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이 아니라 감사
완벽이 아니라 감사
이름 : 이근호(IP:117.55.134.181)
완벽이 아니라 감사
2009-06-22 08:43:53 이름 : 이근호
감사할 대상이 없고 경배할 대상이 없다면 언제고 자기 자신에게 도로 올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다. 어릴 적부터 강제로 교회에 나갔던 자들이 성인이 되면서 교회 비판을 핑계 삼아 교회를 발을 끊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 외에 달리 경배하거나 감사할 상대가 없음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신을 연구하고 예수와 부처를 연구해도 자기보다 못하다. 내가 나를 사랑해주는만큼 나를 사랑하지 않는 듯하다. 고생을 해도 본인이 했고, 괴롭고 외로울 때 자신을 달래주던 자도 결국 자기 자신 뿐임을 알았을 때, 자신만이 신앙의 대상이요 행복의 원천임을 확신한다.
이로서 인간은 어쩔 수 없이 모두 종교인이다. 자신만을 신봉하는 종교인이다. 그리고 신자 모집에 나선다. “누가 나를 사랑해 줄 사람 없어요?” 이 신앙에 근거해서 자기 완벽에 나선다. 기름칠 하고, 헐렁한 데는 조이고, 속과 겉을 부지런히 닦아서 광나게 된다. 완벽에 완벽을 기한다. 완벽의 레벨이 어느 정도인 지 궁금해서 마실 나간다.( 마을에 나가 볼 일본다는 경상도 사투리)
일생을 이런 식으로 보낸다. 자아를 위하여 허비하다가 다 보낸다. 완벽을 자아 생각을 전제로 한다. 자아를 강하게 붙들어서 완벽이 수행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사가 되면 그 순간은 자아를 잊는다. 자아를 놓쳐야 감사가 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떨어져 나가는 순간이 감사하는 순간이다. 예수님께서는 매사에 있어 자아를 놓으셨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마 11:25-26)
‘완벽’을 찾는 안목으로 예수님을 보게 되면 가짜 예수님이 보이는데 그 가짜 예수님이 실은 완벽을 기하는 자아상이다. 자아가 예수님 십자가 앞에서도 안 죽고 살아 되돌아오면 큰 문제다. 그러나 아버지에게 ‘감사’하는 예수님을 알게 되면 예수님의 감사에 휘말려서 자아를 잊는다.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마 6:9)
이 자체가 얼마나 큰 감사인가! 기도를 듣는 상대자가 계시고 기도를 받는 상대자가 계시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죽음조차도 이 행복을 가리지 못한다.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행 7:59-60)
스데반 집사는 자아가 살기를 기도한 것이 아니라 계속 감사하기를 위하여 기도한다. 감사가 자아를 잊게 한다. 완벽은 일시적으로 자아를 빛내지만 결국 지옥으로 데려가서 그 빛조차 부질없게 만든다. 완벽을 멀리하면 감사가 밀려온다. 완벽 때문에 설움 받던 그 감사다.
비가 온다. 나 위하여 내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위하여 비가 내린다. 그래서 온 대지는 감사한다. “땅을 돌보사 물을 대어 심히 윤택하게 하시며 하나님의 강에 물이 가득하게 하시고 이같이 땅을 예비하신 후에 그들에게 곡식을 주시나이다”(시 65:9)
이미아(IP:115.♡.204.167)
09-06-23 11:51
감사가 사라진다는 것 만큼 실로 무서운 것은 없습니다.
인간이 무서워 한다는 것은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임을-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 잊고 감사하지 않기 때문에 매일 무섭고 두렵고 억울하고 짜증나고 불평하고 서로 잘났다고 싸우고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진짜 무서운 것은 악마의 술수에 감사를 빼앗기고 자아를 챙기게 하는 짓을 악마가 유혹거리로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고난을 감사의 잔으로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마신 잔은 감사할 줄 모르는 인간을 폭로시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무슨 감사가 나오겠습니까???
오늘 아침 보고 싶은 얼굴들이 떠오르는데 이상스럽게도 나에게 잘 해주었던 자들만 떠오르는 것입니다. 쓴 웃음이 나왔습니다. 결국 인간은 자기 밖에 모르는구나....
자기 영역 건드려 보면..백이면 백, 전부 다 그렇게 감사하며 사는 자로 자처했던 자들이 즉시로 가인의 얼굴로 변하여 아벨을 돌로 쳐 죽이는 것으로 자기의 분과 한을 풀어 버리는 것이 인간이라는 군상들입니다. 감사...원래부터 없었던 것입니다. 생일을 저주하며 사는 것이 인간에게 심겨진 본성인데..죽도록 이 세상에서 고생하며 땀을 흘려도 만족이 없기에...도대체 왜 사는지 모르기 때문에..죽음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자기도 모르는 사후세계가 기다리고 있다는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감사하지 못하는 인간들을 향한 칼입니다...칼로 베임 당한 자들에게서 죄인의 시커먼 피가 멈추지 못하고 흘러내려 피 빠진 허연 시체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제 그 시체가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의로우신 피를 수혈 받는 것. 그 뿐입니다. 다른 대안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피가 감사케 하는 것입니다.
"..나의 성도를 네 앞에 모으라 곧 제사로 나와 언약한 자니라 하시도다...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시편 50편)
비가 왔었습니다..그 때..상처는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받을 자격 조차도 될 수 없는 존재임을 말씀 하셨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자아가 살기를 기도한 것이 아니라 계속 감사하기를 위하여 기도한 것처럼(이 말씀이 왜 그렇게도 뭉클한지 모르겠습니다)....
바울 사도가 자신을 허비하며 전한 복음처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기록한 바 내가 믿는 고로 말하였다 한 것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는 고로 또한 말하노라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니 모든 것을 너희를 위하여 하는 것은 은혜가 많은
사람의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고후4:11-15)
"보라 이제 세번째 너희에게 가기를 예비하였으나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하리라
나의 구하는 것은 너희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함으로 재물을 허비하고 또 내 자신까지 허비하리니..."(고후12: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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