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609b 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베드로후서
20090609b 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베드로후서
이름 : 한윤범(IP:119.192.174.148)
20090609b 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베드로후서
(강의:이근호 목사)
베드로후서 1장 16절 봅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그 다음에 부사 나오지요.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그 다음 변화산 이야기는, 내가 봤다는 거예요. 그럼 우리는 묻지요. “아니 베드로 선생님, 볼 때 잘하지. 그때 잘하지.” 베드로 하는 말이, “샛별이 안 떠올랐어.” 이건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불트만이나 바르트나 이걸 해명하기가 골치 아픈 거예요. 하나의 사건이 내 안에 사건이 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게 문제입니다. 십자가 사건이잖아요. 십자가 사건을 불트만 식으로 해봅시다. 이게 역사인데 이게 내 안에 들어오면 내 안에 ‘역사적’이 돼버린다 말이에요. 그런데 불트만의 이런 주장이 잘못이다 이 말이죠.
내 안에 역사가 내 안의 역사적이 되니까, ‘역사’와 ‘역사적’이 달라요. 역사의 의미만 홀라당 빼먹는 거예요. 뭔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이순신 장군이 죽었잖아요. 나는 현장에 없잖아요. 하지만 우리는 이순신 장군이 죽었다는 걸 알지요. 나를 위해 희생한 것도 알잖아요. 그거는 역사적 의미만 빼먹잖아요. 역시 이순신 장군은 역시 옛날 사람이잖아요.
그게 십자가냐 이 말입니다. 아니죠. 그건 십자가가 아니죠. 사도 바울이 이야기한 십자가는 그게 아닙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었나니” 이 말은 의미만 빼먹은 게 아니에요. 지금 날마다 죽는다. 그 십자가가 내 안에도 지금 역사가 돼야 돼요. 이걸 불트만은 해명 못하겠다는 거예요. 해명 못하니까 여기다 뭘 집어넣느냐 하면, ‘믿음으로’ 이런다고. 이게 [두지평]이란 책을 지은 그 사람 사상하고 똑같은 거예요.
“과거에 성경책이 오늘날 은혜 되려면 믿음으로 의미화 돼야 된다.”라고 이야기했어요. 절대로 그 사건이 지금의 사건 되면. 근데 다메섹에 내려간 사도 바울은 뭡니까? 죽으신 예수님이 그때 만나고 헤어졌습니까? 아니지요.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역사가 자기를 삼켰지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내가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계신다. 그냥 ‘예. 알겠습니다. 앞으로 잘할게요.’가 아니라 내 안에 예수님이에요. 내 밖의 예수님이 아니고. 그전까지는 과거의 예수였다가, 다메섹에서 만날 때는 내 밖의 예수였다가 그 다음에 내 안의 예수가 돼버렸어요.
이걸 구약적으로 이야기하면, 모세가 이스라엘 내부인 되었다가 주께서 일부러 사람 죽이게 만들어서 외부인 되었다가, 그 외부인인 모세가 내부인 되면서 모세가 갖고 있는 게 뭐냐 하면, 율법인데 율법을 눈앞에 둔다 했다가 그 다음에 더 나가면, 신명기에 보면, 율법이 할례를 껍데기에 하지 말고 마음에 할례를. 갑자기. 여기서 불가능이라. 하나님의 법이 마음에 안 된다 말이죠.
안 되니까 에스겔이나 예레미야에 보게 되면 하나님의 신이 오실 텐데 신이 오게 되면 네 바깥에 있던 율법이 네 마음속에 들어올 것이다. 이걸 가지고 새 언약이라. 새 언약 받았습니까? 무슨 말입니까? 당신 속에 예수님 계십니까? ‘잘 믿습니까?’ 이걸 묻는 게 아니고 ‘당신 속에 예수님 있습니까?’ 이래 묻는 거예요.
변화산 사건 있잖아요. 몰랐어요. 신기하다. 초막 셋을 짓겠습니다. 이랬을 뿐이지 여전히 누가 살아있습니까? 베드로 자기는 살아있었다가 나중에 샛별이 떠오르게 되면 내 안에 사건, 이런 참 어려워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데 해봅시다.
변화산입니다. 과거 사건이죠. 샛별이 떠올랐어요. 쉽게 말해서 성령이죠. 성령이 베드로에게 들어왔습니다. 그러면 이 사건은 과거 사건입니까, 지금 사건입니까? 지금 사건이에요. 지금에 한꺼번에 들어있는 사건입니다.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아요. 물로 심판 받았습니다. 과거지요. 불로 심판받았습니다. 미래잖아요. 그런 지금은 뭡니까? 물과 불 사건, 양쪽 다 현재 베드로 안에 포함돼있죠. 다른 사람은 조롱하죠. 기롱하죠.
진도 나가봅시다. 여기서 머물 수 없으니까. 그래서 20절에 보면,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까 교인들에게 뭘 이야기해야 됩니까? ‘사사로이 풀지 마세요.’ 이러면 안 되고, 사사로이 푸는 예를 들어야지요.
그럼 그 예를 목사가 우에 듭니까? 우에 들기는 목사 지가 지금까지 해왔잖아요. 신학적으로 해왔잖아요. 사사로이 풀었잖아요. 이것 하면 이런 이득보고 이것 하면 교인들 경건 더 될 거고. 하여튼 인간이 가능할 수 있는 것이 사사로이 푼 거예요. 진짜 사사로이 푼 게 아닌 것은 뭐냐? ‘아이고, 불가능합니다.’ 이건 사사로이 푼 게 아닙니다. ‘주께서 하시겠지요.’ 그게 사사로이 안 푸는 겁니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사람이 뜻으로 낸 것이 아니기 때문이 사람이 그걸 지킬 수 있다, 없다? 못 지키지요. 자기 속에서 나왔으면 자기가 지킬 텐데 자기에게 나온 게 아니기 때문에 누가 지킵니까? 내가 못 지키면 구원 못 받잖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걸 나 되신 분이 그 능력까지 아울러서 세트로 주니까 우리가 안 해도 되게 돼있지요. 그것이 마지막 구원받을 때 ‘제가 한 게 아니고, 주께서 하셨습니다.’ 내가 안 했는데 되게 했어요.
강희남 목사가 자살했지요. 자살한 이유가 자기 뜻대로 안 된다고 자살했어요. 노무현 자살한 것이 자기 뜻대로 안 되서 그래요. 그러면 강희남 목사나 노무현 전 대통령은 세상을 뭐로 봅니까? 하나님의 사건으로 보지 않고 자기중심적으로 봤지요. 자기중심적으로 봤는데 자기 뜻대로 안 되니까 ‘난 있어도 소용없구나.’ 하고 죽어버렸어요.
그런데 이렇게 죽을 사람 같으면 사실 누구도 포함된다? 우리도 하루에 골백번도 더 죽습니다. 심방가고 기도했는데 다른 교회 가버리고. 분명히 설교 듣고 손들고 “목사님, 은혜 받았습니다.” 다음주 등록할 줄 알았더니 안 나오고. 화딱지 나서 하루에 골백번도 더 죽습니다.
그런데 구원은 누구 소관입니까? 주님이 살려줘야 안 죽고 살아있는 거예요. ‘너는 더 욕봐야 돼. 너는 더 조롱당해야 돼. 십자가? 너한테 멀었어. 적을 더 만나야 돼.’라고 십자가 그 길을 가게 하기 위해서 주님 좋으라고 악착같이 안 돼지지요. 살려주니까. 황 전도사님 온 몸이 다 아파서 엎어졌다? 아직까지 살려줘서 기어이 ‘적이 누구냐’ 깨닫게 하죠. 누가 예수를 죽였는가?
2장을 봅시다. 2장이 바로 영지주의, 유다서를 베꼈다는 내용입니다. 거짓선생들이 나타나는데 이 대목의 교재를 보면서 ‘래드야 너다. 너보고 이야기하는 거다.’ 거짓선생들이 일어났는데 자기를 사신 주를 부인하고 호색하는 것을 좇았다. 주를 부인하고 색을 좇아가는 게 뭐냐 하면, 눈 돌리기거든요. 관심사 돌리기입니다. 관심사 문제거든요.
관심사를 돌린다는 말은 이게 현상학까지 이야기할 필요 없습니다만 철학의 현상학에 보면, 반드시 자아라 하는 것은 자기가 봐서 자아를 모르고, 잘 들어놓으세요. 관심사로 곧 자기입니다. 훗설이라는 현상학 창시자가 아주 중요한 말 했어요. 인간의 주체가 뭐냐? ‘내가 누구냐’ 그동안 살폈는데 현상학에 와서 현상을 바라보는 관심사, 나는 현상을 이런 관심으로 본다, 그게 바로 현상이 아니고 ‘너’다 말이죠. 사람은 보는 것만 보게 돼있어요.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다고.
그러니까 성경 설교자가 모든 걸 다 할 수 없어요. 자기 관심사만 풀어놓으면 돼요. 목사가 설교 구절 풀고 하는데 교인들은 복잡해서 안 듣습니다. “그래, 그래. 목사, 너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고?” 그것만 들어요. 그럼 복음을 아는 사람은 뭘 외쳐야 되는가? “그러니까 우리는 주님의 은혜 아닙니까.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갑시다.” 이렇게 돼는 거예요. 이러니까 감사할 만 하죠. 주님이죠.
시편에 보면, “주는 산성이시오, 요새이시오, 피난처시오” 이래 돼있지요. 주는 이 뒤에 산성, 요새, 피난처 이 말은 그 사람은 전쟁 중에 있는데 자기가 자기를 건질 수 있다, 없다? 절망이에요. 절망일 때 비로소 주님이 산성으로 보이고, 요새로 보이고, 피난처로 보이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까 주를 부인해버리니까 뭐가 날아가 버려요? 산성도 날아가 버리고, 요새도 날아가 버리고, 피난처도 날아가 버렸어요. 남는 것은 자기밖에 안 남으니까 그게 자기 자신이 호색을 하고 색을 좇는 그 자체가 결국 전에 예수님이 돌아가셔야 했던 죄 많은 죄인이 호색과 방탕과 세상정욕과 돈을 밝히는 그 모습이 그게 현상학에서 그 뭉치가 ‘나’에요.
그러면서 사람은 뭐라 합니까? “내 마음은 안 그런데.” 만날 자아와 자기를 해놓고 자기가 안 되면 자아로 피신해버리고. “목사가 다 그렇지.” 이런 식으로 자꾸 변명하고. “나 어쩔 수 없어.” 네 어쩔 수 없다는 걸 증명하지 말고 예수님이 누군가 그걸 증거하고 그렇게 해도 자꾸 자기변명하고 있는 거예요.
2절에 보면, “진리의 도가 훼방을 받을 것이요 저희가 탐심을 인하여 지은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를 삼으니” 보세요. 관심사가 이거 아닙니까. 뻔하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이를 탐하지 마라. 이러면 안 돼. 이것도 성경해석 잘못된 거예요. 세상에 이를 안 탐하는 사람 누가 있어요. 다 탐하지. 이러면 안 되고 뭐다? 우리는 주를 바라봐야죠. 간단합니다.
왜 보는데? 주는 산성이고, 요새고, 피난처니까. 왜 그런데? 내가 개판이니까. 내가 살 길은 주님밖에 없다. 교인들이 오랜만에 왔습니다. 잘난 척하러 왔습니다. 설교하고 난 뒤에 나를 구원한 건 주님밖에 없다. 왜? 나는 쪼다니까. 최고 아닙니까. 최고 설교에요. 그래 되면 그 다음부터는 교회 나가면서 싸울 일 없고, 삐질 일 없고. 그야말로 형제우애, 절제, 경건 하지 말라고 해도 해요.
4절에 봅시다. 역시 베드로가 주님한테 잘 배웠어요. 예수님 공생애, 예수님이 누구 때문에 죽었는지 알아요. 마귀 때문에 죽었지요. 악한 천사까지 동원시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베드로후서는 신학은 없고, 윤리만 있다 이러거든요. 유다서도 마찬가지고. 그거는 래드, 니 생각이고. 예수 그리스도 전체에 악마가 동원될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여기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이게 에녹서에서 베꼈느니, 시체 갖고 다투는 것은 모세승천기에 나왔던 이야기다. 맞지요. 하지만 아까 제일 처음에 했지요. 인간의 언어의 개념으로 규정된 사상, 형식을 그대로 빌려오는 겁니다. 유다서나 에녹서나 모세승천기 했다고 해서 성경이 아니다. 이렇게 되면 곤란해요. 그런 건 도저히 안 됩니다.
그러니까 세상 것 사용해서 성경에 쓰였으면 실제로 있는 거예요. 어디에 쓰여 있든 간에. 이런 설이 있다 하면 안 됩니다. 이런 설이 있다는 걸 내가 안다. 이게 아니라 진짜로 그래요.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이게 또 문제가 돼요. 요한계시록에서. 지키는 게 맞나, 아니면 자기가 빠져나오느냐 하는 거예요. 안 그러면 들어갈 뻔하다가 안 들어가고 마지막 때 최후에 들어가느냐? 도대체 귀신, 마귀 이놈들이 현재 어디 가둬져 있느냐, 아니면 빠져나왔느냐?
빠져나온 게 맞다. 아니야. 지금 가둬져 있다. 가둬져 있으면 어떻게 귀신들이 활개 치겠는가? 빠져나왔지. 빠져나왔으면 지킨다는 말이 성립 안 되잖아. 어느 쪽이 맞노? 사람들이 그런데 관심사가 있어요. 주는 관심 없고 마귀한테 관심 있다고.
주께서 마귀를 사용한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중간에 하나 집어넣으면 해결돼요. 뭐냐? 주께서 말씀대로 마귀를 사용하신다. 이래 돼야 돼요. 주께서 마귀 다루는 것에 관심 두지 말고, 주께서 말씀대로 다루어버리면, 우리한테 어떤 해석에 이익이 있느냐? 주께서 나를 다루신다 하지 말고, 말씀대로 나를 다루면, 마귀가 무저갱에서 빠져나가서 활동하는 것도 걱정할 필요 없어요.
왜? 말씀대로 필요하기 때문에 다뤄야 되고, 현재 내가 어려움에 처한 것도 걱정할 필요 없어요. 왜? 말씀대로 마귀를 만나게 된다. 마귀 만나서 엎어지고 자빠지고 까불다 회개하고 돌아온다. 전부다 주께서 말씀대로. ‘주’가 뭐냐 하면, 구약의 언약의 하나님이에요. 언약대로, 다른 말로 하면 말씀대로 누구도 사용하고? 마귀도 사용하고.
그 사용방법이 뭐냐 하면, 2장 9절, 중요한 단어 나온다 했지요. 테스트, 시험. 주께서 경건한 자를 시험 치지요. 시험 치는데 누굴 활용한다? 무저갱에 있는 몇 놈 빼내서 마귀, 악마 빼내서 어디 시험 치는데 동원시킨다? 자기 백성을 믿음이 이만큼 중요하다는 걸 알려주는데 유용하게 마귀를 무저갱에서 빼냈다, 집어넣다 말씀대로 사용해서 성도를 힘들게 하는 거예요. 이 땅에 삶에 미련두지 않게. ‘더러운 세상 왜 성공하려 하느냐? 치워라. 성공, 실패 이 땅에서 하는 게 아니다.’라고 시험 치는 그 이야기를 2장에서 하고 있는 겁니다. 쉽지요.
이걸 만약에 해석을 여러분 똑바로 삽시다. 이렇게 설교하면 설교 끝나고 난 뒤에 교인들이 무거워서, ‘왜 경건하지 않습니까? 왜 절제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나오면 전부다 푸~욱. 목사님 시험에 불합격되지 싶어서.
그 말은 뭐냐 하면, 나 목사는 똑똑하게 사는데 왜 똑똑하지 않습니까? 목사가 한풀이하는 것으로 느낌이 그렇게 와요. ‘나도 쪼다입니다. 주의 은혜 아니면 안 됩니다. 말씀대로 되서 구원받았지 내 힘으로 구원 못 받습니다.’라는 식으로 하게 되고, ‘마귀의 모든 시험도 말씀 아래 있습니다.’ 해버리면, “아, 이렇게 실수하고 시험하는 것도 주께서 테스트한 거구나. 내가 왜 주님만 쳐다봐야 되는지.” 간단하잖아요.
그래서 항상 설교할 때 ‘우리는 못합니다.’ 이런 인간적인 사사로운 해석도 곁들어줘야 돼요. 그래야 차이점을 알게 아닙니까. 하고 주께서 말씀대로 다하십니다.
시험을 치는데 여기 7절에 보면,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요새 말로 옮기면 담배 피는 사람 때문에 고통하는 아무개. 그것도 식당에서. 지난주에 우리교회에 얼마나 재미있는 일이 있었는지 몰라요. 담배 피는 이야기했더니만 담배 피는 교인들 깜짝 놀라요.
여기 11절 보세요. “더 큰 힘과 능력을 가진 천사들이라도 주 앞에서 저희를 거스려 훼방하는” 이거는 모세승천기에 ‘모세 시체 달라.’ 하는 것 때문에 티격태격하는 대목에서 미카엘 하고 마귀하고 붙었는데, 미카엘이 뭐라 했느냐 하면, “네 마음대로 해라. 주께서 알아서 하시겠지”라고 직접 달려들지는 않았다는 그 대목을 쓰는 거예요.
그 말이 심판을 하나님께 맡기고 마귀, 너도 말씀대로 움직이지 너도 네 마음대로 하는 게 아니다. 이걸 소급해서 적용시키면 에덴동산에 뱀이 찾아온 것도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 되시는 분이 주님인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뱀의 침범을 허락하신 거예요. 다른 말로 하면 생명나무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선악과 이용한 거예요. 선악과 하나, 희생번트 알지요. 1루에서 2루 보내기 위해서 선악과 희생번트 대서 생명나무 한 점 난 거예요.
결국 생명나무 뜻은 뭡니까? 선악과를 따먹으면 안 되는 그걸 통해서 생명나무는 따먹어서 얻는 게 아니라 생명나무 스스로 나한테 줘야 얻을 수 있다 이 말이죠. 그래서 주님을 찬양하기 위한 하나님 작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작전에 누가 동원되었느냐? 거짓말쟁이 뱀이 동원되었어요.
영화 잘 만들었어요. 봉준호 감독 아무것도 아닙니다. 박쥐보다 훨씬 더 낫습니다. 마귀까지 이용해서 주만 영광 받는, 아들만 영광 받는 영화. 그 영화를 볼 수 있는 특수 안경을 샛별로 받았으니 이런 복이 어디 있습니까? 입체영화 보는 안경 없으면 지금도 어둠 속에 헤매고 있을 텐데 그것 생각하면 고생한 건 고생도 아닙니다. 고생해보세요. 안경 쓰는가, 샛별 쓰는가? 못 쓰지요.
그 다음에 2장 13절부터 보면, 여기에 망했던 스타가 나와요. 허장강 있잖아요. 나쁜 역할하는 세 사람. 첫째는 뭡니까? 15절에 저주의 자식이 뭐지요? 발람. 발람 말고 또 나오는데? 유다서고. 발람이야기 해야 되겠습니다. 오늘 시간 다 못하지 싶은데. 못 해도 괜찮지요?
발람 이 사람은 어떤 역할 하는 사람이냐 하면, 멈추지 않는 질주하는 기관차에 끼어죽은 사람이에요. 이스라엘은 멈추지 못하는 전력 돌진하는 기관차 같습니다. 브레이크가 파열됐어요. 막을 민족이 없어요. 그런데 모압이 막아설 때 발람, 지도 막아섰잖아요. 그런데 이스라엘 기관차 충돌하기 오 미터 전에 저주를 축복으로 바꿔버렸어요. 안 그러면 된통 당하기 때문에.
그래서 발람이란 것을 왜 기관차 앞에 손 벌리고 저주로 막아보려고 하나님께서 했느냐? 이 발람조차도 이스라엘이라는 기관차가 돌진하는데 그 힘이 어디서 오냐 하면, 여호와에서 오고, 하나님 언약에서 오잖아요. 뭐까지 저주마저 축복으로 변하게 하는 힘이 주어지느냐? 무엇까지 사용하신다? 발람까지 사용해서 추진력으로 이스라엘이라는 기관차를 질주시키는 힘으로 사용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저주가 없으면 힘이 없어요. 저주가 없으면 복으로 전환 안 되고 힘이 없다고.
그러면 내부 장치에 어떤 장치가 있느냐 하면, 외부에 있는 저주는 다 가져오너라. 이걸 뭐로 바꾸겠다? 축복으로 전환시키는 장치가 이스라엘 내부에 있다, 없다? 있음을 알아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걸 몰랐어요. 자기 승리한 것만 되게 좋아하지, 자기 내부에 인간이라는 저주가 계속해서 축복으로 바꾸는 그 작업을 엔진 같은 변환체, 변환하는 기능이 있다는 걸 몰랐습니다.
그래서 발람은 일을 더 해야 돼요. 무슨 일이냐 하면, 첫 번째 일은 저주를 축복으로 변하는 일을 해야 되고, 두 번째, 그 축복을 축복답게 모를 때는 저주로 변하는 일을 또 발람이 해야 되는 기라. 발람, 이거 고맙지요. 이 일을 마귀가 하겠습니까, 안 하겠습니까? 교회 많이 모이지. 특히 정 목사 같은 교회는 주일날 만이천 들어오지. 잘 되지. 믿음 좋다고, 설교 좋다고 칭찬들 하지. 이것도 누가 해야 됩니까? 마귀가 또 해야 돼. ‘역시 내가 훌륭해. 역시 내가 잘났어. 역시 공부 좀 한 티는 나네.’ 이거 그렇게 방방 띄우는 교만을 누가 해야 돼요? 또 발람이 해야 됩니다.
마귀는 두 얼굴의 사나이입니다. 하나는 저주하는 것과 또 하나는 우리의 친구처럼 유혹하는. 그 두 가지 일을 다 하는 겁니다. 그런데 발람은 뭘 받고 했습니까? 돈을 받고 했지요. 그런데 발람의 일을 하는 쪽을 받은 사람, 그 목사는 마찬가지로 돈 받고 하니까 베드로후서 2장 보면 거짓 선생이라 하죠. 앞에 ‘거짓’ 빼면 ‘선생’이었느니라. 무슨 선생? 주의 도를 전하는, 그것도 믿음의 도를 전하는 선생, 다른 말로 하면 복음 전하는 선생이었는데 뭐처럼 되었다? 발람 같이 주께서 사용하시더라.
누구는 아니었다? 베드로, 본인은 아니었다. 왜? 샛별 떴기 때문에. 결국은 샛별 안 뜨면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소경에 불과하고 안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때는 반드시 이런 일이 있어줘야 된다. 왜? 그게 바로 테스트기 때문에. 그게 시험이기 때문에. 그게 바로 제가 아까 이야기한 예수님이 십자가 가는 길에 양 편에 뭐가 있습니까? 계속해서 조롱하고, 기롱하고, 계속 놀리고. 석원태 있어야 되고. ‘내 아들 후임자 되는데 정당성을 쓰라. 리포트를 써라.’ 이런 이야기.
‘우리 딸 이진주 우리교회 당회장 되는데 교인들 보고, 장로님 보고 그 정당성을 리포트 내세요.’ 이게 우에 그리 돼요. ‘십자가마을에 노회장 다음에 정낙원 목사님 또다시 해야 되는데 정당성을 쓰세요.’ 똑같은 거예요.
그러니 마귀가 얼마나 필요합니까? 아예 우리는 피난처요, 산성이요, 요새요 아예 우리는 그냥 기대면 돼요. 믿음이 뭐냐? 그냥 기대세요. 사람이 자유하면 믿음이 아닙니다. 그냥 엎어지면 돼요. 혼자 교회 운영하다고 헌금은 안 나오고 고민하지 말고 엎어지면 돼요. 그런다고 창문 열고 칠 층에서 뛰어내리지 말고. 에이씨. 내 뜻대로 안 된다고 죽지 말고요. 늘 자살하세요. 오랜만에 좋은 말 나오네. 누구 품 안으로? 이미 우리 안에 계신 주님 품 안으로 늘 자살해야 돼요. 자살방조죄에 걸리겠다.
여기 17절 봅시다. “이 사람들은 물 없는 샘이요” 쉽게 말하면 ‘누구 약 올릴 일 있나’ 이 말입니다. ‘야, 샘이다.’ 하고 갔는데 물이 없어. “광풍에 밀려가는 안개니” 실체 있는 것 같지만 허풍에 불과하다. 안개니까 밀려갔잖아요. 뭔가 본질이 없잖아요. 그 다음에 “저희를 위하여 캄캄한 어두움에 예비되어 있나니”
“저희가 허탄한 자랑의 말을 토하여 미혹한 데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한 자들을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하여 저희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기는 멸망의 종들이니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니라 만일 저희가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여기 2장 20절 이 대목을 설교 잘못하면 나중에 큰일납니다. 이 대목을 위하여 3장 18절 보세요. 방금 했던 2장 20절, 21절을 뭐와 연관시키느냐 하면, 3장 18절. 3장 18절부터 먼저 봅시다. “오직 우리 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이 말이죠. 그럼 뭡니까? 자기가 자기를 단도리하라 이 말입니까? 아니지요. 예수 그리스도가 퍼부어준 것, 예수님의 은혜를 아는 것, 그게 지식.
‘이런 쪼다니까 십자가에 죽었구나.’ 이걸 알게 될 때 2장 20절, 21절. 아까 이야기한 것 또 이야기하면 자아에 대한 관심사가 주님이 아니고 갑자기 자기한테 와버리면 결국은 주님을 아는 은혜를 노선에서 기차 탈선. 주님 노선에서 누구노선으로 자기 노선으로 와버렸어요. 그러면 그 사람은 방탕 안 해도 이미 뭘 잊어버렸어요? 예수님을 아는 지식에서 없어져버렸기 때문에 그거는 마귀 밥입니다.
제 말은 쉽게 이렇습니다. 목사가 교회에 전념한다든지, 목사가 어떤 학문에 전념해버리면 그것도 똑같은 거예요. 관심사가 내가 얼마나 많이 똑똑할까, 내가 얼마나 신학에 정통할까? 이것 알면 이미 그건 탈선한 거예요. 3장 18절에 의하면 뭘 이야기한 거예요? 주의 은혜를 아는데 여기에 관심이 있어야 되지. 목사가. ‘내가 얼마나 실력이 있을꼬, 내가 얼마나 설교를 잘할까.’ 개입니다.
잠언서 26장 11절에 나오는 말씀 있지요. 개가 토한 것을 그대로 하고, 돼지가 누운 곳을 다시 뒤척이는 것. 이것도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중심으로 해석해야 되지 개인적인 경건과 윤리로 해석해버리면 이거는 교인들 보고 교회 마치고 쇳덩어리 짊어지고 가는 겁니다. 계속 사람들은 생각해요. ‘내가 지난주에 맞다. 한번 굴렀구나. 한 달 전에 토한 것을 또 마셨는데. 그럼 난 저주받았네.’
다시 이야기합니다. 관심사. 관심사가 주님이 아니고 자기 잘남에 두게 되면 그거는 이미 질주하는 기관차에서 뭘 잊어버린다? 저주를 축복으로 바꿔주는 그것을 통째로 잃어버린 사람이 됩니다.
그 다음에 3장 봅시다. 1장에서 소경과 샛별, 2장에서는 테스트, 3장에서는 3절에 보면,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기롱” 이것 보고 피곤하시니까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여름 되면 굉장히 피곤해지죠. 마치도록 했지만 아직 멀었습니다. 이것하고 마치는 거예요. 조롱이죠. 조롱.
지금 십자가 가는 길에 베드로전서 2장 20절에 의하면 십자가 길에 우린 답습합니다. 십자가라 하는 것은 긴 그림자 있겠지요. 다 잊어버렸지요. 십자가라는 것은, 갈라디아서에서는 하나의 사건이지만 여기선 사건의 긴 그림자가 쭉 이어져있다. 따라서 우리는 그 길을 답습하는데 주위에서 조롱을 하죠.
예수님이 십자가 지실 때 뭐라 했습니까? “네가 뭐 구원자라? 너나 잘하세요. 너부터 십자가에서 내려온나. 아이고, 경찰 몇 명도 못 이기는 게. 못도 못 빼는 게 남을 구원해. 너부터 구원해보세요. 내 믿어줄게. 짠하고 두둑두둑 못 빼고 내려오면 다 믿어줄게. 너나 잘하세요. 어디 남을 구원해.”라는 생각을 목사들이 99.9%하고 있습니다. 목회 한 이십 년, 삼십 년 하고 있는데. “당신을 믿어보려고 애를 썼는데 결국은 당신은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은 무지몽매한 민중들은 예수님이 부활한 것처럼 보지만 많이 똑똑하고 공부 많이 한 목사들은 아무리 믿고자 해서 실제로 살아보니까 경험상 ‘없는 것 맞지, 그자?’ 99.9%입니다. 백 프로란 말은 못하겠고. 진짜 99%입니다. 그게 신학으로 나와요. 개혁주의 신학으로 나온다고.
아까 했지요. 저주를 축복으로 바꿔주는 더럽기 짝이 없는 나를 바꿔주는 그 감격과 그 감사와 고마움에 빠져버리면 자기 실력이 나와 버려요. 그런 사람들은 백 프로입니다. 그런 것은 왜 그렇게 하는가? 또 잊어버렸구나. 뭘 한다? 말씀대로. 인간은 자기 본성을 거스를 수 없어요. 자기 본성을 아무리 꾸며봐야 본성을 추종할 수밖에 없어요. 안 믿는 본성은 안 믿는 식으로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믿으려고 애썼는데 진짜 안 되네.’ 혼자만 알아요. 다른 사람에게 들키면 목사가 장사를 못 하니까. 믿는 척이라도 해야지. 본인은 알아요.
알기 때문에 뭐가 안 나옵니까? 복음에 대한 감격이 안 나오고, ‘다른 목사 다 그런데’ 만날 자기 사수고, 자기 방어가 나와요. 글들을 보면. 자꾸 기어들어가요. 자꾸 신학이라는 거대한 신학 밑에 숨어 들어가요. ‘나 신학 속에 있으니까 건드리지 마라. 신학 많이 안다. 칼빈도 칼 바르트도 공부 다 했다. 두껍지. 건드리지 마라.’ 목사가 설교하면, ‘여러분 생명이 있습니다. 생명 보고 우리 미칩시다.’ 이래야지 신학이 논하면 곤란합니다.
‘아. 나, 생명 보고 돌아버렸다. 생명이 너무 좋아서. 난 죽은 줄 알았고. 주님의 생명, 기적의 생명 완전 미쳐버렸다.’ 이래 돼야지 신학을 논해버리면 그거는 귀신을 속여라.
그 십자가 사건이 답습이 되면 여기 반드시 조롱하는 사람이 좀 배치해줘야 돼요. 그래야 분위기가 살아. 본인은 죽어나지만. 여러분 얼굴에 핏기가 없어 보여. 놀리는데 누가 가담하는가? 놀라운 사실은 내가 가담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걸 아예 우리가 연습을 해버렸어요. 뭐냐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을 누가 의심하느냐? 내가 알아서 내가 의심해 버리는 기라. ‘지금 십자가 전하기는 전하는데 그 피가 맞습니까?’ 그리고 내가 답변하지. ‘이러니 내가 죽어야지.’ 주님의 십자가 안에 바로 이따위 사고방식을 늘어놓는 내가 죄인임을 깨닫게 하는 능력이 주어지죠.
그러니까 목사는 결국 궁시렁궁시렁이죠. 설교 전까지 계속 궁시렁궁시렁. ‘이게 맞습니까? 맞는 겁니까?’ 요한계시록 하는데 헛소리 아닙니까. 괜히 신학자들 말씀대로 그 당시 사람들이 너무 미쳐서 헛소리해서 아무 것이나 끄집어내서 그냥 자기 마음대로 부셔서 조립한 것 있잖아요. ‘정답도 없는 것 맞습니까?’
늘 하면서 그 가운데서 이미 들어있는 샛별이 주님의 그 생애, 주님의 가신 길이 떠오르면서 ‘철없는 질문 많이 했지요? 주여, 철없는 호기심 많이 가졌지요?’ 하고 그게 회개지요. 스스로 자기 회개될 때 그게 그대로 발설되는 겁니다. 하고 경험한 것 그대로 이야기하는 거죠. “여러분 이 본문 가지고 이래 생각하지요. 나도 그래 생각했는데 ( )였습니다.” 이런 식으로. 그렇게 되면 공감이 갈 겁니다.
그래서 기롱하는데 십자가 밑에서 내려오라 했잖아요. 예수님께서 안 내려왔지요. 재미있는 것은 뭐냐? 그들이 조롱하는 기준이 있다고. 그 기준에 맞추어서 더욱더 조롱받을만한 쪽으로 가버렸어요. 그게 뭐냐? 완전히 죽어버렸어요. 죽는 척 하는 게 아니고. 그러면 그들은 뭡니까? 야호 하고 대승리하겠지요.
왜 우리가 지금 본문, 베드로후서, 불로서 심판한다. 천년이 하루같이 하루가 천년 같이 이게 왜 지루하냐 하면, 우리가 아직도 십자가 밑에 있는 불신앙에 있는 것처럼, “주여, 주님 살아계시죠. 살아계시면 나한테 납득이 되도록 좀 기적을 베풀어주옵소서.”라는 어떤 예수님 쪽에서 나오는 실적 같은 것, 내가 납득될 만한 증거물을 찾고 있는 불신앙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말이 너무 어려워졌는데 이해는 하시겠지요.
나는 주님 편이다. 베드로가 칼 쥐고 말고의 귀 베었잖아요. 그리고 도망치기는 혼자 도망쳤잖아요. 우리가 베드로 식이에요. ‘내가 주님 편이니까 우리한테만 알려주세요. 내가 주님 편인 줄 알죠. 그러니까 나만 이해되도록 해주세요.’라고 주님한테 사바사바하는 것, 우리를 더 난처하게 당황하게 만들어버렸어요. 다 떠나게 만들어버렸어요.
그것 때문에 그 기간이 천년 기간입니다. 계속해서 우리가 길다, 길다 하면 더 길어요. ‘이천 년, 2009년 됐는데 아직 왜 안 오는 거야? 말짱 사기 아니야. 괜히 위로 삼아 하는 게 아니야.’라는 생각보다 더 길죠. 더 길게 해서 아예 우리 속에는 주의 말씀을 증거 보고 믿겠다는 그것조차도 죄인 것을 깨닫게 하기까지 지연되는 거예요.
‘무엇을 눈에 보이면 믿겠습니다.’ 하는 것까지도 잘못 되었음을 깨닫는, 너 같은 인간은, 아예 죽은 자가 왜 증거를 달라 하느냐? 죽은 자 같으면 죽은 것도 말씀대로. 뭐든지 말씀대로 되는 순간이에요. 증거가 필요 없어요. 그냥 말씀대로 되는 겁니다. 우리가 죽는 것도 말씀대로, 풀의 꽃같이 사라짐도 말씀대로.
지금의 늦춰짐도 말씀대로 늦춰졌다면 늦춰진 것이 늦춰진 게 아니고 그것이 하나의 말씀대로 된 것이니 즐거움이죠. 그런 자가 바로 오늘 본문에 의하면 경건한 자. 말씀을 믿는 자. 그런데 사람들이 성질이 급해서 말씀은 안 믿고, 로마 회의 이런 것처럼 생태계를 연구해서 증거물을 찾아내려고 해요.
그런데 그 증거물은 둘 다 맞아요. ‘증거물이 없다’도 맞고, ‘늘 있어왔다’도 맞아요. 로마 때부터 계속 왔어요. 로마 때 요한계시록에 있는 모든 증거물이 늘 있어 왔던 것도 맞고, 이거라고 붙으면 아니고.
왜 그러냐 하면 길게 늘어뜨린 십자가를 믿어야지 자꾸 증거 믿어버리면 관심사 그 증거물을 안 내 지식과 나를 믿을 수가 있어요. 나는 죽은 자라고 믿는 게 아니고 십자가를 믿어야 될 건데 십자가 말고 십자가를 대체해서 다른 걸 믿어버린다고. 하나의 간증처럼 돼버려요. 그걸 방제 용도로 주께서 뜻에 따라 주는 겁니다.
그래서 10절에 봅시다. 여기 보면,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이게 누구한테 하는 거예요? 경건한 사람한테 해당되고요. 그 다음에 주의 날에 뭐같이 옵니까? 도적 같이 오지요. 이것 한번 해봅시다. 지금 조롱합니다. 이것 약간 더 설명합시다.
조롱할 때는 그 사람 나름대로 근거가 있지요. 그 근거를 공부하기 위해서 우리는 합리적인 과학과 철학을 공부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내가 누구 편이 되느냐 하면, 내가 철학과 과학 하는 사람 편이 돼보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 불 심판, 조롱할만한 하죠. 이건 인정합시다. 내가 과학자고 철학자면 조롱할 만 하잖아요.
과거에 물 심판 있었던 것은 그때 그뿐이죠. 그때 있었던 걸 가지고 사기 치는 인간이, ‘복음 전한다면서 불 심판, 겁주려고 이용할 수 있다.’라는 그런 가설을 내세울 수 있다 이 말이죠.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고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대로 가요. 조롱할 만 한 거예요. 조롱할 만 하고 조롱에 합세할 만 하다.
그 다음에 그런데 왜 내가 이 말씀대로 되는 걸 믿었는가? 샛별이구나. 주께서 피난처구나. 왜 그런 조롱하는 사람이 있느냐? 테스트구나. 아까 롯처럼. 왜 나는 그 불신앙 보고 가슴이 아픈가? 롯이 갔던 그 길이 십자가 길이고 그 십자가 길을 롯과 함께 같이 초청받아 가는구나.
이렇게 보면 세상이 말씀대로 되니까 세상이 완벽해요. 죄 많은 우리 자신이 너무나 완벽해요. 말이 이상합니다만. 왜? 죄가 톡 튀어나오니까. ‘조롱하지 마라, 마라’ 하고 자기가 하루 열 번 조롱하고. ‘믿음 똑바로 하라’ 하고 목사 자기는 열 번이나 믿음 더 없고. 남들은 직장이나 있어서 그렇지. 사모님이 ‘돈 떨어졌다’ 하면 기절초풍하고 어쩔 줄 모르고. 갑자기 공포가 엄습하면서.
남편 자존심은 세워야겠고. 주께서는 아무 증거 안 주시고. 엘리야 있으면 창고마다 쌀 찰 텐데. 그것도 안 차고. 답변이 궁해요. “나도 돈 벌게.” “뭐하고 벌래?” 답변이 없어요. 대답할 게 없어요. “노가다?” “그 나이에.” 난감한. “주여, 집안 식구에게 이런 고초를 당하게 합니까?” 말씀대로.
만약에 말씀대로가 없으면 자살로 이어지겠죠. ‘주여, 저 잘 믿었는데 안 맞춰줘서 결국 제가 알아서 죽겠습니다.’ 그래서 주께서는 매일같이 우리 자살하라 하죠. 잔소리장이, 기롱하는 자들 늘 떠나지 않고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면서 계속해서 ‘지금이라도 포기하라. 복음 포기하라. 늦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포기하면 키워줄게.’라는 마귀의 세 가지 시험이 계속 따라 붙습니다.
그런데 결론 감아 18절에 그럴수록 뭐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아는 지식에 그 은혜에 대해서 자라가라” 영광이 누구한테 있다? 너한테 있는 게 아니고 주에게 영광이 있다. 그리고 오래 참음과 흠과 티도 없이 완벽하다는 것이, 14절에,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주께서 해주니까 그때를 기다려라. 16절에 무식한 자들은 억지로 풀지만, 그건 샛별 없는 인간들이고, 예수님이 알아서 해주는 속에 너희들이 이미 포함돼있다. 이미.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부끄럽습니다. 만날 불평과 짜증 이외는 주께 영광 돌릴 게 없는 저희들, 하지만 이런 걸 다 아시고 주의 가는 그 길을 가고 있음을 깨닫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의 길의 종국의 끝은 생명이 기다리고 있는데 그 기다린 생명을 더 크게 진작 일찍부터 생명이 우리를 덮치면서 끌고 가고 있다는 의식을 느끼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다음에 유다서 합시다. 유다서를 못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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