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05. 28 대전강의 사도행전 1강
09. 05. 28 대전강의 사도행전 1강
이름 : 이미아(IP:115.41.204.167)
자아라는 것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만드실 때, 뭐를 집어넣느냐 말씀의 내용을 집어넣어서 자아를 만들어 버려요. 그렇다면 두 개가 되요. 자아Ⅰ, 자아Ⅱ가 되는데 만약 자아Ⅰ은 하나님이 만드셔서 말씀을 집어넣어 제조한 것이 자아Ⅰ이라면 자아Ⅱ라는 것은 뭐냐 하면 지금까지 이야기 했던 것. 내 기억 속에서, 내 욕망에 맞는, 내 구미에 맞는, 내 입맛에 맞는 것을 끄집어서 그것으로 어디까지 이어지냐면 미래까지 보장받으려는 개인적인 자아 이렇게 가는 겁니다. 로마서 7장에 보면 이 둘이 서로 싸운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에게만 해당되는 것입니다. 성도 아닌 사람에게는 이게 없어요. 성도 아닌 사람에게는 이게 없기 때문에 자아도취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면 결국엔 급할 땐 뭐하겠습니까? 자살하지요. 천상천하 유아독존. 이 세상에 나 외는 없으니까. 만약 이것이 빨갛잖아요. 이게 빨갛다고 누가 이야기 했습니까? 내가 이야기 하잖아요. 누가 와서 이것이 파랗다고 이야기해도 내가 빨가면 빨간거예요. 저게 시계잖아요. 시곈데 어떤 사람이 가스렌지가 왜 벽에 걸렸지? 아니야 아니야 시계야. 너희들이 다 시계라 할지라도 내가 가스렌지로 보면 가스렌지인 것이다. 이것을 철학에서는 독단론이라고 해요. 이것은 자아가 현재 욕망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소집해서 미래로 이어지죠.
이제 시작할려고 하는데 제가 일방적으로 사도행전을 정했습니다. 사도행전을 일방적으로 합시다 라고 정했는데 왜 그랬냐 하면 사도행전에 대해 보통 상식은 뭐냐 하면 교회에 관한 것이다 이렇게 하잖아요. 그게 보통 일반 교회에서 교회에 관한 것이라고 하는데. 사실은 사도행전은 교회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 관한 것이 아니고. 그러면 사도행전을 펴 보세요. 사도행전의 내용은 십자가 후 작업 입니다. post cross라고 할까요. 예수님의 십자가 후 작업. 예수님의 십자가 후 작업인데, 그러니까 십자가 후 작업이니까. 사도행전의 주제가 뭐냐 하면 예수님은 제대로 주시다. 주님이시다 라는 이 말입니다. 여기서 주라는 것은 구약에 나오는 여호와 하나님 바꾸면 예수님은 제대로 여호와 맞구나 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 사도행전이예요. 다시 간추려 보면 사도행전은 흔히 교회 이야기가 아니고 예수님이 구약에서 말하는 그 주여 주여, 주의 이름 하는 아도나이 그 주님이 제대로 맞구나를 역사를 통해서 증명해 주는 것이 바로 사도행전이예요. 그렇게 되면 사도행전에서 주인공이 누가 되죠? 방금이야기 했으니까 주인공이 누가 됩니까? 주인공은 예수님이 되죠. 사도행전 주인공이 방금 예수님은 제대로 주시니까 주인공이 예수님이 되는데, 예수님이 보입니까? 안보입니까? 우리 재아씨.
예수님이 보입니까? 안보입니까? 예수님이 안보이죠. 안보이니까 사람들은 사도행전의 주인공을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걷어치우고 뭘로 하느냐 하면 소위 움직이는 사람, 또는 교회, 또는 공동체 이걸로 예수님의 주인공을 사도행전의 주인공으로 대체해서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죠. 잘못을 범하죠. 방금 제가 한 이야기가 예수님이 일했는데 사람이 일한 것처럼 그렇게 한 것을 방금 제가 오류라고 했죠. 잘못이라고 했단 말이죠. 그것을 증거하는 것이 뭐냐 하면 사도행전 3장에 보면 성전 미문에 앉은뱅이가 앉아 있는데 앉아 있는 앉은뱅이가 누가 거치고 지나가니까 일어섰죠. 일어섰어요. 그럴 때,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이 하셨다는 생각은 도무지 못했고 누가 했냐면 그 때, 찾아간 사람이 누구냐 하면 베드로와 요한이니까 베드로와 요한이 했지, 베드로와 요한의 경건과 신앙의 능력으로 앉은뱅이를 낫게 했다 라고 사람들이 오해를 하니까 정작 베드로와 요한이 그걸 수정을 해요. 이 사람아 눈에 보이는 우리가 한 것이 아니고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께서 이 사람을 낫게 했는데 왜 자꾸 당신들은 우리가 눈에 보인다는 단지 이유 때문에, 우리가 그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는 이유 때문에 마치 우리 안에서 나간 능력으로 그 사람이 걷게 한 것처럼 그렇게 왜 오해를 하느냐 라는 말을 해요. 그렇다면 지금이 사도행전의 십자가 후 잖아요. 올해가 몇 년이죠? 2009년 이잖아요. 2009년 5월 달이니까 우리는 어디에 포함됩니까? 사도행전 십자가 후 시대에 포함 되겠죠. 그렇다면 이 시대의 지금의 주인공이 누가 되죠? 예수님이 되죠. 만약에 예수님이라고 했을 때, 만약에 여기에 불신자가 온다면 여기 예수님이 어디 있는데 화장실에 가셨나? 부엌에 있어? 유령이야 귀신이야 예수님이 어딨어? 라고 오히려 의아해 할거란 말이죠. 이상한 사람들 아니야 왜 눈에 보이는 자기들이 있는데 왜 자기들은 자꾸 제껴 버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아, 그것도 신앙심인가? 신앙인은 그래야 되는가? 아, 그렇게 멘트를 날려야 신앙인처럼, 척인것처럼 되는거야. 이렇게 자꾸 시비를 걸게 된다 이 말이죠. 방금 제가 간단하게 이야기 했지만 이건 정말 어려운 이야기예요.
고요할 때는 주님의 은혜라는 말을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아무 탈이 없을 때. 그런데 갑자기 돌발 사태가 일어나면 우발이라고도 하고 또는 우연이라고도 하는데 하여튼 우발적이다 우연적이다 라는 예상치도 못한 일이 벌어지면 갑자기 예수님이 하셨다는 생각은 쏙 들어가 버리고 책임이 누구한테 있느냐를 따지죠. 책임이. 내가 평소에 하나님한테 소홀했기 때문에 내가 신앙심이 없어서, 신앙이 없어서 나에게 이런 벌이 내렸다는 식으로 그렇게 곡해하고 오해하는 겁니다. 성도한테는 벌이 없어요. 저주가 없어요. 그러니까 예수님 믿으신다면, 정말 예수님을 믿으신다면, 남은 것은 예수님 하실 일만 남아 있지 새삼스럽게 예수님이 우리하고 의논하거나 타협하거나 협상하거나 너 까불면 매 맞는다는 식으로 하는 그런 식으로 우리를 상대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일방적으로 주님이기 때문에. 주를 몰라서 그러는데 주라고 하는 것은 누구하고 의논하는가 하면 주는 주님과 의논할 뿐이예요. 여기에 사람이 끼어들질 않습니다. 그래서 그걸 로마서 8장에 보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제가 건방지게 주님이라면, 제가 만약 글씨를 쓴다면 막 쓰고 있는데 재원이 너가 와가지고 손을 붙들고 내가 쓸께 한다면 어떻게? 저리가 자리에 앉아 있어. 손을 떼버리지 그렇잖아. 그럼 더 쉬운 예를 들께. 매직이 쓰는데 지금 손은 안보이고 매직만 눈에 보인다고 봐요. 그럼 다른 사람 보기에 누가 썼어요? 매직이 알아서 쓴다고 보이죠. 그렇다면 실제로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누가 잡고 있어요? 내 손이 매직을 잡고 있잖아요. 바로 이것이 사도행전 이라는 것이라니까요. 참 어렵죠.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께서 베드로와 요한을 쥐고 글씨를 썼는데 불신앙인 사람은 그 앉은뱅이를 누가 낫게 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이 매직밖에 안보이니까 누가 낫게 했다? 베드로와 요한이 낫게 했다고 우기니까 그걸 베드로와 요한의 역할이 뭐냐 하면 그것을 수정하는 역할을 하는 거예요. 아니야 아니야 그게 아니야 주님이 하셨어 라고 수정하기 위해서 우리가 아직도 이 세상에 안죽고 살아 있는 것입니다. 재원이 너 피아노 치찮아? 너 피아노 칠 때, 아!!!피아노 잘 치네. 그 때는 독일어로 나인 나인 하죠. 아니야 아니야 주께서 힘주셔서 쳤어 라고 이야기 하라고 피아노를 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게 사도행전 1장 8절에 보면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 너희는 뭐가 된다? 성령이 임하면 누구의 증인된다? 아까 나의 자아의 기억의 증인 된다? 아니죠. 누구 증인 된다? 예수의 증인이 되게 하려고. 성령이 임하면 유다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예수의 증인이 되어라가 아니죠. 되어라가 아니라 반드시 되리라. 그렇다면 되리라고 할 때 누구의 작품이죠? 내 작품이 아니고 누구의 작품이죠? 예수님이 하나님 여호와시니까. 주님의 작품으로서 되고 말리라. 자, 여기 선풍기가 있고 시계가 있어요. 시계가 선풍기 보고 너 왜 시계 아니야 하고 따지면 되요? 안되요? 안되죠. 그리고 선풍기가 시계 보고 너는 왜 선풍기처럼 시원하게 못해 라고 따지면 되요? 안되요? 안되죠. 선풍기, 시계는 이 집 주인이 장만 한거죠. 그렇다면 이 말은 뭐냐 하면 너, 나를 관계없이 주님한테로 가버리면 어떤 형편에 있든지 아까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했는데, 어떤 형편에 있든지 어떤 일이 있든지간에 그것이 서로를 이렇게 만나면 안되고 만약 여기 A라는 사람 있고 B라는 사람이 있다면 눈에 보이는대로 만나면 안되고 주님을 거쳐서 봐 버리면 이 사람하고 나하고 경쟁의 대상이 되요? 안되요? 안되죠. 예를 들면 재원이가 피아노를 쳤으니까 피아노를 쳤을 때 나는 2등하고 쟤는 1등 했다 할 때 괜히 시기와 질투와 미움..우리 재원이 이런 마음 들었어요? 안들었어요? 들었죠. 시기와 질투와 미움..이것을 갈라디아서 5장에 보면 육의 열매라고 해요. 더 심한 것은 육의 열매가 있는 자는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받지 못한다. 뒤에 단서를 넣으면 천국을 못간다. 시기와 질투와 미움 다툼..그럼 어떻게 해야 해요? 그러면 내가 1등 해야 해요? 안되죠. 주님을 거치게 되버리면 얘는 그때에 1등을 해야만 되는 아이고 나는 그 때에 2등 해야만 될 아이란 말이죠. 그런데 1년이 지났어요. 내가 1등하고 걔는 2등을 했어요. 그럼 나는 뭐예요? 계속 1등을 해야 할 아이가 아니고 지금만 나는 1등을 해야만 하고 지금의 걔는 2등으로 밀려야 될 아이란 말이죠. 그 다음에 또 1년이 지났어요. 걔는 세계에서 1등을 했어요. 나는 예선 탈락 했어요.
결국 주님을 거친다는 말은 뭐냐 하면 한 사람이 가지고 있던 재질이 본인의 능력에 의해서 계속 이어지는 것이 아니고 항상 누가 징검다리를 놓아야 한다? 누가? 주님에 의해서 그렇게 동일성이...동일성이라는 어려운 말을 썼는데 유지되어야 되죠. 방금 제가 그린 그림(A, B,주님이 머리로 개입)을 이렇게 변형시켜 그리면(A, B,주님이 머리로 개입=한 몸) 이 안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의미가 없죠. 1년 지나고 2년 지나고 3년 지나도 의미가 없죠. 얘가 1등하다고 2등하다가 걔가 2등하고 1등하다가 얘가 세계에서 1등하고 걔는 예선 탈락 하더라도 전부 다 주님 안에서 한 형제가 되죠. 한 형제 사이에는 무슨 개념이 없냐면은 시간의 흐름이 의미가 없어요. 시간을 느끼는 것은 맞는데 그 자체가 느끼는 것이지 이 안에서 뱅뱅도는 시간 밖에는 안되요. 그걸 가지고 천 년이 하루 같이 하루가 천 년 같은..이걸 묵시라고 표현하는데 이 안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의미가 없고 다만 모든 것이 주님이 주시는 힘으로 하는 거예요.
성경 한 번 찾아봅시다. 성경 베드로전서 찾아봅시다. 베드로전서 4장11절. 누가 한 번 읽어 보세요.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만일 누가 말하려면 자, 불신자 보기에 말을 누가 합니까? 혀를 누가 갖고 있어요? 어떤 사람이 혀를 갖고 있지요. 혀를 갖고 말을 한다는 것은 음성과 피부구조를 동원해서 말하죠. 그런데 갑자기 누굴 집어넣습니까? 하나님이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죠. 갑자기 주체가 하나님을 집어넣죠. 그 뒤에 보세요. 만일 누가 봉사를 한다, 누가 청소를 한다면 갑자기 누굴 집어넣어요?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라. 요게 신앙인이냐 불신앙이냐는 것을 가름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떤 일을 할 때 그리스도 몸 안에 있을 때에 만일 누가 봉사를 한다고 할 때, 봉사라는 말 대신에 피아노를 친다고 할 때, 만일 피아노를 치거든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피아노를 치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이해되십니까? 믿고 안믿고는 본인이 알아서 하고 이해는 되느냐 말이죠. 이 성경 말씀이 이해는 되느냐 이 말이죠. 이는 범사에, 모든 일에 누구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받으시려 함이라. 갑자기 제 삼 자 예수 그리스도가 툭하고 들어가 버려요.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 성도가 되어서 피아노를 잘 쳤을 때, 관객들은 지금 피아노를 친 사람을 보고 박수를 치지 예수님 보고 박수를 치는 사람은 없다 이 말이죠. 그러더라도 그걸 또 멘트라 해가지고 사실은 제가 박수를 받으면 안되요 주님이 하셨습니다 라는 그런 멘트를 날릴 필요는 없고. 그런 것은 미스코리아가 맨 날 하는 상투적인 이야기고. 본인 생각에 박수는 내가 받더라도 사실은 내가 지금까지 이 자리에 서서 설사 안나고 보통 긴강하면 설사 쫙 나는데 오늘 이상하게 설사 안하고 틀린것도 없고 이 모든 것이 누구의 힘이다? 주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해야 그 때만 하나님께 영광이 되요.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 영광이 안되요. 하나님과 나 사이에 주님을 집어넣을 때만 영광이 되요. 이게 제가 지금 오늘 강의할 주제입니다. 이 강의 주제 이야기 할려고 긴긴 시간 서론을 이렇게 끌었습니다.
한 번 정리해 봅시다. 간단히 정리하면 하나님께 영광 되는 것은 내가 바로 하나님께 영광되지 못하고 나와 하나님 사이에 예수님을 개입시켜야 한다는 그 것. 아...그게 왜 그런가 그 내력을 사도행전에 들어가기 전에 구약을 통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아마 이 서론은 앞으로 계속해서 두고두고 반복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 영광은 핵심이 뭐냐? 핵심은 누굴 넣는다? 주 예수님. 주 예수님의 개입. 만약에 주 예수님이 개입하지 않으면, 개입할 때만 영광이 되는데 만약에 개입이 안되면 영광이 안되요. 주 예수라 했잖아요.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주 예수로 안보고 주와 예수를 찢어 버려요. 찢어 버리면 예수라 하는 것은 인간 예수만 남아 버려요. 인간 예수만 남아 버리면 여기에 여호와 주와 인간 예수의 연결고리가 성립이 안되요. 그러면 예수님은 주님이 아니고 단지 우리의 모델(Model), 삶의 모델 밖에는 안되요. 아주 훌륭하신 분, 하지만 나도 얼추 따라 붙으면 따라 붙을 수 있는 괜찮은 분, 멋진 분, 희생하신 분, 인류를 위해서 봉사하신 분 이것 밖에 안되요. 앞에 뭐가 끊어지면? 주가 끊어지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그림으로 그리면 하나님은 여기(위)에 계시고 우리가 여기(아래) 있다면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주님으로서 들어가지 않고 주님이 어디에 들어오느냐면 주님은 옆에 계셔서, 주님은 우리의 모델 밖에 안되니까 내가 주님한테 한 수 배워서 내가 직접 하나님께 나아가야 영광이 된다는 논리가 성립되요. 내가 직접 나아가야. 제 말이 이해가 되겠습니까? 지금 주제가 뭐예요? 주님이 왜 개입되어야 하는 이야기인데 그렇지 않는 경우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주 예수에서 주가 떨어지면 남는 것은 인간 예수만 남아 버리면 인간 예수는 우리 곁에만 서 있죠. 우리 앞에 얼쩡거리지 못하죠. 만약 예수가 얼쩡거리면 나는 예수님 믿어야 하고 하나님 믿어야 하고 성경 믿어야 하고 바쁘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이런 것은 싫고 다만 예수님의 하신 일을 본 받아서 내가 직접 나아가 하나님께 영광되고 싶다는 그런 야망을 보이게 된다는 이 말이죠. 이렇게 되버리면 앞에 뭐가 없어져요? 주 라는 말은 같은 말로 여호와, 하나님이거든요. 주 예수가 달아나 버려요. 그러면 우리가 어디까지 가야 하느냐면, 성경대로 하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예수님이 아버지께 가는 거예요. 처음 듣습니까? 시편 110편에 나오는 이야기 입니다. 주께서 내 주에게. 주가 몇 분 되버려요? 두 분 되버려요. 주께서 내 주에게..이게 바로 사도행전 베드로 설교에 나옵니다.
주께서 내 주에게. 자, 주께서 내 주에게 하니까 그 중에서 누구는 빠져 버려요? 갑자기 구원받고 싶어 환장한 나는 어떻게 되요? 빠지죠. 빠진다고요. 그럼 나는? 내 천국은? 그럼 나는 지옥갈 사람이야? 천국 가는 것은 내가 가는데 천국가야 할 당사자인 나의 의견도 묻지도 않고 내가 열심으로 믿는다는 것도 묻지도 않고 나를 완전히 제껴 버리고 일방적으로 주님께서 주님하고 의논해 가지고 나중에 우리에게 뭘 해주느냐면 뭐해주겠어요? 통보 해주죠. 통보..너 합격이래. 통보 해주죠. 이 통보를 가지고 예수님께서 주의 자리에 앉으실 때 하나님 계시고 하나님 우편에 주의 자리가 있고--오른 쪽 하는 자리는 주의 일을 하는 자리인데 나중에 깊이 들어가면 이야기 하고--주의 자리에 앉을 때, 주의 자리에 앉으면 성령이 오시게 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 베드로 설교에 나옵니다. 제가 지금 사도행전에 나오는 이야기만 합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의 특징이 뭐냐 하면 이 사람은 그냥 통보받는 입장이 되기 때문에 성령을 받기 이전에 그 사람이 거지가 되든 이방인이 되든 헬라인이 되든 유대인이 되든 관계없이 성령이 오게 되면 구원을 받게 되요.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나 아이나 어른이나 청년이나 늙은이나 성령이 오게 되면 그 사람은 누구 덕분에? 하나님 옆에 있는 예수님 덕분에 우리가 그저 구원 받았다는 사실을 알아서 그 사람은 자기의 증인이 아니고 예수님 덕분이라는 예수님을 증거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장 8절에 성령이 임하게 되면 땅 끝까지 너는 나의 증인이 되리라.
그렇다면 예수님이 주의 자리에 앉게 되는 예수님의 코스가 있는데 그 코스를 빨간 글씨로 쓰면 마리아에게 잉태되시고 출생하시고 서른 살 쯤 되어서 마귀에게 시험 받으시고 요단강에서 세례 받으시고 거의 3년 동안 확실한 건 아니지만 거의 2년 내지 3년 동안 이 지상에서 전도 하셨죠. 전도하시고 마지막에 성전 깨부수시다가 정치범으로 걸려 십자가에서 사형당하죠. 그 다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주의 자리에 가잖아요. 그럼 여기 빨간 코스에, 구원받을 사람이 빨간 코스에 들어갔습니까? 안들어 갔습니까? 안들어갔죠. 재아가 이야기 해보세요. 여기 예수님이 가신 빨간 코스에 검은 옷을 입은 우리가 이 빨간 코스에 들어 간적이 있어요? 없어요? 그렇죠. 안들어 갔죠. 재아 선악과 언제 따 먹었어? 너 태어나고 선악과 있었어? 없었지. 재원이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 구경했어? 안했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옆에 있었어? 없었어? 없었지. 태어나지도 않았으니까. 기억할 것도 없어요. 태어나기 전이니까. 없었잖아 봐라. 없었는데, 사도바울이라는 사람은 아주 웃기는 분이야 그 분은 이렇게 이야기해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보세요. 자기가 태어나기도 전에 자기로서는 태어나기 25년전의 이야기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은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산다 했다 이 말이죠. 태어나지도 않은 예수님만의 코스에 자기가 가입하지도 않으면서 이 코스가 어디로 밀려오느냐 하면, 성령이 오게 되면 예수님이 가신 코스가 뭐를 덮치게 되느냐면, 만약 우리가 죄가 있어서 까맣다면은 까만 여기에다 예수님이 가신 빨간 코스가 덮쳐버리게 된다니까. 성령이 오시게 되면 덮치게 되죠. 그럼 예수님의 십자가는 누구 십자가 되요? 덮쳤으니까.
여기에 만약 내가 1층 바닥에 있는데 2층에서 쾅쾅 콘크리트 공사를 하다가 2층 천장이 무너져 버리면 그 무너진 천장이 누구한테 덮쳐요? 1층 바닥에 있는 나한테 덮치니까 갑자기 나는 1층에 있으면서 2층 맛을 보는 거예요. 그렇잖아요. 만약 위에서 지금 운동기구 가지고 놀다가..위에 누가 사십니까? 할머니가 머신 타다가 발작을 일으켜서 지붕이 내려 앉았다 하면 나는 1층에 있으면서 졸지에 무슨 맛을 봐요? 2층에 있는머신(기계) 맛을 보잖아요. 왜 덮쳤으니까. 우린 그냥 공부하는 학생일 뿐이예요.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안에 뭐가 담겨 있어요? 성령 안에는 예수님이 가신 빨간 코스가 담겨 있어 이게 덮치면 나는 그냥 내 일상생활, 아침에 일어나면 밥 먹고 바이올린 켜고 피아노 치고 하는 일상생활하는 나에게 예수님의 생애가 여기에 덮쳐버린다 이 말이죠. 시간과 상관 없이, 시간을 초월해서 그리스도 안에서는 덮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아하...예수님이 가신 그 길은 사실은 내가 가야할 길, 십자가에 죽는, 하나님께 버림받는 그 길을 예수님께서 선점해서 먼저 가셨구나!!! 성령이 오게 되면 내가 그 길을 본의 아니게 가야 되는구나. 그런데 그 길이 십자가에서 끝납니까? 예수님의 코스가 어디예요? 십자가 끝나고 난 뒤에 예수님이 끝났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 끝나고 난 뒤 어디갔죠? 부활 승천해서 하늘 나라로 갔잖아요. 그렇다면 코스가 십자가 끝이 아니고 결국엔 어디로 갑니까? 예수님 계신 나라, 아들의 나라, 천국은 놀랍게도 하나님의 나라 라고 하면서도 아들의 나라 라고 했어요. 이 아들의 나라까지 가잖아요. 그러면 이 땅에 사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우리가 죽고 난 뒤에 예수님이 가신 코스, 그 천국까지 합류가 되는 겁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살할 때 히브리서 9장 27절에 보면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라고 할 때 과연 노무현 전 대통령이 히브리서 9장 27절에 나오는 말씀, 죽고 난 뒤에는 심판이 있다는 것을 고려해서 뛰어 내렸겠습니까? 연필 있죠. 연필 모르는 사람 없을 것입니다. 연필 보면 여기 심지가 나오고 뒤에 지우개 달려 있고. 자, 여기서부터 여기 까지(심지에서 깍인 부분까지)가 연필의 전부예요? 부분이예요? 부분이죠. 그럼 뭐가 전체예요? 심지부터 지우개 달린 부분까지가 전체 아닙니까? 그러면 인생이라는 것은 결국 뭐냐면, 눈에 보이는 산다는 것은 여기서부터 여기까지(연필전체)가 아닙니까? 과연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이걸 생각했겠느냐 이 말입니다. 지 죽으면 그만이지만. 이걸 생각했겠느냐 말입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 말씀을 생각했겠느냐 말입니다. 눈에 보이는 심지는 끊어지면 또 깍으면 되요. 아무것도 아니예요. 연필 전체가 중요하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내가 착해지기 위해서 예수님의 어떤 점을 본 받아야 하는가 그게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이 가신 그 코스 전부를 다 받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십자가 질 때까지는 비록 죄는 없으시면서 무슨 길을 갔습니까? 죄는 없으신 분이 무슨 길을 갔습니까? 죄인이 가야 하는 길을 가는 거예요. 결국 예수님이 가신 코스대로 하면, 그 코스가 우리에게 오게 되면 우리는 이 땅에서 뭘 해도 뭐가 되요? 예수님의 코스에 의하면, 이게 모델이니까. 표준이니까. 우리는 죄인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가 의인된다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고 오직 예수님만이 부활 하셨거든요. 이유가 뭐냐 예수님만이 의인이시기 때문에. 십자가 지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의인이시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코스대로 주어지면 우리는 죄인으로 살다가 예수님 덕분에 의인으로 달라져서 나중에 예수님의 영광까지 차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에 나오죠. 미리 아신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그렇다면 이 이야기에 의하면 우린 뭘 해도 죄인이 되는 겁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나쁜 짓을 해서 죄인이 아니라 이미 예수님 가신 코스에 의하면 예수님 십자가의 코스는 인간의 길인데, 인간의 길은 예수님이 바로 죄를 진 자는 결국 이런 아버지로부터 버림 받게 되는,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십자가 버림받는 거거든요. 아버지로부터 버림 받는 코스가 우리의 나머지 모든 인간이 가야 할 그 아담의 길이었습니다. 아담의 길이고. 그 다음에 부활되고 난 뒤에 길은 바로 예수님의 길. 제 2의 마지막 아담 되신 분 만이 보여줄 수 있는 길. 최초의 부활되신 분은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걸 방금 길게 이야기 했는데 이것을 다 안다 치고. 정작 제가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주 예수님 이야기가 아니고 두 번째 입니다. 첫 번째 것, 또 잊어버리니까 자꾸 반복합니다. 우리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누굴 개입해야 한다? 누굴 집어넣어야 한다고 했어요? 주 예수님. 그 근거는 베드로 전서 4장 11절.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아버지께 영광이 된다. 두 번째. 요 이야기가 구약에서 근거가 있느냐?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우리하고 집어넣어야 아버지께 영광이 된다는 것이 과연 구약성경에 근거가 있느냐? 있습니다. 창세기 12장에 보면, 창세기 12장 1절에서 3절을 보면 거기 하나님께서 누굴 부르시느냐면 아브라함 들어 봤어요? 아브라함은 무슨 역할을 하느냐 하면 아브라함은 복과 저주의 기준이 되요.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에게는 복을 받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자에게는 저주를 받고. 임재아씨 이것이 옳다고 봅니까? 자, 여기 우리 성도들 계시는데 전부 다 잘났어요. 다 잘났는데 아까 강아지 어디 갔죠? 제가 강아지 안좋아하는데, 이 강아지 저한테 안기겠어요? 제가 강아지 안았잖아요. 다 잘났고 착하고 훌륭하다고 나름대로 생각 하는데. 제가 이야기 합니다. 제가 하나님입니다. 이제부터 말하노니 이 개를 축복하면 복 받고 이 개를 만약에 저주하면 저주 받는다 할 때, 누가 화를 안내겠어요? 누가 화를 내지 않겠느냐 말입니다. 각자 전부 다 잘난척하기 때문에 설마 하나님이 나를...그런데 갑자기 하나님이 엉뚱하게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니고 갑자기 여기 강아지를 떡하고..강아지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 내었나니. 아브라함 자리에 뭐를 집어 넣습니까? 강아지를 집어 넣잖은 말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뭐라고 합니까? 강아지, 재하고 내하고 누가 잘났는데 강아지 저게 뭐라고 하잖아요. 그 때,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이게 바로 나의 선택이다!!!이런 경우가 다윗에게 또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사 그로 하여금 복의 원천지가 되게 했습니다. 누구든지 저를 저주하면 아무리 착해도 아브라함을 저주했다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이 저주해 버리고 아무리 나쁜 놈이라도 아브라함을 축복하면 복을 받는 복과 저주의 새로운 기준점을 제시해 버렸습니다. 여기에 방금 이러한 것을 하나님의 일방적 계약이라고 하는데,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언약이라고 하는데 이 계약에 누구도 안믿었게요? 아브라함 본인도 안믿었어요. 놀랍게도 아브라함 본인이 안믿었습니다. 왜 본인이 안믿었느냐 하면 너무너무 겸손해 가지고. 하나님 저는 그냥 개입니다. 제가 남보다 휼륭하지도 않고요, 제가 완벽하지도 않고요, 제가 뛰어나지도 않고요, 제가 믿음 좋은 것도 아니고 저를 그냥 내버려 두세요. 저는 그럴 입장이 못됩니다...만약에 여기에 있는 사람 중에서 이제부터 하나님께서 임재아를 축복하지 아니하면 저주받고 임재아를 축복하면 복을 받는다 하면 재아 너는 기분 좋겠나? 괜히 부담되지. 아, 내가 완벽해야 되고 내가 모범을 보여야 하고 부담되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하고, 인간하고 상대한다? 안한다? 상대 안하죠. 아브라함이 괜히 자기가 상상력을 동원한 것이예요. 하나님이 자기를 택해서 축복과 저주를 삼으니까 아브라함 본인 생각에 자기가 좀 완벽해야 하고 이제부터 행동도 고쳐야 하고 이제부터 믿는 사람척 해야 하고 뭔가 쫌 해야 하는줄로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그게 아니고 아브라함을 통해서 반대로 아브라함의 처음 이름이 아브람입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바뀝니다. 아브라함은 있어요? 없어요? 없는 인물이예요.아브람은 있어요? 없어요? 아브람은 있어요. 있는 것을 없다고 하고 없는데서 있게 만들기 위해서 아브람을 이용한 것 뿐이예요. 아브람은 아무 상관 없어요. 심지어 아브라함 하고도 상관이 없어요. 복과 저주의 기준은 신약 시대에 누구냐 하면, 신약 시대에 복과 저주의 기준은 주 예수님이죠. 예수님이 주가 되셔서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주 예수님이 개입되지 아니하면 구원받지 못한다고 제가 아까 이야기 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안되니까 구원받지 못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게 방금 두 번째 구약 근거가 있느냐 라고 했죠. 구약 근거가 있다고 했습니다. 창세기 12장이라고 했죠. 창세기 12장을 보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해서 축복과 저주의 기준을 삼았다 했죠. 그렇다면 아브라함 본인이 그만큼 대단한 사람이냐? 그것도 아니라고 했죠. 그만큼 훌륭하냐? 그것도 아니예요. 그렇다면 뭐냐 보이지 않는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올라 탄 거죠. 씌인거죠. 요한복음 8장에 나옵니다. 아브람이 있기 전에 누가 먼저 있었다? 예수님이 먼저 있었다. 예수님께서 아브라함 속에 들어가 아브라함 속에서, 자기 영을 통해서, 아브라함은 껍데기에 불과하고. 아브라함을 통해서 신약시대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축복 기준을 구약에 미리 땡겨 구약속에 들어가 아브라함 안에서 예수님이 활동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왕 어려운거 쉽게 하고 싶지 않아요. 안다 치고 세 번째로. 그러면 아브라함하고 하나님과 맺은 사항을 뭐라고 했습니까? 계약이죠. 같은 말로 언약이죠.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이 뭐냐 하면 바로 할례 언약이라는 겁니다. 할례 언약이 뭐냐, 할례언약을 알기 위해서 예레미야 4장을 봅시다. 강의 50분하고 쉬도록 하겠습니다. 예레미야 한 번 보도록 합시다. 예레미야 4장 4절. 누가 한 번 읽어 보세요.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행악을 인하여 나의 분노가 불같이 발하여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 여기 보면 스스로 뭘 행하고? 할례를 행하고. 할례라는 것은 약속입니다. 그 다음에 무슨 가죽이라고 했습니까? 마음 가죽이죠. 저는 이 마음 가죽을 가지고 본격적으로 사도행전 강의 들어가기 전에 모든 것을 설명하려고 합니다. 할례라는 말을 어린 재하씨는 알아요. 할례가 뭔지 알아요? 할례를 네 자로 하면 포경수술 이라고 하는데. 포경수술이 뭔지 친구들한테 들어 봤어요? 요건 뭐냐 하면 남성의 성기 끝에 가죽이 덮여 있다는 겁니다. 덮여 있는 가죽을 찢어서 분리시키는 것입니다. 몸체와 가죽을 분리시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언약이라고 합니다. 참 하나님 희한하시죠? 방주 언약이라는 것은, 노아 언약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잠수함도 아니고 배도 아니고 방주 하나 만들어 가지고 만들어진 방주를 가지고 언약이라고 했습니다. 물건이죠 물건. 잣나무로 만들었으니까. 재질이 목재로 되어 있으니까. 그런데 아브라함 언약은 재질이 목재가 아니고 물건이 아니고 뭐다? 꼬추라 이 말입니다. 꼬추인데, 태어 날 때부터 가지고 온 가죽과 몸체 부분을 구분해서 잘라내는 그것을 노아 때 방주같은 역할을 한다고 해서 할례 언약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뭐냐 하면 오늘 본문에 무슨 가죽이죠? 마음 가죽이죠. 보통 포경수술 같으면 의사 선생님이 "얘야!! 포경수술 해줄까?" "예. 가죽을 벗겨 주세요." 이래야 되는데 "예. 제 마음 가죽을 벗겨 주세요" 라고 하면 의사가 뭐라고 합니까? "웬 마음가죽? 마음에 무슨 가죽이 있어? 얘야 도리어 묻고 싶어. 마음에 가죽이 있어?" "예. 있습니다. 예레미야 4장 4절에 나온 답니다. 마음에 가죽이 있답니다." 그러면 마음에 가죽이 있다는 것은 벗겨서 제거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가죽을 잘라서 제거하듯이.
마음의 할례란 것은 뭐냐 하면 현재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었던 그 마음 가죽을 잘라서 분리시켜야 하는 거예요. 아브라함 가정에 가보면 아브람은 있다 했죠. 아브람은 있는데 아브라함은 없죠. 아브라함이라는 인간은 없어요. 다만 뭐가 있다? 아브람은 있죠. 그런데 여기에 하나님께서 뭘 집어넣느냐? 하나님께서 언약을 집어넣으면 점차점차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뀌죠. 바뀔 때에, 할례를 행하죠. 그렇다면 진짜 아브람이라는 것은 복의 근원이 아닙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 것은 아브라함에 관한 것이지 아브람에 관한 것은 아니란 말이죠. 임재아를 축복하면 복을 받고 그런 것은 없어요. 성경에 안나와요. 이근호도 안나와요. 신약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나오지 인간은 안나와요. 그렇다면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복과 저주의 방식의 기준을 알려면 뭘 해야 하냐면 이 가죽이, 마음 가죽이 벗겨져야 하는데 이 마음 가죽은 어디서 갖고 왔느냐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입니다. 할례를 행할 때에, 아브라함이 자식을 낳았어요. 자식을 낳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마엘을 낳게 하신 것이 아니라 이삭을 낳게 했어요. 이삭을 낳았는데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행한 것은 이삭이 최초예요. 이삭 때문에 다른 사람이 준비 되어 있었던 거예요. 이스마엘은 아니라 구원을 못받아요. 왜냐하면 아브람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구원을 못받아요. 이삭은 구원을 받아요. 왜냐하면 아브람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서 태어난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은 아브라함이 아니라 했잖아요. 아브람 속에 아브라함이 들어 있다는 이 말은 뭐냐 하면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미리 들어 있었던 거예요.
로마서 4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그걸 믿었어요. “나는, 내 아내는 태가 죽었기 때문에 자식을 못낳아도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의 약속된 사람은 내 아내에게서 태어날 것이다.” “나는, 내 아내의 자궁이 이미 죽었기 때문에 자식을 못낳아도 불가능해도 나는 인간으로서 할 수 없어도 하나님은 약속 때문에, 하나님의 그 약속 때문에 나라는 인간을 통해서 해야될 일은 기어히 해 내고 맙니다.”라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너가 바로 믿음이다.” “너가 바로 믿음의 조상이다.” 그러면 마음의 가죽이라는 것은 뭡니까? 육으로 보고 세상적으로 보는 모든 성경 해석...마음의 할례라는 것은 세상적으로 아까 처음에 눈에 보이는대로 성경을 보고 예수를 볼 때 인간으로 보는 그런 육의 가죽이 짤라질 때, 나라는 인간은 나다 라고 하는, 천상천하 유아독존 세상에 나 밖에 없다는 것이 짤라질 때, 내 안에서 작용하고 있는 하나님의 약속을 알게 되면 그것이 뭐냐 마음의 가죽을 벗겨낸 사람입니다. 그게 바로 할례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사도행전을 해석할 때 마음 가죽을 벗겨내고 보게 되면 사도행전은 훤하게 보입니다. 10분 쉽시다.
서경수(IP:116.♡.101.7)
09-06-13 17:37
이미아 선생님. 녹취하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두번 날렸으니까 이번에 올린 것은 세번 녹취를 한 것이네요. 여하간 신고식을 요란하게 치르셨습니다.
녹취 하시면서 마침표 찍고 사이 띄우기를 두번 하셨던데 한번만 클릭 하세요. 제가 고린도전후서 녹취하면서 다침표 찍고 두타 띄워서 책 만든다고 교정하신 오용익 목사님이 일일이 한타로 바꾼다고 엄청나게 고생하셨습니다. 과거 수동식 타자기에서는 마침표 후 두타 사이 띄우기를 했는데 요즘 사용하는 워드프로세스는 다침표 후 한타 띄우는 것으로 규칙이 바뀌었답니다.
계속 수고해 주세요.
정낙원(IP:124.♡.243.22)
09-06-14 00:33
우린 그 동안 너무도 무심하게 넙죽 넙죽 받아만 먹고 있었습니다.
이 귀한 생명의 말씀을 내어 놓기 위해서 한 사람의 죽음을 바탕으로 주어진 것이라는 것을 모르고 읽었습니다.
진심으로 이미아 자매님의 수고에 경의를 표합니다.
녹취 하시는 모든 분들에게도 동일한 경의를 표합니다.
감사드립니다.
이미아(IP:115.♡.204.167)
09-06-14 08:57
어제는 강구만 장로님께서 영어 단어가 잘못되어서 전화상으로 알려 주셨는데...
아!!!그렇군요..제가 컴퓨터와는 담 쌓고 살아서 ㅎㅎㅎ
아니 기계치라서....두 타 띄기 힘들었는데 정말 잘됐어요!!!
혹, 나중에라도 어떤 분의 교정의 수고로움을 덜기 위해서라도 즉각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시간내서 고쳐 놓을께요)
고린도전후서를 책으로 만나 그 은혜의 말씀에 사로잡혀 지낸 시간들이 엊그제 같은데....
교정보시느라 엄청 고생한신 분이 뒤에 계셨음을....
두 분 목사님..고맙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 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벧후3:8-13)
아멘!!!
강구만(IP:118.♡.241.176)
09-06-14 23:51
다시 오신다는 약속이 너무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