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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04.10/25. 인천강의 (조직신학의 고속도로, 계시론 1-3)자유게시판예레미야

2004.10/25. 인천강의 (조직신학의 고속도로, 계시론 1-3)

이름 : 이종호(IP:124.216.74.117)

마지막 시간을 하겠습니다.

제가 푸근한 마음으로 설교하라고 했는데, 속에는 불이 납니다. 아브라함, 다윗, 이사야를 보세요. 예레미야 같은 경우에는 속에서 불이 났습니다. ‘나 이 일 안 하렵니다.’라며 때려 치울려고 애를 썼습니다. 왜냐하면, 예레미야 같은 경우를 봅시다. 자기가 잘못한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 잘못한 여파로 그 아픔이 파도처럼 덮치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하십니다.

교인 한 사람의 잘못으로 옆에 다른 집사가 아픔을 겪고, 또 목사에게 그 아픔을 파도처럼 덮치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인간으로서는 막아 낼 재간이 없도록 그렇게 하십니다. 이런 것은 어느 교회에서도 그러하고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언약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이것을 마태복음에서는 간단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마태복음 5 :11-12)

선지자가 가는 길은 선지자가 원해서 간 길이 아니고 하나님이 고난의 길을 덤탱이로 덮어 세우는 경우입니다. 그 고난의 길이 예수님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입니다. 남한테 욕을 다 얻어먹고, 남에게 풍지박살 당하고, 자기는 그 일에 가담도 안했는데도 피해를 당하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조금 더 어렵게 설명해보겠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에게 선택받은 언약의 사람입니다. 그 아담안에서 두 가지의 자식이 나와야 합니다. 하나는 뱀의 후손이고, 다른 하나는 여자의 후손입니다. 뱀의 후손은 반드시 여자의 후손을 공격해야 되고, 거기에 대해서 여자의 후손은 뱀의 후손의 머리를 쳐야 되는 것은 이미 확정된 프로젝트입니다. (창세기 3:15) 여기에 대해서 이의를 걸면 안 됩니다.

‘내 인생 여기서 빼주세요!’ 해도 못 빼 줍니다. 이것은 우리의 운명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모두 아담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여자의 후손 편에 서 있다면, 여러분은 예수님의 고난을 당해야 됩니다. ‘빼주세요!’ 하면 안 됩니다. 빼주면, 그 사람은 지옥 갈 사람입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운명을 점 쳐드리겠습니다. 사람들은 점을 쳐주어도 복채도 주지 않고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 성도가 어떤 사람인가를 알려 주고 있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요한복음 15:18-19)

이것이 우리들의 장래 앞길입니다. 숨어살래. 기도원에서 혼자 살래. 모두 소용없습니다.

자꾸 도망가려고 하지 마세요. 도망 갈 생각마시고, ‘그냥 이렇게 되었으니까 구원받은 기쁨이 큽니다.’ 라고 생각하세요. 자꾸 도피할 생각은 하지 마세요. 미움 받아도 구원 받으면 됩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운명입니다. 요한복음에서 당연한 공식처럼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를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라.”

(요한복음 15:20-21)

여기서 강조할 것은, “ 알지 못함이라 ! “

이 대목을 가지고 마지막 시간을 장식하겠습니다. 이것이 상당히 어려운 부분입니다.

사람이 예수님을 알 지 못했습니다. 누구도 몰랐습니다. 세례요한도 몰랐습니다.

사람들은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알았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세례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누가 메시아인가를 몰랐는데, 성령이 그에게 내려오시지 않았다면 그가 누구인지를 몰랐습니다.’ 이것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예수 믿으려고 환장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는 우리와 상관없는 존재입니다. 나는 예수님을 알지 못 할 사람이고, 알지도 못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의 구세주가 됨!, 예수님의 십자가는 나와 상관있음!” 이라고 알게 된 것은 성령이 올 때, 곧 십자가의 영이 올 때 비로소 알게 되는 것입니다. 알지 못하는 증거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여러분은 십자가를 보면 무엇을 압니까? 십자가를 보면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는 예수님을 알지 못했던 사람입니다.” 라는 고백이 나와야 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지 못해서 나온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는 자기의 백성들에게 되풀이 됩니다. 어떻게 되풀이 될까요? 십자가에서 두 종류가 나옵니다. 하나는 십자가를 가지고 세상에 나가서 ‘너희들은 십자가를 몰라!’ 라고 하는 언약사람이 있고, 다른 하나는 여전히 자아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로 나누어지게 됩니다.

십자가를 몰랐다가 ‘십자가로 인하여 내가 구원받았구나!’ 라고 하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십자가의 능력으로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어느 누구 앞에서도 부인 할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고생을 사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5장에서 우리가 놓치기 쉬운 것이 하나 있습니다. 나 중심으로 사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미워함으로서 둘 사이에 다시 전쟁이 일어나도록 하나님이 유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불신자를 잘 해주면 우리에게 잘 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은 반드시 예수를 미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설교시간에 이런 예를 하나 들었습니다.

한 청년이 버스를 타서 어떤 아저씨에게 좌석을 양보했습니다. 그 아저씨는 고맙다고 하다가도 청년이 예수믿는 사람인 것을 알게 되면, 돌변해서 청년을 미워하게 됩니다.

“아이고 이 청년아 무엇이 아쉬워서 예수 믿느냐? 나는 예수믿는 사람은 싫더라.” 라고 하면서 그 아저씨는 평소에 예수를 미워하는 감정이 토해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그렇게 되도록 프로젝트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꾸 착각을 합니다. 내가 행동을 잘못해서 미움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타협을 시도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세상은 십자가를 모르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오히려 십자가를 알 게 된 우리가 더 신기하고 놀라운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계시의 하이라이트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모르게 될 자에게는 반드시 모르게 하시고, 알게 될 자에게는 반드시 알게 하시는 언약안에서의 계시가 진짜 계시입니다.” 이것이 바로 정답입니다.

다시 말해서, 언약대로 창세전에 택함 받은 사람은 남기고, 나머지는 지옥가도록 분류시키는 그 작업을 하는 계시가 진짜 언약적인 계시입니다. 그 계시를 위해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장세우고 일을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세례요한도 몰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자가 설교할 때 여기에서 주의해야 됩니다. 앞자리에 예수님이 앉아서 나에게 설교를 시켰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 설교 어떻게 할까요? 라고 물어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생각해야 할 이유가 수요예배 때 더욱 절실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너무 적거나 아내에게만 하게 되면 대충 넘어갈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평소에 우리가 사람이 적을 때나 많을 때나 신심으로 해야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보통 사람이 많으면 설교하는 열정을 내 볼까 하는 잘못된 습관 때문입니다. 많거나 적거나 하나님이 언약을 증거하는 기회를 주셨으면 언약을 증거하는 기회를 마음껏 발휘하는 것입니다. 증거하면서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설교를 듣는 모든 사람이 다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니고, 다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평소에 예수님을 싫어하면서 좋은 척 하는 사람들에게 싫어하는 본색을 들추어내는 쪽으로 해 주어야 언약적으로 합당한 설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만 좋으면 다 좋다고 하는 사람들이 기뻐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목사 본인이 ‘교회에 불이 나도 예수님만 있으면 좋습니다.’ 라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런 경우를 언약공동체라고 합니다.

“그렇게 괴롭혀도 안 나가면 어떻게 합니까?”

“안 나가는 것도 주의 은혜입니다. 아직도 때가 아닙니다. 목사를 더 괴롭히도록 주님에게 시간을 맡겨야 됩니다.”

그래서 요즘 제 설교는 ‘이래도 교회에서 안 나갈래? 이렇게 괴롭혀도 안 나갈래?’ 라는 심정으로 합니다. 자신의 걱정거리와는 상관없이 예수님만으로 즐거워하는 기적 같은 사람이 도대체 있느냐? 하는 마음으로 설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마음먹으면, 교인이 하나가 되든지 둘이 되든지 관계없습니다.

하나가 되면 하나님이 한명밖에 안 보내셨구나 하고, 하나도 없으면 오늘은 하지마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범사에 감사하면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모든 문제의 기초가 무엇입니까? 창세전에 구원받기로 택함 받은 예수님의 숙제로 내가 이 세상에 등장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이 세상에 등장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자기 숙제를 하기 위해서 나를 이 세상에 보냈다는 것입니다.

좀 더 이야기 해봅시다.

“알 수 없음!” 이것이 성경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성경책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성경책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나는 성경책을 볼수록 더욱더 알게 될 것이다.’

인간의 선입관이 “알 수 없음!”이 아니고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자연계시가 미흡하기에 보충하라고 특별계시로 성경책이 주어줬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은 이미 죄 가운데 있고, 죄 됨을 들추어내기 위해서는 알 수 있음 이라고 해서는 안 되고, 전혀 모르고 있었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내가 이 땅에서 그런 모습과 그런 양상으로 일을 해야만 된다.” 라고 하십니다.

소경이 아닌 자라고 하는 자에게 소경인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는, 소경을 불러다가 눈을 뜨게 하심으로 평소에 소경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인간들에게 소경인 것을 알게 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행동을 이런식으로 하십니다.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일하십니다.’

이것은 인간편에서 생각하기를 ‘계시는 우리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라는 사고방식을 모두 거짓이란 것을 공개합니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 사람들 손에 예수님이 죽는데,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보여준다는 것은 ‘너희들은 알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알 수 없기 때문에 예수를 매몰차게 십자가에 죽이지!”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목사가 교인이 백 명인데 한명만 나와서 성질나서 대충 설교한다면, 그 앞에 계시는 예수님을 무시하는 것이 됩니다. 결국에는 평소에 목사가 예수님을 알았다는 것이 엉터리였다는 것을 들추어내기 위해서 예수님이 달랑 한명만 보낸 것입니다.

목사의 본색이 드러납니다. 평소에 관심사가 예수님이 아니고, 예수님 덕분에 교인 백 명을 모았다는 것에 관심이 있었다는 것을 폭로시키기 위해서 한명만 보내 것입니다.

그것이 “알 수 없음! “의 원칙입니다. 목사는 알았다고 하지만, 몰랐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알 수 없음!”이라는 원칙으로 계속 일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계시는 은닉되어 있고. 비밀이고, 감추어져 있고, 은폐되어 있다고 에베소서 3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에베소서 3;9)

못 알아봅니다.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만졌어도 아무도 몰랐습니다.

예수님이 물으시기를, “누가 나를 만졌느냐?”

제자들이 대답하기를, “모든 사람이 만졌는데요?”

예수님이 가라사대, “아니다. 믿음으로 만진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다.”

예수님을 안 사람은 12년 동안 혈류병을 앓은 여인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예수님을 만지고 주물려도 몰랐습니다.

“알 수 없음!”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혹시 여러분이 예수님을 안다면, 그것은 여러분의 능력이 아니라 예수님의 능력이 임하고 예수님이 작업을 하시기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생각하시라는 것입니다.

자기 혼자 있으면,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혼자 있으면 자기위주로 생각하고 예수님과 관계없기 때문입니다. 비치기가 일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내가 모르는 것을 가르쳐 주셔서 알 수 있는 쪽으로 인도 하시게 됩니다.

그러므로, 목사가 설교할 때 교인들이 본문에서 예상할 수 있는 것을 엎어버려야 합니다.

교인들이 예상하는 것을 엎어버려야 합니다. 예상이 된다는 것은 목사 본인이 설교할 때

자기가 내 뱉은 의미를 회수하는 식으로, 자기가 아는 범주내에서 설교했기 때문에 목사는 자기설교에 은혜를 받지 못하게 됩니다.

“주여, 내가 여기까지 아는데 이것도 모르게 하옵시고, 내가 미쳐 몰랐던 것을 이 본문에서 이것을 알게 하옵소서.” 이런식으로 설교하면 설교시간이 지루하지 않고, 금방 지나갑니다.

“세상에 내가 이 본문이 이런 뜻인지 이전에는 몰랐습니다.”라며 설교자는 스스로 기쁘게 되고, 교인들은 무슨 뜻인지 모르면서도 기뻐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세상의 걱정근심이 사소한 것이 되고, 세상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는 것이 깨닫게 됩니다. 주님께서 설교자를 다루고 계시는 것입니다.

끝으로 몇 가지만 정리하겠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언약적 계시로만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으로 언약을 통해서만 나타나는데, 다른 사람을 배제하기 위해서입니다.

언약의 내용을 보면, 창세전에 택함을 받은 자만 구원되고, 나머지는 구원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설교내용이 작정된 자가 누구인가? 쪽으로만 설교를 해야 합니다. 다 은혜받는 것이 아니라 그들 중에서 영생 받을 자가 누구인가를 가려내야 합니다.

영생을 주고 안 주고는 하나님이 이미 작정하신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사도행전 13:48)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영생을 주기로 작정된 자는 믿고, 영생을 안 주기로 작정된 자는 절대로 안 믿어지도록 설교를 한 것입니다. 영생을 못 받기로 작정된 자는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설교를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설교의 내용이 무엇일까요?

‘구원이란 것은 자기가 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임할 때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행함이나 가치는 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의 행함에 가치를 둔 사람은 화가 나게 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구원받기로 작정된 사람만 구원 되면 손 털고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의 계시다. 계시는 반드시 능력이 나타납니다. 어떤 능력입니까?

택함 받든 자와 택함을 받지 못한 자의 내용이 하나님의 계시안에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이 능력은 우리의 능력이 아닙니다. 사도바울도 자신의 지혜로 전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고린도전서 2:7)

베드로나 요한의 병을 낫게 한 것도 그들의 믿음이지 경건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위해서 병을 고치신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전도한다고 다 믿은 것도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증거할 때 믿은 사람은 몇 명 되지도 않았습니다. 공연히 귀 죽지 마세요. 사도바울이 전했으니 많은 교인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데,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많은 교인이 있었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입니다. 로또에 당첨된 사람이 얼마 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설교자의 사고방식에 문제가 있습니다. 기존교회를 닮아 가려고 하지 마세요. 그 자체는 절이요. 사기집단이요. 지옥입니다. 기존교회를 닮으면 큰일 납니다.

‘좁은 길로 가는 자가 적다.’ ‘적은 무리여 두려워 말라. 하늘나라를 너희에게 주었노라.’ 라는 말씀이 이해가 되게 됩니다. 주님의 초월적인 능력이 임한다는 것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 능력은 우리가 개입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자체적인 능력입니다.

계시에는 우리가 믿는 것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믿기만 하세요.’가 계시가 아니라, 도망 가는 사람을 믿도록 하기까지 하는 능력이 계시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능력도 설교자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 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설교자가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설교자가 귀 죽지 않고, 좌절하지 않게 됩니다. 설교자는 말만하고 자기가 믿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러분, 택한 백성은 안 버린답니다.’ 라면서도 자기가 버림받을까봐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설교할 때 트릭을 서려고 하고, 자기가 개입하게 됩니다.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설교는 나의 일이 아니고, 주님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자기 일도 아닌데, 왜 신경 쓰십니까? 주께서 알아서 우리를 활용합니다. 혼자 걱정을 한다는 것은 설교를 자기일이라고 착각했기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우리가 걱정할 일이 아닙니다.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왜? 모든 일이 잘 되리라. 기뻐하고, 감사하고, 기도해라. 기도하라는 것은 헌신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염려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계시이고, 예수님의 능력입니다. 택함 받은 백성을 기어이 건져내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현실로 여기고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모습을 증거하고 자랑하는 것이 우리들의 몫입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어떻게 흑인이 백인이 되겠느냐?” 안되잖아요.

“어떻게 표범에게서 반점을 지울 수가 있겠느냐?“ 안 됩니다.

인간은 아담안에 있고, 표범은 표범안에 있기에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정도로 불가능한 것이 “예수믿기!”입니다. 그것을 우리힘으로 설교해서 믿게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안 되는 것을 주님은 믿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인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바로 증거하고, 그 증거를 통해서 세상은 우리를 미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을 이야기해야 서로 교류가 되고 융화가 되는데 도대체 인간이 할 수 없는 것만 이야기 하니까 교류가 되지 않고 우리를 미워하게 되고, 영생을 얻을 자는 자기의 불가능을 이야기 하니까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현장에 서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이 시간에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서 알았습니다. 계시가 구원받는 능력까지 임할 줄을 이제 알았습니다. 우리가 할 것이 아무것도 없이, 우리의 몸을 주 앞에 맡기면서 주님이 이런 분이란 것을, 기적적인 분이란 것을 가벼운 마음으로 알릴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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