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6월 9일 조지래드 29 신약신학-제42과 베드로후서
부산 6월 9일 조지래드 29 신약신학-제42과 베드로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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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609 베드로후서 - [샛별(마음) vs 형식(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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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6-09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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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6-17 17:41
부산090609a조지래드29신약신학-베드로후서a
20090609a 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베드로후서
(강의:이근호 목사)
-이데아론 하고 히브리서 10장 1절에 나타나는 “율법은 장차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형상이 아니므로” 어떻게 해석을 해줘야 하는지
똑같지요. 똑같은데 항상 철학에서는 내용은 없고 형식만 갖춰졌죠. 왜 그러냐 하면 인간의 언어를 공부하게 되면, 언어는 형식 갖추기거든요. 이 형식이 뭐냐 하면, 바로 영적 세계, 또는 현실세계 말고, 진짜 있는 세계를 형식으로 갖출 때 이걸 반드시 언어로 표현하게 돼있습니다. 다른 말로 개념으로 표현하게 돼있거든요. 이 개념으로 표현한 이것을 사도 요한이나 이런 사람들이 그대로 이용하는 겁니다.
그게 그 당시의 정신세계니까. 옛날 조선시대 할머니들이 조물주, 조물주 안 합니까? 그러면 복음 전하는 사람들은 ‘조물주’란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원어 따지는 사람들이 무식한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원어는 없어요. 원어는 언어일 뿐이에요. 그 당시의 형식체계, 인간의 사고의 그 당시 사람들의 형식체계를 구조화시킨 것이 언어일 뿐이라 말이에요.
영과 혼과 육이 뭐냐? 보세요. 아무 내용도 없어요. 그 당시 일반 사람들이 생각했던 영, 육, 혼이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이데아론을 차용했다고 그렇게 이해해도 되는 겁니까? 아니면 ....
차용할 것도 없고, 따로 개념이 있는데 일부러 차용하면 차용이 되겠지만 복음이란 원래 시대 자체를 변형시키기 때문에 복음은 따로 구조는 없어요. 그냥 들어가서 다 때려 부수는 거예요. 기존의 인간 사고방식 들어가서 다 하는 거예요. 집은 누가 마련하는가? 집은 인간들이 마련해놓는 겁니다. 왜? 복음이란 것이, 언약이라는 것이 인간의 죄성이 도입해야 언약이 성립하니까. 인간의 죄성이 도입되지 아니하면 언약자체가 성립되지 않아요.
예수님이 안 다치면 새 언약이 성립 안 됩니다. 피와 살을 누가 흘려야 되지 않습니까? 흘릴만한 그런 적이 있어야 피와 살이 흐르듯이 예수님은 그냥 인간 속에 들어와서 ‘이게 아님, 이게 죄임’ 하고 드러내는 겁니다. 따로 갖추고 있는 게 아니에요. 어떤 형식에 대해서는. 내용은 있지만 형식은 따로 없어요.
그래서 원어연구, 예수님 연구 해봐야 아무 소용없는 기라. 믿음 연구 해봐야 아무 소용없듯이. 언어란 형식체계라 보면 돼요. 형식 없는 내용이 없다는 거예요. 모든 것에 형식이 갖춰져 있습니다. 그게 질문하신 게 오늘 본문과 멋들어지게 관련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들어가 봅시다. 베드로후서인데
교재에 보면 베드로후서 하고 유다서를 같이 묶어놨지요. 이상하다. 베드로후서는 전서하고 묶어놔야 할 텐데 왜 유다서하고 묶어놨는가? 그 이유는 저자가, 래드가 베드로후서는 결코 베드로가 지은 게 아니라고 초반에 나와 있어요. 그럼 우린 말하죠. 그게 뭐 중요한데. 누가 지었다는 게 왜 중요한데. 도둑놈이 지 발 저리다고 성경을 접근할 때 거기서 복음적인 능력을 성경에서 당기는 능력으로 접근해야 될 텐데.
봅시다. 이게 성경책입니다. 성경을 볼 때 우리는 이래 있잖아요. 성경말씀 쪽에서 당겨서 딸려가는 식으로 성경내용을 봐야 될 텐데 성경을 뭐로 보느냐? 성경을 하나의 분석대상으로 보는 거예요. 그러면 성경과 다른 책들이 있겠지요. 공자, 맹자 다른 책들이 있겠지요. 그럴 때 인간들은 다른 책들을 어떻게 봅니까? 저자가 누구냐? 왜? 저자를 알아야 저자의 사고방식이 담겨있으니까.
또는 김지찬 교수처럼 문예적으로, 문학적으로 예술적으로 봐야 된다. 이 말은 다시 말해서 예술성을 가지고 봐야 된다. 이 말은 과학적 분석 그 위에 미적 감각이 있어야 된다 이 말이에요. 김지찬 교수가 주장하는 게. 학생들한테는 그렇게 안 가르치지요. 기존의 개혁주의 신학을 뛰어넘는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딴 게 아니고 칸트 철학에 이미 나왔던 것 아닙니까.
어떤 문서를 볼 때에 이게 법적으로 볼 것이냐, 아니면 시로 볼 것이냐를 구분해야 해석이 달라진다 이 말입니다. 그 사람 주장은. 세상에 대한민국헌법을 시로 볼 사람 누가 있습니까? 만약에 대한민국헌법을 법적으로 볼 것 같으면 이용가치만 따지면 되지요. 전세방 옮기는데 내가 어떻게 서류 작성할까, 이용가치잖아요.
그런데 시는 뭡니까? 나한테 없는 시인만의 세계관에 내가 참여하는 거죠. 참여할 때 시는 상징적으로 했기 때문에 이 상징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나도 시인처럼 상징적으로 접근해야 될 텐데, ‘상징’이라 하는 것은 기존에 있는 현실에 대한 플러스알파의 다른 세계관이 겹쳐져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보는 밥 먹고 사는 이 현실 말고, 다른 이미지가 있으니까 그 이미지를 파악하는 것이 성경을 접근하는 정답이 된다는 쪽의 문예적 해석법 또는 구조주의 해석법이 되는 겁니다. 이걸 총신 가서 제가 학생들한테 비슷한 강의를 했었어요. 그래서 그 실상을 알고 싶다. 내가 알려주마.
그러나 문예적이 되던, 예술적이 되던, 법적이 되던 벌써 출발이 뭡니까? 성경하고 다른 책하고 동일하다 이 말 아닙니까. 지금 래드도 마찬가지에요. ‘성경, 그 까짓 것 뭐 책이지.’ 이러고 있다고. 이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성경, 우리가 이성적으로 분석하면 분석이 된다, 안 된다? 가능하다 이 말입니다. 왜? 그 이유를 물어보면 성경 쓴 베드로, 지도 인간이고 우리도 인간인데, 같은 인간인데 지가 알면 우리가 모를 수가 있느냐 이러고 있다고. 지도 알면 나도 안다는 뜻입니다.
베드로한테 많이 맞아도 진짜 엄청나게 맞아야 돼요. 베드로, 그 사람은 “나는 죄인입니다. 주여, 떠나소서.” 한 사람이에요. 인간적인 능력으로 성경을 쓰고, 그렇다면 베드로가 소설을 썼겠다. 예수님 전기를 썼겠어요.
꼭 그렇게 총신 다니다가, 장신 다니다가 유학 갔다 오면 그 짓을 해요. 학위 받으려고. 박사학위란 의미가 뭔 뜻이냐 하면, ‘너도 되면 나도 되게 해줘.’ 하는 거거든요. 네가 깨달았다면 그 기술을 우리한테 전수하면 우리도 반드시 기술 따라 가면 우리도 된다, 안 된다? 반드시 되게 돼있는 그 기술을 우리한테 전수해달라는 게 학위 아닙니까. 이것 따라 하면 ‘당신이 아는 진리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하는 이걸 이야기하잖아요.
성경은 인간이 그럴 줄 알고 모든 성경은 인간에서 성경을 대상으로 보는 것을 금지합니다. 적극 금지에요. 이건 이사야 6장에 보면 나오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게 함이라” ‘니들이 뭘 알라’ 하는 식으로 쓰고 있다고. 왜 그렇게 해야 되느냐 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에게만 전수하기 위해서 그런 거예요.
그런데 선택이란 말을 보게 되면, 아까 질문하신 것. 선택이 언어죠. 언어 속에 개념이 들어있죠. 선택이란 용어를 쓸 때 사람들은, ‘아, 선택 안다. 고르는 거잖아. 의미 안다’ 이래 된다고요. 선택이란 말이 주께서 주어지면 자기는 안다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내가 선택을 알기 때문에 이 선택이란 하나님 주신 개념을 내가 가질 수가 있고, 내가 소유할 수 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러면 그 선택은 누구 선택입니까? 누가 누구를 선택하는 거예요? 자기 운명을 자기가 선택하는 요량으로 성경에 나오는 선택을 이해하는 겁니다. 재미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성경에서 선택은 누가 한다 했어요? 선택은 주와 주께서 할 문제죠. 시험문제 출제하는데 선생님들끼리 모이지 시험받아야 될 아들은 거기에 안 끼어들지요. 오늘도 베드로후서에 테스트가 아주 중요한 것 들어가는데, 조금 있다 말씀드리고.
선택의 문제에 대해서 주와 주끼리만 출제를 내는 거지 문제는 학생들이 못 끼어들어요. 그런데 인간들이 건방져서 ‘하나님, 낍시다. 이거 다 아는 문제네.’ 이래되면 뭐가 머쓱해져요?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이 의미가 없잖아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선택이란 용어를 쓰지 말지. 아니에요. 그 선택이란 용어를 써서 인간 세계에 들어오는 겁니다. 들어와서 그 다음에 인간들이 알고 있는 선택개념 있잖아요. 와장창 다 부셔버립니다. 하나님의 선택개념은 따로 없어요. 형식은 없어요. 형식은 맨 인간 선택이에요. 인간들로 하여금 성도로 하여금 ‘아, 내가 아는 선택이 아니네.’라는 변화를 주는 거예요.
이걸 포괄적으로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를 기다린다? 메시아, 다른 말로 하면 구세주, 구원자 아닙니까. 유대인들이 했거든요. 그러면 정작 진짜 왔던 메시아, 그분 어떻습니까? 그냥 메시아에요. 사람들이 알고 있는 메시아 맞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하면서 “드디어 오실 주님이 당신입니까” 물으면서 안다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레미야라 하고, 어떤 사람은 선지자 중에 한 사람, 다 알잖아요.
해놓고 이 메시아가 뭘 꺾어버립니까? 인간들이 고대하고 고대했던 메시아를, 인자를 꺾어버리잖아요. 꺾는 정도가 아니죠. 가짜에 의해서 진짜가 죽임을 당하지 않습니까. 그 죽임을 당한 죽음으로 도로 찾아가는 게 부활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부활이라 하는 것은 십자가라는 내용을 담는 게 부활이지, 부활의 내용만 담는 부활은 부활이 아니죠.
십자가란 인간이 이렇게 일을 저질러 놨다. 큰일을 저질러놨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부활을 통해서 실제 부활을 증거하는 게 아니고, 부활은 형식이니까, 내용은 십자가로 고발하는 거예요. ‘죽었다, 너거들.’
그래서 래드가 ‘베드로후서의 저자가 누구냐’ 라고 묻기 전에 성경에서 만약에 래드를 잡아당긴다면 뭐냐 하면, 베드로전서 1장 말씀대로 성령이 임하게 되면 메시아가 인간들이 알고 있는 메시아와 다르죠. 그러니까 성경에서 오게 되면 뭐로 접근하겠습니까? 답변해보세요. “래드야, 현재 네가 알고 있는 것이 죄다.” 하는 거예요.
설교를 한 십 년 했다고 합시다. 십년 하고 이번 주일날 설교한다 이 말이죠. 그러면 설교단에 선 목사에게 성령이 임하게 되면 뭐가 됩니까? 네가 주일날 설교 준비하면서 생각했던 ‘그 생각은 죄다.’라고 접근하면서 들어올 때 그 설교자는 설교하면서 큰 은혜 받죠. ‘내가 설교 준비하면서 이런이런 점을 또 기대했고, 이런 점을 은근히 노렸고, 이런 점을 욕심을 냈고, 이 설교해서 교인 몇 명 감동시키겠다.’는 이런 게 포함이 돼요.
심재성 목사님이 전화 와서 같이 이야기하는 가운데서 제가 이야기 끄집어냈는지 그분이 했는지 기억이 안 나는데 성경에 이런 말씀 있잖아요. “오른 편 뺨을 때리거든 왼 편 뺨을 내놓으라” 그분이 고신측 목사님인데 지금까지 교회 다섯 군데 부교역자로 있으면서 고신에서 자꾸 쫓아내니까 네 군데 다 쫓겨나니까 할 수 없이 목사안수 받기 위해서 석원태 신학교 갔는데 이제는 제대로 목사 받는가 싶었는데 시험문제를 냈는데 뭐냐 하면, ‘왜 석원태 목사의 아들이 석원대 목사 교회 되는 당위성을 쓰라.’ 리포트에.
그런데 심 목사의 말이 재미있죠. 나는 이제 두 번 다시 안 싸우겠다고 조용하게 안수 받으려고 마지막으로 왔는데 세상에 또 이 짓까지 해서. 결국 마지막까지 치워버리는 기라. 뭘 느끼겠어요. “오른 뺨을 때리거든 왼 뺨 내놓으라”의 의미가 얼마나 어렵다는 것. 인생 조져놨거든요. 한국교회가. 처음에 고신 측에서 쫓겨날 때는 만날 십일조하고 주일성수 반대해서 쫓겨났다고. 괜히 늘푸른교회 이장우 목사님 소개해서 짐이 되는 건 아닌지.
그러니까 나는 복음이라고 준비해서 강단에 서게 되면 뭔가 내가 설교하면서 반대급부 뭔가 노리는 점을 갖고 있다는 그것이 죄인 것을, 이것 설교하고 도대체 뭘 노리는가? 할 때 아무리 성경적으로 주석적으로 올바르고 그거는 교회가 주님의 교회가 아니고 자칫하면 자기 교회가 될 공산이 크죠.
그래서 저자가 누구냐를 물을 게 아니라 이 베드로후서 자체가 래드라는 신학자를 어떻게 조지고 죄인임을 드러내는가? 이런 식으로 고백이 교재에 나와야 되는데 이 인간은, “베드로후서와 유다서를 묶어서 때려죽여도 베드로후서는 베드로가 쓴 게 아니다.”라고 따로 묶어놓은 거예요. 묶어놓고 교재 보면 묶은 이유가 뭐냐 하면, 영지주의 반대하기 위해서. 그 당시에 이미 베드로는 죽고 난 뒤에 AD 60년에서 80년까지 영지주의 반대했었다. 내가 보기에는 베드로후서는 너 반대하기 위해서 썼다.
분명히 베드로후서 보세요.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돼 있잖아요. 뭐가 370년 회의해서 정경에 포함시키느니, 어떠니.
그래서 교재 전체가 그거에요. 무조건 영지주의와 결합한다고 베드로후서를. 내가 보기에는 너하고 결합돼있어. 인간적 사고방식, 그러니까 인간이 성경을 다른 책처럼 분석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 성경은 분석의 대상 아닙니다. 복종의 대상이지. 까라면 까는 거지 따지면 안 돼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적어도, 적어도가 아니라 진짜 대단한 거지만 백부장의 믿음 정도는 돼야 돼요.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온다는 게 뭔 뜻입니까? 해병대에서 고참이 졸병 보고 까라면 까라 안 합니까? 해병대 고참으로 보는 거예요. 누구를? 주님을. 그 앞에서 숨도 못 쉬죠. 주님의 말씀에. 수입이 얼마입니까? 얼마입니다. 바빠서 못 오고. 어디 그런 건방떠는. 어디 해병대 졸병으로 들어와서.
‘선배님~’하고 아양을 떨어도 시원찮은데 어디 거기서 감히 후배가, 감히 졸병이 해병대 고참한테 대들겠어요. 백부장 믿음이 뭡니까? 완전히 자기를 버려버렸어.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옵니다. 생활이 안 되니 어떠니, 어렵다니 사는 형편이 고생스럽다니. 거기다 토 달면 안 돼요. 주신 복이 엄청난데. 오늘 베드로후서 이겁니다. 눈 뜨게 해줬으면 됐다. 딱 그거 아닙니까. 샛별 떴으면 된 거예요. 아무나 뜨게 해준 게 아니잖아요. 여기 1장에 나오잖아요. 눈 뜨게 해줬으면, 샛별 뜨게 해줬으면 그 앞에서 고생 좀 했니, 그것도 사치라.
그래서 베드로후서는 그렇게 만날 영지주의하고 대결해서 어떠니, 그렇게 해석하면 자체가 엉터리고. 그렇게 해석해놓으니까 베드로후서와 유다서 전부다 엉터리에요. 지금까지는 건질만한 게 있었는데 베드로후서, 유다서 이 부분은 건질만한 게 하나도 없어요.
그래서 베드로후서는 1장에 보게 되면 중요한 단어 하나 나오는데 1장 9절에 나옵니다. 적어볼게요. 1장에 중요한 단어 두 개가 나오는데 하나는 ‘소경’이 나오고, 그 다음에 1장 19절에 보면, ‘샛별’이 나오지요.
1장 6절에 나오는 ‘신의 성품’ 그 다음에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우애를, 형제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돼있을 때에 이걸 설명하는데 있어서 이게 없다면 9절에 뭐기 때문에 이게 없다 했습니까? 소경이기 때문에.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 거예요? 믿음, 절제 이건 칸트에 의하면 인간의 본성 아닙니까? 양심에서 만들어낼 수 있는 것 아니에요? 노자, 맹자, 부처 믿는 사람도 있잖아요. 그러나 베드로후서는 그게 아니에요. 소경 같으면 이게 안 된다는 겁니다.
지금 무슨 이야기하느냐 하면, 베드로후서에서 지금 소경이야기를 했다고. 앞에다 믿음, 절제 해놨다 말이에요. 잘 들어보세요. 이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사람과 사람이 모일 때 원리가 있어요. 생각이 같을 때는 사람들이 끼리끼리 모이게 돼있습니다. 유유상종이라 하죠. 생각이 같을 때 세상 보는 관점이 같은 사람까리 모이게 돼있어요.
그러면 베드로후서뿐만 아니고 성경 전체에 성경 자체를 이해하는 성도끼리의 모이는 원리가 뭡니까? 양심입니까, 윤리입니까, 도덕입니까? 아니잖아요. 그게 뭐냐 말이죠. 그게 베드로전서에 보면, 지금 래드는 베드로전서와 후서하고 저자가 딴 사람이라 했거든요. 분명히 그렇게 돼있다고. 그 사람은 백 프로 베드로가 저자가 아니라는 거예요. 내가 보기에는 백 프로 저자 맞아요.
베드로전서의 원리가 뭐냐 하면, ‘예수님의 피 뿌림을 얻은 자’에요. 예수님의 피 뿌림을 받지 아니하면 믿음에 절제, 인내 이 의미를 전혀 모르게 돼있습니다. 베드로전서에서 분명히 예수님의 피 뿌림과 그리고 베드로전서 1장에 보면 성령을 받은 선지자 나오지요. 베드로전서 자체가 뭐냐 하면, ‘성령을 받았느뇨?’라고 묻는 겁니다.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다시 한번 해야 돼요. 처음에 모든 은혜에는 뭐가 있다? 개념이 있다 했지요. 이 은혜의 개념은, 신의 은혜가 아니라 했지요. 누구 은혜라 했습니까? 언어는 인간의 언어입니다. 언어가 있다는 말은 개념의 체계가 시스템이 이미 있다는 말이에요. 이 언어를 그대로 사용해요. 다시 말해서 개념을 그대로 사용해서 주께서 성령이 오게 되면 이 개념 자체를 부심으로 말미암아 이게 죄로 드러나게 함으로 말미암아 같은 언어를 써도 같은 언어다, 아니다?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기존의 언어의 개념으로 유유상종, 끼리끼리 모인 사람이 따로 있을 것이고, 예수님의 피 뿌림을 위하여 피가 묻혀 있는 언어, 그러니까 기존의 인간 언어는 깨어져야 된다는 것을 찾아내는 그런 용어들이죠. 믿음, 절제, 인내, 형제우애 전부다 이런 것으로 진짜 성도가 한 통속으로 모이려면 믿음 안에 피를 찾아내야 되고, 절제 안에 피를 찾아내고, 인내 안에 피를 찾아내야 돼요. 그래야 베드로처럼 순교할 수 있습니다. 순교한다고 떠벌이는 것도 아니고. 곱게 조용한 순교하면서도 순교의 길로 가야 되는 거예요.
절제, 인내, 경건, 형제우애, 사랑 어느 것 하나하나 안에 피 없는 구석이 없어요. 그런데 래드는 이걸 그렇게 보는 게 아니고, ‘자, 이제는 믿었고. 잊어버리고. 새 사람 되었으니까 우리 속에 있는 신의 성품을 발휘하게 되면 층층이 신의 성품에 가까이 갈 수 있다.’라고 주장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뒤에 9절에 소경이라는 말을 왜 못했을까요? 소경하고 갓난아이하고 달라요. 갓난아이는 희망이 있잖아요. 어른 될 희망이 있잖아요. 아직 철이 없어서, 시건 머리가 없어서, 세상의 물정을 몰라서 철이 없는 아이들, 교육하면 가능성이 있지만 소경은 눈 뜨지 않는 한 소용없습니다. 아무리 믿음이 있고, 절제가 있어도 소경이 돼버리면 기존에 자기가 갖고 있는 믿음과 절제 이걸 주장할 수밖에 없죠.
그렇게 되면 예수님의 피 뿌림과 성령 주심, 고난 받음 이게 의미가 없어요. 결국 여기서 피를 찾는다는 말은 베드로전후서의 용어로 사용한다면, 너는 무엇을 위해서 고난 받아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같이 고난 받아라 이 말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21절에 보면, 우리가 자주 놓치기 쉽고 잊어버리고 싶어 하는 게 있는데, 십자가가 갈라디아서에서는 하나의 사건 아닙니까.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는 사건이지만 베드로전서에 보면, 십자가가 길이에요. 그림자가 길어요. 왜 기냐 하면, 우리로 하여금 그 십자가 길을 답습하게 하기 위해서. 철학용어로 ‘반복’, 되풀이죠. 다른 요한복음이나 로마서에 의해서 그 피를 바라보면서. 또 다른 고린도전서에 의하면 피만 자랑하기 위해서.
그런데 예수님이 갔던 십자가는 혼자 가셔서는 발생되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안 만들어져요. 누가 있어요? 주위에 그걸 모독하고 조롱하고. 베드로후서의 중요한 단어 나옵니다. 2장에 ‘기롱’. 베드로후서 오늘 강의할 때 중요한 단어를 포인트로 잡아냅니다. 첫째로 소경, 그 다음에 샛별, 그 다음에 기롱, 조롱. 3장에 나오는데. ‘어떤 사람은 세상이 옛날과 똑같다.’라고 심판에 대해서 그 다음에 ‘기롱, 조롱하는 놀리는 그런 자들이 있는데’라고 베드로후서 3장에 나와요.
베드로후서 2장의 포인트는 ‘테스트’입니다. 이 용어가 어려워요. 롯이 소돔과 고모라에 있을 때에 그 영혼이 상했는데 그게 뭐냐 하면, 주께서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테스트 해보심이라. 천당 가기 직전에 시험 치는 게 아니고, 이미 예수 믿는 순간부터 우리는 매일같이 주께서 주는 시험인데 그 시험문제가 뭐냐 하면, 지금 기롱, 조롱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베드로전서하고 똑같잖아요. 고난 받는 것과 똑같잖아요. 그리고 베드로전서 1장에 나오는 선지자들이 성령 받고 갔던 길하고 똑같잖아요. 선지자들이 기롱 받았겠지요. 그 다음에 테스트 받았겠지요. 그 다음에 뭡니까? 그때 선지자들은 뭘 봤습니까? 너희들은 소경이며 그리고 너희들 마음속에 샛별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게 베드로전후서가 같은 겁니다.
이걸 래드는 저자가 다르다니. 그것도 영지주의 반대한다고 유다서와 같다고. 유다서를 베꼈다. 유다는 예수님 동생이니까, 그것도 래드가 보수주의라서 그 정도 봐주는데, 예수님의 형제인 야고보 동생이니까요.
마찬가지로 그러니까 베드로 죽은 것이 AD 68년 하거든요. 그러니까 AD 60년 됐었고, 베드로후서는 베드로를 참칭해서, 몰라 남의 걸 베껴서, 베드로후서라 해서 아마 그 뒤에 유다서가 했던 영지주의가 확정됐으니까 그 영지주의를 본받아서 나도 베드로 이름으로 쓴 게 베드로후서라는 거예요. 그럼 베드로후서는 외경 내지는 위경 됩니다. 세상에 그게 인간이 성경을 다른 책처럼 분석하는 거예요. 자기가 모르겠다고 하면 누가 뭐래나. 꼭 모르는 게 아는 척해서 문제 아닙니까.
여기 십자가 길을 답습하게 되면, 여기에 반드시 답습하는 것을 조롱하고 놀리면서 공격해주는 세력이 있어야 돼요. 이 세력은 어디서 흘러나오느냐 하면, 바로 십자가를 계속해서 2008년도 십자가, 2009년도 십자가, 십자가를 구성하기 위해서 AD 30년경에 있던 십자가 옆에 좌우에 보좌했던, 십자가 유발시킨 그 세력의 정신이 그대로 이어져야 돼요. 누가 이어지게 합니까, 누가 만듭니까? 주께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제가 주일날 오후에 설교했거든요. 교회는 교회를 위해서 하는 게 아니고 부딪치고 비비면서 뭐가 생산된다? 말씀이 생산되기 위해서 부딪쳐야 됩니다. 이렇게 불신자와 부딪치지 아니하면 십자가가 안 나와요. 십자가 안 나오면 테스트 할 게 없어요.
이미 하나님의 구원기준을 정해져 있고 얼마나 그 기준자체에 대해서 사람들이 기준이라고 알아보려면 그 숨어져 있는 기준이 드러나려면 성도한테 쑤시는 게 있어야 성도는 그때그때마다 ‘아, 십자가 아니면 나는 구원 못 받는다.’라는 테스트에 합격할 수 있는 확인도장을 찍는 겁니다. ‘오늘도 십자가 아니면 안 되는구나.’ 도장 찍을 수 있다 이 말이죠.
그때 뭐가 총동원 돼야 됩니까? 십자가를 유발시킨 십자가 유발자들을 계속해야 되는데 그게 이번에 할 다니엘의 주제에요. 다니엘 금신상의 그림자는 어디까지 입혀졌다? 천국 올 때까지 인자의 나라 올 때까지 그림자 길게 해서, 어디서 그런 강의했죠.
서 있는 우상을 눕혀버리면 이게 초림과 재림된다고. 그러니까 초림과 재림 사이는 텅 빈 게 아니고 십자가 사건으로 꽉 찬 겁니다. 처벅처벅 밟으면 십자가 삑삑 소리 막 나요. 2008년도 모든 게 십자가였고, 2009년도 모든 게 십자가였어요. 피 뿌림의 역사가 계속 되는 겁니다. 자빠뜨리면 초림과 재림이 이어져요.
그럼 이 안에는 뭘 채울 것인가? 바로 십자가로 채워져요. 왜? 그게 새 언약이니까. 마치 구약 전체가 모세언약으로 가득 차 있듯이 신약은 새 언약으로 가득 차 있지요. 그래서 우상이 어떻게, 어떤 경로로써 다니엘 이후까지 우상의 정신이 어떻게 이어지는가? 그건 역사를 통해서 이어지는데 역사가 얼마나 개판인가 그걸 보여주는 게 다니엘과 스가랴에요.
우리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데 무슨 그림자이냐 하면, 바벨론, 느부갓네살의 금신상의 그림자가 먹구름처럼 우리 머리에 덮여져 있어요. 그때 우리는 뭘 느끼느냐 하면, 다니엘 세 친구와 같은 필링을 받아요. 뭔가 외롭다든지, 뭔가 이만하면 됐다 싶으면 어디서 날아왔는지 또 비 복음적 공격이. 어떻게 알았는지 귀신이 알아서 비 복음으로 시비를 걸고.
심재성 목사님이 이번 교회 잘하면 되지, 시키는 대로 해야지. 항상 시키는 대로 해야지. 시키는 대로 다해도 걸리는 게 십일조고 주일성수고. 보통 다른 부교역자는 그것을 동의하면 되는데 이 사람은 고집 있어서 동의를 안 해요. 결론적으로 고집 때문에 고생하는 거예요. 리포트 써서 김정일 찬양합니다. 이러면 될 건데 석원태 찬양하듯이 김일성의 대를 이어 김정일을 찬양합니다. 이렇게 쓰면 졸업하는데 그걸 못해서 불려가서 “너, 왜 안 썼노?” 그래서 어느 군소교단 목사 안수 받았답니다. 내가 “돈 줬지요?” “예. 줬습니다.”
바로 베드로후서가 경건과 인내 꾸준히 뭐냐? 왜 경건해야 되는데, 왜 인내해야 되는데? 네가 뭐 때문에 인내하고 있나, 지금? 양심 때문에 인내하느냐, 아니면 주의 피 뿌림 때문에 인내하느냐? 형제 사랑을 왜 하는데? 아무나 형제가 아니잖아요. 피 때문에 형제 사랑하잖아요. 그걸 이야기하는 거예요. 자기 경건 과시하려고 있는 게 아닙니다. ‘나 수준 높다.’ 그걸 보여주려고 절제와 인내하는 게 아닙니다. 베드로가 갔던 그 길이고, 주님이 갔던 그 길이에요. 이 코스가.
같이 봅시다. 베드로후서 1장 5절. “너희 믿음에 덕을” ‘믿음에 덕’ 표준이 누굽니까? 모델이 누굽니까? 예수님밖에 더 있습니까. 베드로도 아니고 물론 나도 아니고 하여튼 요한도 아니고. 예수님의 믿음의 덕이 뭐냐? 예를 들면 이런 거지요. 제자들이, “저 인간들이 예수님 욕하는데 하늘에서 불 내려서 조져버리죠.” “냅둬라. 날 반대하지 않는 자가 하나님 위한 자다.” 이렇게 해놓고, 어떤 경우는 또 반대로 이야기하죠. “날 함께 하지 않는 자가 날 해치는 자다” 했거든요.
그런 경우가 모순된 경우라도 이 경우를 쭉 넣으면 어떤 인내를, 경건을, 형제우애를 적극적으로 해야 될 것과 소극적으로 할 때를 구분되는 겁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든 한 가지 특징은 절대로 자기 윤리나 자기 성화와는 아무 상관없다는 것.
이거는 소경이 아닌 사람, 소경이 아니라는 말을 구체적으로 해봅시다. 소경이 아니라는 말은 베드로가 뭘 의식하겠어요? 진짜 베드로니까 옛날 예수님하고 같이 있으면서 나왔던 경험이잖아요. 그렇다면 베드로가 이것도 모르는 놈은 다 소경이라는 말은 결국 예수님의 안목이죠. 예수님의 안목을 이젠 베드로 본인이 갖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베드로가 이야기할 때 예수님처럼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아이고, 인간들아. 소경들아.’ 이건 요한복음 9장에서 예수님이 이야기했지만 이젠 베드로가 이야기할 수 있는 겁니다. 왜? 베드로는 19절에 보면 자기 안에 샛별이 떴어요.
그러면 샛별이 떴나는 말은 뭔 뜻입니까? 지금까지는 나의 윤리, 나의 경건, 나의 신앙으로 살다가 나의 신앙, 윤리 이런 것 다 포기하고 예수님의 믿음과 예수님의 소망과 예수님의 사랑 그것의 능력이 자기 속에 지금 작동하고 있다는 겁니다.
샛별이 떠올라 있다는 말은 진짜 쉽게 이야기해서 이렇습니다. 내 안에 샛별만 남았다 이 말이고, 다른 것은 전부다 헌 별이다. 헌 별임을 오히려 더 드러내고 드러내죠. ‘헌 별은 가라. 샛별 떴는데 니가 왜.’ 그렇다면 샛별, 헌 별 우리 안에 다 들어있겠지요.
이 베드로후서를 보면서 베드로가 저자가 맞나 따지는 것은 기존에 우리가 했던 행세, 우리가 옛날 샛별 없었을 때 성경을 보던 인간적인 것, 그저 우리에게 있지요. 그게 있고 샛별 뜨면 ‘주여, 이래서 내가 헌 별이군요.’ 다시 깨닫게 됩니다. 깨닫게 되면 그게 절제로 나오겠지요. 믿음으로 나오고, 덕으로 나오고. 그러니까 믿음의 덕, 절제, 인내, 경건 공통적으로 특징이 뭐냐 하면, 자기 생각을 포기했다는 뜻입니다. 만약에 자기 생각을 포기 안 하면 절대로 남에게 절제, 인내, 덕 안 됩니다. 꼭 상대방을 이용하려고 덤벼들지.
오늘 십자가마을에 아침에 보니까 심 목사님 글 올려놨어요. 외로워서 교제를 원한다고. 내가 리플 달아놨어요. “사랑받으려 하지 말고 주께 사랑 듬뿍 받았으니까 외롭다고 사랑받을 생각하지 말고 주께 받은 사랑이나 내놔라.” 그 앞에 글 하나 더 달아놨어요. “사람들은 이근호는 괜찮은데 그 주변에 있는 사람 미워서 못 하겠다고 수백 번 더 들었는데 그게 뭐냐? 사랑받으려고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들 희생하신 분들입니다. 복음을 위해서.” 서경수 목사님, 그렇죠? 희생하고 있지요. 희생하고 있는데 저거들은 “에이, 사랑 없더라. 사랑 없는 데 왜 가느냐.” 하는 거예요.
예수님은 이 땅에 미움 받으려고 온 사람이에요. 그 길을 우리가 답습해서, 왜 우리는 미움 받아도 괜찮은가 그걸 보여주는 게 절제요, 인내요, 믿음입니다. 안 그러면 조금만 건드려서 성질나지요. 만약에 자기주장, ‘나 잘 믿는다. 난 예수 믿는다.’ 성질나잖아요. 너 잘났나? 나 잘났다. 이래 되지. 그게 무슨 절제고 덕이고 믿음이고 인내입니까? 자기를 포기해야 믿음, 덕이 되지요.
그러니까 이것은 바로 에베소에나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성령의 열매하고 같은 맥락입니다. 갈라디아서는 ‘육에 속했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베드로에서는 자기가 예수님과 함께 다녔기 때문에 뭐라고 합니까? ‘에이 소경아.’ 갈라디아서에서는 ‘성령 받으라.’ 하고 베드로후서에는 ‘샛별 떴다.’ 하고.
19절에 보면, 샛별 뜨기 전에 반드시 뭐가 전제 돼야 되지요? 어두움이지요. 여기에 ‘소경’이라는 말, 그 다음에 ‘샛별’이라는 말 그 중간에 있는 말은 당연히 뭐냐? ‘어두움’이에요. 그러니까 결국 베드로는 모든 인간은 샛별 뜨기 전이니까 어두움에 속한, 요한복음 3장하고 똑같네. “빛에 거하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어두움에 속한 자는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어두움이 드러날까 함이요.” 지가 발각될까 겁난다 이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글을 쓸 때 설교도 마찬가지에요. 글을 쓸 때 발각당한 상태에서 쓰면 글이 다른 사람들이 빛을 느껴요. ‘이 사람 어둡구나’를 보는 게 아니고 이 사람 샛별 떴구나 이래 보는데 자꾸 감추려고 글을 쓰면 지는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도배를 하고 하나님 찬양으로 도배를 해도 ‘아이고 어두워서 보질 못하겠다.’ 이러죠. 요즘 정낙원 목사님 빛 떴잖아요. 솔직한 것 다 써. 세상에 글 쓰면서 목사가 술 먹은 이야기 쓸 일 있겠습니까, 지금 장사 방해되게.
글을 봐도 환하게 밝은 글이 있는 반면에 침침하니 짜증 지대로다 하는 글이 있어요. 신학용어로 도배를 해놓고 해도 짜증이 나요. 이야기하니까 여러분 얼굴이 심각해져버렸네. 괜히 이야기했나. 글이 좋다는 말은 환하게 밝아야 돼요. 밝으면 보는 사람도 기분이 좋은 거예요.
심 목사님이 이야기하는 게 자기가 두 군데를 거쳤답니다. 하나는 박용기 거쳤고, 하나는 이광호 목사를 거쳤는데, 박용기는 예수 피 자랑하는 게 아니고 자기 신학체계 자랑해서 못 견디겠고, 이광호 목사는 아무리 들어도 감동도 안 되고 답답하다는 거예요. 성경해석이. 그런다고 해서 심 목사님이 됐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분은 그것조차 무서워하는 분이니까.
뭐냐 하면, 설교자 본인이 강단에 설 때 노림수를 가지고 설교하면 안 되고, 자기가 복음에 취해서 술 취한 것 알지요. 술 안 잡숴봤어요? 안 잡숴봤으면 말을 하지 마. 자기가 봉사야. 어떤 권사가 안 나왔는지, 집사가 늦게 왔는지 이런 것도 안 보이고, 헌금이 몇 푼 들어왔는지 그것도 안 보이고, 자기가 샛별 뜬 게 고마워서 그 자랑할 때 다른 교인도 샛별 뜹니다. 좋아서. 어둡질 않아요. 설교 끝나고 침침하질 않아요. 목사 자기 혼자 신바람 났는데. 황수관이라.
지금 베드로가 그런 심정으로 글을 썼다고. 그런데 그걸 가지고 베드로가 안 썼지 따지니까 영지주의가 어떠니. 영지주의 말고 너하고 이야기해. 무슨 영지주의보고 이야기해요. 그 당시에 교회에 베드로 죽고 난 뒤에 AD 80년경에 영지주의가 들어와서 교회를 엉망진창 만들어놨다는 거예요. 그래서 나온 책이 하나는 유다서고, 하나는 베드로후서라는 겁니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는가 보니까 여기 베드로후서 1장 6절에 절제, 인내해서 비윤리적인 요소가 있고, 유다서에도 오늘 해야 될 거니까 같이 봅시다. 4절에 보면,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저희는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치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라고 돼있거든요.
이걸 영지주의라 하는데 영지주의든 뭐든 다 포함되지요. 그런데 왜 주님의 믿음을 자기의 색욕거리로 방탕거리로 만드느냐 하면, 누가 살아있기 때문에 그래요? 나. 나가 철판처럼 살아있는 이상은 여기서 믿음의 도가 들어와도 전부다 튕겨버려요. 오늘 중요한 말 했다. ‘튕긴다’ 예수님 십자가 복음, 피 해도 튕겨버려요. 파장이 심해서. 복음적인 건 다 튕겨요.
그럼 누가 남아요? 자아가 남지요. 그럼 자기 속에 인간적인 짐승적인 욕망이 들끓으니까 껍데기는 복음이 좋다 하고, 껍데기만 복음이고 자기 욕망이 있으니까. 복음이 들어오질 않았어. 튕겨버렸으니까. 아주 강력하게 밀어붙여버렸으니까. 그러니까 이거는 어떤 것을 해도 내가 살아있는 한 그게 경건이 됐던, 그게 방탕이 됐던 상관없이 그건 주님을 욕되게 하는 거다.
경건을 자칫 생각하면 예수님이 십자가 진 걸 생각 안 하고, 예수님이 ‘경건하라’ 경건하라에서 경건하라로 끝내버리는 예수님의 사역이 되고, 예수님의 일생이 돼버려요. 뭔 소리인지 아시겠습니까? “착해야 돼. 산상설교 알지. 똑바로 살아. 알겠어. 형제 보고 욕하지 마. 하늘나라 간다. 내가 시키는 대로 잘해.” 이러고 그냥 가버리면 뭐가 빠졌습니까? 십자가가 빠졌잖아요.
그런데 십자가는 뭘 공격한다? ‘경건하라’가 아니고 왜 인간은 경건하지 못하고, 왜 인간은 죄 짓는가? 왜 하나님 말씀을 버렸는가? 그건 누가 살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나도 내 마음대로 못하는 나가 들어있는 것을 십자가 능력은 내가 간수 못하는 나를 그분이 나를 직접 치게 돼있어요.
융이라는 사람은 말하기를 ‘자아’와 ‘자기’를 나눠요. 에고와 셀프를 나눠요. ‘에고’라 하는 것은 진짜 육체 덩어리고, 자기, ‘셀프’라 하는 것은 육체 덩어리를 경건으로 잘 예쁘게 포장해서 밖에 나갈 때는 말조심해. 예쁘게 포장한 자아 있잖아요. 그걸 자기라 하고 들끓는 그걸 자아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아는 성경을 보던 뭘 하던 도를 닦던 자아는 괜찮은 자기로 바꾸어서 갖고 가는 것이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거라 이렇게 가르치는 겁니다.
그럼 뭐가 빠졌습니까? 직접 자아, 자기를 다 치는 십자가의 도, 피 그게 빠져버리니까 껍데기는 십자가인데 속에는 역시 자아가 살아있을 때 유다서 같은 이런 지적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관리자(IP:220.♡.176.169)
09-06-17 17:42
부산090609b조지래드29신약신학-베드로후서b
20090609b 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베드로후서
(강의:이근호 목사)
베드로후서 1장 16절 봅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그 다음에 부사 나오지요.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그 다음 변화산 이야기는, 내가 봤다는 거예요. 그럼 우리는 묻지요. “아니 베드로 선생님, 볼 때 잘하지. 그때 잘하지.” 베드로 하는 말이, “샛별이 안 떠올랐어.” 이건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불트만이나 바르트나 이걸 해명하기가 골치 아픈 거예요. 하나의 사건이 내 안에 사건이 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게 문제입니다. 십자가 사건이잖아요. 십자가 사건을 불트만 식으로 해봅시다. 이게 역사인데 이게 내 안에 들어오면 내 안에 ‘역사적’이 돼버린다 말이에요. 그런데 불트만의 이런 주장이 잘못이다 이 말이죠.
내 안에 역사가 내 안의 역사적이 되니까, ‘역사’와 ‘역사적’이 달라요. 역사의 의미만 홀라당 빼먹는 거예요. 뭔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이순신 장군이 죽었잖아요. 나는 현장에 없잖아요. 하지만 우리는 이순신 장군이 죽었다는 걸 알지요. 나를 위해 희생한 것도 알잖아요. 그거는 역사적 의미만 빼먹잖아요. 역시 이순신 장군은 역시 옛날 사람이잖아요.
그게 십자가냐 이 말입니다. 아니죠. 그건 십자가가 아니죠. 사도 바울이 이야기한 십자가는 그게 아닙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었나니” 이 말은 의미만 빼먹은 게 아니에요. 지금 날마다 죽는다. 그 십자가가 내 안에도 지금 역사가 돼야 돼요. 이걸 불트만은 해명 못하겠다는 거예요. 해명 못하니까 여기다 뭘 집어넣느냐 하면, ‘믿음으로’ 이런다고. 이게 [두지평]이란 책을 지은 그 사람 사상하고 똑같은 거예요.
“과거에 성경책이 오늘날 은혜 되려면 믿음으로 의미화 돼야 된다.”라고 이야기했어요. 절대로 그 사건이 지금의 사건 되면. 근데 다메섹에 내려간 사도 바울은 뭡니까? 죽으신 예수님이 그때 만나고 헤어졌습니까? 아니지요.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역사가 자기를 삼켰지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내가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계신다. 그냥 ‘예. 알겠습니다. 앞으로 잘할게요.’가 아니라 내 안에 예수님이에요. 내 밖의 예수님이 아니고. 그전까지는 과거의 예수였다가, 다메섹에서 만날 때는 내 밖의 예수였다가 그 다음에 내 안의 예수가 돼버렸어요.
이걸 구약적으로 이야기하면, 모세가 이스라엘 내부인 되었다가 주께서 일부러 사람 죽이게 만들어서 외부인 되었다가, 그 외부인인 모세가 내부인 되면서 모세가 갖고 있는 게 뭐냐 하면, 율법인데 율법을 눈앞에 둔다 했다가 그 다음에 더 나가면, 신명기에 보면, 율법이 할례를 껍데기에 하지 말고 마음에 할례를. 갑자기. 여기서 불가능이라. 하나님의 법이 마음에 안 된다 말이죠.
안 되니까 에스겔이나 예레미야에 보게 되면 하나님의 신이 오실 텐데 신이 오게 되면 네 바깥에 있던 율법이 네 마음속에 들어올 것이다. 이걸 가지고 새 언약이라. 새 언약 받았습니까? 무슨 말입니까? 당신 속에 예수님 계십니까? ‘잘 믿습니까?’ 이걸 묻는 게 아니고 ‘당신 속에 예수님 있습니까?’ 이래 묻는 거예요.
변화산 사건 있잖아요. 몰랐어요. 신기하다. 초막 셋을 짓겠습니다. 이랬을 뿐이지 여전히 누가 살아있습니까? 베드로 자기는 살아있었다가 나중에 샛별이 떠오르게 되면 내 안에 사건, 이런 참 어려워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데 해봅시다.
변화산입니다. 과거 사건이죠. 샛별이 떠올랐어요. 쉽게 말해서 성령이죠. 성령이 베드로에게 들어왔습니다. 그러면 이 사건은 과거 사건입니까, 지금 사건입니까? 지금 사건이에요. 지금에 한꺼번에 들어있는 사건입니다.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아요. 물로 심판 받았습니다. 과거지요. 불로 심판받았습니다. 미래잖아요. 그런 지금은 뭡니까? 물과 불 사건, 양쪽 다 현재 베드로 안에 포함돼있죠. 다른 사람은 조롱하죠. 기롱하죠.
진도 나가봅시다. 여기서 머물 수 없으니까. 그래서 20절에 보면,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까 교인들에게 뭘 이야기해야 됩니까? ‘사사로이 풀지 마세요.’ 이러면 안 되고, 사사로이 푸는 예를 들어야지요.
그럼 그 예를 목사가 우에 듭니까? 우에 들기는 목사 지가 지금까지 해왔잖아요. 신학적으로 해왔잖아요. 사사로이 풀었잖아요. 이것 하면 이런 이득보고 이것 하면 교인들 경건 더 될 거고. 하여튼 인간이 가능할 수 있는 것이 사사로이 푼 거예요. 진짜 사사로이 푼 게 아닌 것은 뭐냐? ‘아이고, 불가능합니다.’ 이건 사사로이 푼 게 아닙니다. ‘주께서 하시겠지요.’ 그게 사사로이 안 푸는 겁니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사람이 뜻으로 낸 것이 아니기 때문이 사람이 그걸 지킬 수 있다, 없다? 못 지키지요. 자기 속에서 나왔으면 자기가 지킬 텐데 자기에게 나온 게 아니기 때문에 누가 지킵니까? 내가 못 지키면 구원 못 받잖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걸 나 되신 분이 그 능력까지 아울러서 세트로 주니까 우리가 안 해도 되게 돼있지요. 그것이 마지막 구원받을 때 ‘제가 한 게 아니고, 주께서 하셨습니다.’ 내가 안 했는데 되게 했어요.
강희남 목사가 자살했지요. 자살한 이유가 자기 뜻대로 안 된다고 자살했어요. 노무현 자살한 것이 자기 뜻대로 안 되서 그래요. 그러면 강희남 목사나 노무현 전 대통령은 세상을 뭐로 봅니까? 하나님의 사건으로 보지 않고 자기중심적으로 봤지요. 자기중심적으로 봤는데 자기 뜻대로 안 되니까 ‘난 있어도 소용없구나.’ 하고 죽어버렸어요.
그런데 이렇게 죽을 사람 같으면 사실 누구도 포함된다? 우리도 하루에 골백번도 더 죽습니다. 심방가고 기도했는데 다른 교회 가버리고. 분명히 설교 듣고 손들고 “목사님, 은혜 받았습니다.” 다음주 등록할 줄 알았더니 안 나오고. 화딱지 나서 하루에 골백번도 더 죽습니다.
그런데 구원은 누구 소관입니까? 주님이 살려줘야 안 죽고 살아있는 거예요. ‘너는 더 욕봐야 돼. 너는 더 조롱당해야 돼. 십자가? 너한테 멀었어. 적을 더 만나야 돼.’라고 십자가 그 길을 가게 하기 위해서 주님 좋으라고 악착같이 안 돼지지요. 살려주니까. 황 전도사님 온 몸이 다 아파서 엎어졌다? 아직까지 살려줘서 기어이 ‘적이 누구냐’ 깨닫게 하죠. 누가 예수를 죽였는가?
2장을 봅시다. 2장이 바로 영지주의, 유다서를 베꼈다는 내용입니다. 거짓선생들이 나타나는데 이 대목의 교재를 보면서 ‘래드야 너다. 너보고 이야기하는 거다.’ 거짓선생들이 일어났는데 자기를 사신 주를 부인하고 호색하는 것을 좇았다. 주를 부인하고 색을 좇아가는 게 뭐냐 하면, 눈 돌리기거든요. 관심사 돌리기입니다. 관심사 문제거든요.
관심사를 돌린다는 말은 이게 현상학까지 이야기할 필요 없습니다만 철학의 현상학에 보면, 반드시 자아라 하는 것은 자기가 봐서 자아를 모르고, 잘 들어놓으세요. 관심사로 곧 자기입니다. 훗설이라는 현상학 창시자가 아주 중요한 말 했어요. 인간의 주체가 뭐냐? ‘내가 누구냐’ 그동안 살폈는데 현상학에 와서 현상을 바라보는 관심사, 나는 현상을 이런 관심으로 본다, 그게 바로 현상이 아니고 ‘너’다 말이죠. 사람은 보는 것만 보게 돼있어요.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다고.
그러니까 성경 설교자가 모든 걸 다 할 수 없어요. 자기 관심사만 풀어놓으면 돼요. 목사가 설교 구절 풀고 하는데 교인들은 복잡해서 안 듣습니다. “그래, 그래. 목사, 너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고?” 그것만 들어요. 그럼 복음을 아는 사람은 뭘 외쳐야 되는가? “그러니까 우리는 주님의 은혜 아닙니까.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갑시다.” 이렇게 돼는 거예요. 이러니까 감사할 만 하죠. 주님이죠.
시편에 보면, “주는 산성이시오, 요새이시오, 피난처시오” 이래 돼있지요. 주는 이 뒤에 산성, 요새, 피난처 이 말은 그 사람은 전쟁 중에 있는데 자기가 자기를 건질 수 있다, 없다? 절망이에요. 절망일 때 비로소 주님이 산성으로 보이고, 요새로 보이고, 피난처로 보이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까 주를 부인해버리니까 뭐가 날아가 버려요? 산성도 날아가 버리고, 요새도 날아가 버리고, 피난처도 날아가 버렸어요. 남는 것은 자기밖에 안 남으니까 그게 자기 자신이 호색을 하고 색을 좇는 그 자체가 결국 전에 예수님이 돌아가셔야 했던 죄 많은 죄인이 호색과 방탕과 세상정욕과 돈을 밝히는 그 모습이 그게 현상학에서 그 뭉치가 ‘나’에요.
그러면서 사람은 뭐라 합니까? “내 마음은 안 그런데.” 만날 자아와 자기를 해놓고 자기가 안 되면 자아로 피신해버리고. “목사가 다 그렇지.” 이런 식으로 자꾸 변명하고. “나 어쩔 수 없어.” 네 어쩔 수 없다는 걸 증명하지 말고 예수님이 누군가 그걸 증거하고 그렇게 해도 자꾸 자기변명하고 있는 거예요.
2절에 보면, “진리의 도가 훼방을 받을 것이요 저희가 탐심을 인하여 지은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를 삼으니” 보세요. 관심사가 이거 아닙니까. 뻔하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이를 탐하지 마라. 이러면 안 돼. 이것도 성경해석 잘못된 거예요. 세상에 이를 안 탐하는 사람 누가 있어요. 다 탐하지. 이러면 안 되고 뭐다? 우리는 주를 바라봐야죠. 간단합니다.
왜 보는데? 주는 산성이고, 요새고, 피난처니까. 왜 그런데? 내가 개판이니까. 내가 살 길은 주님밖에 없다. 교인들이 오랜만에 왔습니다. 잘난 척하러 왔습니다. 설교하고 난 뒤에 나를 구원한 건 주님밖에 없다. 왜? 나는 쪼다니까. 최고 아닙니까. 최고 설교에요. 그래 되면 그 다음부터는 교회 나가면서 싸울 일 없고, 삐질 일 없고. 그야말로 형제우애, 절제, 경건 하지 말라고 해도 해요.
4절에 봅시다. 역시 베드로가 주님한테 잘 배웠어요. 예수님 공생애, 예수님이 누구 때문에 죽었는지 알아요. 마귀 때문에 죽었지요. 악한 천사까지 동원시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베드로후서는 신학은 없고, 윤리만 있다 이러거든요. 유다서도 마찬가지고. 그거는 래드, 니 생각이고. 예수 그리스도 전체에 악마가 동원될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여기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이게 에녹서에서 베꼈느니, 시체 갖고 다투는 것은 모세승천기에 나왔던 이야기다. 맞지요. 하지만 아까 제일 처음에 했지요. 인간의 언어의 개념으로 규정된 사상, 형식을 그대로 빌려오는 겁니다. 유다서나 에녹서나 모세승천기 했다고 해서 성경이 아니다. 이렇게 되면 곤란해요. 그런 건 도저히 안 됩니다.
그러니까 세상 것 사용해서 성경에 쓰였으면 실제로 있는 거예요. 어디에 쓰여 있든 간에. 이런 설이 있다 하면 안 됩니다. 이런 설이 있다는 걸 내가 안다. 이게 아니라 진짜로 그래요.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이게 또 문제가 돼요. 요한계시록에서. 지키는 게 맞나, 아니면 자기가 빠져나오느냐 하는 거예요. 안 그러면 들어갈 뻔하다가 안 들어가고 마지막 때 최후에 들어가느냐? 도대체 귀신, 마귀 이놈들이 현재 어디 가둬져 있느냐, 아니면 빠져나왔느냐?
빠져나온 게 맞다. 아니야. 지금 가둬져 있다. 가둬져 있으면 어떻게 귀신들이 활개 치겠는가? 빠져나왔지. 빠져나왔으면 지킨다는 말이 성립 안 되잖아. 어느 쪽이 맞노? 사람들이 그런데 관심사가 있어요. 주는 관심 없고 마귀한테 관심 있다고.
주께서 마귀를 사용한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중간에 하나 집어넣으면 해결돼요. 뭐냐? 주께서 말씀대로 마귀를 사용하신다. 이래 돼야 돼요. 주께서 마귀 다루는 것에 관심 두지 말고, 주께서 말씀대로 다루어버리면, 우리한테 어떤 해석에 이익이 있느냐? 주께서 나를 다루신다 하지 말고, 말씀대로 나를 다루면, 마귀가 무저갱에서 빠져나가서 활동하는 것도 걱정할 필요 없어요.
왜? 말씀대로 필요하기 때문에 다뤄야 되고, 현재 내가 어려움에 처한 것도 걱정할 필요 없어요. 왜? 말씀대로 마귀를 만나게 된다. 마귀 만나서 엎어지고 자빠지고 까불다 회개하고 돌아온다. 전부다 주께서 말씀대로. ‘주’가 뭐냐 하면, 구약의 언약의 하나님이에요. 언약대로, 다른 말로 하면 말씀대로 누구도 사용하고? 마귀도 사용하고.
그 사용방법이 뭐냐 하면, 2장 9절, 중요한 단어 나온다 했지요. 테스트, 시험. 주께서 경건한 자를 시험 치지요. 시험 치는데 누굴 활용한다? 무저갱에 있는 몇 놈 빼내서 마귀, 악마 빼내서 어디 시험 치는데 동원시킨다? 자기 백성을 믿음이 이만큼 중요하다는 걸 알려주는데 유용하게 마귀를 무저갱에서 빼냈다, 집어넣다 말씀대로 사용해서 성도를 힘들게 하는 거예요. 이 땅에 삶에 미련두지 않게. ‘더러운 세상 왜 성공하려 하느냐? 치워라. 성공, 실패 이 땅에서 하는 게 아니다.’라고 시험 치는 그 이야기를 2장에서 하고 있는 겁니다. 쉽지요.
이걸 만약에 해석을 여러분 똑바로 삽시다. 이렇게 설교하면 설교 끝나고 난 뒤에 교인들이 무거워서, ‘왜 경건하지 않습니까? 왜 절제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나오면 전부다 푸~욱. 목사님 시험에 불합격되지 싶어서.
그 말은 뭐냐 하면, 나 목사는 똑똑하게 사는데 왜 똑똑하지 않습니까? 목사가 한풀이하는 것으로 느낌이 그렇게 와요. ‘나도 쪼다입니다. 주의 은혜 아니면 안 됩니다. 말씀대로 되서 구원받았지 내 힘으로 구원 못 받습니다.’라는 식으로 하게 되고, ‘마귀의 모든 시험도 말씀 아래 있습니다.’ 해버리면, “아, 이렇게 실수하고 시험하는 것도 주께서 테스트한 거구나. 내가 왜 주님만 쳐다봐야 되는지.” 간단하잖아요.
그래서 항상 설교할 때 ‘우리는 못합니다.’ 이런 인간적인 사사로운 해석도 곁들어줘야 돼요. 그래야 차이점을 알게 아닙니까. 하고 주께서 말씀대로 다하십니다.
시험을 치는데 여기 7절에 보면,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요새 말로 옮기면 담배 피는 사람 때문에 고통하는 아무개. 그것도 식당에서. 지난주에 우리교회에 얼마나 재미있는 일이 있었는지 몰라요. 담배 피는 이야기했더니만 담배 피는 교인들 깜짝 놀라요.
여기 11절 보세요. “더 큰 힘과 능력을 가진 천사들이라도 주 앞에서 저희를 거스려 훼방하는” 이거는 모세승천기에 ‘모세 시체 달라.’ 하는 것 때문에 티격태격하는 대목에서 미카엘 하고 마귀하고 붙었는데, 미카엘이 뭐라 했느냐 하면, “네 마음대로 해라. 주께서 알아서 하시겠지”라고 직접 달려들지는 않았다는 그 대목을 쓰는 거예요.
그 말이 심판을 하나님께 맡기고 마귀, 너도 말씀대로 움직이지 너도 네 마음대로 하는 게 아니다. 이걸 소급해서 적용시키면 에덴동산에 뱀이 찾아온 것도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 되시는 분이 주님인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뱀의 침범을 허락하신 거예요. 다른 말로 하면 생명나무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선악과 이용한 거예요. 선악과 하나, 희생번트 알지요. 1루에서 2루 보내기 위해서 선악과 희생번트 대서 생명나무 한 점 난 거예요.
결국 생명나무 뜻은 뭡니까? 선악과를 따먹으면 안 되는 그걸 통해서 생명나무는 따먹어서 얻는 게 아니라 생명나무 스스로 나한테 줘야 얻을 수 있다 이 말이죠. 그래서 주님을 찬양하기 위한 하나님 작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작전에 누가 동원되었느냐? 거짓말쟁이 뱀이 동원되었어요.
영화 잘 만들었어요. 봉준호 감독 아무것도 아닙니다. 박쥐보다 훨씬 더 낫습니다. 마귀까지 이용해서 주만 영광 받는, 아들만 영광 받는 영화. 그 영화를 볼 수 있는 특수 안경을 샛별로 받았으니 이런 복이 어디 있습니까? 입체영화 보는 안경 없으면 지금도 어둠 속에 헤매고 있을 텐데 그것 생각하면 고생한 건 고생도 아닙니다. 고생해보세요. 안경 쓰는가, 샛별 쓰는가? 못 쓰지요.
그 다음에 2장 13절부터 보면, 여기에 망했던 스타가 나와요. 허장강 있잖아요. 나쁜 역할하는 세 사람. 첫째는 뭡니까? 15절에 저주의 자식이 뭐지요? 발람. 발람 말고 또 나오는데? 유다서고. 발람이야기 해야 되겠습니다. 오늘 시간 다 못하지 싶은데. 못 해도 괜찮지요?
발람 이 사람은 어떤 역할 하는 사람이냐 하면, 멈추지 않는 질주하는 기관차에 끼어죽은 사람이에요. 이스라엘은 멈추지 못하는 전력 돌진하는 기관차 같습니다. 브레이크가 파열됐어요. 막을 민족이 없어요. 그런데 모압이 막아설 때 발람, 지도 막아섰잖아요. 그런데 이스라엘 기관차 충돌하기 오 미터 전에 저주를 축복으로 바꿔버렸어요. 안 그러면 된통 당하기 때문에.
그래서 발람이란 것을 왜 기관차 앞에 손 벌리고 저주로 막아보려고 하나님께서 했느냐? 이 발람조차도 이스라엘이라는 기관차가 돌진하는데 그 힘이 어디서 오냐 하면, 여호와에서 오고, 하나님 언약에서 오잖아요. 뭐까지 저주마저 축복으로 변하게 하는 힘이 주어지느냐? 무엇까지 사용하신다? 발람까지 사용해서 추진력으로 이스라엘이라는 기관차를 질주시키는 힘으로 사용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저주가 없으면 힘이 없어요. 저주가 없으면 복으로 전환 안 되고 힘이 없다고.
그러면 내부 장치에 어떤 장치가 있느냐 하면, 외부에 있는 저주는 다 가져오너라. 이걸 뭐로 바꾸겠다? 축복으로 전환시키는 장치가 이스라엘 내부에 있다, 없다? 있음을 알아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걸 몰랐어요. 자기 승리한 것만 되게 좋아하지, 자기 내부에 인간이라는 저주가 계속해서 축복으로 바꾸는 그 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