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상 20:35-42 (요나단의 화살)
삼상 20:35-42 (요나단의 화살)
이름 : 우리교회(IP:220.81.176.169)
본문 : 사무엘상 20장35-42절
제목 : 요나단의 화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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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09-06-14 15:06
요나단의 화살
2009년 6월 14일 본문 말씀: 사무엘상 20:35-42
(삼상 20:35) 『아침에 요나단이 작은 아이를 데리고 다윗과 정한 시간에 들로 나가서』
(삼상 20:36) 『아이에게 이르되 달려가서 내가 쏘는 화살을 찾으라 하고 아이가 달려갈 때에 요나단이 화살을 그의 위로 지나치게 쏘니라』
(삼상 20:37) 『아이가 요나단이 쏜 화살 있는 곳에 이를 즈음에 요나단이 아이 뒤에서 외쳐 이르되 화살이 네 앞쪽에 있지 아니하냐 하고』
(삼상 20:38) 『요나단이 아이 뒤에서 또 외치되 지체 말고 빨리 달음질하라 하매 요나단의 아이가 화살을 주워 가지고 주인에게로 돌아왔으나』
(삼상 20:39) 『그 아이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요나단과 다윗만 그 일을 알았더라』
(삼상 20:40) 『요나단이 그의 무기를 아이에게 주며 이르되 이것을 가지고 성읍으로 가라 하니』
(삼상 20:41) 『아이가 가매 다윗이 곧 바위 남쪽에서 일어나서 땅에 엎드려 세 번 절한 후에 서로 입 맞추고 같이 울되 다윗이 더욱 심하더니
(삼상 20:42)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우리 두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시고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리라 하였느니라 다윗은 일어나 떠나고 요나단은 성으로 들어오니라
사람이 이별하는 경우도 가지가지입니다. 서로 감정 상해서 헤어지는 경우도 많지만 너무 사랑해서 헤어져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같이 위험한 지경에 빠졌을 때, 사랑하는 사람을 살려 보내고 자신은 희생당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오늘 본문 같은 경우, 멸망당해야 하는 공간은 사울의 공간이요, 진정 살 수 있는 공간은 다윗과 함께 하는 공간입니다.
즉 다윗이 가는 곳에 생명이 있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을 싫어하는 자가 있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그 자체가 생명의 길을 차버린 셈이 됩니다. 하나님이 없는 곳은 생명도 없습니다. 우리는 요나단의 다윗 사랑이 인간적인 감정에서 나왔다고 여겨서는 아니됩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자기 집안만큼은 싸고 돌기 마련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하지만 요나단은 그런 인간적인 본성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즉 다윗을 만나고부터 생명은 따로 있음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개입해서 주시는 생명만 생명이고 나머지는 저주와 멸망임을 알았습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기준을 다윗을 통해서 접하게 된 것입니다. 생명을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영역에 몰두하게 되면 그 자기 영역이란 극히 위험한 공간입니다. 왜냐하면 항상 생명을 핍박하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자기 할 일’을 집중시키는 지기만의 영역이 있게 마련입니다. 문제는 누가 자기 영역을 부정할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신학을 한 목사는 자신이 정립한 신학이라든지 자신이 목회하는 그 교회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가 극히 위험한 곳이 됩니다. 왜냐하면 자기 교회라는 이유 때문에 생명되시는 예수님의 일을 핍박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세 사람이 등장합니다. 요나단과 다윗과 또 한 사람은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입니다. 우리들은 마치 이 아이와 같습니다. 그저 코 앞 밖에 모릅니다. 우리 머리 위로 화살이 핑핑 날아다녀도 우리는 그 의미를 모르고 자신이 몰두 있는 일만 껴안고 살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요나단은 달랐습니다.
요나단은 화살을 정해진 거리 이상으로 일부러 멀리 쏘았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는 예상한 지점에서 화살을 찾지를 못합니다. 화살은 다윗이 있는 쪽으로 더 멀리 날아갔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여기 없음’을 요나단은 화살로 표현합니다. 다윗과 함께 있는 것이 생명인 줄 알아지만 그 생명이 지금 자신 곁을 떠나려 합니다. 아니, 떠나 보내야 합니다. 차이나지 않는 것은 생명이 아니고 구별되지 않는 것은 생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길로 가야될 사람을 이 멸망의 것들에 머물러 두게는 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죽음은 생명을 노립니다. 요나단은 죽음과 생명, 양쪽을 다 알기 때문에 다윗의 등장으로 인하여 자동적으로 다윗을 배척하는 자기 집안이 저주가 임하고 있음도 알았습니다. 사울의 집단과 다윗의 집단은 가야할 길이 달랐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을 떠나 보낸 요나단이 살 길은 무엇입니까?
요나단은 하나님을 증인으로 내세웠습니다. 즉 내가 다윗을 싫어서 멀리 보낸 것이 아니라 도리어 다윗을 살리기 위해서 멀리 보내야했음을 인정하는 증인으로서 하나님을 내세웁니다. 그리고 비록 다윗과 헤어졌어도 언제까지고 다윗과 함께 있음을 알려주는 증인으로 역시 하나님을 내세웁니다. 하나님께서 영원토록 우리 사이를 연결시켜주시는 분이라는 겁니다.
오늘날 신약 시대에는 새언약이 있습니다. 이 새 언약은 고무줄과 같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아무리 끊어도 끊어지지 아니하며, 우리를 둘러 싼 현실이 아무리 끊으려 하여도 끊어지지 아니합니다. 2000년 이상 이어져온 고무줄입니다. 로마서 8:35-37에 보면,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중보자를 보내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우리 자신들이 어느 편에 서 있을 것인가를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생명은 우리 쪽에 없다는 사실을! 우리가 있는 곳은 계속해서 예수님을 죽일려고 하는 그 세력이 작동하는 세계입니다.
왜 사람들은 예수님을 밀치는 겁니까? 세상에서만 예수님을 밀치는 것이 아니라 교회 내에서도 예수님을 밀치고자 합니다. 그 이유가 뭡니까? 그것은 그들 자존적으로 자신을 ‘가치 있는 자’인 것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스스로 부정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네 대신 내가 이렇게 죽는단다”는 식으로 십자가가 다가와야 가능한 관계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저주쪽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엄연히 자신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그점을 자꾸만 축복쪽이라고 일방적으로 우기고 있는 실정입니다. 사람은 살아있어도 산 것이 아닙니다. 죽어있는 겁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있기를 원해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생명이 있는 자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곱게 죽어가는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생명을 배척하고 거부하고 미워하고 싫어하는 투로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극구 예수님 쪽을 떠밀치고 있는 겁니다. 요나단의 화살의 의미를 모르는 자들이 사람들입니다. 이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는 요나단과 다윗 간의 언약의 의미도 역시 모릅니다. 그냥 그 아이는 무심코 삽니다. 바로 이런 모습이 오늘날 인간들의 모습입니다.
자기 머리 위에 언약의 화살이 슝슝 날아가도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모릅니다. 이 저주받은 세상에서 시키는대로만 살아갈 뿐입니다. 이 화살 속에는 다윗의 운명이 담겨 있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집안과는 영원히 갈라서야 될 존재였습니다. 비록 그동안 자신의 직장이 그곳이요 자신의 생계와 노동의 가치를 주었던 곳도 그곳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새로운 생명의 길로 떠나만 했습니다.
성도의 존재 의미란 축복과 저주를 가름하는 기준으로 버티면서 이 세상을 통과시키는데 있습니다. 이를 위해 언약의 화살이 우리 머리를 위를 지나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화살을 주워야 합니다. 그 화살에 뭐가 실렸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이미 새 언약 속에 포함되어 있어 그것이 곧 우리의 주업무가 되었음을 인정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우리교회
09-10-20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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