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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04대구강의20(교회를넘어서)10-새언약8(에스겔),성전1(학개,스가랴)1자유게시판에스겔

04대구강의20(교회를넘어서)10-새언약8(에스겔),성전1(학개,스가랴)1

이름 : 구득영(IP:203.223.97.234)

[04 대구강의 20] - 교회를 넘어서 10 - 새 언약 8, 학개와 스가랴 성전 1

04,11,08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문자귀신은 물러가라 ??

지난 시간에는 우리 교재 262페이지에 나오는, 즉 야곱의 정실부인인 레와와 라헬의 자식들과, 종인 빌하와 실바의 몸에서 태어난 자식들이, 저주산인 에발산과 축복산인 그리심산으로 나누어지게 되는, 그렇게 구별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마쳤는데, 그런데 그것이 261페이지에도 있다는 것이다.

일단 교재 261페이지를 먼저 살펴보자.

** 그런데 12지파에 대한 땅 분배에 있어서도, 옛 언약이 지니고 있는 특성이 감추어지지를 아니하고 그대로 드러난다. 즉 야곱의 12아들들이 원조가 되어서 줄기를 형성한 지파들은, 야곱과 12지파의 원(原)족장 사이에는 언약적 관계만으로 연결되어있다.

'12지파'에 대해서 !!

이것이 왜 중요한 내용인고 하니, 먼저 12지파가 왜 중요한지를 알아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무'에서 '유'가 나온다는 것이다. 즉 없음에서 있음이 나온다는 말이다. 이것은 곧 있음을 거부한다는 의미인데, 즉 기존의 모든 인간들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들이 "야, 있구나" 라고 하면, 그것은 이미 실패했다는 말이다.

그것은 교회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그러니 "야, 교회다" 라고 하면 이미 교회가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야, 교회다" 라고 하는 의미가 무엇인가? 기존의 있는 교회의 바탕에서 무엇인가를 한번 자기 나름대로 해보겠다고 하는 것이 되니 말이다. 그러니 그것은 이미 있는, 즉 있음에서 있음으로 나오는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 '있음'에서 '있음'이 아니라 !!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이렇게 여기에 하나님이 계시는데 하나님이 뭔가 있음을 남겼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야, 이렇게 있구나" 라고 해서, 그렇게 그 있음에서 있음으로 나가려고 한다면, 그러한 있음에서 있음으로 나가는 관계는 하나님께서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리 하나님이 남겼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관계는 무엇인가? 여기에 이렇게 있더라도, 여전히 하나님께서 그 다음 일을 하신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데, 즉 오늘이 12월 5일이라고 하면 12월 6일은 12월 5일의 다음 날에 아니고, 다시 위에서 시작을 한다는 것이다. 12월 7일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그러니 12월 5일에 뭔가가 있었으니 6일에도 있고, 7일에도 있고, 그런 식은 아니라는 것이다.

◈ 수요일에는 비가 온다 !!

간단한 예를 하나 들어보면, 지난 주 수요일에 비가 왔는데, 이번 주 수요일에도 온다는 말이다. 그리고 다음 주 수요일에도 또 비가 오고, 그 다음 주에도 또 온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신체가 적응을 하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다음 주 수요일에 되면 뭐라고 하는가? "오늘은 비가 와야만 할텐데"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만 비가 오지 않으면, 우리 입에서는 당장에 "왜 이번 주 수요일에는 비가 오지 않습니까?"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말이 튀어나온다는 것은, 지금까지 수요일에 비가 왔기 때문에, 이제는 인간의 요구에 따라서 당연히 비가 와야만 되는 것처럼 여긴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벌써 거기에 적응이 되어있기에, 즉 "수요일에는 비가 온다" 라는 것이 말이다. 그래서 다음 주 수요일에도 비가 와야만 좋으신 하나님이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다음 주 수요일에 비가 오지 않았는데, 그 다음 주 수요일에도 오지 않고, 그렇게 계속해서 오지 않으면, "아하, 이제는 수요일에는 비가 오지 않는구나" 라고 하게 되는데, 그런데 그만 수요일에 비가 왔다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가? "왜 이제야 비가 오는 것이지?" 라고 하게 되는데, 그러나 그런 태도가 바로 문제라는 말이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일을 하시면, 거기에 사람들이 적응하게 되는데, 그 적응하는 방법이 바로 무조건 있음을 모두 다 끌어 모은다는 것이다. 그렇게 모아서 자기 영역이 되는데, 그것이 가인의 후손들이 하는 짓의 특징이라는 말이다. 즉 이미 있는 것으로 구축해서, 그렇게 구축해놓은 대로 하나님이 도와주시면 좋으신 하나님으로 얼마든지 섬기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는 근본적으로 엉터리인데, 왜 그런고 하니까, 이미 인간과 하나님은 결별했는데,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쫓겨 나오면서 말이다. 그렇게 결별하게 된 장소가 바로, 인간은 흙이기 때문에 흙으로 되돌아가는 장소라는 것이다.

◈ 아담이 왜 흙인가?

이것을 조금 더 어렵게 이야기하자면, '아담' 이라는 이름의 뜻이 바로 '흙' 이라는 의미인데,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흙' 이라는 의미로서 아담의 이름을 지었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반드시 아담은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존재가 곧 인간이고 말이다.

그런데 그 아담이 무슨 짓을 했는가? 에덴동산에서 그만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눈밖에 나게 되었는데, 그러므로 당연히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 라는 말씀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아담의 모습이고, 그래서 인간은 거기에서 다른 욕심을 더 내면 안 된다는 말이다.

(창 3:19)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 주의 이름인가? 인간의 이름인가?

그런데도 아담의 후예인 인간이 계속해서 자기 이름을 의존한다고 하면, 바로 그러한 세계를 두고서 '지옥'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천국은 무엇인가? 지옥과는 정반대인데, 즉 모든 것이 인간의 이름이 아닌 주의 이름이라는 것이다. 즉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 라고 했으면, 반드시 주의 이름대로 되어야 하고, 그런 주의 이름이 있는 세계를 천국이라 한다는 말이다.

(마 3: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마 3:17)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그러니 인간의 이름으로 천국에 갈 수 있는 통로는 전혀 없는데, 있다고 하면 다 거짓이라는 것이다. 물론 인간이 천국을 원한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에덴동산에서 살았기 때문에 말이다. 그런 심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그러나 이해를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인간의 이름은 그냥 인간의 이름으로서 끝나버리는데, 그러므로 인간의 이름에 주의 이름이 담기지 않는 이상, 그 사람은 결코 주의 나라에 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천국은 주님의 나라이지 전혀 인간의 나라가 아니기에 말이다.

이렇게 천국은 주님의 나라이지 인간의 나라가 아니라고 하는, 그런 인식의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사람은 교회에 나와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이 얼마나 사악한지, 천국에 가도 그 천국을 자기 세계이기를 원한다는 말이다. 물론 지옥에 가도 자기 세상이기를 원하고 말이다.

◈ 지옥의 주인은 누구인가?

제가 한번 물어보겠는데, 지옥의 주인이 누구인가? 불교 쪽에서는 염라대왕이라고 하는데, 성경에서는 지옥의 주인이 주님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主)' 라고 하는 것은 모든 영역에 다 걸쳐서 주인이기에 말이다. 주님 때문에 천국과 지옥이 생겼으니, 지옥의 주인도 주님이라는 말이다.

바로 그러한 주님이라고 하면, 우리가 그 어디를 가든지 간에 주님을 생각해야 하는데, 그런데 부자는 지옥에 가서 무슨 생각을 했는가? 자기 입이 탄다고 하면서 나사로를 시켜서 물을 좀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즉 자기의 속성이 흙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흙이 아닌 것처럼 간주해서 영원한 구원의 나라를 추구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말이다.

◈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순애보, '반지의 제왕' ??

저는 최근에 아주 슬픈 영화를 한 편 보게 되었는데, 근래에 들어서, 아니 평생에 그렇게 슬픈 영화를 본 적이 없지 싶은데 말이다. 그 영화를 보고 나서 얼마나 가슴이 아렸는지 모르는데, 그 영화가 바로 '반지의 제왕' 이라고 말이다. 그 원정대가 악을 물리치려고 아둥바둥 애를 쓰는 모습이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반지의 제왕'을 보고 십자가 마을에 글을 하나 올려놓았는데, 그들이 물리치려고 하는 '사오론(?)' 이라는 악이 있는데, 그 악이 곧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그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악마로 보이는데, 그래서 인간들이 예수님을 처형했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은 인간들의 눈에 악마로 보였다는 말이다.

◈ 예수님과 인간은 대화불가 !!

다시 말해서, 인간들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것들이, 예수님에게는 맞아 들어가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자기 이름대로 일을 해야 되고, 인간의 인간의 이름대로, 그렇게 인간의 속성을 그대로 발휘해야 되기 때문에, 그러니 서로가 전혀 맞아떨어지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서로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6장과 7장을 봐도 그야말로 동문서답인데, 심지어 구원을 받은 사람조차도 예수님과 대화가 되지 않고 말이다. 우리가 성경말씀을 보면서, 이렇게 예수님과 인간이 대화가 단절되어 있음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전혀 말씀을 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성경해석을 새로 다시 봐야 한다는 말이다.

◈ 문자는 그 밑바닥에 사법성을 띠고 있어 !!

제가 어느 글에서 상당히 어려운 표현을 사용했는데, "문자는 그 밑바닥에 사법성을 띠고 있다" 라고 말이다. 즉 문자는 그 배후에 사법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인데, 이게 무슨 의미인가? 여기서 사법성은 심판성을 말하는 것인데, 그런데 문자로 그냥 문자로 보게 되면, 문자 배후에 있는 그 심판성이 문자를 해독하는 그 인간을 창으로 찔러서 죽여버린다는 것이다.

놀랍게도(?) 성경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그것이 어디 있는고 하니, 고린도후서 3장 6절에 보면 나오는데, 즉 "의문은 죽이는 것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의문(儀文)'은 비석에 새겨진 글자와 같은 문자를 의미하는데, 그러니 문자는 우리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즉 문자가 문자를 보는 그 사람을, 문자를 보았다는 이유 때문에 죽인다는 말이다.

(고후 3:6)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군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그런데 문제가 무엇인고 하니, 우리 인간은 문자를 문자로 볼 수밖에 없는 한계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거기에 갇혀 있는데, 전혀 빠져 나올 수가 없다는 말이다. 우리 인간이 무슨 재주로 문자를 영으로 본다는 말인가? 전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문자를 문자가 아닌 영으로 보라고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인간에게서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지금 사도바울은 우리 인간이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사도바울은 이러한 점을 잘 알고 있는데, 그래서 그 이야기를 하고 난 다음에 모세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 아니, 어떻게 의문이 아닌 영으로?

모세는 문자를 아예 통 채로 돌에 새겨서 들고 와도 죽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모세의 손에 있는 십계명은 문자가 아니라 영이기 때문에 말이다. 그렇다면 모세는 어떻게 문자를 문자가 아니라 영으로 보았는가? 모세가 그렇게 영으로 보게 된 것은, 그곳이 영이 계신 곳이기 때문에 문자가 아닌 영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즉 여호와 하나님 앞이기에 그것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렇게 여호와의 영광 속에 있으니 모세가 죽지 않았는데, 그런데 모세가 실수를 해서(?) 그 모습을 그대로 해서 내려오니 백성들이 놀라서 도망을 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세가 얼굴에 수건을 덮어썼는데, 그렇게 해야 십계명을 이야기할 수 있기에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덮고 나서 이야기해봐야, 백성들에게는 그게 영으로 들리는 것이 아니라 문자로 들린다는 말이다. 하지만 마지막 때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함이 있다는 것이다. 즉 자유하는 예수님의 영 안에서는 자유롭다는 것인데, 그렇게 해서 마지막 때는 문자가 아닌 영으로 해결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고린도후서 3장에서 나오는 내용이고, 이것을 4장 4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는데, 즉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라고 한다는 말이다.

(고후 3:7)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
(고후 3:15)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고후 3:16)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고후 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고후 3: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
(고후 4:3)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고후 4:4)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 자꾸만 멀어지는 그대 이름은 '문자' !!

방금 제가 한 이야기 가운데는 우리 인간이 어떻게 하면 된다는 것이 전혀 없는데, 즉 그냥 말씀대로 진행이 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정말이지 우리 인간들은 어쩔 수가 없는데, 우리 인간이 무슨 수로 악마를 이긴다는 말인가? 악마로 가로막고 있는데, 어떻게 그것을 뚫고 나갈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므로 망할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는 그것이 문자로 들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물론 영으로 들리면 영생이 주어지는데, 그러면 문자로 들리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그렇게 문자로 들리게 되게 되면, 그 배후에 있는 사법성과 법률성으로 인해서 죽게 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런 문자에 사람의 행함이 들어가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 문자는 그만 판사님이 되어서 자꾸만 멀어진다는 것이다. 즉 "판사님, 어디 계셔요?" 라고 하면, 그 판사님은 5m나 멀어지고, 다시 부르면 또 10m나 멀어지고, 또 다시 부르면 또 더 멀어지고 말이다.

바꾸어 말하면, 자기가 이웃에게 뭔가 좋은 일을 하나 하고 나서 "예수님, 제가 이렇게 이웃을 사랑했습니다" 라고 하면 어떻게 되는가? 그 "이웃을 사랑하라" 라는 말씀은 이제는 저만큼 멀리 있고, 그래서 이번에는 다른 것으로 더욱 더 이웃을 사랑했다고 여기면, 이제 그 말씀은 또 다시 훨씬 더 멀리 있다는 말이다.

◈ 어, 콩팥도 있어야 하는데 ??

예를 들어서, 고아원을 방문해서 자기가 그동안 모았던 돈으로 쌀과 라면을 사주고 해서 제법 이웃을 사랑했다고 여기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는가? 사법성이 말하기를, "그런데 당신 몸에 있는 신장은 안 되나? 형제를 위해서 목숨도 바치라고 했는데, 그런 신장은 하나만 있어도 되잖아"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신장을 떼 주고 자기 목숨까지 바치려고 하는데, 그러면 또 사법성이 뭐라고 하는가? "목숨을 불살라서 내어주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데"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새로운 사법성이 가면 갈수록 더욱 더 멀리서 등장한다는 것이다. 자기는 나름대로 아주 열심히 해서 문자가 원하는 지점에 왔다고 생각하는데, 그런데 와서 보면 더 멀리 가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아무리 따라 잡으려고 해도 잡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목사들이 교인들에게 뭐라고 사기를 치는가? "여러분, 이렇게 이렇게 하시면 말씀을 지킬 수 있습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말하는 그 목사에게 "그러면 말씀을 당신은 지켰습니까?" 라고 한번 되물어보라는 것이다. 그렇게 말씀을 지킨다는 것이, 우리 인간에는 전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에 의하면, 이 성경말씀 전체를 지키는 것이 있을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그것이 인간에게 문자로 나타나는데, 인간에는 그렇게 문자로 접근이 되기 때문에, 그런 문자로 접근한 것은 지키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그 문자가 소위 지켰다고 하는 인간들을 공격하고 죽음으로 몰아넣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4장 12절에 보면, 우리의 골수를 쪼갠다고 하는데 말이다.

(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 언약 - 주의 이름과 인간의 이름이 !!

아무튼 이렇게 영으로 문자를 보게 되면, 이것이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즉 처음부터 말씀 속에 나누어져있다는 것이다. 아까 제가 말씀의 속에서의 인간의 이름과 주의 이름을 이야기했는데, 이렇게 인간의 이름과 주의 이름이 어울려져 있는 것을 '언약' 이라고 하는데, 즉 주의 이름이 하시는 일과 '아담' 이라는 인간의 이름이 하는 일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그러면 인간의 이름이 몇 명이나 됩니까?" 라고 물을 필요가 없는데, 즉 "아담만 인간의 이름이고, 아브라함은 인간의 이름이 아닙니까?" 라고 말이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라고 뭐고 간에 모두 제거하고 나면 나중에 최종적으로 남는 것은 아담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아담 안' 이라는 말이다.

◈ 성경해석은 그리스도만 남겨야 !!

이런 의미에서 성경해석은 간단한데, 제 아무리 곁가지가 많아도 모두 다 자르고 나면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만 남는다는 것이다. 성경해석은 이렇게 간단하게 해야 하는데, 그래서 "모세를 본받읍시다!" 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모세든지 엘리야든지, 그 누구라도 모든 인간들은 다 흙인데, 다윗이 제 아무리 훌륭해도(?) 무덤에 들어가서 그대로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자르고 간단하게 하는 것이 성경해석의 기초이고, 그렇게 언약아래에서 해석하게 되면, 주의 이름과 인간의 이름이 나란히 가게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언약 안에서 문자가 나오기 때문에, 이것을 영으로 보게 되면, 영 안에 이 모든 것이 다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랴서 조금 전에 말한 그리심산과 에발산의 경우에, 그렇게 둘로 나누어진다는 말이다.

제가 지금 이야기하고자 하는 언약이 바로 '야곱언약' 인데, 그런데 이 야곱언약에 있어서, 주의 이름과 인간의 이름을 체계화시키고 설계도를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전적으로 하나님에게서 나오지 인간에게서 나오지 않으니, 이것을 아까 제가 "무에서만 유가 나온다" 라고 했는데, 그러니 '유'는 언약이 아니라는 말이다. 즉 언약은 '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 모세언약에서 다윗언약이 아니라 !!

구속사적 성경해석의 한계점이 바로 이런 것인데, 즉 모세언약에서 다윗언약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간다고 여기는 것은 인간의 문자적 의식에 불과한 것이고 말이다. 그러니 모세언약에서 다윗언약으로 가는 것은 위에서 내려오는 것인데, 그렇게 위에서 내려온다는 말은 주의 이름이 일을 하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의 이름이 어떻게 일을 하시는가? 그것이 제가 지금까지 강의한 내용인데, 여기에 이렇게 다윗언약이 있다면, 인간적인 방법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주님이 일을 하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모세언약에서 다윗언약으로 가지고, 그렇게 흉내를 낸 사람들이 그야말로 한 두 명이 아닌데, 사울이 그러했고, 압살롬이 그러했고, 히스기야나 아하스도 그렇고 말이다.

◈ 주의 이름은, 인간들의 실패 가운데 고난받는 선지자로 !!

그렇게 이스라엘의 모든 왕들이 모세언약에 의해서 다윗언약을 자기들이 실천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여로보함, 르호보암도 있고, 이름도 헷깔리는데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인간들이 하는 모든 시도는 다 실패가 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실패가 될 때, 그 가운데 주의 이름이 그들 속에서 고난받는 선지자의 모습으로 계속해서 일을 한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공부하는 것이 에스겔서 선지자인데, 이 에스겔을 하나님께서 뭐라고 불렀는가? 하나님께서는 '인자야' 라고 했는데, 그런데 이 인자는 언약 속에 들어있는 '언약 맨' 이라는 것이다. 즉 언약 속에 들어있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 구원받은 자는 없는데, 그런데 언약 안에서 !!

그렇게 언약 속에 있으면서, 하나님은 어떻게 무에서 유를 하는고 하니, 그것은 바로 언약 안에서만 무에서 유로 일을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전혀 구원받은 자는 없는데, 그런데 언약 안에서 쏟아지게 되어있다는" 라는 것이다.

다시 한번 분명히 말씀을 드리지만, 구원을 받은 사람은 없는데, 왜냐하면 아담이기에 말이다. 아담이기에 그냥 자기 길로 가는데, 그런데 언약이라고 하는 기구인지 뭔지 몰라도 그것이 떨어져 있기에, 그 보자기를 풀어보니 그 안에 구원받은 사람들이 소복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즉 무가 유와 접촉을 하면서, 거기서 언약의 백성들이 등장하게 되어있다는 말이다.

◈ 144,000명 - 들어오지 마 !!

그것이 야곱의 경우에는 12아들들인데, 즉 이러한 야곱의 12아들들이 퍼져서 구원받는 자들이 생긴다고 하는 것은, 그 어떤 인간도 야곱의 12아들들 가운데 들어올 수 없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러니 곧 단절이란 말이다. 요한계시록에서 12가 12번 발생되면 무엇이 되는가? 즉 '12×12'가 되면 144,000명이 되는데, 그러니 이 144,000명이라는 것은 그 어떤 인간도 여기에 들어올 수 없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 여호와 증인들 경우에 !!

여호와 증인들이 왜 군대에 가지 않고 그 대신에 영창에 가려고 하는고 하니까, 집총 거부와 국기에 경례를 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것도 의도적으로 공개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핍박을 자청하고 전도를 열심히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자기들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기들은 이 144,000명에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인데, 그러면 지옥에 가니 자기들에게는 엄청나게 중요한 문제라는 것이다.

아주머니가 얼굴은 예쁘장하게 생겨서 그런 일을 하면서 욕을 얻어먹는데, 왜 그렇게 하느냐고 하면서 하지 말라고 만류를 해도, 지금 자기가 욕을 먹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하지 않으면 144,000명에 들지 못해서 지옥으로 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144,000명의 귀신이 그들을 땡겨서 그렇게 열심을 내는데, 다른 말로 하면 문자적 귀신이 당겨서 그렇게 한다는 말이다.

◈ 그만 '돈' 귀신이 달라붙어서 !!

그렇다면 여호와의 증인들 말고는 문자적 귀신이 없는가? 당연히 있는데, 그것은 144,000명이란 문자귀신이 아니고, 단 한 글자로서 '돈' 이라는 말이다. 우리가 이 세상을 돈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는데, 한 쪽은 144,000명이 들어가지 않으려고 그렇게 욕을 듣고 해도 감당을 하고, 다른 쪽은 돈을 벌려고 모든 설움을 다 인내하고 말이다. 모든 기독교 교리를 버리더라도 그 돈에 목을 맨다는 것이다.

목사들 가운데 "삼위일체 교리를 버리면 돈을 줄 테니, 그런 사람은 이리 오세요" 라고 하면, '할배요(너무 감사합니다?)' 라고 하면서 달려간다는 것이다. 재벌들이 모여서 교회를 하나 개척해서 목사를 청빙해놓고는 "목사님, 이제는 이 범위 안에서 설교를 하세요" 라고 하면 목사가 순종하지 않겠는가? 지금까지 자기가 배운 신학은 다 버리고 얼마든지 그렇게 해준다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은 돈이고, 그것은 바로 "나는 살고 싶다" 라는 것인데, 아무튼 간에 자기는 살고 싶다는 말이다. 교단총회에 가보면, 거기에 오는 목사들이 다 그러한데, 물론 겉으로는 다 숨기고 오지만 말이다. 하지만 결국은 "이 자격증을 유지해서, 그 덕분에 먹고살겠다" 라는 것이다.

◈ 우와, 동료들이 많네 !!

물론 처음에 신학교에 갈 때는 그런 자기 모습이 부끄럽지만, 그러니 목회를 하면서 노회나 총회에 가보면 그런 자기 모습이 부끄럽지 않은데, 왜냐하면 거기에 가면 자기만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다 똑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목사들이 노회를 그렇게 좋아하고 기다리는데, 장로들도 그렇고 말이다.

아무튼 목사들의 행동을 보면 그런 것이 모두 드러나는데, 하나같이 전부가 다 그렇게 하니 자기도 이제는 안심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디에 갔는가? 그동안 모두 잘리고 해서 그만 없어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것을 갈라디아서에서는, "성령이 임한 자는 육에 속한 자에게 핍박을 받는다" 라고 이야기하는데, 역시 오늘날도 그러해야 하고, 실제로 그러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말씀대로 되기 위해서는 거짓 목자들이 많이 많이 생겨나고 부흥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해야 이쪽에서 핍박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목사뿐만이 아니라 교인들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자기가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도 몰라도, 일단 기존 교회에 가보면 안심이 된다는 것이다. 자기하고 똑같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말이다. 말씀을 보면서 평소에 자기가 믿음이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도, 교회에 가보면 믿음이 없는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지 말이다.

특히 개신교에 다니다가 천주교에 가면 그야말로 가관인데, 신부들이 설교라고 하는 것을 들어보면, 성찬식에 참여해서 떡을 먹고 포도주만 마시면 구원을 얻는다고 하니 말이다. 그야말로 복음은 전혀 없는데, 그러니 자기 믿음도 그런 곳에 와보면 대단해 보인다는 것이다.

◈ 예수는 그냥 옛날 사람 ??

아무튼 이렇게 교회에 가든 어디에 가든 믿음이 있는 사람이 없으니, 사실 자기는 너무나 흐뭇한데, 예수님은 그냥 과거의 인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마치 요즘에는 이순신 장군을 믿는 사람이 없듯이 말이다. 인기도 별로 없는데, 그래서 드라마로 해도 시청률도 낮고 말이다. 그냥 그때 그 당시의 인물, 즉 한물간 옛날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과거의 예수보다도 지금 돈이 되는 생생하게 눈에 보이는 교회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왜 이런 일들이 생기는가? 그것은 성경을 문자로 보기 때문인데, 하자만 그들에게 왜 문자로 보느냐고 따질 수가 없는데, 그것이 바로 그들의 한계이기 때문에 말이다. 즉 문자로 보는 것 이외는 방법이 없는데, 그래서 자기들은 144,000명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국기에 대한 경례도 거부하고 무조건 거기에 들어가야 한다는 말이다.

◈ 아니, 주일성수를 하지 말라니 ??

이와 마찬가지로, 일반 교인들은 성찬식에는 반드시 참석을 해야만 하고, 또 주일성수를 하지 않으면 안 되고, 그리고 십일조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문자이고, 그러나 어떻게 하겠는가? 그들에게는 그것이 전부인데 말이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핍박이 어디서 오는고 하니, 문자로 보는 사람들이 영으로 보는 사람들을 핍박한다는 것이다. 즉 문자로 이해하는 자들이 영으로 이해하는 자들을 핍박하는데, 그래서 한 쪽으로 성령으로 낳았고, 다른 쪽은 그 반대말인 율법으로 낳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4장에서, 성령의 자식과 율법의 자식으로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갈 4:22) 기록된바 아브라함의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갈 4:23) 계집 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 전도는, 영 되신 분이 !!

이렇게 확실히 구분이 되는데, 물론 지금 한국교회에서 마구 믹서기로 돌리고 있지만 말이다. 성경에 전도를 하라고 했으니, 전도를 해야 하지 않느냐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전도는 누가 하는가? 지금 주님이 우리에게, 즉 성경의 모든 말씀은 영 되신 분이 우리에게 전도를 하신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모세가 십계명을 받아왔는데, 그 십계명을 누가 지키는가? 모세가 아닌 주님이 십계명을 지켜서, 그 은혜로 인해서 자기 백성을 살리는 방식으로 십계명이 지켜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산밑에 있는 백성들이 그것을 거부하는데, 그래서 모세가 자기 자신을 담보로 그들을 인도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설명이 되어야만, 홍해를 건너왔던 그 40만이(?) 광야에서 왜 몽땅 죽어야 하는지, 그 이유가 납득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은 사람 위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약속 위주이고 맹세 위주이지, 즉 아담을 보살피는 것이 주님의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 야곱의 12아들들의 등장은?

교재 261페이지에 나오듯이, 이렇게 야곱의 12아들들이 등장했다는 것은, 다른 족속들은 이제 죽었다고 보면 된다는 것이다. 즉 이렇게 야곱의 12족속이 있다는 것은 다른 족속들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지옥에 간다는 말이다. 여기에 대해서 "이스라엘만 사람이고 우리들은 사람도 아닌가?" 라고 한다면, 그 대답은 "예, 사람이 아닙니다" 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어디까지나 아담이고, 그들은 언약맨이니, 그러니 서로가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즉 그들은 천당에 가고, 우리는 지옥에 가고 말이다. 이것이 너무나도 당연하고, 또한 그것을 우리가 기꺼이 수용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 유다족속에서 등장한 메시야를 !!

그렇다면 이 야곱의 12아들들이 "우리들은 구원을 받았다" 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한 12아들들인가? 그것이 아니라, 이 12아들들은 그 자체 내에서 어울리면서 "누가 이들을 구원했는가?" 라는 것이 튀어나와야 하는데, 12아들들의 활동을 통해서 말이다. 그렇다면 요셉이 그들을 구원했는가? 아니면 유다인가? 그러나 나중에 보면 그들이 아닌데, 즉 야곱의 12아들들은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아무튼 이 유다는 분명히 아닌데, 그런데 놀랍게도 그 유다족속에서 등장한 메시야가 이방인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그들을, 오로지 언약적 관계성으로 인해서 구원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을 증거하는 바탕이 되는 것이 야곱의 12아들들이라는 말이다.

◈ 요한계시록의 144,00명은 누구인가?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의 144,00명은 누구인가? 여호와 증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전도를 많이 하고, 또한 착한 일을 많이 해야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중요한 것은, 야곱의 12아들들은 그냥 공짜로 구원을 받았는데, 도대체 이들을 공짜로 구원한 분이 누구냐는 것이다.

사도요한이 밧모섬에서 엉엉 울고 있을 때, 24장로 중의 한 사람이 와서 "유다지파에서 나온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도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의 힘으로는 악마를 이기지 못하지만, 즉 우리는 이 세상을 이기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문자로밖에 볼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성경에서 "하지 말라" 라고 하면, 그것은 하지 않으면 되는 줄 알고 있다는 것이다.

(계 5:5)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그런데 놀랍게도 유다지파에서 나온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이겼는가? 어린양의 피로서 이겼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지금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에스겔서에서 미리 앞당겨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제 교재 261페이지를 보자.

** 이와 마찬가지로, 야곱의 가정에서도 야곱의 두 처, 레아와 라헬 사이의 갈등으로 인해서 각자의 여종을 통해서라도 기어이 자식을 낳고야 말겠다는 너무나도 인간적이고 비약속적인 결과들을 도출하는데 이르고 마는데, 바로 이러한 인위적 결과가 야곱의 위상으로 인해서 다같이 약속의 지파라는 큰 무리 속에 흡수되고 만다. 따라서 야곱가문, 즉 이스라엘 12지파 간에 '레아와 라헬' 구조와 '정실과 여종' 이라는 상호 대립되는 두 개의 갈등 구조를 형성하게 된다.

◈ 아하, 언약 때문에 !!

그러므로 그 당시의 12지파들은 무엇을 느껴야 하는가? 자기들이 구원을 받은 것은 결코 자기들이 잘나서가 아니라, 야곱에게 내려주신 언약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 야곱은 무엇을 느껴야 하는가? 자기가 구원을 받은 것은 형을 이겼기 때문이 아니고, 형을 이긴 분은 따로 있는데 말이다. 그렇게 이삭에게 언약을 내려주신 그분이 형을 이기고, 야곱 자신을 이겨서, 바로 그렇게 해서 자기로 하여금 하나님의 구원자가 되게 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삭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어떻게 이삭과 이스마엘이 갈라지게 되었는가? 그것은 바로 아브라함에게 내려주신 하나님의 언약이 이스마엘을 버리고 이삭을 구원해주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4장에 보면 아브라함에게 여자가 두 명이 나오는데, 즉 '사라'와 '하갈' 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사라와 하갈의 자손으로 완전히 쪼개버린다는 말이다. 하나는 약속의 자녀이고, 다른 하나는 육신에 속한 자녀로서 말이다. 이렇게 사람이 쪼개진다는 것은 언약 안에 있어야 그런 것이 보이고, 그렇게 영적으로 볼 줄 알아야, 이러한 문자 속에 쪼개짐이 있다는 것이다.

◈ '전도를 하자' 라는 의미는?

그러므로 "전도를 하자" 라고 했을 때, 그것을 문자로서 전도를 이해한다고 하면, 우리가 전도를 열심히 제대로만 하면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의미로서 여기지, 어떻게 이러한 쪼개짐이 있을 수 있느냐는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전도를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여긴다면, 그 사람은 문자에 속한, 즉 하갈 쪽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전도를 자기가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부활하신 주님께서 전도를 하셔서 그 결과로서 우리를 전도를 시키고, 또한 우리가 전도를 받게 한다는, 그렇게 영적으로 볼 줄 아는 눈을 가질 때 그 사람은 바로 사라에 속한, 즉 이삭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똑같은 문자인 "전도를 하자" 라는 것을 두고서 확실하게 나누어진다는 말이다. 그러니 영에 속한 사람의 경우에는 무엇을 생각하는가? 자기는 주님에게 전도함을 당했는데, 그렇게 때문에 자기 속에는 "전도를 하자" 라는 것이 계속해서 울렁거리고 있다는 것이다.

◈ 난, 당신을 사랑해 ??

쉽게 말해서 다음과 같은 것인데, 만약 자기가 어떤 여자를 사랑한다고 했을 때, 그것을 문자로 보면, "너는 가만히 있어. 내가 너를 사랑해" 라는 의미이지만, 그러나 이것을 영으로 보면 어떠한가? 즉 "내가 너를 사랑한다" 라는 의미는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 의미는 바로, 먼저 그 여자 쪽에서 자기에게 사랑을 주었기 때문에, 그래서 자기에게는 난데없이, 그것이 바로 '무(無)' 인데 말이다. 즉 자기가 난데없는 사랑을 받고 난 다음에 가까이 다가서게 되었는데, 그것이 다른 사람이 볼 때는 그 여자를 사랑하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사랑을 받지도 않았으면서 흉내를 내는데, 즉 성경에 보면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 지어다" 라고 하니, 자기가 그렇게 주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자기가 살아가는 환경이 괜찮을 때는 그래도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깝죽거리다가 자기 형편이 어려워지고 사업이 부도가 나고 하니, 그만 주님에서 돌아서더라는 것이다.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주님에게서 사랑이 공급되지 않은 상태에서, 자기 사랑을 끄집어내어서 사랑을 하다가보니, 그 사랑이 어려운 일이 닥치고 무슨 일이 생기게 되니 그만 중단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니 목사가 아무리 설교를 잘해도 사랑이 아니고, 자기 사제를 털어서 구제를 해도 사랑이 아니고, 심지어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고 해도 사랑이 아니라는 말이다.

◈ 과연 사랑이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과연 사랑이란 무엇인가? 그런데 고린도전서 13장에서는 정작 거기에 대해서는 답변이 없다는 것이다. 사랑은 이러 이러한 결과가 나온다는 것만을 이야기만 하지, 정작 그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제가 십자가 마을에서 언약은 이런 이런 결과를 나타낸다고 하니, 그 언약이 무엇이냐고 따지는 사람이 있는데, 그러나 그것은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언약은 문자로서 설명이 되지 않는데, 그것이 성경전체에 퍼져있으면, 언약 속에 있는 사람은 언약이 그렇게 성경에서 거물망처럼 퍼져있음을 보면 되는 것이지, 굳이 언약이 무엇인지 알아서 무엇을 할 것이냐는 말이다.

아무튼 사랑하는 사람이 다가오게 되면, 처음에는 철이 없어서 그 여자를 자기가 사랑한다고 여기에 되지만 말이다. 하지만 다른 여자는 그렇지 않은데 왜 그 여자만 사랑하는가? 그것은 바로 먼저 그 여자에게서 자기를 당길만한 것이 왔다는 것인데, 그런 요소에 의해서 당겨서 가니 결국에 그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 주님이 우리를 낚아채야만 !!

그러니 알고 보면 자기가 먼저 사랑한 것이 아니라, 여자가 자기를 낚아챈 것이 된다는 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님이 우리를 낚아채야만 우리가 구원을 받는데, 이것은 성경의 기본이란 말이다. 여기서 이탈되면 완전히 사기꾼이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주님의 전도하심이 바로 우리 속에 있기 때문에, 그렇게 주님의 손에 의해서 마구 이끌려가면서, "저는 이렇게 주님에게 마구 끌려가고 있습니다" 라는 것을 전하게 되면, 주님께서는 그것을 전도라고 보신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전도를 할 수밖에 없는 입장에 놓이게 된다는 것이다. 자기가 전도를 하는 차원이 아니고 말이다.

전도는 바로 그것인데, 즉 "제가 한 것이 아니고, 주님이 하셨습니다" 라는 것 말이다. 그것은 결단코 우리가 겸손해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나는 현상이 그렇다는 말이다. 바로 이러한 것이 모두 '무'에서 '유'가 되는 과정이라는 말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그것이 바로 주님이 하시는 전도라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에게 끌려가는 입장이고 말이다. 제가 방금 말한 이 모든 것이 교재 263페이지 이하에서는 에스겔 성전을 중심으로 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것이 어떻게 짜여져 있는지 한번 살펴보자는 말이다.

일단 교재 263페이지를 보자.

** 따라서 새 성전을 중심으로 해서, 사방에는 다윗언약으로 창조되고 되살아난 새로운 이스라엘만 자리를 잡는다. 이들은 모두 언약에 의해서만 영생이 가능한 지파들이다.

이것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요? 오로지 닫혀있는 언약 안에서만 구원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외부에서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전혀 아니라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따라서 왕의 땅 분배 과정에서 이러한 언약적 속성을 필히 드러내게 된다. 예를 들면, 성전을 중심으로 하여 여종 소생의 지파들은 북쪽과 남쪽 끝에 땅을 분배받게 되는데 이는 성전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이다(단, 아셀, 납달리, 갓). 거기에 비해 정실 부족들은 남쪽과 북쪽에 각각 넷씩 성전 가까이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구조를 통해, 새 성전이 장차 드러내 보여줄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그 인물은 오직 하늘의 아들에만 지칭함을 지향케 한다.

이것을 이해하려고 하면, 제가 여러 번 이야기를 하지만, 갈라디아서 4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아내인 사라와 하갈의 관계를 잘 살펴보면 되는데, 물론 좀 복잡하지만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뿐만 아니라, 여호와께서 함께 하신 성읍에는 사방으로 총 12개의 문이 있는데 그 문마다 지파의 이름이 붙는다. 그런데 그 이름이 붙여진 구조를 사방으로 살펴보면 되면, '라헬측과 레아측'이라는 큰 구조의 틀 아래서 세부적으로 각각 '여주인과 종'이라는 구조로 짜여져 있다.

** 즉 북쪽과 남쪽은 모두 레아 소생의 지파들만 구성되어 있는데, 북쪽은 정실 소생으로 짜여져 있고, 남쪽은 여종 소생이 주종을 이룬다. 반면에 동쪽과 서쪽은 라헬측이 대부분 차지하는데, 동쪽은 모두 라헬이라는 본 부인 소생이 주종을 이루며, 서쪽은 여종의 소생과 그리고 레아의 여종인 실바 소생의 지파 이름이 붙여져 있다(에스겔 48:30-34).

(겔 48:30) 그 성읍의 출입구는 이러하니라 북편의 광이 사천 오백척이라
(겔 48:31) 그 성읍의 문들은 이스라엘 지파들의 이름을 따를 것인데 북으로 문이 셋이라 하나는 르우벤 문이요 하나는 유다 문이요 하나는 레위 문이며
(겔 48:32) 동편의 광이 사천 오백척이니 또한 문이 셋이라 하나는 요셉 문이요 하나는 베냐민 문이요 하나는 단 문이며
(겔 48:33) 남편의 광이 사천 오백척이니 도한 문이 셋이라 하나는 시므온 문이요 하나는 잇사갈 문이요 하나는 스불론 문이며
(겔 48:34) 서편도 사천 오백척이니 또한 문이 셋이라 하나는 갓 문이요 하나는 아셀 문이요 하나는 납달리 문이며
(겔 48:35) 그 사면의 도합이 일만 팔천척이라 그 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삼마라 하리라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그리고 문 방향을 소개하면서도 일상적인 동쪽 문부터 소개하는 것이 아니다. 민수기 2장에서는 '동→남→서→북'의 형태가 되는데, 이러한 방향 순서는 바로 정실 측(북과 동)부터 먼저 거론하고, 그 다음에 여종 측(남과 서)을 제시함으로서, 여전히 '정실과 여종'의 대립 구조를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형태는, 에스겔 37장 15절에서 22절에 나와 있는 새 다윗 왕 중심의 국가라는 취지에 부합되는 언약이 주어진 결과이다.

(겔 37:15)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겔 37:16) 인자야 너는 막대기 하나를 취하여 그 위에 유다와 그 짝 이스라엘 자손이라 쓰고 또 다른 막대기 하나를 취하여 그 위에 에브라임의 막대기 곧 요셉과 그 짝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쓰고
(겔 37:17) 그 막대기들을 서로 연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라 네 손에서 둘이 하나가 되리라
(겔 37:18) 네 민족이 네게 말하여 이르기를 이것이 무슨 뜻인지 우리에게 고하지 아니하겠느냐 하거든
(겔 37:19) 너는 곧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에브라임의 손에 있는바 요셉과 그 짝 이스라엘 지파들의 막대기를 취하여 유다의 막대기에 붙여서 한 막대기가 되게 한즉 내 손에서 하나가 되리라 하셨다 하고
(겔 37:20) 너는 그 글 쓴 막대기들을 무리의 목전에서 손에 잡고
(겔 37:21)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그 간바 열국에서 취하며 그 사면에서 모아서 그 고토로 돌아가게 하고
(겔 37:22) 그 땅 이스라엘 모든 산에서 그들로 한 나라를 이루어서 한 임금이 모두 다스리게 하리니 그들이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아니하며 두 나라로 나누이지 아니할지라

◈ 어휴, 복잡해 !!

지금 이 내용이 무슨 뜻이지 이해가 됩니까? 물론 조금 복잡해 보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어려운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지파의 구분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오로지 자기가 원하는 자만을 건지겠다는 것인데, 그러니 하나님이 원하지 않은 자들은 그냥 방치함으로 지옥으로 보내버린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이스라엘' 이라는 나라의 구조자체도 역시 그러한데, 남쪽은 유다지파이고, 그 나머지 지파들은 북쪽이라는 말이다. 물론 베냐민 지파는 유다지파에 따라가고 말이다. 아무튼 이러한 차별성과 또한 선택성은 왜 그러한가? 즉 왜 유다지파인고 하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유다지파를 선택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 '차별'하고 '선택'하는 근거는?

그렇다면 여기서 "목사님, 하나님께서 그렇게 차별하고 또한 선택하시는 근거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라고 물으신다면, 이것이 오늘 강의에서 제일 어려운 부분인데 말이다. 바로 야곱의 12아들들인 이스라엘의 12지파 가운데서, 그 중에서도 바로 유다지파에게서 메시야가 나오는데, 왜 하필이면 유다지파냐는 것이다.

◈ 왜 유다지파인가?

그것은 바로 멜기세덱의 위치상으로 알아볼 수 있는데, 이 멜기세덱은 분명히 존재는 하지만 그러나 손에 잡히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그야말로 추적이 불가능한 완전범죄인데, 흔적은 있지만 그 흔적을 가지고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제 아무리 'CSI(?)'가 오더라도 말이다. 그분은 이름도 없고, 족보도 없는데, 그러니 결국 이 멜기세덱의 등장은 어려운 말로 '무(無)'의 등장인데, 즉 없음의 등장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없음'이 등장했으면 그것이 '있음'이 아닌가? 하지만 그것은 '있음'이 아니라, '없음' 이라는 것이다. 문자적인 입장에서 보면 말이다. 그래서 지금 제가 하는 이야기가 굉장히 어려운데, 분명히 있는데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없다'는 라 말은, 인간의 손에 잡히지 않고 전혀 관리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치 유령처럼 말이다.

◈ 분명히 계시는데, 사람의 손에 잡히지 않아 !!

성경에서는 이것을 '바람' 이라고 표현하는데, 그래서 성령이 바람같이 분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분명히 계시는데 사람의 손에 관리가 되지 않고 조정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우리 인간들 마음대로 붙잡아서 처리를 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이것을 두고 불트만은 '불처분자(?)' 라고 아주 어려운 용어를 사용했는데, 즉 우리 인간이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대상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성경 내용이 목회자에게는 얼마나 답답한지 모르는데, 왜냐하면 목회는 있음에서 출발하기에 말이다. 즉 목회자가 사람을 끌어 모으면 그것을 흔히들 교회라고 하는데, 이렇게 교회라고 하는 '유'에서, 즉 목회자 자신의 '유'에서 교회라는 '유'로 가는데, 물론 그러한 교회를 더욱 더 키워도 역시 '유'이고 말이다.

그러므로 진짜 하나님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는 '무'인데, 그런데 이런 무의 교회에서 아까 말한 여기의 유의 교회로 전환을 시켜야, 이렇게 모여있는 인간들이 구원이 되는데, 그러나 그렇게 전환시킬 방도가 없다는 것이다. 목회자의 '있음'에서는 말이다.

◈ 목회자가 사기꾼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목회자가 사기꾼이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데, 즉 "여러분, 40일 새벽기도를 하시면 여러분의 소원이 이루어집니다" 라고 하면,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목회자의 동업자가 되어서 도와주니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목회자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교인들은 뭐라고 하는가? "목사님은 주의 종이니 하나님의 뜻을 알지요?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할까요?" 라고 하는데 말이다. 그렇게 하니 할 수 없이 "이렇게 이렇게 하세요" 라고 했는데, 그런데 그렇게 해도 안 될 때는 목회자가 참으로 난처하다는 것이다. 정말 주의 종이라면 하면 되어야만 하지 않느냐는 말이다.

그래서 예레미야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데, 즉 "내가 너희들에게 가르치지 않은 이야기를 너희들이 했고, 내가 시키지 않는 일을 너희들이 했다. 그러면서 너희들은 평안을 이야기했는데, 하지만 내 언약대로 하지 않는 너희들을 처벌하리라" 라고 말이다. 무슨 의미인가? 하나님은 언약대로 하지 않으면 반드시 처벌을 하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목사님, 그 당시의 선지자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은 없는데, 단지 언약대로 하지 않으면 처벌을 받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당시 선지자들은 언약대로 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언약대로 하시는 분이 장차 오시게 되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말이다.

◈ 주님은 우리를 왜 책망하시는가?

그러니 하나님에게 책망을 받았다고 해서 그것을 우리가 고쳐서 제대로 할 수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오산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책망하는 차원은 그것을 우리보고 고쳐서 바로 하라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이 왜 예수님의 하심을 모르는가?" 라는 차원이라는 말이다.

교회에 교인이 10명 정도가 되는데, 그런데 목회를 하다보니 그 10명도 붙잡아두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래서 너무 안타까워서 기도를 했는데, 즉 "하나님이여, 어떻게 하면 10명을 계속해서 붙잡아둘 수 있습니까?" 라고 말이다. 그러자 응답이 오기를 "니 힘으로는 안 된다" 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주님의 힘으로만 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 말귀를 잘 알아들어서, 즉 지금까지 10명이라도 데리고 있은 것은 자기 능력이 아니라, 주님이 보내어서 그렇게 되었다고 말이다. 그런데 그 사람은 그렇게 이해를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동안 열심히 했는데도 10명밖에 모이지 않는데, 그러면 나머지는 다 하나님께 맡기자"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10명 정도는 자기가 알아서 할 수 있다고 말이다.

◈ 아니, 5명이나 남았네요 !!

그런데 나중에 교인에 그만 5명이 되고 나니, 그 사람이 하나님께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하나님, 왜 5명이나 줄었습니까?"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하시는가? "왜 5명이나 남았는지 물어보지를 않는가?"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 사람은 처음부터 목회를 자기의 있음에서 있음으로 나아갔기 때문에, 이런 교회는 교회가 아닐 뿐만 아니라, 목사도 역시 사기꾼이라는 말이다. 그것은 그런 교회는 없어진다는 말이 아니라, 교회가 있으면 그것은 '무'에서 나온 '무'인데, 그런데 목사는 자꾸만 '유'에서 나온 교회라고 오해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교인들도 역시 그렇게 오해를 하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목사는 자기가 설교를 잘해서 온다고 하고, 교인들은 처음에는 은혜로 왔다고 여기다가, 하도 목사가 그런 이야기를 하니, 목사의 말을 듣고는 그렇게 넘어간다는 말이다. 그러니 교회를 교회라고 할 때는 이미 교회가 아니라는 것이다.

◈ '내' 교회는 없어 !!

에스겔의 경우에 과연 몇 명을 앉혀놓고 설교를 했겠는가? 사실 선지자의 경우에는 몇 명이라는 것이 없는데, 사도바울에 한번 그런 이야기를 해보라는 것이다. 귀싸대기를 얻어맞지 말이다. 사도바울이 그렇게 열심히 주의 일을 해도, 그에게는 교인이 몇 명이냐는 것은 안중에도 없는데, 그냥 복음만을 전하면 되지 말이다. 교회도 주님의 교회이지 '내 교회' 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모든 교회는 주도 하나이듯이 하나일 뿐인데, 그러니 어떻게 "과연 몇 명인가?" 라는 것이 있을 수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자꾸만 사람들이 마귀에게 속아서 떠나니, "이것도 떠나고, 저것도 떠나고, 에이 다 떠나라(?)" 라고 하는데, 마치 예수님이 하듯이 말이다.

교재 264페이지를 계속해서 살펴보자.

** 옛 왕들의 잘못을 새로운 다윗 왕이 보상하시면서 나라는 다시 새 왕을 중심으로 한 나라가 되고, 거기에 복속된 지파들은 그들의 위상을 통해서 새 왕의 언약적 위상을 증거하는 위치에 놓이게 된다. '동산 한 가운데' 있었던 그 생명나무는, 이제 새 언약의 세계에서는 하나님이 거주하시는 성전으로 구체화되었다.

◈ 주님은 자기 약속에 머뭇거린 적도 없어 !!

이것을 보니, 시편의 한 성경구절이 생각나는데, 한 시내가 나누어져서 생명의 물을 준다고 말이다. 그러므로 단 한 순간이라도 하나님은 자기의 생명나무를 흐지부지하게 여긴 적이 없는데, 물론 포기한 적도 전혀 없고 말이다.

아무튼 하나님은 지독한 분인데, 즉 처음부터 자기가 계획한 것을 사람들에게 양보한 적도 없고, 또한 조금도 머뭇거린 적도 없다는 것이다. 초지일관 그대로 밀어 부쳐서 그대로 성공을 하는데, 괜히 우리 자신이 믿음이 없어서 고민하고 머뭇거리고 하는 것이지, 주님은 결코 그런 적이 없다는 말이다.

목사가 되어서 노회에 짤렸다면 그것이 걱정거리가 되는가? 전혀 될 수 없는데, 그런데 그런 걱정을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은연중에 '유'에서 '유'로 가는 교회를 만들려고 하는 사고방식이 자기 자신에게 들어있음을, 주님이 그렇게 전도를 해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다는 것이다. 거기에 동원된 전도의 훌륭한 도구가 노회장이고 노회의 목사들인데, 그러니 반드시 그런 사람들도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이스라엘 왕은 모든 백성들을 대변하는 제사장 입장에서 하나님의 왕되심과 언약의 영원성을 보장받는다. 가나안 이스라엘 영토에 한 가운데 있는 성읍의 이름이 무엇인가? '여호와 삼마', 즉 '여호와께서 거기 계시다'라는 이름의 성읍이다.

(겔 48:35) 그 사면의 도합이 일만 팔천척이라 그 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 삼마라 하리라

◈ 여호와 삼마 - 여호와께서 거기 계시다 !!

이제 이것이 에스겔 성전의 마지막 부분인데, '여호와 삼마' 라고, 그 의미는 바로 "여호와께서 거기 계시다" 라는 것이다. 포항 쪽에서는 이 꽁치를 '삼마' 라고 하는데, 구룡포 과메기를 만드는 고기를 그들은 삼마라고 한다는 것이다(ㅋㅋ).

그러니 여호와 하나님이 계실 만한 성전을 인간이 만든다는 말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친히 만든다는 말인가? 하나님께서 이렇게 손수 만드시는데, 왜 우리가 쓸데없이 걱정을 하고 난리를 피우느냐는 것이다. 하나님이 거기에 계시는 것이 인간의 이름이 아니라 주의 이름으로 계시는데,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들은 주의 이름을 모르는데, 왜 그런가? 교회에 오더라도 자기 이름을 버리지 않고 고수하면서 그대로 오니 말이다. 자기의 있음을, 자기의 존재가치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이더라도 인간 이름들의 모임이지 주의 이름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교회에 문제가 생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마 18:19)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마 18: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 무지개 교회 이야기 !!

어떤 개척교회 목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 자기가 있는 교회에 교인이 10여명 정도 되는데, 한국교회의 기독교 역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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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