' 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지금 현재 내가 나를 새롭게 만들었기 때문에 날로 새롭게 되는 것입니까? 그런 거예요? 아니잖아요. 아니예요. 날로 새롭다는 말은 우리가 새삼스럽게 안 만들어도 나를 만드신 분이 따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고린도후서 5장에 보면 하늘에 이미 장막을 만들어 놓았어요. 그렇기 때문에 고물딱지 같은 (고물이라 해서 죄송합니다 ^^) 이 몸을 무슨 몸이라? 후패한 몸. 다른 말로 하면 고물. ‘이 고물, 정 고물...’ 이렇게. 고물이죠. 고물은 후패해야 되는 겁니다. 자기가 늙는다는 것에 대해서 너무 아쉬워하면 안 됩니다.
특히 남자는 몰라도 여자같은 경우에, 제일 아쉬운 것이 젊을 때에는 화장발이 잘 받아요. 화장하면 화장이 먹어주는데, 나중에 나이가 많아져서 화장을 하면 화장(품)이 피부를 배척해요. ^^ 놀기 싫다고. 화장(품) 위신 다 버린다고. 피부야 미안한데 내가 참 네 피부에 바르려니 내가 참 우사스럽다(?) 할 정도로 뭔가 화장품하고 (피부하고)서로 싸우는 것 같아요. 그래서 자고 나면 화장발이 다 떨어져버려서 귀신처럼 해 가지고... ^^
물론 과학적으로 여성 호르몬이 전보다 활성화되지 못해서, (호르몬이) 나오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만, 어떠하든지 새로운 것이 있기 때문에 옛 것은 서서히 정리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체가 되어야 합니다. 교체되는 광경을 이야기 합니다. 미래가 이미 너희 속에 작용하고 있으니 현재는 없어져도가 아니라 없어지는 것이 마땅하니라, 그런 뜻입니다.
그러면 미래의 힘이 무엇이냐? 지난 시간에 했는데 봅시다.
고린도후서 1장 21절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고후 1:22)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책임지고 땡겨 줄게.’ ^^ 책임지고. ‘당겨주는 증거를 대 보세요. 제가 당겨지는 지 어떻게 압니까? 증거가 무엇입니까?’ 환란이 오더라도 끄떡없게 해 줄게. 환란이 없게 해 줄게,가 아니라 환란이 오더라도 너의 견고한 믿음, 성령은 변함없이 너에게 작용시켜 줄게. 이것이 지금 특수한 인간입니다. 세상 사람이 아니고 특수한 인간.
세상 사람들은 현재의 내가 미래를 만들어 가는 사고방식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내가 굼뱅이처럼 게으르고 신앙생활을 잘 못하면 미래에 내가 구원받지 못한다, 라는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그런 사람에게 묻지요. ‘그러면 교인인(이런 분은 성도도 아니죠 그냥 교인이죠) 당신은 미래에 천국가기 위해서 지금 어떤 어떤 일을 하면 확실하게 천국에 갑니까? 그 방법을 한 번 제시해 보세요?’ 하면, 말을 못하지요.
성경 2장 읽고, 기도 2시간해도 안되지요. 왜 안 되지요? (시간이) 2시간만 있습니까? 2시간 반은 없습니까? 성경도 2장만 있습니까? 3장도 있잖아요. 5장은요? 도대체 현재에서 내가 꼼지락 꼼지락해서 한 걸로 미래에 천국을 보장 받을 방법이 없어요. 방법이 없다구요.
무엇을 끊고, 무엇을 해도 백날 소용이 없어요. 왜냐하면 그 나라는, 생각해보세요, 늙어가는 후패해가는 몸 가지고 이웃사랑 해 보았자 이웃 사랑이 되겠습니까? 저 우리 사모님, 편찮을 때에 이웃사랑이 되던가요? 자기 몸이 아픈데. 안 되잖아요. 사람이 아프면 이웃 사랑보다 누구 사랑이 우선이죠? 내 사랑이 먼저 우선입니다. (답변을 안 하시네요^^)
내가 몸이 건강해야 최고 아닙니까. 건강해야 남을 사랑하는 거죠. 그죠? 사람이 아파보면 만사 귀찮고 내 몸 하나 어떻게 하고 싶죠, 관심이. 사실 건강하면 그 다음에 자식이고 뭐고 생각하겠지만... 사람이 몸이 아프면 다 귀찮아요.
지금 사모님이 몸이 아프다면 우리 여기 모임부터 귀찮아서 문도 안 열어줄 거예요. ㅎ ㅎ ㅎ 가소 그만, 오늘은 귀찮아요. 내가 몸이 끄덕거릴 힘도 없소, 그럴 거란 말이죠. 몸이 아프면 성경 공부하러 오시라고 해도 가기 싫어요. 찌부둥하니 신경통에 비가 오려나? 아이고... 웬만해서는 드러눕고 싶지 성경공부고 뭐고 다 하기 싫은 거예요.
사람이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그 주체자가 뭔가 움직일 본인을 먼저 사랑해야, 내가 나를 사랑할 수 있어야 남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순서가 그래요, 순서가. 내가 무슨 특별한 위대한 도사가 되라는 말이 아니고, 인간은 타고 난 순서가 나부터 먼저 챙기고 내가 숨쉰다 싶으면 그 다음에 여력으로 남을 챙기고, 그리되면 저 태평양 건너 선교한다고 난리하고 그런 겁니다.
자기가 아프면 모든 관심사도 다 회수합니다. 다 다시 도로 다 끄집어내는 겁니다. 돈 빌려 준 것 다 받아내고, 교회 작정 헌금한 것도 안내고 다 끊어 버리고 다 그런 거예요. IMF터져버리면 교회 헌금 나오는 줄 압니까? 다 자기 있는 곳으로 다 끌어 모으죠.
따라서 여기서 좀 어려운데, ‘몸’이 후패 한다 할 적에 사람은 자기 몸만 이야기 하는데 사도 바울의 ‘몸’이라 하는 것은 그 ‘몸’에서 무엇이 나오느냐, 몸에서 사상도 나오고 몸에서 성격도 나오고 몸에서 마음가짐도 나오고 몸에서 양심도 나오고... 다 나와요.
‘몸’이 후패한다는 것은 결국은 무엇이냐 하면, 너의 육체만 달랑 바뀌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모든 마음가짐도 성령님이 주시는 것과 기존에 내가 가지고 있는 사고방식과 교체가 되는 과정 속에 우리가 놓여 있습니다. 이것을 한마디로 말하면 미래의 힘이 현재를 묵살내고 , 현재를 미래로 바꾸는 그 과정을, 그 하나님의 일을 고린도후서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참 이 이야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제가 단적으로 이야기 할께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 내가 신앙생활을 잘 해야 구원된다, 이러거든요. 그런 사람들에게 묻고 싶어요. ‘저, 당신이 말하기를 내가 지금 신앙생활 잘 해야 구원받는다고 하는데 하루에 신앙생활 몇 시간 합니까?’ ‘2시간이요.’ ‘그러면 3시간하면 더 빨리 가겠네요’. 그러면 말 못하죠.
‘지금 믿어야 미래에 구원받아요.’
‘그러면 내가 지금 믿는다고 하는 걸 몇 분 몇 시의 믿음을 말합니까? ’
‘그게 무슨 말입니까?’
‘당신은 지금 아침의 믿음이 다르고 오후의 믿음이 다르다고요. 빚쟁이가 왔을 때의 믿음이 다르고, 돈 많은 친척이 선물 들고 왔을 때의 믿음이 달라져요. 한 번 측정해 보세요’
자기 몸이 아플 때의 믿음과 몸이 건강할 때의 믿음이 달라지는데, 어느 믿음을 말하는 겁니까? 그러니까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을 내가 문제 삼느냐하면 현재의 내가 똑바로 안하면 미래가 보장되지 못한다는 기존의 이 사고방식. 이 사고방식이 문제가 된다는 말입니다.
더 노골적으로 말해서 ‘나’라는 인간은 현재를 밀어서 미래로 올라 간다, 이렇게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현재의 나를 밀어서, 현재의 내가 현재의 나를 미래까지 밀어붙이면 나는 성공하고 그렇지 못하고 도중에 힘빠져서 놓아버리면 나는 비참하게 되고 원통해서 넘어진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성경 전체를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내가 보기에는 성경해석을 그렇게 안 하는 것이 드물 정도로 그렇게 다 해석해요. 지금 사모님도 그렇게 안 배웠습니까? 다 그렇게 알고 있죠. 이것이 고린도후서 1장 21절에 성령의 보증이라는 말씀에 보면 틀렸다는 말입니다.
성령은 어디에 사시는 분이냐. 성령은 현재, 과거, 미래가 없으신 분이예요. 이것을 제가 천국이라고 아까 얘기했는데, 다른 말로 하면 묵시 세계입니다. 묵시 세계란 천년이 하루같고 하루가 천년같은 세계입니다. 그러면 하루가 천년이면 12시간은 몇 년입니까? 이것이 묵시 세계에서는 못 따지요. 왜냐하면 하루가 천년 같다는 말은 천년이 하루같다는 말하고 같이 이해가 될 수 있어야 됩니다.
그 말은 시간과 상관없는 세계라고 이해하셔야 합니다. 시간과 상관없이 똑 같이 지금 내가 현재, 미래 이렇게 이야기 하지만, 우리가 현재 미래라고 일방적으로 정했지만, 하나님의 묵시 세계에서는 우리가 정한 대로 안 따라 주고, 지금도 천국이고 그 때 가도 천국이고... 이것이 부활의 세계입니다. 부활의 세계는 묵시의 세계인데 지금도 천국이고 그 때 가서도 천국입니다.
지금 들어오신 성령님이 나중에 만나게 될 성령님과 다른 분이 아니고 똑 같은 성령님이십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이야기해요. 사역하는 사람, 방금 막 목회하려는 목회자에게, 복음을 아는 사람에게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목사님이 되셔서 이제는 기존 교회에 갈 때 혼자 들어간다 생각하지 말고 주님께서 함께 투입되었다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나중에 교인들에게 추방당할 때 혼자 추방당했다고 생각을 하게 되면 되게 억울해요. 하나님이여 이럴 수가 있습니까? 복음만 전했는데..?. 지금 세상은, 요한복음에도 나와요, 그 목사를 추방한 것이 아니고 그 목사 배후에 있는 주님을 추방한 것인데 이 목사는 교인들이 나를 추방한다고 오해해서 너무 씁쓸해 하는 겁니다. 인간들에 대해서 대단히 섭섭해 합니다.
그러나 그 복음을 모르는 분들은, 그 죄 많은 인간들은 주님을 추방하는 겁니다. 단지 내가 추방당하는 것은 내가 그들 편에 서지 않고 주님 편에 섰다는 이유 때문에 밀리다 보니까 추방당한 겁니다.
사무실에서 1년에 한 번씩 물청소 할 때 문턱에 찌꺼기 종이들이 있을 때 양동이로 물을 확 뿌립니다. 여기에 쓰레기 A(종이), 쓰레기 B(비닐)이 있다가, 지금 A에게 물 뿌리나보다 하다가, 물을 뿌리면 둘 다 휩쓸리듯이 지금 보이지 않는 분, 누굽니까? 예수님. 보이지 않는 예수님, 보이는 사람은 나 잖아요. 교인들은 보이는 나를 추방하는 거예요. 왜? 복음을 전하니까. 십자가를 전하니까 십자가가 싫어서 처리를 할 때, 사람들은 자꾸 자기만 억울하다 하는데 왜 자기만 억울해요. 주님과 함께 침투했다가 함께 추방당한 입장인데.
그래서 저는 이것을 보고 사람은 ‘홀로 살지 말라’. 다른 말로 하면 ‘홀로 결정하지 말라’ 해요. 더 줄이면 ‘결정하지 말라’. 더 줄이면 ‘그냥 살아라’. ^^ 사람이 뭔가 걱정하는 것은 혼자 그곳에 투입하려니까 걱정하는 거예요. 주님이 보내시면 보내신 주님이 걱정해야지 왜 본인이 걱정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