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요리문답공부 27(20030622)
소요리문답공부 27(20030622)
이름 : 오용익(IP:59.3.147.39)
소요리문답공부 제 27강 (이 근호목사, 2003년 6월 22일, 우리교회)
구원론을 계속 공부합시다. 다시 끈질기게 쓰겠습니다. 첫 번째가 부르심, 예정하신 자만 부르시고, 예정하신자만 거듭나게 하시고, 그 다음에 회개시키시고 믿음주시고, 그 다음에 칭의케 하시고, 이런 순서로 구원한다는 뜻은 아니에요, 그 다음에 양자, 일곱 번째가 성화, 여덟 번째 영화,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되는 것인데 예정하셨다는 것은 구원되고 싶어서 환장한 사람만 골라서 구원해주는 것이 아니고, 구원되기로 예정된 자는 반드시 이 땅에 출현하게, 태어나게 만들어요. 출생도 자기 맘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레미야 1장에서 보면 ‘이미 내 모태에서부터 하나님이 나를 지었다’고 했습니다.
예레미야 1:4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출생을 자기 맘대로 ‘아, 나 세상 구경하고 싶어서 미치겠네’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에요. 절대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 대해서 현대인들은 상당히 불쾌하게 생각하지요. 지금은 출생을 자기 맘대로 하겠다고 나서고 있는 그런 시대입니다. DNA 조작, 시험관아기, 그밖에 여러 가지 불임시술에 의해서 억지로 난자와 정자를 결합시키는 방법입니다.
시험관 속에 정자와 난자를 넣어서 흔들고 흔들어서 섞이게 해서 억지로 착상되게 해서 키워내려고 애를 쓰는데, 태어남도 예정한 대로 태어나게 되어 있어요. 그리고 태어나서 몇 년 후에 믿기로 되어 있고 그것도 어떤 목사나 성도를 통해서, 안 그러면 그것도 아니고 그냥 집에서 성경 보다가 안 그러면 길에서 자빠지든지 엎어지든지 어찌되었든 간에 반드시 믿어지도록 하는데 그것도 다 이미 예정하신 자에게만 일어나는 기이한 현상입니다.
칡넝쿨 보면 한쪽 뿌리만 잡아당긴다고 생각했는데 잡아 당겨보면 여러 뿌리가 동시에 죽 따라 올라오잖아요. 마찬가지로 ‘내가 믿었다. 내가 결심해서 믿었다’ 라고 자기 결단력에 의해서 믿었다고 생각하는데 이 뿌리를 잡아당기니까 예정하심도 덩달아서 따라오는 거예요.
‘아, 예정되어서 믿게 되었구나.’ 나는 생각하기를 되게 맘써서 ‘이제부터 예수 믿기로 했네. 나 예수 사람 되련다’ 하고 각오를 무지 단단히 했다고 생각했더니 그게 예정하심에 의해서 되었고 태어난 것조차 우연이 아니고 부모한테 물어볼 일이 아니라는 말이죠. 이런 믿음이 안 되면 자칫하면 패밀리, 가족주의죠, 자기 사업 망하면 온 가족이 다 음독자살하는 식의, 그런 현상들이 유교권, 동양권에서 많이 발생됩니다.
일본이나 한국등, 유교가 발달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런 현상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애를 배려한답시고 그렇게 하는 거죠. ‘내가 죽고 난 뒤에 자식들이 얼마나 힘들겠나. 내가 죽듯이 자식들도 함께 죽는 것이 차라리 낫지 않겠는가’ 하는 자식에 대한 아주 숭고한 배려로서 집단 자살하는 그런 경향이 있어요. 한쪽에서는 기를 쓰고 죽겠다고 하고 또 한쪽은 아예 사형제도를 없애자고 하면서까지 살겠다고 하고, 이런 희한한 몸부림들이 있습니다.
칡넝쿨 뿌리처럼 하나의 줄기를 뽑았는데 줄줄이 모든 것이 다 달려나옵니다. ‘아하, 내가 마음 단단히 먹고 믿은 것이 아니고 예정되었기 때문에 믿어졌구나.’ 태어난 것까지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죽 딸려 나오는데 ‘믿고 난 뒤에 죄지으면 내가 지옥 갈 것 같다’ 하다가 그게 아니고 당겨 보니까 ‘칭의’라. 칭의는 믿고 그 다음에 의로움을 받아라, 그것이 아니고, 믿는 놈도 칭의를 안 받으면 안 된다, 그것이 아니라, 믿음 안에 이것이 다 들어있고 칭의 안에 이것이 다 들어 있고 회개 안에 이것이 다 들어 있고, 이것들이 다 들어 있습니다. 왜? 같은 뿌리로 연결되어 있으니까.
그러니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 하는 것이 바로 이런 뜻입니다. 믿음안에 들어가보니까 칭의되기로 다 예정되어 있어요. 그 칭의를 위해서 부르심을 받은 거예요. 그 믿음을 위해서 부르심을 받은 거예요. ‘칭의고 믿음이고 이제 챙길 것 다 챙겼으니까 교회 이제부터 빠이빠이다.’ 그게 아니라 ‘양자’ 비로소 새로운 아버지, 육의 아버지만 알았던 자가 그때부터는 영의 아버지도 알게 되는 겁니다.
영의 아버지라 하는 것은 명령받고 간섭받는 그런 아버지가 아니지요. 프로이트라는 정신과 의사가 있는데 정신분석가죠. 그의 모든 이론이 뭐냐 하면 ‘아버지주의’입니다. 아버지주의. 애들이 뭘 아냐 말이죠.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그것이 정보가 쌓이고 쌓여서 그 애가 나중에 아버지같이 또 어른이 되면 아버지가 해왔던 것을 그대로 할 수 밖에 없지 않느냐? 그런데 아버지가 죽 훈계한 것이 뭐냐 하면 ‘네 욕정을 죽이라’ 그런 쪽으로 쭉 훈계를 했다는 거죠.
그러니까 욕정은 욕정대로 생기는데 어릴 때부터 아버지한테 들은 것이 있어서 ‘너 주의해라. 네 욕망대로 살아서는 안 된다.’ 이것이 있어서 이 둘의 틈바구니에 끼어서 짜증이 나는 거예요. 이게 신경질이 나면서 정신병으로 간다는 거예요. 이것이 하나의 무의식속에서 권력으로 자리 아서 양쪽에서 서로 잡아당겨요. 천사와 악마의 얼굴과도 같이.
아버지의 말씀은 ‘너,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내 본성, 본능은 ‘네가 그것을 해야 즐겁다. 그것이 아니면 네 인생은 낙이 없다. 너는 무슨 재미로 사나? 간섭 때문에 사나?’ 이런 식으로 그 둘 사이의 싸움과 갈등이 스트레스가 되어서 인간의 창조성을 발휘 못하게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술가들은 어떻게 하느냐 하면, 아버지의 음성을 차단시켜 버려요.
‘창조적리비도’, 힘이죠, 이것을 욕정이라고 표현하는데, 창조적 힘이 맘껏 발현되니까 남들이 쉬쉬하는 것이 그 그림과 음악과 영화속에 맘껏 난무하죠.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카타리시스라고 하지요, 세상에서 꾹 눌렸던 그 스트레스, 하고 싶은대로 못해서 눌린 그것을 그러한 예술작업을 통해서 맘껏 발산할 수 있는 쪽으로 문화기여자로서 활동한다고 합니다.
우리 이전도사님도 맘껏 발산하고 있습니까? 예술을 한다고 해서 발산한다고 기이한 기인들, 개량한복 입고 머리 기르고 수염도 기르고 머리에 뭘 쓰기도 하면서 마약도 피우고, 이런 이상한 사람들 있잖아요, 기인, 도사, 그런 쪽으로 많이들 하죠. 그러나 이 세상은 다 도사되어서 도사와 도사끼리 만나게 되면 완전히 개판되어 버리죠.
그래서 절제하고 공중도덕을 지키고 예의를 지키고 양보해야 될 것은 양보해야 되고 더러워도 할 말 안해야 되고 그런 식으로 해야 사회가 얼추 안정되게 돌아간다는 거죠. 그런데 새로운 영의 아버지는, 제가 방금 말씀드린 프로이트처럼 간섭하고 지시하고 명령하고 복종을 요구하는 그런 분이 아니고 이 아버지는 사랑입니다. 사랑.
사랑, 용서하심, 네게 주신 은혜를 아느냐, 이렇게 사랑으로 오는 것이 영의 아버지입니다. 만약에 그 사랑을 무시한다면 그 때는 사정없이 징계가 오지요. 법조항을 지켜서 되는 것이 아니고 신약에서는 사랑이 곧 법이에요.
로마서 13장에 보면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찌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그러니까 사랑이 모든 것을 다 이룬다는 겁니다.
달리 이야기하면 ‘아무리 부모공경 하고 아무리 살인 안하고 간음안하고 탐 안내고 도적질 안하고 거짓말 하지 않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남편이 아내 대할 때도 사랑으로 대하고. 사람은 사랑으로 행복해지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사랑을 하니까 더 불행해지더라’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그리움이 쌓여서 그래요.
너무 사랑이 그리움으로 바뀌어서 그럽니다. 그러면 그 사람에게 묻지요. ‘그런 그리움마저 없으면 무슨 낙으로 사시렵니까?’ ‘아이고 그러면 끔찍하지요.’ ‘그거 보세요. 그리움이 있더라도 사랑하니까 좋잖아요.’ 누굴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 하는 그 자체가 바로 행복해서 어쩔 줄을 모르는 시기라는 거예요. 제가 보니까.
사람이 결혼할 때 그리워했지요. 지금 결혼하고 난 뒤에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있습니까? 부부가 왜 권태기가 오는가? 상대가 안 그리워서 미치는 거예요. 하나도 안 그리워. 각방을 쓰고 싶어. 채널도 KBS 틀어 놓으면 MBC로 바꾸어놓고, 그리움이 아니라 싸움하기 바빠요. ‘어이구, 저 인간 또 술 먹고 들어온다.’ 사람은 그리워야 될 것인데 그리움이 없어요.
처음에 연애할 때는 그리워서 ‘함께만 살수 있다면 더 큰 은혜는 안바라겠습니다. 이 은혜면 족합니다. 함께 살게만 해주시면 더 이상은 바랄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기도 했는데 결혼하고 나니까 그만 갑자기 소중한 그리움이 사라지지요. 그리워야 상대방을 애틋해하고 존경스러워하는데 안그리우니까 상대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대하는 거예요.
상대를 존경하고 애틋하게 아끼는 것이 아니고 서로가 서로를 아주 시시하게 여겨요. 아침에 일어나서 머리 부스스 한 것을 보면서 ‘아이고, 내가 저런 여자하고 잤나’ 하고, 애틋한 것이 없어요. 그래서 어떤 학자는 말하기를 ‘결혼은 미친짓이다’ 라고 했어요. 결혼은 광기라는 거예요. 결혼은 오래하지 말라는 거예요. 누가 이야기 했는가 하면 마광수가 이야기했어요.
마광수가 <운명>이란 책에서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그러나 영의 아버지는 늘 용서와 사랑이기 때문에 그야말로 하나님자체가 소망입니다. 교회 와서 돈이 소망이 아니라 교회 와서 권력이 소망이 아니라 하나님 그 자체가, 사랑 그 자체가 소망이 될 때, 그 사람은 정말 다행스러운 사람이에요. 행복한 사람인데 그걸 가지고 성경에서는 ‘복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의 대상으로 삼는 자, 이게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다’ 하는 것이 그런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여러분, 잘 모르겠지만 그 뿌리를 잡아당겨 보면 믿음 안에 이것이 다 들어 있어요. 우리가 그 깊이와 높이와 그 광대하심을 우리가 너무 시시하게 여겨서 그렇지 그런 사랑이 이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그 다음, 오늘 할 것이 ‘성화’인데 성화라는 말 자체는 ‘거룩하게 변해진다’는 뜻입니다. 저는 성화, 이것을 안 믿고 거룩을 믿죠. ‘거룩함’ 으로 끝나는 거죠. 이것 성경에서 한 번 찾아봐야 됩니다. 히브리서 10장 10절입니다. 왜 이것을 찾아보라고 하느냐 하면 혹시 여러분들이 사람들 대하다 보면 ‘아, 그거 엉터리다. 잘못 배웠다’ 이렇게 하는 분들이 많을 거예요. 그래서 톡 쏘듯이 일침을 놓을수 있으라는 말이지요.
히브리서 10:10
“이 뜻을 좆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거룩함을 얻었노라’라고 하죠. 거룩함은 얻어서 생기는 것이지 자기가 노력해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함을 입으라’는 말은 뭘 하라는 말이 아니고 주어진다는 말이죠. ‘입으라’ 하는 것은 명령입니다. 거룩함이 입혀 왔다는 거죠. 성경에서 명령은 곧 현실이고 실제를 두고 말합니다. ‘빛이 있으라’ 하는 명령이 실제 존재가 되지요.
빛이 있어 버렸지요. 마찬가지로 ‘거룩함을 입으라’ 하는 명령은 그 명령이 우리에게 닿는 순간 그것이 우리에게 거룩이 존재가 되어 버려요. ‘아, 그렇구나. 아, 그래서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구나’ 라는 것을 확인하는 거예요. 거룩은 지금 10퍼센트 거룩, 20퍼센트 거룩,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이란 것은 그냥 화살처럼 와서 팍 꽂히는 거예요.
‘윤리 도덕으로 그렇게 됩니까?’ 하는데 여러분, 거룩은 윤리 도덕이 아닙니다. 하여튼 모르는 사람이 나대는 것이 문제라! 거룩은 윤리 도덕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분리됨, 차별됨입니다. 거룩이란 구약에서 차별함, 차별됨, 또는 분리됨, 다른 말로 하면 격리됨입니다. 거룩이란 따로 간수하는 것, 이것이 거룩입니다.
두 그룹을 나누는 것이 거룩이라 이 말이죠. ‘너는 이쪽에 지배받고 너는 저쪽에 지배받아라’ 이렇게 나누는 것이 거룩이에요. 조금 나누는 것이 아니에요. 차츰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신분상 이미 나누어져 버린 거예요. 그걸 조금씩 조금씩 거룩해진다고 하는 것은 윤리 도덕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원래 거룩이라는 것은 구약 때는 피뿌림으로 됩니다. 예를 들어서 만약 ‘내가 잘못을 저질렀다’고 한다면 구약에 ‘네가 잘못을 저지른 만큼 벌을 받아라. 의자 들고 있어라’ 는 식으로 벌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에서 그렇게 벌주죠. ‘네가 지각을 했기 때문에 의자 들고 벌서라’ 그런 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네가 잘못을 저질렀어? 그럼 피뿌림을 받아라’ 그러면 끝나는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본인이 아무리 개선하고 개과천선해도 또 그 행동을 되풀이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거든요. 그런 식으로는 분리가 안 되니까 피뿌림, 다른 분의 어떤 생명이 나에게 와 닿을 때 그분의 피가 와 닿을 때, 마치 딱지를 붙이는 것처럼, 상표를 붙이는 것처럼, 레떼르를 붙이듯이 피를 바름으로서 그 피를 보고 죽음의 사자도 넘어가고 ‘피뿌림이 있은즉 사함이 있느니라’하는 이것이 거룩입니다.
‘양털같이 희어진다’(사 1:18) 는 이것이 거룩입니다. 그래서 거룩되게 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칭의와 같지 않느냐? 칭의는 위에서 그렇게 칭해주는 것이고 거룩은 우리의 신분상 그렇게 되어 버리는 겁니다. 만약에 ‘성화’라면, ‘성화’에서 ‘화’라는 것이 점점(化)이라는 뜻인데, 점점 더 거룩해진다는 거죠. ‘예수 처음 믿을 때보다 지금이 내가 더 거룩하다.’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것은 거룩과 관계없습니다. 왜? 믿는 순간 이미 거룩해 졌으니까. 그러나 그것은 다르겠죠. ‘나는 처음보다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을 더욱 많이 안다.’ 그것은 인정하죠. 왜? 그만큼 나는 점점 더 개판인 것을 알았으니까. 그러니까 ‘나는 점점 더 사랑하니까 훌륭하잖아’ 라는 말을 못하죠. 반대로 이야기해야 되지요.
‘나는 주님이 그렇게 고마운 줄 알아. 왜냐고? 나는 갈수록 점점 더 개판인줄을 이제 알았으니까.’ 자기가 얼마나 나쁜 죄인인 것을 알았으니까. 겉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해 놓고는 자식을 더 사랑하고 겉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해놓고는 남편이나 아내를 더 사랑하고 뭔가 다른 구석, 다른 지갑을 챙기는 거예요.
다른 자존심 챙길 구멍을 가지고 있었던 이것이 세월이 가면 또는 연세가 많아지면 그것을 분명히 알게 될 것입니다. 오늘 여기까지 하고 ‘성화’는 다음에 더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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