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요리문답공부 26(20030615)
소요리문답공부 26(20030615)
이름 : 오용익(IP:59.3.147.39)
소요리문답공부 제 26강 (이 근호목사, 2003년 6월 15일, 우리교회)
구원론 계속해서 하겠습니다. 구원론에서 첫 번째가 부르심, 두 번째가 중생, 세 번째가 회개, 네 번째가 믿음, 다섯 번째가 칭의, 여섯 번째가 양자, 일곱 번째가 성화, 여덟 번째가 영화. 이것이 마치 다이아몬드의 여러 가지 단면을 보여주는 것과 같습니다. 다이아몬드의 여러번이 빛을 내면서 반짝 반짝 거리는 것처럼 전부 다 한 면을 장식하는 것입니다.
철도처럼 줄지어 되어 있는 것은 아니고 하나의 다이아몬드처럼 각 단면을 장식하는 겁니다. 칭의 다음에 양자 되는 것이 아니고 칭의 된 자, 양자 된 자, 믿음 된 자 모두 다 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신자 되었으면 믿는자요, 신자 되었으면 회개한 자요, 신자 되었으면 중생한 자요, 신자 되었으면 부르심을 받은자요, 신자가 되었으면 이미 영화롭게 된 사람이고 성화 된 사람입니다. 성화라는 것은 거룩인데 거룩도 된 사람이고 다 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구원이 주는 그 풍성함이 크기 때문에 하나로 설명못하고 ‘ 렇게 보면 이런 축복의 풍성함들이 여덟가지가 있습니다.’ 라고 그래서 여덟가지를 소개하는 거예요. 불러주신 것도 축복이고 거듭나게 해 준 것도 축복이고 다 축복이기 때문에 어느것이 큰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한 사람에게 다 이런 혜택이 주어진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무엇이든지 반복해야 됩니다. 부르심이라는 것은 ‘누가 불러주었지?’ 라는 생각을 갖게 하는 것이 부르심의 능력입니다. ‘내가 자진해서 교회 나온 것이 아니라 누군가 불러줬기에 내가 나왔지. 주님이 불러줬기에 내가 나왔지’ 라는 생각을 갖고 있으면 그 사람은 이미 부르심의 은혜를 이미 받은 사람입니다. ‘내가 잘나서 내가 훌륭해서 나왔지’ 라는 사람은 아직도 부르심의 은혜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불러주시기 때문에 내가 이 자리에 나왔지 안 불러주시면 내가 지금쯤 다른 곳에 가 있을 것이다’ 라고 느껴지는 것, 그것이 부르심의 은혜를 받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중생이라는 것은 육이 뭔지, 영이 뭔지를 구분할줄 아는 그런 인식을 갖게 된 것을 중생이라고 합니다. ‘아, 저것은 육이구나. 저것은 영의 세계구나.’ 이미 영으로 거듭났기 때문에 육에 대해서 알지요.
영으로 거듭나지 않았다면 육이 뭔지를 모르게 되지요. 이게 전부인지 알고 바깥세상을 모르니까. 그런데 영으로 거듭나고 보니까 ‘아. 저것은 육이구나. 육에서 나온 것은 육에 불과하고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하는 것을 알지요. 그런 경우에 중생이라고 합니다. 회개라는 것은 자기의 기본으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이만큼 되었으니까 더 되어야 돼.’ 그것이 아니라 ‘나는 이것도 은혜야. 왜냐? 나의 원 자리는 이 자리이기 때문에.’ 항상 자기의 원래 자리를 생각하는 것, 그것이 회개입니다. 그러니 반성하는 것이 아니지요? 애들 일기 쓰듯이 ‘오늘은 나쁜짓을 했다. 다시는 안그래야지.’ 그런 것이 아니고 자기의 본래의 자리에서 ‘이것도 나에게는 과분하다’ 하면서 자기 본래의 자리에서 모든 것을 보면서 ‘이것도 다 하나님의 은혜이고 축복이구나. 나같은 것이 오래사는 이것도 참 축복이구나’ 라고 본래의 자리에서 감사하는 것이 회개라고 합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믿는자의 믿는 행위가 믿음이 아니고, 예수님을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믿는자의 자기의 믿는 행위에 대해서 추적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에요. 그래서 제가 예를 들었지요? 지,정.의. 지식과 감정과 의지, 이것 가지고 믿음을 만들어 낼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지식과 의지와 감정을 다 합친다 하더라도 이것이 믿음은 아니다, 라고 했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아까 말한 부르심하고 비슷해요. 믿음이라는 것은 ‘나는 예수님을 믿지, 나의 변화된 것, 나의 성격, 내가 꿈에 본 것, 내가 남에게 기적을 베푸는 것, 자선을 베푸는 것’ 그런 것을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런 것도 다 예수님께서 해 주신 것이다’ 할 때 믿음이죠. 믿음에 관하여 한가지 예를 들어보면, 만일에 어떤 신자가 건널목을 건너고 있는데 기차가 달려오고 있었다.
그런데 어떤 여자가 자기애를 죽이기 위해서 애를 포대기에 싸서 기차가 달려오는데 그 앞에 놓더라. 그래서 그 애를 살리기 위해서 얼른 애를 철길에서 빼냈는데 자기도 빠져 나온다고 한 것이 미처 빠져나오지 못해서 발목을 다쳤다.
다른 사람들이 그걸 보고서는 ‘대단합니다. 훌륭합니다.’ 이렇게 칭찬하겠지만 진짜 믿는 사람 같으면 ‘누가 그 아이를 거기에 놓게 하셨는가? 하필이면 꼭 그 시점에 기차가 오게 되었는가? 하필이면 내가 꼭 그 자리를 지나치게 되었는가? 이런 삼박자가 딱 맞은 것은 다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내 공로가 아니고 주님의 공로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착한 일을 많이 해 보았겠습니다만 예를 들어서 어려운 사람이 있었다. 너무 너무 가난한 사람이다. 우연히 지나가는데 그 집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엄마, 쌀이 떨어져서 이제 죽는수 밖에 없겠다’라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사극에 나오는 의적처럼 혹은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처럼 몰래 쌀한포대를 사서 그 마당에 털썩 내려놓고 동정을 살폈다. ‘엄마, 바깥에서 무슨 소리 났잖아. 어? 이게 웬 쌀이지? 천사가 왔다 갔나봐.’
그럴 때 얼마나 흐뭇하겠느냐 말이죠. 그런 경험 안해봤습니까? 이것은 기독교 신자 아니더라도 불교신자든 무신론자든 누가 지나가도 도와주게 되어 있어요. 꼭 종교하고 연관짓지 않아도 됩니다. 제 사촌여동생 남편은 불교신자입니다. 보살이라고 하지요. 그 사람은 중국에까지 된장을 수출할 정도로 된장 공장을 크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천주교에서 노숙자, 걸인들 모아서 도와주는 그 일을 합니다. 대구에도 있어요. ‘된장 떨어졌습니까?’ 그러면 된장 거저 주고 짜장면 먹고 싶다고 하면 짜장면 걸인들에게 100그릇 배달시킵니다. 또 제 사촌여동생은 그 여자걸인들 손수 세수시켜주고 목욕시켜주고, 사물놀이 해서 마음도 달래주고 그것이 낙입니다.
종교를 떠나서 어려운 사람들을 돌봐주고 도와주는 그것이 낙이고 취미입니다. 그 즐거움은 빼앗아갈자가 없답니다. 자기가 열심히 남 도와주면서 그것을 통해서 보람을 느끼고, 사회를 저주하고 사회를 미워하고 사회에 저주를 퍼붓던 사람들이 그 다음부터 눈물을 주르륵 흘리면서 ‘아, 아직도 사회가 사랑이 있구나. 그동안 나는 뭐했나. 이 사회를 저주나 하면서 살았지. 그동안 내가 무슨 사회에 보탬이 된적이 있는가? 이제부터 새사람되어서 사회에 기여하는 인간이 되어야지.’ 그래서 개과천선한 사람이 한두명이 아니라는 말이죠.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니까 그것으로 사람이 변화가 되더라는 말이죠. 그것은 믿음하고 아무 관계도 없는 겁니다. 그것이 하나의 보람이에요. 그런 것을 제가 취미라고 했는데 취미라고 해서 나쁘게 생각하지 말고 그런 취미도 가지게 되면 취미치고는 괜찮아요. 괜찮은 취미입니다. 보통 시민단체에서 하는 봉사활동 보면 처음에는 노숙자들 식사대접하는 일에 봉사자로 한 100명쯤 오는데 그 다음날 한 50명 빠져버리고 더 가면 10명만 남아요.
일주일 지나면 한명도 안 남아서 다시 뽑아야 되고요. 왜냐하면 봉사할 때 봉사한다는 기분만 들었지 막상 해 보니까 힘들거든요. 하루 하고 나서 집에 오면 온몸이 안아픈 구석이 없어요. 남편이 가만있습니까? ‘너는 남은 봉사 그렇게 잘하면서 남편에 대해서는 봉사 안하나?’ 이래가지고 가정불화까지 일어나게 되니까 ‘조금만 하다가 그만둘래’ 하는 예가 굉장히 많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뭐냐 하면 그 자체의 재미를 못 느껴서 그래요. 봉사하는데서 오는 보람을 일부러 가지려고 해서 그러는데 제 사촌 여동생은 그것이 재미있는 모양입니다. 그 여동생 남편이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나는 결혼할 때 50만원가지고 했다. 따라서 나는 50만원만 있으면 되고 나머지는 다 사회의 것이다. 사회에서 나에게 벌어준 돈이지 내것이라고 볼수 없다.’ 보살입니다. 보살.
대단하지 않습니까? ‘50만원만 빼고는 다 사회에 환원할 것이다. 자식들아 미안하다. 공부시켜줬으면 끝이다. 너희들이 알아서 해라. 사회에서 이만큼 나에게 잘해줬기에 다 도로 환원한다’ 는 거죠. 차도 체어맨인가 그런 것 타고 다니는데 돈 번 것 자선사업 많이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결국 뭐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나에게 줬다는 그런 생각은 안 들고, 그냥 내가 하는 일의 보람이다, 그런 식으로 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것을 믿음이라고는 볼 수 없는 겁니다. 믿음이란 뭐라고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믿음이고 예수님의 행하심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을 준적이 없다.’(행 4:12)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얼마나 폐쇄적이고 독단적인, 유대교적인 선택주의에 빠졌다고 욕할 거예요. 하지만 성경은 말씀합니다. 선행으로가 아니라는 거죠.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을 준적이 없다.’
조깅하는 사람들이 그 다음부터는 마약처럼 안 뛰면 안 되듯이 착한 일도 해 보면 그것도 마약처럼 거기에 빠지게 되어 있어요. 결국 사람 사는 것은 똑같아요. 이렇게 50만원 남으나 저렇게 50만원 남으나 50만원 남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사업망해서 50만원 남으나 다 줘버리고 50만원 남으나 마찬가지입니다.
‘칭의’ 라고 하는 것은 인간에게서는 의가 나올수 없음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인간에게서는 어떤 의도 나올수 없다. ‘의’라는 것은 수입품이죠.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미리 아신자니까 예정된 자죠. ‘미리 아신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칭의, 의롭다고 칭한다. 지난시간에 중요한 이야기를 했는데 그 중요한 이야기가 뭐냐 하면, 우리가 죄가 많아서 구원받고 싶어서 의를 요청한 것이 아니고, 우리를 부르실 때부터 우리가 의롭게 된 것은 하나님의 요청이라고 했어요.
싫든 좋든 의롭게 되어 버렸어요. ‘아이고, 죄가 많아서 지옥 가니까 하나님께서 의롭게 했구나.’ 그것이 아니라 좋든 싫든 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인되게 하기 위해서 부르실 때부터 예정하실 때부터 아예 그런 계획 하에 뽑아낸 거예요. ‘칭의’는 우리 소원이 아니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하나님께서 본인이 우리를 의롭게 하겠다는데 우리가 왜 말이 많아요?
‘나는 죄인이야’ 그럴 필요 없어요. 하나님이 의롭다고 하겠다는데 우리가 말릴 수가 없잖아요. 그게 칭의입니다. ‘칭의’라는 것은 의롭다고 칭해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주는 거예요. 오늘 이 시간에는 ‘양자’입니다. 이것이 참 어려워요. ‘양자’란 자식이 아닌데 자식으로 간주하는 것을 ‘양자’라고 합니다.
그러면 자식은 따로 있지요. 그것이 로마서 8장에 나옵니다.
로마서 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여기에 보면 참 재미있지요? 하나님의 아들 되는 것은 성령이 있으면 됩니다. 그런데 성령이 있으면 아들되니까, ‘아하, 아들이라는 것은 양자로 세분되기 전에 그냥 하나님께서 예수님처럼 우리도 아들로 삼아주는구나’ 이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15절부터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로마서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그러니까 아들이라고 해서 그 격이 예수님과 같은 격, 같은 레벨이 아니라 양자로서의 아들이죠. ‘너희는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다’는 이것이 뭐냐 하면 율법이에요. ‘너희가 다시는 율법을 겁낼 것이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의 양자되었음을 이제 믿으라’ 그말이죠. 그러면 양자가 되었을 때 혜택이 뭐냐? 양자된 혜택은, 아들과 함께, 여기서 진짜 아들은 예수님인데, 아들과 함께 기업(천국)을 상속받습니다.
옛날 유대교에 보면 아들이 아니면 상속될 수가 없어요. 딸은 상속이 안됩니다. 딸은 시집가면 그만이니까.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이 만드신 그 천국이라는 기업은 아들되었을때나 있는 혜택입니다. 예수님 오시기 전까지는 우리는 그런 천국의 혜택을 입을수가 없습니다. 없는데, 아들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그 아들의 영 덕분에 우리는 양자가 된 거예요.
로마서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을 맏아들로 삼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와 함께 상속을 받는, 하나의 양자로서 간주를 시켜주는 그러한 혜택이 성령으로 구원받은 사람에게 주어진 혜택입니다. 그러면 양자라고 하지 말고 그냥 아들이라고 하면 안 되는가? 돼요. 되는데 이것을 그냥 ‘아들’이라고 하니까 ‘나도 예수다’하는 식으로 나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너만 예수냐? 나도 막 먹자’ 이렇게 되거든요. 이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양자 주제에 어떻게 자기가 잘났다는 식으로 나옵니까? 아들은 아들인데 정식 아들이 아니고 양자입니다. 주워 와서 키운 아들입니다. 그래서 양자된 자는 자기가 아들 됨을 황공스럽게 여길 줄을 알아야지 ‘나도 아들이다’ 라고 나오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창조주고 우리는 피조물이니까 다 같은 아들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양자됨에 있어서 그 점을 우리가 꼭 생각해 주셔야 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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