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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광주 5월 29일 강의 디모데후서 2장 25절강의디모데후서

광주 5월 29일 강의 디모데후서 2장 25절

이름 : 관리자(IP:125.190.2.45)

090529 완료된 채로 내려오는 천국의 구조

관리자(IP:125.♡.2.45)

09-05-30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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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IP:220.♡.176.169)

09-06-14 20:38

광주090529a디모데후서2장25절a

광주 강의(09. 5. 29) 49-1

디모데후서 2장 25절부터 읽겠습니다.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저희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바 되어 그 뜻을 좇게 하실까 함이라”

여기에서 ‘진리’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말 뒤에 반드시 나와야 할 말이 뭐냐 하면, ‘마귀’ 그리고 ‘하나님’입니다. 마귀의 존재를 염두에 두지 아니하면 제대로 진리가 규명될 수 없습니다. “마귀의 올무에 매여 있다는 말을 나는 처음 듣는데” 이렇게 나오면, 그 사람한테는 진리를 설명하기 곤란합니다.

땅 위에 있는 줄기를 잡아당기면 땅 속에 있는 뿌리의 깊숙한 것이 딸려 나오듯이, 진리를 잡아당기면 반드시 하나님과 마귀가 같이 나오는데, 이렇게 되어야 진리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단 말입니다.

‘3+5=8’ 이것이 진리입니까, 아닙니까? 이건 진리가 아니죠. 왜냐하면, 3+5는 무엇을 고려할 필요 없어요? 마귀나 하나님을 고려할 필요 없이 셋에서 다섯을 더하면 여덟이 됩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진리가 아닌 거예요.

성경에서 ‘진리’라고 할 때는 반드시 구원을 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진리는 아는데 구원은 안 되더라.’ 이건 곤란합니다. “나는 교장 선생님을 잘 알아.” “그러면 너 구원 받을 수 있어?” 교장 선생님을 잘 아는 것과 구원이 관련이 있습니까? 없지요. 교장 선생님이 같은 동네에 살아서 만나면 인사를 나누는 것과, 내가 죽어서 구원 받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관계없잖아요. 이럴 경우 교장 선생님을 안다는 것이 진리가 됩니까? 안 됩니다.

그런데 “나는 진리에 대해서 알아. 진리를 만났거든.” 그러면 그 뒤에 “구원 받았어?” “응 구원 받았어.” 이렇게 연결이 되어야 됩니다.

제가 최근에 여름수련회 교안을 다 작성했어요. 수련회 공고가 되면 즉시 교안을 올리려고 합니다. 그 교안에도 그런 뉘앙스가 있지만, 제가 쓴 다른 글에 이런 것이 있어요. “그리스도를 가르치는 것과 그리스도를 토해 내는 것은 다르다.” 이게 아직 미공개 된 글인데 [철학과 신학의 허상]이라는 제목을 달고 책이 발행 될 계획인데, 최일규 집사님이 이것을 발간합니다. 700페이지 이상 됩니다. 이번 주에 인쇄에 들어가려고 했는데 너무 책이 연이어 나오면 체한다고 강 장로님이 말려고 지금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해서 가르치려면 신학교 졸업하면 가능합니다. 그곳에서 배운 지식을 사람들에게 가르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토해 내는 것은 신학을 배웠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진리를 만나야 돼요. 진리를 만나게 되면 진리가 우리를 구원 시켰기 때문에 더 이상 무서울 것이 없지요. 진리를 알았기 때문에 겁나는 것이 없고, 죽는다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고, 진리 때문에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바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었을 때 진리를 안다고 할 수 있어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라고 주님이 말씀하셨는데, 우리가 그 말을 되풀이 하면서 사람들에게 가르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가르치다가 학교에서 문제를 제기해서 사표를 내라고 한다면 어떻게 됩니까? 가르치는 것은 가르치는 것이고 사표 내라고 하는 것은 겁이 나지요? 이것은 진리를 토해 내는 것은 아닙니다.

목사가 신학교를 나와서 진리를 가르칠 수는 있어요. 아모스가 무슨 말을 했고, 오바댜가 어떤 말을 했고 등을 가르칠 수 있지만, 그것 가르친 후에 “이제 그만 두세요.” 이렇게 하면, “어휴 겁나.”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은 자기가 가르쳤던 진리와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제가 묻습니다. “영어가 진리입니까?” 아니죠. 왜냐? 영어 가르치면서도 ‘영어 가르치는 것을 그만두면 나는 뭘 먹고 살지?’ 이것이 겁 날 것 같으면 영어는 절대로 진리가 아니죠. 그냥 영어를 가르치는 기능인이죠. 판사가 판결을 내립니다. 기능인이죠. 정형외과 의사가 수술을 한다. 기능인입니다. 이것은 진리가 아니에요.

이런 사람들은 기능을 발휘할 뿐이기 때문에 기능을 그만두라고 할 필요는 없어도, ‘당신도 진리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해야 되지요. 용접하는 사람에게 “진리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구원 받습니다.”라고 하면 용접하는 사람은 이 말이 납득이 되는데, 판사나 철학자에게 “당신은 진리를 알아야 합니다.” 라고 하면 그들은 “나도 기독교에 대해서 압니다.” 이렇게 나와요. 이 사람은 지금 무슨 소리인지 못 알아들어요. 진리가 무엇인지.

진리란 무엇인가? “당신은 마귀의 올무에 빠졌는데 진리로 말미암아 당신은 하나님께 사로잡혀야 합니다.” 이것입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한 마디로 하면, ‘진리는 우리로 하여금 창세기 1장으로 되돌아가게 한다.’ 창세기 1장으로 돌아가면 거기에 누가 기다리고 있습니까? 뱀이 기다리죠. 거기에 아담에게 찾아왔던 분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죠.

우리가 창세기 3장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마귀도 없고 하나님도 없고 자기만 자꾸 생각하고 나밖에 없는 것으로 여기지만, 진리는 우리로 하여금 창세기 1장으로 돌아가서 우리가 잊고 있었던 악마의 존재와 기능, 하나님의 존재와 기능에 대해서 다시금 기억나게 하는 겁니다.

지금까지는 서론 격으로 했고, 이제 본격적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오늘 20절에서 26절까지의 내용은 ‘합당한 그릇이 되어야 된다.’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이런 말씀이 나오는데, 혹시 네가 잘 가르치고 바르게 살면 이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한 마디로 해서 개인적인 문제지요. 그런데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것은 진리문제입니다. 이 진리가 개인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이것이 참 난해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연결 고리를 몰라요. 겨우 한다는 주장이 ‘예수님은 착하고 훌륭한데 나는 죄인이잖아.’ 이런 핑계를 대고 예수님 따로 나 따로 그렇게 살아요. 왜 이렇게 됩니까? 연결 고리를 모르기 때문에 그래요.

“나 예수 믿습니다. 하지만 내 일상생활을 내가 알아서 합니다.” 판사의 경우는 판결을 내리고, 의사는 진료를 하고, 주방장은 고기를 굽고. 이것은 내 개인적인 문제입니다. 고기 굽는 것은 진리가 아니잖아요. 고기 굽는다고 구원 받는 것은 아니니까요. 구원이 되어야 진리지 내가 하는 일은 단순한 기능입니다.

영어를 가르치는 것은 기능이지 진리가 아니지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진리 따로 기능 따로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훌륭하고 좋은 분인 것은 좋은데 나는 지금 학원에서 애들한테 영어를 가르치기 때문에 이것은 내 문제입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오늘 분문 말씀처럼 ‘진리가 이렇기 때문에 너는 바르게 살아야 된다.’ 하는 연결 고리가 없다니까요. 이게 얼마나 어려운 문제입니까? ‘예수님 훌륭한 것은 알지요. 하지만 지금 나는 바쁘거든요.’ 충분히 이렇게 나올 수 있단 말이지요. ‘예수 믿어야 구원 받는 것도 인정하지만 지금 저녁시간이 다 되어서 식사 준비하는 것은 내가 해야 되지 않습니까?’ 라고 나온단 말이지요.

제가 “우리는 죄인입니다.” 라고 하니까, 어떤 사람은 벌꺽 화를 내요. “나는 주방장인데 예수 믿으려고 주방장 사표 낼까요?” 이렇게 나와요. 연결 고리를 못 찾습니다. 이제부터 이 연결 고리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것이 안 되면 본문 해석을 할 수 없어요.

신학자들이 이 연결 고리를 못 찾았어요. 그래서 그들은 윤리와 철학으로 들어와요. “예수님을 본 받아서 바르게 살자.” 이것으로 끝납니다. 예수님 본 받아 바르게 살면, 진리는 없고 죄인만 남아요. ‘예수님 훌륭한 것은 인정하지만 우리도 훌륭해야 된다.’ 이렇게 돼요. 이것은 믿는 것이 아닙니다. 아예 믿음은 없고 자기 행함만 있는 거죠. 그래서 이 진리와 개인은 어떻게 연결 되는가 하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제가 크게 쓰겠습니다. ‘창조 때로 돌아가야 한다.’ 창조 때로 돌아가면 개인이 없어요. 우리는 지금 개인(나)이 있으니까 나를 염두에 두고 거기에 예수님도 연관 시키고, 하나님도 연관 시키고, 잘 믿어 보려고 하고, 성경공부도 하는데, 창조 때로 돌아가면 누가 있어요? 하나님만 있고 우리는 없어요. 하나님이 만들어줘야 있는 것이지 나를 만들어 달라고 요구하면 안 돼요.

인 간: “신이시여!”
하나님: “왜?”
인 간: “나를 만들어 주세요.”

이것이 창조 때 성립이 안 됩니다. 그렇지요? 제 말 맞지요? 그런데 왜 오늘날 교인들은 “신이시여! 복 주소서.”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합니까? 창조 때로 돌아가지 않으니까, 내가 신에게 무엇을 달라고 요청할 권리가 없다는 것을 감히 상상도 못합니다.

주기도문 앞부분에 어떤 내용이 있지요? 기도 할 때 무엇 무엇을 달라고 하지 말라고 했지요. 로마서 11장에 보면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창조가 뭡니까? 창조물이 뭘 빌어서 창조 된 것이 아니잖아요. 창조는 창조주만 있으면 그 다음에 ‘있음’이 되잖아요.

대전에 성경공부를 갔는데, 공부에 참석한 집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해요. 딸(중학생)에게 어머니가 성경공부에 같이 가자고 하니까 그 애는 성경공부 참석 못 하겠대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자기는 이미 정리된 것이 있는데 ‘신은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엄마가 답변을 할 수 없었답니다.

제가 넌지시 답변을 했습니다. 신은 ‘있다. 없다.’에 저촉을 안 받습니다. 이런 범주에 해당이 안 됩니다. ‘있다. 없다.’는 인간들의 눈에 띌 때 인간들이 판단하는 겁니다. 인간을 만드신 분한테는 ‘없다. 있다.’가 해당이 안 되는 이유가, 인간 자체가 하나님의 없음과 있음에 포함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말을 해놓고도 참 어렵네요. 미안합니다.

두 아이가 있습니다. 동생이 하는 말이 “나는 왜 언니보다 먼저 안 태어났는데?” 라고 묻는다면, 엄마는 굉장히 난처합니다. 그 때는 이렇게 말하면 됩니다. “네가 태어날 상황에서는 언니가 ‘있다. 없다.’에 해당이 안 된다.” “언니가 있네.” 라는 말을 하려면 언니보다 늦게 태어나고 보니 언니가 있다는 말을 할 수 있단 말이지요.

그러니까 그 중학생이 ‘신은 없다.’고 이야기하는 자체가 이미 그 말을 하게 하신 하나님이 계시는 거예요. 애는 자기 딴에는 깊이 생각을 했는데, 더 깊이 생각을 해야 돼요.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었다고 하니까 ‘그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나?’ 라고 물을 때, ‘바로 그렇게 이야기한 너를 그런 이야기를 하라고 만들었다.’ 이렇게 답변해야 돼요.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창조 자체를 몰라요. 녹매교회에 다니는 다섯 살 어린 아이가 죽었어요. 노무현 전대통령 장례식 하는 날 같이 장례식 했어요. 한쪽은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오고, 한쪽은 조용했어요. 둘 다 창조인데. 우리가 ‘나는 신앙이 있다.’고 할 때 이게 오류고 거짓말일 수가 있어요. 이게 창조의 관점에서 신앙이 있다고 하면 이것은 옳은 신앙인데, 창조를 생각하지 않고 신앙을 가지면 신앙이 내 소유가 됩니다. 이럴 경우 자기 소유인 신앙을 빼앗아버리면 화를 내요.

지금 마귀의 올무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마귀는 창세기 3장 이후에 나옵니다. “너는 이미 신이다. 그러니 신을 따로 믿을 필요 없고 네가 신이야. 창조에 대해서 네가 이야기하고 ‘있다. 없다.’를 네가 판단해. ‘있다. 없다.’를 네가 있기 전으로 왜 자꾸 거슬러 올라가. 그러지 말고 네가 있잖아. 있는 네가 봐서 없으면 없는 것이고, 있으면 있는 거야. 하나님이 안 보이면 없는 것이고 보이면 있는 거야. 네가 판단해.” 이것이 마귀의 올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사로잡힌 자는 어떠냐 하면, 우리로 하여금 내가 없던 시절로 돌아가요. 이건 너무 중요합니다. 진리란 내가 없던 시절로 돌아갑니다. 그렇게 되면 지금 내가 판단하는 것. ‘천국이 있네, 없네. 하나님이 있다, 없다.’ 이런 모든 것이 내가 없던 시절이기 때문에 이런 판단도 없던 시절입니다. 이게 신앙입니다.

신앙은 선물입니다. 내가 만든 신앙은 내가 있던 시절을 기초로 해서 만든 것이기 때문에 뭔가 사건이 일어나면, 우리 아이가 죽는다든지 우리 교회에 분란이 생기면 그만 악마적인 본성이 나와서 화를 냅니다. “하나님 당신이 뭔데 내 것을 빼앗아 가.”

욥기 1장에 보면, 하루아침에 자식 10명이 다 죽었잖아요. 이 충격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아브라함이 자식을 번제로 드렸다. 성경에 나오니까 그런가보다 하지만 엄청난 충격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충격은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인 사건입니다. 그것도 의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죄인을 위해서.

사람이 충격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내가 없던 시절로 못 돌아가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없던 시절로 안 돌아가고 있던 시절에서 신앙을 가지면 이 신앙은 누구를 위한 용도인가 하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용도가 아니고 날 천국 보내는 용도입니다. 이것은 신앙이 아니라 종교입니다. 바꿔 말하면 취미고 오락이지요.

오늘 광주로 오면서 차 안에서 TV를 켜 놓았는데, 계속 노무현 장례식을 해서 차 안에서 안 볼 수도 없고 했는데, 장례식도 결국은 오락이에요. 자기 연민. 나를 슬프게 만드는 오락이에요. 노무현은 이미 죽었고, 그 광경을 보면서 슬퍼하는 자기가 좋아. 내가 울면서 내 존재의 의미를 찾는 거예요.

노무현이 죽었다고 우는 것이 아니고 평소 시어머니한테 맺힌 것이 있는데 노무현을 핑계로 울고, 남편한테 맺힌 것이 있었는데 노무현 핑계대고 울고, 노무현 인생이 불쌍해서 우는 것이 아니라 ‘내 인생이 왜 이 모양, 이 꼴인가?’ 생각하면서 우는 거예요. 자기 연민이죠.

이런 것은 자기 ‘있음’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1장에는 우리가 없었어요. 울 인간도 없고, 웃을 인간도 없었어요. 그 때는 주님만 계셨어요. 그래서 주와 주 사이에 의논해서 주어진 신앙이 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비로소 제대로 신앙이라고 할 수 있고, 내가 조작한 신앙이 아니라 선물로 받았고 이 선물로 받은 신앙은 나로 하여금 내가 ‘없음’으로 되돌아가는 능력이 나오지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사로잡인 자입니다. 하나님께 사로잡힌 다는 것은 ‘나는 없다.’가 됩니다.

“네가 없는데 왜 네가 있느냐?” 고 묻는다면, 그 때 이렇게 답하면 됩니다. “내가 없을 때 주께서 뜻이 있어서 지금 나를 만들었다.”고. 그러면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릴 수 있는 유일한 바탕인 내가 없었던 창세기 1장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게 보통 어려운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까지의 신앙을 재수정해야 돼요. “나는 예수 믿습니다.” 이거 거짓말입니다. 뭘 하나 빼앗아가 보세요. 자식을 죽이든지 하면 기절합니다.

“신은 없다.”라는 말을 중학교 학생이 했다는 것은, 일단 반가워요. 왜냐? 우리가 평소에 감추고 있던 본성을 철없는 학생의 입을 통해 폭로되었다는 것이 즐거워요. 그런데 왜 신은 없다고 했을까? 있는 게 자기밖에 없으니까, 자기는 보이는데 신은 안 보이니까.

자기 눈에는 신이 안 보이고, 그런데 성경에는 하나님이 있다고 했으니까 둘 중 하나를 버려야 되는데, 자기 자신이 보고 판단하는 것이 옳아야 자신을 계속 유지할 수 있기에 ‘신은 없다.’고 결론을 내리는 겁니다.

창세기 1장처럼 만약 내가 없던 시절이 있다고 한다면, 지금 내가 있다고 여기고 했던 모든 것이 졸지에 비진리가 되고, 비신앙이 되니까, 이것은 성경대로 하면 저주 받고 지옥 갈 대상이 되는 거예요. 그게 싫은 거예요.

천국이 있고 천국에 가면 복 받는다는 이야기보다 더 편하고 좋은 소리는 아예 천국이 없다는 소리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주 골치 아픈 시어머니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시어머니가 내게 한복 한 벌 해 준다고 해요. 그 말보다 더 기쁜 소식은 시어머니 죽었다는 소식입니다. 아예 없는 게 속 편해요. 살아 있어서 한복을 해 주고, 용돈은 주고 하는 것이 다 귀찮아요. 그냥 죽으면 제일 좋아요. 인간은 자기밖에 모릅니다.

그러면 마귀의 올무라는 것은 무엇인지 따져봅시다. 창조 때는 누가 있다? 인간은 없으니까 영적 존재밖에 없지요. 마귀의 존재가 언제 등장합니까? 창세기 3장에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마귀가 먼저 선악과를 알았으니까. 창세기 3장에서 마귀가 등장하고, 마귀는 인간이 알지 못하는 선악과를 알아요.

마귀의 전략은 창세기 1장, 2장으로 돌아가지 말고, 지금 마귀 나를 만났던 그 시점부터 ‘네가 따먹으면 신이 된다.’ 진짜 신은 창세기 1, 2장에 있는데 마귀의 올무는 무엇입니까? 마귀는 우리에게 1, 2장은 무시하고 선악과를 따먹은 3장부터 네가 판단하는 모든 것으로 신으로 행세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그 마귀의 꼬임에 넘어간 아담, 그 아담의 속성을 물려받은 우리는 아담의 후손이고 그래서 그 악마의 본성을 담고 있고, 우리는 신이 있다, 없다를 내가 판단하고, 신앙이 선물로 받은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 내고, 내 자식은 내 것이고, 내 노동의 대가도 다 내 것이고 --

나의 것이 하나 둘 빼앗기니까 노무현씨는 부엉이바위에서 뛰어내렸고, 역대 대통령가운데 가장 청렴했다는 그 위신에 흠집이 생길까 싶어 자살을 했단 말이지요. 생각해 보세요. 검찰에서 수사 안 했으면 뛰어 내렸겠습니까? 검찰에서 수사를 하니까 뛰어내렸어요. 이건 무슨 말입니까? ‘날 건드리지 마.’ 왜? 창세기 3장 이후 악마의 올무에 매인 인간의 특징은 ‘내가 신이니까 날 건드리지 마!’

그런데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나는 진리를 안다. 나는 똑똑하다.”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님께 뭐라고 했습니까? “진리가 뭐냐?”고 했잖아요. 예수님이 안 가르쳐 줘요. 이미 ‘진리가 뭐냐?’ 라고 판단하겠다는 그 자체가 진리와는 다른 노선에 있기 때문에 그래요.

빨간 펜으로 써 보겠습니다. 노선이 빨간 노선이 있고, 검은 노선이 있어요. 지금 본디오 빌라도가 검은 노선인데, 즉 창세기 3장 이후의 인간인데, ‘진리가 무엇인가?’ 라고 물었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이 무슨 답변을 해도 해석은 본인이 합니다. 자신이 검은 노선 위에서 해석을 하니까 결국 해석자는 누구입니까? 자기 자신이 되지요.

예수님은 붉은 피 노선입니다. 십자가에 죽으로 가잖아요. 그러기에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노선은 어떤 노선입니까?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그 노선에서 기적을 베풀었고, 병을 고쳤고, 산상설교를 했고, 제자들을 가르쳤어요. 그런데 예수님 외의 사람들은 어느 노선에 있습니까? 창세기 3장 이후 악마의 올무에 빠진 이 노선에 있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어느 누구도 알아듣지 못하는 거예요. 성령이 올 때 알아들었지요.

그렇다면 예수님만 구원 받고 아무도 구원 받지 못하는 것 아닌가? 걱정하지 마세요. 한 사람만 믿어도 믿은 것으로 쳐줍니다. 그 한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예수님입니다. 천국에서의 법칙은 언약 법칙인데, 이 법칙의 특징은 한 사람만 지켜도 안 지킨 사람을 지킨 것으로 해주는데, 이것은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에 이미 약속된 것입니다.

시편 110편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이것이 신약 성경에는 이렇게 되어 있어요. “주께서 내 주에게” 라고 해서 주가 두 번 나옵니다.

시편에서는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 그러니까 누구의 원수입니까? 예수님의 원수지요. 이 이야기가 창세기 몇 장의 이야기입니까? 바로 3장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이 시편 110편이 진리라면, 이 진리가 우리를 시편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고, 시편을 보면서 창세기 3장으로 데려가지요. 얼마나 신기합니까?

모든 성경이 다 그래요. 지금 우리가 보는 디모데후서도 마찬가지에요. 그런데 일반 신학자들은 그걸 모르고 그릇에 대한 말씀이 나오면(딤후2:21), 이것을 가지고 개인적인 경건으로 설명하잖아요. 예수 믿는 것으로는 모자라고 개인적으로 착해야 구원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여전히 무지몽매한 거예요.

역사가 시작된 것이 창세기 3장부터입니다. 역사의 시작은 창세기 1장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의 시작이란 반드시 인간이 있어야 돼요. 그러면 범죄한 인간이 언제부터입니까? 창세기 3장입니다. 그러면 창세기 3장부터 아담의 후손이 생기고, 아담의 후손이 생기는 것을 가지고 인간의 역사라고 해요.

그러면 그 전의 역사는 뭡니까? 인간이 없던 시절을 뭐라고 합니까? 묵시라고 해요. 역사가 인간을 구원 못해요. 인간은 역사 속에 갇혀 있으면 끝나는 거예요. 그 역사에서 못 벗어납니다. 인간은 진화론 속에서 못 벗어나고 DNA에서 못 벗어나요. 제가 [뇌 과학과 철학]이란 책을 읽고 서평을 해 놓았습니다. 지금 학자들이 뭘 연구하는가 하면, 두뇌를 바꾸려고 해요. 바꾸는데 어떤 지점에 있느냐, 아니면 공명되는 장치에 있느냐 그것을 연구해서 지점에 있으면 지점을 바꾸면 되고, 공명되는 장치에 있으면 전체 다를 바꿔야 하기 때문에 골치 아프고 그런데, 현 시점에서 뇌 과학이 어디까지 갔는가 하면, 인간이 믿고, 사랑하고, 느끼고, 웃고 하는 것은 어떤 지점도 아니고 공명도 아니라 어떤 특징을 반복해서 훈련을 시키면 그 지점이 특화된다고 해요. ‘특화’는 특별나게 윤기가 난다, 특별나게 빛이 난다. 뭐 이런 의미입니다.

특화가 되면 특화된 그것 때문에 사용하지 않는 두뇌의 다른 세포는 서서히 죽어간다. 그러니까 인간 사회만 도태가 아니라 두뇌 세포들 사이에도 자연 도태를 통해서 인간은 점점 더 진화된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바꿀 수 있는 그 두뇌는 어디에서 나오느냐 이 말입니다. 그것을 집도하는 기능을 가진 의사의 두뇌 세포의 특화는 누가 시킵니까? 곤란하지요? 이 범주에서 못 벗어나는 거예요.

그래서 최고의 자리에 가면 사람이 허무해 지잖아요. 전도서가 그 이야기입니다. ‘책을 보고 궁극적으로 연구를 해 보니까 결국 마지막은 헛되다. 그러니까 차라리 돈 아끼지 말고 맛 있는 것 사먹고, 하고 싶은 것 다하고, 재미나게 살다가 죽어라.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허무하기는 마찬가지인데, 재미나게 사는 것이 네게 주어진 분복이다.’ 배당된 복이란 것이지요. 애가 셋 있으면 셋으로 살고(넷 욕심 내지 말고), 하나 죽으면 둘로 살고.

지난 수요일 그런 설교 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속인다고. 욥의 친구들이 하나님의 계시로 욥에게 고난이 닥치니까 친구들이 친구가 아니고 원수가 되 버려요. 그러니까 욥이 하는 말이 “그동안 너희들이 나를 속임이 아니고 이런 사태를 있게 한 하나님을 속이면서 ’하나님 믿습니다.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 너희들이 하나님, 하나님 하지만 진짜 하나님이 어떤 사건을 일으키니까 너희가 믿던 하나님은 엉터리 하나님으로 드러났다.” 하나님 근처에도 안 갔어요.

하나님이 우선이 아니고 누가 우선이었다? 내가 우선이었고 거기에 도배하듯이 도배지로 가져다붙인 것이 하나님이었어요. 종교였고 오락이었단 말입니다.

신앙이란 것은 (마귀의 존재 이유, 하나님의 존재 이유, 여기에 나는 빠져요.) 주님만 계시던 그 시절로 나를 데려가는 겁니다. 거기에는 내가 없으니까 내 주장을 펼칠 수도 없고, 내 계획을 할 수도 없지요. “주님, 주께서 선택하실 때 저를 꼭 넣어 주세요.” 라고 건의 할 입장이 못 돼요. 왜? 그 때는 내가 없으니까. 그러면 누가 있었어요? 주님과 악마가 있었지요. 성부, 성자, 성령과 누가 있었습니까? 천사와 악마가 있을 뿐이죠. 인간은 없어요. 이게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바치라고 할 때, 이것은 ‘아브라함 너도 없다.’는 것입니다. 자식만 없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도 없는 거예요. 네가 없던 시절이 되어야 비로소 하나님의 언약이 보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 시간에 할 내용인데, 잠깐 언급하면, 이것이 ‘천국의 구조’입니다. 구조이니까 개인은 의미가 없어요.

고린도후서 12장에 보면 바울이 천국의 구조에 들어갔지요. 삼층천. 그곳에 들어간 소감이 뭡니까? 내가 있는 둥 없는 둥 했지요. 이것은 ‘자아의 윤곽 상실’입니다. 이런 경험을 여러분들이 평소에 많이 합니다. 언제? 내 아이가 학원에서 웅변대회에서 웅변할 때. 너무 아이가 잘해서 내가 있는 둥 없는 둥. “이, 연사는 쓰레기 분리수거만이 지구를 살릴 수 있다고 목청껏 외칩니다.” 라고 하면 엄마가 정신이 하나도 없이 막 박수를 치지요. 박수 칠 때 옷이 어께에서 흘러내리는 것도 몰라요. ‘자아 윤곽 상실’입니다. 그리고 로토복권 1등에 당첨될 때. ‘자아 윤곽 상실’입니다. 정신 못 차려요.

삼층천을 보고 난 뒤에 사도바울이 미쳤습니다. 죽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어요. 이게 성령이 주시는 구조에요. “자식이 떡을 달라고 하는데 돌을 줄 자가 누가 있으며, 자식이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뱀을 줄 자가 누가 있으랴. 하물며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는가?” 성령이 오면 천국의 구조를 보게 되지요. 그러면 자아 윤곽이 상실됩니다.

윤곽의 상실은 생물학에서 세포 분열할 때 세포막이 없어지면서, 세포막이 없어져야 다른 자아로 번식됩니다. 여자가 진짜 여자가 될 때는 자식이 태어나야 진짜 여자가 돼요. 자식을 낳아 봐야 자식이 나의 대체물이 되고, 여자로서는 이제 끝나고 아줌마(엄마)가 됩니다. 아줌마의 의미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는 자가 아줌마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는 자는 (아가씨)여자입니다. 자식을 위해서 살 때는 아줌마가 돼요. 엄마가 되면 자식을 위해서는 눈에 뵈는 게 없어요. 자기를 건드리면 화 안 내는데 자기 자식을 건드리면 용서가 안 돼요.

그런데 녹매교회 다니는 000성도의 다섯 살 난 딸이 아파트에서 떨어져서 죽었어요. 수원으로 이사 가기 전에는 우리교회 다녔습니다. 몇 주 전에도 우리교회에 와서 예배 드렸는데, 제가 그 아이 엄마를 생각하니까 밤에 잠을 잘 수가 없었어요. 구득영 목사님은 얼마나 난처하고 힘들었겠습니까?

주께서 일으키는 사건은 창조 차원에서 일으키는 사건이기 때문에 우리 책임 아닙니다. 자식 죽은 것이 부모 책임 아닙니다. 우리는 책임 질 필요가 없습니다. 왜? 우리는 아예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사태는 아예 내가 없던 시절에 계획 잡힌 것이 나에게 덮칩니다.

10분 쉽시다.

(2009. 6. 4. 10:35 녹취 마침)

관리자(IP:220.♡.176.169)

09-06-14 20:39

광주090529b디모데후서2장25절b

광주 강의(09. 5. 29) 49-2

지난 시간에 천국의 구조에 대해서 말씀 드렸는데, 구조가 짜여진 채 내려오는 겁니다. 우리가 손댈 필요 없어요. 완성품으로 천국이 내려오는 겁니다.

자, 아담이 출생했다. 교육 받았다. 취직했다. 아파트 사고 그 다음에 부장으로 승진하고, 퇴직하고 죽는다. 이것이 하나의 과정이죠.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가? 성령에 의해 출생하셨고, 성장하셨고, 요단강에서 세례 받으시고, 복음 전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다.

성령이 뭐냐 하면, 바로 이 예수님이 가신 노선이 구조 채로 우리에게 오는 것을 말해요. 간단하죠? 예수님의 생애가 검은 우리 생애에 찾아오게 되면 검은 것이 없어지지 않아요. 이게 중요해요. 검은 것은 그대로 있고 빨간 주의 생애도 들어와 있고. 그래서 우리 안에서 언약을 이룹니다. 우리는 죄인이고, 예수님은 죄인인 우리를 의인되게 하는 겁니다.

제 글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어요.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실 때는 반드시 우리로 하여금 저주 받은 죄인으로 만들어서 구원한다.’ 성령이 오게 되면, 십자가가 우리에게 덮치지요. 그러면 십자가의 의미가 뭡니까? 예수님이 출생하셔서 십자가까지의 의미가 뭐냐 하면, 죄인의 생애입니다.

이 죄인의 인생을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시키면,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부활로 말미암아 의인 되었지요. 그래서 로마서 8장에 보면, 예수를 죽인 자 가운데서 살린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다른 말로 하면 죄인의 몸으로 살았던 예수님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의인의 영광을 누렸듯이 그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죄인인 너희가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죽을 너희 몸도 살리라.

이 말은 뭐냐 하면, 우리에게 어떤 숙제를 주느냐 하면, 첫째로, ‘왜 내가 이 땅에 살면서 뭘 해도 죄인일 수밖에 없는가?’ 라는 숙제를 우리에게 주지요. 둘째로, ‘뭘 해도 죄가 된다.’는 것을 느긋하고 즐겁고 행복해하면서 당당하게 말합니다. 왜냐? 성령이 임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죄인 되어 십자가 지시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부활된 그 영이 우리 안에 거하면 죄인 된 우리가 그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도 살리라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뭘 해도 우리는 죄인이다.’ 라는 것을 느긋하게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왜 뭘 해도 죄인일 수밖에 없는가?’ 이것을 아는 숙제가 남아 있지요. 이것은 나로부터 출발하면 안 되고 내가 없던 시절로 가야 된다고 첫째 시간에 말씀 드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리의 세계인데 창세기 1장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그곳으로 돌아가면 ‘왜 우리가 죄인일 수밖에 없습니까?’ 우리는 악마의 올무에 빠졌고, 빠진 자는 자기 힘으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자기 운동화 끈을 잡아당기면 물에서 빠져나올 수 있습니까? 안 되지요. 오늘날 과학과 철학이 이런 식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건진다고 자기 운동화 끈을 잡아당기는 거예요. 이게 불교입니다.

제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불교 신자가 ‘나는 지옥이 있더라도 가겠다.’ 라는 이 말의 잘못된 점은 무엇입니까? 자아가 있던 시절의 지옥 개념은 어디서 나온 개념이냐 하면, 자아는 기억에서 자아가 나옵니다. 그런데 사람의 기억이란 것은 자기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해요.

시를 쓰는 시인이 어떤 지점에 가서 느끼는 것과 화가가 어떤 지점에 가서 느끼는 것이 다르고, 부동산 업자가 어떤 지점에 가서 느끼는 것이 달라요. ‘이곳에 집이나 건물을 세우면 팔릴까?’ 이런 생각을 하지만, 시인은 ‘저 벌판에 핀 한 송이 민들레는 얼마나 쓸쓸할까?’ 이것을 생각합니다.

사람은 기억이 모여서 자아가 되는데, 이것은 모든 사건과 사건이 다 기억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알고 싶은 것, 가지고 싶은 것, 기억하고 싶은 것만 골라서 기억합니다. 그렇다면 과거의 그 경험이 지금의 기억이 되어서 자아가 됩니다.

이 자아에서 과거의 기억을 근거로 지옥이라는 개념을 만들어요. 지옥 또는 귀신을 만들면, 여기서 나온 영화가 뭐냐 하면, [박쥐] [오멘] 이런 영화입니다. 이것이 전부 과거에 알고 있던 지옥을 지옥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자아가 없던 시절, 진짜 하나님이 만든 지옥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내가 아는 지옥 같으면 한번쯤 다녀와도 괜찮을지 몰라요. 그래서 이 불교 신자의 잘못은 뭐냐? 자기가 상상한 지옥을 지옥으로 여겼던 그것이 바로 잘못입니다. 진짜 지옥은 후회할 만합니다.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22:13).”고 했어요. 왜냐? 자기 예상 밖이거든요. 평소에 ‘지옥은 아마 이럴 거야.’ 라고 생각했던 그 예상을 능가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평소에 진짜 지옥을 맛볼 수 없는가? 있습니다. 어디서?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마27:46)” 아버지로부터 버림 받는 것이 지옥입니다. 그 경험을 예수님이 그 지옥에서부터 나왔고, 그냥 나오신 것이 아니고 그 나온 능력을 이웃 사랑을 발휘하셔서 우리에게 성령을 통해서 천국을 구조화 시키니까 그 천국 안에서 내가 했던 업적은 없어요. 왜? 예수님 혼자의 공로로 주어졌기 때문에 우리는 그냥 혜택을 입고 들어갈 뿐이지요. 그러면 우리는 이 구조 안에서 하나의 부분이 되지요.

디모데후서 2장 25절 끝부분부터 읽어봅시다.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저희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바 되어 그 뜻을 좇게 하실까 함이라.”

이제 이해되십니까? 구조로 생각하면 이해되지요. 개인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왜? 개인은 창세기 3장 이후이기 때문에 개인으로 하면 해석을 잘못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을 구조로 해석하는 사람을 못 봤어요. 지금까지. 있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저는 못 봤어요.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딤후2:20)’ 이 대목을 전부 어떻게 해석하는가 하면, “예수 믿었습니까? 이제 바르게 삽시다.” 전부 개인으로 넘어가요. 그렇게 하니까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하지요. “목사님, 나는 예수 믿기는 믿는데 바르게 못 살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목사는 “그러면 벌 받지요.” 이런 식으로 나오는데, 이것은 죄인 문제가 아니고 이 자체가 구조 문제란 말입니다. 왜냐? 사로잡힌바 되었기에.

전에는 어디에 사로잡혔습니까? 마귀에게.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께 사로잡혔지요. 인간은 두 종류뿐입니다. 하나님께 사로잡힌 자, 그리고 마귀에게 사로잡힌 자. 이것도 저것도 아닌 사람은 없어요.

이것을 어떻게 아는가? 진리가 와서 우리로 하여금 내가 없던 시절로 되돌아가면 됩니다. 왜 우리를 없앱니까? 우리가 있으면 쓸데없이 자아가 판단을 해요. 그래서 믿을 만 한 것은 믿고, 안 믿어지는 것은 안 믿고. 이렇게 되면 하나님을 속이고 사는 것이 됩니다.

그런 관점에서 22절을 보세요. “또한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

이것을 개인적으로 보면 윤리, 도덕입니다. 그렇지요? 그러나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구조에 뒤집어 쓰인 거예요. 이것이 깨끗한 마음입니다. 이것이 의와 화평입니다.

자, A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기는 B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A는 오 목사님, B는 사모님입니다. 자녀들 3명이 있다. 애들 때문에 서로 티격태격 합니다. 주를 통해서 하게 되면 싸울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주를 안 거치고 “내 생각은 이렇단 말이야.” 하고 바로 나오면 B도 “내 생각은 당신 생각과 달라.” 하고 바로 충돌이 벌어지지요. 둘 다 자아가 있어요. 이런 가운데서 ‘나는 의롭단 말이야.’ 또는 ‘나는 믿음이 있단 말이야. 사랑과 화평도 있어.’ 이렇게 아무리 주장해도 자아가 있는 이상은 다 거짓말입니다.

그러면 뭐냐? 뚜껑이 양쪽을 덮어버리면 천국의 구조가 오지요. 그렇게 되면 당신의 있음 자체가 하나님의 창조의 적용물입니다. 당신이 있으매 나로 하여금 묵시 세계가 존재함을 보여주는 하나의 창조물이 되는 겁니다.

당신이 내 앞에 왜 있느냔 말이지요. ‘당신은 틀렸고 나는 맞다.’ 라고 하기 전에, 먼저 ‘내 앞에 왜 저 사람이 있지?’ 이렇게 되면, 일종의 천사처럼 보이는 거지요. 주님께서 나와 만나게 한 사람인데 그로 인하여 내가 만들지도 않은(아내는 남편이 만든 것이 아니잖아요) 낯선 여인이 내 앞에 있다는 것은 누가 그렇게 했느냔 말이지요. 이것은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은 왜 있고, 자식은 왜 있습니까?’ 저 위쪽 구조에서 ‘내가 있게 했다.’ 이게 만약 안 된다면(이 구조가 느껴지지 않는다면) 모든 것은 거짓말입니다.

인간은 사랑 받기 위해서 말을 걸고 상대를 만나고 합니다. 사랑한다는 말도 거짓말입니다. 이런 말을 하면 혹시 날 사랑해 줄까 싶어서 그런 말을 합니다. 사람은 입만 열면 거짓말입니다.

아까 말씀드렸지요. 빨간 노선(예수님)이 있고 검은 노선(인간)이 있는데, 빨간 것이 덮쳐 와도 검은 것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평생을 갑니다. 밑에는 검은데 위에는 빨간 것이 씌워진 형국입니다. 죄인과 의인이 붙어서 우리는 의인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박쥐입니다. 의인의 피를 빨아먹고, 용서의 피를 빨아먹고 의인 덕분에 의롭다 함을 얻어요.

이런 느긋함으로 마음껏 자기 자신의 울분을 푸시기 바랍니다. 헌화를 하든지 통곡을 하든지 마음껏 하세요. 아이 죽었다고 울고, 남편 애 먹인다고 울고. 마음껏 우세요. 왜? 하지만 울더라도 구조를 믿기 때문에 울면서 느긋합니다. 눈물이 나는데 울지 말라고 하면 안 됩니다. 속 상할 때는 속 상하시고, 욕 하고 싶을 때는 욕 하세요. 하지만 느긋함은 잊지 마세요.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이니까.

우리가 언약을 받는 것이 아니고 우리 자체가 언약 덩어리입니다. 처음 방주 때 언약은 방주 자체가 언약이었는데, 할례 언약에서 언약은 뭡니까? 가죽 껍질이 벗겨지는 것 자체가 언약이에요. 나중에 새 언약은 나 밖에 계신 분이 언약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될 수 있는 대로 여러분의 책임을 주님께 떠맡기세요. 맡기면 맡길수록 주님은 좋아하십니다.

신입사원 불러놓고 아무것도 안 시키면 그것은 나가라는 소리거든요. 신입사원 뽑았으면 복사도 시키고 커피 심부름도 시키고 자꾸 시키세요. 자기는 안 하고. 그것이 예수 믿는 겁니다. 그게 기도예요. 떠맡기는 것. “주님 저는 이것도 못하고 저것도 못합니다. 주님이 알아서 해 주세요.” 하고 맡기는 것입니다.

지난 수요일 어린 아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제일 먼저 떠오르는 말씀이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신다(삼상2:6).”는 말씀입니다. 막상 가까운 사람의 자식이 죽는 것을 보니 내 자식이 죽는 것처럼 가슴이 아팠는데, 내 자식이 죽었다고 생각하니 진짜 하나님은 진짜 죽는다는 대상을 줌으로써 주님은 살아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겁니다. “아, 주께서 살아 계셔서 죽이기도 하시는 구나.”

우리는 늘 살리는 하나님만 생각했는데, 죽이시는 하나님을 모르면 살리는 하나님은 내가 만든 가짜 하나님입니다. 때로는 죽이는 사건이 벌어져야 살린다는 의미도 새롭게 다가옵니다. 그 때의 의미는 뭡니까? 고맙게 살리는 것입니다. 죽이시는 하나님이 없으면 내가 사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되는데, 죽이는 사건이 있는데 살아 있으니까 ‘고맙게도 살려 주시는 구나.’ 감사가 나오지요.

이게 오늘 본문(딤후2:22)에 나오는 화평이고 사랑이고 깨끗한 마음입니다. 이것은 윤리, 도덕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사로잡힌바 되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천국의 구조가 내려앉아야 돼요. 이렇게 되면 자아 윤곽은 흐려지고 구조가 장악합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고 했지요.

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구조가 나로 하여금 일하게 하십니다. 베드로전서 4장 11절에 유명한 말씀이 있지요.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여기에서 묵시에 대해서 조금 더 이야기하겠습니다. 창세기 2장에 보면 ‘안식’이란 말이 나와요. 그러면 사람은 왜 만들었습니까? 사람 자기를 안식하라고 만들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 안식하려고 사람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안식이 언제 깨집니까? 마귀가 사람에게 이런 말로 유혹합니다. ‘너는 하나님께 속할 자가 아니고 따로 독립해서 있는 자다.’ 라고 할 때 안식이 깨져버렸어요.

마귀의 이야기는 사람이 하나님의 안식에 동원된 소모품이 아니라는 겁니다. ‘너희가 따로 독립하면 하나님만 안식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도 안식할 수 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의 들러리로 있느냐?’ 이것입니다.

아까 중학생이 하는 말이 뭡니까? ‘신은 없다.’ 이 말을 왜 하고 싶은 겁니까? 신이 있으면 뭐가 깨지기 때문에? 자기 속에 있는 악마의 본성이 깨져버리고, 신이 있으면 신이 모든 일에 자꾸 간섭하니까 자기 안식이 안 됩니다.

그러면 성도가 누리는 안식은 자기 안식입니까? 자기 안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는 것이 바로 성도가 누리는 안식입니다. 이것이 히브리서 4장 9절에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고 했고, 요한계시록에는 “잠자는 자는 복되도다. 네가 영원히 쉬리라.” 이게 누구 안식이냐 하면, 예수님의 공로지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없을 때 인간을 만드신 목적이 하나님 안식하시려고 만들었고, 우리는 그 안식이란 구조를 통해서 안식케 하신다면 그것으로 하나님 안식에 곁들여 참여하는 그런 영광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 영광은 천사도 사모하는 영광입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나오지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라고 했는데, 이 말 자체의 뉘앙스가 이상하잖아요. 우리가 사는 목적이 아예 정해졌지요.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목적인데, 문제는 믿음이 없으면 기쁘시게 못하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는 거예요.

‘네가 지금 행복하냐? 얼마나 만족하느냐?’ 이런 것은 하나님이 관심도 없어요. 제가 지난번 대전에 가서 강의를 했는데 끝부분에 이런 말씀을 했어요. 사도행전에 보면 성경 해석이 두 종류가 있는데, 인간의 행함으로 해석하는 것과 하나님의 주 되심으로 해석하는 두 가지가 있는데, 인간의 행함으로 해석하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자책을 합니다. “나는 왜 말씀대로 못 살까? 왜 나는 자꾸 죄만 지을까?” 이런 식으로 성경을 보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안식을 생각 못하고 자기 안식을 따로 챙기려는 심보에요. 자기 딴에는 굉장히 경건하고 진실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전혀 아니에요.

믿음은 떠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다 맡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고 이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로마서 3장 23절에 보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볼 때 ‘너 단독적으로 행복하냐?’를 묻는 것이 아니고, ‘네가 나와 무슨 연관이 있느냐?’ 이것을 가지고 우리의 가치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스스로 자립하고 행복하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의 안식은 아닙니다. 이것은 내 소유에 만족하는 것인데, 만약에 자식을 죽인다든지 무엇을 빼앗아가 버리면 내가 평소에 알고 있던 안식은 내 안식이지 주님의 안식이 아니었다는 것이 드러나겠지요.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차를 몰고 교회를 가는데 갑자기 시동이 꺼졌어요. 그 때 생각하기를 ‘예이 바보같이. 토요일 차량을 점검 하는 건데. 조금 이상해도 교회 갈 때까지는 이상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하나님이 지켜 주실 테니까), 교회 갔다 와서 월요일 쯤 고치려고 했는데 지금 고장이 나면 예배 참석도 못하고, 교인 몇 명 되지도 않는데 내가 빠지면 목사님은 얼마나 설교하시는데 힘이 빠질까.’ 이게 바로 행함으로 해석하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시동 꺼졌나?” “꺼졌습니다.” “누가 꺼지게 한 줄 아냐?” “주님입니다.” “그래.” 이것이 안식입니다. 모든 것을 그분께 맡겨야 됩니다. 우리 인생 자체를 주님께 맡길 때 주님께 영광이 됩니다.

자, 이제 3장을 보겠습니다. 지금까지 살핀 천국의 구조를 모르고 3장을 보면 교회 갈 마음 하나도 안 생깁니다. 왜냐하면, 1~4절에서 “말세에 --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18가지가 나옵니다.

이 목록을 놓고 밤마다 점검을 해 보세요. 이것들 중 몇 가지는 지켰고 몇 가지는 못 지켰는지. 정답은 이것입니다. 하나도 못 지킨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주께서 우리에게 방문 했다. 느긋한 가운데 못 지키죠. 여유 있는 가운데 못 지킵니다. 그런데 불신자는 초조함 가운데 지키려고 애써도 못 지킵니다. 불안한 가운데, 이 말씀을 지켜야 복 받고 구원 받는다 싶어서 나름대로 열심히 지키려 해도 못 지키고(고생만 실컷 하고) 결국은 지옥 가고. 이게 불신자들의 고생담이지요.

우리는 못 지키는데도 느긋합니다. 주께서 알아서 지켜 주실 것을 믿고 다 맡기는 것입니다. “제 조급한 것 아시지요? 주께서 알아서 다 해 주세요.” 그러면 주께서 알아서 다 해 주십니다. 화평교회 교인들은 생활고에 시달리다 보니까 TV를 거의 못 보지요? [개그 콘서트]에 보면 어떤 코너가 있는가 하면, ‘섭섭한 인생’이라는 코너가 있는데, 거기에 깡패 보스가 있고 그 뒤에 남자 두 명이 있어요. 이 두 명의 특징이 뭐냐 하면, 성질이 굉장히 급해요. 보스의 명령이 다 끝나기도 전에 행동으로 옮겨요. 굉장히 급해요.

그런데 생각해 봅시다. 다음 중 어떤 것이 조급한 것입니까? 1)명령 후 1초 뒤. 2) 2초 뒤. 3) 3초 뒤. 4) 4초 뒤. 정답이 없습니다. 다 조급할 수 있고, 다 느긋할 수 있지요. 여기서 조급하다는 것은 믿는 구석이 없다는 거죠. 자기 외에 믿을 사람이 없을 때 조급해요. 심지어 모든 일을 천천히 여유롭게 해도(달라이 라마처럼) 조급하지요. 왜? 그것조차도 불안하니까.

조급함이란 결국 믿을 사람이 없고 자신 밖에 못 믿으니까 조급할 수밖에 없어요. 조금 있으면 느긋해 하지만, 조금만 모자라면 조급하고. 이것은 결국 조급한 거예요.

18가지의 항목을 한 마디로 줄이면 뭡니까? 내 인생을 맡길 분이 있다, 없다?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마지막 고통하는 때에 자기 팔 자기가 흔드는 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대세가 됩니다.

대전 강의에서 누가 이런 질문을 해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지옥을 만들어 놓았는데 이것이 모순되는 것 아닙니까?” 제가 이렇게 답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가 사랑할 사람만 사랑한다.”

그러니까 사랑한다는 말을 불신자가 들어봤자 자아가 곡해하고 오해합니다. 자기가 과거에 받았을 사랑을 기억해서 ‘아마 하나님도 이런 종류의 사랑일거야.’ 라고 생각했지, 언제 자기 아들 죽이는 것을 사랑이라고 생각 했겠어요. 안 죽이고 살려내는 것을, 십자가 저주를 안 받고 그냥 천국에 넣어주는 것이 사랑인 줄 알지, 자기 아들에게 지옥의 맛을 보게 하는 그것이 사랑인 줄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지옥을 거치지 않으면 사랑이 아닙니다. 지옥이 있기 때문에 사랑은 빛이 나요.

제가 질문 드립니다. 답변해 보세요. 빛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지요. 어두움은 있습니까, 없습니까? 사람들은 어둠에 대해 항상 있는 것으로 생각 안 해요. 빛이 비추면 어둠은 사라지니까. 그런데 이사야 45장 7절에는 그렇게 말씀 안 했어요.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어두움을 만들 때 어떤 환경에서 만듭니까? 우리의 생각은 어두움은 원래의 배경이고, 그러니까 도화지지요. 도화지는 그림이라고 안 하지요. 그런데 화가가 그림을 그리면 그림이 되지요. 그런데 도화지를 그리지는 않잖아요.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도화지를 내가 그렸다는 거예요. 그런 느낌을 평소에 우리는 못 가집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고 빛도 내가 만들고 어두움도 창조했다고 할 때, 어두움을 만들 때의 배경은 뭡니까? 더 짙은 어두움이었습니까. 빛도 어두움도 사람은 자기 살기 좋은 것만 생각해서 “하나님, 어두움은 싫어요. 빛을 보내 주세요. 아, 밝은 빛이 왔구나. 감사하다.” 이렇게 생각하거든요.

인간은 자기 입장만 생각하는데, 창세기 1장으로 돌아가게 되면 빛도 어두움도 다 하나님이 지었어요. 그렇다면 하나님이 지으신 것은 사람 좋으라고 지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을 위해 빛도 만들고 어두움도 만드셨기 때문에 지옥도 하나님은 자기 좋으라고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해서 “지옥을 왜 만들었습니까?” 하고 삿대질 하면서 하나님께 달려들어요. 이런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를 위해서 지옥을 만들었어요. 하찮은 입이 어떻게 입을 만드신 하나님을 판단하겠습니까? 시편 94편 9절에 “귀를 지으신 자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자가 보지 아니하시랴.”고 했는데, 이 말은 너 있기 전에 누가 있었다? 하나님이 있었는데, 그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피조물 주제에 이러쿵저러쿵 할 수 있느냐는 것이지요.

욥이 자식 10명 죽고, 재산 다 불타고, 온 몸이 만신창이 되었을 때 처음에는 길길이 날뛰며 하나님을 원망했지요. “하나님, 왜 날 이렇게 하십니까?” 그러다가 하나님이 나타나니까 “주여, 내가 무지한 인간입니다.”

결국 제가 이야기한 것은, 하나님 자리에 자기를 집어넣은 거지요. 지금 종말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종말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나를 치면서 옵니다. 이것을 빠뜨리면 종말을 모르는 것입니다. 종말이 나를 치면서 내 안에 들어오면 나의 종말론은 다 깨집니다. 내가 생각하는 종말론은, 내게 해롭게 하는 놈은 망하고, 회사가 구조조정해서 많은 사람이 잘려도 나는 승진하고, 그런 신나는 종말론(야, 이것 책 제목으로 괜찮은 것 같은데)을 내가 갖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항상 종말을 꿈꿉니다. “주여, 위층에서 쿵쿵거리고 시끄럽게 하는데 위층 주인 암에 결려서 죽게 하옵소서.” 우리는 아침에 눈만 뜨면 그런 종말론을 잘도 지어내요. 드라마를 보면서도 “저 못된 놈 작가가 빨리 안 죽이나?” 항상 내 중심의 종말론이 있어요. 혹시 동료 교사 중에 미운 사람이 있다면 빨리 다른 곳으로 전근가기를 바라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종말론은 예수 잘 믿고 살아가는 성도의 아이를 죽임으로 우리로 하여금 아브라함의 아들을 바치게 함으로 말미암아 진짜 하나님이 들이닥치는 날, 이것을 이번 수련회 교재에 이렇게 표현해 놓았어요. ‘하나님의 오심, 혹은 하나님을 만나는 날은 내 종말론이 치명적인 결함이 있음이 폭로되는 날이다.’

그래서 만약 내 자식이 죽는다면 그 날이 진짜 하나님이 방문하신 날입니다. 왜? 지금까지 내가 생각했던 인생관은 남의 자식 다 죽어도 내 자식은 출세하는 것을 꿈꾸는 그것이 내 종말론인데, 그것을 깨는 것이 하나님의 종말입니다. 이렇게 내 종말이 깨어지는 자, 이것이 복 받은 자입니다.

하나님이 방문하시는 날은 나의 종말론은 부수고, 우리 죄인을 건지시는 예수님의 종말론이 등장합니다. 비록 너의 아이가 죽고, 너의 재산이 불타고, 네 몸이 만신창이 되어도 하나님은 그런 것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으시고 그냥 건져 주신다. 너는 이미 사랑 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다. 라는 것을 알려주는, 내가 스스로 날 지키던 그 종말론은 깨어지고 내가 날 안 지켜도 괜찮은, 오직 주님의 긍휼이 덮이는 그런 종말론이 예수님의 종말론입니다.

그래서 신자에게는 이것이 기쁜 날이지만 불신자는 믿는 것이 없기 때문에 자기가 스스로 그 불안과 염려를 물리치고 안식을 이루기 위해서 그들은 온갖 자기 속에 있는 더러운 욕망을 끄집어내면서 살아가는 그것이 마지막 때의 모습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가 죄인인 것을 다시금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기쁘고 느긋하고 감사하면서 확인했습니다. 그 이유는 십자가의 피가 있기에, 그것이 우리를 용서하는 피 이기에, 우리가 그것이 믿어지기에 하나님의 사랑인줄 알았습니다. 이 사랑 안에서 믿고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09. 6. 12. 10:26 녹취 마침) 이름 : 서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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