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 4: 5-10 (예상 밖의 심판)
렘 4: 5-10 (예상 밖의 심판)
이름 : 우리교회(IP:220.81.176.169)
본문 : 예레미야 4장 5-10절
제목 : 예상 밖의 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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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09-06-17 20:57
예상 밖의 심판
2009년 6월 17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4:5-10
(렘 4:5, 개정) 『너희는 유다에 선포하며 예루살렘에 공포하여 이르기를 이 땅에서 나팔을 불라 하며 또 크게 외쳐 이르기를 너희는 모이라 우리가 견고한 성으로 들어가자 하고』
(렘 4:6, 개정) 『시온을 향하여 깃발을 세우라, 도피하라, 지체하지 말라, 내가 북방에서 재난과 큰 멸망을 가져오리라』
(렘 4:7, 개정) 『사자가 그 수풀에서 올라왔으며 나라들을 멸하는 자가 나아 왔으되 네 땅을 황폐하게 하려고 이미 그의 처소를 떠났은즉 네 성읍들이 황폐하여 주민이 없게 되리니』
(렘 4:8, 개정) 『이로 말미암아 너희는 굵은 베를 두르고 애곡하라 이는 여호와의 맹렬한 노가 아직 너희에게서 돌이키지 아니하였음이라』
(렘 4:9, 개정)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날에 왕과 지도자들은 낙심할 것이며 제사장들은 놀랄 것이며 선지자들은 깜짝 놀라리라』
(렘 4:10, 개정)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진실로 이 백성과 예루살렘을 크게 속이셨나이다 이르시기를 너희에게 평강이 있으리라 하시더니 칼이 생명에 이르렀나이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작심을 하시고 심판을 감행하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어찌 하다보니 심판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심판조차도 하나님의 계획 안에 명백하게 들어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유다 백성들이나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난데없는 심판 소식에 어이가 없어 합니다.
즉 그들의 안중에 심판이 들어있지 않았습니다. 이와같은 의식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 인간들이 원하는 하나님은 마땅히, 당연히 축복만 주고 은혜만 주는 하나님이기를 원합니다. 심판은 될 수 있는 대로 안하는 그런 하나님을 원합니다. 이런 인간들의 생각은 마치 심판이라는 것이 원래 하나님 마음에는 아예 없는 것처럼 여깁니다.
하지만 이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이것은 진리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자기 살아있음을 명백한 현실로 볼 줄 알았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명백한 현실을 간주하지 않으려는 습성 때문에 그러합니다. 내가 살아있음이 진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이 진리입니다.
나에게 심판이 오는 것을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말고 그 일을 계기로 ‘과연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것이 맞구나’에서 오는 희열과 감역을 가져야합니다. 이렇게 되면 나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바뀝니다. 이렇게 되면 심판받는 것도 축복에 해당됩니다. 흔히 요즈음 사람들이 성경을 하도 안보니 심지어 기독교 내부에서는 성경을 일개 신화나 전설로 후퇴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대중들에게 심리적 부담을 안주어서 교회로 유도하기 위한 전략이지요. 그러다보니 성경 내용에 신경 쓰지 말고 교회에서 제공하는 인간적인 사랑을 받으라는 식으로 나옵니다. 그러니 갈수록 적극적으로 성경 말씀을 외면합니다. 성경을 거부하다보니 남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존재 뿐입니다. 이런 존재 위주에다 심판이나 저주를 말한다면 사람들은 화를 내지요.
그러나 실제로 인류 역사를 보면, 이스라엘은 자기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아 유리하는 민족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이처럼 고생시키는 것은 세상이 인간 중심이 아니라 이스라엘 하나님의 말씀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그들로 통해 전달하기 위함입니다. 즉 그들 위해 살아계신 하나님이 주신 심판을 가득 싣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심판이라는 하나님의 뜻이 언제부터 생긴 겁니까? 마태복음 15;13에 보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아니하는 것은 다 뽑히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예수님의 관점에서 구약 창세기 1장과 2장을 봅시다. 그렇게 되면 흔히 거기에는 축복만 있는 줄로 아십니다만은 실제로는 그 축복의 뒷면에 저주와 심판이 들어 있었던 겁니다.
즉 축복 기능은 저주 기능을 뒷면으로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2장을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축복을 하게 되면 피조물들은 번성하고 번창하게 됩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이 하나님의 안식이 나옵니다. 이것을 볼 때에 하나님의 창조 완성은 안식으로 표현되는 겁니다.
그런데 창세기 2장에 보면, 에덴동산이 나오고 거기에 두 가지 의미있는 나무가 심겨져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생명나무요 다른 하나는 선악과 나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악과 훼손을 허락하셨지만 생명나무 훼손을 허락지 아니하심으로서 이 에덴동산은 선악과 위주가 아니라 생명나무 위주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때부터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은 자체적으로 장착된 화재 경보시스템이 가동이 됩니다.
즉 이 우주는 자체적으로 저주를 낳게하는 시스템이 본디 탑재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때부터 주어진 모든 말씀에는 필히 저주의 요건이 갖추어지게 되었습니다. 신명기 28:14부터 보면, 만약 하나님의 말씀대로 안 살다가는 들어와도 저주받고 나와서는 저주받는다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분명 천국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옥도 있습니다. 이것은 창세기 1장에 나타나지 않았던 그 저주의 요소가 제대로 요한계시록에서는 공개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옥은 필히 있어야 하고 그 지옥이 만들어져야 창조는 완성되는 것이며 그럴 때만 하나님께서 안식하시는 겁니다. 지옥은 사람들 겁주려고 만드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창조 작업의 필수 구성요건인 것입니다. 지옥은 천국과 더불어 짝을 이루어야 하나님께서 만족하십니다. 이 천국과 지옥의 존재는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거나 신나게 하거나 하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어쨌든 화재경보 시스템이 가동되면 인간들은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었으며 다시 원상복귀할 대책은 인간에게는 나오지 못합니다. 그런데 희망은 있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 안식을 선언하시기 전에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서 축복한 대목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하나님의 형상 되시는 분을 직접 이 땅에 보내셔서 만물을 새롭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 하나님의 형상되시는 분의 뒤를 따라, 축복이 오게 되어 있고 그 축복 뒤에는 하나님의 안식이 따라옵니다. 이 하나님의 형상되시는 분의 완성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역사를 개시했는데 그것이 창세기 3:15에 나오는 ‘여자의 후손’ 계열과 ‘뱀의 후손’ 계열이 이 땅 위에 전개되기 시작합니다. 이 약속은 사람들 좋아라는 것이 아닙니다. 순전히 하나님의 만족과 안식 때문에 시작된 역사입니다.
설교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보면, 사람들이 성경에서 이런 내용을 보지 못하는 것은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으로 보지 못하고 자신을 위대하게 하게 포장하는 포장지나 도배지 용도로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위장에서 신에게 나아가보겠다는 발상으로 성경을 대하다 보니 맨날 자기 완벽으로 신의 복을 따내려고 합니다.
그러나 구원의 조치, 즉 천국과 지옥 만들기는 하나님의 형상되시는 예수님이 수행할 조치입니다. 혹시 누가 여러분들의 태도나 행동을 보고 구원을 비웃거나 이렇게 이야기하세요. “나에게 시비걸지 말고 나를 위해 피 흘리신 예수님에게 시비걸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부터 예수님을 바라볼 생각 못하고 맨날 자기만 바라보려고 합니다.
즉 스스로 자신에게 조치를 하려고 하지 마세요. 우리는 천국이나 지옥을 만들 권한이나 골라 잡을 자격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면 됩니다. 심판받는 것도 하나님의 축복임을 아는 자가 진정 자기 중심에서 벗어난 사람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에 너무 몰두하지 말게 하옵소서. 성경의 중심인 예수님이 하신 일을 바라보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우리교회
09-10-20 23:46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예레미야-2009/015강-렘4장5-10(예상밖의심판)-jer090617.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