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605b 울산강의-출애굽기1장
20090605b 울산강의-출애굽기1장
이름 : 한윤범(IP:119.192.174.148)
20090605b 울산강의-출애굽기1장
(강의:이근호 목사)
제가 새로 하나 쓰겠습니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는 방법은, 항상 새로 시작한다는 거예요. 작년에 잘 믿었는데, 한 달 전까지 잘 믿었는데 이러지 말고 잘 믿었어도 그만이고, 못 믿어도 너무 탄식하지 마세요. 과거에 자기 잘못한 걸 자꾸 후회해버리면 그건 마귀의 시험입니다. 지금 주신 은혜도 대가없이 주는데 왜 지난 달 은혜만 대가없는 걸로 여깁니까. 오늘도 대가없이 공짜로 줬는데 지난번에 공짜로 준 것만 자꾸. 그땐 자기가 잘해서 복 받은 걸로 자꾸 결부시키느냐 말이죠. 항상 새로 시작하는 거예요. 되풀이에요. 매일같이 되풀이해서 출애굽의 은혜를 주신다.
방금 이야기했던 이런 요소가 매일같이 지금 이 순간도 새로 시작하는 겁니다. 하는데 육을 뭐로 바꾼다? 육을 영으로 바꾼다. 달리 이야기하면 육의 뒷부분에 하나님의 말씀을, 영을 실어서 다른 사람은 말씀이 없지만 우리한테는 말씀이 실린 그런 사람으로, 똑같은 육이지만 말씀이 있어서 말씀의 사람으로 살게 하시는 겁니다. 이것도 공짜로 주시는 거예요.
공짜로 준다는 게 21절에 나옵니다. “산파는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을 왕성케 하신지라” 여기 누가 개입합니까? 애굽나라와 히브리 사이에 제 삼자인 하나님이 개입하잖아요. 하나님이 개입해서 왕성케 하면 왕성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개입했는데 그들은 하나님이 안 보이니까 누구만 상대하고 있어요? 애매하게 히브리인들만 닦달내고, “너희 왜 말 안 듣노? 왜 이렇게 자식을 많이 나.” 이런 식으로 하나님이 눈에 안 보이니까 자꾸 사람만 닦달 내는 거예요.
오늘도 우리들이 세상 사람에게 당하는 것과 똑같은 이치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때문에 구원받았는데, “너희는 뭐 잘났다고 구원받았어?” “잘난 것 없거든요.” “잘난 것도 없는데 왜 구원받아.” “그게 구원의 방식이거든요.” “너 돈 좋아하지?” “돈 억수로 좋아하거든요.” “그런데 왜 구원받아?” “돈 좋아하는 것도 주께서 구원하시거든요.” 이처럼 하나님의 개입을 이야기하는 사람, 영적인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개입을 빠뜨리고 눈에 보이는 사람이 육적인 사람이 되죠. 굉장히 간단한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2장에 문제 하나 나갑니다. 모세가 죽을 뻔 했는데 엄마가 석 달 키우다가 살리기 위해서 광주리에 담아서 나일 강 물에 띠웁니다. 모세 누나가 쫓아가죠. 아무래도 젊은 사람아 안 낫겠습니까. 쫓아가서 광주리가 어디 가는가 보니까 바로의 공주가 목욕하는데 갔다 이 말이죠. 그때 모세 누나가 “이 집에 유모 안 필요하십니까?” 물어서, “마침 유모 필요한데.” “그러면 좋은 아줌마 소개해 드릴까요?” 해서 모세 엄마를 유모로 해서 낳은 엄마가 유모도 되면서 모세를 양육했다는 이야기죠.
문제가 뭐냐 하면, 모세를 누가 살렸습니까? ①바로의 딸, 바로의 공주. ②누나. ③엄마. ④모세. ⑤하나님. 보통 문제 낼 때는 하나님을 문항에 안 집어넣어요. 두루 뭉실. 그런데 반드시 집어넣어야 돼요. 우리는. 집어넣어야 일번, 이번, 삼번, 사번이 정답이 아님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오번 되는 하나님을 집어넣어야 돼요.
우리가 매일같이 생활에 하나님을 집어넣어야 될 이유가, 내가 믿음 좋다고 과시하기 위함이 아니라 내가 행한 건 없음을 너무나 느끼기에 하나님을 집어넣는 겁니다. 당연히 하나님이 하셨고요.
그렇다면 문제가 다르죠. 모세의 운명은 정답이 하나님의 개입이죠. 그러면 애굽과 모세와의 싸움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우리하고 세상사람 없습니다. 그럼 누구하고 싸움이냐? 하나님이 개입했으니까 하나님과 누구하고 싸움이다? 애굽과의 싸움이다. 하나님은 언약이고, 애굽은 비언약이죠.
이번에 광주 공부할 때 디모데후서 2장 했습니다. 악마의 올무에 빠진 사람을 하나님께 ‘사로잡힘’ 완전히 귀신 굿하는 것 같이 영에 사로잡힘. 둘 다 뭐가 돼요? 우리 개인적인 자유는 없어요. 이걸 제가 글을 하나 썼잖아요. [기계들] 기계와 인간의 싸움. 성령의 기계냐, 악령의 기계냐? 둘 중에 하나. 제 삼의 지점은 없어요. 하나님께 사로잡힐 것이냐, 악마에 사로잡힐 것이냐?
하나님이 개입했으니까 모세는 울며 겨자 먹는 식으로, 그런데 모세의 본 마음은 언약이에요, 비언약입니까? 비언약이죠. 그러니까 문제가 복잡해져버렸어요.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모세지만 모세의 본심은 비언약이고, 하나님은 언약으로 비 언약을 공격하니까 하나님이 결국 누굴 공격해야 돼요? 하나님이 같은 비언약인 모세를 공격해야 되는 거예요.
출애굽기 4장 봅시다. 4장 24절 다같이 읽어볼까요? 시작. “여호와께서 길의 숙소에서 모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시는지라” 맞죠. 신학자들이 이걸 손을 못 대요. 왜 하나님께서 자기가 일에 부른 사람을 죽이면 일을 누굴 시킵니까? 하나님께서 착각했는가? 왜 이 글이 있는지 이유를 몰라요.
하나님은 매일같이 우리를 죽이죠. 왜? 우리는 매일같이 비언약이고 세상 사람과 동일하기 때문에 죽여주는데. 죽여주니까 고마운 거예요. 죽여주니까 우린 뭘 느끼느냐? 하나님께 사로잡힘을 알죠. 매일같이 자기 부인이 되게 하시니까. 세상 사람은 그게 안 되는데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서 자기를 낮추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내가 미워하고. 그런데 이 미운 나를 살려내시는 하나님이 고마워.
마음속에 욕망 때문에 남을 얼마나 힘들게 합니까? 우리가 남을 힘들게 하는 것은, 기계와 기계가 충돌되면 항상 상대방에게 피해보상을 요구하게 돼있어요. 자기가 남들 해코지 한 건 생각 안 하고 자기가 받은 아픔만 피해보상을 요구하게 된다고요. 상대방도 마찬가지니까 인간은 항상 자기중심이라는 것 때문에 우리는 육에 속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하나님께서 그런 인간을 사로잡혔으니까 매일같이 죽이고, 낮춤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고집스럽게 우리 자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게 하시는 거예요.
그럼 출애굽기 다시 1장 봅시다. 그러면 모세가 하나님이 개입하니까 하나님은 언약인데, 애굽은 비 언약이다. 그래서 비 언약 나라에서 빠져나와서 언약의 나라, 그곳에 가고자 하신다. 그런데 모세를 비롯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비 언약에 속해서 얼씨구나 하고 한 통속에 돼있어요. 분류할 수 없어요. 같은 한 통속이니까.
애굽에서 못 빠져나온 이 사람들을 언약으로 빠져나오게 하는 그 아이디어, 방식이 뭘까? 문제. 같은 한 통속인데 누구는 구원하고, 누구는 구원 안 해주는 방법이 뭘까요? 방법이 이렇습니다. 이런 것은 강도사 시험문제 내면 좋겠는데. 똑같은 인간인데 누구는 콩은 콩이고, 팥은 팥이고 가르는 방법이 뭐냐? 하나님께서 애굽을 사용해서 이 히브리인들이 자기와 한 통속 되는 것을 도리어 애굽 사람들은 미워해요.
이 사람들은 미움 받으니까 더욱더 애굽에게 매달리겠지요. 미워하지 말라고. ‘시키는 대로 할 테니까 제발 우리를 미워하지 말라.’고 더욱더 매달리겠죠. 하지만 하나님께선 애굽을 사용해서 더욱더 미워하게 하죠. 하지만 이들은 모르죠. 애굽 아니면 희망이 없으니까. 울산 사람이 현대중공업 빼놓고 희망이 어디 있습니까?
그럴 때 하나님께서 미워하는데 미워하는 방식이 뭐냐 하면, 너희들이 하나님에 속했기 때문에 너희 민족과 우리 민족이 다르다 해서 배척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구분시켜놓고 이 애굽나라에는 저주를 퍼붓고 히브리인들은 저주를 면제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애굽과 히브리인들을 차이 나게 하심을 깨닫게 하죠. 그렇다고 해서 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좋아할까요, 안 좋아할까요? 안 좋아하죠. 우린 이 땅에 살면서 차이 나는 것도 싫어.
여기 오다보니까 38층짜리 거대한 아파트 건립 중인데, 예수 믿는 사람은 따로 산다. 이건 우리가 싫어. 우리는 예수 믿는 것 안 들키고 싶어. 같은 아파트에서 조용하자. 조용한 게 제일 좋아요. 섞이는 게 싫어요. 그런데 들통 나면 예수 안 믿을 게, 교회 안 갈게 해서 자꾸 갖다 붙죠. 이게 바로 우리의 육적인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무리 애굽을 통해서 떼어내도 세상이 좋아. 우리는 그곳이 안 좋아요. 하나님 안 좋아요. 우리는 사는 대로 이게 좋아요.
이 가운데 누가 힘들게 되죠? 모세와 모세의 형이 있었죠. 모세와 아론이 백성들한테 맞아죽게 됐습니다. 언제 우리를 빼 달라 했느냐? 우리는 약간 살기 힘들어서 하나님께서 기도해서 형편이 좋아지게 했지 언제 우리가 애굽 아니면 땅에서 여기서 집어넣은 펀드가 몇 개인데 보험을 들은 게 몇 개인데 이걸 취소하고 우리는 어디가 산다 말이냐? 갈 데도 모르고 말이야. 하나님이 너희들을 벌하기를 원하다. 그들은 모세와 아론을 핍박했습니다. 그래서 모세와 아론이 굉장히 힘들었어요. 이것이 바로 장차오실 예수님 받을 압박이고 고난이었습니다.
점차 힘들게 분리되면서 한 쪽은 저주가 주어지고, 한 쪽은 저주가 안 주어지고 마지막엔 어린양 피로써 한 쪽은 다 죽이고, 한 쪽은 다 살려서 홍해 갈라지게 해서 건너오게 하는. 그러니까 출애굽기 15장에서 그제야 미리암을 정점으로 해서 역시 하나님은 댁길, 최고. 그러나 그때뿐입니다. 그 뒤에 보면,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
그러니까 한 번 은혜 받았다고 그것으로 구원 못 받습니다. 매일같이 주께서 은혜를 주시고, 또 주시고, 늘 주셔야 주신 은혜로 구원받지 내 힘으로 은혜 유지하고 간증한다고 처재 논다고 구원 못 받아요. 오늘 치 은혜가 중요하지 어제까지 처재 논 은혜는 소용없습니다.
결국 출애굽의 내용은 뭐냐 하면, 어떤 인간도 자력으로 구원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개입하니까 하나님께서 전쟁을 벌여서 구원하셨다. 그런데 그 전쟁에서 애굽만 적이 아니었고, 누구도 적이었다? 구원받는 백성들도 하나님의 전쟁을 이해 못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출애굽기 12장에 보면, 너희들을 여호와의 군대라고 부르죠.
그렇다면 모세가 죽어야 될 이유가, 여기 2장 12절. 제가 읽습니다. “좌우로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죽여 모래에 감추니라” 이건 완전히 벤또 던지는. 이봉창 의사. 강홍규 의사. 안중근 의사. “이또히로부미, 민족의 이름으로 널 처단하노라.” 완전히 그 식이잖아요. 또는 민주화를 위해서 순교하신 노무현. 부엉이 바위에서 민족의 제단에 바쳐진 순교자 노무현.
오늘 누가 이야기하던데요. 검찰에 있는 사람이 이야기하는데 노무현이 죽었던 것은 계획적이었다. 왜? 자기 부인은 참고인이고, 자기는 피의자기 때문에 참고인이 오백만이든, 천만을 받아도 소용없고, 피의자가 죽어버리면 수사가 종결된답니다. 그걸 노무현이 법을 해서 알기 때문에 자기는 죽고, 오백만 불 챙기고. 그런 계획을 세웠을 수 있다고.
하여튼 국가와 민족을, 자기 엄마한테 너는 민족의 지도자가 되었다. 특별한 하나님의 배려다. 너는 보통 인간 아니야. 죽은 널 살리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명이 있어서 그렇다. 인간적인 사명감, 목사한테 이건 참 큰 시험이에요. 인간적인 사명감, 뭔가 튀는 것, 위대한 부흥사, 위대한 설교자. 내가 없으면 일 안 된다는 그런 것, 이것 모세입니다. 백 프로입니다. 영웅심리에 미쳐버린 도취된 백 프로 모세입니다. 이것 숙소에서 죽어야 돼요. 아까 죽인다 했지요. 하나님이 죽여 버려요.
세상에 비 언약으로 해서 비 언약에서 탈출할 인간이 없었어요. 항상 언약이 와서 우리를 구원하지 비언약적인 인간이 자기가 열심 내서 비 언약에서 벗어날 수 없어요. 로마서 10장에 보면, 유대인들 보고, 너희들은 법을 지킨다든지 열심은 있는데 당최 하나님의 의는 모르고 기껏 자기 의만 챙기더라. 지키면 지킬수록 쌓이는 것은 자기 의만 쌓여요.
갈라디아서 2장에서 했잖아요. 만약에 인간이 율법을 지켜서 의로울 것 같으면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공연히 죽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공연히 죽은 게 아니라면 우리는 율법의 의를 버려야 돼요. 말씀 지켜서 의롭다는 걸 버려야 됩니다. 그래야 십자가 의만 부각이 되는 거예요.
언약이 오면 비 언약은 꺼져주세요. 그 비 언약 속에 누가 들어가느냐? 내가 들어가요. 내가 자책하고 스스로 판단하고. 왜 그런 짓 합니까? 난 너무나 잘못됐어. 원래 잘못 된 거야. 우리는 선을 나누는 자체가 잘못 됐어요. 선악과 아는 자체가 잘못 됐어요. 세상 잘못된 인간 보고 잘못 됐다고 하는 건 교만입니다. 원래 잘못 됐는데 뭘 새삼스럽게 잘못 됐어요. “주여, 내가 잘못입니다.” 원래 알거든.
비언약이 좀 비껴주셔야 언약이 부각이 됩니다. 우리 가정에, 우리 교회에 예수님의 피와 용서와 은혜와 사랑이 뜨도록 비 언약은 숨 좀 죽여줘야 돼요. 그런데 이 세상에 비언약이 나서서, “하나님이여, 제가 나서서 해방시키겠습니다.”
여러분 ‘구원’과 ‘해방’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사실은 같은 뜻인데 사람들은 구원을 원하지 행방을 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이라 하는 것은, 내가 있다가 좋은 데 가는 게 구원이에요. 해방은 갇혀있다는 뜻이에요. 내가 갇혀있다는 것을 인정을 안 하니까 해방이란 말을 싫어해요. 해방군이 뭡니까? 갇혀있었는데 외부에서 군대가 와서 우리를 갇혀있는 걸 옥문을 풀어 젖힐 때 해방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해방군이에요. 죄에 갇혀있던 사람이 더 이상 죄에 얽매이지 않게 된 신분 됐다고 풀어준 거예요. 주의 의가 있는 이상은 죄는 저리가. 율법을 묻지 않는 것은 죄를 묻지 않는 거예요. “율법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없어요.
문제는, 해방군은 반드시 외부에서 와요. 마태복음 10장에 나와요. 강도가 들어와서 가구를 훔쳐가듯이. 그 외부인 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내부인 모세를 외부인으로 바꿔요. 나이 팔십 넘어서 내부인이었던 모세를 이런 살인사건을 일으켜서 현상범으로 도망치게 만들어서 본의 아니게 외부인으로 만들어서 외부인 자격으로서 꾸역꾸역 자기 백성 건진다고 돌아오게 되죠.
개척교회 할 때 일가친척, 서 목사님, 일가친척이 몇 명 있습니까? 역시 외부인. 보통 개척교회 할 때 동생, 시누이, 올케 다 오지요. 복음 전하면 언젠간 돈만 내고 다 떠납니다. 돈 내는 것만 해도 어딥니까? 고맙지요. 실컷 전도해도 나중에 떠나버려요. 그야말로 인맥이라든지, 정, 그동안 돈 거래했던 것, 너 어릴 때 공납금 내주고 많이 돌봐준 것, 인간적인 정, 소용없습니다. 반드시 외부인이 옴으로 말미암아 이 외부인은 우리에게 이질적이죠.
그렇다면 모세가 내부인에서 외부인으로 바뀌면 그냥 거리만 바뀌어있으면 됩니까? 아니죠. 모세가 피 없는 남편에서 피를 발린, 피를 지닌, 피와 관련된, 피를 위한 남편으로서 외부인이 되어야 여기 있는 자기 백성을 건져낼 수 있습니다.
문제 나갑니다. 모세가 사람 때려죽인 것, ①잘했다. ②못했다. ③뭘 해도 못했다. 잘했다, 못했다는 선악적인 사고방식이기 때문에 일번, 이번은 정답이 아니죠. 사람 안 죽이고, 내가 참는다 해도 못한 거예요. 주의 뜻대로 성질대로 죽일 수밖에 없었고, 도망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그는 양 쳤을 뿐이고, 팔십 넘어서 하나님께서 떨기나무로 데려갔을 뿐이고, 그것도 형하고 같이 갔을 뿐이고, 오다가 숙소에서 죽을 뻔 했었고, 그 죽음을 푼 것은 피로 했고, 모세도 물에서 건진 것도 하나님이지만 죽인 모세를 피로써 건진 것도 하나님이라면 그 하나님의 피로 자기 백성 건지는 그걸 모세를 통해서 되풀이 합니다.
그래서 모세와 함께 있으면 산다 이 말입니다. 왜? 모세가 많이 얻어맞았으니까. 모세는 하나님한테 제대로 얻어맞았으니까 하나님과 함께 있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그들도 사는데 그들은 개인이 아니고, 집단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 잠 오고 하니까 찾지 않겠지만 출애굽기 끝에 보면 나와요. 모세가 시키는 대로 하면 네가 살고, 모세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너희들이 죽는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지금도 예수님 왔는데 아직도 모세 찾고 있어요. 한국교회도 아직도 주님 왔는데 십일조 이야기하고 있잖아요. 슬슬 출애굽기 윤곽이 벗겨지지요. 하지만 아직 멀었습니다. 이불 두께가 두꺼워서 한두 개 벗겨서 벗겨지지 않습니다.
이 모세가 도망을 칩니다. 도망을 치고 난 뒤에 가정을 꾸며요. 2장 21절에. 이 말은 뭐냐? 모세한테는 자기 민족을 구원하기는 물 건너간 거예요. 총각 때 남자 친구들 많지요. 하지만 결혼하게 되면 가정을 위해서,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서 친구들 하나, 둘 다 정리해야 됩니다. 결혼하고도 친구들 불러 다니면 가정생활 파탄 나지요. 남자가 가정을 꾸렸다는 말은 이제는 자기가 외부는 정리했고, 새로운 가정에 대해서 자기가 헌신해야 된다는 것을 간과한 겁니다. 이걸 주례사로 할까 하는데.
그런데 문제는 모세가 가정을 꾸몄다는 말은 더 이상 머리 속에 하나님도 없고, 여기 22절에 보면, “모세가 이름을 게르솜이라 해서 내가 타국에서 객이 되었음이라” 쉽게 말해서 날 잊어다오. 이 나이에 뭘 하리. 나는 가정을 꾸몄거든요. 뭔 뜻입니까? 나보고 일 시키려 하지 마라. 나는 내 가정 있으니까 더 이상 신경 못 쓴다. 조국의 해방, 나하고 상관없는 거다.
그리고 난 뒤에 23절에 보면,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 진도 팍팍 빨리 나갑시다.
모세는 잊어진 존재에요. 타인입니다. 모세는 찾지 마세요. 그때 괜찮았던 바로의 공주의 아들, 그건 있지만 이젠 그 사람은 죽은 사람이에요.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에요. 상관없음이 개입될 때 여기에 변명을 늘어놓지요. “모세야 가라.” “저 말 못합니다.” 자꾸 빼지요. 이것은 그렇다면 앞으로 모세가 일을 한다는 것은 결국은 모세의 자발적인 것이 있다, 없다? 전혀 없고, 모세의 재주, 모세의 지혜, 모세의 경건 아무짝도 소용없습니다. 모세는 자기 가정만 돌보기거죠.
전에 창세기 할 때 아브람이 뭐로 바뀌었습니까? 아브라함으로 바뀌었지요. 하나님의 언약은 축복하면 복을 받고, 저주하면 저주받는다는 것은 아브람이 아니에요. 누굽니까? 아브라함이에요.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이 되는 재주를 아브람이 부릴 수가 없어요. 자기는 아브람으로 계속 살고 싶어요. 아브라함이라는 넉 자 이름, 그것은 자기 생각도 아니고, 그럴 생각도 없고, 지금이라고 취소하고 싶고 이래요.
복음 전하는 목사님들이 설교할 때 꼭 이런 마음이에요. 주께서 주셔야 설교해요. 그냥 내가 하는 대로 하게 되면 이거는 내 애국심이고, 내 열심이고, 내 의가 되는 거예요. ‘주께서 주시면 하겠습니다.’ 아주 배짱 튕기죠. ‘주께서 말씀주시면 그때 전할게요.’ 어차피 죽은 놈이니까.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바뀐 것은 언약의 힘으로 오듯이, 우리가 구원받는 것도 새 언약의 힘으로 되듯이 상관없는 모세가 개입하는 것도 여기에 뭐가 작용하느냐? 하나님의 언약이 개입하게 됩니다. 언약이 개입하게 되면 모세는 누굴 닮게 되느냐? 예수님을 닮게 됩니다.
이번에 십자가마을수련회 할 때 교재를, 강의안을 올려놨잖아요. 그 강의안에 보면, “말씀 속에 종말이 들어있기 때문에 말씀을 외면해버리면 종말이후의 혜택을 받지 못한다.” 이래 놨어요. 모든 말씀에 종말이 들어있다. 종말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심판하는 거니까 성경말씀을 통해서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아야 돼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만 찾기 때문에 우리가 보기에는 예수님은 우리의 소망과 아무 상관없는 것이 돼요. 상관없는 분이 개입하게 되면 우리는 외부인이 되서 구원받는 겁니다. 제가 이 말을 왜 하느냐 하면, 앞으로 출애굽기 해석할 때 반드시 외부적인 것, 이질적인 것으로 보기 때문에 해석을 인간적인 해석은 금물이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역시 모세다. 역시 모세가 성실해.’ 이런 설교하면 큰일 나는 겁니다. 목사님들 설교를 보면 제일 어려운 게 뭐냐 하면, 어떤 본문을 가지고 십자가를 끄집어내는 게 제일 어려워요. 어떤 본문 가지고 십자가를 만약에 안 끄집어내면 행함이 나옵니다. “여러분, 다윗을 본받읍시다. 모세를 본받읍시다.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안 돼요. 이질적인 것, 낯선 것, 우리가 흉내 내지 못하는 그런 것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여러분들이 행하지 않더라도 말씀 속에서 나온 이질적인 것이 여러분들을 구원합니다. 이렇게 해야 그게 복음이지 만약에 설교를 우리가 열심히 해야 잘한다 하면, 나중에 설교 들으면 짐 가득지고 교회 계단을 내려가게 돼요. 적어도 교회 오면 세상근심 다 잊어버려야 돼요. 다 생각이 안 나요. “별 세계가, 이런 세계가 다 있나? 모든 게 은혜네. 내가 행한 것도 없는데 전부다 공짜네.” 이런 느낌이 와야 되지 계단 내려가면서, ‘말씀 안 들어서 오늘도 벌 받을 게 한 짐 남아있어.’ 이런 근심걱정 되어 내려가면 계단 내려가다 엎어집니다.
아무 걱정근심이 없어야 돼요. 물론 계단 내려가다 다 잊어버리죠. 계단 몇 개인지 모르지만. 그래서 내려갈 때만큼은 “아이고. 쓸데없는 것 가지고 걱정했구나. 걱정 안 해도 될 것 가지고 걱정했네.”라는 기분으로 가야 돼요. 그래서 설교에서 복음을 뽑아내야 상대적으로 행함이 없잖아요. 이질적인, 낯선 것 이런 웬 떡을.
그런데 출애굽 해석에서 일 번, 낯선 것으로 해석하는 방법이 있지만 출애굽을 보면, 우리도 할 수 있음으로 해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게 누구냐 하면, 바로에요. 히브리인들이고. 우리가 죽을 때가 없어서 홍해 강가에서 죽이느냐? 이렇게 나오죠.
그러니까 반드시 출애굽은 우리 역사, 우리 일생, 여러분들의 하나하나의 삶을 해석을 두 가지로 할 수 있어야 돼요. ‘우리가 할 수 있다’로 나가면 안 되고, 우리는 이렇게 해도 힘들기만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낯선 것이 우리를 이런 고민으로부터 해방시켜주는구나. 이게 반드시 우리 일생 가운데 둘 다가 나와야 돼요.
평생 우리는 이것도 나와요. 나도 할 수 있었는데. 그때 실수하지 말아야 했는데. 손님 하나 붙드는 건데. 만날 우리는 반성하는데 그것하고 상관없이 낯선 것으로 자기 일생을 과거를 해석해주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하나님 은혜구나. 이런 남편 만난 것도 복인 줄 알아라. 이것들아. 이런 아내 만난 것도 영광인 줄 알아라. 이것들아. 늘 이렇게 해석할 때 낯선 것, 그렇게 할 수 있어야 돼요.
광주에서 오 목사님 내외분으로 예를 들었어요. 오 목사님은 사모님을 볼 때 키 크신 여자 분이 왜 이렇게 반드시 주님을 통해서 받아들여야 되고, 사모님도 왜 이렇게 삐쩍 말랐는데 내 남편이지 통통한 남자 아니고. 모든 게 남편을 낯설 게 보자. 하나님의 선물로 보고 낯설 게 봐야지, 내가 잘했으면 이 남자 말고 저 남자 만났을 텐데. 행함이 들어가니까 그러면 사람 자체가 힘들어요.
코미디에 그런 게 있잖아요. 내가 초등학생들 환상을 다 깰 거야. 독한 것들에 나와요. 너희들 엄마가 백점 맞으라고 백점 맞으면 안 된다. 기대치만 높인다. 나중에 백점 맞는 걸 당연한 걸로 여긴다. 절대로 육십 점만 맞아야 되지. 한 것처럼 자기 자신의 기대치를 낮추세요. 한 번 잘했다고 다음에 잘할 수 없어요. 그거는 우연입니다. 어떨 때 기도 잘 될 때 있지요. 우연입니다. 백 프로 우연이기 때문에.
뭐든지 자기는 못 낫고, 죄만 짓고 항상 이렇게 생각해야 그래서 정상적으로 살아가는 걸 보니 감사하게 되죠. 낮은 만큼 감사의 폭이 많아지게 됩니다. 모세가 바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지요. 모세는 낯선 길로 갑니다. 정말 엉뚱한 길로 가요. 그 시작을 3장에 봅시다. 지금까지는 모세가 가정 꾸리고 잘 있었는데 3장에 보니까 산에 올라가니까 거기에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하나님이 나타났다 이 말이죠.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가로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는 동시에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에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2~5)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모세가 어디로 도망쳤습니까? 애굽을 벗어나서 떨기나무 쪽으로 약속의 땅으로 왔지요. 나중에 약속의 땅이고 가나안 땅으로 왔지요. 자기는 도망쳤지요. 누가 좇는데? 애굽이 달려드니까 도망친 게 맞지요. 그런데 불러낸 거예요. 해석의 차이가 뭐냐 하면, 내 행함으로 보면 도망친 게 되고, 하나님의 낯선 것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불러낸 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교회 온 게 아니고 주께서 불러내신 거예요.
여러분들이 천국 가는 게 아닙니다. 천국에서 여러분들을 끌고 가는 겁니다. 천국에서 로봇 팔이 나와서 여러분을 모가지를 쥐고 질질질 끌고 가는 겁니다. 해석을 그렇게 해주세요. 모세는 정신없이 와버렸는데 그 모세 있는 자리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서 하는 말이, 네가 있는 곳으로 너의 백성들도 이 자리로 불러 모아라.
그게 어디 나오느냐? 3장 12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자기는 멋도 모르고 왔는데 그 고장에 있는 산에서 하나님께서 장차 백성을, 이스라엘 집단을 불러내기 위해서 모세로 하여금 이곳에 들리도록 조치를 하는데 애굽 사람을 쳐죽이는 방법을 통해서 조치하는 거예요. 전 이것을 하나님의 횡포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 개입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당황스럽게 만들어요. 내 뜻으로 아니고 당황스럽게 하는데 나중에 보니까 “수고했어. 이것들아. 너희들이 수고가 많다.” 이러고 박수치고 있더란 말이죠. 우리는 허겁지겁 사는데 이것은 예정된 코스야. 느긋하게 하는 거예요.
마치 우스개 소리로 이렇습니다. 오늘은 양식을 먹어볼까, 오늘은 한식, 중식을 먹을까? 갑자기 소나기가 와서 ‘아무데나 들어가자’ 하고 짜장면 집에 들어가니까 하나님께서 박수치면서 ‘네가 수고가 많다. 비 피하느라 수고가 많다. 원래 넌 짬뽕 먹게 돼있어.’ 한식, 양식 그렇게 생각했는데 비 한 방울, 소나기 오니까 어쩔 수 없이 중국집 들어갔는데 거기에 주님께서 주방장하고 있더라. “내가 맛있게 요리해줄게.” 그게 오늘날 저와 여러분의 형편입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목사님 어떤 사람은 잘 살고 우리는 못 삽니까?” 하는데 하나님 앞에서 잘 살고 못 살고는 아무 의미 없어요. 하나님이 함께 있는 곳에 와 있다가 중요하지 잘 산 채 와있던지 거지꼴로 와있던지 관계없이 누구와 함께 있느냐가 중요한 겁니다.
지금 애굽에서 불러낸 그 집단은 하나님이 함께 있어요. 그게 중요해요. 그들이 얼마나 못났는가, 그들이 인구수가 몇 명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동행한다는 그 점이 중요한 겁니다. 모세야 내가 너와 함께 그들을 불러낼 테니까 이번 인도하는 것은 모세, 네가 하는 게 아니고 너와 함께 가는 내가 더불어 내 백성을 불러낼 것이다. 너는 목격자 노릇을 해라. 못 알아들어요. 말 잘하는 사람 불러줘라.
그러니까 아론으로 엠비씨 앵커로서 세워놓고. 엠비씨 뉴스 할 때 사건 앵커, 자기가 일으켰습니까? 아니잖아요. 하나님이 사건 일으키고 원고 읽고 하는 것은 아론이 하고, 모세가 하고. 오늘날 목사하고 여러분이 하는 겁니다. 그것도 못하면 안 되지요. 내가 했으면 자랑인데 내가 한 게 아니잖아요. 내 믿음 좋다. 이런 것 자랑하지 말고 그런 건 원고에서 빼고, ‘주께서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사 죽으시고 그 죽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습니다.’ 이런 멘트를 날려줘야 한다 말이죠.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13절에 보면 약간 어려운 게 나오죠.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갑자기 하나님이 보냈다 하면 보낸 거지 이름을 왜 묻느냐? 결국은 하나님은 뭐가 없는 하나님? 이름이 없는 하나님. 맞잖아요. 이름이 없는 하나님이 갑니다.
그러면 이름은 누가 불러줍니까? 이름은 앞으로 채울 거예요. 뭐로? 기발한 사건과 사건이 뭘 만들어낸다? 새로운 이름의 등장. 이런 사건 처음이다. 이런 여호와 이름은 처음이다. 여호와 이름이 그냥 사건 없이 이름이 여호와 같으면 그렇고 그런 이름 중에 하나에요. 옷의 메이커가 얼마나 많습니까? 하여튼 옷 이름이 그렇게 많은데 김혜수가 입었던 옷 하면, 이건 사건이 되는 거죠. 영화배우 김혜수가 입었던 원피스 하면 사건 되죠. 김혜수 사인이 있는 옷, 사건 되죠. 그러면 그만그만한 옷에서 갑자기 특별한 옷으로 부각 됩니다.
이름이 없어요. 이름은 사건을 일으킬 때마다 여호와 이름으로 사건을 유발시켜서 그 사건이 모아모아서 이름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 이름으로 구원 못 받아요. 예수란 분이 나에게 낯선 사건을 일으킬 때 자기가 사건을 믿는 사람은 예수 믿어도 구원받아요. 말해도 어렵다.
예수란 이름은 여호수아 그냥 이름입니다. 하지만 그 예수님이 진짜 구원자 되려면 그 예수로 인하여 내 인생이 달라져야 돼요. 달라져서 ‘난 예수님 아니면 난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라는 고백이 있을 때 비로소 그 사람 속에 예수는 의미 있는 예수가 됩니다. 십자가 사건에 의해서. ‘비로소 내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죄인인 줄 몰랐는데 예수님 십자가 보니까 내가 죄인 맞구나’ 하는 놀라운 변화가 ‘나는 예수만으로 살겠다.’ 예수가 새로운 의미로써 담기는 겁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기도해도 예수 이름으로, 살아도 주의 이름으로 살지요. 그게 예수의 증인되는 겁니다. 자기의 증인되지 않고. 그 사건이 또다시 출애굽 사건이 바뀌는 겁니다.
이름이 없는 이름은 어떻게 됩니까? 괄호로 비워놓죠. 이름 대신 뭐가 오느냐? 언약이 옵니다. 언약이 무슨 언약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을 지상에 실현시킴으로 말미암아 ‘도대체 이런 사건을 일으키는 분이 누구냐?’고 되묻는 방식으로 그때야 여호와 하나님이 등장합니다.
왜냐? 지금 애굽에서 벌였던 그 여호와 하나님이 애굽을 벗어나서도 여호와 되기 위해서는 애굽에서 혼나는 애굽에서 저주와 축복을 가름하는 큰 사건을 유발시켜놔야 이 애굽에서 있었던 사건에 나중에 여리고 성에 있는 기생 라합의 마음을 흔들어서 이스라엘이 오기도 전에 미리 앞장서서 ‘나는 해방군 맞이합니다.’ 해서 붉은 줄로 기생 라합은 구원받았잖아요.
구원받고 난 뒤에 야고보서 2장에 보면, 아브라함하고 기생하고 맞먹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 예를 들 때 아브라함이 아들 바친 것 하고, 기생 라합이 거짓말 한 것 하고. 보세요. 맞먹잖아요. 하늘나라 맞먹습니다. 비록 기생이라도.
애굽에서 여호와 사건이 애굽에서만 끝난 게 아니고 그 다음에 광야나 약속의 땅에서 그걸 반복하고 되풀이하고 오늘날 2009년에도 구원의 방식이 오늘날 울산 바닥에서 되풀이 될 때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다른 이름은 없고, 무슨 이름? 옛날 애굽에서 그런 일을, 그런 사건을, 그런 큰일을 벌이신 그분의 이름으로 십자가 지신 그분의 이름으로 우리는 구원받는다. 이 고백이 바로 오늘날 우리에 주님이 담겨있는 내용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힘으로 구원이 안 되는 걸 우리가 너무 잘 압니다. 이대로 주저앉을 수도 있는데 그곳이 있답니다. 천국이 있답니다. 있기는 있는데 갈수는 없고 주께서 우리에게 사건 일으켜서 주의 피를 묻게 하시니 이 은혜를 평생 보물로 여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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