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612-(2) 서울강의녹취 : 에베소서 제 38강
20090612-(2) 서울강의녹취 : 에베소서 제 38강
이름 : 오용익(IP:59.3.147.39)
에베소서 제 38강 (이 근호목사, 2009년 6월 12일-(2), 서울의존교회)
이번시간에는 개인구원과 집단구원이 어떤 차이가 나는가를 알아보겠습니다. 왜냐하면 그 차이를 알아야 영적전쟁의 내막을 알 수가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개인이 전쟁을 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집단으로 전쟁했습니다. 구약의 전쟁이 불신자 집단과 신자집단의 전쟁이라면 신약의 에베소서 6장의 전쟁도 혼자 잘 싸우면 된다는 것이 아니라 함께 싸우게 된다는 것을 이야기 합니다.
나 혼자 잘 싸워서 혼자 천당가겠다는 것은 없습니다. 반드시 더불어서 함께 싸우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그 내막을 알기 위해서 앞에 한 것을 다시 정리하겠습니다. 죽은 사람의 가문이 현재 산 사람에게는 붕 떠 있습니다. ‘죽은 사람은 없는거야. 현재 살아 있는 사람끼리 해.’ 이런 식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성경에 보면 죽은 사람의 가문이 따로 펼쳐져요. 죽은 사람의 가문에서 이미 죽어버린 사람이 갖고 있는 하나님에게서 받은 약속이 살아 있는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이미 죽어버린 아브라함, 야곱 때문에 이스라엘이 전쟁에 승리해요. 이것이 신기하지 않습니까? 야곱은 이미 죽어 없어지고 야곱이 받은 약속 때문에 생겨난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이름도 야곱의 이름을 그대로 따서 이스라엘입니다. 야곱은 이미 죽고 없는데 그 죽은 사람에게 주어진 약속에 의해서 산 사람이 사는 거예요. 누구의 공로입니까? 이미 죽은 사람이 받았던 약속의 혜택이죠. 이미 죽은 세 명의 사람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되지요.
그러면 지금 산 사람들을 이스라엘 집단으로 본다면 이스라엘 한 사람 한사람이 얼마나 재주있고 똑똑하고 믿음 좋은가, 이것이 이스라엘을 유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을 찾아오신 하나님이 계신데 그 하나님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 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줄여서 ‘언약의 하나님’ 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집단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에 의해서 생겨난 아주 신기하게 짝이 없는 집단이 성립되는 겁니다. 이것을 가지고 아브라함자손이라고 합니다. 아브라함 자손이란 결국 이스라엘이 아브라함 가문에 속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아브라함 씨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면 ‘내 씨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복을 받는다’ 고 되어 있어요.
그런데 여러분은 그것만 알고 있지요? ‘내 씨로 많은 사람이 저주를 받는다’ 는 이것은 자꾸 잊어버리려고 하지요. 결국 이 세상은 두 세상으로 나누어지도록 되어 있는데, 아브라함 때문에 복받는 집단, 정확하게 말해서 아브라함 씨 때문에 복 받는 집단이 있는 반면에 또 다른 한쪽은 아브라함의 씨로 말미암아 꼭 저주를 받아 지옥에 가야만 하는 집단이 생깁니다.
그 두 집단 외에 다른 제 삼의 집단은 죄송합니다만 없습니다. 제가 죄송할 문제는 아닙니다만 사적으로 개인적으로 구원받겠다는 분들에게는 죄송하다는 말씀밖에 못 드립니다. 그런 구원은 성령 받지 않고 일반사람들도 지어낼 수 있어요. 학자들이 성경보고 연구해서 예수 믿으면 구원된다는 아이디어를 만들어 낼 수가 있어요. 그것은 가짜입니다.
성경은 집단으로 구원받지 개인자격으로 구원받는 그런 법은 없습니다. ‘왜 자꾸 목사님은 개인은 안되는 이야기를 합니까?’ 라고 하는데 아브라함의 씨로 구원받는데 그 씨에 뭐가 있는가? 이름이 있는데 그 이름이 주의 이름입니다. 아브라함자손의 씨가 세월이 흐르면 마태복음 1장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라고 해서 ‘다윗의 씨’라고 하고 로마서에서는 ‘다윗의 가문’ 또는 ‘다윗의 자손’ 이라고 합니다.
소경들이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라고 했잖아요. 하면 되는데 왜 다윗의 자손이 나옵니까? ‘제가 하나님 믿습니다. 조물주를 믿습니다.’ 그냥 이렇게 해서 구원받으면 된다고 여기는데 그것은 자기 생각이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약속으로만 구원받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사적인 이성, 양심, 종교성으로 구원받는 것은 마귀가 지어낸 것이지 그런 구원은 하나님의 사전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전에 없는 것이 많아요. ‘예수 안 믿어도 구원된다.’ 이런 것은 하나님의 사전에는 없어요. 나폴레옹의 사전에는 다 들어 있습니다. 주님의 사전에는 없는 것이 아주 많아요. ‘남자거든 여자 되기를 기도하라.’ 이런 것이 없어요. ‘네게 필요한 것을 구하라’ 그런 것도 없어요. 반대로 있어요. ‘네가 필요한 것은 알아서 다 준다. 그런 것은 기도하지 말라’(마 6:31,32) 고 했습니다.
하여튼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사전에는 하나도 없습니다.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은 없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롬 1:17) 그렇게 되어 있어요. 개인구원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전에는 아브라함 자손만 구원받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 자손 되고 안되고는 주의 이름의 고유권한입니다.
제가 좀 건방지지만 주의 이름이라고 해 봅시다. ‘학생, 까만 것을 줄까? 빨간 것을 줄까?’ ‘…?’ ‘안줘!’ 이것이 누구의 권한입니까? 주의 이름 본인의 권한입니다. 어느 산골에 나무꾼이 도끼를 연못에 빠뜨렸어요. 수심이 깊어서 수영도 못하고 어쩔줄을 모르고 있는데 갑자기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오르더니 신령 비슷하게 생긴 할아버지 한분이 올라왔어요.
‘왜 울고 있느냐?’
‘나무하다 도끼를 빠뜨렸시우.’
‘거좀 똑바로 하지 그랬냐? (금도끼를 들어보이면서) 네꺼 맞냐?’
‘아니어라.’
‘심부름 되게 시키는구나. (사라졌다가 다시 올라와서 이번에는 은도끼를 들어보이며) 이거냐?’
‘그것도 제것이 아니어라.’
‘에이 귀찮구나. (사라졌다가 세번째 다시 나타나서 이번에는 쇠도끼) 그럼 이거냐?
'아, 그거이 제 도끼가 틀임 없구만유.'
‘그래. 네 쇠도끼 가져가라. (금도끼 은도끼는 그대로 가지고 사라지면서) 안녕! 나무 계속 하면서 잘살아라.’
나무꾼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이상하다. 시나리오가 이게 아닌데, 분명히 세 도끼를 다 내가 가지게 되어 있는게 아닌가?’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의 시나리오는 착하면 구원받는다는 거예요. 절에 가서 비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사고방식을 가지고 교회 와서 ‘주여, 오늘도 교회 왔습니다. 저 착하지요? (오늘 내가 교회 왔기 때문에 나를 구원해 줘야 될 걸)’
이런 식으로 자기가 시나리오를 짜요. 소설을 씁니다. ‘하나님, 제가 이런식으로 하면 구원받지요?’ 이렇게 자기가 구원받는 시나리오를 다 써요. 주께서 찢어버립니다. ‘아이고, 그것은 제가 착한 일을 한 것을 왜 찢어 버립니까?’ ‘죄사함의 권세는 너에게 없고 나에게만 있다. 누구에게 벌을 주든 구원을 주든 그 권세는 나에게만 있다.’ 이렇게 주님은 자기가문만 구원합니다.
아직도 이해가 안 되십니까? 학교에서 운동회를 하는데 김씨가문에서 치킨을 시켰습니다. 후라이드 반마리, 양념 반마리. 그 집 애가 둘인데 치킨 먹게 손 씻고 오라고 시켰습니다. 그런데 그 옆에 치킨이 먹고 싶어 환장한 애가 하나 있었습니다. ‘아저씨, 치킨 먹으면 안되나요? 안돼. 이 치킨은 우리집 가문을 위한 치킨이지 너의 집 가문을 위한 치킨이 아니거든.’
이래도 이해 안되시면 저의 한계입니다. 개인 구원이 아닙니다. ‘아저씨 저 구원해주세요.’ 다른 말로 하면 ‘아저씨, 치킨 먹고 싶은데 치킨 주세요.’ 죄송합니다. 안됩니다. 치킨을 주고 안주고는 주의 이름으로 달렸습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은 말합니다. ‘이 세상에 주의 이름외에 구원얻을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행 4:12)고 합니다.
로마서 10장에서 말합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롬 10:13) 이 말은 ‘너의 가문을 포기하고 너의 이름 접어라’ 그 말입니다. ‘처나 자식이나 아비나 남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하늘나라 유업을 받을 수 없다. 심지어 너 자신마저도 믿지 마라.’ 자신이 의욕이 있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의욕이 있든지 없든지 간에 구원자는 따로 계신데 그분이 누구냐? 주의 이름이 되는 겁니다.
어째서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습니까? 예수 이름만이 뭘 갖고 있습니까? 언약을 가지고 있어요.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만 이룰 수 있기 때문에 그 약속에 의하면 자기가 원하는 자에 한해서만 구원할 수 있는 겁니다. ‘목사님, 왜 하나님의 약속은 왜 하나님만이 지킬 수 있습니까?’ 라고 물으신다면 답변은 이렇습니다.
제 글씨는 성질이 급해서 다른 사람들이 잘 알아볼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제가 갈겨 쓴 이 칠판 글씨를 그대로 쓸 수 있습니까? 저는 쓸 수 있습니다. 왜? 제 글씨이거든요. 하나님의 약속은 원래부터 하나님만이 이루도록 되어 있고 다른 누구, 악마든 인간이든 이루지 못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주제넘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룬다는 것은 있을수 없습니다.
그러면 성경말씀은 왜 주었는가? 성경말씀은 이미 이루어진 언약에 의해서 칼로 사용해서 관절과 골수를 후비고 쪼개서 완전히 우리의 존재를 사건의 쪼가리로 분해시키기 위해서 말씀을 주는 겁니다. 인간을 분해하는데 말씀으로 분해합니다. 그러면 남는 것은 사건과 사건의 덩어리, 연속으로만 남습니다. 의사가 인간을 해부하면 목, 팔, 다리등 따로 따로 나옵니다. 소고기도 부위별로 부르는 이름이 다 다르지요? 아롱사태, 안심, 등심 등등.
그런데 성경말씀이 우리를 쪼개면 사건과 사건이 생겨요. ‘아, 일곱 살 때 내가 눈 다친 것도 주의 은혜구나. 아홉 살 때 잠자다가 오줌 싼 것도 은혜구나.’ 모든 것이 은혜의 사건으로 분류가 됩니다. 애들이 마징가젯 조립해서 가지고 놀다가 형이 실수해서 아랫도리 치면 마징가 조립한 것이 다 부서지고 부품들이 남지요.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은 죽으면 흙이 될 수밖에 없도록 하는 약속의 사건만 남게 됩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이것만 남아요. 우리는 처음부터 말씀이었는데 ‘이것은 팔, 이것은 배’ 만날 눈에 보이는 물체덩어리로만 본다는 거예요. 인간은 없고 사건덩어리입니다. 여러분이 엎어져서 정강이가 깨져서 파스 붙여보세요. 그러면 그 정강이는 엎어졌다는 사건이 들어 있는 정강이가 되겠지요.
파리바케트 빵 사러갔다가 복숭뼈가 깨졌대요. 그러면 그 복송아뼈에는 파리바케트에 빵사러 갔다가 엎어져서 복숭아뼈 깨진 사건이 거기 붙어 있어요. 학생들의 머리카락이 머리카락이 날때부터 길었어요? 주께서 길러 주신 거예요. 참새도 누가 기른다고요? 주께서 기른다고요. 발걸음을 누가 센다고요? 주께서 세시고 참새도 기르고 모든 들에 핀 꽃 한송이도 하나님께서 은혜주시는 사건과 사건에 의한 것이고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고전 15장 10절에 보면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 라고 합니다. 교회에 교인들이 모이게 되면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이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이게 된 것은 주의 은혜 아니면 절대 모일 수 없고 내가 강단에 설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설수 없다’ 고요. 만일에 허리가 아파보세요. 의자에 앉아서 해야 되겠지요.
허리가 안 아플때는 마치 당연히 안 아픈 것으로 여겼지만 허리가 아파보면 그동안 당연히가 아니고 하나님이 힘 주셔서 은혜로 그동안 복음 전하라고 안아팠던 것이고 또 허리가 아프면 아픈 채로 복음전하라고 하는 것이고 그러다가 죽게 되면 스데반 집사님처럼 복음전하다가 죽으라고 그렇게 은혜주신 겁니다. 그러니까 사나 죽으나 누구의 것입니까? 주님의 것이죠. 사건을 그렇게 만들었어요.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빈틈없는 사건 아닙니까? 완전범죄같은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신 것은 그 말씀으로 우리를 쪼개서 구석구석에 우리가 놓치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 놓치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감사할 거리, 그런 것을 찾아내서 범사에 감사하라고 이 말씀을 준 겁니다. 다음주에 제가 결혼식 주례를 해야 하는데 주례사를 열 번도 넘게 고쳐쓰고 있어요.
열 번 다 맘에 들지 않아요. 주례가 너무 과격해요. ‘시집가고 사고 팔고 할 때 인자가 왔다.’ 결혼식을 앞두고 단꿈 같은 신혼여행을 생각하는 사람에게 ‘주님의 재림을 알아? 시집 장가가는 것만 생각했지 주의 재림을 생각이나 해 봤어?’ 라고 해버리면 분위기가 밥도 안넘어가게 생겼어요.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많이 되는데 주례 내용 중의 하나는 이겁니다.
아내가 남편을 생각할 때 간격을 좁히기 위해서 애쓰죠. ‘당신과 나는 맘도 맞고 성격도 맞다’ 합니다. 그런데 막상 보면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먼 당신이고 점점 더 멀어지는 당신이에요. 그래서 아내가 자기의 미흡한 것을 보상하려고 들죠. 이것도 역시 칼 구스타프 융의 이론입니다.
‘항상 인간의 무의식적인 행동은 내 행동에 대해서 미흡함을 찾아내서 그 미흡함에 대한 보상을 어디선가 끌어내기 위한 행동을 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갈라진 내 마음이 합해지면 그것이 내 마음의 평화다.’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여자가 처녀 때 ‘나는 이런게 모자라고 부족한 면이다’ 라는 점을 메워줄 수 있는 남자랑 결혼해서 ‘얼추 내 모자라는 것을 채워주겠지’ 라고 생각했는데 점점 더 멀어지고 가까워지기에는 너무 먼 당신입니다.
이것은 항상 미흡, 미완료입닏. 미완료는 당하면 당할수록 점점 더 멀어지니까 이것을 한꺼번에 완료로 메꿀수 있는 것이 뭐가 있는가? 그게 바로 자식입니다. 왜? 자식은 앞에 뭐가 붙는가? ‘나’ 항상 ‘내 자식’이 됩니다. 자식이 생기면 이제 여자는 남편도 제쳐두고 자식이 온전하기 때문에 엄마는 자기 자신이 미흡해도 자식만 있으면 그것이 보상이 되지요.
이제는 자식의 인생이 내 인생이지 내 인생은 없어도 괜찮아요. 자식을 위해서라면 지하철에서 자리 잡기 위해서 체면이 깎이는 것도 개의치 않습니다. ‘다 비켜라. 내 새끼 여기 앉아라.’ 부끄러운것도 없지요. 처녀 때는 부끄럽다고 공장도 안 가더니만 자식 과외 시킨다고 공장이건 뭐건 마다 않고 미싱 질 하는 것도 마다않고 드르륵 박음질 하면서 ‘그저 공부만 해라. 내가 바로 너다. 내 인생은 없다. 네가 내 대신이다. 나는 없다.’
그러면 남편보기에 이것은 완전히 미쳤지요. 남편은 머슴으로 전락하죠. 남편은 뭔가? 돈 버는 기계에 불과합니다. ‘누구든지 내 남편을 힘들게 하면 용서하지 않겠다’ 하다가 ‘누구든지 내 새끼를 힘들게 하면 용서하지 않겠다’로 바뀝니다. 자식은 완제품이라고 여기지만 자식도 나이 들면 서서히 부모 곁을 떠나갑니다. 그러면 또 간격이 벌어지지요.
여자가 아이 낳을 때 그 기쁨을 가지고 성경에서 ‘여자가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딤전 2:15)고 합니다. 비록 고통스럽지만 해산 하고 난 뒤에는 기쁨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완제품인지를 그때 안다는 거예요. 구원도 비록 고통스럽지만 완제품이 온다는 그 기쁨, 내가 손대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완벽하고 흠이 없다는 그 기쁨을 여성은 해산을 통해서 잠시 누리고 느낍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누구중심이 아니다? 역시 내 중심은 아니고 주님께서 만들어놓은 집단중심, 가문중심은 따로 있습니다. 좀 힘들더라도 바짝 정신좀 차립시다. 중요한 것은 뭐냐? ‘멜기세덱의 반차(반열)’. 이것이 성경에서 어려운 말인데 ‘멜기세덱의 반차는 말은 족보도 없고 어미도 아비도 없는데 죽은자와 방불하다.’(히 7:3)
아까 ‘시형제결혼법’ 이야기했지요. 분명히 나는 나인데 나는 나이면서도 내 것이 아니고 이미 돌아가신 분의 소유가 되지요. 멜기세덱의 가문은 원래 없는 가문입니다. 없는 가문인데 없는데서 능력이 와서 세상에 있는 자기백성을 ‘너는 내꺼야. 너는 메시야에 의해서 구원될 자야’ 라고 뽑아 보니까 그 위에는 멜기세덱의 가문, 하늘에 속한 가문, 천상의 가문, 묵시적 가문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 대 인간의 자식 낳기는 아무 의미 없지요. 의미 없는 것을 왜 하게 하느냐? 의미 없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하게 해요. 어떤 분이 질문한 게 있어요. ‘목사님, 이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혼의 기쁨과, 이혼의 기쁨이라니 말이 좀 이상한데, 이혼의 기쁨과 이혼의 슬픔도 감당 안 될 정도로 큰 기쁨.
이혼하면서도 ‘나 같은 인간을 왜 구원하셨으며 나 같은 죄인을 왜 끌어 올렸습니까?’ 라는 구원의 기쁨 앞에서 이혼하고 안하고 그런 것은 고민거리도 문제거리도 안된다고 했어요. 따라서 이혼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치료센터같은데 가지 말고 이혼문제의 유일한 해결점은 복음만 전하는 곳에 가시면 이혼도 하나의 은혜의 사건(?)인 것을 아는 겁니다.
그래서 자식들 뿔뿔이 흩어지고 헤어지는 것도 은혜로운 사건입니다. 좀 납득이 안 되지요. 한번 해 보세요. 납득이 되는지. 해봐도 납득이 안 될 거예요. 하나 안하나 관계없이 평소에 이혼하기 전에도 감사했고, 이혼 때문에 아니라 평소에 ‘나 같은 인간도 구원했다’ 하는 그 감사가 있으면 그것은 별 문제 안 된다고 했어요.
그래서 성경에서 사도바울은 ‘갈리게 되면 갈라서게 해라’(고전 7:15) 합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사도바울이 결혼을 해보지 않아서 말을 함부로 한다고 합니다. 그게 곧 죽어도 신학자입니다. ‘결혼도 안해 봤으니 이혼의 아픔을 몰라서 그런 소리를 하는데 그런 아픔도 모르는게 무슨 사도겠는가?’ 라고 합니다.
그러면 내가 한마디 하지요. ‘사도 같지도 않은 사도의 말을 듣고 구원받고자 하는 너는 또 뭔데?’ 사도는 삼층천에 올라간 사람입니다. ‘거기 누구십니까?’ ‘사도인데.’ ‘어디계십니까?’ ‘천국이다.’ ‘묻겠습니다.’ ‘물어봐라.’ ‘이혼할까요? 말까요?’ 시내산에 올라간 모세한테도 물어보세요. ‘모세님, 밥 얼마나 굶었습니까?’ ‘밥같은 것 안먹어도 상관없다.’ ‘그럼 묻겠습니다. 이혼 할까요, 말까요?’ ‘올라와 봐라. 그것이 화제거리가 되는지.’
시내산까지 높은 곳에 올라갈 필요 없이 가깝고 낮은 곳에 가봅시다. 변화산. ‘베드로님, 이혼 할까요, 말까요?’ 지금 베드로 정신없어요. 초막 셋을 짓고 주님께 바치기 바쁜데 언제 그런 생각하겠어요. 이것이 다 뭐냐? 내 구원이 아니고 주님의 집단구원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 집단구원의 우두머리, 책임자를 교회의 머리라고 하고 주님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주님의 특징이 뭐냐? 부활의 능력이 있어요. 죽은자도 죽지 않아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 모든 죽음도 어른께서 처리합니다. 30도 안된 어떤 아가씨인데 ‘인주시’ 시장이 되었어요. 그 도시는 어떤 드라마에 나오는 허구적인 도시인데 그 도시의 시장이 되었어요. 그 시장 누가 되게 했는가? 그 이전에 부시장이었던 사람이 알아서 시장되게 만들었어요.
그럴 때 그 시장은 혼자 시장되었다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누가 떠밀어서 날 시장되게 했어?’ 그렇게 해야지요. 마찬가지입니다. ‘누구입니까? 날 구원시킨 분이.’ ‘바로 나다.’ ‘아, 주님이셨습니까?’ 이것이 바로 ‘성령이 임하면 너희가 땅끝까지’ 누구 증인되리라? ‘주의 증인되리라.’(행 1:8)
성경전체가 이렇게 집단구원입니다. 아직까지 개인구원이야기를 안했습니다. 집단구원과 개인구원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개인구원은 자기 이름이 있어요. 개인마다 이름이 있지요. 개인의 이름안에 개인의 이름이 다 들어 있어요. 이름은 개인의 대표입니다. 그러면 개인이 구원받는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내 이름이 천국에 구원 받는다’ 혹은 ‘내 이름이 천국간다’ 그런 뜻입니다.
이스라엘, 집단구원 말고 이방인들, 개인구원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는가? 이름이 그 사람을 대표하기 때문에 신의 이름이 있으면, 내가 신의 이름을 부르게 되면 신은 이름을 대표하기에,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신이 갖고 있는 그 능력의 일부가 내 이름으로 들어와서 나로 하여금 능력자가 되는 아이디어를 발휘하게 되어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 만날 때 이름을 물으니 하나님께서 ‘네가 왜 내 이름을 묻느냐?’(출 3:13,14)고 합니다. 사람들이 신의 이름을 부를 때는 ‘내가 신의 이름을 부르고 관리하고 갖고 있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위급할 때 신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그 신의 이름이 담고 있는 능력이 작동해서 나를 위급한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준다’는 아이디어가 모든 종족마다 다 있습니다.
그래서 가인이 제사한 거예요. 모든 사람은 가인의 후손입니다. 어떤 나라에 가도 그 나라에 맞는 신을 불러야 됩니다. 어떤 영역에 가도 그 영역에서 힘을 쓰는 신이 따로 있거든요. 얼마나 공평한지 몰라요. 뷔페 같은데 보면 김밥 있고, 초밥 있고, 잡채가 있고, 탕수육이 있다면 ‘여기 김밥은 있는데 초밥은 없네’ 하면 안 되고 초밥동네에 가서 초밥을 건지면 됩니다.
그래서 일본에는 신이 15만가지가 있답니다. 인도에는 원숭이 신을 믿고 원숭이처럼 벽을 기어오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세상에 이런 일이> 프로에 나왔어요. 원숭이에게는 내게는 없고 원숭이게만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 능력을 내게 보충하기 위한 겁니다.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하고 내가 못하는 것은 신의 이름을 불러서 신의 능력으로 내 부족을 채워서 내가 원하는 것을 보상할 수 있다는 모든 아이디어가 모든 인간에게 다 있습니다.
여학생들이 시험칠 때 볼펜 붙들고 ‘귀신아, 귀신아, 붙어라’ 이런 것들. ‘생물귀신아, 물리귀신아, 수학귀신아.’ 왜 그런 현상이 있는가? 신이라는 것은 타인의 모습인데 나한테 없는 것이 상대에게 있을 때 그것을 빼앗아서 내 것으로 채우기를 원하는 겁니다. 종교란 내가 가능한 것은 빼앗아서 내 것으로 챙기고 내가 안 되는 것만 골라서 신의 능력으로 채워서 내가 안되는 것까지 극복하는 위대한 실력을 남에게 보여주는 겁니다.
그럴 때 그 신의능력이 나에게 와버리면 나의 이름이 팽창하겠지요. 이것이 창세기 11장에 나오는데 사람들이 바벨탑을 만든 이유가 뭡니까? 바벨탑에 간판이 붙어 있는데 뭐라고 써 있지요? ‘우리 이름을 하늘에 닿게 하자.’ 다른 말로 하면 ‘영광교회’ 쯤 되겠지요. 또 ‘빛남교회’ ‘충만한 교회’ ‘번성하는 교회’ ‘행복이 가득한 교회’ ‘사랑이 넘치는 교회’ 이정도 되겠지요.
앞으로는 교회도 이렇게 한글 이름으로 짓지 말고 ‘MB교회’ 아니면 ‘PK교회’ 이렇게 해서 뭔가 있어보이게 짓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 목사님처럼 성씨가 ‘한’ 같으면 교회 이름 지을 때 ‘HAN교회’ 이 목사 같으면 'LEE-CHURCH' 이러면 상당히 세련되어 보이지 않습니까? 신이라는 것은 누굴 위해 존재한다? 내 이름이 존재하는 한 항상 나를 위한 신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골로새서 1장 16절의 ‘모든 만물은 예수님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그 말씀과 충돌이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하는 것은 뭘 포기하라는 것입니까? 내 이름을 포기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만드는 것을 걸쳐야 너는 집단전쟁으로 치르는 영적전쟁에서 승리할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신의 이름은 뭡니까? 모세가 말합니다. ‘신의 이름은 뭡니까?’ ‘안가르쳐 줘. 왜? 너는 죽어야 되고 너의 이름은 없어져야 되니까.’ 신의 이름은 없어요. 신의 이름에서 나오는 사건들이 뭉치고 뭉쳐서 신의 이름이 됩니다. 예수 이름 부르면 구원받는가? 예수 이름 단순히 입으로 부른다는 것으로 구원 못 받습니다.
그러면 뭐냐? ‘예수님은 누구신데?’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물위를 걸으시고 오병이어 행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시고’ 라는 이런 사건들이 뭉쳐진 그 이름을 믿을 때 그 사람이 구원받습니다. 만약에 박재규라는 사람이 있다 칩시다. ‘나는 박재규를 믿습니다’ 하면 소용없어요.
‘박 재규가 누군데?’ ‘몰라.’ ‘그냥 이름만 알아.’ 그러면 안돼요. ‘박재규라는 사람은 신월동에 와서 살았으며 최근에 아파트를 분양받았으며…’ 이런 것이 다 있어야 돼요. ‘박재규라는 사람이 이런 사건, 업적, 성과를 남겼구나’ 할 때 그 성과, 그 공로가 주의 이름이 돼요. 십자가 뭡니까? 십자가가 저주받을 자기 백성을 위해서 대신 죽으신 거죠.
그러면 십자가에서 진작 죽어야 될 사람은 누구입니까? 죄많은 우리가 죽어야 되지요. 죽을 우리를 껴안고 주님이 대신 죽었잖아요. 그러면 ‘주의 이름을 믿습니다’를 다른 말로 하면 ‘주의 이름이 하신 사건을 믿습니다’이고 다른 말로 하면 ‘주님께서 지신 십자가가 나와 관련되어 있음을 내가 믿습니다’ 아닙니까? 그러면 ‘십자가를 믿습니다’ 그 말이 무슨 뜻입니까? ‘나는 죽어 마땅합니다’ 그 말입니다.
이 세상에 어떤 인간도 ‘너는 죽어 마땅하다’고 손가락질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는데 주님께서 ‘이 근호 너는 죽어 마땅해. 너는 태어날 때부터 부모 죄로부터 태어났어. 그것은 아담의 죄이며 너는 저주받아야 돼. 너는 저주받았기에 그 저주로 인하여 영광되지 못해.’ 하나님께 영광 안되면 안되는 거예요. 그러면 ‘너는 저주받을 수밖에 없다’고 할 때, ‘저는 믿습니다. 그것을 수용하고 동의합니다. 내가 그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라고 하는 겁니다.
주의 이름속에 예수님 하신 일이 있고 그 일에 의해서 나 하나만 구원하는 겁니까? 나 같은 똑같은 사람이 또 있지요. 그 때 무엇이 함께 섞이고 연결됩니까? 주님께서 주시는 용서가 있지요. 그리 되면 복음 안에서 형제사랑이 성립됩니다. 왜? 각자 나의 이름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나의 이름 속에 뭐가 있습니까? 나의 사건들이 있습니다.
나의 사건들이란 나의 이름으로 통하는 사건이기 때문에 모든 사건이 나를 위해서 존재합니다. 공부든 밥을 먹든 뭘 하든 다 나를 위해서 하는 나의 이름이 주님의 이름 안에서 죽고 죄인 된다는 말은 자신의 사랑 자신의 사랑 같은 것은 다 소용없는 것이 됩니다. 그저 주님이 주신 사랑 안에서 형제가 하나가 될 때 r그게 바로 이웃사랑이고 형제사랑입니다.
부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부부를 서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왜 저 여자를 하나님이 내게 주셨을까?’ 하면 ‘주의 복음으로 나같이 못난 인간에게 저런 아름다운 여인을 주셨구나’ 가 됩니다. 가장 이상적인 남편감은 ‘매일 아내에게 반하는 남자.’ 결혼 안 해본 사람은 말을 하지 마세요. 결혼 해보면 이것이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알 수가 있어요.
세로토닌이라는 물질이 결혼해서 6개월만 지나면 다 없어지고 따라서 사랑도 다 사라집니다. 매일 같이 아내에게 반하는 남자, 오금이 저릴 정도로 맥을 못 추는 남자, 마치 전기충격을 받은 개구리 같은 남자.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해서 죄송합니다. 매일 아내에게 반하는 남편 봤습니까? 그저 나이트 바에서 술 마시다 만난 여자, 술김에 결혼하자 해놓고는 6개월 지나서 흥신소에 연락해서 몰래카메라 설치한다고 난리피우면 곤란하죠.
의존교회 집사님들의 남편은 매일 반합니까? 안 그러면 매일 패고 싶은 경우입니까? 보통 남자들은 매일 반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패고 싶은 심정으로 아내를 대한다고 하지요. 매일 반하는 것은 매일 죽어야 가능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 합니다. 매일 죽어야 이렇게 돼요. 그런데 남편이 아내에게 이것을 원한다면 그 아내는 매일 죽어야 됩니다.
기대할 것을 기대하세요. 아내도 이것을 기대하면 안돼요. 혹시 남편이 한 이틀 이렇게 해 주거든 고마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라’ 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죽어라. 네가 죽어야 네 안에서 내가 산다’ 는 겁니다. 주어진 모든 인생의 사건은 다 나의 의미가 죽어줘야 나에게 들이닥친 주님의 사건이 살아나요.
나의 의미는 의미 없어요. 주님께서 의미 있어서 살게 하신 거예요. ‘주여, 왜 살게 하십니까?’ 이렇게 나와야지 ‘주여, 왜 죽이십니까?’ 이렇게 나오면 안 됩니다. 죽어도 마땅하기 때문에 ‘주여, 오늘도 왜 살아났습니까? … 아, 먹든지 마시든지 주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는 것이구나.’(고전 10:31)
6장 18절에 보면 ‘기도와 간구를 하되 무시로…’ 여기서 ‘무시로’는 시도 때도 없이, ‘성령안에서’ 어디 안에서? ‘성령 안에서’ 육은 아닙니다. 성령은 십자가 이후에 나오는 영이 성령이죠. 십자가죽음 이후에 비로소 나왔던 영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죽고 부활하고 난 뒤에 하늘나라 올라가셔서 내려온 영을 성령(성령세례)이라고 합니다.
그 때의 영은 십자가의 부활을 거쳐서 나온 영이기 때문에 그 십자가 영을 받게 되면 날마다 죽어 마땅하고 살아온 것도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깨닫는 그런 영, 그런 영안에서 ‘성령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입장이 집단 구원이기 때문에 자기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을 위해서 그리고 주를 믿는 성도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합니다.
자기를 위해서 기도할 것은 하나도 없어요. 자기를 위해서 기도할 것은 만 날 이것이죠. ‘주여, 주의 복음의 도구가 되게 하옵소서.’ 19절에 나옵니다.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것이니.’ ‘복음의 비밀’ 이라고 했는데 시형제결혼법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밀입니다.
알면 비밀이 아닌데 비밀은 감추어졌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나타난 것은 비밀을 비밀스럽게 하기 위해서 비밀 아닌 것들이 나타나줘야 돼요. 그렇다면 성도의 모든 의미가 복음의 능력, 구원의 능력에서 나온 겁니다. 성도의 모든 행동의 초점은 복음의 비밀로 올라가 있어야 되겠지요. 왜 밥을 먹는가? 복음의 비밀을 나타내기 위해서. 왜 숨을 쉬는가? 복음의 능력을 전하기 위해서.
그런데 만약에 이 비밀을 끊어 버리고 살면 비밀이 없는 삶이 되지요. 비밀이 없는 삶을 살면 눈에 보이는 대로만 살게 되지요. 그러면 눈에 보이는 삶은 누구입니까? 자기자신이죠. 나를 위해서 살면 복음의 비밀하고 충돌되니까 하는 일마다 하나님께 영광이 안 되지요. 하나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제가 운전시험을 친다고 합시다. 여섯 번 떨어진 경험이 있습니다.
그 때 왜 여섯 번 떨어졌는가? 여섯 번 떨어져도 복음으로만 구원되도록 하기 위해서 여섯 번 떨어지는 거예요. 만일 일곱 번 떨어진다면 일곱 번 떨어져도 구원받는데 아무 지장이 없음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 일곱 번 떨어지는 거예요. 그런데 한번에 되는 경우는 뭔가? 한 번에 되는 것과 구원되는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복음의 비밀은 뭡니까? ‘완료!’ 완료가 없으면 사는 것이 괴로워서 못살아요. 자기 미흡함을 자기 행동으로 메우려고 하면 그것이 마귀의 시험입니다. 완료라는 말은 ‘상관없음’ CF용어로 하면 ‘문제없어~ 문제없어~ 문제없어♫’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문제없어~ 문제없어~ 문제없어♫’ 아무 문제없어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갑니다. 주변 아줌마들이 마구 울어댑니다. ‘문제없어~ 문제없어~ 문제없어♫’ ‘날 위해서 울지 말고 너희 딸들을 위해서 울어라. 나는 아무 문제가 없다. 도리어 너희에게 문제가 있다.’ 이것이 복음의 비밀입니다. 이미 완료가 된 상태이기 때문에 이것만이 완료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미완료적이고 힘든 이 인생을 아직도 살아가야 합니다.
이 땅의 아이들은 더 자라야 되고, 중학교가고 고등학교 가야 되고, 남자아이들은 자라서 해병대 입대해야 되고, 그러면 엄마는 울고불고 하면서 ‘얘야, 건강하게만 돌아와 다오’ 하고. 왜 이렇게 모든 이 땅의 미흡함이 있으냐? 그것은 복음으로만 구원되기 때문에 문제 없음에도 불구하고 문제 있게 여기는 우리 자신에게 미흡함이 있다는 거예요.
우리 자신에게 많이 찾으시기 바랍니다. 왜 우리는 성경대로 못사는지, 왜 우리는 돈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는데 돈만 챙기고 좋아하는지, 왜 우리는 그렇게도 욕심이 많은지 성경을 보면 볼수록 점점 더 많이 알아서 그 미흡함을 충분히 느끼면서 ‘문제없어!’ 라고 외칠수 있는 고백이 있기를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기도를 해도 하나님이 기도하지 말라는 것만 골라서 기도하고 예배 참석해도 자기욕망만 챙기고, 하나님께서 내 미흡함을 덜어줄 것이라는 보상을 은근히 기대하면서 예배 참석하고 착한 일을 해도 남을 꺾고 이기기 위한 욕심으로 하는 정말로 문제 많은 우리들, 익히 아시고 십자가 피를 흘려주심으로 말미암아 문제 많은 우리가 주님안에서 문제 없는 사람으로 바뀌게 해준 이 복, 이 은혜를 평생 감사할수 있고 증거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엡 38(20090612-2).hwp (108.0K), Down: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