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강의(09. 5. 29) 1강
광주 강의(09. 5. 29) 1강
이름 : 서경수(IP:116.37.101.7)
광주 강의(09. 5. 29) 49-1
디모데후서 2장 25절부터 읽겠습니다.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저희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바 되어 그 뜻을 좇게 하실까 함이라”
여기에서 ‘진리’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말 뒤에 반드시 나와야 할 말이 뭐냐 하면, ‘마귀’ 그리고 ‘하나님’입니다. 마귀의 존재를 염두에 두지 아니하면 제대로 진리가 규명될 수 없습니다. “마귀의 올무에 매여 있다는 말을 나는 처음 듣는데” 이렇게 나오면, 그 사람한테는 진리를 설명하기 곤란합니다.
땅 위에 있는 줄기를 잡아당기면 땅 속에 있는 뿌리의 깊숙한 것이 딸려 나오듯이, 진리를 잡아당기면 반드시 하나님과 마귀가 같이 나오는데, 이렇게 되어야 진리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단 말입니다.
‘3+5=8’ 이것이 진리입니까, 아닙니까? 이건 진리가 아니죠. 왜냐하면, 3+5는 무엇을 고려할 필요 없어요? 마귀나 하나님을 고려할 필요 없이 셋에서 다섯을 더하면 여덟이 됩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진리가 아닌 거예요.
성경에서 ‘진리’라고 할 때는 반드시 구원을 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진리는 아는데 구원은 안 되더라.’ 이건 곤란합니다. “나는 교장 선생님을 잘 알아.” “그러면 너 구원 받을 수 있어?” 교장 선생님을 잘 아는 것과 구원이 관련이 있습니까? 없지요. 교장 선생님이 같은 동네에 살아서 만나면 인사를 나누는 것과, 내가 죽어서 구원 받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관계없잖아요. 이럴 경우 교장 선생님을 안다는 것이 진리가 됩니까? 안 됩니다.
그런데 “나는 진리에 대해서 알아. 진리를 만났거든.” 그러면 그 뒤에 “구원 받았어?” “응 구원 받았어.” 이렇게 연결이 되어야 됩니다.
제가 최근에 여름수련회 교안을 다 작성했어요. 수련회 공고가 되면 즉시 교안을 올리려고 합니다. 그 교안에도 그런 뉘앙스가 있지만, 제가 쓴 다른 글에 이런 것이 있어요. “그리스도를 가르치는 것과 그리스도를 토해 내는 것은 다르다.” 이게 아직 미공개 된 글인데 [철학과 신학의 허상]이라는 제목을 달고 책이 발행 될 계획인데, 최일규 집사님이 이것을 발간합니다. 700페이지 이상 됩니다. 이번 주에 인쇄에 들어가려고 했는데 너무 책이 연이어 나오면 체한다고 강 장로님이 말려고 지금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해서 가르치려면 신학교 졸업하면 가능합니다. 그곳에서 배운 지식을 사람들에게 가르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토해 내는 것은 신학을 배웠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진리를 만나야 돼요. 진리를 만나게 되면 진리가 우리를 구원 시켰기 때문에 더 이상 무서울 것이 없지요. 진리를 알았기 때문에 겁나는 것이 없고, 죽는다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고, 진리 때문에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바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었을 때 진리를 안다고 할 수 있어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라고 주님이 말씀하셨는데, 우리가 그 말을 되풀이 하면서 사람들에게 가르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가르치다가 학교에서 문제를 제기해서 사표를 내라고 한다면 어떻게 됩니까? 가르치는 것은 가르치는 것이고 사표 내라고 하는 것은 겁이 나지요? 이것은 진리를 토해 내는 것은 아닙니다.
목사가 신학교를 나와서 진리를 가르칠 수는 있어요. 아모스가 무슨 말을 했고, 오바댜가 어떤 말을 했고 등을 가르칠 수 있지만, 그것 가르친 후에 “이제 그만 두세요.” 이렇게 하면, “어휴 겁나.”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은 자기가 가르쳤던 진리와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제가 묻습니다. “영어가 진리입니까?” 아니죠. 왜냐? 영어 가르치면서도 ‘영어 가르치는 것을 그만두면 나는 뭘 먹고 살지?’ 이것이 겁 날 것 같으면 영어는 절대로 진리가 아니죠. 그냥 영어를 가르치는 기능인이죠. 판사가 판결을 내립니다. 기능인이죠. 정형외과 의사가 수술을 한다. 기능인입니다. 이것은 진리가 아니에요.
이런 사람들은 기능을 발휘할 뿐이기 때문에 기능을 그만두라고 할 필요는 없어도, ‘당신도 진리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해야 되지요. 용접하는 사람에게 “진리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구원 받습니다.”라고 하면 용접하는 사람은 이 말이 납득이 되는데, 판사나 철학자에게 “당신은 진리를 알아야 합니다.” 라고 하면 그들은 “나도 기독교에 대해서 압니다.” 이렇게 나와요. 이 사람은 지금 무슨 소리인지 못 알아들어요. 진리가 무엇인지.
진리란 무엇인가? “당신은 마귀의 올무에 빠졌는데 진리로 말미암아 당신은 하나님께 사로잡혀야 합니다.” 이것입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한 마디로 하면, ‘진리는 우리로 하여금 창세기 1장으로 되돌아가게 한다.’ 창세기 1장으로 돌아가면 거기에 누가 기다리고 있습니까? 뱀이 기다리죠. 거기에 아담에게 찾아왔던 분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죠.
우리가 창세기 3장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마귀도 없고 하나님도 없고 자기만 자꾸 생각하고 나밖에 없는 것으로 여기지만, 진리는 우리로 하여금 창세기 1장으로 돌아가서 우리가 잊고 있었던 악마의 존재와 기능, 하나님의 존재와 기능에 대해서 다시금 기억나게 하는 겁니다.
지금까지는 서론 격으로 했고, 이제 본격적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오늘 20절에서 26절까지의 내용은 ‘합당한 그릇이 되어야 된다.’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이런 말씀이 나오는데, 혹시 네가 잘 가르치고 바르게 살면 이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한 마디로 해서 개인적인 문제지요. 그런데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것은 진리문제입니다. 이 진리가 개인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이것이 참 난해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연결 고리를 몰라요. 겨우 한다는 주장이 ‘예수님은 착하고 훌륭한데 나는 죄인이잖아.’ 이런 핑계를 대고 예수님 따로 나 따로 그렇게 살아요. 왜 이렇게 됩니까? 연결 고리를 모르기 때문에 그래요.
“나 예수 믿습니다. 하지만 내 일상생활을 내가 알아서 합니다.” 판사의 경우는 판결을 내리고, 의사는 진료를 하고, 주방장은 고기를 굽고. 이것은 내 개인적인 문제입니다. 고기 굽는 것은 진리가 아니잖아요. 고기 굽는다고 구원 받는 것은 아니니까요. 구원이 되어야 진리지 내가 하는 일은 단순한 기능입니다.
영어를 가르치는 것은 기능이지 진리가 아니지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진리 따로 기능 따로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훌륭하고 좋은 분인 것은 좋은데 나는 지금 학원에서 애들한테 영어를 가르치기 때문에 이것은 내 문제입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오늘 분문 말씀처럼 ‘진리가 이렇기 때문에 너는 바르게 살아야 된다.’ 하는 연결 고리가 없다니까요. 이게 얼마나 어려운 문제입니까? ‘예수님 훌륭한 것은 알지요. 하지만 지금 나는 바쁘거든요.’ 충분히 이렇게 나올 수 있단 말이지요. ‘예수 믿어야 구원 받는 것도 인정하지만 지금 저녁시간이 다 되어서 식사 준비하는 것은 내가 해야 되지 않습니까?’ 라고 나온단 말이지요.
제가 “우리는 죄인입니다.” 라고 하니까, 어떤 사람은 벌꺽 화를 내요. “나는 주방장인데 예수 믿으려고 주방장 사표 낼까요?” 이렇게 나와요. 연결 고리를 못 찾습니다. 이제부터 이 연결 고리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것이 안 되면 본문 해석을 할 수 없어요.
신학자들이 이 연결 고리를 못 찾았어요. 그래서 그들은 윤리와 철학으로 들어와요. “예수님을 본 받아서 바르게 살자.” 이것으로 끝납니다. 예수님 본 받아 바르게 살면, 진리는 없고 죄인만 남아요. ‘예수님 훌륭한 것은 인정하지만 우리도 훌륭해야 된다.’ 이렇게 돼요. 이것은 믿는 것이 아닙니다. 아예 믿음은 없고 자기 행함만 있는 거죠. 그래서 이 진리와 개인은 어떻게 연결 되는가 하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제가 크게 쓰겠습니다. ‘창조 때로 돌아가야 한다.’ 창조 때로 돌아가면 개인이 없어요. 우리는 지금 개인(나)이 있으니까 나를 염두에 두고 거기에 예수님도 연관 시키고, 하나님도 연관 시키고, 잘 믿어 보려고 하고, 성경공부도 하는데, 창조 때로 돌아가면 누가 있어요? 하나님만 있고 우리는 없어요. 하나님이 만들어줘야 있는 것이지 나를 만들어 달라고 요구하면 안 돼요.
인 간: “신이시여!”
하나님: “왜?”
인 간: “나를 만들어 주세요.”
이것이 창조 때 성립이 안 됩니다. 그렇지요? 제 말 맞지요? 그런데 왜 오늘날 교인들은 “신이시여! 복 주소서.”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합니까? 창조 때로 돌아가지 않으니까, 내가 신에게 무엇을 달라고 요청할 권리가 없다는 것을 감히 상상도 못합니다.
주기도문 앞부분에 어떤 내용이 있지요? 기도 할 때 무엇 무엇을 달라고 하지 말라고 했지요. 로마서 11장에 보면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창조가 뭡니까? 창조물이 뭘 빌어서 창조 된 것이 아니잖아요. 창조는 창조주만 있으면 그 다음에 ‘있음’이 되잖아요.
대전에 성경공부를 갔는데, 공부에 참석한 집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해요. 딸(중학생)에게 어머니가 성경공부에 같이 가자고 하니까 그 애는 성경공부 참석 못 하겠대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자기는 이미 정리된 것이 있는데 ‘신은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엄마가 답변을 할 수 없었답니다.
제가 넌지시 답변을 했습니다. 신은 ‘있다. 없다.’에 저촉을 안 받습니다. 이런 범주에 해당이 안 됩니다. ‘있다. 없다.’는 인간들의 눈에 띌 때 인간들이 판단하는 겁니다. 인간을 만드신 분한테는 ‘없다. 있다.’가 해당이 안 되는 이유가, 인간 자체가 하나님의 없음과 있음에 포함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말을 해놓고도 참 어렵네요. 미안합니다.
두 아이가 있습니다. 동생이 하는 말이 “나는 왜 언니보다 먼저 안 태어났는데?” 라고 묻는다면, 엄마는 굉장히 난처합니다. 그 때는 이렇게 말하면 됩니다. “네가 태어날 상황에서는 언니가 ‘있다. 없다.’에 해당이 안 된다.” “언니가 있네.” 라는 말을 하려면 언니보다 늦게 태어나고 보니 언니가 있다는 말을 할 수 있단 말이지요.
그러니까 그 중학생이 ‘신은 없다.’고 이야기하는 자체가 이미 그 말을 하게 하신 하나님이 계시는 거예요. 애는 자기 딴에는 깊이 생각을 했는데, 더 깊이 생각을 해야 돼요.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었다고 하니까 ‘그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나?’ 라고 물을 때, ‘바로 그렇게 이야기한 너를 그런 이야기를 하라고 만들었다.’ 이렇게 답변해야 돼요.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창조 자체를 몰라요. 녹매교회에 다니는 다섯 살 어린 아이가 죽었어요. 노무현 전대통령 장례식 하는 날 같이 장례식 했어요. 한쪽은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오고, 한쪽은 조용했어요. 둘 다 창조인데. 우리가 ‘나는 신앙이 있다.’고 할 때 이게 오류고 거짓말일 수가 있어요. 이게 창조의 관점에서 신앙이 있다고 하면 이것은 옳은 신앙인데, 창조를 생각하지 않고 신앙을 가지면 신앙이 내 소유가 됩니다. 이럴 경우 자기 소유인 신앙을 빼앗아버리면 화를 내요.
지금 마귀의 올무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마귀는 창세기 3장 이후에 나옵니다. “너는 이미 신이다. 그러니 신을 따로 믿을 필요 없고 네가 신이야. 창조에 대해서 네가 이야기하고 ‘있다. 없다.’를 네가 판단해. ‘있다. 없다.’를 네가 있기 전으로 왜 자꾸 거슬러 올라가. 그러지 말고 네가 있잖아. 있는 네가 봐서 없으면 없는 것이고, 있으면 있는 거야. 하나님이 안 보이면 없는 것이고 보이면 있는 거야. 네가 판단해.” 이것이 마귀의 올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사로잡힌 자는 어떠냐 하면, 우리로 하여금 내가 없던 시절로 돌아가요. 이건 너무 중요합니다. 진리란 내가 없던 시절로 돌아갑니다. 그렇게 되면 지금 내가 판단하는 것. ‘천국이 있네, 없네. 하나님이 있다, 없다.’ 이런 모든 것이 내가 없던 시절이기 때문에 이런 판단도 없던 시절입니다. 이게 신앙입니다.
신앙은 선물입니다. 내가 만든 신앙은 내가 있던 시절을 기초로 해서 만든 것이기 때문에 뭔가 사건이 일어나면, 우리 아이가 죽는다든지 우리 교회에 분란이 생기면 그만 악마적인 본성이 나와서 화를 냅니다. “하나님 당신이 뭔데 내 것을 빼앗아 가.”
욥기 1장에 보면, 하루아침에 자식 10명이 다 죽었잖아요. 이 충격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아브라함이 자식을 번제로 드렸다. 성경에 나오니까 그런가보다 하지만 엄청난 충격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충격은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인 사건입니다. 그것도 의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죄인을 위해서.
사람이 충격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내가 없던 시절로 못 돌아가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없던 시절로 안 돌아가고 있던 시절에서 신앙을 가지면 이 신앙은 누구를 위한 용도인가 하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용도가 아니고 날 천국 보내는 용도입니다. 이것은 신앙이 아니라 종교입니다. 바꿔 말하면 취미고 오락이지요.
오늘 광주로 오면서 차 안에서 TV를 켜 놓았는데, 계속 노무현 장례식을 해서 차 안에서 안 볼 수도 없고 했는데, 장례식도 결국은 오락이에요. 자기 연민. 나를 슬프게 만드는 오락이에요. 노무현은 이미 죽었고, 그 광경을 보면서 슬퍼하는 자기가 좋아. 내가 울면서 내 존재의 의미를 찾는 거예요.
노무현이 죽었다고 우는 것이 아니고 평소 시어머니한테 맺힌 것이 있는데 노무현을 핑계로 울고, 남편한테 맺힌 것이 있었는데 노무현 핑계대고 울고, 노무현 인생이 불쌍해서 우는 것이 아니라 ‘내 인생이 왜 이 모양, 이 꼴인가?’ 생각하면서 우는 거예요. 자기 연민이죠.
이런 것은 자기 ‘있음’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1장에는 우리가 없었어요. 울 인간도 없고, 웃을 인간도 없었어요. 그 때는 주님만 계셨어요. 그래서 주와 주 사이에 의논해서 주어진 신앙이 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비로소 제대로 신앙이라고 할 수 있고, 내가 조작한 신앙이 아니라 선물로 받았고 이 선물로 받은 신앙은 나로 하여금 내가 ‘없음’으로 되돌아가는 능력이 나오지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사로잡인 자입니다. 하나님께 사로잡힌 다는 것은 ‘나는 없다.’가 됩니다.
“네가 없는데 왜 네가 있느냐?” 고 묻는다면, 그 때 이렇게 답하면 됩니다. “내가 없을 때 주께서 뜻이 있어서 지금 나를 만들었다.”고. 그러면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릴 수 있는 유일한 바탕인 내가 없었던 창세기 1장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게 보통 어려운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까지의 신앙을 재수정해야 돼요. “나는 예수 믿습니다.” 이거 거짓말입니다. 뭘 하나 빼앗아가 보세요. 자식을 죽이든지 하면 기절합니다.
“신은 없다.”라는 말을 중학교 학생이 했다는 것은, 일단 반가워요. 왜냐? 우리가 평소에 감추고 있던 본성을 철없는 학생의 입을 통해 폭로되었다는 것이 즐거워요. 그런데 왜 신은 없다고 했을까? 있는 게 자기밖에 없으니까, 자기는 보이는데 신은 안 보이니까.
자기 눈에는 신이 안 보이고, 그런데 성경에는 하나님이 있다고 했으니까 둘 중 하나를 버려야 되는데, 자기 자신이 보고 판단하는 것이 옳아야 자신을 계속 유지할 수 있기에 ‘신은 없다.’고 결론을 내리는 겁니다.
창세기 1장처럼 만약 내가 없던 시절이 있다고 한다면, 지금 내가 있다고 여기고 했던 모든 것이 졸지에 비진리가 되고, 비신앙이 되니까, 이것은 성경대로 하면 저주 받고 지옥 갈 대상이 되는 거예요. 그게 싫은 거예요.
천국이 있고 천국에 가면 복 받는다는 이야기보다 더 편하고 좋은 소리는 아예 천국이 없다는 소리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주 골치 아픈 시어머니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시어머니가 내게 한복 한 벌 해 준다고 해요. 그 말보다 더 기쁜 소식은 시어머니 죽었다는 소식입니다. 아예 없는 게 속 편해요. 살아 있어서 한복을 해 주고, 용돈은 주고 하는 것이 다 귀찮아요. 그냥 죽으면 제일 좋아요. 인간은 자기밖에 모릅니다.
그러면 마귀의 올무라는 것은 무엇인지 따져봅시다. 창조 때는 누가 있다? 인간은 없으니까 영적 존재밖에 없지요. 마귀의 존재가 언제 등장합니까? 창세기 3장에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마귀가 먼저 선악과를 알았으니까. 창세기 3장에서 마귀가 등장하고, 마귀는 인간이 알지 못하는 선악과를 알아요.
마귀의 전략은 창세기 1장, 2장으로 돌아가지 말고, 지금 마귀 나를 만났던 그 시점부터 ‘네가 따먹으면 신이 된다.’ 진짜 신은 창세기 1, 2장에 있는데 마귀의 올무는 무엇입니까? 마귀는 우리에게 1, 2장은 무시하고 선악과를 따먹은 3장부터 네가 판단하는 모든 것으로 신으로 행세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그 마귀의 꼬임에 넘어간 아담, 그 아담의 속성을 물려받은 우리는 아담의 후손이고 그래서 그 악마의 본성을 담고 있고, 우리는 신이 있다, 없다를 내가 판단하고, 신앙이 선물로 받은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 내고, 내 자식은 내 것이고, 내 노동의 대가도 다 내 것이고 --
나의 것이 하나 둘 빼앗기니까 노무현씨는 부엉이바위에서 뛰어내렸고, 역대 대통령가운데 가장 청렴했다는 그 위신에 흠집이 생길까 싶어 자살을 했단 말이지요. 생각해 보세요. 검찰에서 수사 안 했으면 뛰어 내렸겠습니까? 검찰에서 수사를 하니까 뛰어내렸어요. 이건 무슨 말입니까? ‘날 건드리지 마.’ 왜? 창세기 3장 이후 악마의 올무에 매인 인간의 특징은 ‘내가 신이니까 날 건드리지 마!’
그런데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나는 진리를 안다. 나는 똑똑하다.”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님께 뭐라고 했습니까? “진리가 뭐냐?”고 했잖아요. 예수님이 안 가르쳐 줘요. 이미 ‘진리가 뭐냐?’ 라고 판단하겠다는 그 자체가 진리와는 다른 노선에 있기 때문에 그래요.
빨간 펜으로 써 보겠습니다. 노선이 빨간 노선이 있고, 검은 노선이 있어요. 지금 본디오 빌라도가 검은 노선인데, 즉 창세기 3장 이후의 인간인데, ‘진리가 무엇인가?’ 라고 물었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이 무슨 답변을 해도 해석은 본인이 합니다. 자신이 검은 노선 위에서 해석을 하니까 결국 해석자는 누구입니까? 자기 자신이 되지요.
예수님은 붉은 피 노선입니다. 십자가에 죽으로 가잖아요. 그러기에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노선은 어떤 노선입니까?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그 노선에서 기적을 베풀었고, 병을 고쳤고, 산상설교를 했고, 제자들을 가르쳤어요. 그런데 예수님 외의 사람들은 어느 노선에 있습니까? 창세기 3장 이후 악마의 올무에 빠진 이 노선에 있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어느 누구도 알아듣지 못하는 거예요. 성령이 올 때 알아들었지요.
그렇다면 예수님만 구원 받고 아무도 구원 받지 못하는 것 아닌가? 걱정하지 마세요. 한 사람만 믿어도 믿은 것으로 쳐줍니다. 그 한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예수님입니다. 천국에서의 법칙은 언약 법칙인데, 이 법칙의 특징은 한 사람만 지켜도 안 지킨 사람을 지킨 것으로 해주는데, 이것은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에 이미 약속된 것입니다.
시편 110편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이것이 신약 성경에는 이렇게 되어 있어요. “주께서 내 주에게” 라고 해서 주가 두 번 나옵니다.
시편에서는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 그러니까 누구의 원수입니까? 예수님의 원수지요. 이 이야기가 창세기 몇 장의 이야기입니까? 바로 3장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이 시편 110편이 진리라면, 이 진리가 우리를 시편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고, 시편을 보면서 창세기 3장으로 데려가지요. 얼마나 신기합니까?
모든 성경이 다 그래요. 지금 우리가 보는 디모데후서도 마찬가지에요. 그런데 일반 신학자들은 그걸 모르고 그릇에 대한 말씀이 나오면(딤후2:21), 이것을 가지고 개인적인 경건으로 설명하잖아요. 예수 믿는 것으로는 모자라고 개인적으로 착해야 구원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여전히 무지몽매한 거예요.
역사가 시작된 것이 창세기 3장부터입니다. 역사의 시작은 창세기 1장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의 시작이란 반드시 인간이 있어야 돼요. 그러면 범죄한 인간이 언제부터입니까? 창세기 3장입니다. 그러면 창세기 3장부터 아담의 후손이 생기고, 아담의 후손이 생기는 것을 가지고 인간의 역사라고 해요.
그러면 그 전의 역사는 뭡니까? 인간이 없던 시절을 뭐라고 합니까? 묵시라고 해요. 역사가 인간을 구원 못해요. 인간은 역사 속에 갇혀 있으면 끝나는 거예요. 그 역사에서 못 벗어납니다. 인간은 진화론 속에서 못 벗어나고 DNA에서 못 벗어나요. 제가 [뇌 과학과 철학]이란 책을 읽고 서평을 해 놓았습니다. 지금 학자들이 뭘 연구하는가 하면, 두뇌를 바꾸려고 해요. 바꾸는데 어떤 지점에 있느냐, 아니면 공명되는 장치에 있느냐 그것을 연구해서 지점에 있으면 지점을 바꾸면 되고, 공명되는 장치에 있으면 전체 다를 바꿔야 하기 때문에 골치 아프고 그런데, 현 시점에서 뇌 과학이 어디까지 갔는가 하면, 인간이 믿고, 사랑하고, 느끼고, 웃고 하는 것은 어떤 지점도 아니고 공명도 아니라 어떤 특징을 반복해서 훈련을 시키면 그 지점이 특화된다고 해요. ‘특화’는 특별나게 윤기가 난다, 특별나게 빛이 난다. 뭐 이런 의미입니다.
특화가 되면 특화된 그것 때문에 사용하지 않는 두뇌의 다른 세포는 서서히 죽어간다. 그러니까 인간 사회만 도태가 아니라 두뇌 세포들 사이에도 자연 도태를 통해서 인간은 점점 더 진화된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바꿀 수 있는 그 두뇌는 어디에서 나오느냐 이 말입니다. 그것을 집도하는 기능을 가진 의사의 두뇌 세포의 특화는 누가 시킵니까? 곤란하지요? 이 범주에서 못 벗어나는 거예요.
그래서 최고의 자리에 가면 사람이 허무해 지잖아요. 전도서가 그 이야기입니다. ‘책을 보고 궁극적으로 연구를 해 보니까 결국 마지막은 헛되다. 그러니까 차라리 돈 아끼지 말고 맛 있는 것 사먹고, 하고 싶은 것 다하고, 재미나게 살다가 죽어라.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허무하기는 마찬가지인데, 재미나게 사는 것이 네게 주어진 분복이다.’ 배당된 복이란 것이지요. 애가 셋 있으면 셋으로 살고(넷 욕심 내지 말고), 하나 죽으면 둘로 살고.
지난 수요일 그런 설교 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속인다고. 욥의 친구들이 하나님의 계시로 욥에게 고난이 닥치니까 친구들이 친구가 아니고 원수가 되 버려요. 그러니까 욥이 하는 말이 “그동안 너희들이 나를 속임이 아니고 이런 사태를 있게 한 하나님을 속이면서 ’하나님 믿습니다.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 너희들이 하나님, 하나님 하지만 진짜 하나님이 어떤 사건을 일으키니까 너희가 믿던 하나님은 엉터리 하나님으로 드러났다.” 하나님 근처에도 안 갔어요.
하나님이 우선이 아니고 누가 우선이었다? 내가 우선이었고 거기에 도배하듯이 도배지로 가져다붙인 것이 하나님이었어요. 종교였고 오락이었단 말입니다.
신앙이란 것은 (마귀의 존재 이유, 하나님의 존재 이유, 여기에 나는 빠져요.) 주님만 계시던 그 시절로 나를 데려가는 겁니다. 거기에는 내가 없으니까 내 주장을 펼칠 수도 없고, 내 계획을 할 수도 없지요. “주님, 주께서 선택하실 때 저를 꼭 넣어 주세요.” 라고 건의 할 입장이 못 돼요. 왜? 그 때는 내가 없으니까. 그러면 누가 있었어요? 주님과 악마가 있었지요. 성부, 성자, 성령과 누가 있었습니까? 천사와 악마가 있을 뿐이죠. 인간은 없어요. 이게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바치라고 할 때, 이것은 ‘아브라함 너도 없다.’는 것입니다. 자식만 없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도 없는 거예요. 네가 없던 시절이 되어야 비로소 하나님의 언약이 보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 시간에 할 내용인데, 잠깐 언급하면, 이것이 ‘천국의 구조’입니다. 구조이니까 개인은 의미가 없어요.
고린도후서 12장에 보면 바울이 천국의 구조에 들어갔지요. 삼층천. 그곳에 들어간 소감이 뭡니까? 내가 있는 둥 없는 둥 했지요. 이것은 ‘자아의 윤곽 상실’입니다. 이런 경험을 여러분들이 평소에 많이 합니다. 언제? 내 아이가 학원에서 웅변대회에서 웅변할 때. 너무 아이가 잘해서 내가 있는 둥 없는 둥. “이, 연사는 쓰레기 분리수거만이 지구를 살릴 수 있다고 목청껏 외칩니다.” 라고 하면 엄마가 정신이 하나도 없이 막 박수를 치지요. 박수 칠 때 옷이 어께에서 흘러내리는 것도 몰라요. ‘자아 윤곽 상실’입니다. 그리고 로토복권 1등에 당첨될 때. ‘자아 윤곽 상실’입니다. 정신 못 차려요.
삼층천을 보고 난 뒤에 사도바울이 미쳤습니다. 죽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어요. 이게 성령이 주시는 구조에요. “자식이 떡을 달라고 하는데 돌을 줄 자가 누가 있으며, 자식이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뱀을 줄 자가 누가 있으랴. 하물며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는가?” 성령이 오면 천국의 구조를 보게 되지요. 그러면 자아 윤곽이 상실됩니다.
윤곽의 상실은 생물학에서 세포 분열할 때 세포막이 없어지면서, 세포막이 없어져야 다른 자아로 번식됩니다. 여자가 진짜 여자가 될 때는 자식이 태어나야 진짜 여자가 돼요. 자식을 낳아 봐야 자식이 나의 대체물이 되고, 여자로서는 이제 끝나고 아줌마(엄마)가 됩니다. 아줌마의 의미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는 자가 아줌마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는 자는 (아가씨)여자입니다. 자식을 위해서 살 때는 아줌마가 돼요. 엄마가 되면 자식을 위해서는 눈에 뵈는 게 없어요. 자기를 건드리면 화 안 내는데 자기 자식을 건드리면 용서가 안 돼요.
그런데 녹매교회 다니는 000성도의 다섯 살 난 딸이 아파트에서 떨어져서 죽었어요. 수원으로 이사 가기 전에는 우리교회 다녔습니다. 몇 주 전에도 우리교회에 와서 예배 드렸는데, 제가 그 아이 엄마를 생각하니까 밤에 잠을 잘 수가 없었어요. 구득영 목사님은 얼마나 난처하고 힘들었겠습니까?
주께서 일으키는 사건은 창조 차원에서 일으키는 사건이기 때문에 우리 책임 아닙니다. 자식 죽은 것이 부모 책임 아닙니다. 우리는 책임 질 필요가 없습니다. 왜? 우리는 아예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사태는 아예 내가 없던 시절에 계획 잡힌 것이 나에게 덮칩니다.
10분 쉽시다.
(2009. 6. 4. 10:35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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