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상 21: 1- 6 (떡의 두가지 의미)
삼상 21: 1- 6 (떡의 두가지 의미)
이름 : 우리교회(IP:220.81.176.169)
본문 : 사무엘상 21장 1- 6절
제목 : 떡의 두 가지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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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09-06-21 14:53
떡의 두 가지 의미
2009년 6월 21일 본문 말씀: 사무엘상 21:1-6
(삼상 21:1) 『다윗이 놉에 가서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이르니 아히멜렉이 떨며 다윗을 영접하여 그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네가 홀로 있고 함께 하는 자가 아무도 없느냐 하니』
(삼상 21:2) 『다윗이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이르되 왕이 내게 일을 명령하고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보내는 것과 네게 명령한 일은 아무것도 사람에게 알리지 말라 하시기로 내가 나의 소년들을 이러이러한 곳으로 오라고 말하였나이다』
(삼상 21:3) 『이제 당신의 수중에 무엇이 있나이까 떡 다섯 덩이나 무엇이나 있는 대로 내 손에 주소서 하니』
(삼상 21:4) 『제사장이 다윗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보통 떡은 내 수중에 없으나 거룩한 떡은 있나니 그 소년들이 여자를 가까이만 하지 아니하였으면 주리라 하는지라』
(삼상 21:5) 『다윗이 제사장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참으로 삼 일 동안이나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나이다 내가 떠난 길이 보통 여행이라도 소년들의 그릇이 성결하겠거든 하물며 오늘 그들의 그릇이 성결하지 아니하겠나이까 하매』
(삼상 21:6) 『제사장이 그 거룩한 떡을 주었으니 거기는 진설병 곧 여호와 앞에서 물려 낸 떡밖에 없었음이라 이 떡은 더운 떡을 드리는 날에 물려 낸 것이더라』
양식이란 먹고 살기 위함입니다. 여기서 ‘산다’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적인 ‘산다’가 되면 거기에 합당한 양식은 따로 있습니다. 즉 오곡입니다. 하지만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도 ‘산다’가 성립되려면 다른 의미의 양식이 동원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떡은 이 두 가지 의미가 함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두 의미를 따로 분리해 내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6장에 나오는 떡은 바로 이 두 가지 의미를 다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광야로 보십니다. 곧 죽음의 세계입니다. 먹어도 먹어서 수평적으로 목숨 부지와 관련 있습니다. 즉 계속 죽어가고 죽어가게 되는 겁니다. 절대로 수직적으로 상승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도가 아무 것도 안 먹고 성경책 종이만 뜯어내면서 먹고 산다는 뜻은 아닙니다. 성도도 동일하게 떡을 먹지만 그 떡에 2중의 의미를 담아서 떡을 먹는 겁니다. 즉 떡 에 담겨있는 거룩의 의미를 놓치지 않는다는 겁니다. 거룩을 만들어내는 양식은 우리 인간 몸의 내부에서 만들어지지 않고 외부에서 예수님의 몸에 의해서 주어집니다.
창세기 3장의 상황으로 돌아가봅시다. 거기에 가시 덤불과 엉겅퀴가 사방에서 자라나고 있습니다. 아담을 겨냥한 저주의 풀입니다. 저주의 풀이 자라나는 것을 아담의 저주의 상황이라고 이해할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장치한 환경입니다. 인간을 살리기 위한 환경이 아니라 죽이자고 하시는 환경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직장관이 이래야 합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한 직장이 아닙니다. 죽이기 위한 환경입니다. 목사에게 있어 교회도 또한 그런 곳입니다. 목사를 살리기 위한 직장이 아니라 죽이기 위한 직장입니다. 아무 것도 안 나와서 사람이 죽는 것이 아니라 아담이 가진 본성을 겨냥해서 서서히 죽는 잔인한 환경입니다.
즉 가시 덤불과 엉겅퀴가 없어서 저주스러운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런 것들이 방해공작을 하기에 사람의 애쓰고 노력한 만큼의 대가가 수월하게 주어지지 않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내리시는 저주의 기본 원리를 알아야 합니다. 이마에서 땀을 흘리고 힘든 것을 통해서 잃어버렸던 낙원과의 차이와 간격을 늘 느끼면서 살게 만듭니다.
단순한 낙원과의 환경 차이가 아니라 아담의 마음가짐 차이를 부각시키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았던 그 낙원에서의 마음이 이제는 앞 뒤 가리지 않고 오로지 자기 생존에만 매달리는데 진력을 다하는 마음가짐으로 달라지게 되는데 바로 여기에서 낙원의 마음과는 더욱더 격차가 벌어지게 됩니다.
남은 것은 독한 악밖에 없게 됩니다. 바로 이러한 지경에 예수님께서 뛰어드신 것입니다. 사람들의 인심이 얼마나 생계 위주로 달라졌는지 확실하게 보여주시고자 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주시고자 하시는 양식은 사람들이 기대한 것과는 달리 사람의 마음을 돌이키기 위한 양식입니다.
먹어도 썩어질 수 밖에 없는 양식이 아니라 영생한 양식을 가져오셨는데 그 영생할 양식은 기존의 가졌던 마음가짐을 전혀 다른 마음가짐을 지녀야 얻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에게 도로 우리가 대접해야 하는 위치에 있다는 겁니다. 즉 오늘 본문에서 두 가지의 거룩이 만났습니다.
하나는 아히멜렉 제사장이 주장하는 율법적인 거룩관입니다. 이것은 '깨끗함‘의 의미를 인간 쪽에서 삼가고 금지하고 조심하고 절제하는 식으로 달성할 수 있다고 믿는 ’깨끗함‘입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식으로 성화된 생활을 독려하는 자들이 태반입니다. 즉 인간의 행위로 만들어낼 수 있는 거룩이 성경에서 요구하는 거룩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다윗이 요구하는 거룩은 바로, “내가 배고프다, 나와 내 일행을 대접하라”는 겁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기 절제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윗의 심정과 고난받음에 동참하는 것이 진정한 거룩의 의미라는 겁니다. 요즈음 같으면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것이 거룩이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어떤 마음입니까?
예수님의 마음은 그 분이 하나님이시나 도리어 하나님의 영광을 자진 포기하시고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의 종이 되어 사람들을 위해서 봉사하시다가 심지어 죄인으로 몰려 십자가 죽기까지 봉사하신 그 마음을 가지라는 겁니다. 이것은 이미 구원 확정된 신분자가 행사할 수 있는 자유함입니다.
일단 율법적 거룩이 다윗의 자유를 가로 막습니다. 하나님께서만 바치는 떡이 있지만 여자와 가까이한 소년들에게 줄 수 없다고 나섭니다. 여기에 대해서 다윗은 말합니다. 나와 함께 있는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입니다. 제사장의 주장은 이것입니다. 거룩한 떡은 거룩한 그릇에만 담겨야 그 거룩이 훼손되지 않을 것이라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다윗의 주장은 이것입니다. 나라는 것을 담고 있는 그릇이라면 그것으로 그 그릇의 거룩함을 충분히 보인 셈이 된다는 겁니다. 성전 안에 있는 테이블 위의 떡을 하나님께서 잡수시게 위하여 놓인 떡입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존재하게 된 떡이라는 겁니다.
하나님만 먹을 수 있기에 거룩한 떡입니다. 그렇다면 진정 인간이 먹고 죽지 않고 살 수 있는 떡은 어떤 떡이 있음이 분명해집니다. 즉 하나님만이 받으실만한 떡을 인간이 함께 뜯어먹으면 인간은 삽니다. 요한복음 6:49-52에 보면,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이르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유일한 생명의 떡인지를 알려주기 위해서 예수님의 살점이 어디에서 뜯기는지 어디에서 피를 쏟는지 보라는 겁니다. 그곳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다윗은 하나님만이 먹을 수 있는 진설떡을 먹음으로서 장차 오실 예수님의 고난의 길로 접어들어가고 있는 겁니다.
다윗이 자신이 먹는 떡은 일행들이 뜯어먹어야 될 생명의 떡으로 변신되어야 하는 그 고난의 길에 그들은 함께 들어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떡을 준 아히멜렉 제사장도 그 길에 이미 들어섰습니다. 인간의 양식은 똥만 낳지만 예수님의 양식은 우리를 살리는 살과 피를 낳습니다. 지저분하고 더러운 우리 자신 바라보지 말고 이 더러운 죄인을 살리기 위해 죽으신 예수님을 사랑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 덕분에 살았지 우리 힘으로, 우리의 율법으로 살 수 없음을 우리가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우리교회
09-10-20 13:14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사무엘상-2008/048강-삼상21장1-6(떡의두가지의미)-1sa090621.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