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상 20: 1- 6 (사람의 마음)
삼상 20: 1- 6 (사람의 마음)
이름 : 우리교회(IP:220.81.176.169)
본문 : 사무엘상 20장 1- 6절
제목 : 사람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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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09-05-31 15:06
사람의 마음
2009년 5월 31일 본문 말씀: 사무엘상 20:1-6
(삼상 20:1, 개정) 『다윗이 라마 나욧에서 도망하여 요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무엇을 하였으며 내 죄악이 무엇이며 네 아버지 앞에서 내 죄가 무엇이기에 그가 내 생명을 찾느냐』
(삼상 20:2, 개정) 『요나단이 그에게 이르되 결단코 아니라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 내 아버지께서 크고 작은 일을 내게 알리지 아니하고는 행하지 아니하나니 내 아버지께서 어찌하여 이 일은 내게 숨기리요 그렇지 아니하니라』
(삼상 20:3, 개정) 『다윗이 또 맹세하여 이르되 내가 네게 은혜 받은 줄을 네 아버지께서 밝히 알고 스스로 이르기를 요나단이 슬퍼할까 두려운즉 그에게 이것을 알리지 아니하리라 함이니라 그러나 진실로 여호와의 살아 계심과 네 생명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와 죽음의 사이는 한 걸음 뿐이니라』
(삼상 20:4, 개정)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 마음의 소원이 무엇이든지 내가 너를 위하여 그것을 이루리라』
(삼상 20:5, 개정) 『다윗이 요나단에게 이르되 내일은 초하루인즉 내가 마땅히 왕을 모시고 앉아 식사를 하여야 할 것이나 나를 보내어 셋째 날 저녁까지 들에 숨게 하고』
(삼상 20:6, 개정) 『네 아버지께서 만일 나에 대하여 자세히 묻거든 그 때에 너는 말하기를 다윗이 자기 성읍 베들레헴으로 급히 가기를 내게 허락하라 간청하였사오니 이는 온 가족을 위하여 거기서 매년제를 드릴 때가 됨이니이다 하라』
세상을 무시하며 사는 것은 두 가지 경우에 해당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세상을 초월하며 사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오로지 자기 사정만 생각하고 남의 사정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사는 겁니다. 인간은 철저하게 개별자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타인을 이해한다고 노력해도 자신이 처해 있는 공간의 제약과 시간적인 짧음 때문에 상대방의 심정을 제대로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사람에게 기대하지 마세요. 아무리 이해해도 사람은 타인을 본인만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요나단을 우리와 마찬가지로 두 가지 한계를 보여줍니다. 하나는, 자기 집안 사람에 대해 사고 도는 한계와 또 다른 한계는 타인을 제대로 이해 못하는 겁니다. 아무리 타인을 사랑해주어도 그 타인은 자기 밖에 모릅니다. 괜히 내가 제공한 사랑을 알아주기를 원하지 마세요. 실망만 깊어질 뿐입니다.
다윗은 요나단을 만나면서 하는 말이, 요나단의 아버지 때문에 자신이 괴롭다고 알려줍니다. 즉 피해자가 발생한 겁니다. 이 피해자의 등장은 요나단으로 하여금 자신의 집단이 가해자로 살아가고 있음을 아는 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는 다윗이 자기 집안 사람으로 인하여 쫓기고 다니는 것을 미처 몰랐습니다. 그럴 리가 없다고 말합니다. 즉 요나단은 한 집안 사람이라도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서 잘 몰랐던 것입니다.
이 때부터 요나단은 같은 집안 식구의 입장에서 아버지를 다시 알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에게 피해를 입고 있다는 피해자의 입장에서 아버지를 살피는데 집중합니다. 팔은 안으로만 굽고 밖으로는 감싸듯이 작용하지 못하는 법입니다. 마찬가지로 같은 편이라는 이유 때문에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것에 대해서 무관심하게 여길 공산이 큰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과연 아들인 요나단이 아버지를 대변할 위치에 있느냐 하는 겁니다. 즉 같은 가족이니까 어디까지나 생각이나 바라보는 것이 같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밥먹고 사는 점에 대해서는 한 편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땅에서 정착생활을 하게 되는데는 농사나 목축을 할 시기로부터 시작됩니다.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게 됩니다. 한 사람이 많은 가축을 다 관리할 수는 없고, 넓은 영토를 다 옥토로 바꿀 수는 없습니다. 생존에 관한 문제에 있어 가족이란 같은 운명으로 묶이게 됩니다. 함께 일하고, 함께 생활하지 아니하면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공동의 생각으로 일을 해야 일에 능률이 오르게 됩니다.
옛날부터 부락이나 부족마다 공동의 신을 섬겼는데 주로 ‘조상신’을 많이 섬겼습니다. 같은 조상의 핏줄을 이어받아 태어났다는 그 의식이 그 부락이나 그 가족의 정신을 하나로 만들 수 있다고 여긴 것입니다. 즉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자라는 의식이 자연과 다른 부족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결집은 흔히 쉽게 늘 같은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여겨질 공산이 큽니다. 즉 아버지의 생각을 자식이 그대로 받아줄 것이라고 여기게 될 것이요, 아버지는 자신을 영원히 지켜주리라 여겨질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가족 내부의 결집은 외부에서 찾아드는 사건으로 인하여 쉽게 균열을 보이게 됩니다.
아버지란 존재는 농경시대 때는 신과 같은 존재입니다. 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한다든지,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즉 믿은 가정에서도 마찬가지 구조를 보이게 됩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십계명의 말씀도 아버지가 경험한 계기 사건을 전달받아 자식들도 하나님의 언약에 참여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됩니다. 즉 조상에게 찾아온 그 하나님의 경험이 자신들을 지켜주기를 바라는 겁니다. 신약 성경에 오면 ‘예수님의 아버지’로서 하나님이 등장합니다. 이렇게 되면, 새로운 가족 구성을 위해 기존의 가족 구성은 예수님에게 양보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10:36-37에 보면,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고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피해자의 입장에서 이 요나단 가정에 찾아듭니다. 이렇게 해서 요나단과 가해자 가정의 일원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 본문 같은 경우에는, 요나단이 다윗이라는 외부인을 만나고 난 뒤 스스로 자기 가족의 대표자 입장이 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외부인에게 피해를 입한 가해자가 자기네 식구 중의 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즉 악한 인물이 자신의 가족으로서 들어앉아 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그 가족으로 인해 계속해서 피해를 받게 된다면 같은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요나단 자신도 비난 받을 처지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안 말리고 뭐했느냐라고 추궁 받을 소지가 있습니다. 곧 요나단 자신의 문제로 넘어온 것입니다. 따라서 참으로 요나단이 자기 가족을 악에서 건지려면 피해 입은 다윗의 편에 서서 그 피해자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하는 겁니다. 바로 이 정신은 예수님의 정신입니다. 예수님과 성도는 한 가족으로 묶어져 있습니다. 같은 운명체입니다.
이는 곧 기존의 육적인 가족만을 우선시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진정 감사와 영광과 찬양을 드릴 분이 육적인 가족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뿐이며 그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육적인 결속력 때문에 피해자의 신분으로 우리 앞에 등장하고 있음을 우리가 인정해야 합니다. 요나단은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 자기가 만나고 있는 다윗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자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요나단 본인이 진정 하나님 반대편에 서고 싶지 않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함께 일하게 하시는 다윗 편에 설 수 밖에 없습니다. 다른 방식으로 살다가는 하나님의 영광을 공격하는 자와 한 통속이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다윗이 제안을 그대로 받아서 그대로 실행에 옮깁니다.
요나단은 다윗과 영원히 같은 운명이기를 원합니다. 이는 곧 자기 가족을 배신할 경우가 온다할지라도 다윗을 버리고 싶은 마음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도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이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유일하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는 그 예수님과 한 몸이 되어 같이 하나님의 영광에 동참하고자 하는 심정으로 사는 것이 신앙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인생 전부를 떠맡길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뿐임을 우리가 인정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우리교회
09-10-20 13:19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사무엘상-2008/045강-삼상20장1-6(사람의마음)-1sa090531.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