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요리문답공부 28(20030629)
소요리문답공부 28(20030629)
이름 : 오용익(IP:59.3.147.39)
소요리문답공부 제 28강 (이 근호목사, 2003년 6월 29일, 우리교회)
구원론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여러 가지 면들을 보면 제일 첫 번째가 예정하심이 되고 그 다음에 부르심, 거듭남, 회개, 믿음, 칭의, 양자, 성화, 영화. 이렇게 아홉가지 여러 가지 면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난시간에 성화에 대해서 했습니다. 성화라는 것은 성화가 아니고 거룩이 되어야 되고, 이 거룩은 단번에 된다고 했습니다. 거룩은 길게 길게 끌 문제가 아니에요.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 해결된다는 식으로 하는데 해결되는 것도 있어요. 대부분 시간 지나면 해결되는데 인간성이라는 것은 시간이 지나게 되면 해결이 안됩니다. 보통은 옛날 지식에다가 새로운 지식을 보태면 발전이라는 것이 성립되는데 인간성 자체는 축적이라든지, 어떤 지식을 모은다든지 그 지식이 힘이 된다든지 그런 것이 없어요.
‘과거를 알아서 현재를 새롭게 한다.’ 그런 이야기도 있습니다만 그런 것은 현재를 변명하기 위한 조치이고 인간은 새롭게 될 수가 없는 겁니다. 교재 135페이지를 봅시다. 거기 도표가 나와 있는데 ‘칭의하고 성화는 어떻게 다른가’에 대한 도표입니다. “칭의란 죄책을 제거하고…” 죄에 대한 책임성이 있다. 이것도 잘못되었어요.
죄에 대한 책임성이란 우리에게 없습니다. 책임질 수도 없고 책임도 묻지도 않고, 그렇습니다. 그냥 죄지은 것 자체이지 죄에 대한 책임을 묻는다고 해서, 예를 들어 사람을 죽인 사형수를 사형시킨다고 해서 그 사람의 죄에 대한 책임을 다 가져가는 것은 아닙니다. 피해보상이라는 것이 되지를 않아요.
만약에 교통사고가 나서 차가 망가졌다면 그 차를 고치거나 바꿔서 보상해주면 되지만 사람은 죽인경우는 이미 죽은 사람을 어떻게 보상합니까? 지하철에서 200명이 죽었다면 지하철공사에서 어떻게 무슨 수로 보상합니까? 죽은 사람을 살려낼 겁니까? 상해나 절도나 다른 피해들은 죄의 근본에 속하지 않고 자투리에 속하고 죄의 근본은 창세기 4장에 나왔듯이 살인죄입니다.
살인죄는 그 살인자를 죽인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관계에서 절단을 시키지 ‘동생을 죽였으니 너도 죽어라’ 라는 것은 보상이 되지를 않는 겁니다. “영원한 기업을 포함해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을 포함한 …” 여기 ‘자녀의 신분’ 이라는 아주 중요한 말이 나오는데 칭의는 신분에 관한 문제라는 겁니다. 이것은 옳게 이야기 했어요.
신분증, 예를 들어 주민등록증이 있는데 과속을 한다고 해서 주민등록증이 바뀌는 것은 아니지요. 아침에 밥을 먹어야 하는데 라면을 먹었다고 해서 신분이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신분은 안 바뀌는 것이 특징입니다. 한번 의인이 된 사람은 영원한 의인입니다. 이게 바뀌지를 않습니다.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 신분이 가지고 있는 놀라운 장점입니다.
신분은 절대로 바뀌지 않습니다. 신분이 바뀐다고 하는 것이 마귀의 역사입니다. 마귀는 예수님의 하신 능력보다도 인간의 능력쪽으로 모든 것을 해석해서 스스로 자포자기 하게 만들도록 하는 것이 마귀의 술책입니다. 마귀의 술책은 죄짓게 하는 것이 마귀의 술책이 아니고 자포자기하게 만드는 것이 마귀의 술책입니다.
가룟유다가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가룟유다는 자기죄를 알고 지옥간 사람입니다. 사람이 잘나갈 때는 좀 실수를 해도 과감하게 반성이 됩니다. ‘잘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이렇게 나옵니다. 그러나 아주 잘못했을 경우에는 그만 자포자기 해 버립니다. 그러면 안되잖아요. 마귀의 역사란 인간을 자기행위에 준해서 그 인간이 스스로 신분을 정하는 쪽으로 몰아세웁니다.
내일부터 노회가 설립이 되는데 노회설립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이 노회에 소속하는 사람들은 깨끗한 사람들인가?’ 라는 시선으로 노회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엄청난 오산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자격이 대단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중의 괴수만 되면 복음을 전할 수 있어요.
대단한 사람들만이 노회를 하고 노회에 소속될 수 있다는 식으로 알고 있고, ‘저렇게 노회에 속해 있으면서 하는 짓이 추하고 꼬락서니가 우스우면서 어떻게 복음을 전할 수가 있는가?’ 라고 트집을 잡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에게 거슬리는 노회는 잘난체, 교만, 자칭 훌륭하고 교만하다고 여기는 노회가 오히려 악마로부터 지배받는 노회입니다.
‘가정이 화목하다’고 하면 언제 화목하겠습니까? 서로가 못난 것을 인정하면서 ‘그대가 존재하는 것은 나에게는 과분한 은사이고 사랑입니다’ 라는 생각을 가질 때 가정이 제대로 가정이 되는 거예요. ‘나는 이렇게 잘났는데 너는 왜 그렇게 못났는가?’ 하면 가정이 아무리 노력해도 가정이 안 됩니다. 금으로 집을 도배한다고 해서 행복한 가정 되는 것 아닙니다.
서로 못남을 발견하는 것이 부부인데 서로의 약점을 잡아서 공격하고 그러다가 헤어지고 애까지 죽여버리는 사태로 가는데 그것이 무슨 부부입니까? 부부는 자기 잘난 것을 시합하려고 있는 부부가 아닙니다. ‘얼마나 못나고 부족한데 같이 살아주는 그것만 해도 고맙다’ 하는 것이 부부입니다.
한쪽만 그래도 문제고 한쪽이 그렇게 나오면 나머지 한쪽이 그런 면을 이용하려 드는 그것이 문제이기는 합니다만 양쪽 다 그런 마음가짐일 때 가정은 화목 안할 수가 없어요. ‘잘했군, 잘했어’라는 노래말처럼 뭘 해도 그저 ‘잘했군, 잘했어’라고 하는 겁니다. 제가 이런 소리를 해서 죄를 유발시킨다는 느낌이 듭니다. 죄가 유발되어도 행복하면 되지요.
죄가 유발 안 되고 뻣뻣한 가정은 더 지내기 힘든 가정입니다. 너무 깨끗해서 몸둘바를 모르겠는 그런 집은 별로 가고 싶은 마음도 안 들고 약간은 지저분하고 어질러져 있어야 더 맘이 편하고 놀기 더 좋잖아요. 인간은 원래 그렇습니다. 너무 완벽하면 대인관계가 좋지 않아요. 그래서 제가 대인관계가 안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제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습니다.
칭의라는 것은 우리쪽에서 칭의를 달성하라는 요구가 아니고 ‘이미 너는 신분상 의로운 신분이 되었다’라고 해서 이것은 변하지 않는 겁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고 우리 삶가운데 어떤 예상치도 못한 일들이 벌어진다고 할지라도 이 신분은 우리가 사진 찍어서 여권 만들 듯이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냥 하늘에서 만들어서 준 것이기 때문에 불변하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시민권인데, 우리의 시민권은 동사무소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 있습니다. 하늘에 있는 시민권이 달라질 리가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고도 합니다. 등기가 되어 있습니다. 우리한테는 생명책이 없지요. 그러나 하늘나라 생명책 2752페이지 둘째 줄에 보면 이름이 적혀 있다는 말입니다.
모세가 그걸 봤어요. 시내산에 올라가서 그것을 보고 난 뒤에 ‘아하, 생명책에 내 이름이 기록되어 있구나’ 라는 것을 알았어요. 그 생명책의 명단대로 구원하려면 그 생명책을 열어야 하는데 그 생명책을 여실 분은 다윗의 후손인 어린양 메시야뿐입니다. 메시야만이 그 생명책을 열어서 오직 자기 십자가복음으로만, 예수님 자신의 의로만 선택된 자를 불러내어서 신분증을 나눠주시고 그리하여 천국은 이루어지는 겁니다.
거룩(칭의를 같은 뜻으로 보고)이라고 한다면 성화라는 말은 필요가 없어요. 성화란 거룩이 아니라는 것이죠. 성화는 미완료된 거룩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미완료되었다는 말은 인간의 수명을 100년을 해야 됩니까, 200년을 해야 됩니까? 만일에 어떤 사람이 교회를 나왔는데 그 사람이 술은 끊었는데 담배를 못 끊었어요.
그가 계획세우기를 ‘6개월만 말미를 주신다면 그 안에 끊어보겠습니다’ 라고 했는데 3개월만에 죽어버렸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담배를 못 끊은 상태로 죽어버렸으니 천당을 갔는지 못 갔는지 알 수가 없게 되었지요. 그리되면 곤란합니다. 그렇다면 누구나 미완료된 거룩이 됩니다. 그게 무슨 거룩이며 성경에 무슨 미완료거룩이 있습니까?
노래야 있지요. ‘인생은 미완성, 쓰다가 마는 편지, 그리다 마는 그림.’ 그 말은 맞아요. 인간들이 볼 때 인생은 미완성이죠. 하지만 거룩은 완성입니다. 단번에 주신 거룩이기에 완성입니다. 신분상 미완성은 남아 있어도 안되고 남아 있지도 않습니다. 제가 하는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거룩이 완성된 거룩이기에 그 거룩으로 인하여 비로소 미완성된 우리의 모습이 얼마나 부끄러운지를 안다는 겁니다.
이미 완성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평소의 죄가 들키우는 겁니다. ‘내가 이렇게 부족하고 내가 이렇게 못났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거죠. 완성된 거룩이 없다면 완성된 것이 없기에 우리는 도달한 수준만큼 자기자랑 할 것입니다. 완성된 거룩이기에 부끄러운줄 알아야지 다 같이 미완성이라면 남과 비교해서 높다는 그것에 대해서 자기자랑할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람 심리가 그렇잖아요. 만약에 남편은 완성된 자인데 아내는 미완성이라면 그 아내는 남편 앞에서 항상 기죽지요. 그런데 완성되었다는 남편이 큰 잘못을 저질렀을 때는 ‘음메, 기살아. 너도 똑같네’ 해서 갑자기 기가 사는 거예요. 미완성이라는 것은 절대적이 아니고 상대적이라는 말입니다. 상대적이라는 것은 비교해 봐야 안다는 것인데 상대적으로 비교해봐야 도토리 키재기 아닙니까?
백날 해 봐야 비교할 의미도 없고 가치도 없게 되어버립니다. 이 교리서에서 성화를 뭐라고 하는가? “죄의 부패를 제거하며 죄인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점진적으로 새롭게 한다.” 이것은 웃기는 소리이고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부패를 제거한다고요? 90세 넘는 분들 다 오라고 하세요. 90세 넘은 노인이 10세 소년보다 더 낫다는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없습니다. 없다고 이 연사는 과감하게 주장합니다. 물론 나이 90세 넘은 분이 아는 것은 많기 때문에 ‘안 돼’ 하는 것은 알지요. 알지만 ‘안 돼’ 라고 잔소리 하는 것은 실제 행동이 따라주는 것과 같습니까? 차라리 어린아이처럼 되지 못하면 천당 못 간다고 해야지요. 나이 먹는다고 해서 인간 되는 것 아닙니다.
새댁들 처음에 시집오면 시부모가 군기 잡는다고 이렇게 저렇게 하지만 사람됨됨이는 군기 잡히는 자가 더 좋을 수가 있어요. 음식솜씨 별로 안 좋고, 이런 저런 일이 서툴러도 남을 배려한다 할지, 세상을 보는 안목 같은 것이 더 넓을 수가 있어요. 자기 가문의 영광밖에는 볼 줄 모르는 시부모보다 더 넓을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나중에는 시부모입에서 ‘우리보다 배운 네가 낫고 젊은 네가 낫다’ 라는 고백도 자발적으로 나올 수가 있지요. 그래서 ‘칼 구스타프 융’ 이라는 정신과 의사는 말하기를 ‘사람은 배웠다고 해서 어른행세를 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속에는 각자 여성성과 남성성이 다 들어 있는데 그 비율에 따라서 남성이냐 여성이냐에 관계없이 남자쪽이 강렬한 사람이 있고 여자쪽이 강렬한 사람이 있다. 그래서 남성이냐 여성이냐에 관계없이 남성이라도 여성성의 비율이 높다면 그것은 결혼해도 여자가 가장 역할을 하고 남자는 그 밑에서 빌어먹고 사는 그것이 가정이다’ 라고 합니다.
이것은 시집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시부모가 여성성이 많고 새댁이 ‘해보겠다는 말인가!’ 이런 식으로 나오면 그 집안은 그 며느리 중심으로 다 돌아가는 거예요. 소위 기가 세다, 혹은 대가 세다고 말하는데 과학자들은 그것을 ‘아니마(anima, 남성이 지니는 무의식적인 여성적요소)’, ‘아니무스(animus, 여성이 가지는 무의식적인 남성적요소)’ 라고 표현한 거예요.
그러니까 부부라는 것은 둘 다 여성적이라든지 둘 다 남성적일 경우에는 잘 안 맞고 서로 보완하고 한쪽이 한쪽을 채워준다는 식이니까 둘 중의 하나는 남자역할을 하고 하나는 여자역할을 하면 되지 남자라고 해서 반드시 남자역할을 할 필요는 없다는 이론들입니다. 그것이 현상적으로 일리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과 사람이 되는 문제하고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것은 성격인데 한번 주어진 성격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잖아요. 성격도 그렇고 죄의 부패성은 나이를 더 먹는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나이 들면 힘이 줄어드니까 젊을 때는 다방에 열 번 가던 것 네 번으로 줄이는 것은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죄를 좀 덜짓겠지요. 열 번 가면 열 번 죄짓던 것을 네 번가니까 네 번으로 줄잖아요
젊을 때는 경마하다가 나이 들면 고스톱 치는 것으로 하는 정도죠. 고스톱 쳐서 딴 돈으로 건강식품 사들였다가 며느리와 싸우고. 그 나름대로 새로운 양상으로 죄가 소박하게(?) 또 나옵니다. 골프 친다고 죄가 아니고 또 아무 짓도 안하고 혼자 이불 쓰고 누워있다고 해서 그것도 죄 안짓는 것이 아니고 인간은 누구나 다 평생 사는 동안 죄가 나옵니다.
“칭의는 죄인의 외부에서 일어나며…” 맞지요. 이것은 잘 정리한 거예요. “… 성화는 인간의 내면에서 일어난다.” 이것은 잘못된 거예요. 인간의 내면에서는 아무것도 안 일어나요. “칭의는 한번 일어난다.” 한 번 일어난다고 하지 말고 덮친다고 해야 됩니다. 단번에 완성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성화는 지속적 과정이며 현세에 완성할 수 없다.”
아닙니다. 무슨 지속적 과정입니까? 현세와 완성할 수 없는 것은 영화입니다. 이 사람들이 지금 오해를 하고 있는 거예요. 영화는 영광스러움인데 이것은 현세에 안 됩니다. 인간은(겉) 후패합니다. 현세에는 영광스러움은 안 되지요. 그러나 거룩은 단번에 되는 거예요. “칭의는 예수님의 공로로 가지지만….” 이 말은 맞지요.
“…성화는 예수님의 공로를 공적 요인으로 가지지만 성령 하나님은 우리를 성화시킨다.”
성령 하나님이 우리를 성화시키는 것이 아니고 성령하나님은 예수님의 선물을 우리에게 적용시키죠. 그냥 그 선물을 우리에게 안겨주죠. 성령이 예수님을 떠나서 일을 안 합니다. 그러니까 이 말대로 하면 칭의는 우리하고 예수님관계고 성화는 우리하고 성령관계라고 하는 것인데 그게 아닙니다.
성화도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이고 그 일을 중간에 하시는 분이 성령입니다. 즉 예수님의 거룩이 우리의 거룩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143쪽에 보면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었어요. 145쪽에 밑에서 열 번째 줄에 보면 “성화는 몸과 영혼, 지성과 감정과 의지 전체에 영향을 줍니다. 성화는 인간의 내면적 삶에서 일어나는데 …” 라고 하면서 철학적으로 아주 유식하게 만들려고 애를 썼습니다.
인간의 오성이 어쩌고, 의지, 감정 다 동원시키는데 이것을 하려고 들면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랍니다. 몸을 아예 부엌칼로 다 쪼개야 합니다. 우리가 오징어도 아닌데 오징어처럼 다리 열 개가지고 한쪽다리는 감성담당, 한쪽 다리는 의지담당, 이것 챙기고 저것 챙기고 아주 바쁩니다. 이렇게 복잡해서 언제 천당 가겠습니까? 이것이 잘못된 것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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