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6월 12일 에베소서 6장 10절
서울 6월 12일 에베소서 6장 1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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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612 전신 갑주와 사59장 메시야의 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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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6-13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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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6-21 16:06
서울090612a엡6장10절a
에베소서 제 37강 (이 근호목사, 2009년 6월 12일-(1), 서울의존교회)
에베소서 6:10-13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방금 읽은 이 대목중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혹시 우리가 대하사극의 엑스트라로 출연하게 된다면 우리는 눈이 있고 팔이 있기 때문에 갑옷을 걸칠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영적 갑옷을 입으라고 한다면 이것이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촬영대본대로 엑스트라 1(백제군사1), 엑스트라 2(신라군사1) 이런 식으로 각자의 갑옷을 입고 ‘감독의 액션 사인이 나면 대본대로 이쪽에서 저쪽 방향으로 뛰어라’ 라고 할 때 ‘뛰겠습니다’ 라고 하고 실제 촬영에 들어가면 뛰게 되겠지요.
여기가 촬영장이라고 해 봅시다. 여기에 카메라가 위치하고 있고 여기 셑팅된 장소에 엑스트라 군사1과 군사2가 있습니다. 촬영이 시작되고 갑옷을 입은 엑스트라들이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뛰었다면 이것은 뭐가 뛴 겁니까? 이것은 육, 인간의 육체가 뛴 것이죠. 인간이 할수 있는 것이 이것 밖에 없어요. ‘갑옷 입고 뛰어라’ 하면 뛰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라’ 라고 하면 도대체 이것이 무슨 말인지…? 또 14절에 보면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라고 하면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집사님은 허리사이즈가 얼마입니까? 한 35쯤 됩니까? 그러면 집사님이 시장에 가서 자기 허리에 맞는 띠 띨 수 있어요. 그런데 그것말고 ‘진리로 허리띠, 혹시 있습니까?’ 한다면 ‘아저씨는 어느 별에서 왔습니까?’ 하든지 ‘꺼져’ 라고 할거예요.
오늘 성경말씀에 나오는 이야기는 전혀 우리가 해 낼수가 없는 이야기입니다. 해낼수 없는 것은 그냥 해 낼수 없다, 그러면 됩니다. 하지도 못할 주제에 이대로 한다고 철야기도 하는 식으로 나온다면 그것은 속임수입니다. 목사가 교인들 속이고 자기자신도 속이고 서로 속이고 모두 속이고 그저 남는 것은 시장에서 가서 허리띠 하나 사서 맨 것 빼고는 아무것도 없어요.
‘나는 진리로 허리띠를 매었다.’ ‘그러면 그 허리띠 좀 모자. 헐, 진리가 세모네. 그게 무슨 진리허리띠냐?’ 본문에 이런 말씀도 나옵니다.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라고 하는데 신발 몇 미리 신습니까? 나이기사이즈 얼마 신지요? 대충 종이 오려서 신발 모양으로 만들어놓고 거기에 ‘평안과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라고 써놓고 신어보세요. 그게 과연 그러한가?
그것 가지고 절에 가서 ‘사탄아 나와라. 한 판 붙자’ 하면 절에서 그럴 겁니다. ‘신발이 아깝다.’ 이것은 당최 인간이 지킬수 없고 흉내도 낼 수 없는 겁니다. 그러면 이 말씀이 왜 있는가? 안 된다는 것을 이야기하려고 있는 겁니다. 어설프게 흉내조차 내지 말라는 뜻입니다. 안되면 안된다고 하지 왜 되지도 않는 성경말씀을 왜 지키려고 그토록 설쳐대냐 이 말이죠.
지키지도 못할 것을 괜히 지켰다고 나대면 자기 자존심만 높아질 뿐이지 남는 것이 뭐가 있어요? 평안의 흉배를 붙이는 것이 아니라 교만의 흉배를 붙이는 격입니다. 지키지도 못한 것 지켰다고 혼자서 착각하면 남는 것은 자기가 교만한 것밖에 남는 것이 뭐가 있습니까? 남는 것은 교만 뿐입니다. 영적 싸움에서 교만하면 마귀만 좋~다, 합니다.
안되는 겁니다. 또 봅시다. 안되는 것만 계속 보면 재미있어요. 17절에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성령의 검’ 이라고 하니까 언뜻 무엇을 생각하느냐 하면 <스타워즈> 에피소드시리즈에 나오는 광선검을 떠올립니다. <주몽>드라마에 보면 털보아저씨가 강철검을 만드는데 성령의 검은 누가 만듭니까? 본인이 만듭니까? 누가 줘야 받지요.
게다가 투구를 쓴다고요? 카우보이 모자를 쓴다고 하면 이해되지만 이것도 역시 우리는 안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고 했는데 이것은 성경을 아예 찢어서 우리 몸에 도배하고 문신처럼 새겨넣는다고 해도 그것은 말씀을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말씀을 가질만한 장치가 우리맘에는 없어요.
이것은 몸은 몸이로되 우리 몸이 아니고, 육이 아니고 그리스도 몸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 비슷한 대목이 이사야 59장에 보면 나와요.
이사야 59:16-18
“사람이 없음을 보시며 중재자 없음을 이상히 여기셨으므로 자기 팔로 스스로 구원을 베푸시며 자기의 의를 스스로 의지하사 의로 호심경을 삼으시며 구원을 그 머리에 써서 투구를 삼으시며 보수로 속옷을 삼으시며 열심을 입어 겉옷을 삼으시고 그들의 행위대로 갚으시되 그 대적에게 분노하시며 그 원수에게 보응하시며 섬들에게 보복하실것이라”
이 모든 것이 누구에게만 해당되느냐 하면 여호와에게만 해당되는 겁니다. 메시아가 나서서 적들을 쳐부수는데 이때 메시아가 나서서 쳐부수는 적은 죄송합니다만 우리의 적이 아닙니다. 누구의 적인가? 메시아만 알아보는 적입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요. 오직 예수님만 알아보는 적입니다. 다른 사람은 적이 있다고 해도 ‘적이 맞습니까? 원수 맞아요?’ 라고 의심할 정도로 너무나 착하고 훌륭한 사람들입니다.
다만 그 사람들은 예수님한테만 적으로 제대로 보이지 다른 사람한테는 친구로 보이고 다른 사람 눈에 보기에는 그들이 예수님의 적이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하게 되어 있어요. 정리해봅시다. 적이 있는데 누구의 적이다? 예수님의 적이다. 그러면 그 적의 처리방법이 있는 그 처리 방법도 누구만 안다? 메시아만 안다. 적도 메시아를 알고 메시아도 적을 아는데 누가 승리하고 누가 패배할 것인지 그 처리의 방법도 메시아만 알고 있어요.
그렇게 처리해서 메시아가 승리한 그 전리품, 또는 포로를 가지고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사람들은 육이니까 육은 적을 못 알아봅니다. 아무리 예수님이 싫다고 해도 아랑곳 않고 ‘우리는 좋~다’는 식으로 합니다. 그저 돈만 몇 푼 더 쥐어 주면 ‘아이고, 천사시군요’ 라고 하면서 우리는 정신을 못 차리고 좋아해요.
자기한테 잘해주면 동지요 자기한테 해코지 하면 원수가 되는 것이 인간육체의 특징입니다. 안산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그게 너무 괜찮아서 여기에 적어보겠습니다. 인간이 살면서 하루 종일 행동하는 그 모티브가 뭐냐? ‘누가 나를 힘들게 하느냐?’ 이것이 아침에 눈 뜨면서도부터 저녁에 잠들 때까지의 삶의 모티브입니다.
해가 지고 잠들고 나면 그때는 꿈꾸느라고 바쁘겠지만. ‘칼 구스타프 융’(1875-1961)이라는 사람이 꿈을 연구했는데 꿈의 특징이 뭐냐 하면 꿈에는 절정의 위기가 있다는 겁니다. 꿈은 깨고 나면 뭔가 아슬아슬한 상황만 기억에 남아요. 다른 내용은 기억이 안납니다. 뭔가에 쫒기면서 ‘아, 여기서 나는 죽는가보다. 이것이 꿈이었으면 좋겠다’ 했는데 꿈에서 깨고나니까 ‘정말 꿈이었구나’ 라고 된다는 겁니다.
뭔가는 아슬아슬한 위기의 상황에서 9회말 역전홈런으로 승리해서 즐거운 것, 이런 것이 꿈으로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하루종일 살면서 육신이 내부적으로 감추고 싶었던 것을 감추지 못한채 그것이 꿈으로 나타나는데 그 감추고 싶은 것이 뭐냐 하면 ‘누구든지 나를 힘들게 한다면 나는 못산다. 제발 내 주변 사람들이 나를 힘들게 하지 말고 나를 행복하고 즐겁고 재미있게 해줬으면 좋겠다’ 라는 겁니다.
‘왜? 나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기에. 나는 무조건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났기에 만일 내가 원하는 사랑과 내가 바라는 행복이 없다면 그것은 나를 힘들게 한다.’ 따라서 하루 종일 24시간 걱정하는 내용은 ‘나, 힘들면 어떻게 하지?’입니다. 사랑받고 싶고, 힘들면 싫고, 그저 나를 위로해주면 좋고, 이것이 육의 본성이라면 이 육에서 나오는 원수의 정체란 뭘까요?
나의 욕망을 죄라고 규정하고 나의 욕망을 훼방할 때 그 전부가 원수가 되는데 그 원수중에 누가 들어 있습니까? 메시아가 들어있죠. 한편으로는 예수님께 기도하면서도 주님이 나를 힘들게 한다고 여겨지면 ‘나도 참을 만큼 참았는데 이제 더 이상 못 참습니다. 이러다 교회 안 나갈 수가 생길 수 있다’ 는 식의 협박근성, 이것이 육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주님께서 왜 우리를 보고 싸움을 하지 않는지를 알겠지요? 차라리 원수를 동원해서 자기 전쟁을 하라고 하세요. 우리 육체가 이미 예수님과는 반대성향을 가지고 원수노릇을 하고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우리와 의논해서 우리를 건지지는 않습니다. 일방적으로 예수님 본인이 아는 적을 본인이 처리해서 그 승리한 선물을 우리에게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졸지에 구원받은 사람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출애굽에 나오지요. ‘여호와는 용사시니 우리가 주의 승리로 말미암아 주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에 원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원수는 하나님이 아니고 그 원수를 처리하는 방법도 하나님이 아시고 사람이 끼어들지 못하고 구원받는 사람은 그 승리의 혜택만 염치 불구하고 받았을 뿐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어떤 사람은 ‘그러면 우리보고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말인가?’ 라고 반문하지요. 우리는 아무것도 안하고 있는 그 순간에도 나밖에 몰라요. ‘누구야? 누가 오늘 나를 힘들게 했어?’ 이것만 계산하는 겁니다.
‘나를 힘들게 한 것이 영업과장이야? … 내 남편이 나를 힘들게 하는 거야? … 너 또 공부 못했지? 엄마가 공부 잘하라고 했지? 왜 공부 못했어. 왜 엄마를 힘들게 해 … 고작 월급이 이게 다야? 내가 당신보고 결혼했는데 이렇게 나를 힘들게 할거야?’ 교회 목사 같으면 ‘당신은 왜 다른 교회를 갑니까? 내가 당신한테 투자한 것이 얼만데 이 교회를 버리고 다른 교회를 갑니까? 왜 당신은 나를 힘들게 합니까?’
각자각자 관심가지고 기대하는 것이 뭐냐 하면 ‘나를 힘들게 하지 말라’ 는 그것입니다. 주님이 적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하고 의논하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일을 처리함으로 말미암아 ‘나의 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네가 나의 적이었어’ 라고 일러줌으로 말미암아 ‘네가 구원받은 것은 내 공로야. 나 예수님의 공로지 네가 나에게 협조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야’ 라는 소리만이 악령을 이깁니다.
그것만이 마귀를 이겨요. 쉽게 말해서 ‘저, 마귀 못 이깁니다’ 라는 소리가 이미 마귀를 이겼다는 표시입니다. 마귀가 하는 말이 ‘너 나하고 붙자.’ ‘나는 너를 벌써 이겼거든.’ ‘네가 언제 나를 이겼어?’ ‘나는 못 이기지만 우리 주님이 이겼거든.’ 그것이 마귀를 이기는 우리 주님의 유일한 방법입니다. 다른 방법을 내세울 때는 거짓말이 백퍼센트입니다.
예수님께서 마귀하고 싸운 것은 ‘너 자신을 알라’ 고 하신 겁니다. ‘네가 누구 때문에, 어떻게 해서 구원되었는지 그것을 알라’ 하는 겁니다. 이렇게 보시고 오늘 읽었던 본문을 다시 보시면 이제 이해가 되실 겁니다. 12절에 보면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달리 이야기하면 누구에 관한 것이 아니요? 나하고 관련한 것이 아니고 ‘정사와 권세와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의 악한 영들에 대함이라.’
그런데 13절에 보면 하나님의 뭘 취하라?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하나님의 전신갑주는 누가 만든 겁니까? 예수님이 홀로 만든 겁니다. 그래서 전신갑주의 모든 장치, 투구, 신발, 흉배, 허리띠 이 모든 것은 다 그 제조원이 어디입니까? 메이드 인 차이나? 어디서 만든 거예요? 예수님께서 홀로 다 만들어서 ‘입기나 해라. 입기나 해’ ‘제가 좀…’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고 입으면 마귀는 알아본다. 입는 것도 못하나! 공짜로 입는 것도 못해?’
다음 주에 어떤 분의 결혼식이 있습니다. 그런데 결혼 전에 웨딩드레스를 먼저 입어보지요. 그런데 그런 신부가 있습니다. ‘저는 그냥 평상시에 입는 원피스같은 걸로 할래요. 이 웨딩드레스 못 입겠어요. 가슴 다 나오고 이것은 부끄러워서 못 입겠습니다.’ ‘그냥 입기만 해요. 꾹 참고.’ ‘넘사스러워서 못입겠어요. 저는 그냥 청바지 입고 나가겠어요.’ ‘그냥 입기나 해!’
왜 그날만큼은 웨딩드레스를 입어야 하느냐 하면 특별히 그날 신랑이 그 드레스를 맞춰줘서 신랑 폼내라고 신랑의 영광을 위해서, 신랑의 자존심을 위해서, 신랑이 자기를 배려한 신랑의 사랑, 신랑의 격에 맞도록 신부가 아름답게 꾸며야 된다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21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하늘나라에서 신부가 내려오는 그 신부의 단장은 누가 했다? 신랑이 자기 영광의 격에 맞도록 신부를 단장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신부는 그냥 입기만 하면 자기 폼내라는 것이 아니라 누구 폼 내라고? ‘와, 신랑하나 잘 만났구먼’ 그거 하나 자랑하라고 우리에게 아름다운 웨딩드레스를 입혀주는 거예요. 그래서 마지막에 혼인잔치가 거행되거든요. 그 혼인잔치를 미리 당겨서 우리가 하는 거예요. 나의기도, 나의 헌금, 나의 전도 그런 것 걸쳐서는 마귀를 못 이깁니다.
주님의 기도, 주님의 믿음, 주님의 사랑,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모든 것을 주렁 주렁, 그것은 내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이니까 마음껏 주님의 것이라고 자랑하면서 달고 다니면 그것이 마귀를 이기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100퍼센트 그것밖에 없습니다. 할 것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입기만 하세요.
나중에 강의 끝나면 또 엉뚱한 생각을 하기 때문에 아예 적어놓겠습니다. ‘입기나 하세요.’ 갈라디아서 3장에 나오지요. ‘누구든지 예수의 옷으로 입은 자는 성령을 받은자라서 하늘나라에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자기 행한 것 자랑하지 말고 자기가 걸치고 있는 것을 자랑하세요. ‘이것은 우리 주님이 주신 거거든. 색깔 좀 나오지? 이 투구 좀 봐. 상당하지? 이 신발도 좀 봐봐. 갑옷은 또 어떻고. 파스텔 톤으로 해서 오렌지 빛깔로 해서 잘 나왔잖아.’
안 믿는 사람은 뭐라고 하겠습니까? ‘네가 바로 동화에나 나오는 벌거벗은 임금님 같다.’ 벌거벗은 임금님 알지요? 아무것도 안 걸쳐 놓고는 그걸 걸쳤다고 하니까 곧이듣잖아요. 성령을 받은 사람은 벌거벗은 임금님이 먹은 욕과 같은 욕을 먹을 각오를 해야 됩니다. 왜? 육에 속한 사람들은 우리가 걸친 것이 눈에 안보입니다. 괜히 헛소리하는 것처럼 들릴 거예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할 때 사도바울을 그 당시 사람들이 욕을 했어요. ‘사도바울아, 그런 소리를 하지 말고 실적을 내놓아라. 교회가 몇 명이 부흥이 되었다든지 헌금이 얼마나 걷혔다든지, 세상에 나가서 취직을 해야 된다든지, 아들을 못 낳아서 걱정을 했는데 아들을 낳았다든지, 결혼 못하던 노총각이 결혼을 하게 되었다든지 이런 복받은 실적을 내 놓으라’고 자꾸 이야기를 하지요.
인간들이 원했던 실적은 마귀도 원했던 실적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마귀를 이기는 것이 아니고 마귀와 친구가 되고 단짝이 되는 축복관이죠. ‘나는 교회 다녔더니만 몸이 나아졌어.’ ‘그랬구나.’ ‘그렇다면 당신은 그 몸 나은 것을 가지고 맘껏 자랑해라.’ 이것이 마귀의 소리입니다. ‘교회가서 기도했더니 간암이 나았다.’ 이런 실적이 마귀가 원했던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말기 암에서 나았다고 자랑하자마자 사흘 뒤에 교통사고로 죽게 만들어 버립니다. 예수님의 공로가 나를 구원하지 병이 나았다는 이런 훈장 같은 것은 가져다 버릴, 아무것도 아닌 겁니다. 이것 가지고는 악마를 이길 수가 없습니다. 왜 이 전쟁은 우리로 하여금 아무것도 못하게 하고 싶어도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냥 종일토록 ‘나를 힘들게 하는 자 누구야’ 라고 하면서 성질만 부리면서 사는 우리를 그냥 덧입혀 주는 주님의 공로로만 덥석 크레인처럼 잡아서 천국에 집어넣는 방식, 왜 이런 방식을 하나님은 사용하는 겁니까? 조금이라도 감사하고 찬양하고 그러면 ‘와, 착하다. 대단하다. 훌륭하다’ 이런 칭찬들이 있을 것인데 주께서는 그런 칭찬도 없고 ‘그렇게 해 봐야 자기 본성이 사라질 것 같은가? 착각하지 말라’ 라고 하십니다.
교회 나오고 은혜 받았다고 해서 그 육의 본성은 죽을 때까지 없어지지 않습니다. ‘내가 이 교회에 헌금을 얼마나 했는데. 나만 건드려 봐라. 이제는 목사도 겁나지 않는다. 이 교회는 내가 유지한다. 내가 돈 안내면 이 교회 유지 안 된다.’ 이런 생각이 자연스레 들기 마련입니다. 성경이 이런 말씀을 했어요. 누가 오른뺨을 때리거든 어떻게 하라고요? 왼뺨도 내놓으라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이죠.
그런데 어떤 육의 무식한 사람은 오른뺨을 때리니까 진짜 왼뺨을 내놓고 맞는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은 두 대 더 맞아야 돼요. 아직 정신을 못 차렸어요. 모든 성경은 못 지킨다고 하는 소리입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도 ‘네가 할 수 없는 일을 내가 혼자 한다’ 는 뜻입니다. 흉내도 내지 말라는 말입니다. 왼뇌와 오른뇌 사이에 뇌량이 있어서 서로 서로 정보를 다 압니다.
‘오른뺨 맞으면 왼뺨 내 놓으라’ 는 것은 ‘너는 오른뺨이든 왼뺨이든 다 맞아도 구원받는데 지장 없다’ 그 말입니다. 내가 해석해도 속이 시원합니다. ‘마음속으로 간음하지 말라’는 그 말은 ‘너는 백날 해 봐도 못지킨다’ 하는 겁니다. 그런데 백날 가봐야 못 지켜도 구원받는 것은 다른 동네에서 실시한 것으로 구원받지 지킨다고 구원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마음속으로만 간음해도 간음이다’ 라는 그 말씀을 봐야 ‘구원은 육으로서 되는 것이 아니구나’ 라는 것을 실감할 것이 아닙니까? ‘구원의 갑옷을 쓰라.’ 쓰기는 뭘 씁니까? 안그래도 더워죽겠는데 뭘 뒤집어 쓴다는 말입니까? 그런 말씀 하나 하나가 ‘너는 이미 영적 세계에 사로잡힌 자 되었다’는 말입니다.
혹시 마귀가 너를 물으러 가거든 ‘아하, 나를 알아보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쓰게 하신 그 구원(의 투구)으로 인하여 나와 함께 계신 주님을 알아보고 물려고 하는 구나’ 라고 이해하라는 겁니다. 이솝우화에 이런 것이 있어요. 여우가 가는 곳마다 동물들에게 인사를 받아요. 나중에 알고 보니 여우에게 인사하는 것이 아니고 여우 뒤에 있는 사자에게 인사하는 거 였습니다.
그런데 여우가 못 돼먹어서 자기보고 절하는 줄 아는 거예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을 다 이루신 예수님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는데 우리는 자기솜씨 부릴 요량으로 교회 나오고 자기 잘남을 과시하기 위해서 교회 나오는 경향이 있어요. 지금까지는 여러분이 다 아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제부터는 여러분이 모르는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왜 주께서 일방적으로 전쟁을 이런 방식으로 해야 되는지에 대한 구약의 근거가 있어요. 왜 주님께서는 육이 된 우리를 일방적으로 하신 자기일로서 건지시는 이유가 뭐냐? 그 이유를 좀 어렵게 이야기할게요.
‘시형제결혼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여기서 ‘시’ 란 시댁(媤宅)이라는 뜻의 글자입니다. 형제가 많이 있는데 그 중에서 큰 아들의 아내가 아들 없이 죽었거든 그 죽은 큰 형님의 여자는 그 아래의 동생하고 결혼을 해야 된다는 법입니다. 동생들 전부하고 결혼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형수가 시동생과 결혼해서 자식을 낳게 되면 그 자식은 씨를 준 그 시동생의 자식은 되지 못하고 죽은 형님의 아들이 되는 법이 ‘시형제결혼법’입니다.
이것과 영적전쟁, 이것과 구원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일단 누가 죽었습니까? 형님이죠. 그러면 형수는 죽은자의 아내가 됩니다. 형은 죽었는데 아내는 살아 있어요. 하지만 이 아내는 죽은자의 아내입니다. 남편은 죽어도 아내가 살아 있다면 아내는 남편을 위해서 죽은 자의 자식을 생산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나온 이 자식은 산자의 자식이 아니고 죽은자의 자식이 됩니다. 죽은자의 자식이 나오면 놀라운 것은 이 죽은 형님이 죽은자의 자식으로 인해서 그 가문속에서 안죽고 살아 있는 존재로 출몰하게 되는 겁니다. 그 가문의 이름이. 이것은 쉽게 할 수가 없습니다.
보통 세상은 산자들의 세계인데 하나님의 구원의 세계는 이렇습니다. 산 사람들이 하는 말이 ‘저 사람은 죽었으니 우리 세계 밖이다’ 라고 추방하는 그 죽은 자의 세계가 산자의 세계를 몰아버리고 죽은 자가 이 산자의 세계를 독차지 하는 거, 그게 바로 구원입니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교회 나와서 예수 믿고 구원 받는다’ 이 말을 ‘내가 예수 믿으면 내가 죽어서 천국간다’ 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이런 사적인 구원을 이야기하잖아요. 그런데 구약성경에는 사적인 구원이란 전혀 없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살고 싶어서 기독교의 성경구절을 몇 개 잡아당겨서 만든 것이지 성경에는 아예 개인적구원이란 없습니다. 성경에는 집단구원이고 그 집단구원이란 가문구원입니다. 그 최초의 가문은 아브라함입니다. 모세도 레위지파인데 아브라함허리에 이미 들어 있습니다. 아브라함가문은 열두가지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14만 4천이 나오지요. 요새 신천지집단이 유행처럼 이것으로 뜨고 있는데 그 14만 4천이 뭐냐 하면 열두가지가 열두가지를 가지고 천번 새끼를 친 결과물이 14만 4천입니다. 열둘, 열둘, 열둘, 계속 새끼를 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지정한 가문이 아니면 천국에 갈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집단구원이고 단체구원이지 개인구원은 없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 150년 역사동안 다 개인구원으로 알고 있으니까 제가 여기서 집단구원을 설명한다는 것이 너무 어려워요. ‘목사님, 그런 소리 하지 말고 내가 뭐 하면 구원받을지, 그거나 알려주세요’ 만날 ‘내가 뭐하면 구원받습니까?’ 그러면 저는 ‘당신은 할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지요. 왜요? 집단구원이거든요.
‘나는 아무것도 할 것이 없습니다’ 라는 말과 ‘집단구원이기에 할 것이 없습니다’ 라는 말이 잘 연결되지를 않아요. ‘아니, 나도 그 집단인데 뭔가 보탬이 되어야 할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제가 이야기합니다. ‘그 집단이 당신집단 아닙니다.’ ‘내가 속했는데 왜 내 집단이 아닙니까?’ ‘그 집단은 죽은자의 집단입니다.’
신약에 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서 십자가 저쪽 세계와 십자가 이쪽 세계가 나누어 졌습니다. 한 목사님께 여쭤보겠습니다. 거울 속에 들어가 보셨습니까? 거울을 비추는 것이 아니고 거울 속에 들어가 보셨어요? 거울 속에 들어가는 동화가 있습니다. 영국의 수학자가 쓴 동화인데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라는 영화인데 그 영화에서 거울 속에 뛰어 들어갑니다.
거울 속에 못 들어갑니다. 거울 속에 들어간다면 그것은 괴기영화, 혹은 판타지영화가 되지요. 엽기영화, 텔레비전에서 특히 여름철에 긴 머리 아줌마 나오는 것 있지요. 특히 일본 괴기영화가 무섭습니다. 갈라디아서 6에서 보면 ‘십자가로 인하여 세상은 죽었고 그 세상은 우리를 죽은자로 보고 십자가안에서 보면 너희는 이미 죽은자’고 십자가를 사이에 두고 서로 서로 죽은자래요.
갈라디아서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죽은 자에 의해서, 산자가 죽었던 분의 세계에 들어가서 죽은 자에 합세해서 구원받습니다. 다니엘 세친구가 어디에 들어갔습니까? 불속에 들어갔지요. 그러면 불속에 들어간 세친구는 불속에 들어갔으니까 다른 말로 하면 죽음 속에 들어갔지요. 그러면 이번에는 불속을 들여다 봅시다. 불속에는 아들같은 분이 있어서 그분과 강강술래를 하고 있었지요.
그러면 세 사람이 들어갔는데 합쳐서 몇 명이 되었다? 네 명이 되었지요. 불속에서 저쪽을 보세요. 우리는 불속에 들어와서도 산자인데 저쪽은 불속에 들어오면 죽을 자니까 그냥 죽은자지요. 불속에서 살아야 산자지 불속에 안들어가고 살았다는 것은 산 것으로 취급을 안해요. 십자가에 들어와서 영생받지 십자가 안들어오고 버티는 놈 지옥갑니다.
그것은 산자가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십자가를 통과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다 없다? 없습니다. 교회에 나올수는 있어요. 전도할 수는 있습니다. 헌금 할 수는 있어요. 전도도 할 수 있어요. 찬양 집회 다 할 수 있고 설교, 강의 다 할 수 있어요. 문제는 십자가안에 들어오는 이것은 누구 소관이다? 이것은 우리 소관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내가 죽어야 될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죽어야 된다는 말은 내가 없어져야 된다는 말입니다. 내가 없어지면 내가 구원받고 안 받고가 이미 내 소관에서 떠난 문제입니다. 다시 이야기할게요. 내가 죽기 전에는 ‘구원 받아야 될 텐데, 예수 믿고 천당 가야 될 텐데…’ 그걸 걱정하지요. 그렇게 걱정하다가 내가 죽어버리면 다 없어지지요.
내가 없어지면 뭐도 같이 없어집니까? ‘구원받아야 될 텐데’ 라는 것도 없어지지요. 그러면 구원받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만약에 내가 구원받으면 그것은 누구 소관이고 누구 덕분입니까? 그것은 이미 죽어버린 우리를 향한 죽어버린 일방적인 주님의 약속의 결과지요. 그걸 미리 안사람이 뭐라고 합니까? ‘내가 구원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하지요.
‘내가 구원받고 내가 건짐받은 것은 주의 은혜입니다.’ 예수님이 ‘어이, 어딜 감히 이방여자주제에 구원을 받으려고 하는가? 자녀에게만 허락된 떡을 개에게 주는 법이 없다’고 합니다. 여자가 하는 말이 ‘제가 개 맞습니다. 저 개입니다.’ ‘와, 이런 여자 처음봤다. 어떻게 네가 개인줄 알았느냐?’(마 15:21-28) 어떻게 우리가 죽은 자 라는 것을 압니까?
십자가 영이 오니까 내가 산자가 아니고 내가 죽은자이고 다만 내가 산자가 되는 것은 내 덕분에 산자가 아니라, 내가 있음에 산자가 아니라 내안에 그리스도가 있음에 나는 산자로서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누가 산다? ‘그리스도가 산다.’(갈 2:20)
성경에 분명히 있어요.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그것도 모르고 율법을 지키면 하나님께서 그것에 대한 보너스로 구원받는다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을 것 같으면 애초부터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지지도 않았다’ 라고 합니다. ‘율법을 지킨다거나 각자 자기의 양심을 발휘해서 선을 이루어서 구원받을 것 같으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질 이유도 필요도 없었다.’ 십자가를 진 이유가 뭐냐? 안된다는 겁니다.
오늘 집에 가서 거울 속에 한번 들어가 보세요. 들어갈 수 있는가? 내일 또 거울 여러장 깨질까 걱정되는데, 안됩니다. 우리가 거울 속에 못 들어갑니다. 마찬가지로 십자가속에는 예수님만 들어갑니다. 왜? 예수님만이 죽은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나는 죽은자가 낳은 자식이 되죠.
참 어렵습니다. 지금 죽은자는 없지만 죽은자의 아내는 있잖아요. 그러면 죽은자의 아내가 시동생과 결혼해서 낳은 자식은 누구의 자식이라고 했습니까? 시동생의 자식? 우리의 자식? 다 아닙니다. 여기에 있지도 않고 없는 죽은자의 자식으로 올라갑니다. 그러면 그 자식이 바로 ‘나’ 라는 말이죠. 그 자식을 여러분 자신으로 봐야죠.
처음에 아무것도 모를때는 내 구원을 위해서 예수 믿는다고 세례도 받고 난리를 피웠어요. ‘믿쉽니까?’ 그러면 ‘믿셥니다!’ 그러면서 난리 피웠잖아요. 그런데 나중에 보니 그것은 말짱 다 사기였어요. 만약에 내가 구원받으면 나는 나의 것이 됩니다. 성경에는 나의 것이 되는 구원, 그런 구원의 구원자는 없어요.
사나 죽으나 누구의 것이다?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지 나의 것으로 도로 환원되는 식으로 구원되는 자는 없습니다. 착각이었죠. 주님께서 살아 있는 나의 것이 아니라 죽은 주님의 것으로 구원을 주는데 그 구원의 능력이 뭐냐 하면 ‘나는 죽어 마땅합니다’ 라는 것을 느끼면서 예수를 믿게 해요. ‘예수 믿으면 살겠지’, 이것이 아니라 ‘주여, 나는 죄인중의 괴수입니다. 나는 죽어 마땅합니다. 나를 죽이든지 살리든지 주님께서 마음대로 하세요.’
이렇게 나를 맡길 때, 그때 주님께서 몽땅 나를 점령할 때 ‘이제는 두말 없기다.’ ‘두말 않겠습니다.’ ‘이제는 너는 너의 것이 아니어도 좋지?’ ‘좋습니다.’ ‘이제는 내가 너를 가져간다.’ ‘가져가세요.’ 그렇게 가져간게 죽은자의 자식, 바로 우리입니다. 주님은 안보이잖아요. 살아 있는 우리가 보이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마귀들린 세상에게 뭐라고 합니까? ‘나는 주님의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이 바로 영적전쟁, 주님의 전신갑주를 입는 거예요.
전쟁 승리하기 참~ 쉽죠 잉! 사실은 이것은 쉬운 문제가 아니고 불가능합니다. 쉬운 문제가 아니고 불가능합니다. 어떤 목사가 교인 100명쯤 된다. 그런데 1000명을 노리는데 전도집회한 결과가 900명밖에 안되었다. 목사가 화를 냅니다. 왜 화를 냅니까? 아까 이야기했지요? 누가 나를 힘들게 하는가? ‘누가 나를 힘들게 한다’에서 그 주체가 누구입니까? 나지요.
나가 살아 있으니까 천명이 오든 만 명이 오든 이 사람은 누구입니까? 악마하고 한통속이죠. 예수님의 적이 되는 거예요. ‘주여!’ ‘왜’ ‘제가 천명 노렸는데 왜 이번 전도집회에 900명 밖에 안왔습니까? 예상하기를 2천명 했는데 900명 밖에 못왔잖아요. 이럴수가 있습니까?’ ‘너는 누구냐?’ ‘저는 나입니다.’ ‘알았어. 그러니까 내 적이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을 힘들게 하는 것이 누구입니까? 성경에 정답이 나와 있어요. ‘너 자신이 너를 힘들게 한다.’ 그 밖에 아무도 자신을 힘들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내가 여기 있다는 자체가 이렇게 숨쉬고 있다는 자체, ‘남은 죽어도 나는 살아야 된다는 그 자체, 남은 취직 안되어도 나는 취직되어야 하고, 남은 승진 못해도 나는 해야되고, 다른 교회 부흥 안되어도 우리교회는 부흥되어야 되고, 다른 사람은 기도해서 병이 안낳아도 내가 기도하면 병이 낳아야 되고’ 라고 노리는 그 자체가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예수님 중심이지 누구 중심은 아닙니까? 내 중심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내 중심이라고 그렇게 고집을 세웁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모든 것은 주님 중심이다.’ ‘아닙니다. 저는 제 중심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저도 한고집 합니다. 기어이 제 중심은 포기 못하겠습니다. 저도 참을만큼 참았습니다. 아무리 예수님이라도 저를 힘들게 하는 것은 더 이상 못참겠습니다. 교회 발 끊는 수가 있고 절에 가는 수가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협박을 하지요. ‘이런 식으로 안도와주시면 동업 못하지요. 이렇게 기도를 열심히 해도 교인수가 불지 않는다면 주님과 동업 못하죠. 통일교나 신천지나 이런 데로 가버릴겁니다.’ 그러면 사모도 거듭니다. ‘당신 목회 때려 치워라.’ 그럴 때 ‘그렇다 용기를 내서 목회 성공해야지.’ 이것은 마귀입니다.
목회를 하든지 말든지 이것은 죽어 마땅한 나의 소관이 아닌데 왜 자꾸 주님의 소관인 것을 억지로 내 소관이라고 끌어 당겨 오느냐 말입니다.
우리는 죄인이기에 죄인이면 욥처럼 입을 막고 ‘주여, 제가 할 말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라고 재를 뒤집어 쓰고…, 또 재를 뒤집어 쓴답시고 연탄불 피워서 가스 피우는 난리 피울 생각일랑 마시고, ‘주여, 제가 주님 주신 은혜를 보니 제가 할말이 없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비를 내리시지, 선인과 악인 가리지 않고 햋빛주시고 공기주시지 심장 뛰게 하시지 감사할 뿐입니다’ 라고, 내가 감사할 대상이 있다는 그 자체, 내가 경배할 대상이 있다는 그 자체, 나를 낳아준 분을 알게 된 그 자체, 경배만 하고 찬양만 하고 감사만 해도 한평생 다 보내기 바쁜 이 시대에 무슨 자기것을 또 챙깁니까?
신자라는 것은 자기보다 더 센 분이 있다는 것, 경배할 분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 그 사람이 신자 맞습니다. 10분 쉽시다.
관리자(IP:220.♡.176.169)
09-06-21 16:08
서울090612b엡6장10절b
에베소서 제 38강 (이 근호목사, 2009년 6월 12일-(2), 서울의존교회)
이번시간에는 개인구원과 집단구원이 어떤 차이가 나는가를 알아보겠습니다. 왜냐하면 그 차이를 알아야 영적전쟁의 내막을 알 수가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개인이 전쟁을 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집단으로 전쟁했습니다. 구약의 전쟁이 불신자 집단과 신자집단의 전쟁이라면 신약의 에베소서 6장의 전쟁도 혼자 잘 싸우면 된다는 것이 아니라 함께 싸우게 된다는 것을 이야기 합니다.
나 혼자 잘 싸워서 혼자 천당가겠다는 것은 없습니다. 반드시 더불어서 함께 싸우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그 내막을 알기 위해서 앞에 한 것을 다시 정리하겠습니다. 죽은 사람의 가문이 현재 산 사람에게는 붕 떠 있습니다. ‘죽은 사람은 없는거야. 현재 살아 있는 사람끼리 해.’ 이런 식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성경에 보면 죽은 사람의 가문이 따로 펼쳐져요. 죽은 사람의 가문에서 이미 죽어버린 사람이 갖고 있는 하나님에게서 받은 약속이 살아 있는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이미 죽어버린 아브라함, 야곱 때문에 이스라엘이 전쟁에 승리해요. 이것이 신기하지 않습니까? 야곱은 이미 죽어 없어지고 야곱이 받은 약속 때문에 생겨난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이름도 야곱의 이름을 그대로 따서 이스라엘입니다. 야곱은 이미 죽고 없는데 그 죽은 사람에게 주어진 약속에 의해서 산 사람이 사는 거예요. 누구의 공로입니까? 이미 죽은 사람이 받았던 약속의 혜택이죠. 이미 죽은 세 명의 사람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되지요.
그러면 지금 산 사람들을 이스라엘 집단으로 본다면 이스라엘 한 사람 한사람이 얼마나 재주있고 똑똑하고 믿음 좋은가, 이것이 이스라엘을 유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을 찾아오신 하나님이 계신데 그 하나님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 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줄여서 ‘언약의 하나님’ 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집단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에 의해서 생겨난 아주 신기하게 짝이 없는 집단이 성립되는 겁니다. 이것을 가지고 아브라함자손이라고 합니다. 아브라함 자손이란 결국 이스라엘이 아브라함 가문에 속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아브라함 씨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면 ‘내 씨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복을 받는다’ 고 되어 있어요.
그런데 여러분은 그것만 알고 있지요? ‘내 씨로 많은 사람이 저주를 받는다’ 는 이것은 자꾸 잊어버리려고 하지요. 결국 이 세상은 두 세상으로 나누어지도록 되어 있는데, 아브라함 때문에 복받는 집단, 정확하게 말해서 아브라함 씨 때문에 복 받는 집단이 있는 반면에 또 다른 한쪽은 아브라함의 씨로 말미암아 꼭 저주를 받아 지옥에 가야만 하는 집단이 생깁니다.
그 두 집단 외에 다른 제 삼의 집단은 죄송합니다만 없습니다. 제가 죄송할 문제는 아닙니다만 사적으로 개인적으로 구원받겠다는 분들에게는 죄송하다는 말씀밖에 못 드립니다. 그런 구원은 성령 받지 않고 일반사람들도 지어낼 수 있어요. 학자들이 성경보고 연구해서 예수 믿으면 구원된다는 아이디어를 만들어 낼 수가 있어요. 그것은 가짜입니다.
성경은 집단으로 구원받지 개인자격으로 구원받는 그런 법은 없습니다. ‘왜 자꾸 목사님은 개인은 안되는 이야기를 합니까?’ 라고 하는데 아브라함의 씨로 구원받는데 그 씨에 뭐가 있는가? 이름이 있는데 그 이름이 주의 이름입니다. 아브라함자손의 씨가 세월이 흐르면 마태복음 1장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라고 해서 ‘다윗의 씨’라고 하고 로마서에서는 ‘다윗의 가문’ 또는 ‘다윗의 자손’ 이라고 합니다.
소경들이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라고 했잖아요. 하면 되는데 왜 다윗의 자손이 나옵니까? ‘제가 하나님 믿습니다. 조물주를 믿습니다.’ 그냥 이렇게 해서 구원받으면 된다고 여기는데 그것은 자기 생각이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약속으로만 구원받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사적인 이성, 양심, 종교성으로 구원받는 것은 마귀가 지어낸 것이지 그런 구원은 하나님의 사전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전에 없는 것이 많아요. ‘예수 안 믿어도 구원된다.’ 이런 것은 하나님의 사전에는 없어요. 나폴레옹의 사전에는 다 들어 있습니다. 주님의 사전에는 없는 것이 아주 많아요. ‘남자거든 여자 되기를 기도하라.’ 이런 것이 없어요. ‘네게 필요한 것을 구하라’ 그런 것도 없어요. 반대로 있어요. ‘네가 필요한 것은 알아서 다 준다. 그런 것은 기도하지 말라’(마 6:31,32) 고 했습니다.
하여튼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사전에는 하나도 없습니다.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은 없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롬 1:17) 그렇게 되어 있어요. 개인구원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전에는 아브라함 자손만 구원받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 자손 되고 안되고는 주의 이름의 고유권한입니다.
제가 좀 건방지지만 주의 이름이라고 해 봅시다. ‘학생, 까만 것을 줄까? 빨간 것을 줄까?’ ‘…?’ ‘안줘!’ 이것이 누구의 권한입니까? 주의 이름 본인의 권한입니다. 어느 산골에 나무꾼이 도끼를 연못에 빠뜨렸어요. 수심이 깊어서 수영도 못하고 어쩔줄을 모르고 있는데 갑자기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오르더니 신령 비슷하게 생긴 할아버지 한분이 올라왔어요.
‘왜 울고 있느냐?’
‘나무하다 도끼를 빠뜨렸시우.’
‘거좀 똑바로 하지 그랬냐? (금도끼를 들어보이면서) 네꺼 맞냐?’
‘아니어라.’
‘심부름 되게 시키는구나. (사라졌다가 다시 올라와서 이번에는 은도끼를 들어보이며) 이거냐?’
‘그것도 제것이 아니어라.’
‘에이 귀찮구나. (사라졌다가 세번째 다시 나타나서 이번에는 쇠도끼) 그럼 이거냐?
‘그래. 네 쇠도끼 가져가라. (금도끼 은도끼는 그대로 가지고 사라지면서) 안녕! 나무 계속 하면서 잘살아라.’
나무꾼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이상하다. 시나리오가 이게 아닌데, 분명히 세 도끼를 다 내가 가지게 되어 있는게 아닌가?’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의 시나리오는 착하면 구원받는다는 거예요. 절에 가서 비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사고방식을 가지고 교회 와서 ‘주여, 오늘도 교회 왔습니다. 저 착하지요? (오늘 내가 교회 왔기 때문에 나를 구원해 줘야 될 걸)’
이런 식으로 자기가 시나리오를 짜요. 소설을 씁니다. ‘하나님, 제가 이런식으로 하면 구원받지요?’ 이렇게 자기가 구원받는 시나리오를 다 써요. 주께서 찢어버립니다. ‘아이고, 그것은 제가 착한 일을 한 것을 왜 찢어 버립니까?’ ‘죄사함의 권세는 너에게 없고 나에게만 있다. 누구에게 벌을 주든 구원을 주든 그 권세는 나에게만 있다.’ 이렇게 주님은 자기가문만 구원합니다.
아직도 이해가 안 되십니까? 학교에서 운동회를 하는데 김씨가문에서 치킨을 시켰습니다. 후라이드 반마리, 양념 반마리. 그 집 애가 둘인데 치킨 먹게 손 씻고 오라고 시켰습니다. 그런데 그 옆에 치킨이 먹고 싶어 환장한 애가 하나 있었습니다. ‘아저씨, 치킨 먹으면 안되나요? 안돼. 이 치킨은 우리집 가문을 위한 치킨이지 너의 집 가문을 위한 치킨이 아니거든.’
이래도 이해 안되시면 저의 한계입니다. 개인 구원이 아닙니다. ‘아저씨 저 구원해주세요.’ 다른 말로 하면 ‘아저씨, 치킨 먹고 싶은데 치킨 주세요.’ 죄송합니다. 안됩니다. 치킨을 주고 안주고는 주의 이름으로 달렸습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은 말합니다. ‘이 세상에 주의 이름외에 구원얻을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행 4:12)고 합니다.
로마서 10장에서 말합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롬 10:13) 이 말은 ‘너의 가문을 포기하고 너의 이름 접어라’ 그 말입니다. ‘처나 자식이나 아비나 남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하늘나라 유업을 받을 수 없다. 심지어 너 자신마저도 믿지 마라.’ 자신이 의욕이 있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의욕이 있든지 없든지 간에 구원자는 따로 계신데 그분이 누구냐? 주의 이름이 되는 겁니다.
어째서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습니까? 예수 이름만이 뭘 갖고 있습니까? 언약을 가지고 있어요.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만 이룰 수 있기 때문에 그 약속에 의하면 자기가 원하는 자에 한해서만 구원할 수 있는 겁니다. ‘목사님, 왜 하나님의 약속은 왜 하나님만이 지킬 수 있습니까?’ 라고 물으신다면 답변은 이렇습니다.
제 글씨는 성질이 급해서 다른 사람들이 잘 알아볼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제가 갈겨 쓴 이 칠판 글씨를 그대로 쓸 수 있습니까? 저는 쓸 수 있습니다. 왜? 제 글씨이거든요. 하나님의 약속은 원래부터 하나님만이 이루도록 되어 있고 다른 누구, 악마든 인간이든 이루지 못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주제넘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룬다는 것은 있을수 없습니다.
그러면 성경말씀은 왜 주었는가? 성경말씀은 이미 이루어진 언약에 의해서 칼로 사용해서 관절과 골수를 후비고 쪼개서 완전히 우리의 존재를 사건의 쪼가리로 분해시키기 위해서 말씀을 주는 겁니다. 인간을 분해하는데 말씀으로 분해합니다. 그러면 남는 것은 사건과 사건의 덩어리, 연속으로만 남습니다. 의사가 인간을 해부하면 목, 팔, 다리등 따로 따로 나옵니다. 소고기도 부위별로 부르는 이름이 다 다르지요? 아롱사태, 안심, 등심 등등.
그런데 성경말씀이 우리를 쪼개면 사건과 사건이 생겨요. ‘아, 일곱 살 때 내가 눈 다친 것도 주의 은혜구나. 아홉 살 때 잠자다가 오줌 싼 것도 은혜구나.’ 모든 것이 은혜의 사건으로 분류가 됩니다. 애들이 마징가젯 조립해서 가지고 놀다가 형이 실수해서 아랫도리 치면 마징가 조립한 것이 다 부서지고 부품들이 남지요.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은 죽으면 흙이 될 수밖에 없도록 하는 약속의 사건만 남게 됩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이것만 남아요. 우리는 처음부터 말씀이었는데 ‘이것은 팔, 이것은 배’ 만날 눈에 보이는 물체덩어리로만 본다는 거예요. 인간은 없고 사건덩어리입니다. 여러분이 엎어져서 정강이가 깨져서 파스 붙여보세요. 그러면 그 정강이는 엎어졌다는 사건이 들어 있는 정강이가 되겠지요.
파리바케트 빵 사러갔다가 복숭뼈가 깨졌대요. 그러면 그 복송아뼈에는 파리바케트에 빵사러 갔다가 엎어져서 복숭아뼈 깨진 사건이 거기 붙어 있어요. 학생들의 머리카락이 머리카락이 날때부터 길었어요? 주께서 길러 주신 거예요. 참새도 누가 기른다고요? 주께서 기른다고요. 발걸음을 누가 센다고요? 주께서 세시고 참새도 기르고 모든 들에 핀 꽃 한송이도 하나님께서 은혜주시는 사건과 사건에 의한 것이고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고전 15장 10절에 보면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 라고 합니다. 교회에 교인들이 모이게 되면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이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이게 된 것은 주의 은혜 아니면 절대 모일 수 없고 내가 강단에 설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설수 없다’ 고요. 만일에 허리가 아파보세요. 의자에 앉아서 해야 되겠지요.
허리가 안 아플때는 마치 당연히 안 아픈 것으로 여겼지만 허리가 아파보면 그동안 당연히가 아니고 하나님이 힘 주셔서 은혜로 그동안 복음 전하라고 안아팠던 것이고 또 허리가 아프면 아픈 채로 복음전하라고 하는 것이고 그러다가 죽게 되면 스데반 집사님처럼 복음전하다가 죽으라고 그렇게 은혜주신 겁니다. 그러니까 사나 죽으나 누구의 것입니까? 주님의 것이죠. 사건을 그렇게 만들었어요.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빈틈없는 사건 아닙니까? 완전범죄같은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신 것은 그 말씀으로 우리를 쪼개서 구석구석에 우리가 놓치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 놓치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감사할 거리, 그런 것을 찾아내서 범사에 감사하라고 이 말씀을 준 겁니다. 다음주에 제가 결혼식 주례를 해야 하는데 주례사를 열 번도 넘게 고쳐쓰고 있어요.
열 번 다 맘에 들지 않아요. 주례가 너무 과격해요. ‘시집가고 사고 팔고 할 때 인자가 왔다.’ 결혼식을 앞두고 단꿈 같은 신혼여행을 생각하는 사람에게 ‘주님의 재림을 알아? 시집 장가가는 것만 생각했지 주의 재림을 생각이나 해 봤어?’ 라고 해버리면 분위기가 밥도 안넘어가게 생겼어요.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많이 되는데 주례 내용 중의 하나는 이겁니다.
아내가 남편을 생각할 때 간격을 좁히기 위해서 애쓰죠. ‘당신과 나는 맘도 맞고 성격도 맞다’ 합니다. 그런데 막상 보면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먼 당신이고 점점 더 멀어지는 당신이에요. 그래서 아내가 자기의 미흡한 것을 보상하려고 들죠. 이것도 역시 칼 구스타프 융의 이론입니다.
‘항상 인간의 무의식적인 행동은 내 행동에 대해서 미흡함을 찾아내서 그 미흡함에 대한 보상을 어디선가 끌어내기 위한 행동을 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갈라진 내 마음이 합해지면 그것이 내 마음의 평화다.’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여자가 처녀 때 ‘나는 이런게 모자라고 부족한 면이다’ 라는 점을 메워줄 수 있는 남자랑 결혼해서 ‘얼추 내 모자라는 것을 채워주겠지’ 라고 생각했는데 점점 더 멀어지고 가까워지기에는 너무 먼 당신입니다.
이것은 항상 미흡, 미완료입닏. 미완료는 당하면 당할수록 점점 더 멀어지니까 이것을 한꺼번에 완료로 메꿀수 있는 것이 뭐가 있는가? 그게 바로 자식입니다. 왜? 자식은 앞에 뭐가 붙는가? ‘나’ 항상 ‘내 자식’이 됩니다. 자식이 생기면 이제 여자는 남편도 제쳐두고 자식이 온전하기 때문에 엄마는 자기 자신이 미흡해도 자식만 있으면 그것이 보상이 되지요.
이제는 자식의 인생이 내 인생이지 내 인생은 없어도 괜찮아요. 자식을 위해서라면 지하철에서 자리 잡기 위해서 체면이 깎이는 것도 개의치 않습니다. ‘다 비켜라. 내 새끼 여기 앉아라.’ 부끄러운것도 없지요. 처녀 때는 부끄럽다고 공장도 안 가더니만 자식 과외 시킨다고 공장이건 뭐건 마다 않고 미싱 질 하는 것도 마다않고 드르륵 박음질 하면서 ‘그저 공부만 해라. 내가 바로 너다. 내 인생은 없다. 네가 내 대신이다. 나는 없다.’
그러면 남편보기에 이것은 완전히 미쳤지요. 남편은 머슴으로 전락하죠. 남편은 뭔가? 돈 버는 기계에 불과합니다. ‘누구든지 내 남편을 힘들게 하면 용서하지 않겠다’ 하다가 ‘누구든지 내 새끼를 힘들게 하면 용서하지 않겠다’로 바뀝니다. 자식은 완제품이라고 여기지만 자식도 나이 들면 서서히 부모 곁을 떠나갑니다. 그러면 또 간격이 벌어지지요.
여자가 아이 낳을 때 그 기쁨을 가지고 성경에서 ‘여자가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딤전 2:15)고 합니다. 비록 고통스럽지만 해산 하고 난 뒤에는 기쁨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완제품인지를 그때 안다는 거예요. 구원도 비록 고통스럽지만 완제품이 온다는 그 기쁨, 내가 손대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완벽하고 흠이 없다는 그 기쁨을 여성은 해산을 통해서 잠시 누리고 느낍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누구중심이 아니다? 역시 내 중심은 아니고 주님께서 만들어놓은 집단중심, 가문중심은 따로 있습니다. 좀 힘들더라도 바짝 정신좀 차립시다. 중요한 것은 뭐냐? ‘멜기세덱의 반차(반열)’. 이것이 성경에서 어려운 말인데 ‘멜기세덱의 반차는 말은 족보도 없고 어미도 아비도 없는데 죽은자와 방불하다.’(히 7:3)
아까 ‘시형제결혼법’ 이야기했지요. 분명히 나는 나인데 나는 나이면서도 내 것이 아니고 이미 돌아가신 분의 소유가 되지요. 멜기세덱의 가문은 원래 없는 가문입니다. 없는 가문인데 없는데서 능력이 와서 세상에 있는 자기백성을 ‘너는 내꺼야. 너는 메시야에 의해서 구원될 자야’ 라고 뽑아 보니까 그 위에는 멜기세덱의 가문, 하늘에 속한 가문, 천상의 가문, 묵시적 가문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 대 인간의 자식 낳기는 아무 의미 없지요. 의미 없는 것을 왜 하게 하느냐? 의미 없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하게 해요. 어떤 분이 질문한 게 있어요. ‘목사님, 이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혼의 기쁨과, 이혼의 기쁨이라니 말이 좀 이상한데, 이혼의 기쁨과 이혼의 슬픔도 감당 안 될 정도로 큰 기쁨.
이혼하면서도 ‘나 같은 인간을 왜 구원하셨으며 나 같은 죄인을 왜 끌어 올렸습니까?’ 라는 구원의 기쁨 앞에서 이혼하고 안하고 그런 것은 고민거리도 문제거리도 안된다고 했어요. 따라서 이혼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치료센터같은데 가지 말고 이혼문제의 유일한 해결점은 복음만 전하는 곳에 가시면 이혼도 하나의 은혜의 사건(?)인 것을 아는 겁니다.
그래서 자식들 뿔뿔이 흩어지고 헤어지는 것도 은혜로운 사건입니다. 좀 납득이 안 되지요. 한번 해 보세요. 납득이 되는지. 해봐도 납득이 안 될 거예요. 하나 안하나 관계없이 평소에 이혼하기 전에도 감사했고, 이혼 때문에 아니라 평소에 ‘나 같은 인간도 구원했다’ 하는 그 감사가 있으면 그것은 별 문제 안 된다고 했어요.
그래서 성경에서 사도바울은 ‘갈리게 되면 갈라서게 해라’(고전 7:15) 합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사도바울이 결혼을 해보지 않아서 말을 함부로 한다고 합니다. 그게 곧 죽어도 신학자입니다. ‘결혼도 안해 봤으니 이혼의 아픔을 몰라서 그런 소리를 하는데 그런 아픔도 모르는게 무슨 사도겠는가?’ 라고 합니다.
그러면 내가 한마디 하지요. ‘사도 같지도 않은 사도의 말을 듣고 구원받고자 하는 너는 또 뭔데?’ 사도는 삼층천에 올라간 사람입니다. ‘거기 누구십니까?’ ‘사도인데.’ ‘어디계십니까?’ ‘천국이다.’ ‘묻겠습니다.’ ‘물어봐라.’ ‘이혼할까요? 말까요?’ 시내산에 올라간 모세한테도 물어보세요. ‘모세님, 밥 얼마나 굶었습니까?’ ‘밥같은 것 안먹어도 상관없다.’ ‘그럼 묻겠습니다. 이혼 할까요, 말까요?’ ‘올라와 봐라. 그것이 화제거리가 되는지.’
시내산까지 높은 곳에 올라갈 필요 없이 가깝고 낮은 곳에 가봅시다. 변화산. ‘베드로님, 이혼 할까요, 말까요?’ 지금 베드로 정신없어요. 초막 셋을 짓고 주님께 바치기 바쁜데 언제 그런 생각하겠어요. 이것이 다 뭐냐? 내 구원이 아니고 주님의 집단구원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 집단구원의 우두머리, 책임자를 교회의 머리라고 하고 주님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주님의 특징이 뭐냐? 부활의 능력이 있어요. 죽은자도 죽지 않아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 모든 죽음도 어른께서 처리합니다. 30도 안된 어떤 아가씨인데 ‘인주시’ 시장이 되었어요. 그 도시는 어떤 드라마에 나오는 허구적인 도시인데 그 도시의 시장이 되었어요. 그 시장 누가 되게 했는가? 그 이전에 부시장이었던 사람이 알아서 시장되게 만들었어요.
그럴 때 그 시장은 혼자 시장되었다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누가 떠밀어서 날 시장되게 했어?’ 그렇게 해야지요. 마찬가지입니다. ‘누구입니까? 날 구원시킨 분이.’ ‘바로 나다.’ ‘아, 주님이셨습니까?’ 이것이 바로 ‘성령이 임하면 너희가 땅끝까지’ 누구 증인되리라? ‘주의 증인되리라.’(행 1:8)
성경전체가 이렇게 집단구원입니다. 아직까지 개인구원이야기를 안했습니다. 집단구원과 개인구원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개인구원은 자기 이름이 있어요. 개인마다 이름이 있지요. 개인의 이름안에 개인의 이름이 다 들어 있어요. 이름은 개인의 대표입니다. 그러면 개인이 구원받는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내 이름이 천국에 구원 받는다’ 혹은 ‘내 이름이 천국간다’ 그런 뜻입니다.
이스라엘, 집단구원 말고 이방인들, 개인구원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는가? 이름이 그 사람을 대표하기 때문에 신의 이름이 있으면, 내가 신의 이름을 부르게 되면 신은 이름을 대표하기에,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신이 갖고 있는 그 능력의 일부가 내 이름으로 들어와서 나로 하여금 능력자가 되는 아이디어를 발휘하게 되어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 만날 때 이름을 물으니 하나님께서 ‘네가 왜 내 이름을 묻느냐?’(출 3:13,14)고 합니다. 사람들이 신의 이름을 부를 때는 ‘내가 신의 이름을 부르고 관리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