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508-(2) 서울강의녹취 : 에베소서 제 36강
20090508-(2) 서울강의녹취 : 에베소서 제 36강
이름 : 오용익(IP:59.3.147.39)
에베소서 제 36강 (이 근호목사, 2009년 5월 8일-(2), 서울의존교회)
첫째시간에 했던 것을 다시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생각나시는대로 답변해 보세요. 육과 영이 있는데 육은 눈에 보이는 것, 영은 눈에 안보임. 그런데 육은 안 보이는 영을 싣고 다니는 거예요. 예를 들어 육은 텔레비전 같이 물질이고 재료이고 영은 그 텔레비전을 통해서 나오는 드라마같은 것입니다.
TV안에 탤런트가 없지요. 그런데 육은 무엇을 싣고 다닌다? 영의 세계를 싣고 다니지요. 영의 세계에는 두 가지 일이 있습니다. 성령이 하실 일과 악령이 할 일, 이 두 가지를 육에다가 담아버리면 육이 두 종류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는 성령 받은 육이고 하나는 악령 받은 육인데 이 세상에는 이 두 종류밖에 없어요. 다른 사람은 없어요. 성령 받았나, 악령 받았나, 이 두 종류 외에는 없어요.
그러면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나는 영을 안 믿는다’ 해도 소용없어요. 죽으면 다 흙이 되지요. 흙이 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마지막 때에 예수님께서 다시 부활시키죠. 한쪽은 무엇으로 천국으로 부활시키고 나머지 한쪽은 지옥으로 부활시킵니다. 이러한 시나리오가 다 어디서 나온 겁니까? 육에서 연구해서 나온 것이 아니고 영에서 나온 것입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 하면 ‘목사님, 그 말이 맞습니까? 증거가 있어요?’ 라고 나올 겁니다. 그래서 제가 증거를 뭐라고 댔습니까? 육과 영이 만나는 그 지점이 증거라고 했지요. 육과 영이 만나는 그 지점을 뭐라고 했습니까?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서 희한한 일이 생겼지요. 예수님이 죽기는 죽었는데 예수님의 그 무덤이 무슨 무덤이 되었어요? 빈 무덤이 되었지요.
분명히 묻었는데 흙이 되어야 할 분이 흙이 아니고 부활체, 영체가 되었지요. 그것이 부활입니다. 그래서 부활이 없으면 우리의 믿음도 헛되다고 했습니다. 두 번째 시간을 해 봅시다. 베드로전서 3장 18절을 봅시다.
베드로전서 3:18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질문 나갑니다.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방법이 뭡니까? 1) 우리의 열심가지고. 2) 우리가 성경공부해서. 3) 우리가 헌금해서. 4) 우리가 전도해서. 뭡니까? 우리 힘으로 될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전부 다 아니지요. 그러면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방법은 뭡니까? 우리는 육이니까 우리가 아니지요.
그리스도께서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면 우리는 뭡니까?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요. 나아가면서 우리는 뭘 봅니까? 나아가면서 우리 앞에 계신 예수님을 보는데 예수님이 어떤 분이라고요? 예수님은 대신 죽으신 의인이 되고 우리는 그 예수님 앞에서 불의한 자가 되지요. 맞잖아요. 의인이 불의한 자를 위해서 대신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지금 하나님께 가잖아요.
그러니까 주님이 앞장서고 우리가 따라간다면 앞서가신 예수님은 의인이고 그 뒤를 따라가는 우리는 불의한 자가 되고. 세상에 우리가 불의한 자가 되어서 이렇게 즐거운 적이 없어요. 내가 불의하다는 것 때문에 너무나 즐거워요. 왜? 앞장서서 가시는 분이 그냥 앞장서시는 것이 아니고 뒤따라가는 우리를 대신해서 죄를 용서해주신 분으로서 앞장서 가니까 우리는 즐겁게 앞장선 주님을 바라보면서 따라가면 되는 겁니다.
따라갈 때 우리는 육이지요. 그 육에 무슨 옷을 입어야 합니까? 그게 베드로전서 4장 1절에 있지요.
베드로전서 4:1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예수님께서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그 뒤를 따라가는 우리도 무엇을 입어야 한다? 예수님의 고난을 마치 갑옷처럼 드레스나 조끼 입듯이 걸치고 가야 한다는 거예요. 왜? ‘나는 죄인 맞습니다. 나는 죄인 중에 괴수가 맞거든요’ 라고 하면서 걸치고 가면 된다는 거예요. 참 쉽죠. 앞에는 예수님 앞장세우고 우리는 염치 불구하고 죄인이라고 고백하면서 즐겁게 뒤따라가면서 ‘예수님 죄송합니다. 내 대신 돌아가셨지요?’ 라고 하는 거니까 구원받는데 얼마나 쉽습니까?
문제는 악마에 속한 자들은 앞에 아무도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앞에 아무도 없고 자기가 열심히 기도해서 구원받는데요. 이런 이단들이 어디 있어요. 이단들은 그것밖에 모르지만. 베드로전서 3장 18절 끝에 봅시다. “…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그 다음에 뭡니까? “…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보세요. 육적세계하고 영적세계하고 다르잖아요.
육의 세계는 영의 세계로 갈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누구만 갔습니까? 예수님만이 육에서 죽으시고 어디로 갔다? 예수님만이 영의 세계로 가셨지요. 그러면 우리는 누구를 따라가야 됩니까? 우리는 부처도 아니고 그 누구도 아니고 누구를 따라가야 됩니까? 육의 세계에서 영의 세계로 넘어가신 그분 만이 진짜 영의 세계를 아시는 분입니다.
스웨덴 볽이라는 사람은 자기가 계시를 받았다, 천국을 봤다, 그렇게 말하는데 그 사람 따라가면 안돼요. 진짜 예수를 따르고 그분과 우리 사이에는 뭐 밖에 없는가? 오직 십자가 뿐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십자가가 있는데 누가 너희를 다른 것으로 꾀더냐, 그렇게 나옵니다. 병고침이나 무슨 기적. 이런 것에 넘어가면 안돼요.
‘오직 십자가가 우리 대신 죄를 해결 했습니다’를 보여주는 유일한 증거가 십자가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오직 자기 십자가를 지고’ 누구를 따라라? ‘즐겁게 십자가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라고 하신 겁니다. 이것이 베드로전서 3장의 이야기인데 왜 제가 여기서 갑자기 이 본문을 들이댔느냐 하면 이렇게 육의 세계와 영의 세계는 다릅니다, 하는 것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첫째시간의 내용입니다. 그 다음에 에베소서 6장 9절에 보면 성경에서 잘 안 나올 것 같은 용어가 하나 나옵니다. 그게 ‘공갈’ 이라는 용어입니다. 번역을 아주 잘했는데. “상전들아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 같이 하고 공갈(협박)을 그치라…” 라고 되어 있는데 이 말은 뭐냐 하면, 아까 했던 그 법칙을 그대로 적용시켜 봅시다.
지금 부하직원이 상전을 볼 때에 육에서 육으로 봐버리면 눈가림만 하게 되고 그것은 상전의 힘을 이용만 하려는 노림수가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영적인 사람, 텔레비전에서 드라마 나오는 것 같은 사람은 ‘상전을 대할 때 그리스도에게 하듯 순종하라’ 고 되어 있지요. 그런데 그 순종의 뜻이 뭔지를 첫시간에 이야기했습니다.
성경에서 순종의 뜻이 뭐라고 했습니까? 순종이란 새삼스럽게 순종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확정된 계획 따라서 가는 것을 말합니다. 군대이야기 하면 여자분들 싫어하겠지만 군대이야기를 해야 되겠습니다. 군대에서는 군법대로 해야 할 것은 무조건 해야 됩니다. 그런데 하지 말아야 될 것, ‘어이 졸병 술사와’ 이런 것이 군복무규정에 나와 있습니까? ‘졸병은 상급자가 술을 사오라고 시키면 사와야 된다’ 이런 것이 나와 있습니까?
안되지요. 직장 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뜻에 순종할 때 아버지의 뜻이 아닌 것에 대해서 순종하겠습니까, 안하겠습니까? 안하지요.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하나님, 이 고난의 쓴잔 할 수만 있으면 그냥 없는 것으로 칩시다’ 라고 했습니다. ‘아버지 뜻은 알겠는데 제가 너무 힘들기 때문에 없는 것으로 치면 안 되겠습니까?’ 라고 하지요.
이러한 인간의 죄욕심을 꺽는데 얼마나 힘들었던지 땀방울 속에 피가 막 섞여 나왔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힘들었던지. 내 뜻을 꺽는다는 것이 그렇게 힘든 것인데 바로 그 순종을 말하는 겁니다. ‘아버지 뜻은 알겠는데 제가 너무 싫습니다. 그냥 못 본체 넘어가면 안되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했지만 결국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라고 순종을 이루어서 돌아가셨지요.
그처럼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이것이 우리에게 이익이 될 것 같으면 왜 순종 안하겠습니까? 그런데 나에게 이익이 아니고 나를 힘들게 한다고 한다면 그것이 비록 하나님의 뜻이라도 그것을 해내지를 못해요. 그래서 인간은 죄인입니다. 디모데전서에 나오지요. ‘네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는 것으로 그만 되었다.’ 아, 이것이 참 힘들어요. 애가 과외비를 달라고 할 때 돈은 없지요. 휴대폰도 사달라고 하는데 또 돈은 없지요. 이것이 참 힘듭니다.
여러분, 어버이날인데 잘 들으세요. 부모 돈은 없지요. 휴대폰은 사달라고 하지요. 남들처럼 사줘야 다른 친구들에게 기 안 죽고 기 펴고 못났다는 소리 안 듣고 당당하게 살 것이 뻔한데 그래서 ‘하나님, 애 휴대폰 사줄 돈 안 됩니까?’ 할 때 우리가 영적인 사람이니까 말씀이 나오잖아요. ‘네가 지금 못 고 사나?’ ‘아닙니다.’ ‘그러면 네가 지금 벗고 사나?’ ‘그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되었다. 먹는 것과 입는 것으로 족한 줄로 알라.’
그럴 때 그 엄마가 애를 불러서 ‘너 휴대폰 없으면 못살겠니? 굶어죽니?’ ‘아닙니다.’ ‘그거 없으면 공부가 안되나?’ ‘그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되었다. 나중에 공부더 잘하면 사주마.’ 어린이여러분, 그 말은 믿지 마세요. 공부 잘해도 안 사줍니다. 오늘 어린이들의 환상을 다 깰 겁니다.
그러면 휴대폰은 언제 사주는가? 애들이 기분 좋을 때가 아니고 엄마가 기쁠 때, 기분 좋을때 사줍니다. 엄마가 기분 좋을 때 사달라고 하세요. 그러면 엄마는 그 좋은 기분 유지하기 위해서 휴대폰 사줍니다. 마아슬루에 따르면 인간의 육적인 욕망이 다섯 가지로 나오지요. 생존의 욕구, 안전의 욕구, 소속의 욕구. 인정받고 존경받고 싶은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 이 런 욕구들에서 못 벗어 납니다.
우선 밥 먹고 살아야지요. 그 다음에 집이 있어야 안정, 안전하지요. 그 다음에 혼자는 못살고 죽고 싶게 됩니다. 왕따 되면 안 되지요. 어딘가에 소속되어서 나를 변호해줄 사람들이 많을 때 안심하잖아요. 그 다음에 존경, 남한테 인정받고 싶은 욕구, 그 다음에는 절대자가 되고 싶은 욕구, ‘내가 최고다’ 라는 이런 욕구를 예수님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겨냅니까?
돈 벌어도 공부를 해도 다 여기에 속한 것,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이 다 이것 때문이잖아요. 어떤 사람이 시집을 갔는데 아기를 못 낳는다면 어느 욕구에 결핍됩니까? 아기도 못 낳는 여자가 아파트 부녀회에서 존경을 받겠습니까? 애를 배서 배가 볼록해 가지고 돌아다녀야 존경을 받지요. ‘새댁은 결혼한 지 얼마나?’ ‘5년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기는?’ ‘아직 안 들어서네요.’ ‘기도해 보시지…중보기도 해 드릴까요?’
이런 식으로 꼭 약 올리는 것 같지요. 아기가 없으니까 결핍을 느끼고 결핍을 심화되고 깊어지면 이것이 나중에 자살로 이어져요. 자살로서 시련을 장렬하게 마감하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육적인 것인데 육적인 것에 영적인 그리스도의 순종이 와버리면 ‘그리스도가 이런 분입니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상전을 대할 때 눈가림만 하지 않고 그리스도께 하듯 한다’ 이 말이죠.
그러면 그럴 때 상전이 하는 말이 ‘왜 다른 사람들은 다 농땡이를 부리는데 왜 당신은 그렇게 착실하게 하는가?’ 할 때 ‘저는 당신을 보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보면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제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라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겁니다. 이렇게 실제로 할 수 있다, 없다? 택도 없지요.
왜냐하면 인간의 육이라는 것은 인간의 다섯 가지 욕망이 잡아당기기 때문입니다. 존경받고 싶고, 우대받고 싶고, 집안 자랑하고 싶고 뭔가 위태로울 때 무조건 지켜주기를 원하고, 우선 먹고 잠자는 것이 급선무이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것은 영적인 것이 와야 하고 영적인 것이 왔다고 해서 우리보고 영을 다루라는 것이 아니고 영을 다루시는 분, 전문가가 따라 옵니다.
성령께서 이런 것이 육됨을 알려줌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죄인중의 괴수임을 알게 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상한심령이니까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을 마음껏 발휘하는 거예요. 두 번째로 상전이 아랫사람을 대할 때 육으로 봐버리면 자기가 하기 싫은 것을 아랫사람이라고 해서 떠맡기게 되는 자신의 이용물이 되어버리지요.
협박, 공갈이죠. ‘너 나하고 똑같은 인간이지. 맞지? 내가 너의 위치에 있을때는 상전에게 벌벌 기었단 말야. 그런데 왜 너는 나에게 벌벌 기지 않는거야. 요즘 후배들은 선배 알기를 우습게 안단말야. 선배를 좀 깍듯이 모시란 말야. 그래야 신상에 좋아’ 라는 것은 자기가 육이니까 육을 육으로 보는 것 밖에는 아닙니다.
군대이야기를 안하려고 했는데 해야 되겠습니다. 제가 군 생활을 할 때 상병 달 때까지 매일 밤중에 자다가 일어나서 야구방망이로 매타작을 당했어요. 그런 날이 거의 매일밤이죠. 일주일이면 4일, 5일은 맞았어요. 하루가 멀다 하고 맞으니까 안 맞으면 허전해요. 왜 때리는가? 고참들이 술을 안 먹으면 괜찮은데 술만 먹으면 군대생활의 스트레스를 사람 때리는 것으로 풀기 때문에 그랬어요.
‘나도 너희들처럼 졸병 때 이렇게 맞으면서 생활해왔다. 이게 바로 군대라는 거다. 원망하지 말고 억울해 하지 마라.’ 이러면서 때렸어요. 그렇게 얻어맞다가 제가 고참이 되었는데 어떻게 되었을까요? 완전히 그 폐악을 없애버렸어요. ‘내가 맞을 때 힘들었다.’ 그렇게 맞으면 정신적인 파괴를 당하는 것입니다. 육체가 아픈 것이 아니고 정신이 파괴됩니다.
맞아야 되는 이유를 모르는 채 맞을 때 ‘나라는 인간이 누군가?’ 하는 자기정립이 안 되는 상황, 자기정체성이 깨져버립니다. 이유 없이 맞으면서도 반항을 못할 때 그것은 사람이 아니고 기계가 되지요. 사람인데도 기계처럼 되려고 하니까 인격의 분열이 일어날 정도입니다. ‘이제부터 일체 이런 것은 안한다. 자는 사람은 일체 못 깨운다. 심지어 차렷, 경례도 하지 마라. 그냥 푹 자라.’
‘다 같이 객지에 와서 고생하는 마당에 서로 힘들게 해서는 안 된다. 남을 괴롭히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풀면 안 된다. 다 자거라.’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고참은 술을 마시면 안 됩니다. 술만 안 들어가면 돼요. 나는 술과 담배가 없는 나라가 있으면 좋겠어요. 갑자기 생각이 나네요. 갑자기 반발하는 사람이 있을까 싶은데 술을 많이 취하면 안된다 그 말이죠.
인간은 술 취하면 완전히 개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저 사람을 위해서 몸을 바쳤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아랫사람을 대할 때 그런 마음으로 대하면 그것이 바로 영적인 것을 싣고 담는 그릇이 됩니다. 그것이 바로 영적으로 사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우리 힘으로 이렇게 살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안됩니다.
우리 힘으로는 안 되고 성령께서 간섭해 줘야 그것도 한 3초 정도 잠시 그런 생각이 들어가다 말지요. 좀 은혜로운 사람은 한 5초까지 가는 경우도 있고요. 그런 사람은 못봤고 보통 3초에서 그치고 말지요. ‘내가 저사람을 위했는데 저 사람은 나한테 해준게 뭐있나’ 라는 이런 생각이 퍼뜩 들고 말기 때문에.
제가 군대에서 그렇게 했더니만 저는 군 생활에 있어서 무능력자로(*이런 경우를 두고 군대용어로 고문관이라고 했던가?) 찍히고 말았지요.
6장 10절에 보면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합니다. 여기서 ‘종말로’ 라는 것은 세상끝이라는 말이 아니고 편지 끝에 ‘마지막으로’라는 뜻입니다. 여기에 마귀가 등장하는데 불신자한테는 마귀가 없어요. 흡혈귀는 있는지 모르겠지만 마귀가 없어요.
<박쥐> 라는 영화의 주제가 뭐겠습니까? 박 찬욱 감독이 그만큼 공부를 많이 한 것이 엿보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도입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하나님? 하나님은 전지전능한 분으로. 아까 여기 다섯 가지 욕망에 뭐가 생깁니까? 결핍이 생기죠. 신을 믿는 이유는 생존, 안정, 소속, 존경, 등등의 욕망의 결핍에 대해서, 자기한테 모자라는 것을 채우기 위해서입니다. 신에게 아부하고 뇌물 바치기 위해서 교회 나와서 열심히 비는 거예요.
지성이면 감천인데 ‘이렇게까지 하는데 하나님이 정말 안 도와 줄겁니까?’ 하고 계속 비는 겁니다. ‘이렇게 착한 나를 안 돕고 누굴 도와줍니까?’ 라고 착한 짓을 해서 결핍을 메우려고 하는 거예요. 전혀 영적이 아니지요. 박 찬욱 감독의 주장은 뭐냐? 하나님을 찾는 이런 인간, 혹은 교회의 습성이 악마의 습성과 같다고 보는 겁니다. 이것이 주제입니다.
사람들이 교회라든지 목사라든지 신부라든지 이런 능력 있는 사람을 찾아와서 병을 고치겠다는 생각은 하나님만을 도입했기에 거기서 나온 착각인데, 실제로는 악마, 흡혈귀가 기도해주면 감전된 것 같이 찌릿찌릿 하면서 은혜를 받는다는 거예요. 그 영화에 보면 그런 게 나와요. 그 영화에 나오는 여배우가 그러잖아요. ‘신부님이 기도하니까 막 전기가 통하듯이 은혜를 받는 것 같다’고 하죠.
박 찬욱 감독은 그걸 보여줍니다. ‘악마가 안수해주니까 감전되듯이 사람들이 은혜 받더라’는 겁니다. 왜? 사람들은 정작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고 자기를 찌릿찌릿하게 해 줄 수 있는 자기욕망을 메워줄 수 있는 자기 욕망이 만들어낸 신입니다. 젊은 흡혈귀 신부가 말합니다. ‘신부님, 제가 악마의 피를 받아서 제가 흡혈귀가 되고 말았습니다.’ 늙은 신부가 하는 말, ‘그래도 자네는 능력이라도 있잖아.’
능력, 남의 병을 고치는 능력은 있지요. 마태복음 7장에 보면 ‘귀신쫒아내고 병도 고치고 기적도 행하고 많은 주의 일을 해도 그런 것은 믿지 말라’고 하지요. 왜? 악마들도 다 그렇게 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렇게 당부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서는 그걸 이야기하지 않는데 박찬욱 감독은 그것을 이야기 합니다.
그 장님인 늙은 신부가 하는 말이 ‘네가 흡혈귀라도 좋고 악마라도 좋은데 제발 눈이라도 한 번 떠보고 죽고 싶은 것이 내 소원이다’ 라고 말하니까 그 주인공 흡혈귀가 된 신부가 하는 말이 ‘아이고, 이 더럽고 지옥 같은 세상 뭘 볼게 있다고 눈을 뜨려고 하십니까’ 라고 합니다. 이게 마귀의 말입니다.
그래서 <박쥐>라는 영화는 철저하게 한국사회의 인간들의 종교 심리를 공박하는 거예요. 박 감독의 주장은 이거예요. 신만 도입하지 말고 악마까지 같이 도입해줘서 진짜 하나님이 뭐고 악마가 뭔지를 따져보라는 식입니다.
‘너희가 진짜 하나님을 아느냐’ 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교회가 악마는 감추고 전지전능을 입혀놓은 하나님을 잡아당기니까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신이 악마인줄 모르고 진짜 하나님인줄 알고 착각을 하면서 성부, 성자, 성령을 부르짖고 있으니까 그것이 바로 악마짓이 아니고 뭐냐고 하는 겁니다. 이것이 그 영화의 주제입니다.
그 영화의 문제점은 뭐냐? ‘인간은 왜 구원되어야 하느냐’ 거기에 대해서 이유가 없어요. 거기서 주장하는 바, 인간은 무조건 구원되어야 된다는 거죠. 그것은 비성경적입니다. 인간은 구원되어야 할 이유가 없어요. 인간은 창세전에 이미 구원되기로 작정되어서 구원되지 개인이 자기가 구원되고 싶다고 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이런 것까지 박 감독한테 요구한다는 것이 무리지요. 그 사람은 신학을 한 사람도 아니고 아마추어니까 제가 그걸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그 사람이 만드는 영화의 주제는 다 ‘복수’라는 주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영화는 신(악마)이 인간에게 복수하는 것입니다. <올드보이>도 그렇지요. ‘나한테 15년동안 군만두를 먹인 놈이 누구야?’ 복수잖아요.
그래서 사람들은 그 영화를 보고 자기의 어두운 면을 들켜서 분노하는 거예요. 제가 이렇게 쉽게 <박쥐> 영화를 해석해서 그렇지 실제로 그 영화를 보면 무슨 이야기인지 정신이 다 빠집니다. 영화 다 보고 나면 송 강호 벗은 것만 기억에 남지요. ‘악마의 궤계’라고 할 때 이것이 무슨 의미냐 하면 구약 이스라엘에서 무엇 때문에 이스라엘을 공격했는가를 파악할 때 바로 그것이 악마의 정체입니다.
악마라는 것은 하나님의 저주의 대상인데 ‘목사님, 악마의 정체를 말해주시오’ 라고 한다면 ‘악마란 하나님께서 선택한 백성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 선택한 백성을 공격하는 것, 그것이 악마의 속성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일방적으로 선택해서 구원하느냐’ 그것이 악마의 공격의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 받을 때 하늘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왔습니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했지요. 베드로전서에서는 그걸 뭐라고 하는가 하면 ‘선택’ 이라고 합니다. ‘내 사랑하는 아들’에서 아들은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아들을 심을 권한이 누구한테 있다? 아버지만이 이 땅에서 아들을 만들 권한이 있다는 말이죠. 아들 만들기죠. 아들 만들기에 대해서 마귀는 반대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아들 만들기’는 예수님의 근거, 예수님의 공로에 의해서 무조건 선택으로 되거든요. 그래서 이 안에서는 인간의 행함이 남아 있을 수가 없습니다. 행함은 무조건 다 빼앗기고 사라집니다. ‘나 구원되었습니다.’ ‘어떻게?’ ‘창세전에 선택되었습니다.’ 끝나는 문제입니다. 이것이 에베소서 1장 4절이죠. ‘창세전에 예수 안에서 너희를 택하였다.’ 끝나는 문제입니다. 창세전에 한사람은 사랑받기로 작정되었고 한 사람은 미움 받기로 작정되었는데 그 창세전에 작정되었던 그 일에 이 역사가운데서 카펫 깔리듯이 죽 깔리는 거예요. 이불 가져와서 바닥에 깔면 좍 깔리잖아요.
그것처럼 창세전에 누가 사랑받기로 예정되었는지 누가 미움 받기로 예정되었는지 모르잖아요. 그런데 창세전에 예정된 그 이불을 바닥에 죽 깔아 보니까 한쪽은 빨간 이불, 한쪽은 파란 이불, 한쪽은 천국가기로 되어있고 한쪽은 지옥가기로 되어 있어서 이것이 이미 예정된 대로 간다 이 말입니다.
이것이 에베소서 3장에 나옵니다. 하나님의 감추어진 비밀의 경륜이라고 하죠. ‘경륜’ 이라는 말은 하나의 과정이라는 말이죠. 하나님의 예정된 것이 하나의 역사가 되어서 펼쳐졌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누가 선택했나가 마지막 때에 드러나는데 ‘예수 안에서’ 선택했다는 겁니다. 여기서는 ‘인간이 어떻게 해서 구원받습니까?’ 하는 질문 자체가 용납이 안돼요.
‘내가 어떻게 해서 구원받습니까?’ 라는 질문은 용납이 안 되고 ‘주여, 어떻게 해서 제가 구원받았습니까?’ 라는 말을 해야 돼요. ‘왜 저를 구원하십니까?’ 그것을 다른 말로 사도바울이 이렇게 했습니다. ‘주여, 누구십니까?’ 주님의 답변이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핍박했다는 그것이 지옥가는 이유가 된다는 말이 아니고 핍박을 하게 해서라도 핍박한 그것보다 주님의 선택이 더 세다는 것을 밝히시는 겁니다.
‘사람의 열심보다 하나님의 열심이 더 세고 너의 죄보다 나의용서가 더 세다’고 하십니다. 고린도전서 10장에 보면 ‘너희가 주님보다 더 세냐’(고전 10:22)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주님이 참 세신분입니다. 그 강한 분에 의해서 우리는 가기 때문에 저항할 길이 없습니다. 오랜만에 연극을 한번 할까요? 여기에 앉아서 늘 연극을 도와주던 꼬마 어디 가셨습니까? 이사 갔어요?
연극을 하자면 이렇습니다. 등장인물입니다. 1. 악마 2. 도둑 3. 가재도구. 악마가 가재도구를 지키고 있습니다. 도둑이 와서 가재도구를 가지고 나가는데 그냥 가져 나르는 것이 아니고 악마를 세게 꽁꽁 묶어놓고 입도 막아서 도둑이 여유만만하게 가재도구를 들고 나가는 것, 이것이 구원방식입니다.
가재도구는 가만히 눌러 있다가 ‘너 뭐야?’ ‘장롱인데요.’ ‘끌고 가’ 이렇게 장롱은 가만 있다가 그냥 끌려가는 거예요. 도둑이 가져가는 일종의 장물인데 그것이 구원입니다. 어린이여러분, 보쌈 알아요? 옛날에 색시를 구할 때 잠자는 여인네를 자루 같은데 넣어서 숨만 겨우 쉬게 해서 둘러메고 집으로 데려가서 ‘내 마누라다’ 하는 것이 보쌈입니다. 이렇게 마지막 때의 구원은 당사자한테 허락도 안 맞고 그냥 보쌈 하듯이 데려가 버립니다.
그렇게 누가 좀 해 줬으면 싶은 분들 여기도 몇 분 계신 것 같네요. 제발 누군가 좀 그렇게 해줬으면 싶다는 것이 부모들 심정입니다. 이렇게 보쌈해서 데려가는데 바로 그분이 우리의 신랑이라는 것이니 졸지에 신부가 되어버렸지요. 졸지에 여자에서 뭐가 된다? ‘누구 누구의 신부’가 되어 버립니다. 마귀는 이것을 반대하는 거예요.
‘그럴 리 없다. 인간에게는 신을 사랑하는 의지가 있는데 자기가 알아서 구원되는 것이지 누가 와서 그냥 데려가서 구원되는 것은 없다’ 라는 이것이 바로 영적 싸움입니다. ‘주께서 데려가신거야.’ ‘아니야, 네가 믿으려고 애쓰니까 믿게 된거야’ 라는 이 싸움이 바로 성도와 악마와의 싸움이고 복음의 싸움입니다. 자, 어떻게 이기는가?
에베소서 6:10-11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이겁니다. 우리 몸에 예수님의 뭐가 있다? 예수님의 수난, 예수님의 피죠. 예수님의 고난이 우리 몸에 있다는 이 말은 ‘나는 신랑 피 때문에 구원 받았다’ 라고 됩니다. 제가 지난 수요일에 그런 설교를 한 것 같은데요. 아내가 남편을 출근시키고 나서 집안 청소를 하면서 보니까 바닥에서 뭐가 눌러 붙으면서 질퍽질퍽 하는거예요.
그래서 보니까 온 천지가 남편이 흘리고 간 피입니다. 그 피가 웬 피인가 하고 보니 전부 다 아내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흘린 피라는 겁니다. 그 피를 밟으면서 남편을 잊을수가 있겠습니까? 그 피를 질퍽질퍽 밟고 있으면서 그 피가 전부 자기를 살리기 위해서 흘린 피인데 다른 남자를 생각하겠느냐는 말입니다.
그게 ‘피남편’이라고 했습니다. ‘당신같이 나쁜 인간이 어떻게 구원을 다 받나?’ ‘글세 내가 생각해도 그것이 참 이상한데 예수님의 십자가 흘린 피를 보니 예수님께서 그냥 용서하고 그냥 데려가는 그것이 분명하다.’ ‘그러면 당신은 착한거네.’ ‘이것은 내 착함과 무관하다. 이것은 내 착함과 아무 관계도 없고 순전히 예수님께서 화목제물이 되셔서 구원하는 것이다. 그분의 의로 구원받는 것이다.’
그 싸움이 우리가 죄를 지을 때 마다 ‘내가 이렇게 죄를 지어도 되는가? 내가 이렇게 나쁜 짓을 해도 되는가?’ 그런 생각을 할 때 마다 ‘내가 착해야지’라는 것은 마귀의 시험이고 마귀가 그렇게 하는 겁니다. 착해본 들 그것이 몇 미터나 가겠습니까? 사람이 착하면 착해진 자아를 또 믿어요. ‘나는 착해졌구나’ 그것을 또 믿어요.
그것은 예수님의 용서를 자기 의로 전환시키는 악마적인 사고입니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에게서 ‘악마의 궤계’란 뭐냐? 로마서 10장에 나오는데 ‘자기열심’입니다. 자기열심에서 자기의가 만들어지는데 그 자기의를 가지고 아까 말한 욕망, 자기가 얻고 싶은 것을 얻는 기족을 바라는데 이것이 바로 악마의 궤계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로마서 10장에서 구원은 인간의 열심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의인데 이 하나님의 의는 인간이 원하는 기적이 아니라고 합니다. 천국, 지옥은 눈에 보이는 기적이 아니라 바로 네 눈앞에 있는데 그게 무엇으로 나타난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난다’고 했습니다.
제가 여기서 세바퀴를 굴러야 믿겠습니까? 그런 것은 마귀의 역사입니다. 병고침을 받아야 믿겠습니까? 그런 것은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어야 구원받지 병고침을 받는다고 그것이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 10장에서 그렇게 말씀합니다.
로마서 10:1-15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좆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으니라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가로되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복음의 말씀이 네 눈앞에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고 그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원하는 기적이란 자기가 눈앞에 생각했던 그런 기적을 보기를 원하는데 그것은 말씀이 아니고 실적이죠. 말씀만 전하면 지식만 전할 수가 있다는 이런 오류도 있지만 성경자체가 믿음은 들음에서 나오고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온다는 거예요.
제 말이 아니고 이것이 로마서 1장 17절의 말씀입니다. 실적, 기적, 업적, 성과 같은 그런 것이 있어야 내가 진짜 믿는 사람이 맞다고 여기지 마세요. 성과나 기적이 아니고 오직 말씀인데 그 말씀은 로마서 10장 9절에 보면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참 쉽고 간단하잖아요.
아까 쉬운 것은 뭐라고 했습니까? 앞에서 앞장서서 가시는 분이 의인인데 나를 대신하시는 의인이다. 나는 뒤에 가는데 즐겁게 불의한 자로 앞서 가시는 의인을 따라간다. 참 쉽죠. 마찬가지로 이것도 참 쉬운데 더 쉽습니다. 이것은 따라갈 것도 없이 말씀에 있는 대로 십자가와 부활을 내가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받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선택의 방식이 나에게 꽂히는 거예요. 에베소서 6장 12절에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관한 것이 아니요”에서 혈과 육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말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 업적과 실적과 성과가 아니라는 겁니다. 이것은 안산강의에서 한 이야기인데 한 번 더 이야기하겠습니다.
이게 뭘까요? 풍선이죠. 이것은 동그란 풍선, 이것은 막대풍선, 이것은 코끼리 풍선이죠. 바람을 다 빼버리면 전부 그냥 축 늘어진 고무에 불과한데 여기에 바람을 불어 넣으니까 막대기 모양이 나오고 코끼리모양도 나오고 동그란 것도 모양이 나와서 붕붕 뜨지요. 이것처럼 우리도 하나의 풍선입니다. 풍선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 복음을 훅 하고 불어 넣으면 우리는 복음이 들어 있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제가 이 말을 하는 이유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사람들을 볼 때 그냥 눈에 보이는 그것대로만 보지 말고 그 사람 속에 무슨 바람이 들어 있는가를 보라는 말이죠. 악령의 바람이 들어 있는지, 구원의 성령의 바람이 들어있는지. 아무리 전 국무총리든 전 대통령이든 그게 누구든지간에 그 사람에게 복음의 말씀이 들어있지 않는다면 바늘가지고 꼭 찍으면 퍽 하고 터지겠지요.
결국 말씀 없는 인간들은 껍데기만 남는다는 겁니다. 그걸 왜 겁을 내느냐 하는 거죠.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눈에 보이는 껍데기 인간이 아니라고 합니다. 대통령이나 국무총리냐 하는 껍데기 싸움이 아니고 알맹이 싸움입니다. 훅하고 불어넣은 그 알맹이의 싸움입니다. 우리 학생 안에는 뭐가 들어있지요?
어떤 학생은 묻기를 ‘엄마, 나는 왜 쌍커플이 없어?’ 하는데 그것은 원래부터 상커플이 없는 몸으로 태어나서 그런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얼굴 잘났다 못났다 가지고 천국 오지 말라하는 것이 없어요. 얼굴 잘났다 못났다 하는 기준도 사실은 없습니다. 현미경 가지고 얼굴 들여다보면 그것은 세포덩어리에 불과합니다. 겉에서 보면 근사해 보일지 몰라도 안에서 보면 다 세포덩어리입니다.
세포 안을 들여다 보면 다 똑같아요. 핵이 있고 세포질이 있고 다 같아요. 그걸 가지고 누가 더 예쁜가를 겨루고 미스코리아 대회를 하고 누가 잘났나 하는 것을 따진다는 것이 웃기지 않습니까? 멀리서 보면 좀 차이날 수 있지만 가까이서 현미경으로 보면 똑같아요. 선 볼 때 돋보기를 가져가서 들여다보면 좀 곤란하겠지요. 선 볼 때도 겉모습만 보지 말고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 보란 말이죠.
그러면 우리가 이 사람들을 전부 다 멀리해야 되느냐? 아니지요. 시집을 갔는데 시어머니가 불자라서 교회를 반대한다면 우리는 성도로서 ‘그리스도께서 왜 저런 분을 두셨는가’를 생각해야지요. 이것은 베드로전서에 나옵니다. ‘악한자들이 비난을 할 때 그들이 예상못한 선을 행함으로 말미암아 그들로 하여금 부끄럽게 만들어라’ 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베드로전서 3:16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그들이 할 수 없는 선, 그들이 요구하는 선 말고요. ‘네가 이번에 제사를 드려주면 교회 한번 나가주마’ 이런 것들 말고 그들이 아무리 해도 안 되는 선이 있지요. 그게 뭡니까? 자존심을 낮추는 겁니다. 이것은 불신자들은 때려죽여도 못해요. ‘나는 잘났다’ 하는 이런 것은 그들은 참 잘하죠. 누구나 다 할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죄인입니다.’ 이것은 그들로서는 못합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그것도 사람 앞에서가 아니라 주님 앞에서. 이처럼 우리의 씨름은 교만한 인간들, 눈에 보이는 것, 육만 과시하는 그들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용서하심을 품고 있을 때 주께서 벌려놓은 싸움터에 우리는 놓여 있습니다.
에베소서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에게 대함이라.”
겁납니다. 이거 겁나지요? 우리는 교인수도 몇 명 안 되고 초라한데 우리한테 달려드는 사람들은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자지요. 그런데 요한복음 16장 끝에 보면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걱정하지 말라 네 안에 계신 분이 세상을 이겼노라’ 그들은 죽으면 지옥가지만 우리는 죽어도 안 죽어요. 왜? 영생안에서 사니까.
요한복음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세상을 이기신 분이 우리 안에 계십니다. 우리 안에 계신 분이 세상을 이기신 분입니다. 이겼다는 말은 죽어도 산다는 거예요. 죽는 순간이 우리가 패배하는 순간이 아니고 그 순간이 비로소 우리가 풍선이 되어서 하늘로 날아가는 순간입니다. ‘잘 있거라 이것들아. 날 만난 것이 영광인줄 알아라’ 그리고는 하늘로 올라가는 순간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돌 맞아 죽을 때 ‘주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하고는 ‘나는 간다!’ 하고는 올라가 버렸어요. 사람들은 닭 좇던 개가 되었지요.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능력이 성령 안에서 들어왔기 때문에 예수님 가신 그 코스대로 우리가 가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영을 실어 나르는 하나의 수레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부활의 능력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부활의 능력이 있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었고, 그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기 때문에 세상의 껍데기를 가지고 설쳐대는 것들 앞에서 기죽지 않는다는 것, 이것을 명심해야 됩니다. 이것이 영적인 싸움입니다. 영적싸움이 돈 가지고 돈과 싸우는 것이 아니고 힘으로 힘과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너 잘났나?’ ‘그래 잘났다.’ ‘그래, 나는 못났다. 해볼래?’ 이렇게 못난 죄인도 구원되었다는 그 기쁨이 우리의 유일한 무기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정말 사실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지킬 수 없었습니다. 선택 당한 것이 웬 횡재인지 선택 받을 자격도 안 되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십자가 피가 우리 죄를 용서했다는 것을 성령이 우리에게 믿도록 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믿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이런 선물을 받았사오니 영적 싸움에서 기죽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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